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주일예배 _ 요한복음 15장 1-6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주간의 마지막 순간, 목요일밤에 포도원을 지나시면서 하셨을 가능성이 높은 말씀입니다. 주석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포도원을 지나시면서 이탈과 균열의 조짐이 보이는 제자들을 다잡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게 붙어 있으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오늘 이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넘겨질 예수님을 이탈하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이 상황, 갈릴리 방랑예언자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제자들에게 무얼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격한 인생 속으로 연루되어 가면서 예수님을 갈아엎었던, 예수님을 유린했던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같이 깔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깔려 희생당하는 예수 옆에 붙어 있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죠. 그래서 이탈과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모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제자들의 다짐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분열감을 일으킵니다. 모두 다 주를 버릴지라도, 주를 버리는 분위기가 대세가 된 거죠.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 라는 말을 하자마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닭이 운다는 말은 새벽을 깨운다는 말이죠. 새벽을 깨우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는 뜻입니다. 누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니까 이미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cross out 된 거죠. 지워진 거죠. 예수님은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가야 할 사람이 아닌 거죠. 왜? 부인했으니까요. 그런데 말로 부인하는 것은 새벽되기 전에 세 번씩, 예수님이 가야바와 안나스의 집에 잡혀간 시간이 새벽 3시경 정도라고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새벽 4시경에 닭 웁니다. 닭 우는 소리를 못 들어봤죠? 대개 4시에 웁니다. 4시전에 세 번 부인하니까 3시경 붙들렸고, 목요일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 하시다가 2시 반 정도 체포된 것이고, 겟세마네 동산은 힌놈의 아들골짜기 아래 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은 성전 있는 돋을새김된 높은 산에 있기 때문에 다시 올라와야 합니다. 15-20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인당하고 버림 받을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는 indissoluble 해체할 수 없고 해소할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너희는 가지라’ 이 말은 가지가 돼라가 아닙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에고 에이미 라는 말입니다. 15장 5절에 나옵니다. 에고 에이미 휘메이스 타 클레마타, 에고라는 말은 보통 영어로 자아라고 하죠. 내 자아가 강하다, 원래 에고는 1인칭 대명사를 가리킵니다. 헬라어로 1인칭 대명서 I myself 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 I am the Good true 포도나무, 내가 진짜 포도나무라는 말, 대개 차이 보조사,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누구누구라는 정체를 말할 때 에고라는 말을 씁니다. 이게 헬라어 어법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참 포도나무다, 그런데 이 말을 하자마자 구약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금방 이사야 5장 1-7절과 예레미야 2장 21절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2장 21절 시편 80편 8절 등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들포도나무, 또는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장에서 가짜 포도나무 들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텐데, 포악과 압제와 아우성 불공평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포도원 농부로서 포도원을 가꾸었던 포도원주인이 소출을 가지러 왔습니다. 신적자비와 친절을 열매 맺을 것으로 알고 왔는데 포악과 압제와 불평등과 사회적 균열과 양극화를 열매로 맺었습니다. 이게 유명한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쟁의 비유가 정확하게 이사야 5장에서 나온 겁니다. 이사야 5장에 보면 포도원 열매를 거두러 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 농부가 하나님이 포도원에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바랐습니다. 공평과 정의 정반대인 열매, 불공평과 불의와 압제와 무자비한 양극화가 열매로 맺힌 겁니다. 그런 게 들포도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 들포도를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 바리새인의 역사를 지금 들포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공평과 정의의 열매, 야훼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해서 완전히 쓸모없게 된 열매입니다. 혹시 기억나세요? 누가복음 13장에 가꾸는데 열매 맺지 못한 포도원을 몇 년 간 참아줍니까? 3년간 참아줍니다. 전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메타포로 설명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 마카베오 독립항쟁 세력들이 돈을 만들었습니다. 그 은전에 포도송이가 쭉 달려 있습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가리킵니다. 