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주일설교 _ 요한복음 16:13-24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본문이 계속 반복되는 느낌이 들고 있죠? 예수님이 14-16장까지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의 근심은 깊어가고 아직까지 이해의 빛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14장부터 불안과 근심에 둘러싸인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을 또 다른 보혜사가 오기 위한 조건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하지 않았고 그들의 근심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점점 위축되어 가는 마음, 모든 것이 사그라지고 끝났다고 느끼는 허탈감들이 제자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아버지께 떠나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 왜냐하면 또 다른 보혜사가 와서 내 이름으로 활동하며 내가 지상의 육신으로 있을 때와 똑같은 효과를 내는 영원히 함께 하심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깐 동안 맛 보는 격한 이별의 슬픔과 허탈감이 이 모든 말들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이럴 수 있나 싶습니다. 책 바깥에 와 있는 우리는 납득이 됩니다. 책 안에 있는 제자들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7절, 세 군데에서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내가 만일 돌아가 아버지께로 가면 아버지께 요청하여 성령을 보내주실 텐데 너희가 성령을 받는 순간 확신하여라, 내가 매장 되어 썩어 점점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가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그 결정적 증거는 오순절 첫 열매절, 초실절, 곡식을 재배하여 첫 열매를 수확하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 내가 매장되어서 썩지 않고 하나님 우편보좌로 올라가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논리적으로 확신하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이별에 압도돼 있고 예수님은 근심과 이별과 허탈감에 압도되고 있는 이 제자들에게 내가 육신적으로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하지만 납득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아무리 납득하고 싶어도 압도된 슬픔, 압도된 좌절감 앞에 있으면 우리가 아무리 슬픈 일 너머에 금방 좋은 일이 온다 하더라도 납득하지 못하고, 그 뒤에 올 좋은 일 때문에 나쁜 현재의 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잘 발휘가 안 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 관계는 아무리 본문을 해석해도 그 논리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슬픔에 사로잡히고 근심에 잡혀버린 사람들을 충분히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 인간이 이성적인 논리에 더 이상 납득당할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성적인 논리에 납득당할 수 없다는 말은 압도적 슬픔 압도적 감동에 격류에 지배당할 때는 더 이상 로고스, 차분한 언어가 우리에게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를 겪은 사람들에게 정부가 이들이 나쁜 행동을 할까 싶어서, 자살을 할까 싶어서, 다른 격한 행동을 할까 싶어서 정부가 엄청난 상담사를 강제로 파송하여 상담을 arrange 했습니다. 상담을 기초도 모르는 짓이라는 것이 상담학자들의 대부분 이야기입니다. 격한 환난을 겪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에게는 로고스 중심의 상담이 필요한 게 아니라 슬픔을 고즈넉하게 안고 말없이 앉아 있어주는 것, 아무 말도 않고 상담도 시도하지 않고 우는 사람 옆에 가서 같이 우는 자의 공명현상을 일으키면서 울어주는 것 자체가 상담인데, 그걸 로고스로 말로 시도했다는 거죠. 정부는 이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슬픈 현상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에 이들이 격한 우발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진정시키려고 하고 감정을 진압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대통령과 우리 정부 당국의 입장입니다. 그분들은 인간성이 타락했습니까? 개개인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과 직분 자체는 우리에게 내가 타락한 인간이 아니면 보일 수없는 반응을 보이게 만듭니다. 슬픔과 근심과 허탈감과 모든 것이 끝났다는 자포자기 열정, 그런 격한 감정이 지배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도 심지어 설득하는데 실패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4-16장 굉장히 민망할 정도로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시고 저는 세 장에 걸쳐 너무 긴 설교를 계속합니다. 생각해보니 너무 길게, 왜 설교를 이렇게 오래하는가 봤더니 예수님이 제자들 때문에 쩔쩔매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아마 성령설교가 너무 오래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저는 주석서를 봐도 어떤 책을 봐도 요한복음 14-16장에 대한 시원스러운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계속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내가 떠나가서 진리의 성령이 오면 진리가 너희 모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서는 적합한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진리의 영이 와서 진리가운데 인도한다는 말은 진보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왜 죽는지, 예수님이 진짜 죄를 지어서 죽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께 인정받는데 세상 임금에게 일시적으로 단죄되고 있는 것인지, 명확한 사태를 바로 알게 해주는 것이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성령입니다. 