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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기도

8월 17일 주일예배 _ 요한복음 17장 1-11절“거룩하신 아버지여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by 【고동엽】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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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일 주일예배 _ 요한복음 171-11

거룩하신 아버지여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오늘 본문은 우리 한글번역성경에서 헬라어 성경본문을 번역하기 매우 힘든 점이 많은 그런 본문입니다. 한글성경을 읽었을 때는 비장한 느낌이 들지 않은데 이걸 원전으로 읽으면 굉장히 비장하고 논리적으로 촘촘한 연결이 돼 있습니다. 17장 1-2절은 한 문장입니다. 직역하면 지금처럼 문장을 끊어 읽으니까 인과관계가 안 생기죠. 원래 한 문장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여기까지는 분사구문입니다. 눈을 들고 보는 겁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까지 한 문장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그 뜻을 안다면 2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2절을 모르면 아들이 아버지께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뜻이 뭔지 알 수 없습니다. 2절에는 just as, according as, 약한 이유접속사가 들어 있습니다. 앞에부터 하지 말고 뒤에부터, 당신께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당신께서 아들에게 모든 사람의 영생을 주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심으로써, 이 2절을 이해해야만 영화롭게 한다는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은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다 주었습니다. 아들은 지상에서도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누구에게도 굴복할 필요가 없는, 누구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고 죽음의 권세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는 예수님은 완전히 자유입니다. 만민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권세의 목적은 영생을 주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는데 그 목적이 만민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권세의 목적이 영생에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지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영생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 권세를 누린다는 말이죠. 권세의 목적이 생명을 주기 위함, 플라톤의 국가론 첫 마디, 통치자가 통치권을 갖는 목적, 통치 받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기 위함,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옵니다. 통치자가 통치권을 받는 목적은 통치 받는 사람에게 생명을 평안을 선물로 주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세를 갖는 목적은 수능 점수 나쁘다고 때리려는 목적입니까? 아니면 무차별 징벌권입니까? 아닙니까? 생명을 선물로 주는 것, 선생님이 학생에 대해 권세를 갖는 목적은 마음대로 권세를 남용하여서 아이들 인생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생명을 주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구조가 있어요. 모든 만민에 관한 권세를 다 주셨어요. 그 목적이 임의로 변덕스럽게 만민의 운명을 나누라고 한 게 아니라 만민 모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이중예정론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중예정론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 가능한 본문입니다. 장로교가 이중예정을 믿기 때문에 아주 잔혹합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멸망으로 심판받기로 예정됐기 때문에 불행하다, 이렇게 하고 가버립니다. 굉장히 악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만민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아들이, 그런 권세를 가진 아들이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겁니다. 만민에게 생명을 선물로 줄 만큼 만민의 운명을 생명의 잔치로 초대할 권력을 가진 그 예수가 지금 그 사명을 잘 수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본문 1-2절은 한글 성경을 읽어서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1-2절만 이해하면 다 된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이 영화롭게 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이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방식이 아들의 사명은 모든 육체를 다스릴 통치권을 받았는데 그 통치권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민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는 건데, 이 과업을 잘 수행하도록 자기를 도와달라는 겁니다. 아들의 영화는 아버지가 주신 과업을 100% 순종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영화’라고 할 때는 압도적인 권력을 누림,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지위를 획득한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화롭다는 뜻은 아버지가 주신 과업을 100% 완수하는 것이 아들의 영화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화롭다는 말뜻은 굉장히 독특합니다. 