내가 그 참포도나무라고 말하는 것은 이사야 5장이 말하는 들포도나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참포도나무, 내가 진짜 참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나와 여러분이 진짜 참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나와 내 옆에 붙어 있는 가지가 하나님이 진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한 목적을 성취할 참 포도나무라는 겁니다. 여기에 차이보조사였던 나야 말로 라는 에이고 라는 말을 썼고, 5절에도 똑같은 말을 썼습니다. 이것은 한 번에 구약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포도원 농사로 설명하고 있는 모든 예언서를 순식간에 상기시켜줍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열두제자, 열두지파를 replace 대신할 수 있는 열두제자야 말로 참 포도나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 성취되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포도나무라는 뜻 안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25장 6절에 보면 세계만방에게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를 가지고 세계만민을 희락의 잔치에 초청하여 기쁨의 포도주에 취하게 만들어 세계만민 가운데 다시는 적개심의 면박을 쓰지 않도록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세계만국 가운데 싹트는 형제우애적 사랑의 자치관계로 우리를 몰아가는 기쁨의 포도주, 그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신 포도주의 목적입니다. 포도주가 얼마나 좋은지 먹기만 하면 정신없이 착해져버립니다. 이걸 마시면 민족적 identity 역사의식도 사라집니다. 용서가 어떻고 복수혈전 같은 마음도 없어지고 금방 하나가 됩니다. 열국 모두가 이 포도주를 마셔서 야훼하나님의 산에서 다시는 형제자매 살육과 골육상잔과 타자에 대한 지배와 압제가 없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이 술을 마시면서 계속 좋아집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포도주를 많이 들이켰기 때문에 winebibber 술고래 술 들이키는 자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잔치 분위기를 굉장히 많이 연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잔치분위기에서 삭개오와 가나안 시몬이 하나가 됐고 이 잔치분위기에서 갈릴리적 저항성과 유대적 보수성이 하나가 되고, 남자 여자가 하나가 되고, 종과 자유자가 하나가 되고,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하나가 됩니다. 예수가 마시게 격려했던 그런 포도주 때문에, 결국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새 술에 취했다, 술에 취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매우 설명하기 힘듭니다. 술에 취해보면 성령충만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바로 자기 속 이야기가 나오고, 형제자매 사이에 내가 이 사람을 오해했나, 이런 반성도 나오고, 물론 일정량 마셔야 역사합니다. 너무 많이 마셔 필름이 끊어지면 안 됩니다. 술을 한 잔 마시는 사람이 갖는 relax 이완하는 힘들이 있는 겁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자기를 경직되게 강압하면서 채찍질, 자기에게 폭력적 자상을 입히면, 내가 나를 엄격하게 만들지만 다른 사람이 갖는 희락의 요소, 웃음의 요소, 삶의 경쾌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너무 자기를 학대하면요. 그래서 저는 술 먹는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술 담배 피우는 사람을 이해하냐면 제가 해봤기 때문이 아니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입니다. 술 먹어야만 잠을 자는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니까 술을 마셔야 합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탄광노동자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하루 종일 일만 하면 폭도가 됩니다. 담배는 사실 뇌의 중추부를 마비시켜서 잠시 잊게 만듭니다. 담배나 마리화나 모든 것들은 고통을 유발합니다. 혹사당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걸 빼앗으면 폭동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술 담배를 너무 지나치게 청교도적으로 억제해서 담배 피우는 사람 중에서 굉장히 우리 교회에 올만한 사람이 너무 많은데, 거기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술 담배 하는 것이 엄청난 죄인 것처럼, 엄청난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중에서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이 주은래입니다. 술 담배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모택동이 그다음 죽었습니다. 좀 많이 했습니다. 제일 세게 많이 한 사람이 등소평인데 오래 살았습니다. 히틀러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사나운 사람 중에서 술 담배를 하지 않고 무섭게 자기를 절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뜻은 아닙니다.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인간성이 매우 황폐해진 이유가 술 담배를 안 해서인가? 그렇게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제 말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포도주라는 메타포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 이야기입니다. 이걸 보면서 술을 마시는 사람을 가만히 묵상과 관찰해보면 접근이 매우 쉽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굉장히 합리주의와 이성적으로 involve 된 사람은 G.K 체스터튼이 말한 악마, 감성적 요소, 자기를 조롱할 수 있는 감정에너지가 100% 박제된 인간 합리주의의 화신들이 바로 악마입니다. 귀신입니다. 체스터튼이나 C. S. 루이스의 견해에 따르면요. 