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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스승이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3장 12-20절

by 【고동엽】 2022. 2. 14.

7 21일 주일예배 1_ 요한복음 13 12-20 (주와 스승이 되신 예수님)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본을 보였다는 말을 쓴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이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지체가 높은 사람이 지체가 낮은 사람에게 몸을 굽혔던 것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지체 높은 사람을 천진난만하게 거듭나게 만들어주시지 않으면 용가리통뼈처럼 굳어진 교만의 죄가 멈출 수 없듯이 유연하게 낮춤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처음으로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라는 구절을 여러 번 자주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갑자기 처음으로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말씀을 이 장면에서 처음 했다면 굉장히 생뚱맞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을 오랫동안 연습했을 겁니다. 제자들이 열 명씩 스무 명씩 몰려다닐 때 특별한 지체 높은 양반집에서 종이 나와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겼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짐작컨대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일을 오랫동안 시켜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이 장면에 처음으로 몸을 구푸렸다기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 공동체 사이에는 예수님의 선행적 모범, 시범적 모범이 굉장히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연적인 예수님의 행동과 섬김의 훈련 속에 오늘 이 훈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이 있고 나서는 몸을 구푸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른들임에도 불구하고 유치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는 성인 아이가 아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서 뼈마디가 굵어져서 영적인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무리 지체 높은 성공을 거둔다 할지라도 유아적, 성인 아이, adult-child 같은 본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은 부부사이에도 일어날 수 있고 부자지간에 일어날 수 있고 회사동료 사이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많은 대학 각 학과 교수들 사이에 명예교수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20년 동안 그 학과에서 탈 없이 교수생활하면 명예교수가 되는데 그 명예 교수를 후임교수들이 결정해줘야 하는데, 왕왕 명예교수로 추대 받지 못하는 교수들이 있습니다. 명예교수로 초대 받지 못한 이유를 적어 보라고 하면, 과에 덕을 세우지 못했다, 가장 많이 올라오는 것이 선배교수의 모범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전화해 보면, 한 번도 먼저 밥 산 일이 없었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논문을 표절해서 과를 어려움에 빠뜨렸고 그리고 공저가 너무 많다, 단독으로 쓴 논문이 없고 전부 제자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고로 우리는 명예를 줄 수 없다, 옛날에 명예교수는 그야말로 엄청난 불명예를 안기지 않으면 전부 다 명예교수가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로 명예교수가 되고 나면 정말로 명예로운 겁니다. 명예교수가 되면 시간당 강의료가 7만원씩 줍니다. 5만원 강사료, 명예교수는 두 과목만 하면 180만 원 정도 받습니다. 이게 명예교수입니다. 그런데 두 과에서 명예교수가 안 돼서 명예교수 심사위원인 저한테 미리 전화가 옵니다. 최종심사할 때 우리 과 분위기를 알고 꼭 이걸 좀 받아달라고, 교목실장인 제 입장에서 볼 때는 24년 우리학교 봉직하고 이를 갈면서 은퇴하는 것은 학교 전체에 선이 되지 않습니다, 난감합니다. 이 분이 돌아가실 때 한 1억씩 내고 돌아가실 분들인데, 이런 분들이 원통한 마음으로 죽을 때 교목실장으로써 굉장히 난처한 일입니다, 제고를 부탁합니다. 본을 보이는 것은 교수사회에서 굉장히 힘듭니다. 직장동료 사이에서도 힘들고, 또래 집단일수록 겸손해지기가 너무 힘듭니다. 아예 격차가 많이 나면 할 수 있습니다. 아예 격차가 많이 나면 내가 몸을 구푸려도 내 지체가 감가삼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래집단에게 내가 만일 몸을 숙이면 내 존엄성 일부가 훼손되거나 내 영의 일부가 뭔가 감각되는, 약간 감소되는 느낌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에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독교의 구원을 누가 크냐는 논쟁, 이걸 우리는 신학에서는 자기주장의지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권력의지, 크고자 하는 이유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부린다는 원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의 운명과 시간을 압류할 수 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부려 먹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자와 작은 자 사이에 있는 큰 묵계입니다. 