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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싱크로율 100%-요한복음 12장 44-50절(

by 【고동엽】 2022. 2. 14.

7 7일 주일설교 2-요한복음 12장 44-50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싱크로율 100%)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은 나를 보내신 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을 지칭할 때 나를 보내신 이이라는 말을 많이 썼을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1-20장까지 한 장에 네 번씩 나올 때도 있고 한 번은 나오는 나를 보내신 이‘,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구약예언자들을 파송하실 때 썼던 그 말을 씀으로써 자신은 독창성의 천재가 아니라 순종하는 데 천재였다, 독창적 사상을 전파함으로써 자신의 지위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함으로 자신의 독창성을 과시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고등종교를 창시한 모든 사람들은 사상의 독창성이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상의 독창성이 주목되지 않고, 순종과 실천의 독창성, 독보적일정도로 철저한 순종과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특이성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절제하고, ’나를 보내신 이 이라는 말을 많이 씀으로써 하나님이라는 언어가 갖는 종교권력적인 요소를 은닉하시거나 배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골치 아픈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 때문에 인류가 평화롭기 보다는 화평을 도모하기 보다는 적대관계를 도모할 때가 많았고, 선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는 순간보다 악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할 때가 훨씬 더 빈번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하여 함부로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쓰지 않는 그 전통에 따라서 나를 보내신 이 라고 하는 에둘러 쓰는 표현을 함으로써 겸양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거명할 때는 딱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철두철미하게 복종하고 자기의 뜻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킬 때, 그 순간에는 하나님 아들 또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의 관계성에 관한 모든 예수님의 언어는 특권을 배제할 때 쓰는 말이었고,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맥락에서 쓰는 말이라는 겁니다. 구약예언자들은 이런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 아마르 아도나이, 라고 말합니다. 코는 이렇게, 아마르는 말했다, 아도나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사자파송양식이라고 말합니다. messenger formula 사자, 파송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전할 때 쓰는 도입부가 코 아마르 아도나이입니다. 구약예언자들은 전부 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 앞에 가서 모세가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가 아하스 왕 앞에 가서 코 아마르 아도나이,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가서 코 아마르 아도나이, 그래서 이 말을 썼을 때는 긴장을 해야 합니다. 구약 예언자들이 썼던 코 아마르 아도나이,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파송의식을 다 합해도 예수님만큼 독특한 파송의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의 의식 속에 있었던 나는 파송 받았다는 그런 의식들의 편린들, 파편들을 다 합해도 예수님만큼 파송 받았다는 의식이 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예언자들의 피파송의식, 파송 받았다는 의식을 총괄 다 모아놓은 것보다 더 많은 의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이름을 은닉하면서 자기 사명을 실천할 때 특심, 열심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말끝마다 하는 사람들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젯밤 꿈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들은 굉장히 권력을 과시하겠다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라는 예언자와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예레미야 28장에 보면 서로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간 계속될 것인지, 2년간 계속될 것인지 논쟁이 붙었습니다. 참 예언자였던 예레미야는 70년 포로생활이 있을 것을 확실하게 들었습니다. 70년간 포로생활이 있을 거라는 말을 그 당대에 하는 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생활은 2년 만에 끝납니다, 단기 포로설을 설파했던 사람이 하나냐라는 예언자입니다. 하나냐는 단기포로설 예레미야는 장기 포로설입니다. 단기포로설은 사람들 마음에 있는 것을 확 드러내서 응답하는 말입니다. 