성령은 술로 표현되고 포도주로 표현돼 있고 포도나무 공동체라는 말은 결국 보혈을 흘려서 남을 취하게 만들고 희락에 도취하게 만드는 힘을 이 세상에 공급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고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 이유는 복음의 엄청난 transforming power 변화의 힘, 기쁨이 없고 희락이 없고 설렘이 없는 삶을 설렘과 희락이 넘치는 삶으로, 역동적 에너지가 넘치는 삶으로 바꾸어주기 위하여 더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은 오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은 포도나무 줄기고 제자들은 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붙어 있는 가지이면서 동시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가지입니다. 이것이 보통 포도나무와 다른 겁니다. 보통 포도나무는 그냥 가지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한다 나는 고로 존재한다, 가만히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생각합니다. 붙어 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생각하죠. 마침내 붙어 있기로 결단하고 매 순간 붙어 있기로 결단하여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Cogito ergo sum 생각하는 포도나무로서의 인간입니다. 우리는 원래 주님께 붙어 있는 가지이면서 동시에 붙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비극적 운명으로 끌려간다고 여러분이 나를 떠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떠나려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어져 밖에 버리어져 불태움을 당합니다, 지금 십자가의 운명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가 여러분의 위험하고 폭풍을 몰고 올 것 같은 재난의 불씨 같은 느낌이 들지라도 절대로 나를 떠나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지는 내 안에 붙어 있는 것만이 진짜 나랑 인격적 결속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과 영접한 가지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참 중요한 말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친, 스스로 약해진 예수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옳지만 옳지 않다고 엉터리 같은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예수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사랑해야만 우리 안에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정말 중요하죠.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유다를 가리킵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잘라냈습니다. 붙어 있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예수님의 떡을 먹고 회개의 기회를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떡을 받자마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유다는 잘림을 당했습니다. ‘내가 일러준 말로’ 십자가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했던 여러말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그 말을 듣고도 떠나지 않고 영원히 정결 되고 영원히 깨끗해졌습니다. 십자가의 말, 예수 믿으면 손해본다, 예수 믿으면 당신 쪽박 찰 수도 있다, 예수 믿으면 단기간으로는 생매장 될 수 있다, 그 말을 듣고도 예수님께 남아 있는 사람이 깨끗해진 사람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공동체에 머무는 것이 내게 마이너스가 될 지라도 여전히 그 예수님을 붙잡고 붙들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가 깨끗게 된 자입니다.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감옥에 있는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누가만 감옥에 있는 바울을 뒷바라지 했습니다. 디도 데마는 다 갔습니다. 누가만 예수님의 제자 바울 옆에 있으면서 그의 고난을 함께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왕이신 예수님 옆에 머무는 것은 우리에게도 이해타산으로 볼 때 득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위엄으로 가득 찬 사람 옆에 있는 것은 우리 자신 인생에 플러스 요인입니다. 몰락한 사람 옆에 있는 것, 지금 아무런 장래성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의 인생 반경 앞에 머물면서 그와 인생이 엮이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동작을에 국회의원이었던 정모의원은 한 때 국민21이라는 이상한 단체를 만들어서 대권에 도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한 달도 안 돼서 국민21에 모여들었습니다. 돈 때문에 모여든 것입니다. 그가 지자마자 바람에 날리듯 다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우면산 생활공원 체육시설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70대 할머니 할아버지 세 사람이 뭔가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억울함이 가득 찬 채로, 한 사람은 정 모 그 사람이 인덕이 없다는 이야기고, 한 사람은 박 모 그 사람이 농약으로 사람을 괴롭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55세 하는 중늙은이가 운동하고 있었는데 끼어들었습니다. 농약을 먹이다뇨? 농민을 모독하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것은 한살림 빼고는 전부 다 농약입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한 아주머니가 맞아 우리 다 농약 먹어, 가락동 시장에서도 다 농약이야, 박시장만 농약 먹인 것 아냐, 그 사람 아무도 없어, 아무도 옆에, 동작을에서도 17% 적게 나왔더라고, 돈도 한 개도 없어. 박 모 시장이 농약을 먹인 것이 아니라 우리 농민들이 그렇게 농약을 쳐서 생산하는 구조가 문제입니다, 하면서 거꾸로 매달리기를 계속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제가 뉴스를 보다가 정말 90일 만에 뉴스를 처음 봤습니다. 요즘은 15분 이상 뉴스를 볼 수 있는데, 저는 100일 내내 TV를 켜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들어오시고 나서부터는 절대로 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붙들어 놓는 것이 십자가의 비극적이고 애매모호한 죽음으로 휩쓸러 가면서도 11명의 제자에게 남아 달라고 소리치고 호소하고 마침내 남아 있게 만드는 엄청난 인격적 감화력은 신적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못합니다. 