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주일설교 _ 요한복음 15장 7-15절
-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지난주에 이어서 포도나무 비유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5장 1-7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를 이집트에서 꺽어 와서 가나안 땅에 심은 특상품 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꺾어온 특상품 포도나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열매를 기대했습니다. 공평과 정의를 기대했습니다. 공평과 정의를 기대했는데 실제로 맺은 열매는 포악과 부르짖음이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읽을 때는 말장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쉬파트 하면 공평입니다. 미시파트를 맺기 기대했는데 미시파흐를 맺었습니다. 미시파트를 기대하고 포도를 가꾸었는데 강자의 압제와 유린, 공평무상한 공동체 생활을 기대했는데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유력한 자들이 사회적으로 힘 센 자들이 경쟁에서 뒤쳐진 자들을 비인간화시키는 균열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포악입니다. 미시파흐, 공평과 정의는 체데카입니다. 또는 처다카입니다. 처다카를 기대했는데 부르짖음 츠아카를 만들었습니다. 말장난은 히브리어 두 단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구사할 수 있는 거거든요. 이사야는 이렇게 한 번 들으면 잊힐 수 없는 word paly를 가지고 그 사회를 규탄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참 포도나무라고 말했을 때는 들 포도를 맺었던 이사야의 규탄맥락을 이어 받는 겁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구성된 현재의 성전체제와 대비되는 새 포도나무 공동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방식대로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를 재창조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아무도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 타자를 지배하듯이 간섭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율적으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 이것이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세상을 원했는가? 위계질서는 있지만 부당함과 압제와 타자의 인생을 박탈하는 위계질서는 없는 것을 원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위계질서는 있지만 진정한 관계는 박탈관계는 아니죠? 여러분 자녀가 내가 자녀이기 때문에 참 불편하다는 사람이 없죠. 이 집에서 왜 자녀이지? 자녀됨을 향유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종과 지배자, 노예주인과 노예, 거류민과 본백성 사이에 차별이 없다는 것, 그게 바로 공평과 정의입니다. 정의라는 말은 체데카 또는 처데카라는 신적 친절입니다. 신적친절은 도덕이 요구하는 것 이상입니다. 도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은 우리 옆집 굴뚝에 삼일 째 연기가 나지 않는다, 삼일 째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 가서 노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악은 아닙니다. 냉정함입니다. 처데카는 이웃집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면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왜 안 나는지 물어보고 책임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언약공동체 결속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공세적으로 베푸는 친절과 사랑의 행위입니다. 처데카의 반대가 츠아카입니다. 츠아카는 못 살겠다고 부르짖는 부르짖음입니다. 이웃이 나를 못 살게 구니까 살 수 없다고 츠아카, 부르짖는 겁니다. 에스겔 16장 49절에서 소돔성이 멸망한 원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맷돌질 하는 부자들의 악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돔성이 무너졌습니다. 소돔성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왜? 소돔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소돔성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갑질하는 세상, 그래서 소돔성에서 부르짖음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말하면서 이사야 1장 10절, 이사야를 통해서 비판합니다. 이사야는 자기 시대가 한때 번영했다가 재기불능의 파멸을 겪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소돔과 고모라 수준으로 타락했다고 보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수준으로 타락한 시온산에서 메시지를 전하면서 에스겔 16장 49절을 생각하면서 공평과 정의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한 공동체로 존립가능하지 않은 자신의 시대를 향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라고 했을 때는 정확하게 이사야 5장 1-7절을 이어받았다, 에고 에이미 페 암펠로스 헤 알레티네, ‘나는 참포도나무요’ 들 포도나무였던 이스라엘과는 달리, 성전 종교체제와는 달리, 왕과 관료와 상비군이 지배하는 나쁜 세상 말고, 예수님의 나라에는 왕과 거대한 관료조직과 상비군이 없는 겁니다. 깨어 있는 자율적 시민만 있는 겁니다. 