6월 29일 주일설교 _ 요한복음 15:16-23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
요한복음 15장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분위기에 접근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쓰는 언어는 모두 다 구약성경을 의식하거나 구약성경을 참조하거나 구약성경을 성취하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 말은 이스라엘 구원사 1500년간을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나오는 참포도나무라는 말은 들포도나무 역사로 단정되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신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 공동체는 원래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간 존속된 그 역사는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복기가 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열두 제자들의 삶을 통해 원래 하나님은 세계 만민에게 열두 사도와 같은 자기 내어줌의 삶, 거룩한 복음의 포도주를 공급하기 위하여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혈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세상 만민에게 선물로 주기 위하여 선택했는데,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은 열방 중의 한 나라가 되는데 만족해버렸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역사는, 바둑 대국을 마치고 나면 왜 졌는가 다시 한 번 복기합니다. 삼백 수까지 다시 한 번 복기하는데 복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살아가는 방식은 원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를 잘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목적이 보인다는 거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거역하는 역사였습니다. 집을 나가버린 역사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내팽개치고 혈과 육의 집단으로서의 민족국가로서의 이스라엘 존립에 목적을 두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다, 원래 하나님께서 심으신 뜻은 나와 열두제자공동체를 통해서 성취된다, 나와 열두제자공동체가 이루는 앞으로의 장엄한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아라, 이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목적이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열두제자의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복기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교회를 볼 때 한국교회의 모든 윤리적 영적 도덕적 일탈은 성경을 보면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가 저렇게 됐는가는 성경텍스트를 잘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즐겨보고 있다는 말은 오늘날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주류기독교인의 삶이 얼마나 잘못됐는가를 차분히 성찰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나오는 거죠. 그런데 모든 교회가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모든 교회 중에서 성경을 안 읽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성경을 믿지 않고 사람이 와서 헌금하고 조직을 만들고 건물을 매입하고, 성경이 규정하지 않는 이런 사기업적 자기 성장에 목적이 있지, 성경의 정면요구에 응답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하나님 백성 중심, 이 세상에서 을지로와 충무로와 테헤란로에 가서 가지에서 열매를 맺어야 할, 세속과 접촉해 살면서 기독교의 위력을 실험하고 입증해야 할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유급 성직자들이 모든 교권을 쥐고 인사 재정을 다 쥐고 있습니다. 유급 성직자들이 장로 세우는 것을 다합니다. 유급성직자는 자기 직장으로서의 교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예배당이 수천 명이 오는 게 하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적당한 수의 투명한 interpersonal relationship 인격적 상호관계가 긍정되고 투명해지고 공동체성을 느끼는 optimal point 까지 자라는 것, 반드시 하나님은 공동체성과 투명성과 인격적 상호성이 희미해져서, 내가 군중 속에 고독을 느낄 정도로 익명의 군중인 다수가 지배할 때쯤엔 반드시 나오십니다. 그런데 원래는 안 오십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원래 그렇게 됩니다. 원래 하나님의 성령으로 시작된 교회가 아니면 1-8부까지, 13부까지 예배를 드리고 밤 12시까지 예배를 드려 헌금을 거두어들여서 부동산을 매입하고 그림을 사들이고 MMF에 돈을 투자하고 광적인 일을 합니다. 어떤 큰 교회 목사님들도 무한 성장추구적 소상공인 mentality가 있습니다. 잘 보세요. 소상공인 mentality는 내가 일 한 만큼 돈을 벌기 때문에 24시간 손님이 오면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왜? 