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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3장 31-38절

by 【고동엽】 2022. 2. 14.

8 4일 주일예배 2 _ 요한복음 13 31-38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은 당분간 여기서 끝납니다. 앞으로 22주 동안 가향교회 처음 시작할 때 하려고 했던 새 교우 전입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이 교육은 22주간 계속되는데 구원론 8주 사도신경 8주 주기도문 십계명, 이렇게 되겠습니다. 22주 교육을 마치면 여러분께서 우주적 공교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세례로 연합된 고수교육을 받는 것이 되고,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례교육을 받는 셈이 됩니다. 예수를 믿고 아직 세례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 22주 교육을 받고 2년 이상 주일예배를 꾸준히 참여하여 심사를 받고 나서 3년 만에 세례를 받게 되겠습니다. 세례는 공개적으로 세례의식을 하는데 세례 고백문을 낭독하고 세례를 받겠습니다. 가능하면 물에서 주려고 합니다. 한강에서 주려고 하는데, 세례는 원래 물에서 해야 합니다. 장로교 세례는 너무나 영적의미가 잘못된 것입니다. 22주 교육을 받으면 가향교회 출신이 됩니다. 우리는 등록에 있지 않고 교육에 있습니다. 가향교회 출신이라는 말은 이 교회에서 22주 교육받았기 때문에 다른 교회 갈 때는 이 교육 안 받았다고 직분에 나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또 반대로 우리가 인정하는 이단이 아닌 정규교육에서 우리에게 옮겨올 때 담임목사님의 이명증서를 가지고 오면 우리교회에 오랫동안 안 다녔어도 우리교회 직분을 바로 맡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럼 우리교회는 등록제도가 없습니까? 우주적 공교회에 등록한 사람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두 번 등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 등록돼 있기 때문에 또 한 번 등록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우들을 등록해서 사유화하는 것, 회계 명부상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인두세를 요구하기 위해서 등록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등록하지 않을 자유가 있고 주님께만 끝까지 소속될 절대적 소속감을 누릴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절대로 장부를 안 줘도 됩니다. 교회에서 누가 사진 찍자고 해도 사진 안 찍을 초상권 보호의 권한이 있습니다. 윤구형제가 사진을 찍자고 해도 여러분께서 자신이 없으면 사진을 안 찍어도 되고, 혹시 지명수배를 당한 상태면 사진 안 찍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초상권이 중요하지 않다면 찍는 것 또한 막지 않겠습니다. 22주 교육을 마치면 영적으로 소생함을 덧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능성입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연속극 보고 TV보는 시간이 아까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갑자기 교회가 좋아지고 심지어 예수님이 가깝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이 교육을 받고 나가면 딴 교회 갈 때 저한테 전화 한통만 하면 됩니다. 저 교회 옮깁니다, 그러면 제가 22주 교육증서를 찍어다 이 분은 22주 교육 받았습니다, 이단 아닙니다, 이렇게 드리면 우리교회에 머문 기간만큼 여러분이 옮긴 교회 기간에 합산되어 장로 투표할 때 유리합니다. 알겠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좋은 교회에서 우리교회에 옮겨 왔다면 이분은 좋은 교회에서 왔고 이사를 왔기 때문에 왔다면 이 교회 다닌 것과 똑같이 대우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명증서가 있는 사람들, 운영위원회 당회 또는 담임목사의 서명이 들어간 신원보증서가 있는 사람들은 우리교회에 다닌 것과 똑같은 효과로 직분에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노릴 만한 직분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운영위원회라는 고위직이 있습니다. 두 달에 한 번 하는데 아무라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구역장이라는 고위직이 있는데 저랑 바이블 스터디를 한 달에 세 번 정도 하는 고위직입니다. 청소 및 배식에 참여할 수 있는, 미가엘 천사가 했던 수고의 고위직이 있습니다. 하고 나면 주님께 가까이 가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 교육은 앞으로 유현미 집사님께서 이걸 잘 풀어서 교육오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바로 녹취 상태가 올라갈 겁니다. 그걸 보시면 됩니다. 다음 주는 주기도문 3, 십계명, 구원론은 왜 제일 마지막에 하느냐? 구원론은 여기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좀 더 완전히 잊어버려야만 새로 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기억이 생생할 때 들으면 재탕이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구원론은 되도록 빼서 완전히 처음 들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 겁니다. 물론 내용은 완전히 새롭습니다. 저는 항상 본문은 같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1, 2부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1, 2부 내용이 30%만 같고 70%는 완전히 다릅니다. 왜 그렇죠? 서비스입니다.