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주일예배 1부_ 요한복음 13장 21-30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옛날 로마제국 시대 때는 기록말살형이 있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은 외경 일부에 나오고 있습니다. 유다는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말살형을 당했습니다. 유다의 행위 마지막 장면만 기록돼 있기 때문에 유다가 왜 마귀의 생각에 동조했는지는 주장하기 힘듭니다. 다만 외경, <유다복음>, <빌립복음> 기타 소설적 각색이 일부 됐지만 야사들에 의해서 유다가 도덕적으로 돈 때문에 예수를 판 사람이라고 보면 예수님이 3년 동안 그런 인물도 분별하지 못하고 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과 유다의 갈등은 은 30 정도의 갈등이 아니라 굉장히 깊은 신학적 갈등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유다의 이름은 유다지파에 나오는 그 유다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핵심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유다는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을 대표하는 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유대인의 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장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이때 마귀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3장 27절 ‘사탄’이 나옵니다. 사타나스, 마귀는 디아볼레입니다. 마귀와 사탄, 귀신들은 복수로 많이 나옵니다. 사타나스는 단수입니다. 귀신 즉 사탄보다 아래 서열인 귀신이 생각을 집어넣고 나면 그 생각을 가지고 의지를 완전히 통째로 장악하는 인물이 사탄이라고 말할 수 있죠. 디아볼레, 즉 마귀의 생각과 통섭하고 동조하여 조율을 마치면 마귀적 생각의 조율을 마친 사람의 의지를 사타나스가 접수하고 포획합니다. 마귀가 생각을 넣었다는 것과 사탄이 들어갔다는 말은 용적이 어디가 큽니까? 마귀가 생각을 넣으면 마귀의 생각과 유다 자체의 생각이 싸움하겠죠. 그런데 마귀가 생각을 넣은 단계는 유다가 회개할 기회가 있는 것이고 다시 한 번 의지의 전환을 통해서 반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탄이 들어갔다는 말은 완전히 인격의 주체성을 박탈했다는 것이죠.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사탄이 집안 세간을 넓혀 갑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한 귀신이 쫓겨나서 가면 일곱 귀신이 깨끗케 된 집을 다시 접수해버린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인격은 마귀에게 있어서 거주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인격이라는 것은 귀신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는 겁니다. 마귀가 생각을 집어넣었던 단계에서 사탄이 들어가는 단계는 진전이 있는 단계이고, 이 사이에 유다의 의지적 반영 여하에 따라서 생각단계에 머물렀던 예수 팔려는 생각 자체가 행동으로 action으로 진화되는 과정은 긴 숙고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생각을 집어넣더라도 그 생각을 즉시 배척해야 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주님에 반하여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할 때, Get behind me Satan,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이때는 너무 강력한 표현입니다. 디아볼로가 아닙니다. 사탄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마음이 들어갔는가, 여기서 유다복음이란 외경이 이걸 해명합니다. 유다복음은 이집튼 나그함마드에서 발견된 56개의 영지주의 문서 중 하나입니다. 그 문서는 이집트 수도원에서 한때 수도사들이 읽던 책 중에서 AD 390년경에 아타나시우스가 성경 27권을 신약으로 확정할 때 탈락한 문서들입니다. 나그함마드 문서에 보면 유다가 예수와 짜고 팔았기 때문에 유다는 베드로보다 더 예수의 속마음을 잘 읽어낸 수제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유다복음이 그렇게 나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정경인 복음서는 유다를 도덕적 파탄자로 보고 영적인 일탈자로 봅니다. 참 중요합니다. 유다가 결국 한 행위가 예수로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가게 만든 겁니다. 당국자에게 넘겼으니까, 그러면 유다는 마귀의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집행한 겁니다. 이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나오는 논리입니다. 백도기라는 사람이 쓴 <가롯 유다에 대한 증언>의 문학적 상상력입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어떤 논리가 이 안에 들어가야 말이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언뜻 읽으면 유다를 너무 미학적으로 옹호하기 쉽고, <유다복음>처럼 영지주의처럼 결국 유다는 예수와 밀통하다가 밀당하다가 베드로 요한은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에, 유다와 예수의 깊은 교감 끝에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 왔다는 겁니다.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불러서 베드로와 요한은 이해하지 못하니 네가 나를 팔아야 한다, 절대로 너는 배반하는 일에 있어서 추호의 의심과 양심의 가책을 가져선 안 된다, 이렇게 설득하고 괴로워하면서 유다가 배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일련의 진실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팔려고 했을 때 은 30받고 예수를 죽음에 내던졌다고 하면 도덕적 파탄자입니다. 