여러분 상상이 안 되죠. 하나님 나라에는 거대한 폭압적 관료조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도덕적 영적 자율성을 가진, 결단하고 순결한 사람들만 있는 겁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왜 닮았느냐? 교회는 폭압적 국가기구가 없는데도 사람들이 고분고분하게 말씀을 잘 따라옵니다. 말씀을 하면 다 따라옵니다. 헌금 내라면 내고, 수양회 가자면 가고, 청소하라면 오고 아무도 관료적 압제를 하지 않습니다. 안 온다고 벌점 매기지 않고 소송 걸지 않습니다. 십일조 하지 않는다고 소송 걸지 않습니다. 할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도 강제로 당신 이렇게 살아야 해, 말하지 않습니다. 권면할 뿐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2천 년 동안 자기회비를 내서 유지되는 기관입니다. 2천 년 동안 자발적으로 회비를 내서 유지되는 기관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불교도 만일 매번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불교인구가 확 줄어들 것입니다. 초파일에 한 번 5만 원짜리 등 한 번 달고, 기왓장 하나에 3만원 내고, 그런 정도의 불교는 2500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도시에서 살면서 계속 실천을 요구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모여드니까 교회는 시민조직으로서 어마어마하게 기가 막힌 조직입니다. 이 조직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폭압적 강제적 조직이 아니라 내부에서 깊이 나온 확신으로 시작된 모임이기 때문에 아무리 스탈린과 모택동과 히틀러 등이 지우려고 하고 말소시키려고 해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지워버리고 박해한 그 자리에 계속 기독교가 나오는 겁니다. 레닌과 스탈린 시기에 5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은 주교들이 죽었고 수녀들이 죽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스탈린과 레닌 시대에 죽었던 기독교인이 제일 많습니다. 솔제니친의 주장입니다. 서구유럽에서 죽었던 모든 순교자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17세기부터 시작된 러시아 종교의 타락과 순교다, 그렇게 말하거든요. 5천만 명 죽었답니다. 모택동이 인민공사 대약진운동으로 2천 300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인간의 마음은 끊어질 수 없는 선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아무리 담임목사님이 엉망진창이 나와서 교회를 분탕질 쳐도 신앙심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엉터리 같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나쁜 놈이 이 짓을 해도 교회는 들어옵니다. 그 사람이 참아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비한 끈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악한 교황이 있어도 가톨릭교회는 수가 늘어났습니다. 영락교회는 15년 간 담임목사님과 장로님이 일종의 내전에 있었지만 4천 500명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늘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싸움이 진정한 진검승부인가 구경하러 갔을 수도 있고요. 제가 볼 때 인간은 아무리 교회가 개독교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진심은 어떤 압제나 탱크나 고문도 지울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 중간 폭압적 중간 매개구조물이 없는 상태가 천국입니다. 천국은 무정부주의입니다. 폭압적 국가기관이 제로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참주형 목사가 나올 수 있고 교황형 목사가 나올 수 있고 봉건영주형 목사 나올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나오면 ostracism으로 공동의회 열어서 몰아낼 수도 있습니다. 생명력을 이어가는 교회, 예수님처럼 사람을 다룬 영적 리더십을 가진 교회는 재림 때까지 끝까지 갑니다. 그게 바로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는 것, 교회는 공평과 정의의 포도주를 공급하는 거룩한 양조장입니다. 교회를 한 번 다녀오면 술취한 상태가 돼야 하는 것이고 교회를 다녀오면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신적도취상태와 명랑쾌활한 상태에 빠져서 자기 탐욕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 쉬워지는 사람, 이게 바로 거룩한 양조장인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들이 마시는 포도주입니다. 교회는 얼마나 오래된 포도주냐? 이사야 5장 6절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입니다. 아브라함부터 하나님은 포도주를 담그셨습니다. 아브라함이 BC 15세기 또는 16세기 사람이니까 1500년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포도주를 담그셨습니다. 1500년 만에 내어놓은 포도주가 복음의 포도주, 예수의 포도주입니다. 아브라함 이래로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냈던 순종하는 인간들을 총적분하며 예수님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모든 훌륭한 인간들을 합성해 집단복합합성을 하면 예수님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세례요한까지 일어났던 파편적인 순종, 부분적인 순종, 부분적인 하나님 경외 하나님 사랑을 다 합하니까 예수님이 나오는 겁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세계만민에게 퍼트릴 수 있는 생산완제품입니다. 