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1, 2부가 똑같다면 완전히 automatic 전자동으로 녹음기 튼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일부러 예화도 다르게 하고 그렇게 합니다. 장로님 그렇죠? 1, 2부가 항상 다르고. 두 번 참석한다고 피해의식 안 들죠. 요한복음 13장의 마지막 장면은 gloomy 합니다. 왜냐하면 분위기가 쳐지는 분위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정적인 감정을 피력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적 감정이 피력되면서 14 1절까지 이어지는, 수학적으로 말하면 하강곡선을 그립니다. 13 21 '심령이 괴로워' 죽게 되었다는 격한 표현을 씁니다. 주님이 교란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마음을 잡지 못합니다. ? 제자 중 한 사람이 팔기 때문에, 주님은 배신감을 다루지 못합니다. 그다음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주님의 3년 동안의 모든 교육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제자들의 집단권력 의지로 주님은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발 씻어주지 않는 제자들의 엄청난 무례와 오만과 교만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depress된 마음, 주님의 착 가라앉은 마음을 결정적으로 완성시켜 준 사람이 제자 중 하나, 팔 사람 유다입니다. 유다는 주님이 주시는 최선의 우정의 표시였던 떡을 받고 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유다는 밤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어둠을 몰고 올 아들이 돼버린 겁니다. 그래서 유다가 나가자마자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이런 말을 하십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이 말씀은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주님은 이번 유월절이 아니라 딴 유월절까지 생명을 유예시킬 수 있는 chance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3년 만에 반드시 돌아가셔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3년 만에 유월절에 반드시 돌아가신다는 약속은 안했습니다.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포괄적인 약속이 있었을 뿐입니다. 유다가 밤의 심장 속으로 피하여 어둠의 군대를 데리고 올 것이 예상되었음으로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이때 영광을 받았다는 말은 mission completed 이런 뜻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완료단계에 들어갔다, 주님은 자기를 파송하여 보낸 바 그 목적 mission 사명을 완수할 때 자기가 영광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노리는 부귀영화를 보고 그걸 획득함으로 영광스럽게 느끼지 않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함으로 영광을 느꼈습니다. 주님이 영광을 느끼는 그 장면은 이렇게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가 이 세상 밑바닥에 쳐진 인생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벗이 되고 목자가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100% 대현하고 체현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보낸 목적도 성취됐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또 자기 때문에 영광을 받게 되신 겁니다. 참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로 인자 예수의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어집니까? 신문에 나는 권력을 가지고 비리를 범한 그 사람들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고 이 세상을 우주적 안정감이 들게 통치하는 사람이 누구냐? 인자되신 예수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사람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고난의 아들, 메시아적 굴욕을 감수하면서 손해를 감수하면서 정직과 의로움으로 이 세상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이 세상을 우주적 안정감으로 지켜가기 때문에 통치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잘 안 믿어질지 모릅니다. 누가 통치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모택동 스탈린 시저 카이사르 나폴레옹, 이런 사람이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죠? 하나님 앞에서는 인자되신 예수님, 가난한 사람 갇힌 사람, 눈 먼 사람, 장애인, 귀신 들린 사람, 이 세상에 정상적인 사람에서 밀려난, 주물을 받았다가 쓰레기가 돼버린 outcast, 금속을 만들 때 쓰다가 남은 쇳덩어리 부스러기를 우리는 outcast라고 말합니다. cast 주인공이죠? 영화배우 뽑을 때, outcast 뽑히지 못한 자, 정당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쓰잘 데 없는 일로 처리당하는, 막장 인생으로 처리 당하는 이런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마음이 온통 쏠려 있는 그 자들과 인생을 섞여 살았던 그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은 겁니다. 이건 너무 다릅니다. 요한복음 언어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와 다릅니다. 요한복음판 레알 사전이 필요합니다. 