순종의 극댓값을 바치는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이 본문과 가장 닮은 본문이 빌립보서 2장 6-9절입니다. 지금 이 뜻을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죽기까지 복종해야만, 만민에게 대권을 받은 사람, 중요합니다. 만민을 통치할 통치권을 가진 그 아들이 죽기까지 자기를 부인해야만 통치 받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선물로 간단 말이에요. 이 원리가 중요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목사님이 교우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려면 목사님이 제네시스나 슈퍼살롱을 타고 교우들을 따라지신세로 몰아넣어야 합니까? 아니면 소울보다 더 작은 차를 타고, 비천함에 처하고 교우들을 생명으로 초대해야 합니까? 교황이 소울차를 타서 만민이 감동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교황의 겸손한 행보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감동 받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만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주고 예수가 이 통치권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는가를 봤는데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권세를 사용한다는 거죠. 그렇게 권세를 사용하니까 만민은 생명을 누리더라는 거죠. 빌립보서 2장 6-11절 기도가 오늘 1-2절 기도라는 말이에요.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저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드라마 앞에 숨이 막힙니다. 어떤 정치학 교과서도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의 통치방법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런 예수가 우리 인류의 왕이 되면 인류는 더 이상 통합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단위의 리더가 이런 예수 같은 사람이 서기만 하면 인류는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연구해도 끝이 없이 풀리지 않는 신비이고,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통치하는 꿈을 꾸었는지, 겸손한 사람이 정복자로 나서면 서로 지배해달라고 난리치는 겁니다. 요순 우 탕 있죠. 주무 요 순 우 탕,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탕 왕이 70리를 다스리다가 정복군주가 됩니다. 정복군주가 지방을 정복하고 탕왕이 다스리던 모든 곳은 정의와 평화와 공평이 넘치면서 살만해지니까 탕왕이 정복하고 가면 주변 사방 천지에서 우리부터 먼저 정복해달라고 정복을 청원하는 상소문이 올라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 받았기 때문에 허접한 말도 안 되는 자의 통치를 받으면 존재가 파괴된 것처럼 느끼고, 불행한 것처럼 느낍니다. 나쁜 대통령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면 계속 생명력이 감소되는 겁니다. 나쁜 교장 선생님 밑에, 나쁜 목사 밑에, 나쁜 주교 밑에, 나쁜 군수 밑에 살면 죽는 겁니다.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존엄성이 만족되지 못하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우리에게는 국민적으로 집단적으로 몹시 불행한 시대에 사는 거예요. 공기가 오염됐을 때, 땅이 오염됐을 때, 수질이 오염됐을 때 환경자체의 오염을 피해갈 수 없듯이 거짓말하고 은폐하고 무책임하고 무자비하고 너무나 많은 악을 범하면서 여전히 지도자 노릇하는 자 밑에 살면 우리 생명력이 사그라지고 삶의 기쁨이 없어져버려요. 28사단, 군대에 살면 자살지향적, 자살로 인생을 끝내고 싶은 우울증에 집단으로 걸려들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만일 대한민국이 우리가 소속된 유일한 나라라면 우리는 자살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야만적인 사회에서 영생의 공동체를 허락하시고 숨고 은닉할 수 있는 비밀한 초막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 희망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세계만민을 통치할 권세를 위임 받은 왕이셨고 통치의 목적은 생명에 있었고, 세계만민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는 마지막 통치 행위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종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 순간을 감내해 받아들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 십자가의 무시무시한 항거 앞에, 뒤로 물러가 움츠러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십자가의 무시무시함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용기를 백배 갖게 해달라는 기도이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의 입으로부터 예수가 주라는 고백을 받아냄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용서하고 만민을 구원하는, 만민의 입에서 예수가 주라는 그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만민을 다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만민을 위하여 찌꺼기가 되고 만민을 위하여 죄를 뒤집어쓰고 만민이 받아야 할 저주의 연대를 자기가 감수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고 철저한 십자가의 죽음을 자기 몸 영혼에 짐 지는 겁니다.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왕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예수님께 절을 한 번 할수록 경배한 번 할수록 악한 왕들의 통치, 무시무시하고 잔혹하고 파괴적인 영역으로부터 면제되고 해방되고 자유케 되고 중성화됩니다. 우리가 이럴 때는 매시간 한 시간마다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성이 황폐화되고 파괴됩니다. 