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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설교 : 요한복음 17장 20-26절“아버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by 【고동엽】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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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720-26
아버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


어제 8시간 동안 우리 교우들이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예언서 강독을 잘 마쳤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시애틀까지 가는 시간이라고, 10년 전에는 이렇게 연속으로 9시간 강의하면 목이 많이 아프거든요. 서울가향교회에 와서 도라지차를 먹으면서 전혀 목이 아프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어제 공부한 예언서는 이 가을에 여러분께서 더 긴 호흡을 가지고 차근차근 읽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마 종교개혁 기념일 때까지 예언서 한 번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날 겁니다. 여러분 모두 예언서를 정독해주시고 묵상해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독특한 구문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해석이 약간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26절까지는 그리스단어로 목적절이라고 하는 특수한 구문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구문의 ‘희나’ 목적절이 많이 나오는데, ‘~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해석하는 거죠. 17장 22절에 희나 목적절이 세 번 나오고, 23절에 두 번 나오고, 24절에 두 번 나옵니다. 약 8번의 목적절이 나옵니다. 목적절 희나를 해석을 잘 하면 원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17장 20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이렇게 하나 되게 해달라고, 즉 세상에 그들을 보내면서 그들도 진리 가운데 보존되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이유는 목적절입니다. 나를 믿는 내 제자들과 내 제자들의 말을 통하여 나를 믿게 되는 후 세대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까닭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비는 까닭은, 19절까지가 그런 내용입니다.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이렇게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보존해달라고 간구하는 까닭은 21절에 목적절이 나옵니다.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다음 목적절,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그 목적은 목적절입니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나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목적절에 나와야 하는데 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3장 16절에 나옵니다. 세상이 독생자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내가 하나님께 파송받은 독생자임을 믿고 영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독생자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나를 믿는 제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그들이 예수 안에 거하는 공동체가 되고, 그들이 예수 안에 사는 공동체적 모습을 보여줄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사람들 안에 있구나, 이 안에는 예수님이 있구나, 계급적 계층적 인종적 모든 차별을 해소시키고 모든 인류를 하나 되게 만드는 강력한 힘, 예수가 이 공동체 안에 있구나, 라고 세상이 믿을 수 있도록, 계급적 계층적 차이를 극복하고 세상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볼 때 그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인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분명하구나, 예수 믿는 공동체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만 믿으면 영원히 지속가능한 사회생활이 가능하구나, 예수만 믿으면 시편 133편이 말한 형제자매적 연합이 가능하구나, 믿고 영생하여 멸망치 않도록, 공동체가 와해되고 해체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멸망으로 가지 않고 하나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세상 사람들이 영생을 얻도록, 즉 기독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계급과 계층과 인종과 국적 등을 다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 기독교인 공동체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의 손 안에 있는 공동체라고 믿게 되는 겁니다. 