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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장 21-30절

by 【고동엽】 2022. 2. 14.

7 28일 주일설교 2_요한복음 13 21-30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요한복음 13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27절에 보면 마귀라는 말 대신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생각을 넣은 단계를 지나서 사단이 직접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어떤 진전이 있습니다. 생각 단계에서 사탄에 협조하는 단계가 있고, 아예 사탄이 유다의 인격을 통째로 장악해서 유다의 행동을 선택의 여지없이 만들어버리는 단계가 있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 한 가운데서 벌어진 배반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양육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보내는 생애 마지막 날에 지리멸렬하는 걸 보고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심령이 괴로워서 증언했습니다. 11 33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12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11 12 13장에서 계속 예수님께서는 죽게 되었다는 말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들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자체로 죄 없으시고 최선을 다했지만 예수님이 길렀던 제자들은 지리멸렬했습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식탁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예수님이 기어코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누가 크냐는 논쟁에서 섬기는 자가 으뜸이라는 말, 으뜸이 되려고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며 친히 둘로스, 몸종이 되는 시범을 3년 내내 보였습니다만,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식탁을 심히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렀던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에게 네 번째로 중요한 직책을 부여받았던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웠습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괴로움입니다. 치를 떤다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부르르 떠는 겁니다. 주님이 배신당하는 감정, 당신께서 가르친 대로 행해주지 않는 제자들의 집단적인 배신행위가 주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여러분의 선한 의지와 선한 모든 의도가 모질게 배척당하는 경험을 하면 괴롭겠죠. 우리 주님도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아십니다. 질고를 아시는 분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이 마귀의 생각인데, 이 마귀는 디아볼레입니다. 성경에서 귀신은 다이몬, 성경에서 예수님과 적대하는 영들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다이몬 앞에는 더럽다는 형용사가 붙습니다. 더러운 귀신입니다. 왜 더럽다는 말이 붙느냐면 중립적인 귀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 다이몬, 그 다이몬은 영입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영이라고 했던 다이몬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더러운 귀신으로 분류가 됩니다. 디아볼로, 디아볼레, 마귀라는 존재가 나옵니다. 마귀와 귀신의 특이점은 디아볼레는 단수로도 쓰이고 복수로도 쓰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항상 복수로 쓰이는 건 아니지만 귀신들 대부분은 집단으로 활동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절대 단수로 쓰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과 마귀와 귀신은 일종의 삼층 위계질서를 가지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마태복음 12 43절 이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말은 인간의 영과 혼은 귀신의 거주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발동하는 의지와 지성의 힘 바깥에 귀신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존재. 영적인 힘에 노출돼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는 인간이 받았던 교육과 교양만 작용하지 않고 인간이 예기치 못했던 태풍과 같은 귀신의 힘에 인간이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무서운 겁니다. 마귀가 생각을 넣었을 때는 유다가 저항할 수 있습니다. 생각단계에서 마귀가 유다를 테스트합니다. 유다가 마귀생각을 합치하여 자기 의지로 완전히 영접했을 때는 사탄이 아예 유다 안에 들어가서 유다의 인격을 접수해버립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의 뚜렷한 개별성이 증가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면 내가 독특하게 과시할 수 있는 개인기와 재능이 꽃이 핍니다. 그런데 귀신이 우리 안에 오면 귀신은 우리 인격을 접수하고 장악하고 인격성과 개체성을 파괴해버립니다. 심지어 귀신들린 사람들은 목소리까지 바뀝니다. <엑소시스트>라는 린다 블레이어가 나왔던 영화에 보면 소녀가 귀신이 들려 남자 목소리를 냅니다. 이건 70% 이상 사실입니다. 거기서 피 색깔이 녹색으로 나오는 건 사실이 아니고, 그것 빼곤 다 사실입니다. 