지금은 진짜 예배 잘 드려야 합니다. 왕이신 예수님께 옳게 경배 드려야 하고 올바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 세계만민에게 영생을 주도록 제게 만민의 통치할 권세를 주셨으니 그 관점, 그 조건 하에서 그 과업을 성취함에 있어서 제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그 목적으로 저를 영화롭게 해 주소서, 제가 만일 십자가를 지는 이 굴욕의 시간을 못 받아들이면 저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지도 못하고 제게 맡겨진 만민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지 못합니다, 무릇 왕은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만 백성들은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저는 플라톤이 말한 국가론을 성취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게 바로 공자가 한 말이고 맹자가 한 말이고, 모든 동양사상 불교, 인류의 모든 성자들은 전부 다 권력을 가진 자가 살아야 백성이 산다, 얼마나 좋아요. 권력이 무섭습니까? 권력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죽음을 초래하면서 만민을 통치하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안 가진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는 권한입니다. 부장이 과장보다 권력이 많은 목적은 무엇이죠? 과장을 괴롭히기 입니까? 과장 성희롱입니까? 학대입니까? 자기 생명력을 소진해서 그에게 생명력을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부장의 권한입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권위가 있죠? 교사가 학생들에게 권위가 있죠? 권위의 목적은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함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정말로 신비한 분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시는지, 사람을 통치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면 인간이 이런 하나님에게만 이런 왕에게만 통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목숨을 존중하는 이에게만 복종합니다. 왜? 인간은 너무나 고귀하게 창조됐기 때문에 하나님 같은 왕이 아니면 절대로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정말로 고귀한 존재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친 왕과 같은 존재에게만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멋진 기도를 했습니다. 1-2절은 해명되었다고 보고요. 설교문을 올려놨으니 보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곧 이것입니다, 여기도 목적절이 있습니다. that 이하는 목적절입니다. 이것은 영생입니다.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영생은 아는 행위가 아닙니다. 앞으로 알아가는 계속되는 행동입니다. 이것도 참 번역하기 힘든 번역입니다. 번역할 생각을 포기해버린 겁니다. 영생은 이것입니다. 목적절입니다. This is eternal life in order that 이런 뜻입니다. 영생은 아는 단발성 행위가 아니라 영생은 참되고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예수의 관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영생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참되신 한분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를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알다는 동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알다는 동사는 공감하다, 교통하다, 깊게 정직하게 정확하게 교감하다는 뜻입니다. 교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노스코라는 동사인데, 가정법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은 동사입니다. 기노스코신입니다. 안다는 행위가 아니라 영생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 한분과 그 보내신 자 예수와의 관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를 교감하는 겁니다. 아버지 명령과 아버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수가 기도하는 것 교감하는 이 장면을 공감하는 것, 교감하는 것, 그 세계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사물로 아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도 알고 두 개에 다른 목적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드라마를 안다는 말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드라마의 관계, 극적인 구조를 안다, 그 논리를 이해한다는 말이지, 아버지도 알고 찐빵도 알고 라면도 알고 각각 두 개의 개별목적어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낸 목적, 아들이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는 그 분위기를 교감하고 동정하고 공감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해요. 그걸 아는 상태까지 가는 게 영생이래도요. 제가 설명하고 싶은데, 새벽 4시에 깨달은 희열이 전달이 안 돼요. 오전 11시에 오면, 제가 새벽 4시에 굉장히 흥분하고 깨달았는데 이상하게 여기 오면 잘 안 돼요. 잘 될 때까지 계속, 너무 깊어서 이해가 안 되죠. 사람들이 자꾸 영생을 주일학교 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가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왜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지,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설렘과 공포 모든 것을 충분히 교감하고 동감하고 그 세계에 몰입되는 상태, 영생의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완료 시제이기 때문에 끝난 게 아닙니다. 