인류는 예수 안에서 모든 종족과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 인류문명 공동체 범 피조물의 공동체 가족적 우애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인류가 피 터지는 싸움을 하지 않고 아귀다툼을 하지 않고, 아수라처럼 투쟁과 갈등을 벌이지 않고도 사는 일이 가능하구나, 그걸 한 공동체만 시범을 보여도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제대로 한 번만 시범을 보이는 공동체가 나오기만 하면 인류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제자공동체가 하나 되는 일이 결정적으로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파송 받은 독생자임을 세상이 믿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냈다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능력해서인지 우리가 믿음이 진실 되지 못해서인지 세계가 하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능력하다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2% 모자란 방식으로 부활했거나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충분히 우리한테 나타나지 못하도록 불순종을 끊임없이 일삼아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아담인류 안에 있는 죄성을 계속 발휘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기도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22-23절, 만유를 통일하기 위하여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면서 모든 종족 계급 계층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고 인류가 하나 되도록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기도합니다.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지금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와 잇닿아 있는 기도는 평화를 위한 기도, 하나됨을 위한 기도, 형제자매적 우애와 박애가 세상에 흘러넘치도록 하는 기도, 그게 바로 교회가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 되는 방식이 약자가 강자에게 병합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일본이 일제시대 때 강요한 겁니다. 내선일체입니다. 일본이 타자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지워버리고 병합하는 식의 일종의 병합적 하나됨입니다. 이건 모든 강자, 아테네가 주변을 정복할 때 페르시아가 주변을 정복할 때, 전부 다 하나됨을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하나됨을 내걸었을 때는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어가 세계 만민의 언어로 통일되기 원하지 않습니다. 세계 만민의 언어가 통일돼서 영어만 하면 되는 천국을 만들지 않고, 모든 언어가 저마다 천국에서 독특한 역할을 하기 원합니다. 지금 42명만 쓰고 있는 만주어도 예수님께서는 소멸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만주어, 스왈리아어, 아프리카의 숱한 토착어들, 3천명도 쓰지 않는 언어, 그런 언어들도 주님은 보존되기 원합니다. 또 우리가 전부다 백인종이 되기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종족적 언어적 지방적 특성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언어적 줄기가 다른 소수민족 단위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세계는 개별자 특수한 것 이런 것들을 다 보존하는 방식으로 천국이 구성된다는 거죠.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때 내선일체를 했던 방식으로 하나되는 것은 강자가 원하는 방식입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정복했을 때, 알렉산더가 정복했을 때, 전부 다 하나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되는 것은 악마적인 하나됨이고 사단적인 하나됨입니다. 우리 주님의 하나됨은 누구도 개성을 잃지 않고 인격적 존엄과 주체성을 잃지 않고 피조물의 독특성을 잃지 않고 전부 다 그 자체를 가지고 하나 되는 겁니다. 여기는 굉장한 고등수학이 필요합니다.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 저마다 모여서 하나 되는 것, 정말 이건 신령한 화학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12제자가 하나 되기에 적합한 인간적인 화학작용이 없었습니다. A.B 브루스가 쓴 <열두제자 훈련> 이란 책에 보면 열두제자의 인적구성원을 보세요. 절대로 하나되기 힘듭니다. 시몬 베드로가 있고 시몬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있고 요한이 있고 야고보가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완전히 히브리 이름입니다. 그런데 안드레와 빌립은 그리스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올 때 안드레와 빌립이 나가 영접합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그리스 이름을 썼듯이 그리스 말을 잘 했다는 뜻입니다. 마태는 세리 출신이죠. 가난한 시므온은 열심당원입니다. 바돌로메는 아람 사람입니다. 아람사람이고 바아는 아들, 돌로메의 아들입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바아드 요나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요나의 아들 시몬아, 아람이름은 주로 갈릴리 사람이 썼습니다. 베드로와 바돌로메는 갈릴리 사람이 확실합니다. 빌립과 안드레는 그리스 사람이 많은 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갈릴리 중에서 그리스 이름을 가진 부자동네에서 부자들과 어울렸다는 뜻입니다. 열심당원 세리출신, 예수님 당시 힐렐이라는 유대인 랍비가 있었습니다. 힐렐 샴마이 가말리엘 랍비가 있었는데, 랍비의 면면을 보면 전부 다 8학군 출신입니다. 