단기포로설을 설파했을 때 너무 많은 환영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절대로 바벨론 포로생활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마자 벌떼 같은 대적자들이 일어나서 예레미야를 핍박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환영받지 못한 말들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조심스럽게 거명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냐가 예레미야에게 박해를 하면서 거짓예언자라고 공격을 할 때 예레미야는 의심에 빠졌습니다. 내가 혹시 하나님 말씀을 잘못 들었나? 예레미야는 지방출신이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전부 서울출신입니다. 혹시 나의 편견이 그들에게 미운 감정이 있어서 내가 70년 포로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 말씀으로 둔갑했나? 이런 자기의심 때문에 의심을 합니다. 그런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거짓 예언자라고 막 혼냈을 때 예레미야는 긴가민가하면서 의심에 빠져서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냐라는 이 거짓예언자는 절대로 확신하면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데카르트적 의심도 하지 않고 완전히 믿으면서 대중들의 열광을 다 받습니다. 그런데 70년간 바벨론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2년 바벨론 포로생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민중봉기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그 쿠데타에 엄청난 돈을 쏟고 힘을 쏟았다가 전부 다 처형당했습니다. 4명의 지도자가 처형당했습니다. ? 2년간 바벨론포로생활을 한다고 하니까 바벨론에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지금 우리가 탈출할 때인가 보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은 환영하지 않는 적대적인 군중과 회중에게 그들의 거짓됨을 폭로할 때만 하나님의 이름을 어렵게 거명하는 겁니다.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예수님은 왜 믿기가 힘든가? 요한복음 3 19-21절에 보면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왜 종교권력자들은 받지 못했나? 그들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왜 사람들은 빛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자기가 속해 있는 모든 특권적 삶의 지위가 산산조각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다 못 믿는다는 말은 삶의 조건, 권력기반 경제적 기반 토대 등이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배척당하고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 때문에 못 믿는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이런 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중립적으로 나는 하나님 못 믿겠어, 이런 사람은 못 믿는 사람이 아니라 불가지론자입니다. 우리가 보통 전도하러 갔을 때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은 불가지론자입니다. 자기들 삶의 조건 삶의 토대 등이 하나님을 근원적으로 배척할 때 믿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루살렘 종교권력 당국자 그들이 거짓 토대 위에 있는 나쁜 종교, 압제종교, 사람들을 기만하는 종교, 그런 종교를 떠받치는 토대를 주님의 말씀은 부서뜨리기 때문에 못 믿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근원적 방해물은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무너뜨리는 말씀을 못 믿는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치명적 자기중심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요즘 사람들은 자기중심성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광고에 하도 지배를 당하기 때문에 줏대 있게 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개 집단 논리에 다 매몰됩니다. 독자적으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가 속한 기업과 계층과 계급의 논리에 매몰될 때가 많다는 겁니다. 멀쩡한 사람도 집단 안에 소속되면 집단논리를 대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자기 삶의 조건이 무너뜨려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권력도 없는 사람이 못 믿는 이유는 교인들이 매우 나빠서 못 믿습니다. 기독교와 교우들이 하는 행동이 너무 처량할 정도로 도덕적으로 슬럼지대 같기 때문에 싫어서, 미워하는 감정 때문에 못 믿는 것은 그 사람 책임이 아니라 교회의 책임입니다. 너 왜 하나님 안 믿느냐고 했을 때, 당신도 내가 살던 시대에 살아보면 알아, 어떻게 믿어?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권력기반 삶의 토대가 하나님과 대척점에 있어서 못 믿는 사람과 교회에 상처를 입어서 또는 그리스도인에게 상처를 입어서 모든 교회를 싫어해서 안 나가는 사람을 구분하십니다.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오늘 성경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예언자들의 파송의식의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온전한, 더 치열한 파송의식을 받고 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의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신적충동과 추동 때문에 말합니다. 