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주일설교 _ 요한복음 14장 1-6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예수님께서 쓰신 단어 근심하다는 동사는 trouble이라는 단어의 원어, 트러소에서 나왔습니다. trouble이라는 말이 그리스말로 트러소입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 앉아 있는 찌꺼기들을 원천에서부터 휘저어서 시야를 가리는 것, 깊은 바다속에 갯벌과 바다 땅들이 격동되면서 시야가 가려지는 것, 전망을 잃어버리는 것, 객관적으로 전망을 잃어버리는 자가 느끼는 황당함 당황, 그걸 우리는 근심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에 잘하려고 마음을 초조하게 다잡는 것은 근심이 아니고 초심입니다. 초조한 마음이죠. 시험을 잘 치려고 다잡기 위해서 근심하는 것은 집중된 마음이죠. 지금은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중심에서부터 해체되어 직립보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심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상태입니다. 네 신앙의 중심, 인생의 중심 좌표가 흐느적거리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너희의 마음이 중심에서부터 흔들려서 해체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갔던 이 길, 전 재산을 주님께 바치고 버려두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줄 믿고 일종의 투쟁을 한 거거든요. 예수님께 investment 한 겁니다. 그 investment 투자자들의 돈을 모은 예수님이 투자금을 돌려주지 못하고 부도를 내는 겁니다. 부도를 내면서 하는 말이 어렵게 됐다, 내 책임이 아니라 투자환경이 몹시 힘들어졌고, 그런 상태에서 오는 근심입니다. 갈릴리 베뢰아 데가볼리 예루살렘 바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폭풍 같은 설교, 엄청난 이적으로 민중들을 휘어잡았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니까 매우 작은 자로 축소되면서 두려워 떠는 자가 된 겁니다. 예루살렘 바깥에서는 강한 사자처럼 담대한 예수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적의 혼돈안, 적진 한복판에 들어오니까 매우 축소지향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예루살렘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이 12장 27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중심이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다음 말을 보십시오. 그렇지만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강요하는 죽음, 예루살렘의 당국자들이 조성해놓은 죽음의 발자취 죽음의 덫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예수가 하는 말이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심각한 분열에 시달립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계획하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죽음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순종의 극한치를 드러내 아버지께 영광돌리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모든 가치는 자기 목숨을 하나님의 진리 앞에 내 놓을 때만 불멸의 업적이 나옵니다. 모든 위대한 업적은 생물학적 목숨을 앗아갈 것 같은 무서운 결단의 시간에 기꺼이 도달하는 결단에서 나옵니다. 예수의 결단이지만 우리 모든 사람들은 불멸의 삶의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기까지 진리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피하여 생물학적 목숨을 연장시키든지 둘 중 하나거든요. 예수님은 지금 정확하게 아담인류의 두려움을 몸서리치게 느끼는 겁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깊은 곳에서부터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 동요를 보고 제자들이 동요하는 거거든요. 제자들의 마음의 동요와 근심은 파생된 동요와 근심이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의 근심과 동요를 같이 느낍니다. 아하스 왕이 아람 군대와 북이스라엘 군대에게 포위됐습니다. 이사야 7장입니다. 그런데 포위되자마자 사시나무처럼 떨게 됩니다. 왕의 마음이 사시나무처럼 떨게 되자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백성들의 마음도 사시나무처럼 동요가 막 일어납니다. 기가 막힙니다. 동요와 불안은 전염성이 강하고 확산성이 매우 강한 겁니다. 그 기간에 그 모든 불안과 동요를 태산 같은 평정의 사람, 평안의 사람이 진정시키면 진정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14일 동안 로마로 가던 배가 지중해에서 표류합니다. 오디세우스를 태운 배가 지중해 일대를 표류하듯이 14일 동안 해와 달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때 모든 사람이 먹기를 포기했습니다. 아무도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먹기를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그 전날밤에 사도바울의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칠흙같은 절망의 밤에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로마까지 가야하는 사명의 엄숙성 때문에 풍랑도 이 사명을 좌절시키지 못한다, 네가 로마 가이사 앞에 복음의 위대성을 입증할 사명이 있는데 어떻게 이 배가 네 목숨을 앗아가겠느냐?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276명 모두 살려준다, 다만 배와 선체는 산산이 부서진다, 276명 모두 살려준다, 바울이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276명의 선상공동체에서 리더십을 잡지 못했거든요. 그 밤에 환상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영접했습니다. 