명문가족 출신이고 뼈대 있는 자손 출신이고, 이렇게 지리멸렬한 사람을 불러놓고 맨발 벗고 랍비 행세를 하고 다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열두 제자 훈련> 책에 보면 도저히 화학적으로 하나 될 수 없는 그런 그룹을 데리고, 예수님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제자들의 심각한 분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때 예수님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논쟁을 벌여서 지극히 분열된 상황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 옆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놓고 투쟁을 벌이고 전쟁을 벌이고 굉장히 문제가 많은 그룹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여러분은 영적으로 서민들이기 때문에, 아무 직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영적 귀족들, 영적 6두품이나 진골 성골 목사들을 보면 기독신문, 크리스천 연합신문 아무 판이라도 보세요. 매번 70여명 이상의 회장직이 나옵니다. 회장, 총대표회장 상임회장 사무총장 사무처장, 이번에 새누리당에서 부대변인을 70여명을 임명했습니다. 제1사무부총장 제2사무부총장, 크리스천신문과 기독공보를 보면 이게 남이 볼 때 굉장히 웃긴 짓인데, 문제는 그들이 묻지 않고 회의를 한다는 겁니다. 누가 보더라도 우스운데 아무도 웃지 않고 엄숙하게 그 일을 한다는 겁니다. 한국기독교 행사를 가보면 한기총이 주최하는 부활절 행사는 72개의 자리가 나옵니다. 장로교에 72개 교단이 있습니다. 72를 인수분해보세요. 12지파 중에서 6명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72개의 자리가 있는데 대부분 비어 있고 혹시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정신이 나간 사람들입니다. 그게 너무 웃긴 이야기인데 그 웃긴 행사에 65억을 씁니다. 그 사람들이 롯데 호텔에서 12만 원짜리 점심을 처먹습니다. 웃긴 일인데 아무도 웃지 않고 엄숙합니다. 우리는 개그콘서트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문을 보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권력욕이라는 것은 그게 허무맹랑한 줄 알면서도 인간이 자기에 집착하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옆에 앉고 싶은 마음, 주님 좌우편, 인간이 허할수록, 내 속이 정말 삭아 문드러진 문둥병 같이 더러울수록 명품가방을 들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 명품가방을 들어야만 존재가 지탱이 됩니다. 이런 더럽고 추악한 직분들이 칠십 몇 가지씩 나누어지는 이유가 종교권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로 자칭하는 자들이 얼마나 하나 되기 힘든가 아시고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승천하십니다. 지상에선 안 되고, 아직까지 이 기도제목을 하나님 아버지께 응답 못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아직까지 이 기도를 한다는 말은 제자들이 하나 되는 것은 종말이 올 때까지 응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미완료시제로 끝나버린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큰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 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타자를 무효화시키고 나 자신만 100% 하고 타자를 0으로 만드는 일체, 영적서민들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야심을 꿈꾸지 않습니다. 성령은 내가 제로가 되고 타자를 100으로 만드는 영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존재 값어치를 높여줍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 옆에 있으면 내가 갑자기 높아진 느낌을 갖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타자를 100으로 만들어주고 자기를 낮추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건 사기가 아니라 진짜 내면성과 인격과 교양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옆에 가면 보통 사람도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존엄성의 일부가 회복됐다는 느낌이 들면서 묘한 인력,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상식적인 사람이고, 교양이 넘치는 사람이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이 없고 수줍은 사람에게 수줍은 사람답게 접근하고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말이 많은 사람답게 접근하면 성령 충만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 되는 화학작용에 민감하기 때문에 친구를 잘 사귀어서 친구가 많은 사람, 일단 기본적으로 성격이 괜찮은 사람입니다. 친구가 아무도 없는 사람보다는, 친구가 돈으로 유지되는지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친구가 많은 사람들은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서 비장하게 마지막에 기도하는 이유는 아담인류 안에는 타자 다른 사람을 누르고 주장하려는 자기주장 의지가 있습니다. 죄성이 있습니다. 죄는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과도하게 챙기는 것입니다. 필요이상으로 과도하게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필요이상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높이면 타자에게 유익이 되는데 필요이상으로 높이는 가운데 타자를 무효화하고 지워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인류 안에 있는 죄성입니다. 우리가 70평짜리 좋은 아파트에 살면 25평짜리 국민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70평짜리 아파트 안에 있는 학군에 25평짜리 국민주택이 들어오는 것을 왜 막느냐? 국민주택에 사는 사람과 70평짜리 사는 사람이 한 학교에 다니는 것을 결사반대합니다. 맞벌이 부부를 하는 25평짜리 자녀와 강남 8학군 7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한 학교에 다녀서 하나가 되는 것을 절대로 견딜 수 없는 겁니다. LA 한국사회에서 흑인 부자가 한인촌에 이사를 오면 집값이 떨어집니다. 