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주일1부예배_ 요한복음 13장 1-11절 (친히 몸종(둘로스)이 되신 예수님)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12장 1절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2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약6일 동안 베다니와 예루살렘에서 보낸 일들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2장은 겟세마네 기도가 적혀 있고 주님께서 마지막에 했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목요일 밤, 금요일 새벽 4시 정도에 체포당하시고 예수님께서 금요일 정오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목요일 밤에 하루가 남아 있는 겁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이 말은 매우 에둘러 한 표현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12장 3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해서 적의가 충천해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당국자들의 매서운 권력의 맛을 불가피하게 보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의식하면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볼 때 유월절 어린양으로 당신이 붙들려 죽으실 것을 예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남은 시간은 매우 짧은 시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는 장면은 많지 않고,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스럽다고 느낄 만큼 유들유들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민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을 느끼시는 분은 전부 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당시를 지배하던 지배권력자들로부터 소외된 자들이고 눌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을 사랑으로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위험스럽게 느낀 사람들은 예루살렘 종교당국자와 총독 빌라도와 헤롯 분봉왕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랑을 했던 대상은 자기 사람들입니다. 자기 제자들입니다. 자기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배타적 사랑이고, 특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만 특별히 사랑하신 이유는 이 배타적 사랑이 보편적 사랑으로 전환될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특별하게 사랑하는 것은 그 특별한 사랑이 한 가지 의미에서만 정당화됩니다. 그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특별한 사랑을 받기 전보다 훨씬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가능성이 있을 때만 특별한 사랑에 대한 이해가 성립됩니다. 저는 수업할 때 그런 말을 합니다. 제가 이 class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러분 실족하면 안 됩니다, AA 모모, BB 자매나 형제를 사랑할 때 그것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사랑을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똑같은 사랑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원리를 확정하기 위해서 특수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저는 특수한 사람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그 이유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보상이 있다는 보편적 원리를 구체화시키기 때문에 장학금을 줍니다, 이 사람의 생물학적인 요소들의 조합에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가치에 상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반장 부반장을 불러서, 여러분은 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보편적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이 class에서 선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고, 우리 학우들 모두가 낙오하는 일이 없도록 격려하는 자가 돼야 합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특별한 사랑이 한 가지 경우에 정당화됩니다. 그 특별한 사랑을 받기 전에는 보편적 사랑의 사도로 바뀔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인데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나서야 보편적 사도적 사랑, 이 세계 만민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감복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세계만민을 동시다발적으로 희미하게 보편적으로 똑같이 사랑하는 것보다 몇 사람을 선택해서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불멸의 기억을 남기면서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왜 하나님은 선택하고 집중합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집중하는 이유가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사랑을 폭포수처럼 쏟아 부으면 그 사랑의 기억을 가진 사람만이 목숨을 걸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 한 시간씩 만 명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한다면 그 사랑은 누구에게도 불멸의 기억을 남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만 시간동안 사랑하면 그 만 시간 동안 사랑받은 그 사람은 불멸의 사랑을 기억하고, 세계 만민 9999명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생기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극단적 사랑, 이 집중적 사랑이야말로 세계만민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되도록, 그래서 결국 누가 나왔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1500년 동안 누적된 사랑이 어떤 인간형을 탄생시켰어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1500년 동안 누적된 집중된 사랑, 선택된 사랑은 결국 예수를 만들었어요. 선택과 집중이 가져온 하나의 질적 변화입니다. 