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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십자가

요한복음 18장 12-18절 “나는 아니라!

by 【고동엽】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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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12-18나는 아니라!

 

이에 군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

 

2주전에 살펴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군대원들이 로마제국의 레기온, 600명으로 구성된 군대 3분의 1 규모가 되는 스페리안이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것을 주목했고, 로마총독이 명령하여 군대를 보냈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마 200명 정도까지 보냈고, 그 뒤 오늘 본문에 천부장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규모가 나름대로 빌라도가 결재할 때는 연대급 중대급 작전규모로 결재가 난 상황이다, 12절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청원경찰들입니다.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예수님 결박할 때 너무 많은 사람이 동원된 겁니다. 200명 규모의 지도자급 군대 + 천부장 + 유대인의 아랫사람, 이렇게 엄청난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강력한 장풍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18장 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는데 ‘내가 그니라’ 하며 나오는 대담무쌍함, 전형적으로 체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엎드려지는 것을 보고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어떤 돌발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 청원경찰들이 삼중구도로 예수님을 결박했습니다. 결박하고 나서 로마총독에게 바로 가야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안나스에게 갑니다. 안나스는 그 전의 대제사장이고 현역대제사장, 산헤드린의 의장은 가야바입니다. 여기서 군인은 분명 로마 군병인데 배후조종자는 로마총독과 내통하고 있는, 공식기구와 비선조직인 안나스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안나스가 총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안나스 말고 현역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민족전체를 전멸로부터 구하는 게 낫다는 실용적인 말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완벽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가야바가 한 사람이 죽어서 모든 백성을 살려내는 것이 유익하다고 한 것이 무슨 맥락에서 한 말인지 중요한데요.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갈릴리 태풍을 몰고 온 예수가 유월절에 모여든 엄청난 유대 군중, 약 20만 명이 넘는 군중에게 메시야 같은 역할을 하고 전봉준 같은 역할을 한다면 다시 한 번 소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로마총독은 바로 속주민에게 고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속주민들이 로마 원로원에게 이 총독은 나쁜 사람이고 고발할 수 있는 직고가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 책에 보면 많은 속주에 약 13명의 총독이 파견됐는데 그 총독 중에 고리대금업을 해서 해직된 사람이 있습니다. 속주민의 첩보가 바로 황제와 절친한 원로원들이 읽는 드리는 직고라는 거죠. 빌라도 같은 경우는 소요 사태가 없는 게 나은 겁니다. 소요사태가 난 그 자체가 빌라도에게는 업이 되는 겁니다. 빌라도는 정말로 의심초사하는 겁니다. 20만 명에 육박하는 민족주의적인 정서를 가진 유대인들의 군중을 두려워했고, 안나스는 성전종교, 정결종교, 희생제물을 드려서 성전을 경제와 정치의 중심으로 몰려드는 기존종교가 무력화되는데 엄청난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많은 무시무시한 체포대를 보내서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예수님이 쓰러뜨렸습니다. 내가 그니라, 하니 쓰러졌습니다. 이점이 12절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스페리안, 로마의 200명 군대와 함께 예수를 결박했다, 이때 돌출행동을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었습니다. 말고가 아마 성전 대제사장 청원경찰급 인물 중에서는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종은 말고라는 사람과 아는 사이고, 말고의 귀가 베어질 때 베드로의 강력한 인상착의를 본 것 같죠. 베드로가 칼을 잘 못 쓴 것입니다. 말고의 귀를 베는 것, 말고의 귀라도 베야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엄청난 로마제국의 권력과 대제사장의 종교권력이 제사장의 종 귀 하나를 베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11절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베드로가 칼을 칼집에 꽂지 않은 거죠. 한 번 더 베려고, 두 번째 귀를 베려고 하는 찰나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잔, 이 죽음, 포승줄과 오랏줄은 아버지가 주신 잔이라는 거죠. 이 체포되는 운명을 용납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결박됐습니다. 13절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이때 AD 6-15년 사이에 대제사장 역할을 했어요. 16-40년까지도 가야바가 제사장일 겁니다. 