더 깊은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진리라는 말은 인격적 결속감이라는 뜻입니다. 인격적 결속을 창조하는 영이 진리의 영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상태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서 진실과 비진실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데, 성령 받자마자 완전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을 죽었음을 알게 되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삼일 만에 부활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았음을 다 깨닫게 되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인격적 유대감이 강하게 착류되고,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인격적 유대 외에도 제자들끼리도 서로 강력한 우정으로 결속되는 것이 진리의 성령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한국교회나 여러분 개인의 생애를 볼 때 내가 지금 영적으로 바른 궤도에 서 있는 것인지, 내가 이단교회에 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교회가 통째로 이단인지, 가톨릭이 이단인지, 논리적으로 뒤엉킨 상태일 겁니다. 저 자신도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소수파에 속할까? 나는 다수파에 속하면 안 되나? 내가 뭐가 모자라서 소수파에 속해야해? 내 안에 반골기질이 있는가? 심리학적으로 뭘까? 내가 어렸을 때 매를 심하게 맞았나? 제 자신이 왜 이렇게 사는가에 대해서 분석하면서 혹시 내가 유전인자적인 결함이라든지, 치명적으로 기존 주류사회를 생물학적으로 증오하는 힘이 있는가? 혹시 내가 열등감이 있는가?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아닌 것 같아요. 성령께서 작용하신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살 이유가 없고, 제 인간성이 그렇게도 나쁘지 않은데 주류에 낄 만한 남을 맞출 수 있는데, 성경을 많이 봐서 남을 못 보고 공격도 하고 비판도 하고 왜 이렇게 사는가? 제가 최근에 소설 <맹자>를 보면서, 제자가 싸움닭처럼 제자백가시대 때 엄청 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맹자>가 기가 막힌 책인데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스승님은 왜 가는 곳곳마다 싸움을 일으키시고 그렇게 욕설도 하십니까? 내가 하고 싶어 그러나? 이 모든 난세를 어지럽히는 양주와 묵자 같은 어리석은 녀석들이 인륜을 파괴하고 제후와 왕들을 혹세무민 하니 그렇지, 자기가 이렇게 투쟁적으로 논쟁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해명합니다. 저도 지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좋겠는데 확고부동하게 내가 옳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대부분 저렇게 다르게 생각하는데, 혹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속 시원히 정리해주는 그런 사태가 올 것인가? 내가 왕성교회라든지 김홍도 목사 교회라든지 상식이하의 나쁜 사람들이 활약하는 교회보다 결정적으로 낫다는 말인가? 우리 교우들이 결정적으로 나은가? 실제로 그런 확신이 없다는 말이에요. 제가 볼 때 그 목사님들이 저보다 금식기도를 더 많이 할 것이고, 새벽기도도 더 많이 할 것이고, 제가 오리무중 상태에 빠져 있는가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인격적 유대가 심화되고 강화되고,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기도응답 받는 정도가 기도응답 받는 빈도가 기도 응답받는 수준이 확장되고 심화되고 그런 일이 있을 때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거든요. 예수의 명의로 기도응답 받는 일이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는 거거든요. 예수님이 진짜 부활하셨음을 믿는 길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받는 일 밖에 없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받는 사람만이 부활의 능력과 부활에 권능에 사로잡힌다고 24절은 말하거든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받는 일이 심하게 빈번하게 자주 진실하게 많이 일어나야만 내가 예수님의 진리의 영에 인도받는 거라 할 수 있거든요. 예수님이 구할만한 것들을 구하여 예수님 원했던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많이 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통치 흔적을 많이 확산시키는 그 일에 연루될 때 내 기쁨이 충만해지고 세상은 이런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고 내가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다는 확신이 드는데, 이런 진리 실천의 현장에서 많이 떨어질수록 우리는 예수님 부활도 믿을 수 없고 내가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것도 믿을 수 없는 거죠. 이것이 논리적으로 해명이 됐다는 말이에요. 나 혼자는 몰래 실천할 수 있다 쳐도 다수의 우리 형제자매들을 어떻게 인도하는 것이 진리의 영 가운데 인도함 받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우리 성도들의 삶을 대부분 볼 수 없고 성도들은 내 삶을 볼 수 없는 것이고, 도시의 익명의 공간에 불투명한 구역에서 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진리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제 개인적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동체적으로 기도하거나 국가적으로 기도한 것은 전혀 응답 받지 못합니다. 