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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친히 몸종(둘로스)이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3장 1-11절 (

by 【고동엽】 2022. 2. 14.

7 14일 주일2부예배_ 요한복음 13 1-11 (친히 몸종(둘로스)이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2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유월절은 넘을 유, 넘을 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 할 때 어린 양의 피를 유대인들의 집 문설주에 발라서 이집트사람들을 심판하는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왔습니다. 넘을 유 넘을 월, 유월절은 다른 말로 하면 묵과하는 절이다, 묵과절이라고 말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해방열정이 극에 달하는 시점입니다. 유월절 행사를 할 때마다 로마제국의 총독 아래 시달리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히 갈릴리 사람들은 우리를 다스릴 참 모세 같은 메시아가 우리에게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일종의 메시아 도래를 열망하는 감정이 충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에 갈릴리에서 했던 모든 사역들을 총괄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오자마자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혈안이 됐습니다. 12 36절예 유대인들의 종교당국자들의 살기어린 체포령을 패해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왕,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버금 왕 또는 부왕으로 생각하면서 따랐는데 종교당국자들은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자기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라고 단죄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사이에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 권력자들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더 큰 영광 안에 있다고 주장하면 로마제국의 카이사르 신학이 됩니다. 이런 신학은 교황신학, 카이사르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카이사르, 케사르, 시저, 시저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은 권력과 영광과 부와 모든 좋은 것을 독점하고 계시고 모든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하시는 전지전능한 권력을 누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악당을 물리적으로 제압하지 않기 때문에 안 해준다고 말하며 금방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권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전지전능함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성품의 일관성 있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지, 모든 행동을 마음대로 고삐 풀린 망나니 망아지 같은 전지전능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행들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즉각 악행을 중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납니다. 만일에 악을 멈추는 일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이 세상에 모든 악행들을 일시에 stop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인간에게 자기 행동의 선택을 결정하도록 위임을 하고 위탁을 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순간도 막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안 맞는 능력사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하나님에게 불리하게 사용합니다. 악행을 stop시켜 주지 않는다고, 전도서 8 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오해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사랑의 원리와 인격적인 창조의 원리 안에서만 행사되는 전지전능이기 때문에 매우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성도가 자신이 받았던 인격적 자유를 하나님께 다시 위탁하여 양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도를 빙자 삼아서 역사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역사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를 간절하게 하고, 또롯또롯한 목소리로 악을 규명해주고 악이 어떻다 저쩧다고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몰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과 사랑, 모든 것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상에 있는 우리 편에서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 세상 사정을 우리 양심과 이성의 언어로 계속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하나님은 악을 행하기에 무능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점에서 2% 모자란 전능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성품과 고도로 일관성을 가질 때만 능력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오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완전히 결정짓는 참 하나님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권력을 마음대로 쓰시고 권력과 부귀영화의 마지막 지점에 서서 온 세상 만민의 운명을 마음대로 장기판에 돌 움직이듯이 움직이는 임의적인 자위적인 그런 변덕스런 전능하신 분이 아니고 사랑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포기하고 사랑 때문에 자기 전능의 겉옷을 벗고 노예처럼 자기를 낮추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를 먼지처럼 작은 인간과 하나 되게 할 만큼 자기를 낮추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능력 있다고 합니까? 