매출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담임목사님들은 2천 평 교회가 안 되겠네, 제가 아는 교회는 4천 명 들어가는 교회를 짓겠다고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도대체 4천 명이 동시에 오면 무슨 말을 하려고요? 지금 그 교회는 6500명이 들어가는 교회가 됐더라고요. 그럼 당신은 이 교회가 당신의 마지막 토목사업인 것을 천명할 수 있나요? 그 대답을 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그 교회는 main campus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부속 campus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상공인 mentality는 내가 죽자 사자 일해서 마침내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 자기 안식을 영구적으로 박탈하는 것, 이것이 호프집과 단란주점의 특징입니다. 여기는 24시간 문을 열어놓고 돈을 버는 곳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 목사일수록 거룩함이 감가삼각 돼서 어딘가 상인냄새가 납니다. 말투 자체가 다릅니다. 집사님, 사장님, 벌써 경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인 수가 적으면 약간 신적 고독감이 있습니다. 목회란 무엇일까? 교인 수가 적으면 자신도 모르게 거룩해집니다. 나는 왜 이러지? 자기 성찰적입니다. 목회를 실패하는 사람이 오히려 거룩한 gloomy한 현상이 나타나고 거룩한가 보다 느낌이 듭니다. 성공할수록 경박해집니다. 중소상공인 mentality, 미안합니다. 중소상공인 quotation mark를 합니다. 중소상공인은 안식을 영구적으로 박탈하고 24시간 문을 열어 돈을 벌려고 하는 단기성과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소상공인 mentality를 모든 목회자에게 다 봅니다. 한 번도 기도하는데 무한성장 하라는 메시지를 준 적이 없고, 일산두레교회에서 2006년 12월 15일에 은퇴했습니다. 어른이 대학생부터 375명이 됐고, 실제 목회현장에는 400명 정도 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조교수를 하고 있었고 부교수로 승진하는데 학교에서 4년간 봐줬습니다. 총장님이 언제까지 목회할 겁니까? 면접할 때 목회가 교수생활을 방해하지 않을 때까지 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목회생활을 허락받고 했는데, 300명이 넘어가서 기도하니까 한 8시간 정도 걸리는데 기도하면 입안이 헐어서 수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양시에서 있을 때 입안에 아구창이 많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기도하면, 수업이 안 됩니다. 교인들이 생각나서요. 어제 말 안 들었던 교인들, 그래서 학교에 사임을 했습니다. 이 목회를 이어 받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현재 목사님이 목회를 못하겠다고 연동교회로 옮기겠다고 추천서를 써달라고 합니다. 목사님 뒤에 누가 목회를 하겠느냐?, 아무도 못한다고, 그럼 내가 목회할게, 학교를 사임했습니다. 이분이 갑자기 금식기도를 하더니 제가 추천했는데 연동교회가 안 된 겁니다. 이 분 좋은 분인데, 연동교회에서 낙방이 됐어요. 금식기도를 하더니 일주일 만에 목사님 제가 죽어도 좋으니 여기 목회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다시, 그런데 김세윤 박사 이만열 교수 이런 분들이 지금 당신이 그만두면 한국교회 예언자 사역 못한다, 당신이 목회 아무리 천 명을 하더라도 당신이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당신의 목회 관점에서 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목회하지 않는 신학자만이 말 할 수 있다, 김세윤 박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그만두면 안 된다고, 제가 3주 동안 사표상태가 되었다가 갑자기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숭실대는 제가 사표를 냈는데 수리할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무처장은 제가 사표를 낸지 모릅니다. 그때 제가 378명의 이름을 다 완벽하게 외웠습니다. 기도가 안 됩니다. 목회가 안 됩니다. 공부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잠을 네댓 시간 정도 자고 했는데, 한 담임목사가 아무리 책임감을 가지고 기도해도 300명이 넘으면 인간생활 자체가 안 됩니다. 24시간 출근상태입니다. 제 아내와 저는 정서적 별거상태입니다. 어떻게 300명을 계속 기도하는데 목회자가 교인들 얼굴 떠올라서 잠을 못 잡니다. 200-300명은 한 담임목사적 책임감으로 기도할 수 있는 중보기도의 최고 숫자입니다. 이 숫자가 넘어가면 중보기도가 안 됩니다. 중보기도가 안 되면 설교 마치고 빨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안 한 사람에게 설교를 하면 그렇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유모입니다. 유모 같이 젖만 주고 가는 겁니다. 항상 하나님은 저에게 그 명령을 했습니다. 네가 너희 회중이 인격적 상호성을 유지할 때와 익명의 군중으로 변할 그 시점이 나누어질 때다, 항상 그걸 강조했고 인사권과 재정권 등을 담임목사 유급성직자가 쥐고 있을 때는 을지로와 충무로에서 일하는 현장중심의 영성이 교회를 대표하지 못한다, 그래서 구제헌금도 여러분이 집행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이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담임목사가 또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담임목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담임목사입니다. 