그다음 귀신을 쫓기 위해서 축사 기도했던 신부의 분투도 사실입니다. 귀신은 성령과 달리 악령이기 때문에 우리 인격이 파괴됩니다. 그래서 귀신이 지배하게 되면 개체성이 파괴되고, 한 사람의 명령 아래 일사분란하게 복종하는 사탄적 시스템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벨론 탑이 무서운 겁니다. 바벨론 탑은 한 사람이 명령하면 세계만민이 동시에 그 명령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 나왔던 두라 평지에 세워졌던 탑입니다. 바벨탑 한 군데서 명령을 내리면 세계만민이 동시다발적으로 집단으로 순종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뉘른베르크에서 1935년에 40만 명이 모여서 하일 히틀러를 했습니다. 40만 명의 남자가 하일 히틀러를 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일본 군국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적인 것은 개체성의 완전한 파괴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사유재산을 갖지 못할 때, 개인이 절대적으로 소유하는 사적공간을 갖지 못할 때 개인은 파괴됩니다. 이것이 바로 솔제니친이 썼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입니다. 인간이 사적공간을 갖지 못하면 단순히 사적소유가 없는 게 아니라 개성의 파괴가 일어납니다.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인구로 같은 방에서 살면 개성이 다 파괴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공간도 순수하게 사적인 영역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사이가 좋은 이유는 딴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진짜 한 군데서 살면 우리는 다 파괴됩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과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같은 교회를 다니면 힘들어집니다. 성자들도 모아 놓으면 힘들어집니다. 사적공간, 내가 자유로운 몸으로 침 흘리면서 목침 베고 잠도 자고,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고 글도 읽고, 이런 놀라운 사적공간이 개성과 주체성을 담보해줍니다. 사탄은 개성의 파괴이고, 주체성의 파괴입니다. 사단이 생각을 넣으면 저항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넣은 생각을 삐삐삐 하면서 굉장히 무서운 거라고 저항할 수 있는 자동경보장치는 어디서 올까요? 성령에 민감하게 오랫동안 순종한 사람만이 사단의 생각이 들어올 때 마귀의 생각이 들어올 때 즉시 저항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다른 모든 제자와 달리 예수님 만났는가 기록이 없어졌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 회심기록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도 있고 베드로와 요한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만 없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만난 과정이 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록말살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기록말살형이란 옛날에 했던 모든 기록을 다 없애버립니다. 기록말살형은 로마 황제들이 주로 당한 형벌입니다. 예를 들어 티투스장군의 동생이었던 도미티아누스, 이런 황제가 기록말살형을 당하면 국가 공문서를 다 없애버립니다. 그가 했던 모든 치적을 다 없애버리는 것이 기록 말살형입니다. 유다는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말살형을 당했는데, 유다는 이름 자체가 유다이기 때문에 유다지파 출신일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돈궤를 맡은 것을 볼 때 핵심보직을 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돈궤는 원래 가장 정직한 사람이 맡는 겁니다. 유다는 정직하고, computation 수학에 강했습니다. fund raising을 잘했기 때문에 많은 돈을 움직였고 명절에 준비를 다 했습니다. 그런 유다였기 때문에 유다가 예수님 만나는 과정도 굉장히 복잡했을 것이고 극적이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일체 없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아서 배반한 자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은 30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도덕주의적 해석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유다의 행적자체, 마지막에 유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체포되는 장면을 보면서 자살함으로써 회개하는 장면을 볼 때 유다는 파렴치범이라기보다는 사상범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마귀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이걸 알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 마가복음 8장 등 마귀가 화자로 나온 맥락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공관복음서와 복음서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피력했습니까? 마귀는 세 가지 생각을 피력했습니다. 첫째, 능력과 표적을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 나오죠. 둘째, 예수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과호속에 있음을 위험한 순간을 통해서도 입증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밀쳐 떨어짐을 당했을 때도 절대로 두개골이 부서져 죽지 않아야하고 사뿐히 나비처럼 앉는 표적을 보여야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한다고 보는 겁니다. 