여러분도 자식이 있으면 누군가를 편애하게 되고, 편애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편애의 수혜자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어쩔 수 없이 불편부당함을 다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억울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독자, 장자는 동생들과 나머지 식구들에 대한 선교적 책임감이 있는 거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나에게 적은 사랑을 주셨지만 책임감을 덜 무겁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이렇게 신학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런 원리로 편애하는 겁니다. 엄마 아빠는 신학을 모르기 때문에 특수와 보편, 이런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국 됩니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시간이 있을 때까지 사랑하는 겁니다. 둘째 극한을 드러내는 사랑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 경지를 넘어서는 안 되는 수준까지 넘어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사랑이 감행될 그쯤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과 지금 제자들이 이 본문 직전에 있던 상황은 마태복음 19장, 마가복음 10장 35-40절 상황입니다. 최후의 만찬에 앉기 직전상황은 누가 크냐는 논쟁이었습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 논쟁을 촉발시킨 분은 예수님으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주의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는가가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주의 나라 인자의 나라가 영광 중에 임한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은 누가 좌우편에 앉는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 끝에 사도요한의 어머니가 선수를 쳤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전 재산을 바쳤던 요한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열 제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먼저 꺼낸 어머니와 두 제자에게 분히 여겨서 서로 싸움을 했습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이 일어났을 때는 서로 섬기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군대에서도, 동아리 신입사원 사이에도, 모든 세상에는 전부 다 신입과 고참 사이의 권력관계가 있습니다. 명성교회 같은 경우도 나이가 많아도 그 교회에 2년 늦게 들어가면 완전히 하대를 당합니다. 이게 목사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제일 평등한 계급사회가 군대밖에 없습니다. 군대는 시간이 다 만민을 평등케 합니다. 군대는 평등한 계급사회입니다. 시간이 다 해결해줍니다. 명성교회나 <조선일보>는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똑같은 학번인데 2년 늦게 들어간 사람이 2년 먼저 들어간 사람한테 완전히 깎듯이 해야 합니다. 제가 2년 먼저 들어간 친구랑 밥을 먹었는데 2년 늦게 들어온 친구가 들어오더니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면서 똑같은 동료인데, 안녕하십니까? 너무 기가 막혔습니다. 동창회 가보면 누가 크냐? 소득 수준에 따라서 결정되고, 여자 동창회는 누가 좋은 핸드백을 들었느냐에 따라서 모든 순위를 결정합니다. 남편의 소득수준, 남편의 소득수준이 동률일 때는 자녀의 대학입학 성적입니다. 그것도 동률일 때는 휴가 받는 일수, 권력관계가 다 있습니다. 이런 데 대해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야만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우리는 못이 박히기 힘듭니다. 못이 박혔다가도 다시 살아납니다. 내가 형편없이 산 거 아닌가? 우리 아들은 내내 1등급 받더니 서울대 경영학과 밖에 못 갔어, 동문 하나가 이 자식이 중학교 3학년 때 가더니 하버드 법대 밖에 못 가네, 이런 동문이 나옵니다. 서열, 누가 크냐는 논쟁이 우리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어서 섬기는 걸 힘들게 만듭니다. 여러분 교회가 하나님을 입에 내 뱉는 순간, 권력을 주장하는 순간 기독교는 무너집니다. 기독교와 권력은 절대로 같이 가면 안 됩니다. 신과 칼이 같이 가면 안 됩니다. 신과 칼이 하나, 이노센트 3세, 태양은 하나밖에 없다, 칼과 신이 하나다, 이게 유명한 교황권의 세속지배입니다. 교황이 권력까지 쥐려고 할 때 교황이 부패하는 겁니다. 11-12세기입니다. 언제 주교들이 가장 좋았습니까? 아무 권력이 없고 순교당할 권력만 있었을 때가 가장 빛났습니다. 그때가 키프리안 때입니다. 230-250년 이때는 주교가 바로 갑니다. AD 115년 트라이누스 황제가 주교만 잡아 죽였습니다. 일반 평신도는 죽이지 말고 교회 우두머리만 죽이라는 법이 트라이누스 법입니다. 유명한 첫 순교자가 저스틴입니다. 칼과 하나님이 같이 가면 이슬람이 됩니다. 이슬람은 11세기 중세종교입니다. 이슬람의 악함은 신권, 코란 해석자가 칼까지 가지는 것, 이게 바로 코멘입니다. 칼과 총 법 이것을 다 통틀어 인간을 전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가 이 세상에 미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해악입니다. 자본주의가 정말 더럽고 추악합니다. 돈만 있으면 개인의 자유를 무한히 확장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돈 앞에서의 평등입니다. 너무 웃깁니다. 군대는 시간 앞에서의 평등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주기 때문에 아무리 이상사회를 구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억압과 부자유가 있고 칼 밑에 복종을 유발하면 그건 인간성이 견디질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악하지만 그 악한 자본주의가 인간성과 공존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유입니까? 돈을 가지면 순간적인 자유는 있습니다. 훔친 돈이라도 돈 자체는 신성한 빛을 가지면서 훔친 돈도 한 시간의 쾌락을 살 수 있고 훔친 돈도 1년간 2년간 3년간 평안을 줍니다. 이것이 돈 앞에서 누리는 거짓된 유사평등입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 앞에 만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무릎을 꿇리고 복종을 유발하는 모든 담론은 참된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몸종이 되셔서 자기 신성의 겉옷을 두르시고 맨살로 인간의 연약한 발을 씻고, 잘 못 살아버린 파손된 인생을 보듬어 안고 그걸 씻어주고 세척해주고 갱생시켜 주는 끊임없는 갱생작업이 하나님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구부리시고 신성의 겉옷을 두르시고 절대적인 권위를 벗어놓으시고 상대적인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오물 같은 발을 씻어주는 하나님, 이런 극단적인 자기 비움의 양태가 하나님 행동이고 하나님 언어고 하나님 양상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혼돈되면 안 됩니다. 