예수님을 먹으면 취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안 취하면 사람이 아니고 외계인이고 로봇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내가 시퍼런 이기심으로 탐욕으로 중무장한 내 모습이 매우 abnormal 비정상인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자마자 과감한 술 취한 상태가 나를 지배하게 되고 탐욕의 강철 같은 근육이 이완되면서 착해지는 생각만 점점 일어나고 술 취한 상태의 전파와 전염이 일어나면서 세계만민은 면박을 벗고 민족적 적개심과 경계를 다 허물어뜨리고 온 세계만민이 요한계시록 7장 7-9절에 나오는 것처럼 민족적 경계성 정체성을 가진 채로 하나가 됩니다. 월드컵은 로마제국의 올림픽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원래는 악마적 정신이 있는 겁니다. 월드컵을 볼 때 영성이 훼손되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많이 기도하고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월드컵 볼 때 성령 충만 하지 않고 보면 악마적으로 바뀌어 나옵니다. 홍명보 전화해서 댓글 달고, 기독교인들이 축구에 집착하니까 욕설을 너무 잘하고, 개 거품을 물면서, 지나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세속과의 표면접촉을 넓혀도 세속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회식 자리에 가서 맥주 한 잔 마신다고 갑자기 사탄이 침투하지 못합니다. 평소에 이미 사탄이 침투한 사람이 회식자리에 가서 사탄에게 지배당하지, 야 한잔 먹어, 주여 이걸 마시면 저는 사탄이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마시면 그냥 생화학적인 음료수입니다. 평소에 영성생활을 하지 않고 악마적인 지배력에 사는 사람들이 술자리에 가면 악마가 되는 것이지, 세속과의 표면접촉을 넓히면서 세속의 정신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세속을 취하게 만들고 삼투압 현상을 일으켜서 세상을 복음의 기쁨, 복음의 능력, 새로운 세계가 동터온다는 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 일종의 술 취하는 일을 퍼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은 내가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해서 복된 삶을 보여주는 것까지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고 할 때는 내가 복음의 새 포도주에 취한 상태를 시범 보여주고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고 보여주는 것까지입니다. 빌리그래함과 전혀 다른 겁니다. 지하철에서 정신 나간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렸던 귀신 들린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입에 대고 말하는 순간 민망해집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잠잠해라, 네 입에서 내 말을 하는 순간 내가 너와 한편인 걸로 아니까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맡겼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파하도록 말했습니다. 가버나움의 귀신들린 사람이나 귀신들린 자가 예수에게 주여, 이렇게 소리치는 것은 예수님을 오해하도록 만듭니다. 진짜 국민적 호감을 일으키는 사람이 예수님을 말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국민적 비호감과 혐오감과 적개심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가서 간증을 하는 순간 예수님은 매우 민망해지고 귀신 들린 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거룩한 복음의 포도주에 취한 사람이 기독교를 대표하지 못하고, 지극히 완고하고 몰상식하고 이성 이하의 계몽주의 이전 시대를 살았던 유아적 독존적 인식론적인 어린아이 수준의 기독교가 기독교를 대표해버립니다. 이 잘못은 그분들한테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정통으로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이 바른 삶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또한 책임을 면치 못하는 겁니다. 한 사람을 우스갯거리 삼고 참 기독교가 아니라고 빠져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말한 기독교가 세상에 알려진 기독교이고 그걸 해명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대를 이어 도시락을 싸고 다니면서 해명해야 합니다. 문모 씨가 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계속 설득하려면 박사학위 논문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얼마나 고단해요. 귀신이 먼저 복음을 전하고 나면 제자들이 복음전하기 힘드니까 귀신들은 복음전파하면 안 됩니다. 거룩한 새 포도주에 취하여 이기심과 탐욕의 계급적인 기득권, 계층적인 특권의식이 해소된 상태가 복음의 포도주를 마신 상태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회를 만드는 걸 열매 맺는다고 말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어떤 종말론적 자기 해석을 했느냐? 내 옆구리에서 쏟아진 물과 포도주가 복음의 새 포도주다, 요한복음 19장 34절입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물과 피가 쏟아졌다는 것을 요한일서 5장 6-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과 피가 바로 포도주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은 포도주 언약의 피, 이걸 같은 메타포로 쓰고 있는 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라는 말을 쓸 때 너희도 또한 순교적이고 십자가 지는 삶으로 초청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라는 것이 종말론적이고 자기희생, 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1장은 서론입니다. 