우리 딸이 좋은 학군에 배치되기 위해서 기도하면 응답 못 받았죠. 화정고등학교에 배치되기를 바랐는데 무원고가 됐죠. 대부분 국가와 관련돼 있는 건 응답 못 받았거든요. 그런데 제 개인적인 응답은 받았거든요. 말씀을 깨닫는 것도 많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들은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 제 개인을 생각할 때는 진짜 하나님이 계신 것은 믿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실재로 만지게 되는 기도응답을 예수 이름으로 구하여 받는 일은 너무 없는 겁니다. 제가 옛날 캠퍼스 ministry 할 때 제자들 신병을 확보해놓고 준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일주일에 3일은 같이 지내면서 기도하고 같이 다니며 전도하고 사람 숫자가 늘어나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성장한 건 확인할 수 있죠.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 구획돼 있고 따로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삶을 쳐다볼 수 없는 것으로 바뀔 때 어떻게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여 예수님이 구하는 그 나라와 그 의,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른 말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 땅에 통치현장을 확장해가는 그것을 내가 참여하고 맛보고 실천하고 이런 것들을 맛보지 않으면 부활의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케 되지 않는 거거든요. 부활의 기쁨, 내가 지금 잠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에 찬 삶이지만 이 삶은 금방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부활의 확신이잖아요. 옳지만 옳은 내 길이 단죄 받을 수 있지만 옳은 내 길이 언젠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 믿음이 부활의 기쁨인데, 이 믿음이 지금 충만해지려면 우리가 한데 모여서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함께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면서 공동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했더니 응답이 되었다, 하나님의 통치의 흔적이 많다, 입법운동으로 제도의 개선으로 이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없거든요. 우리가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도 악질적인 부패한 장관후보들이 등장하고 3급수 대표자들이 등장하거든요. 1급수가 오는 게 아니라 교육부장관에 가장 반교육적인 사람이 와서 3주 내내 우리를 괴롭히거든요. 여 야를 가릴 것 없이 도덕적 슬럼지대에서 낙인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너무나 부패했거든요. 사법부 언론 종교 정치가, 이 모든 것을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부패한 세상에서 우리 청년들에게 냉소적으로 바뀌어 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붙들어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만지게 만들어주는 기도응답을 우리가 받지 못하면 우리는 기쁨이 없는 거죠. 제자들의 근심과 제자들의 불안과 허탈감은 부활의 기쁨이 없으면 해소가 안 되는 거거든요. 기쁨이라는 말은 내가 이 지상에서 압도적으로 느끼는 기쁨으로서 나머지 소소하고 작은 슬픔들을 다 무효화시키고 무채색으로 만드는 그 기쁨이 충만해야 하거든요. 내가 휘몬 에 페플레로메네, The joy of yours, 너의 기쁨이 충만케 된다, 죽음의 공포도 이기게 만드는 기쁨, 산헤드린 재판을 받으러 갔습니다. 재판 받으러 갔던 요한과 베드로가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 가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옥문이 열렸습니다. 옥문이 열릴 때 나오는 유효한 기쁨, 그런 기쁨이 부활의 기쁨이거든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밤중 12시에 막 기도합니다. 기도하는데 옥문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해야 기쁨이 충만한데 우리는 이런 극적인 게 없습니다. 우리가 닭장차에 올라가서 잡혀갈 때 주여 곤봉의 힘을 낮추어주소서, 했는데 곤봉의 힘이 똑같이 온단 말이에요. 경찰 군홧발의 힘이 약하게 해달라고 해도 안 해주거든요. 이렇게 비영웅적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고난의 끝없는 연속 속에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 냉각되고, 지금 우리 한국교우들의 마음은 부활의 기쁨에 점화되지 못하고 젖은 장작처럼 지극한 냉소에 빠져 있습니다. 지극한 슬픔에, 엠마오 도상의 제자처럼 슬픈 겁니다. 우리는 냉소입니다. 세월호 사건 때문에 매출이 30-40% 다 줄었습니다. 소비행위도 줄었습니다. 304명의 동포가 산 채로 두 시간 20분 만에 물에 서서히 가라앉는 슬로비디오 장면을 봤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약화됐습니다. 세금 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많고 이민 간다는 말도 많습니다. 