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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속에 계실 또 다른 보혜사-요한복음 14장 16-24절 “

by 【고동엽】 2022. 2. 14.

5 25일 주일설교 _요한복음 14 16-24 너희 속에 계실 또 다른 보혜사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요한복음 14-16장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완벽한 성경구절들이 나옵니다. 삼위일체가 어디 있느냐 물을 때 요한복음 14-16장을 읽어보면 삼위일체와 같은 표현들이 수없이 반복되어 나온다고 말하면 됩니다.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알렉산드리아 일대, 그리스정교회의 모태가 되고 러시아 정교회 모태가 되는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을 해박하게 깊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 또는 그리스정교회를 우리는 삼위일체 교회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이렇게 동방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이유는 동방교회는 요한복음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한국교회처럼 마태복음과 로마서로 이루어진 서방교회, 로마 독일 앵글로색슨 모든 교회는 서방교회라고 합니다. 서방교회는 마태복음과 로마서 중심의 교회입니다. 죄를 대속해주고 속량해주는 개념이 강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연합이 강합니다. 죄사함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것을 엄청 강조합니다. 마태복음과 로마서가 믿음이라는 명사를 강조한데 비해서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는 동사를 강조합니다.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이 외견상 지배하는 분위기는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말을 문학적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과 로마총독과 분봉왕 헤롯 등의 권력담합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말을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말을 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와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죽음, 자기를 보호할만한 사법적 장치도 없고 맨파워도 없고 로마제국 헤롯 등 어떤 권력자에게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를 변호할 사람이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강자가 강요하는 죽음,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주는 운명의 처분권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이 세상은 강한 사람이 작은 자의 운명을 처분해줍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방식은 두려움과 공포와 압제입니다. 이 공포와 두려움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반항하면 죽음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세계는 로마제국과 유대인의 대결입니다. 로마제국은 절대강자로써 타자를 지배할 때 죽음까지 처분권을 가지면서 약자를 복속시키는 것입니다. 그 로마의 반대편에 유대인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죽음으로 저항하지만 전세를 뒤엎지 못하고 지상의 역사에서는 항상 패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 로마총독이 예수를 사형할 때 총독이 예수의 십자가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은 굉장히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절대약자인 집단이 로마제국이라는 절대강자에게 예속돼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발생하는 거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은 로마제국 대 유대인 사이에 있는 맥락 안에서의 죽음이라는 거죠. 예수님이 로마제국과 드잡이를 하면서 정면대결하지 않았거든요. 로마제국이 안정시키려고 했던 식민지 속주, 유대상황을 격동시켜서 유대인들이 점점 국가에 예속된 백성이 아니라 헤롯 분봉왕 왕국 식민적 지위를 벗어나서 하나님과 직접 계약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주거든요. 우리는 시민이기 전에 국민이기 전에 부모의 생물학적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께 누구도 매개해주지 않는 직접매개가 됐단 말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국민의 일부이고 가족의 일부이고 심지어 회사조직의 일부지만 사실상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중간 매개 고리 없이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보는 거거든요. 하나님 자녀가 중간매개권력자들인 국가나 지방자치나 회사나 심지어 생물학적인 의미의 가정 등에 의해서 박해받을 때 예수님은 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을 해체시키지 않지만 우리가 정신이 말짱해지고 시퍼렇게 주체성을 회복하고 내가 고귀한 하나님의 친 백성이라는 자각을 하자마자 이 세상은 더 이상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군대를 갔는데 나에게 계엄군 군복을 입혀서 시민을 향해서 발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엄한 계약적 요구 안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총질하지 못합니다. 국가가 예속시키는 어떤 명령도 하나님의 요구를 넘지 않는 한에서만 복종하니까 국가라는 것은 최소통치밖에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만 맞는 통치행위가 국가 회사 지방자치단체, 인간의 모든 결사체가 해야 하니까 최소 통치만 일어나는 거죠. 