바벨론 포로를 70년 동안 한다는 말은 인간의 담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2년 만에 끝난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 사람에게 2년보다 35배가 더 많은 70년 동안이라고 하는 것은 신적추동과 신적인 격려를 받지 못하면 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는 예언자적 의미의 설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적대적인 사람이 일단 아니고 부수어야 할 권력도 거의 없거나 삶의 틀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 있을 수 있는데 아무도 없어요. 전혀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은 제가 설교를 못했거나 아니면 교회시설이 좀 그래서 정이 안 드는 것이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것은 심사숙고 끝에, 데카르트적 성찰을 거쳐서 마침내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되겠다, ? 내 삶이 악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안 믿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성경만 공부하면 대부분 믿게 됩니다. 삶의 토대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4대 종교의 창시자와는 달리 독창적 사상을 가지고 승부를 보지 않고 실천의 독특성과 치열성을 가지고 승부를 봅니다. 예수님 사상은 무엇입니까? 위키피디아에 보세요. 예수님의 사상을 위키피디아에 쳐 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교에 보면 연기론 중용론도 있고,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이오니아학파 탈레스학파 유물론적 철학을 쪼개서 마침내 정신우위의 철학을 확립한 사상가로써 탈레스학파 이오니아학파의 모든 학파를 총괄적으로 종합한 독창적 사상가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실천이 나오지 그 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인데, 이건 사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보편적으로 공기처럼 퍼져 있는 경건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사상으로 승부보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행함의 치열성과 독보적인 철저성으로 이름이 다릅니다. 4대종교의 창시자와 예수님이 너무 다른 것은 예수님은 사상을 쓸 것이 없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사상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이다, 이 정도 말고는 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상자체를 터득하거나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천의 치열성에 온 목숨을 거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데 생명을 건 분이지, 무슨 독특한 말로 사상으로 언어로 사람들을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노동자였고 목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말씀을 왜곡할만한 어떤 토대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권력자들입니다. 정치권력, 종교권력, 그래서 정치인들은 항상 종교인들을 옆에 두었습니다. 정치가들이 종교권력을 옆에 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하는 이 모든 지상의 남용된 권력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상부구조 중의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의 비난을 받는데 너무나 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상부구조는 아니지만 제도종교, 유급성직자들이 관리하는 제도종교는 항상 지배계급이었습니다. 지배계급에 속하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제도가 되는 순간 바로 지배계급이 됩니다. ? 하나님의 전하신 말씀을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질 각오를 하고 전하면 그건 제도종교가 될 수 없어요. 1 2대 교황이 될 수 없어요. 계속 죽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서 네로 앞에 가서 이 말하다가 목 베임 당하고, 도미티안 황제 앞에 가서 일하다가 목 베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볼 때 말이 안 됩니다. 제도종교가 되려면 안정적으로 유급성직자가 확보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도가 되고 인적구조물이 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에 바람처럼 순종하여 이슬처럼 사라지는 이런 사람들의 공동체는 절대로 고체 덩어리 같은 제도종교가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누구에게 보냅니까? 예레미야 1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네가 두려워 할 사람에게 보낸다, 왕과 지주와 제사장과 재판장과 예언자들 틈 사이에 너를 보낸다, 예루살렘 강고한 권력기반 안에 아나돗 지방출신 제사장 예레미야가 가서 말했을 때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레미야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대담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담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오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그런 말을 했죠? 