우리는 출세의 사닥다리 끝까지 올라간 사람을 능력 있다고 말하죠. 그런데 그 사람이 능력을 완성하는 길은 출세의 정점에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자기의 모든 특권을 양도하고 자기를 비워서 둘로스, 몸종이 될 만큼 사랑의 종노릇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은 진짜 능력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일단 증명하기 위해서 일단 올라가야 한다는 비극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장님이 회사에 있는 휴지를 몸을 구부려서 주우면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화원이 주우면 그 사람이 당연히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면 고도한 자신감이 없다면 이렇게 겉옷을 벗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겉옷을 벗고 싶어도 일단 벗는 순간 내가 말살되기 때문에 못 벗는 겁니다. 우리는 겸손하고 싶은데 저 놈이 겸손을 이용해서 나를 짓이기면 어떨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겸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신성의 겉옷을 벗고 맨살을 드러내면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 앞으로 육박했습니다. 유월절은 로마제국보다 더 큰 군대를 동원해서 가이사랴 로마황제를 물리치고 분봉왕을 물리치고 로마제국과 결탁돼 있는 성전체제를 무너뜨리는 무력의 행사가 민족 해방이 아니라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지배욕구의 영원한 단념, 타자를 부려 먹으려고 하는 권력의지로 가득 찬 옛 자아를 부서뜨리는 것이 참 유월절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라는 책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차원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정말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에 마지막에 초대교회는 무슨 특징이 있었나, 지배하려는 의지에 대한 영원한 단념이 있었다, 공동체가 되려면 지배하려는 관념이 포기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배하려는 관념이 살아 있는 한 공동체에 자기 부적합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막대한 해를 끼칩니다. 어떤 사람이 지배를 포기한 사람이냐? 다른 사람이 내게 주는 불편을 감수하려는 엄청난 mental force를 갖춘 사람이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게 주는 불편을 감수할 마음이 없고 다른 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계속 바라는데 내 뜻대로 안 움직여줄 때 화가 나면 공동체에 존속이 안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은 공동체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배하려는 사람이 영원히 사라져야만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지배하려는 의지의 영원한 단념인데, 초대교회 장로들과 주교들은 얼마나 겸손했느냐? 주교는 순교하려는 대기자입니다. 주교가 붉은 모자를 쓴 이유는 순교자의 머리인 겁니다. AD 118년에 트라이누스라는 로마의 유명한 황제가 저스틴이라는 유명한 대성자, 최초의 순교자를 심문할 때,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느냐? 나는 로마 공중목욕탕 2층 거실에서 살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 여러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까, 그들은 죽일 필요 없다, 내가 모든 이 일의 책임자다, 그들은 내게 와서 나를 방문하여 자주 나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을 뿐 아무 죄가 없다, 나를 죽이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면 나를 죽여야 한다, 그렇게 심문에 응했습니다. 그것이 트라이누스 법입니다. 우두머리만 죽이면 되고 나머지는 죽이면 안 된다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교는 죽임을 기대하면서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트라이누스 황제 같은 사람에게서 죽임을 당하면 안 됩니다. 옛 자아를 죽여서 지배의지와 권력의지를 영원히 포기하면 됩니다. 지배의지와 권력의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지배의지이고, 권력의지입니다. 자기 몸을 바쳐서 다른 사람을 받들려고 하는 것이 둘로스, 몸종의 정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둘로스, 몸종이 되셔서 사람의 발을 씻기면서 당신의 전지전능함을 이상한 방법으로 드러냈습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방식으로 전지전능을 드러내셨지, 교만한 베드로의 마음에 엄청난 폭풍을 일으켜서 베드로의 마음이 괴롭게 만들어서 겸손케 하거나, 베드로가 교만한 생각을 품을 때마다 심한 편두통이 몰려오게 만들어 교만해서는 안 되겠구나, 이렇게 굴복을 시켜서 그로 하여금 착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교만을 스스로 반성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주체적인 숙고와 성찰을 통하여 그런 삶을 포기하도록 자유 가운데 결단하도록 돕기 위하여 그런 방식으로 전지전능함을 표현한 겁니다. 어느 것이 전능합니까? 베드로가 교만한 마음을 품을 때마다 편두통 22000V 날려서 죽겠다고 겸손케 만드는 것이 능력이 많은 겁니까? 