이 세계 만민이 국가의 구성원 중 10% 정도만 자기국가의 야수적 관료적 폭력적 명령을 거부하고 보이콧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가는 작동이 안 되겠죠. 불가능합니다. 3%만 있어도 항상 국가는 좌절합니다. 악한 명령을 집행하는데 3%의 보이콧, 하나님의 친백성이라는 고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속한 국가 1차 집단 등의 뜻을 거부하면 그 사회가 무너져버리는 거거든요. 예수님은 우리를 그런 식으로 자유케 하는 거죠.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그래서 14세기 세르비아의 대심문관이 재림한 예수를 붙들어서 감옥에 잡아놓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인간이 너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가톨릭의 교회, 대중적인 신비감을 주는 기적 몇 가지와 빵만 주면 완전히 복종한다, 지상의 모든 인간은 당신이 원했던 시퍼런 자유까지 갈 마음이 없는 말종인간이다, 말종인간은 가톨릭교회가 감동해야지, 당신의 약점은 인간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하수페르츠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 똑같은 말을 합니다. 당신은 인간을 감당도 할 수 없게 자유롭게 만들어버린다, 그게 아니거든요. 진짜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국가적 퇴출연합, 지방자치적 퇴출연합, 생물학적 부모와의 퇴출연합까지 다 부숴버려요. 그래서 예수님은 잘못된 가족관계까지 끌어내버릴 수 있습니다. 누가 내 엄마 아빠냐?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가족법을 가지고 예수가 폐륜아 공동체 응징법으로 죽일 수 있는지 여부를 따져본 거예요. 폐륜아 공동체 응징법은 전통적인 부모의 효도관계를 일탈시켜서 내 부모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망나니 같은 공동체 문제아를 응징하는 겁니다. 신명기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 자녀라고 말할 때는 이런 엄청난 뜻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백성 내 백성이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뜻이 있습니다. 파라오가 압제하면 안 됩니다. Let my people go, 내 백성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내 백성은 절대로 파라오의 압제적 노동 안에 낮시간 대부분을 보내고 채찍 아래 등살 아래 철장 아래 갇혀서는 안 된다, 내 존엄한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Let my people go, 내 백성을 풀어줘야 한다, 이것이 모세의 쩌렁쩌렁한 종교잖아요. 모세의 종교가 이 세상 어떤 종교와도 다르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나쁜 종교는 예속상태에서 약간의 미세한 조종을 통해서 참는 것을 도와주는 겁니다. 모세의 종교, 하나님 종교, 예언자의 종교는 판을 깨버립니다. 내 백성을 노예로 부려먹는 이 체제를 박살내라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모세적 열정, 파토스가 폭발한 겁니다. 예수 안에는 적 모세가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는 엄청난 모세가 있는 거예요. 모세의 저항을 무한적분해보면 예수 언어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의 언어라는 것을 듣는 순간, 여러분은 당사자가 아니라서 몰라요. 우리가 만일 분봉왕이 되고 총독이 되고 대제사장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가 리히터 지진 9 정도가 오는 동요를 느낍니다. 당사자가 아니니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고, 이런 설교를 제가 여기서 할 필요가 없어요. 이건 사랑의 교회에 가서 해야 하는데, 이런 설교는 강남에 가서 해야 할 설교지 신대방삼거리에서 할 설교는 아니거든요. 온누리교회에 갑니다. 설교초청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의롭게 선지자 사역을 감당하시는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굉장히 줄을 쳤습니다. 이게 올무가 아닌가? 덫이 아닌가? 교란 시켜놓고 동영상촬영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6 25일은 3500명의 온누리교회 여자교우들 집회에서 강의를 하고요. 또 한 번은 장로님들만 모이는데 강의를 합니다. 둘 다 예언자적 사역을 의롭게 감당하는, 나를 들어 쓰시려 그러나? 내가 전성기를 맞이했는가? 그런데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성경말씀을 예수님의 언어를 정말로 밤새도록 진심으로 이해당사자인 기득권의 편견 없이 읽어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진짜 하나님 자녀로 대우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대화하세요. 내가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생각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언어가 큰 눈물과 감격과 깨달음을 주는지 알 수 없어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에 지배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민중자치와 자율공동체로 만들려고 했어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와서 형제자매의 우애가 지배하는, 로마제국을 영구적으로 추방하는 형제자매의 수평적 박애적 결속력이 탄탄한 공동체, 원래 모세 엘리야가 꿈꿨던 열두 지파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 거예요. 예수님은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의 이상을 실현하러 온 거예요. 이스라엘을 회복한다고 했어요. 이건 안 좋은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탐욕적이고 각축적이고 파편적인 개인들이 계속 무질서하게 각축을 해줘야만 강력한 권력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파시즘의 출연배경을 보면 무연결적 단자적 개인들의 끊임없는 불화와 갈등상태에서 폭력적 접근, 파시즘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이건 중요한 겁니다. 