그때 모세가 말할 줄 모른다는 말뜻은 문장 구사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치찰음 발음이 안 됩니다, 나는 후음 발음이 안 됩니다,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나는 담력이 모자랍니다, 나는 파라오 앞에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앞에 설교하는 것은 진정한 설교도 아니고 진짜 성경공부 시간이지, 설교는 청와대와 대법원 국회 앞에 가서, 당신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좋은 말 할 때, 하나님 큰일 났습니다, 국정원 앞에 가서 회개를 요청할 때, 성문과 광장 앞에 가서 회개를 요청할 때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때 코 아마르 아도나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맥락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위험한 맥락이었고, 예수님은 그 말을 터트리자 마자 적대적인, 신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말들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라는 말을 하신 겁니다. 저는 왜 예수님을 믿느냐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100% 일치합니다. DNA 100% 일치합니다. 우리와 원숭이가 DNA 99% 일치합니다. 게놈염기서열지도를 보면요. 우리와 돼지와도 90%는 일치하고, 90% 일치해도 이렇게 모양이 달라집니다. 원숭이와 우리도 상당히 다릅니다. 99%는 상당히 일치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행동 중에서 하나님 색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독창성이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프로타주해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썼던 하나님 언어는 이 세상이 어떤 제도 권력 종교들이 썼던 언어와 너무 달라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쓸 때 자기 특권을 절대화하고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낮은 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 되는 자가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기가 땅을 치매 입술을 땅에 대고 섬기며 가장 비천한 자의 친구가 되며, 가장 연약한 자의 벗이 되는 맥락에서만 하나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썼던 하나님 언어는 너무나 정직하고 투명하여 만민에게 환영받을 만한 하나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우리가 이런 올바른 예수님만 알려주면, 이런 참된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을 알려주면 이 세상에서는 자기권력기반이 너무 악하여서 자기 권력기반을 잃기 싫은 그 사람만 하나님만 믿지 않은 겁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겸손하시고 이렇게 자기부인적이고 자기특권포기적인 하나님을 누가 믿지 않겠습니까? 다 믿게 됩니다. 여러분도 어떤 목사님을 원합니까? 설교 엄청 잘 하면서 정말 겸손하고 청빈하면서 신적전지전능에 가까운 밝은 명학으로 기도해주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목사를 좋아하지, 계속 나는 목사다, 폼 잡으면서 김치가져와라, 라면 사줘라, 이런 말 하면서 특권을 요구하는 목사는 얼마나 힘들어요. 어떤 왕이 좋아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닉된 자, 특권의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 섬기는 자리에만 나타나는 그런 왕을 원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그런 왕을 원해요? 우리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에 하나님다운, 은닉성과 철두철미한 자기 비움, 공기처럼 자기를 가볍게 하여 비우는 그런 왕만이 인간성에게 와 닿는 왕이란 말이에요. 결국 예수님 같은 왕이 아니라면 아무도 더 이상 인류를 다스릴 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거예요. 예수님 같은 목사님을 달라고 계속 기도를 하세요. 그래야 좋은 목사가 옵니다. 좋은 목사의 특징은 설교를 예수님처럼 잘 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특권적으로 살지 않고 완전히 물과 피를 쏟고 십자가 앞에서 죽는 목사, 그런 교사, 그런 교사가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사장님도 그렇게 사장님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도 그런 목사님이 있는 교회에 다니기를 그렇게 원합니다. 그런데 다닐 교회가 없습니다. 저도 4년 동안 방황하다가 왔는데, 2006년에 목사 그만두고 설교할 교회가 없어졌잖습니까? 계속 교회를 다닙니다. 어디 가서도 안정이 안 됩니다. 누구의 설교를 들어도 안정이 안 되고, 제 후임자로 왔던 김정태 목사의 설교가 가장 좋은데 그 설교를 들으러 가면 오해를 받기 때문에 갈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계속 탄식하다가 다녔습니다. 저도 가향교회를 떠나서 예수님 같은 목사가 있는 교회로 옮기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진짜 제 마음이 그래요. 가서 저절로 회개가 일어나고 그 목사님 얼굴만 보고 나면 세상에서 맛보았던 모든 억울하고 상한 마음이 치료가 일어나는, healing power가 발산하는 좋은 목사님의 교회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제 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피파송 의식으로 가득차서 사상의 독창성이 아니라 순종의 치열성으로 자기를 드러 낸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한마디 한 마디는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빛으로 왔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거짓을 드러내고 여러분의 자기중심성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지속가능한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날림공사로 지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건물 위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인도하는 삶은 진짜 영구적으로 존립가능한 주택입니다, 그런 집으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저는 왔습니다, 날림공사? 27년 만에 다시 재건축해야 하는 아파트? 