영광, 부귀영화, MB처럼 사는 것, 요한복음의 영광은 이 세상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가면서 정직과 자비로 인생을 개척하는 것, 인생의 outcast들과 각광받지 못한 자들과 인생일촌이 되어 자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의미에서의 영광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장애아이를 둔 엄마 아빠의 마음과 같습니다. 장애아이를 둔 엄마 아빠는 자기가 낳은 자녀기 때문에, 자기 심장과 가슴을 뚫고 나온 자녀이기 때문에 아무리 장애가 중증이라도 사랑하기를 거침없이 쉴 새 없이 합니다. 그게 아버지 하나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마음은 영광이 가려진 사람에게 신적영광으로 조명을 했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듬뿍 확신시키기 위해서 가장 좋은 독생자를 보내주십니다. 캘커타의 빈민 속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가족도 돌보지 않고 씨족도 가문도 돌보지 않아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가장 성스러운 알바니아의 수녀였던 테레사 수녀가 그들의 몸을 씻기고 있습니다. 알바니아의 수녀가 몸을 씻어주기 전까지는 그들은 버림받은 몸입니다. 가장 성스럽고 하나님 영광이 가득 찬 그 수녀가 씻어주는 순간 하나님과 접촉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알바니아출신 테레사 수녀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너무 비참한 사람들과 일생 동안 살다보니까 완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렸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을 감득하지 못하는 무신론적인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무신론적인 저항언어를 터트린 이유는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임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신적 버림받음, 신적 유기감, 방치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사랑을 해도 거친 사람, 비참한 사람과 인생을 보내본 사람은 압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에서 떨어진 자처럼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운명과 하나가 되고 나면 내가 버림받은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이 A. J.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에 나옵니다. 청소년은 이 책을 읽어야죠. 이건 중국에 가서 선교하다가 무신론자가 돼 돌아와 은퇴하는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선한 선의를 가지고 중국에 선교하러 갔다가 모든 걸 다 잃고 오는 신부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습니다. 이 사랑은 애욕에 가득 찬 사랑이 아닙니다. 순수한,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딸을 지켜주지 못하고 또 잃었습니다. 교인들을 홍수와 강도떼에 다 잃고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중국에 있던 흔적, 그 애쓴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병든 몸만 남아 있습니다. 병든 몸만 이끌고 고향에 돌아옵니다. 돌아왔는데 선교에 대실패를 했기 때문에 선교부에서 이 사람에게 연금을 줄 수 없습니다. ? 아무 실적이 없기 때문에, 다 날아갔기 때문에, 사진 한 장도 없고 기록 한장도 없습니다. 강도와 홍수에게 다 당했습니다. 이 사람이 소설 첫 장과 마지막 장면에 안젤모 신부라고 하는 자기가 신학교 다닐 때 권력의지가 강했던, 가톨릭 고위성직자가 된 신부를 찾아가 자기 연금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무신론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 그 인생은 욥처럼 가장 선한 선의였지만 그가 받은 대접은 거절과 버림받음과 냉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말을 한 것은 예수님이 갈릴리 제자들에게 쏟았던 모든 선의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던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토록 남을 도울 때는 기적을 베풀어주셨건만 당신 자신이 고난을 받을 때는 어떤 호의도 베풀어주지 않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것을 묵묵히 냉정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 그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았다는 이 위기감이 예수님의 심장을 관통한 겁니다. 이건 분석해봐야 합니다.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많이 머물고 순종을 많이 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무서운 영혼의 밤입니다. 참 희한합니다. 온 생애를 바쳐서 사랑하고 나면 텅 빈 무신론적인 상념만 남는다는 말이에요. 이게 역설이에요. 이 사랑의 역설을 경험한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3년간 제자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헌신을 다했고 주와 스승이 되어 모범을 보였습니다. 