영생 받았습니다, 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말 하면 안 돼요. 무얼 받아버리는 종료된 명사가 아니라 현재분사에요. 구원을 받아버렸다고 하면 안 돼요. 구원은 명사가 아니라 구원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분사형입니다. 아는 상태로 계속 머무는 것, 더 심화된 교제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영생은 이것입니다. 목적절,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예수의 관계, 그들 사이의 드라마, 명령과 순종의 선순환 관계를 충분히 공감하고 그 세계 속에 몰입되어 가는 상태를 위함입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으면 드디어 알아지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런 말은 안 되는 겁니다. 영생을 받았다, 영생을 누린다까지는 되지만 구원을 받았다거나 명사처럼 취급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절대로 동산이나 부동산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붙들려 있는바 수동태적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주려는 선물, 하나님 아버지가 만민에게 영생을 선물로 준다고 할 때 그 영생은 명사로서의 분할 가능한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우주적 드라마에 초청하기 위하여 저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아까 1-2절에서 말한 생명이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사이에 있는 우주적 드라마에 동참하여 선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아들 하나님이 순종함으로 만민에게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생명이 발생되는 과정과 논리를 충분히 공감하도록 초청하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한 번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종료된 행위로 끝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모든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영생을 발생하는 그 내적 논리와 구조를 납득시켜서 그들도 이렇게 살도록 초청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제가 만민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거룩한 사명에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절대로 개차반처럼 살 수 없어요. 예수님께 구원을 받아버리면 구원 받기 이전처럼 돌아가서 마음대로 사는 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거예요. 이런 구원의 드라마에 들어와 버리면요. 예수님께 구원 받은 사람은 계속 거룩해지고 계속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예수님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계속 개차반처럼 도덕적 슬럼지역에서 뒹굴다가 PD수첩에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가서 기독교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 교만한 겁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이런 구원을 한국교회가 진짜 경험했는지 점점 의심이 갑니다. 왜냐하면 제가 받은 구원을 만일 받았다면 지금 우리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대부분 주류세력들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나쁜 인간성을 가지고 인간성 자체가 워낙 더럽다고 하더라도 그렇게는 안 됩니다. 점점 다른 사람이 볼 때 일반인들이 훨씬 매력적으로 바뀌고 훨씬 멋지게 바뀝니다. 예수 믿으면 배타적인데 보편적인 사람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게 됩니다. 분명히 예수만 믿는데도 모든 신들 믿는 사람보다 더 보편적이게 됩니다. 예수 한 분만 믿는데도 여러 신들을 다 받아들이는 다원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관용이 많고 사랑이 많습니다. 영생을 누리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만민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모든 사람을 생명의 잔치에 초대하기 위해서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조바심이 나면서 굉장히 착해지고 희생적이 되고 내어줌이 되고 점점 자기 소진적이 됩니다. 자기를 점점 내어주고 자기 생명의 불꽃을 태워서 다른 사람을 고쳐주고 이끌어 가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원래 예수님을 믿으면, 점점 그렇게 돼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헌금을 몰래 모아놓고 그 헌금으로 나쁜 짓을 하거나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돈놀이를 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때문에, 이 물질이 들어온 목적은 이 물질을 필요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 금방 쓸 곳을 찾고 항상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듯이 가득 가득 일일 정산하듯이 다 청산합니다. 교회는 재산이 축적돼서 그 재산 때문에 재정 장로가 자살하는 동네가 아니고, 어처구니없는 슬럼가 같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도무지 모르는 자들, 몇 십년이상 하나님과 접촉이 없어야만 그런 결단이 일어납니다. 몇 십 년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야 30년 동안 800억 천억을 모을 수 있습니다. 30년 동안 성령이 그들에게 한 번도 터치를 안 해준 겁니다. 세습하는 사람, 재산 모아놓은 사람,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 그 사람은 한 번 실수를 한 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하나님과 접촉이 없는 겁니다.