파시즘의 사회심리학적 출신배경을 자세히 설명한 책이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거든요. 정확하게 요한복음의 주제인데 무연결적 고립적 파편적 개인적 이해당사자들의 멈출 수 없는 부단한 갈등과 불화상태가 계속되어야만 강력한 악마적 권력이 들어와도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런 권력자 밑에 지배당하는 게 차라리 낫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형제자매들 우애관계가 세포적 연합 상태에서 탄탄하게 되면, 지방자치단체의 폭압적 행정지도가 필요 없게 되면 거기서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거든요. 하나님 나라는 ostracism 참주, 타자의 의지를 지배하고 부서뜨리고 예속시키는 무시무시한 권력 강한 개인이 필요 없는 사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폭압적 지도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기처럼 분산된 질료형태로 계셔서 공기가 있지만 공기의 존재를 압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 공기님 안녕하세요? 공기님 어디 계세요? 불안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공기가 내 허파와 혈관을 완벽하게 서포터하고 섬겨줍니다. 공기적인 분할, 공기적인 분산으로 자기의 신성을 다 흩어서 우리를 끊임없이 지탱시키시고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 같은 분, 그런 지도자가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거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굳게 결속된 사람만이 로마제국에 대한 항구적인 저항능력을 갖췄다고 봅니다. 하나님과 항구적 결합을 한 사람 + 이웃과 항구적인 우애적 결합상태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에게 로마제국적인 타자의 의지를 지배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권력적 지배, 타자의 삶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영원한 평화의 언약을 지켜서 다른 사람을 위협하지 않는 선한이웃이 되겠다고 결단하면서 선한 이웃끼리 결단하고 결속돼 있는 이 상태가 예수님은 로마제국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 거죠. 서로 사랑해야만 로마제국을 이길 수 있고, 서로 사랑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로마의 10군단 4군단 6군단 팔레스타인에 와 있는 4개군단보다 더 강한 힘은 서로 사랑하는 데 있다는 거죠. 이것이 예수님 가르친 것이고, 실현가능한 거거든요. 이걸 보고 비현실이라고 하면 안 되죠. 산상수훈처럼 살아버리면 로마제국은 영구적으로 존립할 이유가 없습니다. 로마제국이 막는 게 아니잖아요. 로마제국이 싫어하지만 로마제국의 법에는 아무도 이 이상 착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쌀을 갖다 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루에 눈물을 2톤 이상 흘리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범으로 처한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많으면 야수적 지배는 더 이상 안 된다, 많이 우는 사람들, 국가보안법 잠재적 위반자이다, 세월호를 보고 계속 울면서 센티멘탈한 얼굴을 하는 사람은 수류탄을 들고 가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 로마제국은 무얼 두려워하느냐? 로마의 폭력적 지배를 정당화해주지 않을 만큼 협동적이고 자립적이고 자활적이고 주체적이고 형제우애적 단합과 결속 속에서 아무도 세리가 되고 싶지 않는 사상, 굶어죽더라도 세리는 안 되겠다, 세리 자체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충원하는 일이 불가능할 때 일제의 지배가 어려웠듯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던 동양척식회사의 조선토착인관리들의 수리조합 서기들과 경찰치안 이런 모든 일에 조선인들이 아무도 apply 하지 않을 때 끝나는 거죠. 사실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유대인에 대한 지배가 유대인을 항상 잠재적 십자가형에 가둬놓고 있는 거거든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단체로 못 박힌 것은 아니지만 저항하면 십자가에 매다니까 유대인 모두는 로마제국 앞에서 잠재적으로 유대인다움을 유지하고 하나님 친백성다운 정체성을 찾는 순간 십자가에 못이 박힙니다. 유대인이 인간다움을 찾는 순간 십자가에 못 박히니까 잠재적 십자가형을 받고 있는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말, 유대인 공동체 개인의 분할된 운명을 한꺼번에 왕창 받는 것이 골고다의 십자가니까 유대인의 왕 예수가 맞는 거죠. 그런 뜻에서 예수가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겁니다. 유대인과 동일시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힘이 약해서 죽는 겁니다. 그런데 힘이 약해서 죽는 이 방식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폭력을 완전히 써야만 로마제국의 카드가 다 소진됩니다. 로마제국의 힘은 폭력입니다. 로마제국의 힘은 죽음의 관문입니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그 길이 로마제국의 권력, 최고무기가 얼마나 쓸 데 없는가,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가야합니다. 이렇게 아버지께로 가는 예수가 복제예수,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유대인의 운명을 송두리째 자기 것으로 영접한 후에 유대인에 의해서 로마제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이 죽음을 상징적으로 겪어야만 모든 십자가 잠재적 처형의 위협 앞에 있는 유대인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는 이 죽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이 죽음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죽음은 아버지가 나를 내팽개쳤기 때문에 죽는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팽개치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꼭 붙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영적으로 완벽하게 결속돼 있기 때문에 이 죽음이 가능한 것이다, 이 해석은 너무 깊죠? 