저도 담임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는 게 없고요. 여러분도 저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도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구제헌금 쓰라고 여러 번 했는데 아무도 쓰고 있지 않습니다. 빨리 써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오늘 날 한국교회를 잘 진단해보세요.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열두제자를 선택해서 하려고 했던 거룩한 포도주 공급업, 잔치, 예수님은 거룩한 포도주를 공급하여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 같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언약적 계약관계가 느슨해져서, 혼인생활의 감격이 느슨한 상태에 포도주를 공급하여 다시 혼인잔치적 열기, 축제적인 설렘을 증폭시키겠다는 것이 이스라엘 열두 제자를 선택한 목적이거든요.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선택한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순식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참백성인 것을 깨닫고 언약적 결속관계가 다시 견고해지도록 포도주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열두제자는 이 세상에다 하나님의 자애와 사랑의 포도주를 많이 공급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돌보는 창조주 하나님이 있는가본데, 창조자체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관계를 의미했네?, 성경이 맞네, 라고 됩니다. 거룩한 양조업이 활활 불타서 계속 사랑과 자애와 희생의 포도주가 온세계에 다 공급되면 하나님과 유대를 잃어버리고 사는 모든 억조창생들이 하나님이 나를 돌본다는 생각을 순식간에 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과 인류전체의 언약적 결속감, 혼인잔치집 같은 분위기가 회복되고, 삶은 하나님이 만드신 잔치집에 가는 똑같은 설렘이 있는 일이 되는 거거든요. 그것이 교회를 선택한 목적이고, 그것이 열두 제자를 선택한 목적이거든요. 교회는 사기업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엄을 잊고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유대를 잃고 자기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기유린, 자기를 학대하고 파괴하는 허무주의적인 불신앙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주고 사랑을 주고 자애로운 이웃이 되어줌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구나,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견결한 유대가 작동하고 있구나, 나는 고아가 아니구나,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 성경은 맞는 말이구나, 라고 느낀다는 거죠. 그런 느낌과 자각이 순식간에 오도록 복음의 포도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혈의 포도주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목적이고 열두제자를 부른 목적이라는 거죠. 그것이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 열매가 항상 제자들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너무나 희소하여 존재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쁜 기독교, 사기업적 기독교, 구원독과점 업체 같은 소상공인 mentality를 가진 모리배들과 잡상인들이 기독교를 대신하고, 도덕적으로 망가진 자들이 기독교를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MBC PD수첩의 단골메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한국 언론들은 볼테르와 니체 같은 통렬한 문필가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괜찮습니다. 만일 인터넷 공간에 볼테르와 니체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정말 큰 일 나는데 다행히 한국기독교도 엉망이지만 한국기독교 바깥도 엉망입니다. 아무도 똑똑한 사람이 없습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도 너무 질이 낮습니다. 니체와 볼테르만 읽어도 한국기독교는 산산조각 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만 읽어도,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만 읽어도 한국기독교가 완전히 엉망인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책이라고 너무 공격을 많이 받는데 이 책은 자유주의 책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의 삶으로 먼저 자기를 입증한 기독교만이 형이상학적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그 책의 핵심입니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의 핵심은 윤리와 도덕 문제에서 먼저 설득력과 자기의 온전하고 성결한 목소리, 거룩한 목소리를 가진 교회가 형이상학적 담론, 하나님은 계시다, 자유가 있다, 영혼은 불멸하다, 이런 입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주장마자도 윤리 도덕적으로 갱생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때는 그래도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거든요. 