물론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오늘 목사님 같은 분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정치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의 운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할 때 이렇게 quotation한 겁니다. 그래도 한 사람이 죽는 게 낫지, 이렇게 된 이유는 유월절만 되면 꼭 미치광이 한 명이 나타나서 메시아 참칭 운동을 했다는 말이에요. 어떤 유월절도 메시아적 인물의 등장, messiahship pretend입니다. 메시아를 참칭하는 인물이 안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전부 나타났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메시아적 참칭을 일삼는 자 한 사람을 죽여서 소요사태를 막는 게 낫다는 겁니다. 이들이 볼 때는 매우 합당한 말입니다. 메시아적 참칭자가 나타나면 항상 이런 방식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메시아적 참칭자,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던 그 프레임에 예수님이 정확하게 맞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보다는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출연하고 숭배당하고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겁니다. 예수님의 사상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갈릴리 농민들에게 엄청난 메시아적 인물로 추대 받고 있는 것이 위험한 겁니다. 정치가들은 사상은 문제 삼지 않고 그 영향력을 문제 삼은 거죠.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이것도 해명이 많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 사람을 요한이라는 사람이라고 요한복음 저자라고 보거든요.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이라고 추정할 때 요한의 집은 대제사장을 알고 있다는 말이죠. 유대인 사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촘촘하고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을 만큼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이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요한은 그 집에 있는 하인들을 알았습니다. 요한은 그 집에 있는 하인들을 데리고, 그 집에 있는 하인들과 대제사장은 사도요한이 이 사람과 그렇게 가까울줄 몰랐던 거죠. 그래서 베드로를 데려옵니다. 예수님이 심문받고 있는 그 집으로 갑니다. 그 사이에 베드로가 여자 종에게 노출이 됩니다. 인상착의가 여종에게 드러나자마자 여종이 압니다. 문을 여자가 지킵니다. 이상합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수위라는 뜻은 아닐텐데요.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이 말은 예수님이 가야바 안나스 대제사장의 내실, 매우 가까운 앞뜰, 안나스라는 대제사장의 사랑채 안까지 갔다는 겁니다. 그 집은 여종이 지키는 겁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여기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세 번이나 에고 에이미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찾는 바로 나사렛 예수다, 에고 에이미 예수스 나사렛, 베드로는 우크 에이미, 나는 아니다, 우크는 부정어입니다. Not am I, 나는 아니다, 이 말을 베드로가 세 번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은 나는 ~이다, 세 번 반복하고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 라는 것을 인용하거나 한 번 반복하는 이것을 대조함으로 예수님의 행로와 베드로의 행로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가 찾고 있는 나사렛 예수라고 소리치며 전진하면서 자기를 체포하러 온 체포팀을 와해시키며 돌파하는데 비해 베드로는 위축되면서 점점 자기를 아닌 것처럼 의식하면서 나는 아니라고 세 번이나 소리칩니다. 아르노마이, 마지막에는 강한 부정을 합니다. 일절 나는 예수와 상관없다고 주장합니다. 여기가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베드로가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인 채 굴욕에 처한 예수를 모른다고 하고 나는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믿음이 없는데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고 하면 성경이 굉장히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위로 받을 데가 없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면, 왜? 나도 그렇게 나가자, 내가 나가니까 안 쓰러지네? 이렇게 나가면 굉장히 코믹하게 전개되는데 그런 만화영화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기 존재를 표명하면서 나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운명이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인 거라면 그 운명과 하나가 되고 싶지 않다, 즉 진리를 따르는 길이 포승줄과 오랏줄의 이름으로 굴욕에 처하는 것이라면, 내가 아는 예수,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예수가 아니다, 베드로는 진짜 맞는 말을 한 겁니다. 내가 그라는 말을 한 예수님도 맞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가 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간구하는 것, 하나님이 성령과 능력을 물 붓듯이 부어서 엄청난 권능을 행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적 왕으로 능히 인정받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다, 지금 이 사람은 모른다, 베드로는 참말도 하고 거짓말도 한 거죠. 