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요한복음 14장 7-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에게 절제를 주시고, 4월 16일 이래로 계속된 슬픔을 멈출 수 있는 결단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심대신에 눈물로 이 사건을 지워버리지 않게 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굳게 결심하고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어서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영구적인 회개 각성의 기념이 되게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국교회가 탄생시킨 괴물, 구원파라는 이단종교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믿어지는 이 사태 앞에 한국교회가 범죄자 집단처럼 자책감과 정죄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돈 사랑 맘몬 사랑 뇌물 사랑 불법 사랑 이 사랑이 이 엄청난 재난을 몰고 왔사오니 기독교대한침례교회 죄뿐만 아니라 저희 모든 교회가 이 죄책을 나누어지게 도와주소서. 오늘도 눈물 대신에 강구한 결심을 주시고 결단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누가복음 7장 11-17절에 보면 나인성 과부가 아들을 잃고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인성 과부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월호로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님들을 어떻게 대하실 것인지 짐작케 해주는 본문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죽음은 마을 공동체 전체의 죽음이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아들의 죽음 행렬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지배하는 나인성 성문에 가까이 가셔서 죽음행렬과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이 과부는 신앙이 좋다는 말도 없고 믿음이 좋다는 말도 없고 경건하다는 어떤 말도 없습니다. 그냥 슬픔을 당한 여인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도 묻지 않고 재산도 묻지 않고 그 슬픔의 정지된 장면 속으로 뚜벅뚜벅 들어가셔서 관을 제지하십니다. 죽음의 행렬을 막으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십니다. 이때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스플랑크니조마입니다. 창자입니다. 지금도 스플랑크스 하면 창자입니다. 스플랑크니조마는 창자적으로 공감한다, 내장적으로 공감한다, 가장 신실한 존재로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창자적 공감, 애 끓는 슬픔에 공감, 그게 바로 스플랑크니조마입니다. 예수님에게 이 동사가 자주 쓰였습니다. 진정성이 가득 넘치는 공감, 창자내적으로 내장적으로 내장과 같이 가장 깊은, 은닉할 수 없는 진정성으로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과부가 울어 젖히는 그 슬픔의 현장에서 우리 주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 슬픔 자체를 주목하고 창자적으로 떨리고 창자적으로 공감하여서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창자적으로 공감하는 것 자체는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도 할 수 있고 공자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서 마음씨 좋은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창자적 공감에 멈추지 않고 사태를 완전히 반전시킬 만큼 사태를 장악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이 명령은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울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울지 말라는 이유를 입증하는 죽음을 삼키는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참담한 슬픔에 창자적인 공감을 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이기는 예수님을 또한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죽은 자도 예수님의 명령을 가청,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죽은 자도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 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우리한테 죽은 자일뿐이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 이 자가 명령을 들었다는 말은 하나님께는 죽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아멘으로 응답하면 죽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도 무생물적 반응을 보이는 그 자가 죽은 자이지, 하나님이 부를 때 일어나면 죽은 자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생화학적 활동이 중지된 자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죽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번 세월호로 국가의 총체적 무능력과 오작동으로 비명을 달리한 네안 니스코스, 청년들을 향하여 아마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너 종교가 뭐니? 너 절에 다녔니? 너 예배당 다녔니? 라고 묻지 않고 슬픔 자체를 정곡으로 돌파하시면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이것이 아마 지금 우리 하나님이 통곡으로 자지러진 엄마 아빠 가족들을 대하시는 유일한 태도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댓글이 달립니다. 김회권 종교다원주의자, 이렇게 기도만 해도 비난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는 천국에 가서는 안 되겠죠. 