전부 다 떠납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 몸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이 진짜 진성 신자입니다. 진짜 어린양의 인을 이마에 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14만 4천 성도급 신자입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말은 예수 믿고 손해보는 삶을 감수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다가 내 명예가 일시적으로 손상당할 수 있음도 견디는 것, 이것이 예수 안에 붙어 있는 것, 예수에게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에게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약속했습니다. 너무나 합당한 겁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그 사람이 깨끗하게 된 가지이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 열매가 카르푸입니다. 스포츠용품에 카르푸가 나오죠. 농부는 게오르고스입니다. 영어의 George라는 이름은 전부 농부입니다. 게오르그, 조지, 전부 다 내 아버지 호 파테르 무 게오르고스 에스히, ‘내 아버지는 농부라’ 게오가 땅입니다. 땅을 돌보는 분이 게오르고입니다. Geo가 땅입니다. 게오르고스는 땅을 돌보는 땅경작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정가위를 가지고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내십니다. 내 가지 안에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잘라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잘라내시는 것은 상심을 주고 아픔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참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 내 인간관계 인맥을 정리해주시기도 하고, 내가 지금 나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해줄 사람과 사이가 나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농부입니다. 내 계산보다 더 멀리 내다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가 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가위로 잘라주십니다. 그런데 포도농사만큼 인간의 손이 많이 가는 게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농부들이 많이 출연했지만 포도농사는 진짜 가지를 끊임 없이 잘라내야 합니다. 포도농사의 처음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위장가지들이 엄청나게 영양분을 빼앗아 갑니다. 교회가 무조건적 영접과 환대가 넘치기 때문에 엄청난 사기꾼과 파렴치한 사람이 얼마든지 와서 진을 쳐도 막을 길이 없는 겁니다. 교회가 나쁘냐고 그러는데, 교회가 무조건적 친절과 환대의 터전입니다. 아무라도 와서 교회에 머물기 때문에 나쁜 놈이 나오자마자 항상 교회를 다닌다는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님들은 목이 깨끗하기 때문에 더러운 놈들이 와서 설칠 때가 없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깎아야 하고, 절에 다니면서 하기 힘듭니다. 교회는 그게 아닙니다. 무조건적 친절과 환대가 있기 때문에 묻지마식의 영접을 해주기 때문에 교회는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탐조등 없이 교인행사 할 수 있습니다. 문제만 일으키면 그 사람이 교회 다닌다고 비난하면 안 되고 교회가 그만큼 모든 인간성들을 다 받아주는 곳이다, 참 신령한 친절이 있는 곳이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게 변명 같지만, 이렇게 나쁜 사람이 다 모이는 교회 같은 민간조직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죽지도 않고 끊임없이 그렇게 부패해 쓰러질 것 같은데도 계속 십일조 내놓고 건물도 내놓고 해외 서포트 보내고 대안학교도 만들고, 민간조직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4H클럽 사파리클럽 누구도 십일조 내서 학교를 짓거나 4H클럽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시베리아에 선교사 안 보냅니다. 오로지 교회만, 이 세상에 민간이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집단인 교회가 우리가 보기에 우습게 보일지라도 이런 민간집단이 2천 년간 존속할 일이 없고 앞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신령한 집단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와 열매 맺는 가지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성령의 하나님 아버지의 끊임없는 전정작업의 손길을 잘 보지 못하면 교회가 도덕적 파렴치범들을 위한 곳처럼 보이고,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잘 보세요. 십자가를 지는 순교자급 성도가 교회를 이끌어갑니다. 웬만한 교회도 조금만 들어가면 그게 보입니다. 영락교회가 담임목사와 장로님 사이에 15년 간 분규가 있었습니다. 15년 분규가 있는 그 교회에서 15년 간 4천 800명의 교인이 더 늘었습니다. 성도들이 기도를 더 많이 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그렇게 계속 분규를 일으키고 사고를 쳤지만 눈물로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기도를 많이 하니까 5천 명이 늘었습니다. 큰교회라 하면 담임목사님의 언변으로 된 교회가 아니라 엄청나게 순교적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 교회입니다. 그냥 절대로 큰 교회가 아닙니다. 순복음교회가 우스워 보여도, 조용기 목사 중심으로 순복음교회를 보면 조롱의 대상의 되지만 우리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숱한 순교적 평성도들의 눈물과 기도의 헌신을 중심으로 보면 도저히 순복음교회와 사랑의 교회 같은 교회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교회가 큰 교회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를 속단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를 끊임없이 전정하시고 담임목사 자리를 잘라내시기도 하시고 장로 자리를 잘라내시기도 하시고, 온갖 깨끗게 하는 역사를 부단히 하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비난하면서 마치 내가 하나님보다 모든 걸 더 조감을 잘하는 것처럼 지레짐작하다가 절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기질이 다분한 사람입니다. 