몸종처럼 발을 씻겨 베드로에게 감동을 일으켜서 영구적으로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교만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는 결단을 하게 만드는 하나님이 더 겸손하고 더 전지전능합니까?. 후자의 하나님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내는 순간, 지배하려고 하고 권력을 부리려고 하고,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 oxy-moron 관계에 갑니다. 지배욕구, 권력욕구, 부귀영화, 독점욕, 배타심 이런 모든 것들은 절대로 하나님과 공존이 안 됩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지배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모든 좋은 것들을 가로채려고 할 때 하나님이름을 들이대는 순간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영구적으로 모순관계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이 모든 법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 때, 당회가 또는 교회가 다른 집단보다 자기를 훨씬 더 유리하게 만들 때 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1980년대 텍사스의 한 교회에서 유전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프린스턴에서 미국 목사님이 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유전이 발견되자마자 당회가 공동회의를 결정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새 교인을 받지 않습니다. 유전을 그 교인수로 나누려고요. 지금도 대법원 판례에 보면 교회 재산은 교인 수 n분의 1로 나누어집니다. 교회 재산에 만일에 100억짜리 부동산이 있으면 필사적으로 싸움에 끝까지 달라붙는 이유는 재산을 나누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우스운 겁니다. 교회 재산이 많을수록 참된 교회신자는 떠나고 나쁜 사람이 와서 그걸 노릴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재산도 없고 아무 권력도 없는 장로가 되려고 하면 그건 성령 충만한 겁니다. 그런데 누리려는 권력이 많으면, 예를 들어 중구 저동에 있는 한 교회는 장로 52명이 한 개의 이사장을 차지합니다. 중구 저동에 있는 유명한 교회는 장로가 되는 순간 중학교 고등학교 무슨 법인 이사회의 이사장을 맡습니다. 그런 교회가 얼마나 착해지기 힘들어요. 어떤 교회 재정장로가 되면 주당 250억의 여신, 즉 어떤 은행에 저금할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누구도 탐할 수 없는 겸손한 액수의 헌금이 나오기 때문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만일 나오면 정신이 이상한 겁니다. 그 장로님 옆에는 모든 은행 지점장들이 전부 다 소고기를 사 보내면서 설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돈이 갈 것입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면 건축에 관련된 사람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깁니다. 여러분 실제로 교회가 돈과 권력과 물질적 혜택과 하나님이 동시에 연동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영이 혼미해지기 시작하면서 판단력은 흐려집니다. 만일 우리교회의 교인수가 500명인데 이분들이 헌금을 전부 다 적십자 회비로 내버리고 교회 와서는 헌금도 안 하고 점심만 먹고 가고 바이블 스터디만 나에게 25번 맡아 달라, 그런데도 제가 좋아하면 제가 성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좋아하지 않고 이 사람이 헌금하기 때문에 친절해지는 겁니다. 헌금도 고아 다 돌보고 적십자 회비 내는데 교회는 몸만 와서 바이블만 배우겠다고 눈을 총총 뜨고 있는데, 그런 만 명을 영접하고 그런 만 명에다 목사님 자기 자녀를 성경공부 잘 시켜서 그 교회를 세습을 시키면 아무도 욕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고 고난의 세습이네, 이렇게 할 겁니다. 자기도 하고 싶은데 먼저 하니까 화가 나니까 하는 놈도 나쁜 놈인데 그걸 보고 질투하는 놈도 나쁜 놈입니다. 다 같이 나쁜 놈입니다. 나는 못하는데 저놈이 하네, 하나님과 급진적 사랑의 실천과 관련되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면서 자기 복무적 self serving 하는 agenda를 가지고 막 내세우거나 하나님을 많이 말하면서 김회권이라는 사람에게 유리해지면 반드시 잘못된 겁니다. 교회 당회장, 당회장 목사님, 당회원, 교회, 모두 가 다 순식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익집단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텍사스에 유전을 발견한 교회처럼 그렇게 돼 버립니다. 100억 정도의 교회를 가지고 그렇게 싸움을 하는 교회 저 강북에 있는 교회처럼 돼버립니다. 지금 목동에 있는 교회는 분명히 목사님이 잘못해 징역 4년 받아 감옥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목사님과 관련된 이권에 개입된 장로들은 필사적으로 그 사람이 와야만 재산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법을 어겨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 재산과 관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권력 탐욕 경제적이득, 이런 것과 관련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영구적으로 알 수 없게 돼 버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빛나는 우리 주님이 맨 살을 드러내시고 겉옷을 벗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로마제국 시대 때 겉옷은 칼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겉옷을 입고 있을 때는 칼을 가지고 주인을 금방 찌를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들은 전부 다 옷을 벗겼습니다. 모든 나라의 노예는 전부 다 옷을 벗겨야 합니다. ? 노예는 비무장으로 있어야 합니다. 