내가 가이사 앞에 서서 복음을 변증하고, 로마제국 최고 지도자인 가이사와 결승전에서 맞붙으려면 로마까지 가는 여정은 필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먹기를 권하면서 성만찬을 베풉니다.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그때 선장과 선주와 사원들은 짐을 버리고 세월호 선장처럼 구명보트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그물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영어로 government라는 말 자체가 구베르나치호에서 나왔습니다. 구베르나치호라는 말은 배를 젓다는 뜻입니다. 그 라틴어에서 Goverement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정부라는 말은 배를 젓는 사공이라는 뜻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놀랍게도 정부 국가 관료적 직제에 있는 영혼 없는 로봇 같은 지도자들, 영혼 없는 박제된 행동들, 매뉴얼보다 더 기계적인 정신적으로 퇴행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공감의 능력이 전혀 없는, 슬픔과 분노를 정물적으로 즉흥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고, 선장이 구해달라고 소리치지 않았다고 아무도 구해주지 않습니다. 이 명령은 선장만 하기 때문에, 조사할 때 그랬습니다. 구해달라는 명령은 선장만 하는데 아직까지 선장은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세월호는 퇴선명령이 영원히 내려지지 않고 구조명령이 영원히 답지가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말을 들으려 했습니다. 바울이 14일 동안 절망이 지배하던 그 밤에 환상중에 나타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미결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인 몸으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그때 바울이 지도한 리더십 아래 공권력은 용해돼버렸습니다. 바울이 그 선상공동체를 지배했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 남아 있던 300여명의 사람 중에 바울 같은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많이 살았을 겁니다. 질서정연하게, 즉흥적이고 기계적인 로봇의 지시를 따르면 안 됩니다. 그때는 총체적인 인간의 양심과 이성이 강요하는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했고 세월호에서는 그런 리더십이 없었습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난 걸 보셨죠? 이번에 저는 다시 그 영상을 봤습니다. 그때도 똑같습니다. 290여명을 앗아간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때 마지막 장면을 보면 70대 할아버지가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이는 바로 옆에서 손만 뻗으면 제압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거든요. 대부분 수수방관 했습니다. 신나의 불은 자켓을 서너개만 덮으면 금방 꺼져버리거든요. 200여명이 죽었습니다. 그건 매뉴얼대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마음의 확신, 근심과 동요를 극복한 멘탈, 강력한 멘탈이 사태를 얼마나 쉽게 장악할 수 있는가 보여준 생생한 사례란 말이에요. 강력한 멘탈, 깊은 평화, 불안을 그치고 동요를 그쳐서 도달한 확신, 14일 동안 절망의 밤을 거쳐서 마침내 도달한 광명의 확신, 이 확신이 바울의 선상공동체를 구했던 겁니다. 마음에 근심하면 사태를 그르칩니다. 우리 마음에 깊은 진창과 갯벌에서 판단력을 흐리는 우발적 요소, 비현실적 요소들이 내 마음에 떠오를 때 그것들이 굉장히 reality처럼 보입니다. 도깨비 같은 생각이 진리처럼 보이고 참다운 진리는 도깨비처럼 희미하게 햄릿의 유령처럼, 샤일록은 사라져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근심에 빠지면 거의 99.9% 오판하게 됩니다. 판단력의 마비가 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을 따라온 3년 반의 행적, 예수님을 따라나선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투신이 중대하게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실패한 것이라는 판단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마음의 근심은 예수님께서 조장한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소스라치는 두려움과 공포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거거든요. 두려움과 공포는 강한 확산성이 있고 전염성이 있고, 이 두려움과 공포는 제압하는 강한 멘탈 확신 또한 확산성이 있고 전염성이 강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불안과 동요를 경험해본 사람이 도달할 평화가 필요합니다. 불안과 동요가 무엇인가를 몸서리치게 경험한 그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과 영접접촉과 매개를 통하여 도달한 그 확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적진 홈그라운드에 와 있습니다. 홈그라운드는 심판이 매수돼 있잖아요. 홈그라운드에 가면 게임이 안 되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이탈리아 물 먹었죠. 스페인 물 먹었죠. 심판을 매수했겠죠. 포괄적인 의미의 매수를 했겠죠. 돈을 주지는 않겠지만 윙크할 때, 정문준이 계속 돈을 썼겠죠. 맛있는 것 사 줄께 했겠죠. 차도 한 대 줬을 수 있어요. 일본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안 합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부터 악마적인 홈그라운드가 됐어요. 그래서 붉은 악마가 됐습니다. 제가 옛날에 작은 초등학교 112명 다니는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면소재지에 있었기 때문에 큰 학교였고 굉장히 명문 초등학교 였습니다. 그런데 하동읍내로 제가 씨름을 하러 갔습니다. 