가건물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영생이라는 말은 하야 아드 올람이라는 히브리말을 번역한 겁니다. 이 말은 eternal life가 아닙니다. life rafting for long time, 오랫동안 지속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올람이란 말이 오랫동안이라는 뜻이에요. 절대로 영생 아닙니다. 지속가능한 삶이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은 이웃끼리 서로 지속가능하게 어울려 사는 삶, 서로 상호보합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사는 지속가능한 삶을 영생이라고 했어요. 요한복음의 영생은 죽어서 무시간적인 시간 속에 가는 것, 혼백으로 육체는 벗고 혼만 날아다니는 삶은 영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은 지속가능한 공동체적 삶, 상호보합적이고 공생적인, 서로 도와주는 네가 나에게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그런 세상입니다. 원래 우리가 네가 나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삶이 너무 좋은 겁니다. 교회는 그런 영생의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교회 와보면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쓰임새가 독특한 사람들이 모여서 상호보합적으로 서로 공생하면서 돕는 삶이 지속가능한 영생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속가능한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 왔는데, 빛 가운데로 오면 내 은사와 재능이 꽃피워서 지속가능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내 이웃과 나 사이에 있는 상호보합성, 이 공생관계를 알지 못하고 경합관계, 서로 배척관계에 있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있는 겁니다.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나와 상호보합적인 공생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웃을 배척하고 타개하고 죽여 없애야 할 무엇으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로마제국과 헤롯 분봉왕 등이 다스리는 질식할 것 같은 세상에서 상호보합적이고 서로 상호의존적인 영생공동체를 창출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갈릴리 농민들 사이에 상호보합적이고 상호공생적인 삶을 창출하기 위해서 서로 빚을 탕감해달라고 했습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 빚 탕감해 주는 운동을 서로 벌여주고, 생존권이 무너진 사람에게 생존권을 찾아주면서 우애를 돈독하게 하면서 자생하는 공동체를 만들라고 주님은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5천명을 잔디밭 테이블에 앉혀 놓고 무한히 갖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천 명을 앉혀 놓고 계속 원 없이 주시는 영생공동체, 지속가능한 공동체, 갈릴리 농민들에게 오랫동안 꿈꾸던 공동체입니다. 그런 공동체를 시범 보이면서 질식할 것 같은 분봉왕 체제 아래서, 질식할 것 같은 로마제국의 착취 아래서 자생하는 공동체, 서로 먹여주고 자기 살 떼어서 양식이 되어주는 공동체, 성만찬으로 확장된 공동체, 이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영생공동체를 창시하신 겁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 중에서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산둥수용소>라는 책입니다. 아우슈비츠에 빅터 프랭클 교수가 쓴 것과 정반대의 희극적인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원 나온 로버트 랭돈 길치라는 사람입니다. 우리 구약학에서 아주 유명한 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1943년부터 중국 텐진에 가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선교사 보조요원으로 따라 가서 영어를 가르치다 중일전쟁 때문에 중국을 접수한 일본관동군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산둥반도 위엔 교도소에서 한 3년을 지내면서 2천명의 중산층의 선교사 의사 교사 사업가등 굉장히 멀쩡한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보여주는 절망적인 인간성들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책입니다. 선교사 교수들, 평소에 도덕감이 탁월한 사람들이 엉망진창의 도덕성을 보여줍니다. 미국 적십자사가 1400명 정도 남았을 때 200명 정도 미국인이 있는 이 수용소에 1500개의 큰 소포물건꾸러미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일본군 사령관이 세어 보니 1500개이고, 남아 있는 사람은 1450명이니까 하나씩 나누려고 계산하고 포고문을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선교사 등 몇 사람이 가서 왜 미국적십자사가 보낸 선물을 온 세계만민에게 나누냐고 항의를 해서 미국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굶게 만들고, 영국 사람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한 사람이 7개 반씩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1450개를 200명이 7개반씩 차지하고 나머지를 쫄쫄 굶게 만드는 결단을 하는데, 거기에 선교사가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교수와 음악가 예술가, 이 사람은 자유주의자였다가 그 장면을 보고 칼빈의 원죄설로 돌아갔습니다. 