맨살에다가 칼을 숨길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로마제국 양반 집에 있는 노예처럼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나는 비무장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 발 씻는 장면 직전에 마가복음 10 35-45절에 이런 싸움이 있었습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 전에 예수님께서 누가 크냐는 논쟁을 촉발시키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런 말을 듣자마자 인자의 나라가 영광중에 임할 때 누가 주의 옆에 앉는가가 핫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 사도요한의 어머니 야고보의 어머니가 헌금을 왕창 바친 사람입니다. 그 헌금을 많이 했기 때문에 오는 자신감으로 바로 예수님께 도전했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랬더니 열 제자가 분히 여기며 감히 그 자리를 넘본다며 화를 내면서 서로 발 씻어주는 것도 잊어버리고 식사에 돌입합니다. 이게 주님의 마지막 식사입니다. 초라합니다. 3년 내내 교육시킨 제자가 이렇게 배반적으로, 기독교의 미래를 맡을 제자들이 예수님 돌아가시기 하루 전까지도 완전히 똥오줌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 예수님께서 식사 하던 중에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식사하던 중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거니와 식사 하던 중에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는 일도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경악스러운 일이 이겁니다. 주님께서 친히 세숫대야에 물을 떠서 발을 씻기는 이 장면은 너무나 엄청난 천근만근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전능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질 수 있는 전능, 우리 하나님 전능은 지배 권력의 영원한 단념, 우리 하나님은 감화감동시켜서 다스리려고 하지, 지배해서 다스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동과 모방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려고 했지, 공권력을 가지고 그를 의지를 주입시켜서 강요해서 절대로 착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집합, 내가 3년간 가르쳤던 가르침이 이것밖에 없더냐? 베드로 꿀밤 10, 꿀밤을 피가 나게 주면서, 옛날에 못된 수도원장이 말 안 듣는 수도사를 때리는 것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구부려서 발을 씻김으로써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의 양심이 영구적으로 각성되도록 이렇게 처절하게 마지막 만찬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우리 옛 자아가 최후를 맞이하는 만찬,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드신 마지막 만찬도 최후의 만찬입니다. 우리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죄 씻음을 받는 발 씻음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사랑의 감촉을 잊지 못하여 우리는 자기 비움의 낙차 큰 자기 하강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어떤 거짓된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은 손봉호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곳에서 탐욕과 파당심과 비린내 나는 이기심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참 하나님을 숭배하는 곳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급진적 사랑과 실천이 계속 일어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기 위하여 몸을 구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 하나님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 발은 이 세상에 살면서 접촉하는 자아를 가리킵니다. 온 몸은 깨끗하지만 발은 여전히 더럽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온 몸이 깨끗해졌지만, 목욕한 자와 같이 되었지만 발은 왜 더러워집니까? 이 세상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 세상에 사는 성도는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발은 주님이 매일 씻어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씻어줄 뿐만 아니라 서로 공동체 지체가 씻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살다가 더러워진 발, 우리 자아, 인격을 말없이 씻겨줌으로 오늘도 기독교를 유지시켜주시고 내 신앙을 유지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의 부드러운 발 씻김의 손길을 매 순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냉담자가 될 것이고 신앙을 잃어버린 자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온 몸을 씻겨달라고 간청함으로써 이 기막힌 사랑의 퍼포먼스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냈지만 주님은 철없는 제자의 발을 묵묵히 씻겼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자신을 팔아넘길 배반자 제자의 발도 부둥켜안고 씻겼습니다. 주님의 손길을 감촉하는 제자들은 양심을 바늘로 찔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날의 경험을 잊지 못해 베드로전서 5 5절에서 이렇게 그날의 경험을 회상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살다가 더러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영혼은 분명히 구원 받았지만 구원 받지 못한 세상과 접촉하면서 오염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저도 오염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염됩니다. 포털을 열자마자 기막힌 뉴스가 뜨면 벌써 그 전에 딱 봅니다. 보면 온갖 사진이 다 올라와 있고, 온갖 엽기적 사건이 다 있습니다. 엽기적 제목을 치며 안 되는데 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쳐다봅니다. 