셋째 천하만국의 영광을 휘두르는 사람, 천하만국을 장악한 능력자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한다는 것이 마귀의 생각입니다. 마귀의 생각은 누가 보더라도 도덕적으로 아주 비열한 짓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신학적 논리를 가진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마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배반하기 때문에 유다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또한 능력과 표적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입증하려고 할 때는 이 시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사무치는 진실한 삶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게 안 될 때는 표적을 사모하게 됩니다. 말 좀 안 듣고 뺀질뺀질한 사람에게는 진실한 인격으로 만나기보다는 지팡이로 뱀도 만들고 컴퓨터에서 연꽃도 불러일으키고 문둥병도 걸렸다가 낫게 해주고, 이런 개인기를 보여주면 복종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억 만 분의 1 나노초에 하게 됩니다. 능력에 대한 사모는 사무치는 진실과 누적된 순종을 통해서 비영웅적으로 그런 능력을 맛보이지 않고 극적으로 누가 보더라도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목사의 카리스마,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그런 식으로 보여주길 원하는 것이 바로 능력숭배 사상입니다. 여러분께서도 만일 저에게 이렇게 말하면 사단의 시험을 하는 겁니다. 목사님은 숭실대학교 때려치우고 강남에 들어가 목회해서 빨리 2천명 모읍시다, 우리도 1만 명 모아 큰 교회 만들어 진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보여줍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2만 명 모으는 능력을 가져야 하나님 아들임을 입증하는 것은 능력숭배 사상입니다. 표적숭배 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런 위험에 처했을 때, 진짜 십자가에 못 박힐 위험에 처했을 때, 당국자의 오랏줄에 묶였을 때 그 상태에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를 입증하고 싶은 극한적인 실험정신이 유다 속에 있는 마귀 생각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이렇게 극단적 자해행위를 하고 극단적으로 하나님께 위험한 행위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마땅히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셔야 해,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마귀의 요구대로 성전에서 뛰어내렸다면, 저 하나님의 아들인 걸 믿습니다, 하고 뛰어내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신앙의 요동하는 변덕에 응답하시기 위해서 계속 기적을 베푸셔야 합니다. 그러면 중력의 법칙도 일시 정지가 돼야 합니다. 제가 63층 빌딩에서 뛰어내릴 때 저를 살려주기 위해서 중력법칙이 그 일대 1km 근방에서 일시정지 된다면 너무나 큰 혼란이 일어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마귀의 생각을 처음부터 배척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마귀의 생각은 마가복음 8 31-33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Get behind me satan, 이렇게 말함으로써 베드로 뒤에 있는 사단을 정조준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부조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 아들됨을 입증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에 내가 옳음에도 옳지 않은 자처럼 대우를 당하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옳기 때문에 항상 이겨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옳음에도 불구하고 진 자가 되고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데는 전능하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품상 악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비루한 전능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타락한 우리 인간이 볼 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거룩한 성품과 어긋나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능자가 아니라 무능자가 돼 버립니다.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데는 절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악을 영구적으로 발휘하지 못하시는 무능력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히틀러나 모택동 방법으로 세계를 통치하실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성품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성품을 배반하면서까지 능력을 발휘하실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악의 무능력자입니다. 하나님은 공권력을 사용하는 변덕성에 있어 무능력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계신데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사이의 관계를 몰라서 비뚤어진 인간성으로 요구하는 겁니다. 힘이 있어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입니다. 