큰 자는 작은 자의 운명을 압류할 수 있고 자산을 압류할 수 있고 정지시킬 수 있죠. 크고자 하는 목적은 자기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 논리 플러스 단순히 내가 나를 지키는 것 너머에 타자를 온순하게 만들어서 내 뜻대로 나의 처분권 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크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사탄의 본질입니다. 존 밀턴이 쓴 <실낙원>에 보면 사탄이 계속 말하는 것, 루시퍼가 한 말 중에, 나는 절대로 고개 숙일 수 없어, I would not surrender, 나는 절대로 몸을 굽힐 수 없어, 항복할 수 없어, 고개 숙일 수 없어, 이것이 사단이 하는 말입니다. 사단들은 자기주장에 의지해 전부 다, 나는 절대로 고개 숙일 수 없어, 절대로 항복할 수 없어, 나는 절대로 I'm sorry라고 말할 수 없어, 이것이 사단적인 권력의 모델입니다. 이런 것이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부리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죠. 바벨론 제국의 황제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운명을 압류했죠? 큰 자가 작은 자를, 로마제국이 카르타고의 운명을 압류했죠. 그리스가 자기가 정복한 나라의 운명을 압류했죠. 병자호란 때 누루하치가 우리나라의 운명을 압류했었습니다. 큰 자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은 타자를 온순하게 만들고, 진짜 타자의 인생을 압류하고 타자의 인생을 부려먹는 자가 큰 자이냐? 아니면 타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동을 일으키고 추종과 모방을 불러일으킨 자가 큰 자냐? 히틀러를 닮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죠? 히틀러가 폴란드를 1938, 오스트리아를 1939년에 순식간에 정복했죠. 그러나 폴란드 사람이나 오스트리아 빈 사람이 히틀러를 닮고 싶어 하고 흠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기를 흠모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만들려고 잔인무도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특히 독일에 갈 때, 유럽을 정복할 때 사람을 많이 죽여서 제압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순종을 받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괴테라는 사람이 나폴레옹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정복하니까, 그다음 베토벤은 <황제>라는 음악을 지어 나폴레옹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히틀러, 모택동, 스탈린, 김일성, 이런 모든 악한 세력들의 앞잡이들은 타자를 온순하게 만들어서 자동적인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의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누가 크냐는 논쟁의 중심, 그 안에 우리가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소위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대인들, 즉 이방인의 집권자라는 말은 호이 도쿤테스 아르테,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이런 말을 씀으로써 이 세상에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타자를 온순하게 만들고 타자의 자유를 압류해서 자기 마음대로 부려 먹는 것, 그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는 누가 지배하느냐면 섬기는 자, 몸을 굽힌 그 자가 진짜 섬기고, 진짜 섬기는 그 자가 다스립니다. 결국 다스린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한 분 하나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만 우리를 다스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큰 자는 우리를 순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자유를 압류하고 우리의 주체성을 박탈해서 우리를 압제하는 거죠. 이 세상에 취직하는 것은 압제를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죠. 취직은 아니꼬운 걸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취직이 비참한 겁니다. 제발 나를 노예로 써주십시오, 15시간 잡아 드십시오, 먹여만 주면 내가 노예가 되겠습니다, 이게 취직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먹지 않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정신의 자유, 디오게네스적 자유, 철학자적 자유를 누리려면 주유소의 기름만 넣고도 100만원 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적게 먹고, 대부분 돈 쓰지 않고 주로 걸어 다니고 이렇게 살면 정신의 자유를 고스란히 지키면서 취직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취업을 거부하고 직장에 안 다니겠다는 사람이 많아지면 누가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될까요? 