흑인이 왔다는 이유 때문에 떨어집니다. 흑인, 아프리카 아메리칸은 집값을 떨어뜨리는 하나의 혐오시설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틴 루터 킹이 1960년대 초에 흑백을 나누는 것을 반대하고 흑백이 같이 사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마이클 브라운이라는 18살짜리 아이, 테네시 주에서 총살로 죽여 버린 이유이고, 이건 마틴 루터 킹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고, 링컨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고, 영구적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쿠르드족, 2500만이죠. 터키와 이라크, 쿠르드족을 제일 잘 대우했던 사람이 사담 후세인입니다. 사담후세인이 쿠르드족에게 가장 많은 자치구를 주었습니다. 지금 사담 후세인보다 더 나은 지도자가 이라크에 없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사담후세인이 죽자마자 이라크가 엄청나게 잔혹한 인류 혐오범죄 전쟁이 일어납니다. 카다피를 제거하니까 리비아가 엉망이 됐습니다. 그런 독재자마저도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 카다피나 후세인보다 낫지 않습니다. 훨씬 더 악하고 악합니다.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그들을 한 데 사는 것을 허용해놓고 계속 지워버립니다. 아프리카 아메리칸을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흑인사형 집행률과 백인사형 집행률을 살펴보면 흑인이 4배 이상 높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선일체, 백인이 흑인을 무효화시키고 지워버리는 채로 지배와 병합하며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하나됨은 무엇입니까? 사자와 어린 양이 하나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자와 어린 양이 하나 되는 것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어린 양도 사자처럼 육식으로 바꾸어 같이 맞장을 떠는 겁니다. 이가 없으면 틀니도 끼고, 육식 맛있다, 나도 DNA 형질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사자처럼 가발도 뒤집어쓰는 하나됨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자가 풀을 먹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자가 풀을 먹게 만들어서 하나 되게 만듭니다. 75평짜리 빌라에 사는 사람이 25평짜리 빌라에 살아도 괜찮다고 믿게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하나됨입니다. 우리교회에는 골프 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골프를 치러 가는 사람 대부분이 설교를 하면 설교를 안 듣습니다. 빨리 칠 생각만 합니다. 제가 높은 뜻 숭의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더니, 그 교회에서 한국에서 골프치는 자제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바로 비난이 들어왔습니다. 부산에 있는 제 형이 그 설교를 듣고 너 괜찮냐고, 자기도 골프를 치는데 지금 초등학교 선생님 학년주임만 해도 다 골프를 치는데, 골프를 엄호하지 않는 것이 두려운데, 제 형이 걱정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굉장한 반발이 왔답니다. 골프를 치지 말라는게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자제한다고 했고 치지 말라고 하지 않고 덜 치라고 했습니다. 치지 말라는 것은 금지고, 노태우 때 경기도에 골프장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식수가 엉망입니다. 다른 사람의 식수를 고갈시킬 때까지는 오락을 치지 말자는 것, 이게 기독교인들에게 할 수 있습니다. 새누리당 연찬회에 가서 이렇게 하면 돌 맞지만 교회에 가서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못하면 목사직 못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권과 나의 오락행위권을 비교할 때 생명권이 오락행위권보다 앞서기 때문에 식수원을 해칠 정도의 오락적 기쁨은 절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비난을 당합니다. 골프도 안 치는 사람에게 심각하게,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있어야지 이런 죄인이 있어야지, 아무도 골프를 안 치는데 오늘 무슨 이야기 하고 있나, 70평 빌라에 아무도 안 사니까 죄책감도 전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강남에 가서 해야 하는데 강남에 가서 하면 욕을 얻어 먹고, 전혀 쓸 데 없는 신대방삼거리 영원히 집값이 오르지 않는 이곳에서 이런 설교하기가 묘합니다. 강남에 가서 하면 돌을 맞고, 안전한 여기서 하면 아무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사자가 풀을 먹는 방식으로 하나되는 것,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결국 사회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볼 때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지속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려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치명적 장애가 있습니다. 진짜 이분들은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지옥에 반드시 갑니다. 