지금은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대표적 은사들은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교집합적으로 엉망진창인 사람들이 기독교를 대표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 윤리 도덕적 상식도 충족을 못 시키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주장도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입증이 안 되는 공염불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우리가 도덕적 시궁창이 되고 슬럼가가 되고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5-23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예언자 노릇하고 목사 노릇하는 그들의 열매가 엉망이다,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고 그들은 예수님 영구적으로 만날 수 없고,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는 저주를 받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한국기독교다, 그런데 이런 말을 구원파도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파의 설교도 교회에 대한 욕이 나옵니다. 우리가 구원파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증인도 한국기독교를 비판합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도 교회를 비판합니다. 기독교회를 좋아하면서 기독교회가 갱생되는 것으로 비판해야 하기 때문에 신뢰 받는 동역자들끼리만 이런 말을 해야지, 막연하게 한국교회를 비판하면 종북좌파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뢰가 되는 사람하고만 한국교회를 비판해야지, 불특정 다수에게 악마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열된, 들포도를 맺은 그들은 경건한 외양을 가지고 예수 이름으로 축사 힐링 등등의 예언자 노릇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들이 마태복음 7장 15-23절만 읽어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교회에 수십 만명이 쇄도하지 않습니다. 종교와 영의 윤리는 인간의 판단력이 파괴가 너무 되어 버렸습니다. 극히 깨어 있는 경성한 사람 숫자가 적기 때문에 항상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숫자는 너무 적습니다. 만민중앙교회, 구원파, 구원파와 방불한 대부분 소위 정통이라는 탈을 쓴 교단의 쇄도하는 인파를 보세요. 얼마나 수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 모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전부 다 아멘을 엄청 하고, 유니폼도 깔끕합니다. 그러고 보면 종교라는 것은 정말 어두움 그 자체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되기 전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 기독교성의 진리성을 먼저 입증하고 나서 마침내 형이상학적 주장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 계신다, 형이상학적 주장으로 들립니다. 무엇이 없다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 받는 일을 세상에게 객관적으로 입증해내지 못한다면,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성전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객관적인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면 우리가 아는 예수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았다는 말은 형이상학적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는 예수 이름으로 옥문을 열어젖히고 예수 이름으로 성전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 들린 여종을 해방했고 예수 이름으로 전 재산을 나누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이 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간구하여 내가 하나님의 우편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됨을 제발 입증해달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려면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을 계승하면서 예수님을 확장적으로 모방하면서 교감해야 하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힘듭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일으킬 역사가 매개되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 거죠. 예수님은 한국기독교인 때문에 예수님은 한국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전할 때 매우 답답함을 느끼시는 겁니다. 