유다는 이걸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유다는 옳은 일이면 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옳기 때문에 힘의 사용은 불가피하고, 옳기 때문에 힘을 써서라도 타자 또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으면 이건 십자가가 아니라 힘 숭배, 폭력숭배, 표적숭배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초과보복 초과응징입니다. 분명히 악당이 나옵니다. 그런데 악당보다 훨씬 더 큰 폭력으로 악당을 제압하며 쓸쓸히 영화가 끝나는 것이 할리우드 영화입니다 우리 한국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당을 제압하기 위해서 악당 보다 더 큰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힘 숭배입니다. 그렇게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유다의 생각과 마귀의 생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폭력과 힘에 대해서 폭력과 힘이 얼마나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폭력과 힘의 희생자가 되어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어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로마제국의 폭력과 로마제국의 힘 자체가 근원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부활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성을 그런 방식으로밖에 과시할 수 없습니다. 중간 요약하자면, 예수를 팔려는 생각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인가 진짜 믿어 보기 위하여 극단적 위험에 빠뜨린 겁니다. 오랏줄에 묶이고 빌라도의 법정까지 끌려가서 뺨을 맞고 이런 일련의 상황에서도 예수가 과연 하나님 아들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를 건져주셔야 한다는 생각을 테스트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매 순간 한 번도 표적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목이 마른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마취제를 먹지 않고 고통을 오롯이 견뎌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포항성시화운동, 대구성시화운동, 춘천성시화운동 기도제목 모두가 시장이 기독교인이 되어서 시청공무원들을 일사분란하게 예배 앞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기독신우회 운동을 가보면 너무 많은 분들이 사원들을 강제로 앉혀놓고 설교를 하라고 합니다. 저는 이미 1 7천명을 인질로 잡아 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데 또 신우회를 잘한다는 마음씨 좋은 사장님이 선의로 잘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잡아 놓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자고 하니까 얼마나 웃깁니까? 저는 안 갑니다. 가보니까 도저히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벌써 얼굴에 쌍심지를 키고 기독교인 사장님에 대한 증오심이 이글거리는데 안 됩니다. 어떤 교수는 유체공학을 가르치면서 주보 10개 모아 오면 1점을 주겠다고 합니다. 유체공학 교수는 유체공학을 잘 가르쳐서 감동을 시켜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줘야 하는데, 주보 10개 가져오면 출석 몇 개 까줄게, 점수 줄게,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대개 보면 신우회 믿음 좋은 교수들이 그걸 저한테 자랑합니다. 저는 교목실장으로써 엄히 명합니다. 예수님을 그런 상상력 수준으로 묶어 놓으면 안 됩니다. 힘 숭배, 표적 숭배, 타자를 굴복시켜서 믿게 만들려는 모든 마음 근본에는 십자군적인 권력숭배가 있습니다. 십자군 숭배는 일단 제압해놓고 무장해제 시켜놓고 신앙을 주입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인디언들을 집단적으로 개종시키려고 한 것이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입니다. 그런 방식에 저항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라는 신부입니다. 지금 구티에레즈 신부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연구소를 하고 있는데,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라는 선교사는 강제로 개종해서는 절대로 안 되고, 인디언에 대한 사냥 포획을 즉시 중지하자고 주장하다가 암살을 당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장님이 직원들 앉혀놓고 강제로 예배드리게 만드는데, 학교 채플도 절대로 강제성을 가지고 종교를 개종시키면 안 된다고 씁니다. 그런데 어떤 반응이 오느냐? 교목실장님 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습니까? 왜 즉시 죄인들에게 회개를 요청하지 않습니까? 이런 항의가 엄청 오는데 그건 극우세력들입니다. 이게 바로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후계자들입니다. 이건 종교를 개종시키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건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 법과 가치를 고급적인 학문적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고, 양심에 절대로 부담을 줘서는 안 됩니다, 불교도 부모가 이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종교편향이라는 말을 하지 못할 만큼 기독교의 보편성을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말했는데 극우 세력들을 가진 아이들이 어떤 댓글을 올리느냐? 실장님은 종교다원주의로 가시렵니까? 이런 비난이 그렇게 올라옵니다. 그게 바로 누구냐면 이사벨라 여왕, 스페인이 원주민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즉각적으로 회개시키고 죄인들은 인격적 자유가 없어도 된다, 이게 바로 청교도 선교사들입니다. 