21장은 부록입니다. 요한복음은 2장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리아를 여자로 불렀던 그 2장부터 시작해서 19장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자 마리아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이 끝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장면에 나오는 여자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똑같은 여자 마리아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2장 1-11절에 흘렸던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그 사건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낼 자기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겁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물과 포도주를 쏟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가나 혼인잔치, 이사야 25장 6절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연회를 준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25장 6절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물 포도주 포도나무를 통해서 결국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흘리는 물과 피가 복음의 포도주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이것도 결국 십자가의 자기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모든 담론들은 자기 해설적입니다. self explainable 합니다. 자기를 해설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한 말씀 한 말씀 할 때 그 한 말씀이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엄청난 의미를 파생시키면서 우리에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가 천둥처럼 세밀한 진동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각성과 영감을 고취시키면서 다가올 수 있게 들리려면 예수님이 읽었던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책을 한 권 읽었던 무서운 분입니다. 책 한권 읽은 분이 무서운 분이죠. 여러분도 책을 한권만 계속 읽으면 예수님처럼 된다고 보면 돼요. 저도 책을 너무 심하게 읽어서 이렇게 됐습니다. 확신이 듭니다. 강해지고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이런 말들은 쉽게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 나와 깊은 친교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 너희도 피 흘리는 십자가를 지는 제자가 된다, 그리고 이 삶을 통하여 기도응답이 이뤄지고 하나님 뜻이 이뤄진다, 십자가를 지는 그 제자만이 기도할 수 있고 십자가를 지는 제자,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의 기도만이 하나님 뜻을 성취하니까 뭐든지 다 성취된다, 김하중 대사처럼 뭐든지 기도하면 다 되는 것은 성경적인 실험보다 훨씬 더 나간 실험인데, 아직까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김하중 대사의 책에 보면 자기 손자가 먹을 음식까지 응답을 받습니다. 응답 안 받아도 대부분이 알아냅니다. 아토피가 있는 아이에게 이거 먹여도 될까요? 안 된다, 하나님은 김하중 대사의 손자가 먹을 음식 때문에 계속 기도 응답해야 하니까 엄청 신경을 쓰십니다. 사십 몇 가지의 음식에 대한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참 용하게 들립니다. 김하중 대사의 하나님의 대사라는 그 책에 나온 기도응답은 성경과는 많이, 일반적으로 종교적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괜찮습니다. 나쁘지 않은데, 그러나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무엇이든지는 내 안에 붙어 있다는 이 선결조건 때문에 무엇이든지가 이미 제한돼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 옆에 붙어 있으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원래 무엇이든지 구하는 게 아닙니다. 전부 예수님 뜻만 구하니까 결국 자기의 뜻이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동어반복입니다. 네가 내 안에 있어 무엇이든지 다 구하라, 다 이루어줄게, 당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나보고 하라는 거거든요. 그러니 결국 예수님 안에 붙어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다 들어준다, 맞는 말이죠. 하나님 뜻을 누가 막아요? 김하중 대사님이 하는 기도는 그게 아니라 훨씬 디테일한 데까지 하나님 뜻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우리가 굉장히 판단하기 힘듭니다. 손기철 김하중 대사는 신사도운동, 직통계시훈련을 말합니다. 이단이라고 하기 힘들고 예의주시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호적이고 중립적인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먼저 정죄하면 안 됩니다. 스스로 글을 쓰기 때문에, 그런 식의 기도응답을 가지고선 안 됩니다. 저도 기도응답을 많이 받기도 하고 혼선하기도 하는데, 2008년 11월에 기도했습니다. 