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사이에 있는 이 아름다운 우주적 장엄한 드라마를 이해하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장엄한 드라마를 다시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만민을 통치할 권세를 주셨는데 그 만민을 통치할 권세의 목적은 바로 만민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권세와 생명의 관계를 잘 설명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펼치자마자 나오고, 논어 공자 맹자 전부 다 이 이야기를 합니다. 통치자의 덕으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가득 채우는 것, 이게 사서삼경의 핵심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이고 힌두교, 모든 인류의 성인들은 하나님을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모든 고등철학과 고등종교는 자기를 희생시키고 소진시켜서 다른 아랫사람을 복되게 만드는 통치술, 영생의 종교가 다 나옵니다. 그런데 기독교 이름으로 반대짓을 하면, 이름은 기독교지만 바가바드기타를 믿는 힌두교보다 더 나쁜 놈들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믿죠. 그들은 여호와를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무엇이 대표하는 여호와입니까? 금송아지, 황금숭배가 대표하는 여호와죠. 지금 한국교인들은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과 하나님이 금송아지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보다 훨씬 더 나쁘고 악한 겁니다. 제가 엘리야처럼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가 7천명밖에 없고, 천하는 이세벨 바알 아세라 선지자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엘리야는 심지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나 외에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다, 그것은 극단적인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우리는 그런 상태는 아닙니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굴에 숨어 있고 그리 시냇가에 쫓겨나 있고 사르밧 과부 집에서 우거하고 있고, 이세벨과 아세라 바알 선지자들은 중앙 성소, 벧엘과 사마리아 모든 채플린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모든 큰 건물은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이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백성들 대부분은 갈멜산에 나아와서 한편으로는 바알과 아세라 주의자가 되고 어느 날은 엘리야 주의자가 되었다가 왔다갔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완전히 잊게 만들만큼 노예적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황 밑에 종처럼 살지 않고 내가 스스로 믿어서 구원 받아 내가 섬길 교회 목사는 내 손으로 뽑겠다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프로테스탄트 종교는 자기 목사님의 신학적인 성향, 영적인 건강을 테스트할 만한 영성 있는 평신도가 없기 때문에 다시 중세시대로 돌아가 버리고 목사들은 교황처럼 돼버렸습니다. 진짜 교황은 40명의 신학자들로부터 설교문을 작성 받아 선물로 받습니다. 교황의 모든 말들은 40명의 신학자가 감수하고,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토씨까지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의 발언은 멋집니다. 그런데 개신교 교황들은 무식하게 혼자 하다가 입을 여는 순간 자신의 지적 하자 상태를 폭로하고 자신의 도덕적 슬럼 상태를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교황 짓을 하려면, 가톨릭 교황처럼 40명의 신학보좌들을 데리고 많은 평신도 3억 명의 도움 받아 설교합니다. 진짜 교황은 자기가 설교를 작성하지 않습니다. 교인들 중에서 설교 작성 위원회가 만들어준 것만 읽으면 됩니다. 진짜 교황은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바알과 아세라 사이에서 야훼 하나님과 구분하지 못하고 황금을 숭배하면서 야훼의 신앙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숱한 평신도들의 병적인 노예근성 때문에 교황 같은 목사가 활개치고 있습니다. 99% 평신도 책임입니다. 같은 신학자 목사가 그렇게 하면 몰매를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우들은 정말 영적으로 냉각돼서 엉망진창 설교를 들어도 그렇게 헌금을 갖다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온갖 어리석은 짓을 다합니다. 이런 무지무매한 평신도들을 위해 40명의 보좌진의 도움도 못 받는 목사들이, 교황의 권위를 가지고 교황권세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로 대표되는 야훼를 믿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교회 예산을 어떻게 쓰는가 보면 됩니다. 교회 예산을 써서 재테크를 하거나 수익사업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이고, 가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물질의 출납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사람이 오고 가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권세를 자기가 통치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어줄 때, 어떻게 나누어줍니까?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자기의 살과 피를 생명의 음료와 생명의 떡으로 나누어줌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서 우리 주님은 옆구리에 창으로 찔렸을 때 물과 피를 쏟았습니다. 