주님은 3년간 모범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온갖 겸손을 다 가르쳤지만 이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였고, 서로 발을 씻어주지 않았고, 제자 중 한 사람은 파는 자가 되었습니다. anti climax 하게 인생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상태, 신적유기상태, 유기감, 내가 버림받았다는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건 진실한 경험이었고 진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죄인의 마음과 100% 하나가 된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모든 무신론의 영토에 집어 떨어진 자들의 그 마음을 주님은 아신 겁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못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지금 한국에 살면서 하나님 사랑이 충만하다고 느끼는 것은 가식된 것이고 최면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있다면 쌍용자동차에 25명이 저렇게 죽었는데도 정의로운 재판관이 하나도 안 일어나요? 저렇게 국정원이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나쁜 짓을 많이 한 그런 사람들이 경향신문에 의하면 10 0으로 이겼습니다. 국정원 비리를 NLL물타기로 완전히 A당이 B당을 10 0으로 눌러서 정치에서 성공합니다. 모든 비리를 더 큰 논리로 포장하여 국민을 가립니다. 우리나라 공중파는 정치와 공적질서에 관한 토론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TV연예 스포츠 오락, 이것이 99%를 차지합니다. 완전히 뚱뚱하고 머리 짧게 깎은 남자들이 어디 가서 텐트치고 번지점프 하는 이런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다음포털 네이버포털 전부 연예인 치정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독일 JDF나 영국 BBC 같은 곳은 7시 틀자마자 바로 토론이 벌어집니다. 모든 중요한 토론은 <네팔 타임즈>도 정치를 다룹니다. <인디언타임즈>도 정치를 다룹니다. 우리나라 신문만이 성과 쾌락의 노예가 된 시민들을 상대로 방송을 합니다. 유재석과 강호동을 무인도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스타들이 너무나 많은 연봉을 받습니다. 박지성이 공차는 축구 한 번 볼 때마다 나이키 신발이 1만원씩 올라갑니다. 그것도 모르고 불쌍한 사람들이, 박지성이 나이키 신발 올리는 것도 모르고, 김연아가 에어컨 값 올리는 것도 모르고 얼음에 안 넘어질 때 박수칩니다. 엉덩방아 찧고 광고효과를 낼 수 없는 사람이 돼야만 서민들이 좋아집니다. 바보 같은 서민들은 박지성이 축구 한 골 넣을 때마다 나이키 가격이 올라가고 나이키 가격은 매년 만원씩 올립니다. 그런데 그걸 이해를 못합니다. 배용준이 근육 한 번 늘릴 때마다 영화표가 올라갑니다. 얼마나 잘못됐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 믿은 집안이 많습니까? 얼마나 영적 명문가정이 많아요? ? 기독교 인구 9.4%에 안 되는 경남에서 태어난 제가 이렇게 급진파가 돼야 합니까? 이 급진파는 다 어디 갔습니까? 이건 우리 제자, 손진운이가 한 말입니다. 왜 기독교 인구가 9.4% 밖에 안 되는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교수님이 가장 급진파가 됐습니까? 한국교회는 아주 엉망입니다. 그런 한 급진파가 있습니다. 왜 박철수 목사 강진구 목사입니까? 믿은 지 일대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 유일한 급진파가 되었느냐? 한국교회 그 많은 목사님이 어디 가고 몇 사람밖에 안 남았냐고, 이게 대학교 2학년 학생이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밤의 아들 유다가 나가자마자 밤의 세력들이 예수님을 포획할 것이고, 예수님은 그 밤 어둠의 세력들에 포획당해서 죽음의 길로 끌려갈 것을 아시고,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올해 내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치닫는 인생들을 돕기 위해서 예수 때문에 선동해주는 자 때문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습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순종의 화신들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정직과 의로움 때문에 우주적인 안정감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니까 사실상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돕는 공동통치자입니다. 정직의 화신, 깨끗함의 화신, 청렴결백한 공무원, 뇌물을 받지 못해 아직도 연립주택에 사는 경찰청장, 이런 분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는 주와 그리스도 같은 독생자급 인물이란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의 종들이라는 말이에요. 저는 이걸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고민됐습니다. 정직한 경찰청창, 뇌물을 받지 않아 25평 국민주택에 사는 국세청 7급 공무원들 이런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공동통치자입니다. 깨닫기는 했는데 누가 이걸 믿어줄 것인가 때문에 지하실에서 많이 우울해했습니다. 벌써 여러분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참 희한하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안 믿잖아요. 전군표 청장은 세 번 검사 만납니다. 이분은 검사를 매우 좋아합니다. 송광조는 입원했죠. 검찰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거래와 민형사상에 관련된 모든 것은 전부 다 뇌물이 들어갑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입니다. 결국은 돈 앞에 속수무책인 대한민국, 돈 앞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돈의 강력한 세상 앞에 정신이 삭아버린 대한민국 사람들, 이런 사람들 사이에 사니까 저는 믿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통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북한에서 저렇게 3대 세습이 일어날 리가 없지, 왜 하나님은 북한동포를 전혀 안 돌보실까? 