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주일설교 1부-요한복음 12장 44-50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싱크로율 100%)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
예수님의 어법 중에서 가장 독특한 어법은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매우 완곡어법을 자주 구사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지극히 절제 있게 사용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말할 때는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자라는 말을 가장 많이 썼습니다. 제가 설교 요약문에 다시 이걸 추가해놓았습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파송양식 언어라고 합니다. 파송했다는 뜻이죠. 예수님이 썼던 언어 중에서 가장 독특한 어법은 피파송의식, 파송 당했다는 의식을 드러나는 파송양식 언어를 가장 즐겨 쓰셨습니다. 파송양식 언어는 원래 예언자들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어느 랍비도 파송양식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랍비들은 선생님, 내 스승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학자들은 내 스승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고 말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당시에 힐렐과 샴마이라는 유명한 양대 랍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항상 내 윗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의 이름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400년 전에 끊어졌던 예언자, 피파송양식,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말을 직접 인용했습니다. 그걸 히브리말로 코 아마르 아도나이 양식이라고 합니다. 또는 너홈 아도나이 양식, 코 이렇게 아마르 말씀했다 아도나이 하나님,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는 말을 하면 긴장했습니다. 왕들이 예언자가 나타나서 코 아마르 아도나이 라고 말하면 이때부터 긴장을 하는 겁니다. 왜? 이때부터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권력자가 감당할 수 없는 파괴적인 언어가 나오는 겁니다. 김현준 형제가 만일 내가 왕인데 예언자로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와서 코 아마르 아도나이, 제가 그때부터 필기해야 하고 제 마음을 찢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언자란 존재는 코 아마르 아도나이,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양식은 말라기 이후로 끊어졌다가 세례요한에게서 나타난 겁니다. 세례요한의 언어가 왕궁까지 영향을 끼친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랍비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랍비들은 축척된 전통과 자기 학문적 가문에 속한 사람들의 바로 윗세대를 인용함으로써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 보다 훨씬 더 차원 높고 격조 높은 코 아마르 아도나이,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는 양식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어법으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이 전부 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갖는 파송의식을 훨씬 뛰어 넘는 파송의식을 가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자들은 아무도 나는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는 말을 안 했는데, 예수님은 모세 사무엘 이사야 엘리사 엘리야 다 합한 사람들을 그 모든 예언자들의 파송의식 또는 피파송의식, 그걸 다 합한 것보다 더 강력한 확신, 나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질적 차이가 있는 줄 알겠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더 하나님 말씀과 가깝습니까? 자기 자신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자가 더 무서운 자입니까? 예수님은 바로 후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라는 완곡어법을 쓰심으로 세계종교 창시자들과 너무 다른 어법을 구사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은닉시키시고 감추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라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권력자의 냄새가 납니까? 안 나죠? 권력자의 냄새가 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집행하고 순종하고 성취하려는 의지만 드러나죠? 제가 요한복음 전체에서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셨다는 파송양식, 사자양식 언어, 사자는 messenger 라는 뜻입니다. 사자를 파송했을 때 쓰는 언어가 얼마나 철저하게 요한복음에 스며들었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를 믿는 것 이상이다,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이 당시 예언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때, 이런 해석의 틀을 가졌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동격이다, 이런 랍비들의 해석 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회중들이 알고 있는 보냄 받은 자와 보냄을 받은 자는 하나다, 랍비들이 구사하던 해석의 틀을 의지하는 겁니다.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죠. 왜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느냐?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종교권력을 자기가 구사할 수 있는 위험한, 너무나 굉장히 놀라운 위치에 자기를 올려놓는 셈이 됩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저는 자신도 모르게 믿건 말건 권력자와 동일시하는 셈법의 언어를 구사하는 셈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나를 보내신 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씀으로써 철두철미하게 순종과 말씀 실천을 온 힘을 다하여 할 것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 중에 거짓예언자들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를 너무 자주 남발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6-28장을 보면 거짓 예언자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갈등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셨다는 것을 오히려 의심을 합니다. 