다른 사람 위에 권세를 잡는 모든 사람은 이처럼 물과 피를 쏟을 각오를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살과 자기 피를 생명의 떡과 음료로 내 놓는 사람,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걸 알려주기 위하여 자기를 영화롭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 모든 악한 정치, 나라가 다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하는 순간 세계의 모든 정사와 권세와 주관과 보좌는 다 무너집니다. 이런 식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한 임금이 나타나자마자 이런 방식으로 다스리지 않은 모든 임금들은 왕위에서 폐위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쫓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아침에 산에 일찍 올라갔습니다. 비가 왔습니다. 우면산 벤치에 앉아서 17장 1-4절을 깨닫지 못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통과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전을 읽고 또 읽고 암송을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절망합니다, 오늘 제가 11분도 못할 것 같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깨달음이 없습니다, 제가 너무 패역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요한복음이 저에게 역부족입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살려주십시오, 정말로 옳은 진리를 알려주십시오, 아우성 쳤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집은 기도를 하면 고성방가죄로 걸립니다. 그래서 저는 산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제 마음이 맑지 못했습니다. 다시 내려가서 또 원전을 또 읽고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마지막 여기 오기 전에 깨달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 깨달아지면서, 제가 얼마 전에 읽었던 공자 맹자 논어 플라톤의 <국가론> 동시에 다, 제가 지금 깨달은 것은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세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게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강력한 메시지 핵심에 빌립보서 2장 6절이 떠오르면서 어떻게 생명을 준다는 말이죠?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그러면서 요한복음 6장이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죽습니까? 한 번 죽으면 됩니까? 아니, 일상생활하면서 네 피와 네 살을 네가 다스릴 그 사람의 생명의 떡으로 내놓고 생명의 음료로 내놓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지금 이런 일을 하게 해달라고 예수님이 기도한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이 세계를 통치하려고 통치원칙을 세웠으니까 이 통치원칙이 천명되는 이 날이 바로 세계 모든 거짓 주들과 거짓 왕들이 그 보좌에서 쫓겨나는 날이 되는 겁니다. 마가복음 10장 41-45절이 떠올랐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호이 도쿠신 아르케임, 이라는 말입니다. 산상수훈 수양회에 갔다 온 사람은 호이가 무슨 말인지 압니다. 호이는 복수대명사입니다. ~하는 사람입니다. 도쿠신, 우신하면 3인칭 복수입니다. 도케로 라는 동사인데 ~하는 것처럼, 아르케임은 통치하다, 이방인들의 집권자들은 통치하는 것처럼 보일뿐 카타 큐리오신 카타 엑소시아주,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고 압제하는 것이다, 압제하는 행위와 권력남용행위는 통치가 아니다, 인자는 이런 이방인들과 달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둘로마이 하러, 둘로스 노예거든요. 자기를 노예처럼 자기 목숨을 소진하도록 왔다, 이렇게 통치하는 것이 인자의 통치방식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이다, 통치 받는 자와 통치하는 자 사이에는 완전한 교감만 있을 뿐 어떤 압제와 자존심의 훼손도 없다, 4절, 에 호세, 예수님께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이미 지상에서 당신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나는 지상에서 공생애를 통하여 이런 방식으로 당신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내 생명을 소진시켰고 내 생명의 떡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내 공생애 전체 역사가 내 생명의 소진이었고 내 생명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미 당신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내가 공생애 3년 동안 했던 생명 희생적이고 소진적인 이 역사를 마무리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내 과업이 완성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내 하나님을 드러냈더니 내 제자들은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그들은 바로 영생을 선물로 얻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우주적 드라마, 통치 원리를 터득하고 공감했기 때문에 그들은 영생을 누렸고 그들에게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제 그들이 지상에서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나는 기도합니다, 거룩하게 보존되는 방식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서로 발을 씻겨주고 서로 생명소진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일삼음으로 내가 그들을 통치하고 있으면 내가 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이 이 세상에 작동되는 것을 그들이 쉬워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들을 진리로 보존되게 해달라는 것이고 그들이 세상에서 보존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남아있는 우리는 하나 돼야 하는데 하나 되는 방식은 생명소진적이고 생명 나누는 생명을 공유하며 희생하고, 내가 가진 권세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섬기는 생명의 선물로 치환하는 방식입니다. 