종합학예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씨름도 하고 주판도 하고 밴드도 하고 다 하는데, 저는 큰북을 쳤고 주판을 두드렸고 마지막 씨름을 했습니다. 혜윤이보다 키가 적습니다. 제가 141cm이었습니다. 하동읍내에 갔더니 순천 이런 데서 키 큰 애들이 몰려드는데 촌놈이 왔다고 소리 지르는데 그때 다리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때 홈그라운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았습니다. 26km를 걸어서 갔거든요. 아름다운 산천배경이 좋아서 지금도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홈그라운드는 다리에 힘을 빼게 만들고 이성을 잃게 만들고 자기에 대해서 축소지향적 오해를 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도달한 예루살렘을 가보면 갈릴리와 너무 다릅니다. 수염을 휘날리는 박사들이 시위백관 스무 명 앉아 있고 대제사장 에봇을 입고, 멋진 관포를 입고 청원경찰 같은 성전경비병이 있고, 예수님처럼 갈릴리 사투리를 쓰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면 그 분위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두려워 떱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려움 떠는 것만이 제자들을 근심으로 몰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폭탄선언,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요한복음 13장 21절에 보면 똑같은 트로소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 말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즉 예찬의 식탁에 와 있던 자가 내 등에 비수를 꽂았다는 뜻이거든요. 제자공동체가 집단적으로 갱업하면서 덤벼들 것이며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며 의심할 것이며 제자 중 한 사람이 아예 팔아넘길 것을 알고 계속 괴로워했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끝까지 자기를 믿지 않고 부인할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순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다를 관리했습니다. 유다의 행동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그 말씀하자마자 ‘심령이 괴로워’ 자기 제자 중 한 명이 자기를 팔아 매각하면서 제자공동체가 산산조각 나는 그 상태가 예수님을 괴롭게 했는데 그 괴로움이 제자들에게 파생됐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이 말을 하자마자 제자들은 직격탄을 맞은 셈이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근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내가 의심받고 있고 우리가 서로 의심하고 적대하고 대적하면서 뱀눈으로 서로를 감시할 수밖에 없는 이 경직된 인간관계가 우리를 근심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할 제자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돌이키려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익명으로 자막처리해주면서 블라인드 처리하면서 그 사람만 이 말을 알고 회개하기를 기대했죠. 그걸 반전시키려고 베드로가 준비 안 된 비교적 영혼 없는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는 말을 함으로써 제자공동체를 영구적으로 회복불능의 타격, 수제자가 이 말을 들었다는 말은 제자대표단이 이 말을 들었다는 말은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혀 믿지 못한다는 거죠. 예수님은 자신이 흔들렸죠. 제자공동체도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상황에서 이 괴로운 상태를 종료하고, 메 타라시스도 헤몬 헤카르디아, 너희의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깊은 곳에서부터 스트로드 업, 헝클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합니다. 14장 1절은 예수님 자신의 근심도 극복했고 제자들의 근심도 수습해가는 단계입니다. 나는 이제 극복되었다는 겁니다. 대적자의 홈그라운드에 들어와서 죽기를 각오하고 내 길을 가야겠다, 나는 이제 죽는 길,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1년 있다 죽는 게 아니라 이번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 길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 죽음으로써 생명의 길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을 먹겠다, 내 잔을 받아들이겠다, 그러니까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손해 보겠다고 결심하고 내 자존심이 약간 훼손되더라도 사태를 반전시키기 위해서 나는 잘못됐다고 말하기로 결심하는 것,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겟세마네 결단입니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형제자매 동기간 친구끼리 의를 지켜내겠다, 내 명예를 지키겠다, 내가 살아온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내 삶의 일관성과 다른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겠다, 이것이 잔을 마시는 겁니다. 우리의 평안이 깨지는 것,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슴 속에 깊은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개 죽기를 각오한 결단,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수습할 수 있는 겁니다. 이때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을 가리키지 않고 대부분 경제적 손실입니다. 대부분 인간관계, 형제간, 친구끼리, 파트너끼리는 자존심 또는 돈입니다. 경제적 희생 또는 정치적 신념의 일부 유보등과 관련된 겁니다. 그런 것들만 일부영역에서만 죽기를 각오해도 평안이 오거든요. 