북한 동포를 낭패로 몰아넣고 저렇게 나쁜 사람들이 3대에 걸쳐서 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통치를 느끼지 못하는 버림받았다는 유기감이 들만큼 대한민국이 삭막해지고 건조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주님 마음이 오히려 이해가 됐습니다. 이럴 때 우리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나 역설적입니다. 어둠의 자식 유다가 밤속으로 뛰어들자마자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표현이 너무나 역설적입니다. 이제 인자는 제자가 데려오는 어둠의 세력들에 포획돼서 십자가의 길로 갑니다. 십자가의 길로 가서 죽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신적유기감 방치감을 피력하면서 죽습니다. 그걸 보고 주님은 영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고, 네가 죽은 후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 승천하여 우편보좌에 앉혀 주겠다는 약속을 주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응답했습니다. 이 삼일간의 빈틈이 중요합니다. 죽기는 죽지만 굴욕의 죽음을 당하지만 삼일 후에 영광스러운 부활을 한다는 것, 이 삼일 동안의 과도기가 우리에게 suspense를 주고 불안을 주고 우리가 불신자가 되게 만드는 영역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삼일 만에 예수님에게 응답했습니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시켜서 세계 만민의 모든 입술이 너를 주라고 고백하는 날을 오게 만들기 위해서 네게 굴욕의 길을 걷게 했다, 라고 응답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목적은 바로 사랑하는 그 일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이 박힌 사람들, 지금은 주님처럼 죽음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없지만 그 후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부활 승천하여 오순절 성령을 보낸 후에는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약속에 비춰볼 때, 서로 사랑하는 일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힌 후에 오순절 성령을 주님의 우편보좌에서 파송하신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그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네가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함으로써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내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올라가서 오순절 성령을 파송한 후에야 여러분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율법의 요구를 따라 행하는 영광의 영을 받고나서야 감히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누가 들었습니까?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여서 서로 발도 씻어주지 않고 서로 권력을 부리려고 했던 사람들 사이에 주신 명령입니다. 여러분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보다 훨씬 작은 자처럼 느껴지면 사랑, 구푸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크다고 하는 허위의식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발 씻겨주기 보다는 발 씻김 당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해야 할 그 사람 앞에 내 몸을 구푸려서 발을 씻겨줄 만큼 내가 축소되는 경험을 자유자재로 성령 안에서 한다면 서로 사랑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오히려 이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 자체가 사랑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은 인류 사랑보다 어렵고,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피골 상접한 어린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끼리는 잠재적 경쟁자, 비교열등 비교우등 사이에서 오락가락 할 수 있는 비교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일흔 번에 일곱 번 씩 490번씩 용서하면서 너그럽게 참아가면서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이가 좋지 않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요한이 주의 우편과 좌편에 자기 형제가 앉겠다고 하니 베드로를 비롯한 열 제자가 분기탱천하여 적개심을 드러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마자 사도행전 3장에서 오후 3시에 요한과 베드로가 둘이 손을 잡고 기도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만 나옵니까? 요한이 쓴 <요한복음> 전체에 보면 베드로가 수제자라는 걸 암시하는 구절이 너무 많습니다. 베드로가 한 실수 중에서 낯 뜨거운 실수를 전부 다 빼 준 사람이 요한입니다. 베드로 자신의 실수를 노골적으로 가장 많이 기록한 것이 마가복음 마태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통역자였던 마가가 쓴 기록이었으니까 베드로의 구술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너무나 실수를 많이 하는 베드로가 나옵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곧이곧대로 받아 적은 사람이 마태와 누가인데 요한은 베드로의 실수를 많이 줄이고 주로 대답 잘하는 베드로, 주님을 놀라게 하는 천재적 베드로가 번뜩번뜩 나옵니다. 