청교도 선교사들은 옛날에 18세기 보스톤 크로니컬 신문에 보면 직원 중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 사람 외에는 휴가를 갈 수 없다, 예배 드리러 가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은 안식도 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청교도들 생각입니다. 이런 청교도 생각을 가진 사람둘 일부가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저는 성경만 읽다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저는 교회의 영향을 거의 안 받았습니다. 저는 성경만 읽고 나쁜 교회에서 나쁜 짓하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앉혀 놓고 강제로 개종을 시키는 발상들은 선교사가 미션스쿨에서 시작한 겁니다. 내가 미션스쿨을 다닌다 해서 내 양심의 지성소까지 기독교신앙에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건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예수를 팔 자 입니까? 예수가 표적과 천하만국의 영광과 능력을 보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유다의 생각이 예수를 팔아넘기는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팔아넘기는 것은 오늘도 그런 점에서 가능합니다. 포항성시화운동, 대구성시화운동의 기도제목을 보면 시의 가장 우두머리인 시장이 하나님께 그 도시를 바쳐버리면 된다고 믿어버리는 것, 이것이 서울시 봉헌 사상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시장님이 서울시를, 주여 받으소서, 그 많은 타종교 타자를 무시하고 타자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죠.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이런 성시화운동, 직장신우회운동, 이런 사상들은 많은 경우에 직위나 직분 또는 표적 등을 이용하여 예수 믿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를 믿게 만들어서 강제로 사람의 이성과 양심을 굴복시켜서 믿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코너에 몰아넣고서 예수 믿게 만들려는 마음들이 바로 예수를 팔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팔려는 이 생각을 우리가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몸종이 되어서 타자의 발을 씻기는 것이 기독교라고 믿는 겁니다. 너무 어려운 겁니다. 여러분 성령 받지 않고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짜증납니다. 성령 받지 않고 몸만 숙이면 단을 치고 싶고 그렇습니다.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몸을 굽힐 수 있습니다. 흉내도 내지 말고 함부로 하면 큰일 납니다. 괜히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아내 발을 강제로 데려다가 세숫대야에 씻으면서, 오늘부터 13장 합시다, 그러면 아내한테 발로 맞습니다. 하지 마십시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야 가향교회에서 배웠어, 이리와, 종아리를 때리면서 발을 강제로 씻으면 놀부 심보와 똑같습니다. 내가 몸을 굽히고 내가 겉옷을 벗는 것이 가오가 잡히고 분위기가 도와줄 때 해야지 갑자기 하면 안 됩니다. 어떤 믿음 좋은 신우회 교수가 갑자기, 학우 여러분 지금부터 기독교 진리를 실천하겠습니다, 다 양말 벗으세요, 강제로 씻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성폭행 되고 성추행 됩니다. 몸종, 다시 말해서 만물에 먼지처럼 자기를 축소시킬 수 있는, 자기 존재를 응축시켜서 없는 것처럼 만들만큼, 자기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숨겨 버릴 만큼 자기를 가볍게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겸손만큼이나 겸비케 될 때 발을 씻길 수 있습니다. 이건 어렵습니다. 우리가 선전의 기독교에 너무 많은 돈을 쓰면 안 됩니다. 몸을 구푸리고 남의 발을 씻고, 이 세상의 죄를 씻으려는 고결한 실천과 보이지 않는 순종을 차곡차곡 쌓아갈 때 기독교는 누가 크냐고 논쟁하는 우리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의 만찬을 베풀 수 있습니다. 언제가 성만찬입니까? 내가 형제의 발 앞에 엎드려서 형제의 발을 부둥켜안고 발을 씻어줄 만큼 내 마음이 엄청나게 고요해질 때, 내 마음이 엄청나게 낮추어질 때 성령 안에서 내 마음이 그렇게 여유로워질 때 성만찬이 이루어집니다. 만찬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 됩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이 지배하는 식사자리에서 누군가 몸종이 되고자 결단하는 순간에 최후의 만찬이 성만찬으로 바뀝니다. 이 땅의 엄마들은 이미 자신도 모르게 친히 몸종이 되었습니다. 이 땅의 엄마 중에서 희생적인 엄마가 있는 집안은 항상 성만찬적 연합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똑같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같은 것은 둘 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시간당 charge, 내가 오늘 봉걸레 다섯시간 잡았다, 이런 게 없습니다. 가정은 엄마 아빠가 아무리 수고해도 자녀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녀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먹고 자라서 또 자기도 자녀를 낳아서 그렇게 행합니다. 가정이 유지되는 이 기적은 성만찬, 기독교 진리의 완전한 복사판입니다. 가정과 같아지는 것, 아무리 수고해도 수고를 돈으로 환산하여 요구하는 마음이 없이 끊임없이 자기를 몸종으로 바치는 무시무시한 낮춤, 이 세상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엄마들이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인스턴트식품을 가져옵니다. 항생제를 많이 줍니다. 성령 충만한 엄마만이 부엌에 가서 몸종이 됩니다. 