지금 세월호 희생자들 유가족들은 죽음 저편 우리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를 하나님의 그물에 잡아넣거든요. 어떤 바다에 빠져도 하나님의 생명그물에 걸리지 않는 생명자가 없단 말이에요. 이걸 믿으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거예요. 대한민국 세월호 맹골수도 앞에 친 그물은 벗어날지라도 유실됐을 지라도 이 땅에 창조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생명그물을 벗어날 수 없거든요. 모든 사람은 다 부활한단 말이에요. 요한계시록 20장 13절, 요한복음 5장 39절,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반드시 다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그물은 단원고 학생들을 절대로 유실시킬 수 없어요. 우리 하나님은 만상의 수효를 세시고 별과 머리털 손상까지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단원고 학생들을 우리 하나님은 모른 체 하지 않습니다. 그걸 믿으면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권세가 맹렬하게 우리를 파괴하는 것도 알아야 하지만 죽음의 권세가 주는 분노도 알아야 하지만 죽음권세까지 넘어가면서 도달한 확신도 알아야 하거든요. 그래야 일상생활이 시작됩니다. 지금 만일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만 시달리고 죽음의 아쉬움 처절한 타격성과 부정성에만 주목하면 세상에 대해서 굉장히 냉담한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하나님의 그물은 깊은 바다, 다 건져내십니다. 만상을 수효대로 다 기억하시고 알아채시고 별들 숫자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 태어난 안산단원고, 우리 오천만 국민이 불러 외쳤던 그 이름을 모르실 수 없죠. 하나님의 그물에 이미 그들은 붙들려 있습니다. 바로 그 바다가 44세 아펜젤러가 빠져 죽은 신안 앞바다가 멀지 않습니다. 언더우드와 같이 들어왔던 아펜젤러, 언더우드는 3대까지 연세대학교 이사를 배출하고 지금도 관련돼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달리 아펜젤러는 44세에 한국어경시대회에 참여하다가 조난사고를 만난 소년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수장됩니다. 아펜젤러는 아마 몸이 유실돼서 못 건졌습니다. 그때는 잠수부도 없었기 때문에, 이 땅에 바다에 빠져 죽은 숱한 사람들, 우리 하나님의 그물에 다 걸려 있습니다. 한 사람도 유실되고 망실된 생명,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이 있어서 보내신 이 아들딸들의 미래를 절대로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살려내십니다. 그걸 믿으시면 엄마 아빠들 위로받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이 평안입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의 공포, 자기가 무로 지워지는 슬픔을 처절하게 겪은 후에 마침내 평안한 도달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근심을 이해하시고 우리 존재 전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슬픔이 뭔가를 아시는 분이고, 우리 뼈마디가 다 흔들리면서 직립보행을 하지 못할 만큼 중심을 잡지 못할 만큼, 이렇게 너저분하게 일상생활의 중심이 해체된 것 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아신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근심하지 말라, 누구의 말입니까? 근심이 아닌 죽음의 공포를 몸서리치게 겪어본 그분의 말입니다. 죽음 저편에서 찾아오는 희망과 평안, 하나님을 향해서 죽을 때 하나님께 순종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하나님 때문에 죽는 죽음,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죽음, 하나님을 향하여 죽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란 걸 아시고 그분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공의, 정의가 충분히 만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불안은 좋은 불안입니다. 이 근심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게 아닙니다. 이런 근심은 즉시 그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존재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치명상을 입히는 근심은 그쳐야 하지만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 목이 마른다는 근심, 구원을 해산하는 근심은 좋은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말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근심은 좋은 겁니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를 맺는 근심은 그쳐서는 안 되겠죠. 그것은 기도의 동력입니다. 생의 선물, 인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창조주의 무한책임적인 돌보심과 자애로운 통치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냉담하게 만들고 냉소주의자로 만들고 의심하게 만드는 근심은 끝내야겠죠. 안산제일교회에 제 제자가 있습니다. 17명의 고등부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이번 사고로 16명을 잃었습니다. 마지막 수습을 하는 아이들이 학생증을 얼마나 꼭 잡고 있는지 펴지지가 않는답니다. 학생증을 가지고 자기 신원을 알아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어떤 파생된 죽음을 일으키느냐면 고등부에 있는 다른 고등학교 학생이 마포대교에서 자살하려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마포대교는 자살을 워낙 많이 하기 때문에 경비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급히 여의도 성모병원에 가서 살려냈습니다. 우리가 그 형제를 돕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 그때쯤 일어난 사건입니다. 