이걸 써놓고 제가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만일 해산해야 한다면 하나님 뜻이라면 해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만 예수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 교우들이 대부분 이 자리에서 기도하는 그런 매력적인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의 어둠을 들추어내고 세상 죄를 폭로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빛이기 때문에, 그랬더니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제자 공동체를 미워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빛의 조명 사역 때문에 어둠의 공격을 받고 어둠의 폭로를 받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빛이기 때문에 받는 공격이기 때문에 이건 불가피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장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 애를 쓰면 단기간에는 어둠의 공격을 받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 닮아서 어둠과 접촉하면서 어둠의 영역을 들추어내는 순간 여러분은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건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기간입니다. 뇌물이 일상화된 곳에서 우리 가향교회 교인이 뇌물을 안 받겠다는 것은 뇌물 받는 너희는 나쁜 놈이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 뇌물 적게 받거나 받아주면서 용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뇌물 안 받습니다, 이런 말은 당신들 엉망이야, 교육과학부에서 나이가 많은 교수들이 수업을 단축한다는 것을 받았습니다. 대개 3학점은 두 시간 한 시간 이렇게 돼 있었습니다. 2대1로 됐었습니다. 심지어 3시간짜리 연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수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해져서 두 시간짜리 수업을 하면서 한 시간 남은 것은 대충 때운다는 내용이 교육과학부에 엄청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교육과학부가 이 세 시간짜리 수업을 75분씩 두 번 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학교수 중에서 수업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에 학우들은 좋아하면서 고발합니다. 수업을 적게 하는 것에 노예근성적 동의를 해주고, 댓글을 달 때는 그 사람 수업 잘 빼먹어, 이렇게 합니다. 수업 한 시간에 7만 5천 원 정도 됩니다. 숭실대 도서관 출입증은 85만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85만원어치를 하려면 브리태니커 온라인 잡지를 하루에 두 시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전혀 도서관에서 공부를 안 합니다. 그러면 85만원을 도서관에 던지는 겁니다. 그러려고 등록금을 내는데 7만 5천 원짜리 수업에서 한 시간을 빠지면 3만 5천원을 학교에 던지는 겁니다. 제가 계산해서 알려줍니다. 너희가 등록금을 깎을 것이 아니라 있는 등록금을 제대로 살려라, 물론 저는 등록금 깎는데 찬성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도덕적 해이에 빠질 때 한 교수가 수업을 칼 같이 하면서 학생들로부터 엄청나게 지지를 받으면 비난을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도덕적으로 느슨한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엄중한 사람이 나타나는 순간 미움을 받습니다. 이게 교수사회 뿐만 아니라 법조사회 상인들 사회 기업인 사회 일반 관료적 위계사회 모든 면에서 빛은 반드시 어둠의 반격을 일시적으로 유발합니다. 어둠이 빛을 미워하는 것은 진리가 희생을 거쳐 가야만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물리화학적인 순서입니다. 빛이 자기가 진리임을 입증하려면 어둠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빛임을 입증하지, 한 번 공격하자마자 금방 수그러들면 진성 빛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길을 따르다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는 가지로 붙어 있을 때 진성기독교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지만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는 것까지 가는 것을 아가파워동사, 사랑한다 동사를 쓸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사랑은 세상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등졌고 세상이 자기 왕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배역하는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모든 사랑에는 우리 자아의 죽음이 있는 겁니다. 진짜 사랑하려면 내 옛 자아가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 자아가 죽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속한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합리적으로 굴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그 중간, 노선은 분명히 합리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면이 있는데 세상의 궁극적인 힘을 틀어쥐고 있는 질서는 예수에 대한 적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전부 다 예수님 닮아가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세상은 기독교 신앙과 공존할 수 있는 매우 긍정적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에 세상은 빛을 가장한 어둠입니다. 