성령 충만한 아버지들이 출근하여 아니꼬운 직장에서 생계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논밭에 씨를 뿌리는 아버지가 됩니다. 이런 성만찬적 사랑이 세상을 유지하는 원리입니다. 세상은 폭력이 지배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은 항상 십자가를 지고 친히 몸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끌고 오는 세상입니다. 역사는 알렉산더와 모택동과 히틀러 같은 사람이 지배했습니까? 아닙니다. 몸종이 되어서 타자의 발을 씻기고 가족을 묵묵히 돌보았던 사람들이 역사를 이렇게 끌고 왔습니다. 역사의 중심세력은 누구입니까? 몸종이 되셔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겼던 마음씨가 넉넉하고, 권력을 많이 갖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를 끌어 왔습니다. 그런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께 아직까지 소망이 있는 역사로 존속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로 인정받습니다. 결국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세계 역사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영웅이 아닙니다. 모든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비영웅적, 일상적, 반복되는 섬김을 묵묵히 감당하는 곳입니다. 발 냄새를 감수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기를 다짐하고 다짐하는 이런 곳에 세계역사의 중심이 있고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어가신다고 할 수 있죠.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친히 몸종이 되는 예수의 길과 능력과 표적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입증해야 한다고 강박하는 유다의 길이 역사 속에 팽팽히 맞서 왔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도 몸종이 되는 예수의 길과 유다의 길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여 우리가 타종교와 종교 갖지 못한 사람까지 몸종이 되어 섬길 사랑의 실천 부담보다는 세를 모아서 엄청난 군중시위를 통하여 최고 집권자가 되어서 강제로 사람을 움직이려는 사단적 지배욕구가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지배하려고 하고 주장하는 모든 사단적인 열망을 영구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게 도와주시고, 오로지 섬기려고 하고 오히려 낮추려고 하고 오히려 덜려고 하는 몸종 기독교를 표방하게 하여 주소서. 가향교회가 몸종 예수 기독교를 재현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진실이 모자람을 슬퍼하기 보다는 능력이 모자람을 한탄했던 이 종이 회개하고 회개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사무치는 진실을 열망하기 보다는, 종처럼 낮아지는 겸비를 원하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광채들과 영광과 표적을 원합니다. 주님 이 잘못된 기독교를 예수 몸종 기독교로 형질전환하게 도와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이 험한 세상에서 생업을 허락하셔서 소득의 일부를 감격으로 바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포도원에 가서 한 데나리온 벌기를 원하는 사소한 자존심 하나 유지하길 원하는 아들딸들에게 반드시 일거리를 허락하여 주소서. 가진 자의 탐욕이 참으로 실업자를 10% 이상 만들어내야만 기업들에게 유리한 노동환경이 조성된다는 거짓된 경제학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아버지들이 연기를 피워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여, 이 땅이 돈과 경제문제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주장하여 주소서. 우리가 운명주의에 빠지지 않고 건전하고도 올바른 경제를 반드시 세울 수 있도록, 이 땅에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23일에 이소율 자매가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 백성의 수를 더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길하 목사님과 정혜영 자매님이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이 딸을 키워내게 도와주소서. 정은 자매님과 박선미 자매님과 임지영 자매님이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8월말 10월초, 긴 세월 후에 하나님 자녀를 위탁받아 양육하고 있사오니 주님이여 하나님의 때에 순산할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혼적령기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들과 취업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속히 응답해주시고 이들이 청년다운 기상을 가지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나날이 살아갈 수 있도록 복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교회에 군문에 가있는 아들이 있고 해외출타중인 아들딸 있고 출장 중인 아들딸 있습니다. 머리털 하나 손상당하지 않고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새 교우들이 와 있습니다. 모두 다 새 교우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자유 안에서 적극적으로 교제하고 두터운 사랑의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몸 구푸리게 하심이 오늘 예배드린 모든 형제자매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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