목사님이 권력과 영광을 탐할 때 하나님을 떠난 자입니다. 어떤 교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광을 취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입니다. 어떤 기관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섬기려 하지 않고 겸허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비우려고 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통째로 다 쏟아 부으려고 하지 않고 채우려고 하고 잡으려고 하고 누리려고 하고 장악하려고 하면 참되신 하나님과는 상관없습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참 되신 하나님과 상관없어도 종교는 성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참되신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가 성업하는지 아십니까? 진짜 이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일종의 가설무대 같은, 신성을 느끼게 만드는 가설무대 같은 것이 제도권 종교입니다. 로마 가톨릭 종교고 그게 목사들의 세계입니다. 어떤 분이 가장 영분별을 잘 할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단파방송으로 포착해서 직접 듣는 평신도가 가장 이 세상의 종교권력들의 패역성을 빨리 알겠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교회를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셔야 합니다. 이런 저런 교회 힘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성령 충만한 개별신자가 되는 길이 교회에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휘둘려집니다. 목사님에게 휘둘려지고 주교와 신부들에게 휘둘려집니다. 저는 이제 거의 결론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도권 종교, 유급 성직자들이 거대한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신하기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코 기독교인 숫자가 많을수록 기독교 진리를 실천하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숫자가 많아질수록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두 사람이 순교적 결단을 하는 것보다 200사람이 순교적 결단을 하는 것이 훨씬 힘듭니다. 2만 명이 순교적 결단을 하는 것은 영원히 힘듭니다. 교인이 절대로 많아지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힘들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2만 명에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은 메시지를 주지 않습니다. 극소수에게만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 극소수가 2만 명을 설득할 길이 없습니다. 왜 큰 교회 당회가 내리는 결정은 전부 다 엉망진창일까요? 필연적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알면 필연적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녁 먹는 중에 누가 크냐는 논쟁, 인간의 항구적 관심사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권력의지, 다른 사람을 부리는 능력이 많아지는 것이 출세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부리려는 마음을 제도적으로 확보해주는 것이 출세하는 겁니다. 자기 몸을 구부려서 다른 사람을 필요를 채우는 것은 노예의 일입니다. 그것이 둘로스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리려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부려 먹으려는 사람이 이방인의 집권자, 이 세상의 모든 악마적 권력자입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은 예수님께 3년 동안 얼과 혼을 배웠던 제자들이 한 논쟁입니다. 순식간에 예수님의 제자가 가이사의 제자가 돼 버렸고 헤롯 분봉왕의 제자가 돼 버렸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3년 배웠다는 것이 너무나 배반적이고 기만적입니다. 예수님께 많이 배운 것 자체도, 예수님께 3년 같이 있던 사람도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마귀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과 얼마나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자태로 겉옷을 벗고 친히 몸종이 되려는 행위를 실천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BC 73-71년 나폴리 근처의 검투사들 양성소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쿠스 반란입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한 성 어거스틴의 논평은 스파르타쿠스나 로마황제나 똑같다는 겁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에서 해적질하는 해적을 잡아서 심문을 했습니다. 너 왜 해적질 하며 이 모양 이 꼴로 사냐? 좀 좋은 일 할 수 없냐? 이렇게 물었더니, 대왕이 하시는 일과 제가 하는 일이 똑같지 않습니까? 둘 다 약탈과 도둑질 아닙니까? 대왕님은 좀 큰 배를 타시고 저는 작은 배를 탔을 뿐입니다,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4권에 나옵니다. 이 세상에 남을 부려먹는 모든 지배권력 의지, 이것은 악한 겁니다. 그래서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쓴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였는가>에 보면, 예수의 초대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지배의지의 영원한 단념입니다.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섬기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몸을 구부립니다. 몸이 아주 중요합니다. 몸을 노예적 민첩성으로 단련해야 합니다. 우리 요한형제가 몸을 노예적 민첩성으로 단련했는지 살이 쏙 빠져 왔습니다. 한창 애기 낳고 나면 노예적 민첩성이 필요합니다. 결혼하니까 어떻습니까? 노예적 민첩성이 필요하죠?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 현준형제도 아는 것 같습니다. 남을 섬기려면 몸이 엄청 신속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몸을 구부리는 것이 그리스철학에 의하면 가장 열등한 겁니다.