자신이 했던 모든 말들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면서 지상의 권력자들에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바로 전했는가 의심을 합니다. 그런데 거짓예언자들은 한 번도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전했는가 안전했는가를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집요하게 코 아마르 아도나이,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독창적 사상이 없습니다. 모든 고대 종교 창시자들은 독창적 사상가입니다. 예수님은 독창적 사상가가 아니라 모방과 신뢰와 순종하는 사람, 즉 하나님을 믿는 일에 독보적 치열성을 보인 분이지 사상의 독창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자기 사상의 독창성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걸 비교해보시면 됩니다.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이오니아학파, 탈레스 학파라고 일컬어지는 터키 남부해변지방 이오니아 지방의 자연철학자들, 탈레스부터 엠페도클레스 아낙시메네스, 이런 철학자들의 모든 것을 집대성합니다. 그게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 직전 스승, 소크라테스가 계승했던 학파의 제일 우두머리는 만물은 물로 돼 있다, 유물론적인 철학을 가졌습니다. 유물론적 철학을 가졌던 아낙시메네스가 오면, 아니다, 만물은 정신과 물질의 동등한 상호작용이다, 소크라테스의 바로 직전 스승은, 만물은 90%의 정신과 10%의 물질로 구성되었다, 마침내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아니다, 만물은 정신 우위적 사상이고 정신이 물질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정신우위의 사상을 소크라테스가 만든 겁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매우 독창적인 겁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독창성이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성취하는 치열성에 있어서 독보적이었지, 독창성의 독보성은 없었습니다. 이건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독창적 사상을 만들어내는데 신경을 쓰면 안 되고, 이미 밝혀진 공적 진리에 대한 순종의 치열성, 실천의 독보적 탁월성, 그걸 만들어내는데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나를 보내신 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왜 그런가를 꼼꼼히 생각했습니다. 예전에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나를 보내신 이라는 표현이 숱하게 매 장 나오는가 이해하지 못하다가 요즘 다시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마다 순종의 무한부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이 말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모세의 하나님은 믿겠지만 나를 믿지 못하겠다, 나사렛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유대종교당국자들의 허위의식을 격렬하게 고발하는 말입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안다면 나를 알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는 겁니다. 나는 구약성경으로부터 돌출된 자가 아니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는 자가 아니라 구약성경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해오신 그 하나님의 보내심의 역사에 마지막에 나타난 자라는 말입니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빛과 어둠을 다시 대조시킴으로써 예수님은 순식간에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1장 1-3절로 돌아가 버립니다. 나는 창세기 시점으로 올라가야만 이해된다, 어둠의 세상을 빛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냈다, 그런 뜻이 이 안에 들어갑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만일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어둠은 무목적성입니다. 어둠은 하나님 앞에 아무 목적 없이 사는 것입니다. 어둠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견딜만한 선량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목적 없이 살고 고결한 목적에 투신돼 있지 않은 삶은 어둠에 붙들려 사는 삶입니다. 창세기 1장 1-3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 인간은 혼돈과 공허가 지배하는 인생입니다. 혼돈과 공허가 지배하는 인생에 대한 성찰은 직업을 갖기 전 청년 때 가장 치열하게 일어납니다. 직장을 갖고 나면 혼돈과 공허가 지배하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이미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실천과 요구가 너무 많이 우리 인생을 옥죄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 자체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텅 비었다고 느끼는 절대적 공허함, 절대적 허무함이 지배하는 우주에 빛을 창조하셔서 진리의 기준점을 창조하심으로, 진리의 절대치를 보여줌으로, 내가 모든 재능과 목적과 삶의 시간들이 중심으로 삼아야 할 절대기준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목적지향적인 삶이 되고, 성취지향적인 삶이 되는 것이 바로 빛의 창조입니다. 빛이 창조되지 않은 삶의 특징은 어둠속에 붙들려 있는 삶입니다. 어둠속에 붙들려 있는 삶은 순간순간 성실하지만 전체적으로 허무한 삶을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어둠에 붙들려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창세기 1장 1-2절에 붙들려 있는 삶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데 그 혼돈하고 공허한 흑암이 깊은 바다위에 떠도는 그 현장에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바람이 그 흑암의 깊은 바다 위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작은 실마리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우리의 깊은 흑암위에 운행하고 있는 그 상태가 지속되다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빛이 있으라’ ‘빛이 있으라’, Let there be light, There was light, ‘빛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어둠에 붙들려 있는 인생 가운데 여호와의 신으로 그 깊은 바다 위에 운행하셨다가 임계점에 도달하는 어느 순간에 명령을 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이 ‘빛이 있으라’ 하는 그 순간이란 뜻이죠. 돌이켜 보면 우리가 예수님 없이 살 때는 어둠 그 자체에 사로잡혔습니다. 제가 읽고 있는 <산둥수용소>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너무 기가 막힙니다.