베드로가 참말을 했다는 말은 속 깊은 곳에서는 참말을 한 겁니다. 내가 따랐던 사람은 지금 이렇게 바뀐 사람이 아니고 내가 따랐던 사람은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나온 그 사람이다, 나는 그분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내가 아는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다,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여서 운신의 폭도 없이 수동적으로 희생당하는 이 사나이는 나는 모른다, 그런 사람과 한 패거리가 아니다, 나는 강력한 나사렛 예수패다, 이렇게 십자가에 박힌 포승줄에 묶인 나사렛 예수가 아니다, 라고 말하니까 진짜 참말을 한 겁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존재의 이중분열이 일어난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복음서의 마지막 수난사는 베드로의 배교와 재활복구라고 할 만큼 모든 복음서가 전부 다 이걸 씁니다. 이렇게 길게 베드로의 배교와 재활복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까요? 도대체 누가 이걸 정리했을까요? 그런데 베드로가 배교하고 재활복구 되는 과정은 베드로를 깎아내리는 것과 동시에 베드로를 결정적으로 최고의 지도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배반과 배교의 과정이 제일 자세하게 적힌 것이 마태복음 요한복음입니다. 베드로의 우크 에이미, 나는 아니라는 말, 이 책이 써있을 때는 숱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미 배교를 한 번씩 경험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충실한 제자의 전범으로만 내세울 뿐만 아니라 한번 부정했다가 재활복구 부활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배교한 제자들을 다 살려야 하기 때문에 복음서의 마지막이 기가 막히게 전개가 됩니다. 만약 복음서 마지막에 승리주의적인 베드로의 순교이야기가 나와 버리면 우리가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고 이렇게 감동이 되면서 자꾸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베드로가 보여준 인간실존의 처절한, 부서지기 쉬운 존재로서의 베드로의 말, 죽기까지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한 것도 베드로의 진실이고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는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것도 베드로의 진실입니다. 이 두 가지 진실이 우리 모두의 진실입니다. 복음서가 어떻게 이렇게 따뜻할까? 배교한 베드로가 재활 복구되는 과정을 이렇게 자세하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너희 모두 베드로처럼 수제자의 자의식을 가지고도 넘어지고 쓰러진다, 너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베드로가 배교하고 변화해서 우크 에이미가 에고 에이미, 신적 항구여일성을 가진 예수님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졌지만 divine concerns 신적 항구유연성 신실성의 극치이신 예수님 앞에 베드로는 부서지기 쉬운 존재로서 약속을 헌신짝처럼, 존재로서 인간의 먼지 같음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먼지처럼 또 부서지고 충무로와 을지로에서 부서지고 세종로에서 부서지더라도 베드로가 재활복구된 것처럼 재활복구 될 희망이 있다, 복음서가 말한다는 거죠. 이런 드라마는 제가 볼 때 깊은 위로가 되는 본문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죄를 짓는 순간 내가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순간입니다. 제가 만일 뇌물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나는 김회권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야, 라는 행동을 하는 거죠.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가야바와 안나스 법정에 끌려가 오랏줄에 매여 가는 일은 원하지 않는 것이고, 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우크 에이미,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의도적인 거짓말입니다. 이게 거짓말입니다. 내 존재를 내가 부정하는 겁니다. 내가 피조물,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 아담의 후손인데 아담은 자기가 먼지로 지어진 존재, 아파르 아타, 너는 먼지니, 먼지스러운 자기의 본성을 부정하고 신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담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내 존재를 파괴하고 부정해가면서까지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이 죄를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크 에이미, 나는 아니라고 소리치는 이스라엘의 슬픈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크 에이미, 나는 아니다, 그런 존재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 당신이 기대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별로다, 나는 야수고 짐승이다, 나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엉망입니다, 나의 세계는 아수라입니다, 나는 축생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존귀한 것 찾지 마세요, 이렇게 살면 탕자가 되는 거거든요. 그때 우리 하나님은 우크 에이미, 나는 아니라고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나를 하나님은 끝까지 신적 항구여일성으로 에고 에이미, 나는 항상 거기 있다, 에고 에이미는 I am 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항구여일성을 가진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뜻이거든요. 