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노예가 하는 것이고, 고상한 정신을 가진, 신과 가장 가까운 누스, 영을 가진 인간은 절대로 몸을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리스철학의 필연입니다. 그리스 철학에 의하면 노예는 반쯤 인간이 아니다, 왜? 몸을 가지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육신을 가지고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여기가 성육신의 가장 극단적인 목적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종이 되셨다, 우리 주님은 왜 육신을 입으셨습니까? 몸종이 되시기 위해 입으셨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인간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육체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육체로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경직된 식사 분위기를 깨치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왜 겉옷을 벗으셨습니까? 로마제국 시대 때 겉옷은 무기를 감출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는 항상 겉옷을 벗어서 나는 무기가 없습니다, 비무장임을 알려줘야겠죠? 거의 모든 메소포타미아 노예들의 특징이 겉옷을 벗은 것입니다. 미국 노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가 겉옷을 벗는 이유는 나는 비무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무기를 갖지 않은, 로마제국 시대 때 흔히 양반 집에 있는 그 노예처럼 겉옷을 벗고,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바리새인 집에 있는 발 씻어주는 그 종처럼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이 장면은 제가 재작년에 발리에 가서, 발리 힌두교 부모 밑에 자란 아이들 400명에게 기독교 드라마를 보여줬습니다. 25분간 굉장히 감동적인 음악드라마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세족식을 하는데 끝날 때쯤 돼서 힌두교 부모 밑에 자란 6학년 아이들, 13세 정도 된 아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장면을 보면서 갑자기 엄청나게 오열을 했습니다. 물론 언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다 음악극이었습니다. 전부 다 자기 죄 때문에 오열을 하는데 거기서 발을 씻어줬습니다. 세 시간 동안 400명을 한 사람씩 다 씻어줬는데 이 장면이 압권입니다. 발을 씻어줄 때 아이들이 영원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걸 힌두교 부모들이 보고 있습니다. 힌두교 부모들도 기독교 학생 선교사들이 세 시간동안 음악극과 더불어 발을 씻어주는 장면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길이 이길밖에 없습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저층민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은 발이 다 부르터 있습니다. 그 발을 씻어주는 것, 힌두교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인도에 간 기독교가 유일하게 하나님 사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했던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힌두교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몸을 구부려서 발을 씻어주는 하나님을 과연 어느 누가 과연 양심을 가진 사람이 거부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옳게만 대표하고 옳게만 알려주면 교회 와 있는 사람보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이 더 예수님을 잘 믿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 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대신하고 대표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가 너무 잘못 알려줬기 때문입니다. 발은 이 세상을 살다가 어쩔 수 없이 더러워지는 자아를 가리킵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세례를 받을 때 다 깨끗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접목될 때 이미 우리는 깨끗케 되었습니다. 원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죄에서 벗어났지만 우리 인간성은 아직도 죄의 권세에서 영원히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은 아직도 로마서 8장 23절처럼 속량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몸이 속량되었다면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이성적 접촉에 의해서 음란한 마음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내가 몸이 속량되었다면 이미 배가 부른데 맛있는 음식을 보고 탐욕적인 식탐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내 몸은 예수 믿었지만 여전히 속량되지 못한 몸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죄악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하는 자이고, 또 더러워지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걸 너무 잘 알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깨끗케 된 온 몸을 가진 사람도 발이 더러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발은 땅과 접촉하는 부분입니다. 세상과 접촉하는 우리 인격 자아는 더러워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더러워지는 걸 이해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더러워지는 그 과정을 이해하시는 예수님은 그 더러워지는 발을 스스로 매일 씻어주기를 기대한 겁니다. 교회에서는 매일 서로 씻어줘야 합니다. 교회에서만 씻어줘야 합니까? 서로 씻어줘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친구끼리도, 이 세상 오염가운데 살면서 이 세상과 오염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옛 자아, 속량 받지 못한 우리 몸을 씻어주는 사랑의 촉감이 예수 안에서 서로 교환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촉감어린 그 사랑을 재현하는 사랑이 서로에 대해서 끊임 없이 실천될 것을 기대하신단 말입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그러나 발은 씻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났고 하나님 자녀가 됐지만 이 세상의 온갖 위협과 유혹과 방사능 피폭지대와 같은 오염물질과 접촉하며 사는 우리의 직장생활과 우리의 세상살이에서 우리의 자아는 더러워지고 우리 인격은 더러워진다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은 씻어주십니다. 