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개념인가를 말한 책입니다. 하버드 신학대학을 나온 랭돈 길키라는 유명한 구약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유명한 구약신학자가 약 3년 동안 중국에서 일본군 포로로 잡혀서 산둥반도 위엔 수용소에서 지낸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야기와 전혀 다른 맥락의 독특한 인류학적 보고서입니다. 좁은 공간의 수용소에서 사니까 선교사 교수 성자, 도덕감 넘치는 중산층이 아무 의미가 없더라는 겁니다. 인간 안에 있는 도덕성이라는 것은 허구다, 전부 다 원시적 이기심에 지배를 받고 있고 탐욕에 지배를 받고 있는데, 이 이야기가 충격적인 것은 미국 적십자사가 미국 수용소 1450명 중의 200명의 미국 사람에게 선물꾸러미를 보냅니다. 선물꾸러미가 1500개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은 1400명입니다. 적십자정신은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 사랑을 나누는 것이죠? 아마 미국 적십자사가 1500개의 선물을 보낸 것은 일인당 하나씩 돌아가도록 보냈을 텐데, 그걸 받은 미국 사람들 200명이 7개씩 나누겠다는 겁니다. 7개를 나누겠다는 미국 사람 중에 선교사가 많습니다. 이 식품을 배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24살 하버드 대학 출신의 길치라는 중국에 와서 영어 인턴 교사로 있던 사람이에요. 우리가 이런 흑백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단순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와 있기 전에는 우리가 어둠인줄 모릅니다. 예수님을 보는 순간 내가 의지했던 도덕성과 선한 마음들이 전부 다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인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지 않으면, 어둠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예수님을 붙들지 않으면 중립적인 도덕적 선과 악의 중립지대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강력하게 take hold of, 붙들지 않으면 어둠이 우리를 붙들어 버립니다. 그것이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한 거잖아요.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빛 가운데 지나지 않으면 어둠의 지배를 받는다, 집단적 이기심에 매몰된다, 네가 속한 계층과 계급의 지배논리에 네 개인이 희생된다, 히틀러치하나 일본 군국주의 치하에서 일본 사람 중에 선량한 사람이 있었죠? 그들은 빛을 붙들지 않은 순간 어둠에 붙잡히게 됩니다. 어둠에 붙잡히는 순간은 빛을 적극적으로 붙들지 않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가오는 6일 동안 적극적으로 빛 가운데 다니지 않고 빛을 붙잡지 않은 순간 어둠에 붙들리게 된다, 어둠에 매몰되고 휩쓸려가게 되고 지배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 사람들은 빛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왜 사람들은 빛을 따르지 않고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까? 3장 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러분 이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고 여명도 아니고 칠흑 같은 어둠도 아니고 나 자신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이 세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러니까 나는 그런대로 괜찮아,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굉장히 기만입니다. 세상을 잘 보면 철두철미하게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봐야 하느냐? 빛 가운데 걸어가면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러울 만한 삶을 보고 도전을 받아야지, 어둠에 처박혀 사는 사람들을 보고 나도 이 다중의 무리에 속해도 괜찮겠구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빛으로 온다는 말은 자기 행위를 하나님의 진리 앞에 폭로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산둥수용소> 이 책에 나온 사도처럼 우리는 집단의 논리에 속하게 되고, 우리는 자기가 속한 계층적 계급적 지반의 집단논리를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성에 치명적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킬 만한 위험한 자리에 와 있지 않았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할 위험에 처한 사람은 종교권력자입니다. 정치권력자입니다. 이 세계가 충분히 공평하다면 내가 부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이미 어둠입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을 등진 어둠의 세계고 탐욕과 부조리와 무력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내가 부자가 되었다, 그건 내가 이 세상 어둠의 논리를 철두철미하게 이용했다는 말이 되죠. 하나님을 등진 세계 안에서 불공평한 룰이 지배하는 세상 안에서 최고의 권력을 얻었다, 그 말은 불공평한 그 룰을 내 내면 속에 내면화했다는 말이잖아요.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내가 양지바른 인생, 양지바른 언덕에 살면 자기 행위가 악한 거죠. 예수님 앞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토대가 어둠 자체라고 순식간에 폭로되는 두려움을 감수할 때 빛으로 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종교권력자도 아니고 비교적 정치권력도 없고 여러분은 결단만 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You're so lucky.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결단해도 착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 이미 방탕한 삶으로 카사블랑카처럼 사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가 이 삶 전체를 고쳐야 하기 때문에 회개불가능지점으로 넘어가버린 겁니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것이 어둠의 세계 속에서 빛으로 가장 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회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우리 유급성직자들, 범종교권력 지도자들, 범정치경제권력 지도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이 어둠인데 어둠이 아닌 것처럼, 빛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은 괜찮다고 말하는 로마제국황제 헤롯 분봉왕들 종교권력지도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이 드러내는 폭로 앞에 자기가 어둠임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고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그래서 세례요한을 누가 목 베었습니까? 