삼성에서 계속 취직해 달라고 할 겁니다. 그 동안 낮 15시간동안 노예처럼 부린 것 잘못했다고, 8시간 지키겠다고, 노동조합 제발 설립하라고, 결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 압제자가 있다고 그 안에 자생하는 자유인의 공동체가 존립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얼과 영에 접붙인 바 된 자녀들이 많아지면 이 세상에 악마적 권력자들의 활무대를 중지시킬 수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계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자유가 박탈된 게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보이콧 할 수 있고 여전히 우리는 큰 자가 되려면 마땅히 몸종이 돼야 하는, 이 세상을 근원적으로 혁신시키고 전복시키는 이런 예수의 삶을 받아들이면, 이런 예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이 세계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온순하게 만들어서 자유를 압류하는 이런 방식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우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자유를 위해서 내 자유가 압류되는, 나의 참된 신앙 양심을 위해서 내 몸의 인신자유가 압류되는 취업을 나는 거부하겠다, 이런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많이 생긴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아진다면 이 세계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압류하고 그들의 인생을 파괴적으로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는 단순히 겸손을 가르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좀 겸손하게 너희끼리 잘 살아라, 그런 정도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 세계의 카타 큐리오 카타 엑소시아주, 권력을 남용하고 압제하면서 지배하는 이 세계 전체를 비신격화하면서 그걸 전복하기 위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나중에 유들유들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고 약간 비굴한 태도를 취하라고 한 게 아닙니다. 교회 가면 그런 사람 많죠. 그런데 그게 꼭 겸손이 아닙니다. 삶이 그렇게 돼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정치철학을 말한 것이고, 혁명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고, 이 세상을 뒤집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성 겸손하게 유들유들하고 가시가 없는 까도남 같은 걸 없애고 순둥이처럼 돼라, 이런 게 아닙니다. 한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실컷 주와 스승이 되고나면 주와 스승이 되는 경지까지 간 사람이 결국 종이 되는 순환관계가 벌어진다면 주와 스승이 안 되더라도 주와 스승이 된 사람의 성공과 출세가 선순환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누가 출세하는 게 좋을까요? 가장 첨탑에 올라가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완벽하게 자기를 비신화하면서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제일 높은 분이 돼야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되면 되죠. 예수님은 쿠데타의 가능성이 없는 나라의 왕인 거죠. 쿠데타를 일으킬 때 전두환 보세요. 가짜인지 모르지만 그림도 많고, 1조원을 전두환 일가가 강탈했다는 겁니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도 없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 자녀 사위까지 페이퍼 컴퍼니까지 있고, 이걸 다 합하면 9700억 정도가 전두환이 강탈한 겁니다. 확실하게 전두환은 지옥 갑니다. 이변이 없으면요. 그리스도의 보혈이 전두환에게 흘러넘치지 않으면 바로, 왜냐하면 그렇게 악한 일을 하면서 그렇게 교만하게 살면서, 타자의 삶을 온순하게 만들고 압류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지금도 그렇게 잘 사는 것, 여기서 우리 마음이 상하면 안 되는 거죠. 누가 으뜸이 됩니까? 만민의 종이 될 그 사람이 해야 해요. 그러면 우리는 으뜸 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원통함이 생깁니까? 아닙니다. 나보다 앞서서 으뜸 된 그분이 내가 으뜸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순환적 섬김을 베풀어서 더 많은 자유를 준다면 우리는 그 분의 승리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경쟁이 있더라도 역설적으로 살신성인의 경쟁만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을 사회생활과 개인생활과 영성생활 전부분에서 실천하도록 본을 보였단 말이에요. 정치학과 경제학과 사회학과 모든 영역에서 이런 삶을 본으로 보인 겁니다. 