2009년에 안식년을 떠났기 때문에 성서학서론을 가르칠 강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내가 이성적 판단으로 볼 때 안 되는 사람이 계속 기도할 때마다 전화가 옵니다. 내 이성적 판단은 이 사람이 아닙니다. 나이도 많고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했다는데 신뢰가 안 가는 인물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잘렸다고 하면서 이유가 돈을 안 갖다 바쳐서 그랬다며 의로운 예언자적 동정심을 유발하면서,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아무도 전화 하지 않고 그 사람만 전화 옵니다. 메일도 오고 전화도 오고, 내가 판단을 잘못했나? 그런데 그 동안 다른 한 사람도 apply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만 apply해도 내가 double check의 원리로 그 사람을 할 텐데, 내 이성적 판단으로 이 사람은 아닌데, 갈등하다가 그 사람을 강사로 추천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튀빙겐에 2009년 4월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데, 아이고 교수님 우리는 죽었습니다, 아이들이 매주 두 명씩 drop하고 있습니다, 강사가 너무 실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망했습니다, 기도응답이 이렇게 오면 안 되잖아요. 이런 기도응답이 있거든요. 그래서 기도만능주의가 아니라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때 마침 오는 기도응답도 아닙니다. 하나님 저에게 사랑을 주소서, 하고 갔는데 때마침 서울역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저 사람입니까?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일단 가겠습니다. 이렇게 헌팅을 하면 안 됩니다. 제가 기도응답에서 피를 본 건데, 그 사람은 지금도 저를 학회에서 만나면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 다음 학기에 자기를 강사로 추천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무서운 인연의 짐입니다. 저도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은데 학회할동 할 때마다 계속 만납니다. 그 사람은 아마 저보고 너무 김회권 냉정하다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이미 통계 과학적 분석으로 이 사람이 얼마나 나쁜가 설문조사로 끝나 있습니다. 주 안에 붙어 있는 사람의 기도가 무엇이든지 응답된다는 것은 동어반복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하게 하는 하나님인데, 내 마음과 공감하는 사람은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인가 알기 때문에 내 뜻을 대신 구한다,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참 중요합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소원하는 일을 내 뜻이라고 착각하면서 뜻을 주장하는데, 이미 기쁘신 뜻을 나에게 소원의 형태로 자는 사이에 살짝 불어넣어 놓으셨습니다. 자고 일어나니까 소원이 생겼네, 알고 보니까 하나님 주신 뜻이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된 것 중에 응답이 안 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왜냐하면 당연히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거죠. 꼭두각시는 아닌데 알고 쓰임 받았어요. 2008년 12월 기도응답은 알 수가 없어요. 제가 1995년에 학교의 기숙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admission을 바로 받지 못해서요. 크램베리라고 하는 데이빗 브래너드가 인디언 사역을 했던 그곳으로 잠시 프린스턴에서 9마일 떨어진 곳에 민간주택을 구해갔습니다. 그때 5천불 정도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 당시 1달러에 1200원이었기 때문에 5천불은 큰돈이었고, 누구든지 큰 돈을 줄 수 없었습니다. 굉장히 emergency상황입니다. 원래 기숙사가 될 줄 알았는데, 프린스턴 배트필드라는 공원에 가서 새벽마다 계속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즈음에 전화가 왔습니다. 이만열 교수님한테 전화가 왔는데, 김회권 목사님 잘 있습니까? 내가 연구 프로젝트가 끝났는데 돈이 600만원이 남는데 기도하는데 김회권 목사 생각이 자꾸 나더라고요. 두시간만에 돈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저를 낭패시키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신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리 해도 돈을 준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월급을 받기 때문에, 월급 받는 제가 그런 것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관철하는 기도의 현장으로 내 기도를 쓰시기 때문에 내가 기도하면 할수록 주고 쓰임 받고 공급받는 하나님의 우주적 총체적 자원 배분 선물배분 상급배분 또는 경고 등등을 다 알 수 있는 시스템의 일부가 돼서 서킷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좋은 것이 기도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얼마 전에는 국정원장이었던 김성규 장로가 김세윤 박사 추천을 받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읽었는데 책이 정말 좋다고 한참 동안 칭찬을 했습니다. 그분은 저와 살아온 방향이 너무 다릅니다. 국정원장이니까 전혀 다르죠. 김세윤 박사님이 저를 추천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읽었는데 너무 글이 좋다면서 쓴 글을 몇 가지 보내달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두 번째 전화가 왔습니다. 