인륜파탄자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생각이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마귀의 생각은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 마가복음 8장 등에 의하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것, 돌로 떡을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됨을 입증하는 것이 마귀의 생각입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지만 죽지 않는 초능력의 발휘자가 마귀의 생각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입증하는 게 마귀죠. 이게 마귀의 생각입니다. 좀 더 나가서 마귀에게 절함으로 천하만국을 얻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됨을 입증하는 것, 이게 마귀의 생각입니다. 이 마귀의 생각과 유다가 동조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마귀의 생각과 동조했다고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위험에 빠뜨린 겁니다. 왜?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에 가서 기적을 행하지 않고 표적을 행할 능력을 자제하니까 진짜 예수가 하나님아들임을 유다가 실제로 보고 싶었던 겁니다. 유다는 원래 진짜 하나님 아들임을 믿고 따랐는데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단계에 가서 현저하게 능력을 절제했고 어떤 능력도 행하지 않고 점점 수세적으로 약해지고, 변신 같은 아주 두려움에 떠는 인간으로 축소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걸 보고서 유다는 예수가 진짜 하나님 아들인가를 테스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생각,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성전에서 밀쳐 죽임을 당해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 아들임을 입증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마귀의 생각은 예수를 배반한 도덕적 파탄행위다, 비열한 배신행위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도와주고 <유다복음>과 같은 강변과 궤변이 가능한 겁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마귀의 생각은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입증하도록 극한으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일련의 과정에 하나님의 강권적 개입이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고, 없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이런 식의 단순논법에 의존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귀는 능력을 통해서 입증되는 자만이 하나님 아들이다, 즉 천하만국에 영광을 지닌 그 자가 하나님 대리자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자가 하나님 아들이고 성전에서 밀쳐져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그 자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면 권력숭배 힘 숭배 기적숭배 초자연적인 능력숭배가 신앙을 입증하는 유일한 통로가 됩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생각입니다. 이게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죽는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사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확하게 이런 겁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반은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되고,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사건이 됩니다. 누가 예수님을 팝니까?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성만찬 떡을 먹고 예수님과 영적으로 일치되고 죽음의 의미에 완전한 이해를 드리는 성만찬적 연합이 일어나지 않고 성만찬 떡을 먹고도 예수님과 결렬되고 예수님과 이탈을 경험하는 능력숭배 기적숭배 권력숭배 기독교, 이적을 통하여 신앙의 진리성을 입증하려고 하는 음란한 표적숭배 사상, 이런 것이야말로 마귀의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진실함을 다해서 제 인격과 제 삶을 통해서 목사임을 입증하는 게 진실한 길이에요? 제가 행동은 엉망으로 하고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어서 여러분을 놀라게 해서, 아이고 김회권 목사 권세 있구나, 어떤 것이 하나님의 길이에요? 제가 지팡이를 들고 뱀을 못 만들지만 진실을 다하여 정성껏 살아가는 것이 기적인데, 지팡이를 들어 뱀을 만드는 것을 더 원하는 것을 음란하고 표적을 구하는 세대라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정말 악합니다. 얼마나 악하냐면 가끔 능력에 덧입히는 목사가 되길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진실로 승부하지 않고, 성품과 삶의 누적된 실천으로 승부해야 하는데 당장 일순간에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도 하는 사람들 조심해야 합니다. 40일 금식기도 하는 사람은 평소에 정상적으로 밥 먹으면서 살지 않고 밥을 굶어서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영적 계엄령을 선포하는 겁니다. 40일 금식기도 하는 목사님 교회 가면 바로 그다음 날, 주님께서 나에게 기도응답을 주셨습니다, 5천만 원 마이너스 통장 만들어서 다 집합하랍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담임목사가 부름을 받아서 40일 금식기도를 갖다왔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저 누구누구 목사에게 완전히 맡겼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책임집니다, 제가 천국으로 인도하겠습니다, 그래서 대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일주일 후에 쫓겨났습니다. 굉장히 사단적인 겁니다. 사단의 특징은 지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알고도 모른 체 합니다. 예수님은 국정원 원장처럼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국정원 원장처럼 에드워드 스노든이 말한 것처럼 정보를 다 수집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마세요. 