미국 비자가 거절될 때 세월호 사태 때문에 한국에 안 돌아온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예단을 내려 지금 비자를 거절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 내가 결국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내가 결국은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 결국은 잡혀갈 것이라는 두려움, 결국은 내가 예루살렘에 있다가 일망타진 되고 종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과 근심이 제자의 근심이거든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은 죽음까지 극복한 후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분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이 바로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를 도와줄 수 있는 기쁨이잖아요.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결국은 내가 패배할 것 같은 두려움, 결국은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것, 내가 존재 없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 같은 근심들, 죽음의 권세 안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소소하게 갉아먹는 두려움과 불안은 예수 이름으로 오는 또 다른 성령 보혜사가 우리를 지배해줄 때만 극복하는 것이고, 그런 성령의 지배를 부단히 경험하는 길은 예수 이름으로 합심 기도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서 경험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구역예배 때 같이 기도해야 하고, 많은 사람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같이 살 수 있으면 제일 좋습니다. 제일 좋은 건 일상적 번개미팅이 가까울 만큼 한 마을에 사는 게 가장 좋습니다. 전화하면 5~10분 안에 다 모일 수 있는 곳에 살면 좋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그렇게 못 삽니다. 저는 좀 있다 치더라도 대부분 여러분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파주에서 방베동으로 왔지 않습니까? 여기 오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한 데 모여, 5-10분 안에 번개 미팅으로 다 모일 수 있는 마을적인 친근 거리에서 살면 합심이 가능하고 기도가 가능하고 응답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설득이 너무 안 되시니까 강력한 해산의 메타포를 구사합니다. 제가 이해를 잘 못하겠더라고요. 인터넷에 쳐서 해산할 때 어떤 현상이 있습니까? 뼈 몇 가지가 흔들리고 온 몸은 액체가 되고, 그렇게 써 놨는데 공감이 안 되더라고요. 엄마의 몸이 액체가 된 상태, 엄마의 뼈가 젤 상태로 말랑말랑해져서 아이에게 최적화된 조건으로 진흙처럼 말랑말랑하게 바뀐 현상입니다. 엄마의 자기 힘을 잔뜩 빼는 겁니다. 엄마가 태아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자기는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 낳게 되는 상태, 이것이 해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공동체로 신생아 교회를 잉태하기 위해서, 여기서 요한계시록의 그 유명한 메타포, 여인과 아이의 메타포, 커다란 용에게 쫓겨 가서 해변가에서 아이를 낳는 엄마, 그게 바로 이 메타포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옥동자를 낳기 위해서 자기 무기력함, 자기 능력을 다 포기하고 온 몸이 부서지도록 자기를 연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연약한 엄마의 몸을 통해서 아이가 탄생하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신적 전능성을 100% 다 빼앗겨서 아무 죄 없는 자처럼, 아무 힘도 없는 자처럼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그 죽음을 통하여 신생 부활하는 옥동자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산모가 해산하고 나면 그 고통을 잊어버리듯이 우리 신생아 교회, 부활의 아들과 딸인 교회를 잉태하고 해산하기 위해서 연약해져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애에서 가장 기를 빼앗기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동반하는 순간이야말로 부활의 아들 딸, 기쁨의 옥동자를 출산하는 날이다, 이런 메타포 원리가 가능한 거거든요.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그 순간이 내게 영구적인 기쁨이 탄생된 날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신앙 때문에 진리를 실천하다가 이런 근심과 불안이 엄습할 때 이 예수의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는 근심과 불안은 절대로 이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때는 매를 맞아야 합니다. 징계를 받고 거듭나야 합니다. 1986년에 로마가톨릭이 교리성 장관 요셉 라칭거 추기경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오랫동안 회의됐던 종교재판을 열었습니다. 그 종교재판에 브라질의 해방신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보프신부가 똑같이 심문을 받았습니다. 보프신부가 심문 받고 1992년에 신부직을 박탈당했습니다. 1986년에 재판받고 1992년에 신부직을 박탈당해서 그때 우리가 너무 무서웠는데, 그 보프신부를 심판했던 교리성 장관이 2005년에 교황이 된 겁니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트 16세가 됐는데 온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밑에 교리성 장관, 종교심문관을 하던 그 사람이 교황이 되는 것을 보고 모든 만민들은 1965년에 제2차 바티칸 공회로 거듭났던 가톨릭교회가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무시무시한 중세시대로 돌아갔다, 많은 비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8년간 교황을 하다가 갑자기 교황을 그만두고 프란체스코 벨로볼리그 라는 이탈리아 이민자 아르헨티나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로마 가톨릭은 8년 동안 해방신학자에 대한 철저한 반계가 있었고 해방신학자를 다 축출해서 신부직을 박탈했습니다. 