그 인간성이 타락해가는 과정 자체에 대한 묘사가 아주 유머러스 하기 때문에 읽은 걸 또 읽고 그럽니다. 제가 읽었던 책 중에서 계속 시종일관 웃게 했던 것은 우리가 수용소 같은 분위기예요. 사람들은 집을 여러 채 가지고도 불안해서 또 사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못 사는 것과는 상관 없이 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인질 같은 사람들의 극단적인 원죄적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부가 많이 창출돼도 바르게 분배되지 않으면 그 부는 불행의 원천이라는 겁니다. 이 주장 자체가, 음식과 공간사용문제에서 인간갈등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자기 사적공간을 갖지 못하면 충분한 의미의 개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나와요. 그래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내 방이 없고, 내가 이상한 묘한 자세로 누워서 책을 보는 자유가 없다면 나는 참다운 개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여기 나와요. 실제로 여러분이 이상한 자세로 다리를 뻗어서 책을 볼 수 없고, 계속 예의를 차리면서 나는 목사니까 조심해야지, 이렇게 살면 폭발한다는 거예요. 이 책에서 말한 인간이 도덕이 어둠이라는 겁니다. 이 책의 핵심은 인간의 도덕성이 빛이 아니고 인간의 계몽주의 지성이 아무 것도 아니고 수용소 안에서 온통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적 법칙성을 가지고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이걸 이 사람이 고발하는 거예요. 자기까지 포함해서요. 미국 사람이 7개반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를 말하는 방식, 일단 7개반을 나누고 나서부터 개인의 도덕성에 따라서 나누든지 말든지 해야지, 적십자사의 원칙은 인종차별 없이 만민에게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보낸 것인데 미국 사람이 민족주의를 끌어 들이냐는 논쟁을 벌입니다. 그렇지만 집단 논리가 이깁니다. 우리가 속한 세상은 어둠입니다. 이런 어두운 세상에서 7개를 가지면, 1450명의 수용소에서 200명이 7개 반을 다 가지고 나머지는 굶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아요. 이게 어둠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을 폭로하러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지성 계몽된 이성 도덕 윤리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온통 어둠 속에 있는 것을 아시고, 어둠을 폭로하고 영생가능한 공동체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 안에는 영생공동체 실험이 가능합니다. 교회는 소득 재분배가 일어납니다. 교회에 가난한 사람들이 오면 그들은 다른 어떤 곳에서 맛보지 못한 소득재분배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나 부자인가 가난한가 표도 날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면, 완벽하게 거룩한 위장이 일어나서 이 사람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전혀 표가 나지 않게 교회가 하나가 됩니다. 은혜가 주는 평탄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교회는 신자유주의, 교회는 헤롯주의, 로마압제주의, 이런 어떤 질식할 것 같은 삶의 방식도 교회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 오면 구원이 있다는 것, 이게 바로 300년 때까지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때 나온 말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키프리안이라는 주교, 카르타고의 주교, 230년 경에 나오셨던 이분이, 엑스트라 에클리 날라 사우리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그겁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던 영생공동체를 실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완전히 공인한 기독교를 역설적으로 되돌리려고 했던 사람이 배교자 율리아노스 황제입니다. 이 율리아노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로마전통종교가 쇠퇴하는 걸 보고, 로마전통종교를 부활시켜서 기독교를 억제하려고 한 황제가 율리아노스 황제입니다. 율리아노스 황제가 보고서에서 그 당시 313년 이후의 교회가 어느 정도 사회에 무한책임을 가졌나 봤더니 작은 교회 큰 교회 상관없이 모든 교회는 과부와 고아와 퇴역군인 가난한 사람과 부랑아와 장례식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사람들의 장례식을 교회가 대부분 다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국가기관은 손을 놓고 있는데 교회는 그 엄청난 일을 다 하고 있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게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하려고 했다가 발견한 역설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빛의 자녀가 어떻게 사는가를 시범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이 실천의 독특성이 바로 예수님의 얼, 정신을 이어가는 교회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감화감동을 받으면 형제자매들이 서로 돕습니다. 