세례요한과 안티파스는 문학적 상상력에 따르면 서로 아는 사람입니다. 친구입니다. 세례요한을 헤롯안티파스가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존경하는 사이였지만 목을 베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선택이론, 예정이론, 이런 것을 참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어쨌거나 예정돼 구원받고, 예정되지 못한 사람은 어쨌거나 믿으려고 발버둥 쳐도 믿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 예정론을 쓴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 자기 행위가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 그 위험성과 낭패감을 하나님 안에서 접수하고, 하나님 제가 이런 어둠의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래서 만일 이런 주님의 말을 듣고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행위가 폭로되는 두려움을 끝까지 외면하고 거짓으로 일관한다면 모세의 언어,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던 모세 구약종교의 율법이 그들을 심판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는데 구원자체를 거부한다는 심판이 유일하게 남은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48절 ‘나를 저버리고’ 괄호하고,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모든 예언자들의 총적분자인 나를 저버리고,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요구를 총 집대성한 나를 버리고, 이런 뜻입니다. 모세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언자들의 그 말을 총 집대성한 나사렛 예수의 말을 버린다는 말은 모세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고 예언자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니까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모세와 예언자의 언어를 총 집대성하여 총 결집한 내 언어를 거부한 여러분은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신적 격동과 충동,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우리 주님은 이렇게 대담한 말, 지상의 권력자들을 두렵게 하는 이 말을 홀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적충동과 용기주심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처럼 이렇게 비적대적 회중들한테 설교한다면 얼마나 쉬워요? 여러분은 저에게 돌로 칠만한 어떤 권력도 없고 여러분의 권력을 흔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이용훈 대법원장이나 정몽준 씨 앞에서 설교하면 내가 설교하는 순간 멱살이 잡히겠죠? 이번 2013년 5-6월호에 크리스 헤지스라는 사람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크리스 헤지스는 <뉴욕타임스> 중견기자입니다. 이 사람은 이라크 전쟁 비판하는 기사를 싣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는 일종의 미국 내부고발자이자 양심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미국 한 대학의 졸업식에 가서 축사를 합니다. 졸업식축사는 저명한 명사들에게 기대되는 일입니다. 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 같은 사람, 축사를 하다가 이 사람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얼마나 약탈적이고 폭력적인가를 잔잔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졸업식장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아주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Bless America, 신이여 미국을 축복 하소서, 그 미국국가를 부르면서 저놈을 끌어내라고 해서 순식간에 명사초청강사가 수위한테 끌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충격적인 크리스 헤지스의 글, 인문학 몰락에 관한 글에서 나옵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치면 나옵니다. 이런 것이 설교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신 말씀은 절대로 신적격동과 격려가 없으면 못하는 말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종교권력자들의 권력기반을 순식간에 폭로하고 정곡을 찌르는 언어들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감동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만일 오늘날 감동을 오늘날 설교자들이 정곡을 찌르는 설교를 하겠죠. 하나님께서 감동을 안 주면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겠죠. 예수님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신적격동과 충동에 사로잡혀 말을 했는데, 악한 행위를 폭로하는 언어를 썼습니다. 그 악한 행위는 다른 사람 대다수를 어둠속에 처박아 넣는 빛을 가장한 어둠의 세력들,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수행한 명령은 영생, 이때 영생은 지속적인 공동체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한 영생은 오랫동안 지속가능한 삶입니다. 영생이라는 말과 제일 닮은 말은 sustainable life,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을 잘못 쓰면 무시간적인 삶, 구약에서 영생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생은 시편 133편에 나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게 영생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속가능하고 영속적인 토대를 가진 삶이란 뜻입니다. 영생은 영속적으로 가능한 삶, 서로 사랑하고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만이 영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자기중심성을 해체하여 자기의 부당한 권력기반을 해체하여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능력으로 소진시켜 쓰라는 겁니다. 그 명령이 바로 영생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속가능한 공동체적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알려주는 지혜로운 영생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갈릴리 일대와 유다와 사마리아 일대에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유다와 사마리아가 로마제국 압제체제 아래 있지만 헤롯 분봉왕 체제 밑에 있지만 그 빈 틈새에서도 여전히 자생 가능한 사랑의 공동체, 우애공동체, 친절공동체, 섬김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겁니다. 