우리 목사님은 우리 집 숟가락 숫자까지 압니다, 그런 목사는 큰일 납니다. 거룩한 무지가 낫습니다. 거룩한 무관심, 자유케 하는 목사가 하나님 닮은 목사입니다. 절대로 이것저것 얽어매서 박해하고 평가하고 줄 세우고 경쟁붙이고, 우리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유다는 결국 어떤 일을 했느냐? 예수가 하나님 아들인가 아닌가를 실제로 알고 싶었던 겁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런 해석이 어떻게 정당하냐? 그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장면을 보고 후회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후회하고 회개를 합니다. 유다는 자살함으로 회개한 겁니다. 어떤 사람은 유다의 자살을 굉장히 나쁘게 보지만, 저는 유다의 자살을 회개로 봅니다. 유다가 돈 때문에 단순히 도덕적 재정적 비리 때문에 그랬다고 보기에는 이 실험이 너무나 대담합니다. 약간 돈을 훔쳐간 정도로는 마귀의 생각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 누가 예수님을 팔 것인가? 누가 성만찬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지극히 많이 받고도 예수를 팔 수 있는가? 예수님을 능력의 화신으로 보고, 그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경배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배 찬양 중에서 능력되신 예수님, 그런 찬양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권력자를 좋아합니다. 왜? 능력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권력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멀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만나자고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정상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옛날에 어떤 목사님과 오랫동안 동역을 했는데, 제가 그 목사님을 사랑하고 동역했을 때는 종로5가에 이분이 작업복을 입고 쌀을 져 나를 때 만났습니다. 농군터에서 일하면서 케일 농사를 지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군포에 농장을 개간하고 하루 종일 노동하면서 저랑 밀접하게 지냈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목사님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계속 떼어놓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그분이 전국구로 유명해지고 KBS에 나가게 되고 전국민, 특히 강남에서 이분이 메시아적인 목사로 떠오를 때는 하나님이 그분과 저를 너무 멀리 하게 하셨어요. 그분하고 제가 사이가 나빠지고 나서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분을 말로나 글로 비판하지 말도록 아홉 번 정도 저에게 권면을 했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제가 그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결렬되고 나서부터는 계속 그분을 위해 중보기도 하라고, 그분과 한통속이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저를 막으시고 그걸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 길을 너무나 감찰하고 계시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빚더미에 앉아서 진안에서 허접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할 때는 그분과 하나 되게 하고 하루 종일 같이 있게 하시고, 그분이 전국적으로 권력자들과 친해질 때는 저를 멀리하게 하시고, 저는 그걸 보고 우리 주님의 길은 권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진실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해야지 권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제가 권력을 가지고 제 학생들을 예수 믿게 할 수 있습니까? 이번에 이 과목 듣는 사람 중에서 가향교회 연속 8주 오지 않으면 재미없습니다, 만일 권력을 휘두르면 오겠죠? 그러나 감동이 전혀 없겠죠. 기독교수들 중에 이런 사람들 있어요. 자기 과목 듣는 사람 중에서 주보 10개 모아 오면 1점주겠다, 그건 굉장히 나쁩니다. Anti christ적입니다. 유체공학하고 예수님이 무슨 상관있어요. 물론 상관있지. 그러나 유체공학하고 주보 10개하고 무슨 관련이 있어요. 저는 교목실장으로써 그런 교수를 불러서 책망을 했습니다. 이건 절대 주님의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신우회 기독실업인들 가운데는 자기 직원들을 강제로 45분씩 앉혀놓고 저더러 설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저는 안 갑니다. 숭실대도 인질이 많은데 왜 또 거기 먼 데까지, 숭실대 1만 명 인질도 많은데, 가보면 인질입니다. 그래서 안 갑니다. 기독실업인들이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남의 주체성을 훼손하는 겁니다. 권력의존적인 설교, 그래서 가톨릭이 잘못된 겁니다. 가톨릭은 권력을 가지고 추장 영주를 예수 믿게 하고, 그 영주 이하에 있던 모든 사람을 가톨릭교회에 강제로 개종을 시킨 겁니다. 이게 바로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입니다. 그런데 이 라틴 아메리카가 어디서 선교를 배웠냐? 스페인이 400년 동안 이슬람 영향을 받았죠. 이슬람한테 배운 전도라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강제로 개종하는 게 없었어요.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던 스페인이 라틴 아메리카 선교하면서 처음으로 강제개종이 일어난 겁니다. 이건 이슬람에서 동의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교회사에서 광범위하게 이런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을 유럽기독교 문명의 사생아라고 말합니다. bastard civilization, 왜? 너무나 기독교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누가 예수를 파는 자인가? 표적숭배, 권력숭배, 천하만국의 영광을 획득한 후에 하나님 아들임을 입증하는 것이 예수를 파는 것이다, 판다는 말은 파라기돈, 이때 파라기돈이라는 말은 넘겨버린다, 누구누구의 손에 넘겨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능력과 바꾸면 안 됩니다. 