수학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신적불변성과 피조물의 가변성의 부등식으로 싸우는 중입니다. 신적불변성과 항구여일성이 이기든지, 피조물의 변질, 피조물의 무지무지한 타락지향성이 이기든지, 우주 안에서는 각축을 하는 겁니다. 성경은 신적 항구여일성과 신실성이 인간의 내적취약성 가변성 피조물의 성향을 이기겠다고 말하는 거니까 너무 놀라운 거죠.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에 만났을 때는 정말 세월호 특별법을 해주고 싶었거든요. 7시간 동안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하니까, 모든 6.4 지방선거 이전에 여당 야당 전부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매를 때려달라고 했습니다. 지방선거가 정반대로 나오고, 곡성 순천 사람들까지 피조물적 가변성에 동참하니까 변화된 모습이 여당과 청와대를 변질시킵니다. 나쁜 변질이 나쁜 변질을 출연하게 하거든요. 지금은 내가 그런 말한 적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른 행동을 합니다. 대통령의 진심을 믿었던 사람들은 우주적 혼돈을 느낍니다. 우리가 만일 거짓말을 하면 이 거짓말의 직접적인 피해는 이 거짓말을 믿고 행동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 달나라에 교회를 개척하렵니다, 헌금해주세요, 100만원 할 겁니다. 윤구형제가 10만원 할 거고, 제가 그 돈을 라스베이거스에서 돈을 다 탕진하고 나서 달나라의 중력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건축은 힘들겠습니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죽으면 직접적 피해는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김회권이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한강에서 물을 오염시키는 우리 모두가 가용하는 토대자체를 붕괴시키는 겁니다. 우리의 거짓말은 당장의 피해자를 냄과 동시에 인류 전체문명이 터를 잡고 있는 모든 것을 파괴 합니다. 한강 1급수의 물을 4급수 5급수로 만드는 것이 대통령의 거짓말이고 여당의 거짓말이고 언론의 거짓말이고 지도자의 거짓말이라는 거죠. 만약 거짓말이 일상화되면, 우리가 반도체를 수출하고 자동차를 수출하고 조선 수출해서 엄청난 천문학적 돈을 벌어도 우리 도덕적 윤리적 문명의 기본이 되는 언어가 수질오염 되듯이 오염되고 진실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리면 이 모든 물질적인 부가가치의 창조가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에는 한스 페터 마르틴 하랄트 슈만이라는 사람이 쓴 책 중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에 나왔습니다. 이 책 전반부에 미국에서 잠재적 폭력과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 2900만명이 사설경호원을 쓰고 있습니다. 2900만명이 사설경호원을 쓰고 있다는 말은, 지금 강남 청담동 거리에 잠재적 성범죄자와 전과 10범들이 5천명이 돌아다닌다, 청담동 일대 이런 소식이 들린다, 청주교도소 전주교도소를 탈출한 또는 만기출소한 모든 성범죄자들이 강남 일대를 휘젓고 다닌다, 특히 청담동 일대에 다닌다, 그러면 청담동 일대는 사설경호원을 써야겠죠. 바로 2900만명이 그런 식으로 산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을 벌고 우리가 아무리 사회를 촘촘하게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쓰는 언어, 내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거짓행동과 거짓말과 거짓 작태를 하면 우리 사회의 근본토대를 허물어 뜨립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전체에 대한 불특정테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세상에 창조하여 보내신 하나님께 향하는 죄가 됩니다. 인간의 죄의 궁극적 파괴적 임팩트는 하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 존재를 모욕합니다. 이렇게 사는 인간을 보고 하나님 자신이 자책합니다. 내가 사람 지었음을 후회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파괴적인 코멘트를 한 거거든요. 내가 이 세상에 사람을 창조한 것을 후회한다, I regret라고 했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 분노의 극단이거든요. 하나님께 자기가 한 일을 cancel 하도록 만드는 것이 인간 죄가 신에게 미치는 것, 인간행동이 신적인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성경의 기가 막힌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도 없는 겁니다. 피조물의 행동이 하나님의 기분을 좌우하고 하나님의 행동을 후발적으로 촉발시키고, 어떤 하나님의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피조물의 모종의 행동이라는 것은 성경의 독특한 사상입니다. 제가 지금 우리집에 있는 개미나 거미 같은 존재가 나한테 아무리 지나다녀도 저한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집 대문 밑에 개미 연막이 16개 있는데 개미 중 아주 사나운 개미가 있는데, 우리 집에 사는 개미로서 김씨 집안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내가 개미 사는 것을 후회한다, 이렇게 하지 않거든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행동 종말적 지향이 내가 널 창조한 걸 후회한다고 할 정도의 반응을 유발하니까 인간의 행동은 우주적 임팩트가 있는 거죠. 창조주에게 후회감을 유발시키는 것, 그러니까 결국 거짓말을 하면 나는 아니다, 나는 그런 대통령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행복하게 돼서 수세에 몰려서 위축감 들고, 나는 삼권의 영향을 받고 있고 6.4 지방선거의 압승을 받고 있고, 하늘에 승천하기 직전에 있는 진성모왕이야, 이런 마음을 갖고 있고 지금 사람이 바뀌어 있습니다. 6.4 지방선거 전 새누리당과 지금 새누리당은 다르거든요. 지금 야당도 다 바뀌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 참 가증스럽죠. 