어떻게요? 몸을 구부리셔서, 이게 참 중요합니다. 이런 기독교만 참된 기독교고 이런 하나님만 우리가 경배해야 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경배할 하나님은 신성의 겉옷을 벗으시고 맨살을 드러내신 채로 우리의 오염된 자아를 씻어준 구부리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경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저는 이런 우리 하나님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이런 분이 우리 왕이심이 너무 감격스럽고, 이런 분이 우주의 창조주고 이 우주를 이런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국정원에 대해서 절망합니다. 국정원, 새누리당, 도덕적으로 사이코패스 같은 이런 집단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를 지탱하는 분은 자기의 권력을 비우시고 몸종이 되신 발을 씻으신 이런 분이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왕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했던 모든 착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우편 보좌, 하나님을 대리하는 모든 대리권력자들이 해야 할 일을 표본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우리 주님의 왕권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모든 왕권은 왕위 찬탈자입니다. 오바마, 후진타오, 시진핑, 아베, 박근혜, 모든 지상의 권력자들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버금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했던 겸손한 자기 비움, 극한을 치닫은 순결과 사랑의 통치 앞에서는 이 모든 지상의 권력자들은 왕위 찬탈에 불과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고 반역자들이지, 절대로 왕이 아닙니다. 많이 걱정됩니다. 우리 주님을 아는 지식이 희미해져 갈 수 있도록 세상에 악한 지배자들과 공모하고 제휴하는 자들이 너무 빠르게 급속히 늘어가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고 영남 보수카르텔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으면서, 우리 주님이 이미 갈릴리 일대에서 보여주셨던 착한 버금왕의 사역을 기점으로 중심으로 지상의 모든 왕권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옳다, 옳지 않다, 우리는 심판해야 합니다. 우린 교회에서 심판해야 합니다. 저는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도덕적 파탄상태에 빠진 것을 봤습니다. 북한은 진작 도덕적 파탄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도덕적 파탄에 빠지고 영적 파탄에 빠진 자들이 7500만 동포의 지배자가 돼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맨살 맨 육체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김정은 오바마 푸틴 같은 악당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가향교회에서 신성의 겉옷을 벗고 서로 발을 씻어주셨던 주님의 급진적 사랑을 실천할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냉소하기 보다는 우리가 가진 자유의 빈틈에서 엄청난 사랑을 급진적으로 실천하면서 이 세상과 다른 세상, 대항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명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하지만 대안과 대조, 대안사회를 만들어야 할 엄숙한 사명이 더 큰 사명이 돼야 합니다. 냉소하지 말아야 하고 비판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하고 대안 대조 사상, 급진적 사랑의 실천을 일삼음으로써 주님이 온전히 통치하는 왕국을 만듦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방수처리가 된 멋진 공동체를 만들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의 더러운 자아를 씻기기 위해서 몸을 구부리시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창조주 우리 하나님이 육신의 세계에 오셔서 자기가 만드신 창조물이 이렇게 더럽고 추악하게 일그러졌어도 그 일그러진 우리 자아를 낱낱이 부드러운 손길로 씻어주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 앞에 저는 감격할 수밖에 없고, 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일주일 동안 오염된 지역에 살면서 더러워진 자아를 주님의 손 안에 맡기면서 정결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우리 하나님의 세상 통치를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진짜 세상을 통치하시는 행위입니다. 모든 세상권력자들의 세상 통치 행위는 찬탈자들과 강도들의 약탈행위와 같습니다. 이런 급진적인 대조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대안사회, 대조사회, 대항사회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서로에 대해서 몸 구부린 몸종으로 서로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가지, 몸종으로 자기를 급진적으로 낮추려면 자기가 하나님 자녀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미 자기가 하나님 자녀임을 확신하지 못한 사람은 몸을 구부리고 싶어도 못 합니다. 왜? 너무 굴욕감이 들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만,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몸을 구부릴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몸을 구부리는 것은 성령의 감화감동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왕들과 주권자들을 보면서 우리 주님과 생생한 대조를 해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교회에서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한 자들의 손아귀에 맡겨져 있다 할지라도, 도덕적 영적 파탄자들이 활무대를 이루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급진적 사랑과 왕적 통치를 실행하고 추종하고 모방할 자유는 있습니다. 우리가 냉소하지 말고 비판을 넘어서 자생영생공동체, 자생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감동 받은 사람이 먼저 몸을 구부려서 겉옷을 벗고 몸종이 되는 놀라운 실천이 일어나게 해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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