능력 있는 자가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표적자가 하나님 아들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고난을 참으면서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 결단과 순종의 치열성이 하나님 아들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능력이 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표적이 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진실을 소박하게 붙드는 것은 루저들의 행동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목사님께서 교수 그만 두고 목회하면 2천명 모일 텐데, 그래서 한국교회에 2천 명 교회가 어떻게 하는지 보여 달라고, 그것도 일종의 사탄적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2천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거니와 뭘 보여줍니까? 저는 그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너는 한 번도 큰 교회를 해보지 못하고 큰 교회를 어떻게 왈가왈부 하냐? 이런 것까지 제가 끝까지 들어야 할 십자가입니다. 너는 부자도 돼보지 않고, 너는 임대소득자도 돼보지 않고 희년 운동 했고, 너는 땅도 없는 놈이 땅을 내자고 하고, 저의 멍에입니다. 제가 만일 그런 게 있으면서 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제가 억만장자 자녀인데 예수 믿고 했다면 훨씬 좋았겠죠. 제가 연세빌딩 같은 걸 가지고서 희사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일종의 능력숭배 신앙이죠. 능력숭배신앙, 대단한 사람이 약간 겸손할 때 광채가 드러난다고 보는 것도 능력숭배입니다. 표적숭배입니다. 왜? 지위가 그렇게 높은데 그렇게 했다는 것도 역시 표적숭배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너무 괴로웠습니다. 13장 2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지리멸렬했습니다. 3년 내내 사역했는데, 이건 3년 내내 히브리어 헬라어 가르쳤는데 창세기 1장을 못 읽는다, 그때 오는 지리멸렬함, 우리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이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사역의 결과 이렇게 장맛비에 무너지는 토성처럼 무가치해진다는 것,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 열매 없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자기평가입니다. 그래서 괴로운 겁니다. 그렇게 사랑을 가르치고 그렇게 섬겼는데 마지막에 한 사람은 예수를 팔 자가 되어버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경직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괴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신 사역이 열매 없음에 대해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더 괴로운 것은 다는 깨끗하지만 한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여 불결한 자가 정결한 자 중에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유다에게 전향을 촉구했습니다.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한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깨끗지 못한 자의 양심에 격동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또 유다를 완곡하게 지적함으로써 유다의 양심에 격동이 일어나게 함으로 대 반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유다의 단호한 표정이 변치 않기 때문에 떡을 찍어줌으로 마지막으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포이 에히 세이,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말도 예수님께서 짜증나게 한 말이 아니라 유다의 양심을 정조준하면서, 유다야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지금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나옵니다. 유다가 여기서 안 팔면 못 잡히잖아요? 이건 굉장히 잘못된 궤변입니다. 유다가 배반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다, 그건 모르는 겁니다. 유다가 배반 없이도 얼마든지 성전 경비원들이 예수님을 덮칠 수 있습니다. 몽땅 잡아넣고 한 명 한명 수색해서 예수님 몽따주를 볼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다 개인의 운명을 향해서 불타는 동정심을 가지고 유다의 양심에 커다란 폭풍과 반전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유다가 끝까지 회개하지 앟았습니다. 유다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임을 극한으로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면 하나님 아버지가 개입하셔야 한다고 믿었고,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면 뭔가 일탈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100% 순도 높은 단호한 순종, 자발적 죽음 등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아들임을 입증하는 것을 알고 양심에 가책을 받은 겁니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양심의 화인 맞은 사람들보다 너무나 고상한 사람입니다. 저는 유다가 지옥 갔다고 믿지 않습니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살을 했습니다. 자살자체가 칭찬할 건 아닙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한 것은 한편으로는 고결한 면이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살할 자가 자살하지 않고 연희동 일대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온 국민이 자살해주기를 바라지만 절대로 자살하지 않지 않습니까? 