쓴 사람이 사도요한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내내 베드로야 말로 진짜 영적으로 영민한 사람이다, 베드로의 가장 하이라이트를 소개하는 사람이 요한복음 6 67-68절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는 안 나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엄청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해서 위로하는 장면입니다. 십자가 지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이런 말은 다 뺐습니다. 우리 베드로 대단하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것을 암시하는 본문이 나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가 AD 64년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음을 암시하는 본문을 적은 것은 사도요한밖에 없습니다. 사도요한과 베드로가 완전히 한편이 된 겁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로 수제자급이고 요한은 애제자급입니다. 애제자와 수제자가 있을 때 권력관계가 복잡합니다. 수제자는 자존심이 있어서 아양을 떨지 못합니다. 애제자는 그 빈틈을 노려 아양을 떨면서 주님의 품에 의지해서 스킨십도 하면서 살갑게 합니다. 수제자는 그렇게 못합니다. 애제자 요한, 수제자 베드로, 영적 총명과 탁월함에 있어 베드로는 탁월했습니다. 베드로는 나이가 스물이 넘었습니다. 요한은 나이가 스물이 안 됐습니다. 어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사이가 좋게 나온 것은 요한복음만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정말 사이 좋았다, 빛나는 사도요, 요한의 제자였던 이그나티우스 안디옥이 베드로를 엄청 칭찬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클레멘트라는 제자를 남겼고 요한은 이그나티우스 안디옥 폴리갑이라는 멋진 제자를 남겼는데 두 제자들이 또 친합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어떨까요? 사도바울의 성격도 상당히 strong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시몬 게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바리새 출신 기독교인들이 오니까 베드로가 황급하게 밥 안 먹은 것처럼 하니까, 그 장면을 보고 바로 사도바울이 혼을 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아, 혼내는데 베드로가 그때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긴장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AD 58-64년경에 짧게는 4년 길게는 6년 정도 교부들에 의하면 로마에서 동역을 하는데, 그 동역의 첫 장면에 바울이 베드로를 먼저 초청해서 카타콤에서 같이 사역을 하는 증언이 나옵니다. 베드로후서 3 15-16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사도바울의 편지를 인정하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렸던 요한과 바울을 존중합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이 말은 정확하게 수건으로 허리를 동였던 요한복음 13장 장면을 방불하게 하는 언어적 표현이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런 말을 베드로가 하는 것을 볼때, 그렇다면 베드로만 바뀌었습니까? 사도요한도 엄청 바뀌었습니다. 사도요한은 별명이 우뢰의 아들입니다. 천둥벼락의 아들입니다. 성격이 너무 급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너무 기각 막히셨습니다. 자기랑 오래 있으면서 이런 이상한 기도를 한다고 하니까 우뢰의 아들, 천둥번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그렇게 성격이 굉장히 괄괄했던 요한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서로 사랑의 도를 완전히 구현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당장 주님의 극한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수 없지만 그 후에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숱한 감화감동을 허락하시면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하다가 십자가를 지는 고난까지 행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갈 수 있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우편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주와 그리스도 계열의 신자는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통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통치하는 사람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통치하는 사람이에요? 발을 씻김 당하는 사람이 통치합니까? 발을 씻고 마대잡고 수건 잡고 있는 사람이 통치합니까? 발을 씻어주는 그 자가 인자의 영광을 누리는 자입니다. 목사님 좋다고 칩시다, 자발적으로 발을 씻기면 왕이라 합시다, 자발성이 없는데 내가 억지로 발을 씻겨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무엇이죠?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좀 너무 곡해하는 것 아닙니까? 그 방법 외에는 달리 해석이 없어서 그렇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주 받았다고 할 겁니까? 나는 씻기 씻은 발을 씻습니다, 나는 저주 받은 게 맞나요? 