그러면 5분이 지나갑니다. 아이고 하나님, 이렇게 안 하려고 했는데, 벌써 잡념이 들어옵니다. 왜 그 사람은 그렇게 했을까? 우리 자아가 오염되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겸손하게 하려고 했는데 교만한 사람이 한 서너 사람이 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 갑자기 겸손해서는 안될 것 같은데, 무언가 거드름 피워야 하지 않겠나, 벌써 제 영혼이 교만의 영에 사로잡힙니다. 우리 몸이 속량 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8 23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 우리 몸은 아직까지 타락해 있습니다. 특히 남자의 몸, 눈은 분명히 거듭났지만 볼 것 안 볼 것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접촉도 함부로 합니다. 돈도 쓰고 받을 것 받지 않아야 할 것 받습니다. 우리 온 몸은 깨끗해져 있지만 우리 자아는 이렇게 더러워져 있고 주님의 깨끗한 손길이 우리를 씻겨주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적인 영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더러워진 우리의 자아를 씻어줌으로 양심과 이성을 회복해줌으로 가장 고결한 삶을 창조해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몸 구부리신 하나님 이야기, 신성의 겉옷을 벗으신 하나님 사랑 이야기, 의 우정>이라는 영화에 보면, 남을 간호하기에 정말 적합하지 않는, 체구도 간호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살아온 방식도 엉망진창인 남자 한 명이 굉장히 귀족적인 비밀을 가진 한 부잣집에 가서 전신 마비된 사람을 돌보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이 발을 씻긴 일입니다. 그런데 모든 프로페셔널한 간호사들은 발을 잘 씻기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고 함부로 합니다. 자기가 살던 방식으로, 함부로 다루는 이 정직한 사나이를 이 엄청나게 1% 부자인 사람이 진심을 받고 영접하면서 서로 친구가 됩니다. 우리 주님은 1% Untouchable한 우리의 발을 씻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몸을 구부리시고 겉옷을 벗었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정말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강한 확신과 정체성 인식을 가진 사람만이 이렇게 몸을 구부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부리고 싶어도 안 됩니다. ? 하나님의 영에 100% 사로잡혀서 내가 하나님 자녀란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만 몸을 구부릴 수 있는데,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내가 몸을 구부리는 것 자체가 굴욕이 아닌가, 창피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1년 반 전에 97% 이상 힌두교가 지배하는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서 학생선교단과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기독교를 힌두교 부모님 자녀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30분짜리 음악극을 했습니다. 세족식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장면을 3, 40분 드라마를 하고 마지막에 세족식을 하는데, 마지막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려 끌려가며 괴로워하는 그 장면, 검은 옷을 입은 로마 군인이 하얀 옷을 입은 주님의 팔다리에 못을 박습니다. 그 장면에서 주님이 아스라한 고통을 내지르니까 힌두교 13세 아이들이 오열을 터트리면서 울기 시작하는데, 통역을 해보니 이 아이들이 자기 죄 때문에 자기 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무감각해도 그 자리에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세 시간 동안 세족식을 했습니다. 세족식을 하는 세 시간이 우리한테도 엄청난 감동이지만 이 아이들한테 처음입니다. 힌두교 아이들은 대부분 발이 부르터 있습니다. 물론 그 학교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여서 집안이 괜찮은 아이들만 왔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발을 좋은 것을 신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 발을 부둥켜안고 씻기는데 그 감동은 엄청났습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입니다. 살다가 상처 입고 부르터버린 자아를 보듬어주고 감미롭게 쏟아주고 사랑의 향유를 발라주고 다시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기독교고 이것이 하나님이고, 이것이 교회가 하나님이 원래 하시는 일입니다. 좋은 교회는 늘 이런 일이 일어나겠죠. 우리도 이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에 급진적 실천, 낮추심 앞에서 우리도 한 번은 이런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일생에 한 번은 이런 기회가 오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고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까지 많이 모자랍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아직 많이 모자라고, 성령이 우리 안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부단히 확신시켜 주는 사람만이 과감하게 자기를 급진적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동시다발적으로 급진적으로 낮춘다면 우리는 굉장히 순식간에 급진적으로 낮추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양회 가보면 약간 인위적인 분위기에선 가능합니다. 밥도 약간 굶기면서 불도 끄면서 노래 불러주면 그때는 하는데 멀뚱멀뚱한 정신에서는 이게 잘 안 됩니다. 