세상을 어둠이라고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냥 온통 어둠이 아닙니다. 빛도 상당히 많이 품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조폭을 하는 사람이 유흥업소 5개 빠칭코 10개를 가진 호텔 사장님이 보면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 흉터가 없습니다. 차 좋은 것 타고 다니고 굉장히 돈을 많이 내고 행동이 매우 세련됩니다. 그 밑에 있는 똘마니들이 흉터가 있지 사장님 그 자체는 아닙니다. 세상을 어둠이라고 할 때 그 어둠이 빛이 도무지 없는 어둠이 아니라 빛과 공존할 것 같은 용기를 가진 어둠이고 빛을 많이 포함하는 어둠이기 때문에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나쁜 일만 하는 게 아닙니다. 명일동에 있는 M교회에서 저 태안 앞바다에 유조선이 침몰했을 때 얼마나 많이 조약돌 닦으러 보냈습니까? 그 조약돌을 닦으려면 많은 교인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해치지 않는 자선행위는 교회가 최고입니다. 자기의 항구적인 불의를 고발하고 항구적인 이익 구조를 침탈하고 흔드는 자의 것은 아주 폭력적으로 나오지만 나머지 모든 면에 착하게 나오는 것이 세상의 어둠입니다. 세상의 어둠은 자기의 결정적 악을 들추어내지 않는 도전은 견디면서 사소한 선은 무진장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기업이 프로그램으로 학자들을 많이 도와줬습니다. 특정기업이 종편방송으로 세월호 방송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착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특정기업이 반도체로 목숨을 잃었다고 백혈병 걸렸다고 하소연할 때는 깡끄리 무시합니다. 그 특정 옷을 입고 정직한 사람도 상품으로 삽니다. 정직한 사람도 상품으로 진열대에 놓고 우리 이렇게 정직한 방송도 판다, 어쩔래? 모든 것을 상품으로 취급할 수 있는 상인이 어둠입니다. 그 사람은 히딩크도 살 수 있고 차범근도 사고 김연아도 사고, 이 세상에 국민적 만장일치적 호감이 가는 인물을 사서 광고비 주고, 박지성 선수가 만장일치적 호감을 갖죠. 박지성 선수가 나이키를 들고 찍으면, 사람들이 만장일치적으로 나이키가 좋은가보다, 나가서 사야지, 온 국민이 공공연히 창출한 명성과 온 국민의 지지로 얻었던 모든 명예를 얻었던 한 사기업이 사서 상품으로 쓰면 만장일치적으로 했던 모든 것은 상품이 된 겁니다. 손석희가 JTBC가서 상품이 된 겁니다. 손석희의 엄정함, 은은함, 공평무상함이 중앙일보의 상품이 됩니다.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도 종편을 안 보겠다고 결심했지만 세월호 사건 때문에 팽목항에 내려 가 있는 그 사람을 봐야만 기도가 나옵니다. 다른 어떤 쓰레기 방송을 볼 수 없는 겁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 사람을 상품 진열대에 놓고 나중에 창고에서 재고정리 할 줄 모른다는 거죠. 그분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이라는 것은 빛이 전혀 없는 어둠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도덕성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을 현혹시킬 정도로 많은 빛 요소, 유사한 빛을 가진 어둠이기 때문에 그런 어둠이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진짜 기독교를 믿고 박해당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이상자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열매를 맺는 착한 제자공동체가 역설적으로 어느 순간에 환영받지 못하고 미움 받을 수 있다, 세상 만민에게 복음의 포도주 사랑의 포도주를 공급하는 거룩한 양조 공동체 인 제자공동체가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세상을 기쁘게 하는 일도 하겠지만 사역의 궁극지점으로 가면 반격 받을 수 있고 적대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우리 기독교가 우리만 잘하면 다 좋을 거야,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 순진한 경고를 하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17절에 굉장히 중요한 목적절이 두 개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6-17절은 제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주도권을 가지고 선택했습니까? 예수님의 주도권과 제자성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고 이렇게 강조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는 기도응답 상태를 강조하는 겁니다. 그 안에 또 하나의 목적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 무엇이길래 이렇게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께 받으리라는 기도를 명령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사랑하는 상태가 가장 식별하기 쉬운 제자공동체가 맺을 열매라는 겁니다. 