이렇게 물으면 아무래도 당신 저주 받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가 목사로써 말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당신이 씻기 씻은 발을 씻는 것도 왕적 위엄과 기품을 단련시키는 뜻이 있는가 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죠. 안 믿어지면 믿음 달라고 해야죠.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가까운데 원수가 있고 내가 씻고 싶은 발이 아니라 쳐내고 싶고 작두로 잘라버리고 싶은 발이 있겠죠. 그러나 모든 역겨운 인간관계 안에서 마저도 내가 때때로 사랑의 기품을 훈련받기 위해서 굴욕적인 낮춤을 해야하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런 포괄적인 낮춤, 십자가의 낮춤을 통하여 이런 굴욕적 경험도 재해석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일주일 내내 사는 동안 사랑하다가 좌절하여 주님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는 낭패스러운 일을 경험하더라도 베드로는, 저 이런 사람입니다, 저 세 번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목자로 거듭났지 않습니까? 저도 세 번 부인한 사람, 주님과 함께 패기와 호언장담으로 따라가다 실패해 넘어진 자입니다, 세 번 부인한 저도 주님과 하나가 되었고 회복되었듯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모든 미래의 독자들이여 나를 보고 용기를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복음 13장의 주제입니다. 마무리 하면 13장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님의 종과 제자가 되는 길에 실패한 사람마저도 주님은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섭리가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뉘앙스가 오늘 본문에 있다는 겁니다. 다음 주부터 전입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좌절된 사랑의 mission에서 실패한 좌절의 현장에서도 따라갈 수 있는 힘을 후에는 허락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 발자취를 가깝게 쫓아가는 길이 매우 힘들고 고달픕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부인하는 엄청난 간격을 압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도 사실이고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여 주님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엄청난 두 사실 사이에 저는 마음이 갈갈이 찢기고 아픕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고백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고백이 되도록 서로 사랑하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세상에서 일하면서 많은 힘든 여정속에서도 직장에 신실하게 출근해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으로 바쳤습니다. 귀한 물질 하나님 친백성 살리는데, 교회 안팎에서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 자녀를 살리는 데 거룩하게 낭비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일터를 찾기 위해서 문 두드리는 아들딸이 있습니다.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아들딸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도와주시기를 원하고 그들이 하루에 한 데나리온 벌어 집으로 돌아가는 감격을 누리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새생명을 잉태하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정은자매님과 박선미 자매님과 임지영 자매님을 축복해주시고, 그들이 해산하는 날까지 아름다운 태교를 실시하며 해산하는 순간에는 순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태아들이 하나님과 부모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이 세상에 감히 태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특별히 유학가는 김현준 형제 박혜윤 자매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가난과 고독 속에서 돌베개를 베고 가는 야곱의 초행길 같은 고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주님 하나님만 참 아버지 된다는 것을 그들이 실감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상의 유력자들 가문이 많고 지상의 물질을 공궤받으면서 가는 유학생들도 있지만 오로지 하나님만 믿으면서 하나님 하늘의 환상을 믿으면서 가는 아들도 있사오니 주님이여 이 부부를 복주셔서 금위환양할 때까지 주님께서 임마누엘로 지켜주소서. 주님 군문에 가있고 출장 가 있거나 해외 여정 중인 교우들 있습니다. 머리털 하나 손상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우리 교우들에게 새 교우들을 영접하는 마음 주시고, 우리 새 교우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화가 임하여서 이 교회의 형제자매들과 사귈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리고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일주일 내내 사랑의 미션에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주님 따라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유학을 떠나는 지체들과 태아의 출산을 기다리는 지체들과 오늘 사랑의 미션에 도전하기로 결단했던 모든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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