그런 사람들은 바로 세월호를 탈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할 때 그 배에 들어가면 죽을 것 같아서 탈출했습니다. 선박직 승무원 15명과 선장이 구원을 위해서 탈출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받기 위해서 한 탈출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으로, 영원한 수치로, 영원한 모욕으로, 영원한 진노의 심판으로의 탈출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 8장 35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죽음의 행렬로 질주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배를 버리고 누릴 그 탈출, 구원은 영원한 죄책감으로의 잠적이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수치와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구원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위하여 세월호 선장처럼 선박직 승무원처럼 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오늘 빌립에게 제자들에게 죽음을 통달한 후에 누리는 구원, 죽음을 통달한 후에 누리는 구원만이 참 구원이고, 내가 죽음을 겪은 후에 얻는 구원만이 참 구원이라는 것, 내가 죽음을 마친 후에 만나는 하나님과의 랑데부가 진짜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는 것, 자기 목숨을 잃지 않고 자기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는 것,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가는 이 길이야말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것을 본문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굉장히 어려운 본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이다, 불교 이슬람교는 사탄이다,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방법은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한 번 죽을 덧없는 생명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밖에 없는 겁니다. 가짜 돈을 잃고 진짜 돈을 얻는 겁니다. 천국에서까지 유포되는 돈은 달러입니까? 세종대왕 입니까? 아닙니다. 천국에서 유표 되는 유가증권은 사랑의 봉사, 우리가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가 그 행위만큼 평가를 받습니다. 내가 얼마나 낭비했는가, 내가 얼마나 형제자매를 위해서 온 물질과 시간을 다 썼는가 내가 천국에서 받는 재산입니다. 이게 내 생명입니다. 우리가 왜 사랑이 증오와 이기심보다 더 나은지는 지상의 생애에서 자명하게 입증하기 힘듭니다. 왜 사랑이 무관심보다 더 나은 건지, 입증하기 힘들어요. 천국 가봐야 아는 거예요. 왜 사랑이 그토록 중요했는가는 천국에 가봐야 살아봐야 아는 것이지 자명하지 않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도 사랑이 왜 미움과 증오보다 나은지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도 그렇고, 어떤 세계 철학도 사랑이 자명하게 다른 것보다 최고라는 걸 입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왜 경쟁과 각축이 사랑보다 나쁜가 입증하기 힘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을 때만 납득되는 것, 비로소 종말론적으로 납득되는 것이지, 종말에 안 가보고도 납득된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홀린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안 갔는데도 사랑이 최고라고 믿어지는 사람은 성령이 우리를 약간 잘못된 세상에서 탈구시켜서 혼을 빼 영적 최면을 걸어놨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과 최면 걸린 것은 거의 유사합니다. 살기어린 눈빛이 거룩한 바보 이반의 눈빛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받기 전에 심사숙고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꼭 살아야 할지, 아니면 살기를 띠면서 최대한 욕망을 극대화하면서 살 것인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가는 길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담 인류가 불순종으로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에 죽음을 수습하는 길은 죽음을 안고 가는 순종, poetic justice, 비례적 정의, 응분의 정의입니다. 아담은 의도적인 죄와 불순종으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아담의 죄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역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안고 가면서까지 순종을 보여서 신앙을 보여서 아담이 가져왔던 불순종의 길을 영어로 re tracking 해야 합니다. 역추적 해야 합니다. 수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담 인류가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초래한 죄와 죽음은 나쁜 겁니다. 아담이 죄인인 것을 입증할 때 쓴 것이 죄와 죽음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와 죽음을 감수함으로써 인간이 극단적으로 신앙을 가질 때 어떤 것인가 보여주는 도구로 재사용됐습니다. 죄와 죽음은 아담이 가져온 인류역사의 최악의 파생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오면 하나님 아들 예수가 극한으로 착해질 수 있는 도구는 죄와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드리는 순종이기 때문에 아담인류가 가져온 제일 나쁜 것이 예수 안에서 최고의 순종과 신앙을 증명할 때 쓰는 도구가 됩니다. 이해가 됩니까? 새벽 2시 반에 이걸 깨닫고 잠을 못 잤습니다. 제가 설교문을 읽으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금요일에는 흥분해서 썼는데 이 설교문을 읽어보니 너무 어려워요. 