우리가 교회 바깥을 돕는 게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와 있는 가난한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와서 높낮이가 다른 사람이 평탄케 되고 나서야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 옳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을 돌보지 않고 바깥에 있는 사람을 돌보면 그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저도 옛날에는 안식이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안식 없이 살다가 안식을 해보니까 안식을 갖지 못하는 사람의 슬픔을 이해했습니다. 저는 옛날에 고아가 얼마나 슬픈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를 키우면서 고아가 진짜 슬프구나, 이런 모든 순간을 고아들은 갖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슬픈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동정심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안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저에게는 절실합니다. 하루 열두시간씩 일하면서 휴식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충분한 의미의 개인이 되지 못하고, 주체성을 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안식해보고 나서 알았습니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영생공동체로서 교회를, 주님의 명령에 치열하게 실천하고 순종함으로 말마암아 이 공동체를 이룰 사명을 받았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어둠에 붙잡히게 됩니다. 35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붙잡힌다는 말은 매우 약한 표현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둠에 지배당하게 된다, 빛이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영접하여 빛의 공동체에 속하지 아니하면 빛에게 소속되지 않으면 어둠에 소속될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이 땅의 영생공동체, 로마의 압제체제 헤롯의 압제체제 아래에서도 불구하고 우리끼리 돈독한 사랑의 공동체, 서로 하나님 되어주기, 서로 상호보합적인 네가 쓸모 있는 존재이고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만끽시켜주는 공동체를 창설하고 유지하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가향교회와 우리 한국교회가 이 세상의 쓰나미 물결 아래 인간성을 침식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빛의 자녀들 공동체로 확연히 구분되고 확연히 대조되는 대항대조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한국교회가 말이 아니라 순종의 치열성과 독특성으로 하나님을 반사시키고 하나님을 드러내게 도와주소서. 주님 우리는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말씀에 순종하는 치열성으로 응답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도와주셔서 우리 가향부터 대항대조공동체로 거듭나게 도와주시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받은 쓰라린 상처들이 이 곳에 와서 치료 받고 지속가능한 영생이 가능함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 기도) 아버지 하나님 지난 일주일간 많이 힘든 가운데서도 꿋꿋이 인내하면서 직장에서 소득을 벌어들인 형제자매들이 감격과 감사 속에 헌물을 바쳤습니다. 이 귀한 헌물이 형제자매들 살리는 데 하나님 백성 살리는 데 쓰임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문 두드리는 아들딸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 문을 열어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출타중인 형제자매들 있습니다. 머리털 하나 손상 당하지 않고 다시 우리와 재회할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소서. 이 귀한 헌물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재물되기를 원하옵고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축도) 아버지 하나님 한국교회가 지속가능한 영생공동체로 거듭나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북한 동포들에게 희망이 되게 도와주시고 세계 만민에게 희망이 되게 도와주시고, 빛의 자녀들로 거듭나게 도와주소서. 새로운 교우들이 낯설지 않도록 친구 생기게 도와주시고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 듣게 하여 주시고, 특별히 잉태하여 출산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순산의 기쁨을 누리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애영 자매님과 정원 자매님과 박선미 자매님에게 잉태의 축복 주셨사오니 그들이 자녀를 나을때까지 완벽한 태교를 주시고 가장 깊은 평안을 주소서. 주님 특별히 우리 교우들 중에 아픈 교우들 있고 부모님들이 아픈 교우들 많사오니 그들의 환부를 어루 만지시고 그들의 저물어가는 생명력 너머에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 생명력, 영생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원합니다. 주님 저희는 한 없이 모자라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한국백성들에게 세계 만민에게 빛의 자녀로 희망의 공동체로 거듭날 때까지 분투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여 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오늘 함께 예배드린 모든 교우들과 그들의 일터와 자녀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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