다른 사람의 죄는 가증스럽게 여기지만 내 행동에 대해서는 가증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행동을 가증스럽게 여길 만큼 숱한 경우라도 우크 에이미, 나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의 죄를 손가락질 하기전에 비참할 정도로 정직하게 내 자신앞에 나를 돌이켜 볼 때 내가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인 예수와 상관없다고 주장하듯이,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인 진리는 싫다, 나는 물붓듯이 쏟아지는 성령으로 권능을 행하는 예수가 좋다, 라고 하면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죠. 베드로는 표적과 권능에 가득 찬 예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뒷모습이 처음 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무슨 충격과 같느냐? 우리가 달의 뒷모습은 모릅니다. 영원히 모릅니다. 달의 뒷모습은 영원히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권능에 가득 찬 예수의 모습이 한 표면이라면 예수의 표면 너머에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 무시무시한 잔을 마시려고 하는 엄청나게 치열한 순종 정신이 있었다는 걸 모릅니다. 그 기적이 바로 치열한 아버지의 잔을 마시겠다는 순종 때문에 권능이 왔는데, 베드로는 이 논리도 연결을 못 시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진노의 잔을 받겠다고 오랏줄에 순순히 묶겠다는 그 순종을 보고 물과 성령을 쏟아 부었습니다. 어떤 종교적 권능을 가지고도 자기 복무적인 나쁜 일을 하시지 않을 하나님 아들이기에 성령의 기적을 부었습니다. 아버지의 잔을 마시겠다는 이유 때문에 요단강에 잠수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에게 권능을 위탁했기 때문에 사실상 베드로가 예수의 이 뒷모습과 베드로가 보았던 표면의 모습은 똑같은 거거든요. 왜요? 아버지의 잔을 마시겠다는 결단에 대한 응답으로 물과 성령의 기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신학적으로 놀라면 안 되는 겁니다. 20대는 이걸 모르고, 나중에 이걸 연구한 사람이 나중의 요한 나중의 바울입니다. 요한은 아버지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 순순히 오랏줄 포승줄에 묶여 있는 무력한 예수에게 엄청난 신적권능이 나타났다는 역설을 말함으로써 종교적 권력은 가장 약한 자에게 사람을 살리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축사의 능력, 치료의 능력, 엄청난 능력은 아버지의 잔을 순순히 받아 마시는 순종 100% 극댓값을 드러내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아버지 잔을 마신 최초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신적권능을 벗어버리고 인간적 연약함에 100% 동의하는 조건으로 육신을 입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행위 자체가 이미 육신의 오랏줄에 매인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 권능을 억제당하는 오랏줄에 스스로 자기를 결박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결박당한 예수에게 신적권능이 폭발했다는 게 역설입니다. 신성의 모든 카리스마를 벗고 육신의 장막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다 겪으시고 육신의 제한성을 받아들였던 예수님, 아버지 잔을 마셨던 예수님께 엄청난 권능이 나타난 것, 요한복음은 성육신하는 그 행위야말로 육신의 오랏줄과 포승줄에 매인 것과 같다, 그게 바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신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랏줄에 매여서 철두철미하게 무기력한 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못한 베드로는 당대에 실수를 합니다. 나는 모른다, 마무리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 능력에 대한 아멘이라면 너무 쉽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참여하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우리를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폭발적인 외견상의 권능이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쉽죠.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정말로 정결의 포승줄과 겸손의 오랏줄에 자기 몸이 매이는 일이라면 성령의 감동없이는 이길 방법이 없죠. 그래서 성령의 감동이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전부다 우크 에이미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충분해야만 정직의 포승줄과 겸손한 오랏줄에 자기몸을 맡길 수 있고, 청념의 오랏줄과 겸비의 포승줄에 자기 몸을 맡길 수 있는 거죠. 그렇지 못하면 베드로처럼 나는 아니라, 우크 에이미, 나는 예수당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일상생활 하면서 얼마나 충만해야만 정직의 오랏줄과 포승에 매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충만해야만 이렇게 따라갈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릅니다. 권력이 많고 이미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과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훨씬 더 무거운 정직의 오랏줄과 겸손의 포승줄에 묶여야 하거든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은 안나스의 사랑채까지 따라서 정직의 포승줄과 순종의 오랏줄에 몸이 매여서 자기가 충분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옳지 않음을 당한 자처럼 참아내는 그 무시무시한 확신, 진짜 확신이 와야 하거든요. 하나님과 하루종일 대화하고 수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실수를 하느냐? 