여러분 남들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슈퍼 갑과 같은 인생이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행복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본 보이는 일에 실패하면 기독교는 없는 겁니다. 기독교는 말 자체가 아니라 action입니다. think tank가 아니라 action tank입니다. 액션을 해야만 탱크 같은 저돌력과 추진력이 생기게 됩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됩니다. 제가 볼 때는 월급이 많은 사람이 월급 없는 사람을 섬깁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소득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 우리 국가 예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잘 사는 동네 사는 사람이 못 사는 동네 사람을 섬기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때요? 서초구 강남구는 세수가 넘쳐서 학교 시설이 엄청 좋아요. 그러나 저기 가리봉동 금천구, 최집사님 계시는 곳은 지하철역도 너무 허접합니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이것 보십시오. 원래 종부세라는 세금을 약 9조를 걷어서, 옛날에 어떤 대통령이 나와서 종합부동산세를 거뒀습니다. 부동산세는 원래 지방세입니다. 부동산세는 재산세이기 때문에 지방세입니다. 그러나 종합부동산세는 국세입니다. 9억 이상 높은 고과의 집을 가진 사람은 세금을 매겨서 그 돈으로 지방교부금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이 종합부동산 법입니다. 그걸 무력화시킨 사람이 이명박 장로입니다. 결국 이 세계의 큰 자가 휘두르는 가장 큰 무기는 법이라는 겁니다. 큰 자는 작은 자를 법으로, 어떤 법? 나쁜 법으로, 이성과 양심을 마비시키는 나쁜 법으로 지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자기 몸을 몸종처럼 낮추셔서 누가 크냐는 그 만찬석상을 사실상 뒤집어 엎어버린 예수님의 행동이야말로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고,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정신 나간 사단적 권력의지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식탁을 뒤엎어버리는 것이 우리 예수님이고, 이게 기독교이고, 이게 교회라는 겁니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종로 연동교회 있죠. 백정과 상놈과 양반 중에서 상놈과 양반이 한 교회에 다니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연동교회에 남았습니다. 연동교회 다니던 양반들이 상놈과 도저히 예배 못 드리겠다, 은혜가 안 된다, 성령의 역사가 없다, 하면서 따로 만든 교회가 안동교회입니다. 안동교회 지금도 안 됩니다만 정신 자체가 백정들을 피해간 교회기 때문에, 연동교회는 이미 융화된, 게일이라는 우리나라 성경번역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연동교회는 계속 인물들이 나옵니다. 나랑 지체가 다른 사람들과 몸을 숙이면서 몸을 굽히면서 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 이 세계가 운영하는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인 부정입니다. 이렇게 본을 보였기 때문에 이 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action tank입니다. 이렇게 행동하고 본을 보이는 사람들의 행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개척교회 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350명 정도의 중소기업 CEO가 교회를 왔습니다. 이 분은 저를 굉장히 존경한다고 한 분입니다. 그런데 존경은 모방과 추종의 부담이 있습니다, 그걸 알고 존경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미리 일러두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에이프런을 둘렀습니다. 모든 형제들은 설거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일산두레교회에서는 형제들은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자매들이 만일 식사담당을 한다면 형제들은 설거지 봉사를 해야 하고, 형제자매가 갑과 을이나 노예와 몸종, 또는 주인의 관계가 돼서는 안 됩니다. 그건 유교입니다. 그리고 항상 형제끼리 밥 먹지 말고 자매끼리 밥 먹지 말고 형제자매 섞여서 먹어야 하고, 발언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자매가 회의 때 동시에 발언해야 하고 동등하게 발언해야 합니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이 형제가 자기는 못 하겠다, 우리 어머니도 저에게 설거지를 시킨 적이 없고 우리 아내도 나에게 설거지를 시킨 적이 없는데 교회가 왜 나에게 야만적인 요구를 하느냐? 알았으니 제가 하는 걸 잘 보세요, 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했죠? , 존경과 사랑은 모방과 추종의 부담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분이 너무 잘했습니다. 사실 그분에게 이게 야만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켈수스라는 AD 2~3세기의 로마의 유명한 지성인이 있습니다. 