성령충만하여 그들을 전적으로 회개시켜서 육식을 버리고 초식으로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에서 자리가 없습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사자는 풀을 먹는 방식으로 어린양과 하나돼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어린양이 사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모두가 하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은 예수님이 하나된 제자공동체를 보유해야만 그들이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는 그들안에 거하고 그들이 예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상호침투 상호영향이 일어나서 예수 이름으로 모인 제자공동체는 계급과 계층을 다 해소시키고 강남 25평과 70평짜리 차이가 다 해소되고, 그렇구나 진짜 그렇구나, 우리 교회는 그렇게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왜 하나되지 못했습니까? 우리 교회는 25평짜리 빌라 사는 사람은 많은데 70평짜리 아파트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직 하나 된 게 아닙니다. 이 교회가 진짜 하나되려면 70평 짜리 빌라 사는 사람도 와서 감동을 같이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뭡니까? 70평짜리 살지 못하는 불평불만 조작하는, 활빈당 비슷합니다. 큰 집에 사는 사람인데도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과 하나되고 전혀 영적소통에 지장이 없을 만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진짜 종말론적인 하나됨의 맛보기입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하니까 가장 큰 문제가 진짜 부자들은 오지 않습니다. 생각해봤는데, 살살 꼬이듯이 곽선희 목사처럼 설교 하다가 가끔 천둥칠 때 무서운 설교를 할까 해봤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일단 70평짜리 빌라에 사는 사람이 와서 몇 달 다니고 나서 충분히 설교로 감동시켜놓고 하나되게 해야 하는데 일단 오지 않으니까요. 우리도 하나됨의 실패했고, 저 자신도 아직까지 더 보편적인 주님의 설득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영력, 고결한 영성, 이런 연마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지리멸렬 할 수 있고 상호배척적이고 상호대적할 수 있고 언제든지 파편처럼 부서질 수 있는 제자공동체를 놓고, 서로 분기탱천하면서 주님의 옆에 앉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제자들을 놓고 이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후대의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되면서 예수 안에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로 믿도록 증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됨을 성취하지 못하면 세상이 손해를 봅니다. 교회가 만일 이런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파송한 독생자임을 믿지 못하면 세상은 방임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가 없는 세상이 됩니다. 세상은 나쁜 교회, 영적으로 지리멸렬하고 아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탐욕적인 교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앗아가서 세상은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나쁜 교회는 교회가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교회가 없는 것이 0의 피해를 미친다면 예수님을 miss representing 하는 교회들은 마이너스 마이너스 억의 가치, 그런 만큼 치명상을 입힌다, 하나님을 향해서 영구적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생각을 저는 합니다. 23절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이 말은 하나된 것보다 더 깊은 단어입니다. 서로 상호 필요에 의해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어떤 누구도 쓸 데 없는 자리가 없고 완벽하게 인격적 쓰임새와 은사의 쓰임새가 일치를 이룰 때 온전함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 본문을 이해할 때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성령의 은사를 보셔야 합니다. 우리 몸이 온전함의 symbol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모든 기관은 온전한 기관입니다. 어떤 것도 쓸 데 없는 것이 없는 공작적 의미로 완벽합니다. 완벽한 기능을 가진 부분들의 조합입니다. 우리 몸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의 symbol인데요. 귀 코 입 발 모든 신체의 각 기능은 온전함을 이룹니다. 인간의 신체와 몸이 갖는 상합성, 상호연락성, 상호 필요성, 그걸 갖춘 공동체가 되는 것, 하나됐다는 것보다 더 발전된 개념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온전한 교회는 그 교회가 속한 공동체를 완전하게 섬깁니다. 우리가 만일 신대방삼거리역에서 온전한 교회를 이루면 우리를 통하여 이 동네가 많은 혜택을 받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그들도 서울가향교회 온전한 제자공동체를 보니까 우리 동네에 이런 교회가 있는 걸 보니까 우리 동네 사람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보다, 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겁니다. 좋은 교회는 그 주변 사람들에 어떤 확신을 주느냐? 하나님이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보다, 이렇게 멋진 천사 같은 사람들의 동아리가 우리동네에 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면 결국 아버지가 누리던 창세전의 누리던 영광을 목도하는 영화로운 상태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건 아직까지 충분히 감이 안잡힐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영화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의롭게 된 상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충분한 성화를 이룬 상태, 마침내 영화를 직접 보는 것입니다.