하나님이 나룰 충분히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자구책을 가지고, 이걸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내밀하게 오랫동안 하나님과 영적교통을 일삼는 사람만이 무시무시한 이 순간에 에고 에이미, 나는 그 사람이 맞다고 대답할 수 있죠. 하나님이 우리를 피조물적 가변성과 변질가능성으로 살아가는 우크 에이미, 나는 아니라고 소리치는 우리를 일주일 동안 참으셨다가 주일마다 에고 에이미, 신적 신실성으로 우리를 대속하시고 우리 죄를 덮어쓰시고 다시 한 번 일주일 동안 기회를 주십니다. 다음 일주일 동안 분명히 내가 신앙이 아니고 내 정체성을 부정하든지 내 정체성을 드러내 피해를 보는지 citical한 중대한 순간이 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주일 내로 한 두 번 올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올 때 우크 에이미, 나는 아니라고 해야 하는 순간 하세요, 어쩔 수 없습니다. 에고 에이미, 하는데 안 쓰러져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웬만하면 안 쓰러집니다. 나는 기독교인이요, 해도 그래? 얼마나 가나 보자, 이렇게 나올 수 있죠. 귀신을 쫓아내면 귀신이 조롱한대잖아요. 뇌물을 가져왔습니다. 부장님 이번에 꼭 5점만 올려주세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받고 5점 올려 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저 서울가향교회 집사에요, 열사 나왔네, 이렇게 해서, 이윤구 집사님 권고 사직됐습니다, 사실은 그럴 수 있죠. 이런 순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이런 순간이 안 온 사람, 진정 겸손한 사람, 출세 안 한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내린 결정은 오로지 나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출세 안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출세 안 한 사람이 정의, 내가 내린 결정이 나에게만 영향을 주는 사람, 결혼하기만 해도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나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전혀 출세와 상관없이 살고, 그야말로 진토에 얼굴을 붙이는 사람마저도 나는 아니라고 소리칠 때가 옵니다. 적어도 우리 모두는 옵니다. 나는 아니라고 소리치는 그 순간도 걱정하지 마시고 신적항구여일성 에고 에이미가 우크 에이미를 덮어 쓰기 위해서 종국적으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 인도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도덕적 방종의 하나의 구실로 삼아서 오늘 설교 정말 좋았어, 우크 에이미로 가볼까? 하나님 나를 얼마나 참나 볼까? 하지 마십시오. 이쪽으로 가면 다 망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제 설교를 그렇게 듣고 그렇게 살면 제 마음이 다음에 여기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치셔서 어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가지고, 내가 아는 나사렛 예수는 달의 이면과 표면과 같다, 권능과 표면과 극단적 순종과 무기력과 극단적 연약함을 감수하는 진노의 잔을 받는 그 모습이 있다, 두 순간이 다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명심할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참 낯선 예수님이기도 하고 포승줄과 오랏줄에 매여 있으면서도 자기를 옹호하지도 않고 변호하지도 않고 죽음의 잔을 받아 마시는 너무나 연약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소리칠 의향도 있고 그런 경험도 많습니다. 주님 일주일 동안 우리에게 너무 극한 시험을 허락하지 마시고 우크 에이미 대신에 에고 에이미로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도 주소서. 저희의 작은 순종을 쓰셔서 대한민국 낫게 하시고 사람이 살게 하시고 연약한 자들이 숨 쉴 수 있는 공동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렵고 험악한 일속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과 감사로 바쳤사오니 이 귀한 헌물이 하나님 백성 살리는데 쓰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직장생활에서 고단하고 어렵고 난삽한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형제자매들 있사오니 진리의 방법으로 그 인간관계를 풀어주시고 해소시켜 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이 시간 간절히 구할 것은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이 있고 시험준비를 하는 아들딸들이 있습니다. 주님 직장에서 일하다가 건강을 손상하여 어렵게 쉬고 있는 교우들도 많사오니 도와주소서. 우리 교회 바깥에 승냥이처럼 울부짖는 아픔이 있고 아우성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여 주셔서 주님 언론과 예언자와 지혜자가 악한 자를 피하여 숨는 이 때에 하나님 의로우신 팔로 압박 있는 곳에 두 팔로 맞이하게 하셔서 주님 역동적인 임재를 드러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디까지나 악인들이 이 땅의 역사를 분탕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고, 의인들이 풀처럼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의 역사가 포승줄에 묶인 연약한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실족할 위험에 처한 모든 교우들과 신앙입문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교우들과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의 자녀들과 일터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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