옛날에 전화가 왔을 때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또 체포될까 싶어서, 그런 사람은 무섭잖아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읽고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글을 몇 가지 주었습니다. 제가 민간인이고 아무 것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과 인맥을 조성하기 위해서 발발이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유명한 가수가 찾아와서 저에게 성경공부 세 시간 하고 갔습니다.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동역자가 그 회사의 부회장입니다. 그 동역자가 저의 성경공부에 참여했기 때문에 너 같은 사람은 이 사람을 만나서 해결해야 한다고, 자기를 만났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실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고 싶은 사람을 주고, 하나님이 세우고 싶은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이 격려하고 싶은 사람을 격려하는 거대한 우주적 감흥의 드라마에 우리가 기도하면 쓰임 받습니다. 다른 어떤 걸 하지 않더라도 이기심이 가득 차더라도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이기심이 찬 상태도 괜찮습니다. 기도만 하면 인간성이 더러워도 괜찮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 선입니다. 기도는 아무리 완고하고 아무리 이기심 있고 아무리 속 좁은 상태라도 어떤 고상한 기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생각보다 엄청난 기도를 잘 모르고 신앙생활이 다인거니 하고 절실함이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사람 때문에 제가 목사 노릇을 하기는 쉽습니다만, 하나님과 우주적 감흥의 시스템 안에 들어가서 주고 받음과 세우심과 만나게 하심과 돕게 하심과 공급받게 하시는 엄청난 역사가 일상생활을 뚫고 들어오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매순간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즐거운 겁니다. 고단한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나면 고단함을 압도하는 설렘이 있습니다. 말씀보고 기도하고, 좌절된 기도도 좋습니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도 좋고요.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내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말을 계속 하다보면, 내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인공적으로 닮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나중에 서서히 예수님의 형상이 프로타주가 돼서 나의 인격과 삶속에 탁본처럼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닮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로 지속적 기도입니다. 이런 지속적 기도를 통해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으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붙어 있음을 공지하게 되고 인지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삶과 사역과 형식만이 세상 사람들에게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거든요. 내 아버지께 영광을 많이 돌려드리는 겁니다. 교회는 진짜 중요합니다. 교회가 옳은 교회 바른 교회 성장하는 교회, 식물생장학적으로 예수님께 붙어서 계속 과실을 맺고 확대재생산하는 교회가 나오면 그 주변은 엄청나게 복 받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말을 써서 씁니다. 학군이 좋아지고 좋은 이웃이 몰려듭니다. 진짜 좋은 교회가 있으면요. 이 교회가 일으키는 게 엄청납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을 찾아다니는 순례적 본성이 있습니다. 이 교회가 진짜 성자들의 공동체라면 우리는 선교하지 않고도 거대한 자석의 힘으로 쇠붙이를 끌어들이듯이 이런 공동체에 와서 힐링을 경험하고, 소중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이 공동체가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예수님 안에 붙어 있는 삶을 개인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 붙어 있는 사람들과 붙어 있음으로, 신령한 교제권에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깨끗게 하는 말씀을 경험하고 내 영혼을 성찰하게 만드는 말씀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구조적으로 닮아가고 공동체적으로 닮아가는 일에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이 단계는 아직까지 제가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예수님이 나를 친구로 대한다고 할 만큼 강한 확신이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나를 모를 수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기도합니다. 어쨌든 모를 수 있다고 하지만 일단 나는 아니까 50% 정도는, 그러나 제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제가 예수님에게 얼마나 인정 받는가 확신할 수 없지만 내가 예수님과 우정을 나누는 이 일을 가장 소중하게 최고로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에 나는 붙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나 제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잘 모릅니다만 우리 생애 마지막 순간에 주님이 저에게 이 확신을 시켜주시겠죠.