그런데 브라질 가톨릭 시민들 교인들이 교황청에 엄청난 탄원과 저항과 편지를 썼습니다. 구티에레스를 만일 파문시키거나 그에게 책도 쓰지 말라고 핍박한다면 이제 가톨릭은 우리 브라질과 아무 상관이 없다, 가톨릭에서는 유례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기도하고 저항했습니다. 구티에레스 신부는 파문을 못 시켰습니다. 그런데 8년 만에 너무나 뜻밖에 교황청 신학지도에 90%를 장악했던 보수신학자들이 꼼짝도 못할 만큼 너무나 뜻밖에 보프신부 밑에서 배웠던 사람이 교황이 된 겁니다. 8월 14일에 이 사람이 오죠. 국민일보에서 종교팀 6명의 기자가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교황이 오는데 개신교인구가 얼마나 줄어들지 모른다고 엄청난 불안에 사로잡혀서 교황이 오는 걸 반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은데 교수님은 어떻습니까?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 신문에 났더라고요. 제가 한 중요한 말은 다 빼고 전혀 엉뚱한 말을 넣습니다. 신문기자의 특징은 엉뚱한 말을 싣는 거거든요. 제가 안 한 말은 아니지만 칭찬한 말은 다 빼고, 교황이 오면 맞불 집회를 하겠다는 겁니다. 저는 보프신부가 1992년에 신부직을 벗으면서 이런 말을 해서 위로 받았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꽃대이다, 눈에 띄지 않지만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들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과 동역자다, 나는 우거의 상태에 있는 꽃들,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들을 믿고 있다, 자기를 지키는 교우들, 일상생활에서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거죠. 그 사람들을 믿고 있다, 저는 한국기독교가 목사가 대표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자들,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뿌리들과 같은 교우들이 있고 한국 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꽃대 같은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교회가 유지됩니다. 그 사람이 그 다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항상 교회에 머물고 싶다, 하지만 로마가 어쩌면 우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시점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게 8년 만에 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쓴 <복음의 기쁨>이 난리입니다. 교황은 슈퍼스타입니다. 성경에서 오랫동안 외면 받았던 예언자들의 관심,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읽은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옳고 그름의 세계를 피해서 자기 개인의 삶에 매몰되어도 선하다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악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일에만 집중해, 딴 사람들에 간섭하지 마, 삼자개입 금지에 걸려, 아무도 관심 갖지 마, 노동자 희망버스 세월호 타지 마, 밀양 가지 마, 강정 가지 마, 그냥 너 결재 서류 밀린 그 일만 해,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이렇게 폐쇄적인 성실로 몰입으로 몰아갑니다. 그게 바로 악의 논리입니다. 이 땅의 공유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한강 물이 더럽혀지는 것은 내 연봉과 상관없지만 한강 물이 더럽혀지면 한강물을 먹고 사는 1200만 서울시민의 건강이 나빠지기 때문에 내 직장도 중요하지만 한강 물의 오염 상태도 중요하다고 믿으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 됩니다. 대한민국의 대지, 대한민국의 하늘, 공공영역에서의 거짓말, 국정원의 거짓말, 한강물에 비소를 버린 겁니다. 대통령의 거짓말, 장관의 거짓말, 국회의원과 종교지도자의 거짓말 악행은 공유지, 우리가 딛고 사는 가치의 공기를 더럽히는 것이고 신뢰의 토양을 어지럽히는 것이고, 우리 모두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심 갖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에 관심 갖지 않고 폐쇄적인 몰입상태에서 자기 성실로 달려가는 것이 죽음의 땅입니다. 무엇이 부활입니까? 한강물의 오염 상태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픈 것이 하나님 나라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1인분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만 종료되는 삶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는가를 봐야 하고 다른 사람이 얼마나 슬픈가를 봐야 하고 다른 사람의 얼굴에 있는 눈물도 봐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우리에게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입니다. 이렇게 되는 상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면서 우애와 자애와 언약적 유대로 똘똘 뭉치면서 삶의 동역적인 위험 앞에서 주눅 든 사람들도 함께 살자고 나누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 구해야 할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할 바, 하나님 나라와 그 의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 주변은 좋아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행할 도구가 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면 구제활동뿐 아니라 사회전체를 개조할 만한 엄청난 인재들과 팀들이 뭉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수록 진짜 한국교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인재들의 요람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많이 기도할수록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감 넘치는 시민이 되고, 내 직장의 성실 뿐 아니라 한강물 수질 오염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되고 세월호 때문에 눈물 짓는 사람들의 도우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받으면 우리에게 으스스하게 어두운 골목으로 멱살 잡고 끌어서 죽을래? 