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바뀌는 상태, 우리가 지금 우리 안에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면 공동체 속한 것 때문에 내가 엄청나게 발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전한 공동체에 들어가면 나의 인격적인 잠재력과 나의 은사와 재능이 이 공동체 안에서 장렬하고 만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침내 내가 영화롭게 바뀔 만큼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실감이 안 납니다. 다만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침내 하나님 아들의 형상으로 화합니다. 온전함을 이루는 제자공동체에 오래 잔류하고 거기서 성숙을 거듭하고 성장을 거듭하는 순간 영화롭게 바뀐다는 뜻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있으면 교회를 옮기자고 했죠. 우리는 좋은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진짜 좋은 목사를 찾아야 하고, 그분들이 계시는 곳으로 다 옮겨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주적 공교회의 작은 구역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구역장 수준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버지 하나님 영화를 지금 이 땅에서 발사하는, 영광을 발산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까지 집요하게 하나 되는 일에 힘써야 하고, 온전하게 하나 돼야 합니다. 즉 우리가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고, 당신이 이 공동체 때문에 당신 때문에 혜택을 많이 본다고 당신들 때문에 내가 너무 많이 성장했다고, 내 안에 있던 많은 약점들은 감춰지고 내 안에 있던 하나님이 만드신 위대한 보물들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 온전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온전함을 이루면 우리 안에 영광의 광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원래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과 오랫동안 교제하면 마치 낙하산이 펴지듯이 날개가 피어오르듯이 엄청난 영광이 우리 안에 잠재돼 있던 영광이 만발하도록 예수님과의 교제가 누적되면 온전한 공동체에서 계속 누적되는 일이 나타난다, 이게 바로 영광을 준다, 저는 이것을 요한일서 우리가 마침내 그와 함께 영광으로 화할 것이라는 본문으로 이걸 이해합니다. 로마서 8장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공동체 안에 배치하시고 이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일삼고 기도를 일삼고 신앙실천을 일삼다 보면 우리는 마침내 영화롭게 바뀔 것을 믿습니다. 24-26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그 사랑을 저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 미래시제입니다. 많이 모자랍니다. 여러분 서울가향교회든 여러분이 속한 신앙공동체 모두에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의 광채를 볼 때까지 집요하게 자라기를 신실하게 자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순간까지 상호 배척적인 제자공동체를 놓고 하나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담인류의 죄성 때문에 하나 될 특권이 없습니다. 자기 주장의지가 가득 차 있고 자기를 과도하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죄성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이후부터는 우리도 형제자매 중심으로 하나 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주님 온전함을 이루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주님의 영광의 광채로 변할 때까지 자라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의 극치를 맛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감사예물을 바친 손길들을 기억해주시고 직장에서 직장상사의 박해와 공연한 핍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들딸들을 붙들어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문을 열어주시기 원합니다. 많은 국민의 대다수가 생존권 벼랑 밑으로 굴러 떨어진대도 홀로 큰 집과 땅을 차지하고 탐욕의 자기도취적 영화를 즐기는 악인들도 많습니다. 최후심판까지 말고 지금 바로 간섭해주셔서 정의를 바로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의로우신 팔로 이 땅의 공평과 정의가 가득 차서 근로할 의욕이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일거리가 주어지고 특별히 청년들에게 사회에 진입하여 사람구실 할 수 있는 일터를 제공하여 주소서. 청년들이 절망하는 세상, 꿈이 없는 세상이고 미래가 단절한 세상입니다. 청년들이 행복하지 않는 세상은 존립할 가치도 없는 세상입니다. 이 땅의 청년들이 생명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도록 복 내려주시기 원합니다. 이 땅의 정치가들과 기존 권력 잡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청년과 청소년들을 부모로 영접하는 세대가 되게 하여 주소서. 교회가 악한 법률을 제정하는 데 앞장서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의로운 법을 제정하고 의로운 기풍을 진작시키는 데 우리교회가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의 역사가 오늘 예배드린 모든 교우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한국교회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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