내 아내에게 몇 마디 해봤는데 감이 안 오더라고요. 너무 걱정을 많이 하고 11시 40분에 잠이 들었다 2시간 후에 깨어났는데 다시 요한복음이 생각나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할까? 새벽 6시 40분쯤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누가복음 나인성 과부 이야기 떠오르고, 지금 하는 설교는 금요일 새벽에는 없던 생각입니다. 깨달았다고 썼는데 읽어보니 너무 낯설어요. 설교자의 비애입니다. 제가 토요일에 누구를 만날 때는 빈껍데기입니다. 설교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을 안 만납니다. 자폐적인 몽유병 환자입니다. 옆에 있어도 사람을 안 봅니다. 설교 생각밖에 안 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은 아담인류와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을 상쇄하면서 그 죄와 불순종을 악마적 위력을 신앙을 표현하는 도구로 써서, 원수의 손에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원수를 무찌르는 방식의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하는 이 삶의 궤적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인격적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이라는 겁니다. 세월호 선원 및 선장은 너무 놀랍게도 우리 보통사람과 똑같습니다. 보통 사람의 행동을 하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악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보통 행동입니다. 보통 사람의 보통 행동이 결정적인 순간에 악인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1학년 때 법학개론 시간에 배웠습니다. 긴급자기구조권인가 피난권인가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분명히 기억납니다. 해상에 조난을 당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널빤지를 빼앗아도 자기 긴급구조권 때문에 죄가 안 된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 비슷한 내용을 배웠습니다. 그 사람이 만일 그렇게 논리적으로 확증해서 나는 시기적으로 간이 작아서, 정신병자처럼 하면 살인죄가 아니라 정당방위 비슷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emergency상황이 아닐 때는 아닙니다. 아담 인류, 청해진 해운, 세월호의 누적된 불순종과 죄를 뒤집어쓰기 위해서는 거기에 비례적으로 걸맞은 극단적인 순종이 필요했고, 극단적인 진리 실현이 필요했고, 극단적인 사랑의 과시가 필요했는데, 청해진 해운의 대표,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 사람은 보통 사람의 보통 행동을 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세월호 상황, 엄청난 아담 인류적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선상공동체를 그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죠. 그래서 그 행동이 아담인류의 죄성을 여실하게 드러낸 겁니다. 여기서 1902년 6월 11일에 목포 청도 앞바다인 신안에서 한국 성서번역자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인천에서 배를 타고 44세의 아펜젤러가 갔습니다. 언더우드 그랜튼, 호레이스 알렌 의사와 함께 1885년에 들어온 사람이고, 감리교 선교사였죠. 배제학당과 정동제일교회와 이화여대를 세운 사람이죠. 44세에 아펜젤러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크게 충돌했습니다. 광산업자 볼디라는 사람이 그때 조난을 당해서 탈출했습니다. 아펜젤러의 마지막 장면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던 갑판 가까이에 와 있었지만 3등 선실에 있던 자기 학생들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구조활동을 하다가 끝내 떠오르지 못했다, 그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배를 끝내 찾지 못했고 양화진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는 가묘입니다. 그의 시신을 영구적으로 수습하지 못했고 돈이 너무 비쌌습니다. 군산에 가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배에서 살아남은 공산업자 볼비등의 증언에 따르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던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등선실에 있던 한국인 조수 조한규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군산에 있는 선교기념관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아무도 막지 않은 툭 트인 바다 밑 묘지, 많은 사람이 함께 묻힌 무덤 속에 헨리 아펜젤러는 잠들어 있다, 그는 그의 품에 영혼을 안고 천국에 들어갔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려고 하는 길이거든요. 우리 일상생활에는 이렇게 극적상황이 필요할 만큼 세월호 emergency는 아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민한 사람, 신령한 감수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일상생활 전체가 세월호적 emergency입니다. 내가 세월호 같은 참담한 사태가 벌어질 때 나에게 아무런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무관심의 세계,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한 무관심의 세계화 덕분에 선박직 승무원들의 일탈된 인간성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지, 내 삶의 좌표가 세월호 상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명의 영과 성령의 영에 사로잡히면 세월호 상황에 디밀어져서 지금도 탈출하기 위해서 3등선실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내가 그 상황에 요청받지 않고 그 상황에 초청받지 못했단 말은 내 삶 전체가 세월호 같은 무관심과 세월호 승무원들의 조기탈출론적 경박함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내가 손을 뻗어 3등 선실로 내려 가고 3등 선실에서 아우성이 들려오지 않는 사람은 이미 헬기를 타고 구명정을 타고 떠났기 때문에 안 들립니다. 