미학적 카타르시스가 있습니다. 죄인이 마지막에 죽으면서 잘못했습니다, 29만원 밖에 없었다는 말 잘못했습니다, 1620억 갚고 죽겠습니다, 저를 국립묘지에 묻지 마시고 저를 한강물에 뿌려주십시오, 마지막 카타르시스라도 남기면서 죽을 수 있는 방안이 없잖아요. 악에 휘둘리는 사람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길을 오해해서 일탈했다고 자기에게 가혹한 단죄를 내렸던 이 양심은 굉장히 고결한, 인류의 대다수보다 고결한 생각이라고 저는 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식탁에서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진하게 나누고,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를 판다는 말, 누가 예수를 팔 것인가? 예수님께서 굴욕적인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런 방식, 순종의 극한을 통해서 굴욕적인 조건 안에서마저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아들됨을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표적과 권력과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됨을 입증하는 모든 시도는 예수를 팔려는 생각이다, 그것이 사탄의 길이다, 사탄의 길은 힘 숭배, 권력 숭배, 폭력 숭배, 결국 사람을 죽이면서까지도 하나님 뜻이라는 논리가 힘 숭배, 폭력 숭배, 천하만국 영광숭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미국의 대외정책은 무엇입니까? 부자집 한 지주가 있습니다. 소작인 몇 명이 쇠스랑과 곡괭이를 들고 집 앞을 지나갑니다. 부자는 생각합니다. 쇠스랑과 곡괭이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겠구나, 저 곡괭이와 쇠스랑을 빼앗아야지, 갑자기 가난한 집을 침탈해서 곡괭이를 빼앗고는 곡괭이가 핵곡괭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이렇게 하면서 미국기독교는 이걸 하나님 뜻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정확하게 미국은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탄적인 하나님 나라의 입장입니다. 빌리그래함도 여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찰스콜슨 마저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하나님 전쟁이라고 사인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미쳤다고 봅니다. 신사참배한 우리 한경직 목사님은 회개할 기회라도 가졌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회개할 기회도 없고 곧 죽습니다. 토마호크 미사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렇게 전 세계 만민을 구령하고 다녔던 빌리그래함이 어떻게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로 날아간 토마호크 미사일을 축복할 수 있습니까? 그건 바로 힘숭배입니다. 한 번 그렇게 마귀의 생각이 들어가면 윤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자기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건 마귀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볼 때 너무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각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이해타산과 권력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나름대로 합리성을 가진 생각도 마귀의 생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예수님의 식탁에서 가장 최고 귀한 대접을 받았던 제자들이 하나님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하는 메시아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날 우리도 전도하면서 폭력과 경제력과 무력과 모든 힘을 동원하여 굴복시켜서라도 예수를 믿게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 목사도 진실이 가득차지 못한 것을 회개하지 못하고 능력 없는 것을 회개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가 능력은 없더라도 가슴 깊이 진실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 되게 하시고 목사 되게 하소서. 주님 진실만이, 십자가의 누적된 순종만이 참 능력이고 참 영광이고 참 하나님의 길인 걸 가슴 깊이 깨닫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팔아버렸던 유다의 길을 가지 않게 도와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그런 식으로 판적이 있다면 양심의 가책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한국기독교가 불교보다 힘이 센 자가 되길 원하고, 고급 관리와 국회의원 숫자 중에서 기독교인이 많아지길 원하고 있고 도시의 시장과 공무원들이 기독교인으로 도배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주님 이름 없는 시인이라도 기독교 진리를 누적된 십자가의 길로 입증할 수 있건만 왜 표적과 기적과 천하만국의 영광을 사모합니까? 하나님 잘못된 저희들, 잘못된 영성이 지배하는 혼탁한 시대를 건져주시고, 정결케 하여 주시고,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주님 우리의 무능력을 정당화하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의 무능력을 초래하는 영적 나팔을 결코 정당화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 연대기 (0) | 2022.02.14 |
---|---|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장 21-30절 (0) | 2022.02.14 |
주와 스승이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3장 12-20절 (0) | 2022.02.14 |
주와 스승이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3장 12-20절 (0) | 2022.02.14 |
친히 몸종(둘로스)이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3장 1-11절 ( (0) | 2022.02.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