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에 견결한 우정, 주님의 속마음이 내게 깊게 전달되고 주님이 왜 십자가의 잔을 마셔야 하는지, 이 고독한 순간에 이렇게 행동하셔야 하는지 내가 속마음을 알게 된다면 나는 주님의 친구가 되는 거죠. 저는 알고 싶어서 성경을 읽는 겁니다. 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고, 이 문자 너머에 혹시 숨겨져 있는 예수님의 얼, 예수님의 기운, 예수님의 정서적인 음률들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서 골똘하게 매일 묵상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힘이 기독교 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의 유일한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과감해질 수 있는 사랑의 실천력, 거룩한 양조장으로 변할 수 있는 희생정신, 세상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 고결한 인격과 윤리적 삶, 이런 것이야 말로 세계만민을 취하게 만들고 놀라게 만들고 면박을 벗겨서 적개심의 면박이 사라지게 만드는 힘이라고 봅니다. 취한 사람처럼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이 세상 사람들을 축제의 여흥 속으로 몰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진짜 진성교회가 되는 거죠. 우리가 이런 교회를 이루자고 실천한다고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교회를 이룰 수 있도록 소원해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 이전에 참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의 약속이 실현되는 경지를 하나라도 더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여러분 모두 일주일 동안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두려움도 극복하면서 예수님께만 붙어 있으면 인생은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에 거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저희를 세상에 죄악의 경주 속으로 집어던져지지 않고 주님의 몸된 교회,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포도주를 마시고 이기심과 탐심과 자기중심의 완악한 죄의 사슬을 무장해제 시키고 주님 닮아가는 지극히 선량하고 지극히 사랑 많은 이웃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공평과 정의의 포도주를 생산하여 온 세계에 무한 공급하는 거룩한 양조장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향을 축복해주시고 한국교회를 되살려 주소서. 한국교회를 축복해주시고 소생시켜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세계에 기초적인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너무나 많은 이웃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월드컵이 열리는 브라질에도, 좌파 노동당 정권이 정권을 잡은 그 나라에도 빈민이 의료혜택과 교육혜택을 받지 못하여 국기를 불태우면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나라가 이 세계가 어찌 이렇게 굴러가도록 내버려두십니까? 우리가 용력을 다하여 기도함으로 이 세계가 잔학무도한 반문명으로 반기독교로 반하나님으로 치닫지 않도록 금줄을 막아서게 하여 주소서.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적인 무한냉정주의 무한방치주의 무한포기주의가 심각하게 작동하고 싶습니다. 우리 박근혜 대통령에게 성령 부어주셔서 대오각성하며 철두철미하게 회개하게 도와주시고, 우리 청와대가 회개의 영으로 가득 차게 도와주시고 국회의사당과 여야 정치지도자들이 바리새적 외양을 버리고 민중의 고통 속으로 내려서게 하시고, 그들의 고통 속에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참된 정치 메시아적 정치 하도록 도와주소서. 금천구 차성주 집사님과 25개 지방자치단체들이 아우성치는 수도시민들의 슬픔 앞에 공감하게 하여 주시고, 12명의 실종자를 남겨 놓고 팽목항에서 여전히 충천하는 슬픔과 아우성에 응답하여 주시고, 종료하여 주시고, 저희도 슬픔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주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슬픔을 마무리할 수도 없고 장을 접을 수도 없는 가운데 있사오니 광막한 바다 가운데 유실돼 있는 우리 아들딸들을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정의로운 관료들이 넘쳐나는 세상 되게 하시고, 국민의 고통을 보듬는 정치 복원되게 도와주소서. 이 귀한 헌물을 하나님 백성 살리는데 써주시고, 불안정한 직장 때문에 시달리는 모든 아들딸들 디 살려주시고 주장하여 주시고 새로운 직장을 놓고 문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여보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서울가향에 온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붉은 보혈의 포도주로 구원해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가 붉은 포도주 피를 흘리기까지 세상의 죄를 다 기어코 마실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사랑과 놀라운 성부의 파송사랑과 성자의 순종해 드리는 사랑을 깨닫게 하신 성령님의 거룩하신 고취하심 계시하심의 역사가 오늘 예배드려서 거룩한 새 포도주에 취한 채 살기로 다짐하고 소원하는 모든 지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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