그 아이들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문을 두드리면서 구조중이라고 외치는 사람의 말이 안 들리는 사람이 이미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라는 어마어마한 맘몬숭배 때문에, 삶의 치열한 현장이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언어 성경의 언어가 하나도 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겁니다. 우리 삶이 이렇게 밀도 높은 생명나눔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성경의 언어는 간절히 살아 있는 언어가 되고 예수님은 너무나 엄청난 분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엄청난 분이고 경배를 받아야 할지 아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누추하고 예수님과 수백억광년만큼 떨어져 있는가 알게 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여기에 애통함이 발생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발생하거든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애통한 사람들이 성령을 갈구하게 되고, 성령충만해지는 공동체가 생기게 되고, 성령충만한 공동체는 고인 물처럼 되지 않고 장렬한 사랑의 불붙음을 경험하면서 온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간단 말이죠. 사랑 자체가 교회의 유일한 핵심표지가 돼요. 큰 교회 예배당 그것이 유일한 표지가 아니라 사랑 활동 자체, 사랑 활동 어디에 관여했는가 어떤 일에 내가 내 시간을 보냈는가 그런 사연을 가지고 모여드는 곳이 교회고 예배당이고 여기서 감격하게 되고 뉘우치게 되고 삶의 좌표가 뚜렷해지거든요. 세월호 수장 사건 같은 극적 구조가 아닌 일상의 나른하고 무료한 구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삶에 본질적으로 깊이 관여하지 못하는 부유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인생은 내가 구해내야 할 사람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일도 없고 3등 선실에 빠져 있는 사람도 아니고 가라앉는 사람도 아니고 가라앉는 사람을 보고도 뛰어 달려갈 사람도 아닌 사람은 이미 가라 앉아 죽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펜젤러처럼 죽은 자가 아닙니다. 헬기를 타고 있으되 죽은 자요, 그는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는데도 죽은 자요, 그는 하나님 말씀이 더 이상 안 들리는 하나님 말씀의 가청권 내를 이탈한, 통화권 이탈지역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구조를 요청한 사람이거나 SOS를 칠 사람이거나 내가 신고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내가 도와달라고 소리침을 하는 사람이거나 이 뚜렷한 역할 구분이 일어나지 않고, 내 삶의 맥락이 도저히 뭔지 정리가 안 된 사람은 제가 볼때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입니다. 아마도 쾌락과 돈과 불순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세월호적인 드라마가 제기하는 역할에 반드시 어딘가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3등 선실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구하러 가기 위하여 죽음을 통과하여 아버지께 가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 길은 성령 받지 못한 제자들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내가 죽음의 잔을 마시면서 아버지께 가는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너희도 언젠가는 따라와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지금 너희는 따라오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나는 지금 힘이 빠져서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 깊은 바다 심해 속으로 요나의 행적을 되풀이하는 게 아니다, 주님은 요나의 표적으로 자기부활을 말했습니다. 요나가 깊은 바다에 3일 동안 빠져 있던 것처럼 본인 자신도 죽음의 바다에 삼일 동안 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예상하시면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요나의 표적으로 인자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삼일만에 부활시킬 것이다, 이렇게 일시적이고 덧없는 또한 그 자체가 영원성이 없는 생물학적 목숨을 한 번 버리고 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맞교환이야말로 예수가 보여주신 길이고 이 길이 제자의 길입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뚜벅뚜벅 심해 바다 깊은 곳으로 잃은 자들을 찾으러 가며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죽음의 잔을 마시는 길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떠니까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을 형이상학적 공간이동으로 생각하지 말라, 내 안에 이렇게 끊임 없는 잃은 자에 대한, 영혼 잃어버린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을 불일듯 하게 만드는 감동의 원천이신 내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에 복종하는 나 자신과 내 가슴속에서 이 복종을 불일듯하게 하는 명령하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 내 안에서 이 죽음의 길을 거룩하게 호위하시고 죽음의 길로 나를 이끄시는 민망해하시는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 안에는 명령하신 아버지가 있고 내 