요즘 말하면 진중권 같은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조롱하는데 기독교는 인간 루저들의 잡탕이다, 노예 여자 미숙아 정박아 고아들, 온통 교회는 인간 말종들만 모여 있다, 더 가관인 것은 십자가에 달린 목수를 주라고 믿고 있다,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걸 오리겐이라는 사람이 콘트라켈수스, 켈수스를 반박하는 유명한 논문을 썼습니다. 네가 관찰한 그대로가 사실이다, 그런데 100년도 못 되어서 로마황제가 인간 말종들, 쓰레기들의 입에서 고백되는 그를 주라 고백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예언했습니다. 로마는 퇴역군인을 무시했습니다. 로마는 고아를 무시했고 로마는 여자를 무시했고 노예를 무시했고 소작인을 무시했습니다. 로마제국이 무시한 모든 사람을 다 흡수한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온 그 사람들이 헌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집 없는 퇴역군인, 소작인, 소작인이 진화하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진화하면 강도가 됩니다. 해적이 됩니다. 해적되기 직전에 절망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다 몰려왔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이 잔치를 벌이고 낳은 아이들이 고아들입니다. 그걸 누가 다 모았습니까? 교회가 다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으니까 사실 로마제국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교회가 다 흡수했습니다. 국가란 존재는 약자를 보호하는 겁니다. 국가의 존재목적은 약자보호입니다. 그런데 그 약자보호는 감독들, 주교들이 다 했습니다. 주교와 감독들은 로마황제와 똑같은 역할을 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이 로마가톨릭교회를 세운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노동부, 국가 내각에 맡겨놓고 있다? 그건 너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국가 내각이 하기 전에 이 땅의 교회가 온통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 병든 노인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전부 다 흡수통일 하면 교회가 국가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발을 씻어주는 것,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잘못 살아버린 인생의 서글픈 죄도 품어준다는 말입니다. 냄새나는 발을 씻어준다는 말은 잘못 살아버린 내 자식의 인생도, 잘못 살아버린 내 친구의 인생도, 우리 이웃의 인생도 돌봐준다, 씻어준다, 영적 정화와 청결을 주면서 내가 그 냄새를 품는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악취 나는 인생의 사연들을 받아들여서 악취나는 그 인생의 발들을 정화시켜서 깨끗한 발이 되게 만들어줍니다. 깨끗한 발은 공동체 적응하기에 충분히 죄사함 받은 자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발을 씻어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공동체에 도무지 적합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적합한 개인이 되는 것은 사랑의 세족을 경험한 겁니다. 사랑의 세족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세족을 당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진실을 피할 수 없느냐? 누군가의 오염 물질 같은 인생, 발과 자아와 인생사연을 묵묵히 들어주면서 절대로 발을 잘라버리겠다는 둥 이런 말을 쓰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님에게 직접 발 씻음 받은 사도적 자아를 가진 겁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이 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짜 죄사함과 자아가 세척되는 사랑의 손길을 진실로 경험한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냄새나는 자아를 가진 형제들을 배척하고 심판하고 다 쫓아냅니다. 우리 가향교회는 아직까지 사랑 섬김 등에서 현저할 만큼 대안공동체가 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영적세척을 나날이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경험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우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신도 모르게 부둥켜안고 씻어줄 수 있는, 본을 따라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원래 룸메이트끼리 잘 안 됩니다. 한 방에 같이 자보면 잘 안 됩니다. 부부관계도 생각보다 잘 안 될 수 있고, 자매관계도 잘 안 될 수 있고, 형제관계도 잘 안 될 수 있고, 공동체 생활하면 더더욱 진짜 냄새가 많이 납니다. 밀착된 대형으로 조금씩 사정거리를 좁히면서 발을 쭉쭉 벗는 순간, 내 자아가 노출되는 순간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아이고 그 인간과 내 인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나는 그의 발을 볼 때마다 찍어버리고 싶다, 속으로 복수의 혈담을 합니다. 공동체는 밀착되면 밀착될수록 진짜 요한일서가 필요할 만큼 서로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을 들어주고 우리가 지혜롭다고 말하면 주님은 거짓말이라고 만들만큼 고백공동체가 되는 그 과정에서 어떤 진통을 해요? 