탐욕과 지배와 독점을 포기하는 것, 초대교회는 지배와 폭력의 완전한 포기, 탐욕과 경쟁의 완전한 포기, 이것이 초대기독교와 신인류가 보여준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소득 있는 만큼, 지혜가 높다면 교회 안에서는 완전히 형제자매들 위에 서려고 하지 말고 형제와 똑같이 대우하고 형제자매들과 똑같이 생명을 나누려고 하고 형제자매들보다 더 많은 존엄성을 누리려고 하지 말고 종처럼 자기를 낮추어서 내 모든 권세와 재능을 다 바쳐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 되기 힘쓰는데 장애가 됩니까? 가진 자, 유력한 자, 많이 배운 자, 사회적으로 높은 데 있는 자들이 하나 되는데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권세 있는 모든 자가 자기 권세를 권세 없는 자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는 도구로만 쓸 때 하나됨이 일어납니다. 결론적으로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사이에 있는 우주적 드라마에 동참하여 나를 본받아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고 자기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들이 됨으로써 하나 되게 해달라고, 십자가의 희생원리를 체득하는 그 일에서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단순한 하나됨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로 하나 되는 것을 예수님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훨씬 더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에게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에게 좀 더 여유 있는 사람이 여유 없는 사람에게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그들과 하나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균질하게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이 하나 되지 못합니다. 항상 왕이신 예수님이 살과 피를 나누고 하나 되신 것처럼 먼저 살과 피를 나눈 사람이 하나됨을 주도합니다. 하나됨의 목적은 뭘까요? 하나된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통치권이 확산되고 확장되어 세계 만민이 탐욕과 교만과 경쟁심으로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가 막힌 하나님의 통치권역, 하나님의 영토로 회귀되는 일이 일어나는 거죠.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설교했지만 충분히 아직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종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말했습니다. 납득하지 못한 것을 말했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진리를 간신히 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우리 가슴에 깨닫게 하여주시고 하나님 도와주시고 저희는 성경을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억 만 광년 멀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와 너무나 떨어져서 하나님과 공감할 수 없고 우리 주님과 공감할 수 없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가 십자가에 자기 소진 자기희생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하나 되는 저희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봉헌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복음서에 적힌 예수님을 사랑하고 인내하고 공감하도록 저희 눈을 여시고 마음을 열어주소서. 예수님이 주신 구원만 달랑 따먹고 구원을 마치 동산과 부동산처럼 여기며 구원을 받아버리고 더 이상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살아버리고 싶은 패역한 마음을 하나님 고쳐주소서. 한국교회가 감히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모든 교회는 이교도보다 더 못한 도덕적 열패와 윤리적 일탈을 보이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갔습니까? 이 땅에 많은 교우들이 바알과 아세라 밑에 가서 아세라와 바알 선지자의 850명의 지도를 받으며 세속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과 예언자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 살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간신히 사는데, 사마리아와 벧엘과 길갈과 모든 성소는 바알과 아세라 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도와주시고 이 교회를 새롭게 하여 주시고 종교개혁 교회로 위엄을 되찾게 하여 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북한 땅 끝까지, 2500만 북한 동포까지 능히 구원하는 큰 믿음의 장막터 되게 하여 주소서. 주님 저희는 한 없이 미약하고 작지만 이 교회에 출입하는 청년들은 영적 낙랑장송이 되게 도와주시고 영적 빙하기에 접어든 한국교회에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는 믿음의 용사들로 삼아주소서. 귀한 헌물을 바친 손길을 축복해주소서. 생업의 현장에서 고달픈 형제자매들을 환경에서 건져주시고, 취업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일거리를 제공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만민의 생명선물 떡으로 음료로 파송하신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이 놀라운 성부의 드라마 성자의 순종 드라마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성부와 성자의 교제 속에 참여하기를 열망하는 예배드리는 모든 교우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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