안에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아들이 있다, 내 안에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다, 아마 이것은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마지막에 또한번 나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죽음을 거친 길이다, 내가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 길이야말로 내가 아버지와 얼마나 완벽하게 결합돼 있는지 증명하는 번지점프와 같은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믿고 죽음의 번지점프를 할 것인데 나와 아버지가 얼마나 견결하게 결속돼 있는가를 이 죽음의 번지점프처럼 자유낙하를 통해서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하면서 우리 주님은 죽음의 번지점프를 내려 가셨고 삼일만에 복원력을 가지고 다시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을 입증했으면 너희는 이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여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을 테스트해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아버지가 들어주신다는 말은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인격적인 결속을 연속적으로 강화시키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무엇이든 응답이 될 것이다, 내가 번지점프로 끝나서 죽음의 바다 저편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아버지께 돌아간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기도응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나가 됐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기도가 참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진짜 어렵습니다. 요한복음의 언어 하나하나는 말이 아니라 영입니다. 그 영의 세계에 가서 깊고 깊은 세계를 밟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 단어가 너무 낯섭니다. 저도 일순간에 요한복음이 낯설어집니다. 이렇게 깨닫고도 또 낯설어집니다. 제가 요한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천박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너무 산만하게,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초첨잡힌 묵상과 예배를 못 드리고 예수님에 대한 경배모드를 자꾸 흩트러뜨리니까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흩트러지고 낯설어지고 냉담해져버립니다. 제가 24시간 예수님을 흠모하고 경배하는 모드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 언어가 살아서 저를 지배합니다. 제가 자꾸 박할머니 김흰머리 안흰머리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짜증이 나서 정신이 흩트러지니까 예수님에 대한 경배모드가 흩트러집니다. 효자동 할머니와 여의도의 흰머리 아저씨 그런 사람을 생각하니까, 여러분도 어쨌든 예수님 경배모드가 흩트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문을 안 봐야 하는데 또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법은 지금 우리로서는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응답받으면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진짜 죽음을 거쳐 생명에 도달한 게 맞습니다. 도킹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천 어딘가 구만리 장천 어딘가로 떠난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참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니까 예수님의 성품에 맞는 기도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에 맞는 기도만 해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이걸 다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예수님과 아버지가 완전히 죽음 저편으로 끌려간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었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것은 기도, 또 다른 보혜사 성령 오심, 이 두 가지가 예수님의 행로가 죽음 저편으로 끌려간 것처럼 보였던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완전한 삼위일체연합을 이루고 계시는구나, 알게 되고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시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던 격렬한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깊은 인격적 교제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여러분께서 일상생활을 재구성할 때 구원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두 가지 역설적 의미로 쓰일 때가 없을 겁니다. 여러분이 심해에 가라앉아 있는, 삼등선실에 잠들어 있는 요나같은 사람이라면 풍랑과 폭풍을 겪고 좌초하는 현실 속에서 구원을 요청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아펜젤러처럼 삼등선실을 향해서 우리 주님처럼 뚜벅뚜벅 죽음의 심해 아래로 가라 앉을 각오를 하고 민간잠수부처럼 40미터까지 직선으로 내려가는 엄청난 용기와 희생정신으로 가득 찬 삶이 되셔서 진짜 영생을 믿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능히 이기시고 우리에게 죽었던 과부 아들을 되돌려 주셨던 분입니다. 세월호 희생자 모든 분들이 우리 주님의 예기치 않는 친절과 엄청난 능력 앞에 놀라서 눈물을 그치고 얼싸안고 웃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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