제자공동체는 바깥에서 하는 대외적 사역보다 더 중요한 1차적 식별표시가 공동체의 사랑이다, 서로 사랑이 견결하게 확실하게 효력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아버지께 기도응답을 받고, 아버지께 기도응답을 받을수록 공동체의 결속력은 강해지는데 예수 이름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서 기도해서 받는 그 기도응답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기도응답을 받을수록 서로 서로 강해질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14장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내용은 성령입니다. 하나 되게 하는 초자연적 영을 우리가 아버지께 선물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대외적인 열매를 맺고 예수를 모방하고 확대하고 체험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구하면 받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됩니까?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개성을 일시적으로 변형시켜 주셔서 개성을 가진 채로 서로 교제하는 기쁨을 만끽시켜주시기 때문에 사랑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일제히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서로 교제의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르고 낯설기 때문에 교제할 때 기쁨이 증폭됩니다. 교제의 기쁨이 증폭되고 확장되려면 낯설어야 합니다. 낯섦 상태를 유지하면서 서로 만나는 걸 기뻐하려면 낯섦 상태를 유지하고 개체성은 따로 존재하게 하면서 성령이 역사해야만 낯섦 유지하면 유대성 결속 우정도 증폭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의 낯섦 개성 독자성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오순절 성령을 받고 우리 안에 있는 교제를 막는 요소가 성령에 의하여 일시작동이 와해되거나 약해집니다. 성령 충만해지지 않으면 다시 돌아옵니다. 성령충만하면 우리가 술 한 잔 먹은 것과 똑같습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집니다. 자리를 양보해지고 웃게 되고 어서오세요, 악수를 하게 되고,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악수하기도 싫고 자리도 양보하기 싫고 눈은 신동아 아파트 쳐다보고 싶고, 그런데 성령 충만해지면 갑자기 존대의 용기가 생기게 되고 악수해도 될 것 같고 말 걸어도 될 것 같은 용기가 생기면서 낯섦이 약간 와해되게 됩니다. 여기가 서로 사랑입니다. 여러분도 서로 이름도 모르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많죠. 저 형제도 이름을 모를 거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이 많거든요.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충분하지 않아서 낯섦이 유지되고 일체성과 동일성이 덜 유지되는 거거든요. 우리가 아버지께 구하면 개체적 낯섦은 그대로 유지된 채 교제의 기쁨이 증폭되면서 남녀 간의 또는 남남간의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도 교제와 우정이 꽃피는 거거든요. 이렇게 사랑하는 공동체가 나가서 밖으로 나가서 열매를 맺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해야 할 것은 예수 이름으로 성령이 임하여 우리의 개체적인 낯섦을 유지한 채 교제의 기쁨 까지도 창조해달라고 기도하는 마음,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제가 볼 때 4-5개월 정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거의 1년은 걸립니다. 왜냐하면 40명으로 1년이 안 걸리는데 40명에게 낯섦을 증가시키는 80명이 되면 또 다시 2년이 걸립니다. 그러다 또 40명이 와 120명이 되면 3년이 걸립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교적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폐쇄적이고 굉장히 공포적입니다. 말도 걸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야만 악수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은 사람을 두려워한다, 아닙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피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교제 중심적인 사람이 됩니다. 저는 책에 미쳐버린 자폐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딴 사람을 전혀 안 봅니다. 그게 원래 저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다른 사람과 교제할만한 준비가 되면 공동체적인 사람이 되고, 낯섦을 이겨내는 사랑의 모험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여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는 오순절 성령, 보혜사 성령의, 진리의 영인 성령에 충만해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하시면서 나는 왜 우리 교우들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은 무자비함은 어디서 왔을까? 다른 사람에게 왜 이름을 묻고 싶지 않을까? 나에게 있는 이 정돈된 무자비성은 어디서 왔을까? 폭력적 무관심은 어디서 왔을까?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좋은 부분이 많이 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에게 정돈된 폐쇄성과 다른 사람을 기꺼이 알고 싶지 않은 자기충족감이 다 있거든요. 그래서 교제하지 않고 김밥 들고 가버리거든요. 