냄새, 사정권 내에 위험부담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향교회가 인위적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지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점점 어찌할 수 없이 밀착대형으로 모이게 됩니다. 밀착대형으로 모이면 누군가가 주도적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라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본받아서 몸을 굽히는 굉장히 조밀한 사랑의 공동체로 경결하게 묶어지고 이발 저 발 자르고,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조선 사람 발 자르듯이 잘라버리면 우리는 공동체로서는 유산돼 버립니다. 오늘 즐겁고 복된 부담이 있습니다. 즐겁고 복된 부담은 조밀한 공동체 생활을 할 때 내가 크다는 그 생각을 가지고, 내게 고개를 숙이기 힘들게 만드는 그 사람이 내 인생에 나타날 때 무슨 signal을 읽어야 할까요? 그때 몸을 구푸려야 하겠구나, 제가 여러분 교우들에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가 동료교수 동료신학자에게, 내 또래에게 유사한 사람에게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내가 좀 더 나은데, 내가 좀 더 큰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이 분이 내가 고개를 숙여서 그의 발을 씻겨줄 만큼, 내가 그의 종이 되어줄 만큼 이분은 나에게 지체 높은 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몸을 딱 구푸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주적인 평화가 오게 됩니다. 여러분끼리는 비교적 쉬울 줄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로 친숙하면서 내가 그의 약점을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경우가 되는 관계는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도록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고, 세숫대야에 물을 뜨는, 그래서 씻기를 시작하는 마침내 주와 스승께서 엎드렸던 그 굴욕의 낮춤, 주와 스승 되신 우리 주님이 땀을 흘리면서 하셨던 부드러운 손놀림, 이걸 모방하는 내가 너무 복된 자다, 내가 몸종으로서의 봉사를 기대하는 나의 동료 나의 친구 나의 지체 그의 발을 부둥켜안는 것이 내 인생의 큰 행복이다, 이런 즐거운 마음이 들어서 본받기를 바랍니다. 이 즐거운 마음이 안 드는데 한다? 소화불량 걸리겠죠. 위궤양 걸립니다. 이런 몸 구푸리는 행위가 우리 안에 계속 일어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아마도 큰 은혜가 임하여 대안 대조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 식탁에서 우리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최후의 식탁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향이 최후의 만찬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서로의 발을 씻겨주기 보다는 서로를 부려 먹으려고 했던 모든 사탄적 지배욕구 사탄적 권력의지가 최후의 십자가를 맞이하는 최후의 식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몸종 예수 그리스도의 DNA가 우리 모두에게 이식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장 내밀하고도 친밀하고도 친숙한 인간관계에서 몸을 구푸려보는 한 주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냄새나는 자아를 향해서 부둥켜안고 말없이 씻어주고 어떤 마귀가 어떤 행동의 역겨움도 표시하지 않고, 저주도 퍼붓지 않고 그냥 그의 발을 묵묵히 씻어내는 사랑의 묵언수행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와 스승이 되셔서 목 땀 흘리면서 하셨던 행동을 우리가 할 수 있도록 도전 받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친숙한 사람에게, 사랑의 공동체에 접근한 형제자매에게 누가 크냐는 지배욕구 때문에, 사단적 권력의지 때문에 몸 구푸리기 힘들고 겉옷 벗기 힘들고 몸을 낮춰서 몸종이 되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몸종이 되느니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만큼 우리는 교만합니다. 주님이여, 우리의 교만한 자아, 타인을 부려 먹으려 했던 사단적 자아가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 앞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놀라운 영적 환골탈태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가향교회가 조밀해질수록 서로에게 약점을 퍼트리면서 서로의 비방거리를 만들고 실족거리를 만들지 말고, 천근의 침묵으로 형제자매의 연약함을 부둥켜안으면서 고단한 발을 닦고 영접의 눈물을 떨구는 주님 본받는 행위가 우리교회에 가득 찰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무리 가까워질수록 험담과 비방이 넘치지 않고 천근의 침묵으로 모든 냄새를 끌어안으면서 사랑의 눈물을 떨구는 감격이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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