못 알아들을 거예요. 몇 달을 고민해야 해요. 이건 아무도 못 알아들어도 괜찮아요. 그냥 힘이 없어 죽었다 해요. 이걸 깨달으면 엄청난 겁니다. 이번에는 새로 깨달았습니다. 요한복음을 몇 년 전에도 했고 일산두레교회에서도 했고 이번에는 요한복음이 진짜 어려워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부터 깨닫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그 생각이 뭔지 알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는 지금 엄청 깨달았습니다. 표현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진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공관복음서에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는 그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말도 맞아요. 고아처럼 버린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졌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칼로 찌를 것을 알고도 속박을 참아낸 모리아산의 이삭처럼,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인격적 신뢰와 연합이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칼에 도살당하는 십자가에 자기를 무한히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처형이 신적유기임과 동시에, 신적으로 내버려두시는 사건임과 동시에 이렇게 버려짐을 당하는 운명을 겪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결국 크게 보면 아버지 뜻안에 있는 거죠. 참 변증법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죄인의 운명을 송두리째 경험하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은 이처럼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에 버림받은 겁니다. 그게 죄인의 운명입니다. 그 죄인의 운명을 유대인이 경험하고 있고 그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인류를 대표하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예수가 죄 가운데 심판당해 죽어가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대신하여 내동댕이쳐집니다.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계속 확신하는 이유는 신적인 유기감, 하나님께로부터 자기가 버림 받았다고 황량한 유기의식상태, 이것이 바로 내가 아버지 안에 100% 순종을 표현하는 길은 버림 받은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내 신앙과 내 진실에 극대값이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 버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이 때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결속 유대를 창조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는 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 받았다는 그 순간마저도 아버지 하나님과 인격적 영적 결속상태를 창조해주는 영이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오는 영이 진리의 영입니다. 그 진리의 영이 알로스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다른 보혜사입니다. 다른 보혜사는 내가 고아처럼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도 사실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 고아처럼 버림받았을 때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격려 받는 순간이라는 거죠. 이게 너무 중요합니다. 고아처럼 버림받았다는 그 사실의 판단에서 중도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아처럼 버림받았다는 황량한 신적고독감 신적 유기감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이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믿도록 격력 받고 믿도록 위로 받도록 내 안에 와 계셔서 내 안의 반전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분이 또다른 보혜사입니다. 이사야 50 10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시편 139 8-12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나를 두른 빛이 온통 어둠이 된다할지라도 그 어둠도 하나님이 주장하는 어둠이라면 어둠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빛이 오히려 위험한 겁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너무나 깊습니다. 고아처럼 버림받았다는 느낌이거나 일상적 경험, 저는 요즘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아처럼 버림 받았다,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 고아가 얼마나 슬픈 건데요. 저는 고아가 얼마나 슬픈가 모르는데 제 자식을 키워보면서 고아가 진짜 슬프겠구나, 이런 사랑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람이 고아겠구나, 싶으니까 그때 비로소 고아가 슬퍼졌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하는 경건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장성하고 강건해보여도 우리 실존적이고 적나라한 모습은 사실상 신적안정감이 나를 덮쳐주길, 신적인 안정감이 내 인생의 천막이 돼 준다면, 신적인 태산 같은 평안이 우리 가정에 충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부부사이에 신적 안정감이 지탱해주면, 내 자녀와 나 사이에 결렬되고 파열이 가득 찬 우리 부모와 자식 사이가 신적 안정감이 지탱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것이 우리 모두의 갈망이죠. 