그런 현상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이거든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거든요. 설교를 못해서 그래요. 설교가 진짜 좋으면 집에 안 갑니다. 설교로 은혜 받지 못하면 김밥만 들고 가요. 엘리베이터 쪽으로 온갖 군중이 쇄도합니다. 은혜를 못 받고 김밥이 오늘 주일의 영수증이라고 생각하며 가는 겁니다. 여러분 책임이라고 보지 않거든요. 설교가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예배가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래요. 그건 여러분 책임이 아닙니다. 헌금 내고 한 시간 동안 무언가 뜨뜻해져야 하는데 아직까지 술기운이 안 들어간 것 같고 복음의 포도주가 여러분에게 성만찬 적으로 은혜가 돼야 하는데, 여러분을 맨 정신으로 왔다가 맨 정신으로 가게 만드는 놀라운 설교자의 은사, 이게 바로 마른 막대기와 같습니다. 아마 오늘 좀 덜 갈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빛의 속도로 엘리베이터로 가는 사람의 명단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은혜를 받지 못해요. 그분들은 웃지도 않고, 은혜 받으면 안 돼, 마음을 무장을 하는지, 김회권에게 속으면 안 된다, 결심을 해서인지 일찍 가더라고요. 여기 남아서 뭔가 재미난 일이 없나 기다리는 사람들은 미진한데 addition 한 은혜가 필요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쓸 데 없이 오해 받지 않기 바랍니다. 은혜 받았는데 김밥 들고 가는데, 사진하나 찍어놓고 싶더라고요. 오늘도 은혜 받지 못하고 김밥으로 영수증 처리하고 가는 모 성도, 이 예배가 더 풍요롭기 원하고 이 설교가 진짜 예수님과 신자의 교감이일어나길 원하고, 기도합니다. 제 핵심은 기도입니다. 제가 기도를 더 많이, 적어도 하루에 4시간 이상 해야 합니다. 진짜 담임목사라면, 그런데 제가 기도를 그렇게 많이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열매가 못 맺습니다. 제가 기도를 4시간 하려면 학교를 그만둬야 합니다. 언제쯤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4시간 하는 게 꿈입니다. 더 강한 메시지가 되는 게 꿈이지만 우리가 아직까지 예배가 모자라고, 우리가 아직까지 냉랭함을 이길만한 은혜를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복음의 새 포도주가 우리를 지배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간구하기며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초대교회 성도들이 드렸던 예배에 비해서 우리가 한 시간 드리는 이 예배는 궁핍하고 많이 냉랭하지만 삶이 따라가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담론들, 그런 기독교는 쓸 데가 없는데, 삶과 일상적 순종이 따라가지 못하는 기독교가 세상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도 세상의 나쁜 기독교의 일부입니다. 냉랭한 기독교, 세상에 불꽃을 던지지 못하는 젖은 장작더미 같은 기독교입니다. 주님, 우리 예배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부터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중보기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 사랑하는 성도 중에서 기도할 시간이 있는 모든 성도들이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주님의 제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늘어나 이 제단이 성령 엘리야의 제단 같이 불꽃 넘치는 제단, 죄를 태우는 제단, 냉혹함과 무자비함을 불태우는 제단이 될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 교회가 세상에 예수님의 뜻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힘과 권력의 비대칭성이 심히 많은 세상에서 관료적인 경제권 위계질서 속에서 참아가면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과 감사로 바쳤사오니 귀한 이 헌물이 하나님 친 백성, 교회 안팎의 백성 살리는데 거룩하게 낭비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부터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을 발굴하여 기꺼이 스스럼없이 섬기게 도와주시고, 직장의 문을 두드리면서 일터를 찾는 아들딸에게 새 일터를 주시고 직장이 불안정하여 곤고한 가시밭길을 가는 형제자매들의 삶 속에서 간섭하여 주셔서 땀 흘리는 그 현장이 주님의 힐링을 경험하는 현장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땅의 경제가 법과 정의가 온전히 바로 서서 근로할 의욕이 있는 모든 사람이 자존심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소득을 벌길 원합니다. 한 데나리온 벌 만한 직장이 왜 없습니까? 만들 수 있습니다. 문명적인 궁핍함 속에 살아가는 아들딸들에게 새 희망, 죽어서 가는 천국 말고 지금 바로 천국의 햇빛이 비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모든 억조창생의 슬픔과 모든 곤고한 운명을 친히 짐 지시고 가장 깊은 슬픔의 골짜기로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죄와 저주와 슬픔의 골짜기로 파송하신 아버지 하나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성부의 파송사랑과 성자의 순종사랑, 우리 가슴 속에 깨닫게 하시고 성자의 발자취를 기꺼이 따를 용기를 고취시키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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