참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투쟁을 통하여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권력을 타도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그 권력자가 질식할 것 같은 통치를 하는 그 틈새에서도 가능한 사랑의 실천부터 점점 요구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로마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에게 로마압제자들을 타도하기 전까지는 영생은 없다고 말하지 않고, 로마압제가 존재하는 그 틈새에서도 우리끼리 서로 로마정신, 로마압제자 정신을 우리 마음의 보좌에서 영원히 씻어 내리는 방법은 서로 로마압제자처럼 굴던 삶을 불쌍히 여겨서 서로 돌보아주고 서로 하나님처럼 돌보아 주는 삶을 살면 되는 겁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아무리 신자유적 격랑이 강할 지라도 옛날 우리 삼한 시대의 소도처럼 도피성처럼,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작동원리가 중지하여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여 교회 안에서는 세상을 망각할 정도의 무릉도원 정도의 신선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돈과 권력과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안에서 평균케 되고 평탄케 되는, 저 사람이 얼마나 소득 있는가를 잊어버릴 만큼,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낮은 사람인가를 모를 만큼 하나가 돼서, one body가 돼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주적 일체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삶이 교회 안에서 가능할 때 자생하는 영생 공동체입니다. 우리 주님은 로마제국과 헤롯 분봉왕 체제를 타도하고 때려 부수는데 모든 정치적 에너지를 모은 것이 아니라 먼저 거대한 압제자들 밑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하나님이 되어주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기업 무르는 자가 되어 주고, 서로 빚을 탕감해주는 자가 되고, 서로 감옥에서 풀어주는 운동을 하자는 말이에요. 마태복음 18장에 100데나리온 빚진 자, 생계 때문에 빚진 자를 풀어줘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만일 임대 업주라면 못 내는 사람들을 돈 받지 말고 풀어주자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 저도 임대사업주가 돼봐야 아는데, 제가 항상 오해 받습니다. 김회권 목사는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이 그렇게 쉬운 줄 알지, 항상 그런 오해를 받습니다. 지금 제가 충분히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임대업자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임대업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데 어쩌면 좋아요? 앞으로 임대업자가 된 여러분 중에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희년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년운동은 백병원원장 아들이 해야 하고 정몽준 같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희년운동을 하면 설득력이 있는데, 우리가 그런 작은 틈 사이에서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우애와 사랑, 탐욕과 자기중심성을 억제하고 조금씩 사랑을 베풀면 영생이 일어납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주님은 나에게 지속가능한 공동체 삶을 창조하라고 나를 보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천당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영생공동체를 창조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지속가능한, 혈과 육을 가지고 물질적 조건 안에서 지속가능한, 오랫동안 존속 가능한, 영원히 존속 가능한 원리를 구현한 삶을 이 세상에 창조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 우리 안에 있는 치명적 자기중심성과 자기 계급적 계층적 이기심을 해소할 수 있는 빛의 감화 감동을 끊임없이 받아야 한다, 빛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많이 경험할수록 우리 안에 있는 원시적 치명적 공동체적 죄악들이 해소된다, 우리 주님이 오신 목적은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행위가 악하지만 우리 행위가 악한 것을 폭로하는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영생공동체에 접목될 수 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매우 뚜렷하고 매우 구체적이었다, 그걸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아마 유일하게 자생가능적인 영생 공동체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교회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가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종횡무진하게 하면 우리는 빈부 남녀노소 지역차별 인종차별 없이 한 몸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빛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치명적 원시적 자기중심성을 폭로하시고, 우리가 빛 되신 주님 앞에 우리 행위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서 주님의 영생공동체에 이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주님을 보내신 이의 뜻을 위하여 온 몸을 바쳤습니다. 그는 왜곡없이 가감 없이 주님의 말씀을 급진적으로 실천하여 로마제국과 헤롯 분봉왕들이 질식할 것 같은 압제를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갈릴리 농민들 한복판에 영생공동체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도 영생공동체를 창조하여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삶이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가능함을 보여주십시오. 더 이상 신자유주의나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못하는 신성구역이 교회 안에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도 힘들고 거친 직장현장에서 생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 생업의 현장에 나가길 원하지만 아직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아들딸들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격하여 감동하여 바친 눈물이 하나님 나라에 아름답게 쓰임 받길 원합니다.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땡볕에서 땀 흘리기를 기뻐하는 아들딸들에게 주님의 포도원 문을 열어주시길 원합니다. 선한 고용주가 주님의 포도원으로 인도하는 그날을 속히 보여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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