제가 압니다. 제가 이런 제 기질 때문에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허풍이 원래 셉니다. 극단적인 사람입니다. 정말로 제 분별력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많은 이해를 해달라고 많이 기도했는데 어느 순간 담임목사 중심으로 교회를 보지 않고 열매 맺는 교인을 중심으로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교회가 다시 어마어마하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절대로 한국교회를 비난하면 안 됩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최고입니다. 한국교회가 서구유럽의 전성기교회, 솔제니친이 회고하는 15세기 러시아 교회만큼은 아닐지라도 한국교회가 어떤 점에서 가능성이 많으냐? 젊은이가 아직도 쇄도하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유일하게 지배종교를 가진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계속 비판을 받으면서 매를 맞고 창피를 당하면서 계속 의로운 기독교적 싹이 트고 있습니다. 제가 갔던 한 교회는 장로님 권사님들 500명 정도 모여 집회를 하는데, 이미 담임목사님과 저를 추천한 장로님들이 제가 쓴 글을 읽었더라고요. 자기 교회 권사님들이 제 글을 보고 상처를 받았다고 담임목사님에게 항의를 했더니 담임목사님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톨릭교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전임담임목사님이 훌륭해도 누구를 선배처럼 대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분은 학자처럼 매우 객관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저를 옹호했답니다. 저를 추천한 장로 서너 분은 <뉴스앤조이>를 매일 보면서 한국교회를 위해 매일 기도를 한답니다. 바로 그분이 문제가 많다고 매일 신문에 나오는 교회들의 핵심멤버입니다. 제 책을 선물했더니 읽었다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께서 저한테 한국교회를 싸잡아서 타락했다고 하는데, 제가 그런 경향이 많은 것을 아시고 너무 그러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바라봤더니 성령의 전령사역과 하나님의 농부 되심의 역사가 한 눈에 들어오면서 완만하게 우리교회가 감수성이 조금 자라나고 한쪽에서는 붕괴되고 한쪽에서는 건설되는 걸 동시에 보여주면서 붕괴되는 쪽 중심으로 비난하지 말고 건설되는 쪽 중심으로 희망을 갖자고 저를 격려했습니다. 제가 혼자 기도하면서 깨달았기 때문에 논문에 발표할 내용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나누는 것이고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오해를 받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너무 괴로운 문제입니다. 답답한 문제입니다. 오늘도 제가 우면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교회와 세계를 통치하시는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 되셨다는 걸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제가 만난 청년들 대부분은 아직 믿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제가 설득할 수 있을지 증거를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6개월 더 기도하고 나서 응답이 되면 논문을 발표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저에게 큰 문제입니다. 저의 말이 더 이상 안 먹혀갑니다. 목사로서 더 이상 전할 메시지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게 전할 메시지가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없다면 더 이상 말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가 되시고 만유의 주가 되셨다는 확신이 내게 사라지게 하시고 나는 이 메시지를 전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기독교를 더 이상 전파하지 않게 하시고 그냥 평범하게 마음속의 신자로만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한국교회를 건전케 하시고 PD수첩으로 우리를 때려주시고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등으로 우리 치부를 폭로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피눈물 흘리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교회들이 다시 한 번 눈물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가득 찬 교인들 일으켜주시고 그들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섬기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때마다 피눈물이 쏟아지고 주님의 이름이 능욕당할 때마다 제 가슴이 사무치는 멍이 들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는 기도의 진의라고 봅니다. 멍이 들고 상처가 됩니다. 주님의 이름이 성경에서만큼 알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제 입이 둔탁하여 신학과 신앙이 너무나 너저분하여 이걸 인정하면서 정곡을 찔러가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나의 완악함과 나의 영적 수준 낮음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게 해달라고, 한국교회와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희망을 갖게 해달라고 메시지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제일의 비밀의 복음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께서도 기도해주시고요. 멍이 들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이렇게 너저분하고 수첩>과 <경향신문>과 <오마이뉴스> 등에 우리가 비판당할 때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우리가 두아디라교회와 사데 교회가 된 것처럼 회개하고, 니골라당과 이세벨의 교회를 받아들인 것처럼 영적인 영도를 잃어버린 교회기 때문에 울부짖고 기도하여, 우리 몸 밖에 서서 문 두드리는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이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성만찬적 공동체를 회복하도록 여러분 기도를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발버둥을 쳐도 안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인생을 한 번도 느슨하게 산 적이 없습니다. 