죽음의 권세가 다른 죽음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창조적 근심은 그치면 안 되지만 하나님의 자애로운 통치, 생과 사의 경계를 넘는 하나님의 우주적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이 일을 우리 하나님이 무한책임지시리라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죽음 자체를 숭배하듯이 죽음 자체의 궁극성과 폭력성에 머리를 조아리면 안 됩니다. 그건 옳은 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적진의 홈그라운드에서 죽고 싶지 않았지만 마침내 내가 가는 이 길이야말로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인 것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죽음은 그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운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여 내 목숨을 드리는 이 길만이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알자마자 이 죽음은 부활을 가져오는 죽음임을 알고 부활을 확신하면서 죽음은 주님께 즐거운 선택이 됩니다. 근심하지 말라, 제자공동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겠다는 말 때문에 결정적으로 동요에 빠졌습니다. 본인 자신이 죽음의 공포 앞에 사시나무처럼 떠는 아담인류가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신인류, 둘째 아담의 이름으로 우뚝 서서 부활하면서 베드로를 안심시킵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죽음의 공포에 사시나무처럼 떠는 예수가 아니라 새 예수입니다. 새 아담, 둘째 아담 예수로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것들은 생명으로 자기 사랑을 표시하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가정이 왜 좋습니까?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나누던 사랑의 관계가 끊어질 때 가장 큰 슬픔이 옵니까? 왜 직장동료보다 죽었을 때보다 자녀와 부모사이의 유착관계가 끊어질 때 우주적 오열이 옵니까? 왜 그렇습니까? 가정 안에는 신성한 사랑, 자기목숨을 내어주는 신성한 사랑이 역사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가정의 슬픔은 우주적 사랑의 법칙이 좌절되는 곳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가장 좋은 것을 희생하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엄마 아빠가 우리를 키우는 방식 자체를 보세요. 매일 성만찬적 사랑을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은 이 세계 어떤 가정외적 기관과 조직과 결사체와 주식회사와 정당들이 줄 수 없는 원초적 사랑을 주기 때문에 가정의 신성성을 보호해야 합니다. 가정은 최고 좋은 것이고, 엄마 아빠는 우주적사랑,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방불케 하는 사랑인 거죠. 우리 딸에게 이번에 카드를 받았습니다. 어버이날 카드를 받았는데 고급 한지에다 글을 썼는데 너무 감동적인 Best Father ever,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버지, 물론 엄마도 같이 썼습니다. 엄마 다음에 접니다. 글 내용은 부모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주적 사랑의 위대성, 그걸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질 때 슬픈 거예요. 그래서 단원고 엄마들의 오열이 우리 오열이 돼버리는 거죠. 그 사랑을 완성도 못한 채 멈추어 있는 겁니다. 가장 위대한 고생은 일상생활에서 분할하는 죽음이든 한 번 죽는 죽음이든 다 죽음이 됩니다. 죽어야만 생명이 나옵니다. 죽어야만 생명이 나오는 원리가 이 세상 원리입니다. 형제자매 간의 좋은 관계는 반드시 누군가 생명을 희생했습니다. 돈을 희생했습니다. 반드시 귀한 것이 희생되고 나서야 생명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 적진에게 붙들려 죽는 죽음은 죽어야 산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 사랑을 표시하기 위해서 죽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원리를 예수님은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 때문에 내 죽음은 희미한 죽음도 아니고 무기력한 죽음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죽음이고 내가 선택한 죽음은 피할 수 있는 길이 아니고 여러분도 따라와야 할 길이다, 지금은 여러분이 따라올 수 없지만 성령 받고 따라오는 길이다, 하면서 설득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 남은 생애도 결국 생명을 나누어주고 가길 바랍니다. 장기기증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더라도 반대는 안 하겠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기증하는 것, 재산을 기증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겁니다. 이건 장기기증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제가 왜 장기기증을 위험하게 생각하느냐? 장기밀매가 일상화됐는데 그 장기는 빨리 죽어야 할 부자들이 계속 교체하기 때문에 악인들의 장수를 도와주는 장기기증을 반대합니다. 장기기증 운동하는 걸 반대합니다. 장기기증 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운동을 해서 그걸 industry가 되게 하는 건 반대합니다. 부자들은 오래 삽니다. 악인은 빨리 죽는 게 좋습니다. 시편 73편처럼 악인은 오래 삽니다. 지금 일시 죽는 죽음은 아버지 집에 제자들과 영구적으로 같이 있을 곳, 지금 잠시간의 이별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한 이별이라는 것을 확신시킴으로써 이 평안을 주셨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난받고 손가락질 당하고 부인당하고 배반을 당하고, 이 배반을 그친 후에야 제자들과 예수님 사랑은 다시는 영속적인 깨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성에 도달합니다. 