라고 협박 공갈치는 죽음의 권세를 깨끗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짜 교회는 그렇게 살다가 단기간 피해 입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피난처입니다. 우리가 교회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 나라 운동을 순진하게 믿고 하다가 파탄난 사람을 살려주는 것, 그들의 살림살이를 도와주고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줘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교회는 숙박시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있어야 할 것은 예배당, 집을 잃은 일시적인 실업자들이 거할 거처, 이 예배당과 거처는 대안학교 사무실로 쓸 것, 그렇게 하면 된다고 봅니다. 모든 교회는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숙소가 됩니다. 교회 헌금은 그런 사람을 도울 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입니다. 그런 의로운 일을 하다가 희생당한 사람을 돕는 그 돈만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겁니다. MMF나 옵션 주식 선물시장에 던져진 돈은 강도 마피아에게 간 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 쓰실 교회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어찌될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을 받아서 으스스한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면서 1인분인생이라도 희망에 차서 기쁨에 차서 살고 싶은 소망이 가득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 공갈에 협박에 고개 숙이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권능이 저를 살리고 1인분 인생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마음으로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혹시 우리에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고,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는 압도적 기쁨이 우리를 지배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면서 근심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도 못하고 부인하지도 못하는 영적인 냉담상태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서 못 믿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못 믿겠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안 믿어집니다. 한국 사회를 청와대를 중심으로 보면 안 믿어집니다. 그러나 숨어서 눈물 깊게 진실하게 사는 은닉된 성도를 볼 때 믿어집니다. 타락한 교회 안에도 희망의 불쏘시개가 될 만한 성자들이 숨어 있고, 담임목사가 분탕질 치는 그 악한 교회에도 눈물로 지새우는 영적백의민족은 있습니다. 신문을 읽을 때도 폭력적인 유혈이 낭자한 이 세계 제후들과 왕들 중심으로 읽지 말고 작은 꽃들과 뿌리처럼 은닉돼 있으면서 세상을 장엄하게 비추는 작은 자들 중심으로 복음의 기쁨 중심으로 재해석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교황과 개신교와 세계 모든 교회가 폭력을 단념하고 사랑만으로 승리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겠습니다. 모든 폭력과 모든 권력과 모든 탐욕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저희에게 부활의 기쁨을 주소서. 우리 몸이 액체처럼 사랑하기에 적합하고 옥동자를 낳기에 적합한 무기력케 되게 해주시고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위해서 산모의 몸처럼 내가 약해지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마음이 냉각되고 근심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불쌍히 여겨주셔서 부활의 기쁨이 기도함으로 사랑함으로 나날이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거칠고 험한 직장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과 감사로 바쳤습니다. 이 귀한 헌물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곳에 쓰이기 원합니다. 한 데나리온 벌기 위해서 문 두드리는 이 땅의 억조창생들과 당신의 교회 안팎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탐욕의 쇠사슬을 끊고 배타와 독점의 사슬을 끊고 하나됨과 나눔과 형제자매 우애로 가득 찬 대한민국 되게 도와주소서. 교회가 그 일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는데 앞장서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교회가 간구하게 하여 주소서. 바른 예배가 드려지게 도와주시고 공평과 정의를 확장시키는 예배를 드리게 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함께하심과 인격적 유대 창조하심의 역사가 예배드리는 가향의 모든 교우들과, 그들을 놓고 중보기도 하는 친구들 동역자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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