사실상 목회자인 제가 볼때 세계 만민은 하나님에 굶주려 있습니다. 세계 만민이 찾는 게 하나님입니다. 세계만민은 찾고 있습니다. 그 모든 걸 다 받는 하나님이 주는 선물, 그걸 사람이 찾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선물에 굶주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확신이 있다면 전도하는 게 가장 쉽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믿으면, 우리 주변 사람들은 전부 다 하나님에 굶주려 있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석달에 한 번 전화합니다. 바빠서 만나지 못하는데 전화를 붙들고 3-4분 동안 말을 안 합니다. 회권아, ? 일 있나? 밥 한 번 먹을까? 먹자, 아무 말도 안 합니다. 너 하나도 안 변했네, 석달 전에 한 말 그대로입니다. 그 아이 사무실에 달마대사가 상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아내가 항상 1월에 받아오는데 사무실에 걸어놓으라네, 차관보위급 고위공직자가 되었고 고시 수석으로 들어간 친구의 인생입니다. 사무실도 족구장 하나만큼 넓은 사무실을 쓰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족구장 하나만합니다. 이거 너 혼자 다 쓰나? 우리나라 공무원들 회개해야 합니다. 차관은 얼마나 크고 장관은 얼마나 큽니까? 차관보 사무실에 달마대사가 있습니다. 이제는 다시 옛날 성경공부 해야지? 할게, 언젠가는 갈게,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와야지,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서 그러거든요. 밥 먹으면서 하는 말은 대화가 적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3분에 한 마디씩 합니다. 그 친구가 저를 보면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자기아들 성균관대 의대 다니는 이야기, 딸은 잘 있나? 한참 3분 있다가 잘 있다, 그 친구 영적갈증은 하나님을 굶주려 하거든요. 아직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올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자주 하는 걸 보니, 이 세상사람 중 하나님께 굶주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충족시킬 수 있는 영적 절대공백이 있거든요. 우리가 채워야 하는데, 얼마나 좋은 교회가 놀라운지, 좋은 교회 다니세요. 우리가 좋은 교회로 옮겨가야 한다고 했죠. 좋은 목사님 찾아야 하고 우리는 다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메시지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박애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고, 그게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내 계명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누가 신적안정감에 덮침을 당하느냐? 예배와 이웃 사랑에 신실한 실천, 예배한다는 말은 내 노동으로 나를 구원하는 시간을 일주일에 한 번씩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주일 6일 동안은 자기 노동으로 자기구원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온전히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이때는 하나님의 생명력에 신적주유를 신적 영양분을 공급받고, 하나님이 나를 사역하도록 영적인 성령의 역사에 무한노출을 경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의 생명에 노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고 내 고요한 진심을 토해내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한다, 비대칭 관계에서 사랑한다는 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대등한 남녀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unequal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를 기뻐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 번 쉬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노동과 안식의 리듬을 잘 지키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새벽에 기도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가족과 이웃에게 지극히 온유한 박애적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인하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우리가 다 지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탁본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모습이 프로타주가 돼서 드러납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이 나타난다는 말은 하나님 사랑의 열매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에게 영적친척이 많아지고 그에게 기도응답의 빈도가 많아지고 그가 하나님의 안정적 인도를 받는다는 증거가 수없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덮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 나에게 이 교회에 나오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거 아니야? 혹시 이단 아니야? 