저는 분투에 분투를 거듭하여 살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제가 30년 전에도 청년들에게 이런 느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30년이 다 지나갔습니다. 30년 전에도 항상 목이 마른 느낌으로 복음을 전했고 30년이 지나 늙은 사람이 다 되었는데도 똑같은 목마름이 있고 한 번도 제가 잘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믿음을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우리 개인의 공동체에게 가정에게 잘라내고 베어내고 우리를 상처를 입히는 분자를 일으키더라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 것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더 풍성한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임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 믿어지더라도 믿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깨끗하게 되는 가지를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깨끗하게 된 가지는 주님과 영적으로 소통이 회복돼서 뭐든지 구하면 응답받는 기도생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함으로 감미롭게 찬미하는 영성생활이 풍요로워집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 성도들 말씀으로 심령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감수성이 회복된 성도들은 기도의 응답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도 말씀이 있어서 설교합니다만 충분히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저는 형편없습니다. 이 말씀이 있어서 전하지만 요한복음의 이 깊이를 이해하기에는 아직까지는 힘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주셔서 우리를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는 감수성을 회복시켜주셔서 감사하고, 찬양과 경배가 우리에게 넘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격려하는 작은 신앙공동체를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다음 일주일도 십자가 안에 머무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과 붙들려 붙잡혀 있는 한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신비하고 심오한 말씀이지만 저희들 삶의 자리가 너무나 완악하고 둔탁하고 죄가 많아 이 말씀의 신비에 만분의 일도 접근하지 못한 채 우리가 목마른 채로 서성대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보좌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설득시킬 수 있는 날카로운 복음의 능력이 없습니다. 저의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친척과 제자들에게도 복음의 진의를 힘 있게 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희망, 주님의 이름이 신문에 능욕되고 모멸될 때마다 제 가슴은 사무치게 멍들고 상처를 입지만 복음이 어떤 점에서 대한민국 5천만 동포의 희망이 되는지를 조리 있게 설명하는데 완악하고 부족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살려주소서. 주님의 몸통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 십자가의 말씀으로 깨끗게 되고 열매 맺게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한 사람도 밖에 버리어 불태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몸에 붙어 있어 우주적 공교회의 일원이 되어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도 주님을 따라가게 도와주시고 예수 믿고 손해 볼지라도 주님의 교회 안에 머물게 하여 주셔서 십자가의 진리 앞에 머물게 하여 주소서. 밤의 어둠의 깊음 속으로 달려가는 유다처럼 되지 말게 하시고 말실수를 하고 죄를 짓더라도 돌이켜 베드로처럼 주님께 붙잡혀 있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들이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과 감사로 바쳤사오니 이 귀한 헌물을 그들의 생명과 삶의 향기를 열납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고단한 직장을 위로하여 주시고 흔들리는 직장을 견고히 붙잡아 주시고 새로운 이직을 위해서 기도하는 아들딸들에게 이직의 기회를 열어 주시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의 포도원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에게 한 데나리온 벌 수 있는 일터를 허락하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나라 경제가 가장 연약한 지체들까지 살리는 공동공영의 경제가 되게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적폐된 많은 돈들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넘치게 도와주시고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만물의 생명의 기운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경쟁에서 뒤쳐진 자들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하나님 찬미할 만큼은 자존심 살려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안식도 박탈당하여 주일까지 일해야 하는 이 많은 억조창생들이 일주일에 한 번 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하나님 존전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감화 감동의 역사가 주님의 십자가 말씀으로 정결케 되고 십자가의 말씀 안에서 십자가 지는 주님 앞에서 붙들기로 결단하는 가향의 교우들과 그들의 뱃속에 있는 교우들과 이 예배당에 와서 예수 믿기로 예정된 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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