백주대낮에는 잘 안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모두 성령 충만하여 몽환적인 세계에 내가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만큼 성령 충만하면 자기 몸을 구부려서 겉옷을 벗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유일하게 겉옷을 벗는 곳입니다. 그래도 우리 한국교회가 평신도들의 세계에서는 굉장히 건전한 것 같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왜 건전하느냐? 일반신자들은 그래도 구역예배를 드려서 굉장히 겉옷 벗는 연습을 많이 합니다. 겉옷 벗는 연습을 많이 하는 교회가 그래도 사랑의 흡인력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사람이 바뀝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겉옷을 급진적으로 벗어서 몸을 구부려서 냄새 나는 형제자매의 발을 씻어주는 급진적 하나님 편에 한 번은 접근해보는 그런 일들이 우리 생에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일들일 한국교회에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과 권력, 하나님과 부귀영화, 하나님과 이익추구는 영원히 공존할 수 없고 제휴할 수 없는 것, 또 특별히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마음대로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굽혀서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전지전능의 극치, 내 능력을 포기하고 은닉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짜 능력의 극치라는 것, 이것이 전지전능의 극치라는 것을 우리가 영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주일 동안 살다가 많이 더러워지고 지치고 부르튼 발길을 부드러운 손길이 여러분 자아를 씻어주기를 바라고 향유를 발라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만 당신의 전지전능함을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당신의 의지를 지배하고 관철하는데만 쓰지 않고, 신성의 겉옷을 벗고 우리의 부서지고 오염 덩어리가 된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서 몸을 구부리는 전지전능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감화감동 받고 우리도 한 평생 한 번은 몸 구부릴 수 있는 결단의 순간을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도 한 순간은 자신도 모르게 체면의 겉옷을 벗고 존귀의 겉옷을 벗고 내가 몸종이 된 것처럼 노예가 된 것처럼 민첩한 사랑의 실천이 일어나게 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힘들고 고단한 생업의 현장에서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를 감사와 감격으로 바쳤사오니 이 헌물을 받으시고, 우리 형제들이 직장의 형장에서 겪었던 고단한 삶의 사연들을 경청하시고 돌봐주시고 권고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의 포도원에 가서 한 데나리온 벌기를 결심하고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주님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내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쌀 자루를 열고 양식 창고를 열어서 전 세계 만민들을 먹이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게 하여 주시고, 굶주린 무리를 광야에서 오천 명씩 먹이셨던 주님처럼 우리 교회도 오천 명 다 먹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먹고 사는 문제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나님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직장에서 겪었던 모든 쓰라린 상처를 주님의 손에 맡기옵고,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새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에 이르는 형제자매들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애영자매님과 최정원자매님과 임지영자매님, 특별히 그들의 출산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엄마 믿고 하나님 아버지 믿고 아빠 믿고 교회 믿고 태어나기로 작정한 이 아이들에게 지상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안전하게 그 여정을 지켜주시길 원합니다. 전부 다 순산하게 하시고 하나님 고고지소 올리는 그 날 모두 우리가 하나님 새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박수하며 환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 부모님들 골육지친들이 병상에서 과료중이기도하고 진단을 받기도 하고 위험한 선고를 받기도 하고 고단한 순례길을 마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단한 순례길이 끝날 때 부활하신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 낯설지 않도록 우리의 여정을 지켜주시고, 주님 만나는 그날 부활의 새 소망으로 나약한 육신의 삶을 이겨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특별히 우리교회에 새로운 교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마음만큼 따뜻하게 영접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친구를 얻게 하시고 동역자를 얻게 하시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영적소통이 다시 재개 되게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 음성이 그들의 심령을 주장하셔서 매순간 감격하며 매순간 감동받으며 나날 보낼 수 있게 도와주소서. 출장 중이거나 출타중이거나 해외에 체류 중인 교우들 있습니다. 군무에 있는 아들딸 있습니다. 지켜주시기 원하옵고 우리 모두 머리털 하나 손상당하지 않고 재회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급진적 사랑의 실천을 하기 위해서 감히 모험하기로 작정한 교우들 머리 위에 그들의 일터와 가정과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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