이런 불안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공교회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에 강력하게 내가 붙어 있기 때문에 이 공동체에 소속된 행위 자체가 하나님 사랑을 주유 받고 하나님 사랑을 공급받고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금방 알게 됩니다. 우주적 공교회로서 교회에 소속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라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무차별 사랑의 실천이 가능합니다. 이게 바로 선교이고 흘러넘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런 자에게 그런 동아리에게 내가 나타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나의 이름으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곳에 두 사람 +, 삼위일체적 연합이 일어나게 되겠다, 구역공부라는 게 하나님 사랑의 임재를 테스트하는 겁니다. 구역공부 또는 부부관계 또는 부자지간 이 모든 관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적인 지지대가 되어서 우리 인생을 지탱하는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자아의식, 내가 유대인의 왕으로서 유대인이 겪는 총체적 무기력감을 대변하면서 죽어간다, 맞다, 그러나 나는 죄 없지만 유대인의 죄를 대속했고 유대인의 죄를 졌기 때문에 유대인이 받는 심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버지 뜻이기 때문에 내가 무력해서 이 자리에 서는 게 아니라 유대인의 죄를 대신 지라고 명령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졌기 때문에, 나는 무기력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짐을 진다, 지금 패배해 버림받아 죽는 것처럼 죽겠지만 나는 아버지께 돌아간다,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가장 큰 증거가 이것이다, 너희가 조만간 나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나의 임재를 일상생활 속에 그대로 경험하는 오순절 성령,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마자 제자들은 영으로 오실 예수님을 일생동안 모시고 살면서, 영으로 오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 개성을 그대로 한 채 각장의 개성을 가진 채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엄청난 유리한 지점입니다. 기독교가 진짜 너무 대단하구나, 진짜 대단하구나, 성경 너무 대단하구나, 예수님 만세, 한기총 해체 예수님 만세, 교황의 몇 마디도 우리를 눈물 나게 하는데, 교황의 억만 배 더 영적 역량인 예수님의 말씀이 있잖아요. 시간이 없으면 예수님 사랑을 못하잖아요. 일단 예배를 드려야 하잖아요.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마다 말씀 보는 게 좋습니다. 제가 새벽에 너무 많이 은혜를 받는데요. 예수님이 진짜 너무 amazing 하시다는 생각이 들고요. 예수님 말씀 한 말씀이 이해했다고 지나가서는 안 되는구나, 또 다시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탐구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잔여분을 또 남겨놓는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고아 같이 내버려둠을 당하는 황량한 삶의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운명에 맡겨 살지 마십시오. 예배를 회복하고 이웃 사랑의 삶을 사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신적인 안정감을 가지고 덮쳐주셔서 아버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강력하게 결속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피곤하시고 곤고하고 초점도 없고 영적으로 냉담해진 여러분도 요한복음 읽어가면서 시편 읽어가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랑의 이중계명에 투신하다보면 반드시 고아 같은 황량한 고독감 대신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옆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심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종횡무진 역사하시는 곳이 원래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많아지도록 기도합시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적힌 유대인의 왕 죄패를 생각할수록 우리 가슴은 먹먹해지고 우리가 져야 할 유대인의 죄패를 홀로 지고 가시면서 당신 자신은 신적 고독감과 유기감에 시달리면서도 유대인의 죄를 대신해서 죽임 당하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이라는 생각 때문에 참아내셨던 것처럼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자기 죄와 상관없이 우리를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죄책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숨 가쁘게 오르는 딸들도 많고 스올의 땅에 내팽개친 것 같은 고독감도 많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스올에 떨어지고 음부에 내려가고 십자가를 지는 이 일도 기꺼이 아멘으로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게 해주실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우리가 텅 빈 공허감 속에 살지 않고 하나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열납 되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 영이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우리 옆에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을 힘 있게 일주일 내내 붙들어 주시고, 험악한 시국가운데 머리털 하나 손상당하지 않게 지켜주시고 우리 교우들 자녀들 직장들 다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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