마지막 이 장면은 이 논리는 납득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손에 의해 발 씻김을 당한 자만이 예수님과 상관있는 자가 되듯이 우리 죄를 씻어주는 맹렬한 죄사함의 경험이 있어야만 예수님과 우리가 영구적으로 결속된다는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극적인 증폭된 우정과 재회를 기뻐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 또한 평안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소품에 불과합니다. 지금 여러분 친구가 여러분을 미워합니까? 손가락질 합니까? 우주적 연합과 우정을 완성시키기 위한 과도기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사이가 나쁩니까? 반드시 그럴 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이가 나쁩니까? 지금 우리가 지리멸렬한 오합지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와 주님이 영구적으로 함께 살 영역을 집들을 예비하신 후 우리를 데리러 오시기 때문에 이 이별은 견딜 만한 이별이고, 고아같이 버려둠을 당했다는 우중충한 느낌은 우리 주님의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깨끗하게 해소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인생살이 자체를 건조하게 느끼게 만들거나 무덤덤하게 만들거나 냉담하게 만들거나 허무하게 만드는 근심에 오래 싸여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그 근심 속에, 죽음과 이별의 공포 속에 존재가 무너지고 3년 동안 바쳤던 모든 희생과 헌신이 깨끗하게 수포로 돌아간다는 무시무시한 남자들의 허무한 생각들을 채워주시고, 3년 동안 나를 따라다닌 것이 절대로 헛것이 아니며 너희끼리 제자공동체로 이루어 사랑을 나눈 것이 절대로 헛것이 아니며 영구적으로 열매를 맺을 것으로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안, 주님이 몸서리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주시는 근심하지 말라는 권면이 여러분을 힘 있게 붙들어 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우리 존재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쓰라리고 슬픈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3년 동안 애써서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끝나고 모든 인간관계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내가 추구했던 모든 일들은 산산조각이 난 것 같은 허무함에 빠질 때 주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이별과 근심, 아버지 하나님 균열과 파열이 성령의 오심으로 창조적인 반전을 일으킬 줄 믿습니다. 일주일 내내 다시 근심스러운 세상에 나가 살아야 할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단단히 붙들어 주시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평안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붙들고 오늘도 승리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생명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선물로 주신 인생살이 자체가 짐이 되고 고역이 되는 세상 한복판에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우리 5천만 동포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밤을 자지 못하고 일상의 중심이 흔들리고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주님이여 우리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엄한 형상들이 저희의 죄악 때문에 산채로 물에 잠기는 것을 보면서 아무 것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무기력이 저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은 가슴을 치고 통곡해도 되돌아오지 못하는 아들딸들 이웃들이 있습니다. 주님이여 주님의 생명그물에는 한 사람도 유실되지 않고 걸려 있을 줄 믿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동시에 통치하시고 산 자의 땅에서도 죽은 자의 땅에서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당신의 공평과 정의와 무궁하신 자비로 이 억울한 삶의 사연을 신원하여 주소서. 이 귀한 물질로 감격과 감사를 표현하며 분투를 표현하는 아들딸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주님이여 직장 생활에서 흔들리는 아들딸들을 건져주시고 살려주소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주님의 포도원을 보내주시고 붙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축도) 몸서리치는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친히 겪으시고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 죽기로 결단한 평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아담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도록 길을 내시고, 격려해주신 아버지 하나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순종 사랑, 우리가슴 속에 깨닫게 하시고 그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오늘 예배드린 모든 교우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가정과 자녀들 위에 세월호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이 땅의 모든 겨레와 동포 위에 희생자들과 유가족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우리의 아들딸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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