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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주일설교 _ 요한복음 18장 28-40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하나님나라의 세상성과 초월성”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 문장은 우리나라 대부분 요한복음 강해서나 설교서 주석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전파하는 나라는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 우리가 죽어서 참여하게 될 완전한 나라, 그 이상적인 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그렇게 둔감한 뜻으로 해석이 된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파했지, 이 땅의 정치 경제, 땅의 권력자들과 각축할 정도로 위태롭게 지상적인 나라를 말한 적이 없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목사님 또는 교회에 충실한 고분고분한 신자로 살다가 개인적인 윤리와 도덕 생활을 잘 하다가 죽어서야 천국에 헤쳐 모여 하는 방식으로 가는 신앙, 라고 가르칩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목적, 저와 장로님과 윤구형제와 태용 형제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과 나와의 의미는 있지만 우리 4명에게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저를 구원하신 목적은 저와 하나님 사이에 궁극적으로 해소가 된 겁니다. 태용 형제를 구원하신 목적은 태용 형제와 하나님 사이에 이미 해소가 됐기 때문에 태용 형제와 저를 우연히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와 태용 형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윤리적 개인주의라고 하고, 개인구원주의라고 말하죠.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천국에 들어갈 관심에 집중해야지, 세상 문제에 좌고우면하면서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복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개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선으로 연결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점으로 존재해야 한다, 선으로 연결되거나 입체가 되거나 이 세상의 어떤 이해관계에 연루되면 안 된다, 이렇게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았다, 이 세상으로부터 기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헬라어로 이 정도는 여러분께서는 아시리라 믿고 썼습니다. 가향교회 2-3년 다니면 헬라어를 알게 됩니다. 준 마취상태, 환각상태로 알아듣게 됩니다. 헤 바실레이아 헤 에메 우크 에신 엑 투 코스모투트, 에크 라는 말은 out of 라는 뜻입니다. 에신이라는 말은 직설법 동사이고요. 바실레이아는 아시죠. 바실레이아는 보통 조용기 목사님도 쓰시는 말입니다.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에이미는 영어는 am 이라는 동사 있죠. 헬라어로 메가 나에게 라는 뜻입니다. 헤 바실레이아 헤 에메 내 나라는 이런 뜻입니다. 우크는 부정어 아니다, 가향교회와 다른 교회 차이점은 헬라어를 알아듣는다, 방언의 은사가 집단적으로 임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크 에신은 산상수훈 5장 3절을 명지산에 갔던 청년 30명에게 가르쳤습니다. 에신은 직설법 be 동사 3인칭 남성 단수, 에크는 out of, 투는 정관사, 코스는 가을에 피는 꽃 코스모스, 우주라는 뜻입니다. 투트는 관형사 this라는 뜻입니다. 헤 바실레이아 에메 우크 에신 텐 엔투데 라는 말은 from heavens 똑같은 말인데, 이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말이지, 이 세상을 지향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여기에 우리 한국교우들이 아는 뜻으로 쓰이려면 에크 투 코스모투트 대신에 투 라는 부정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렇게 쓰면 맞습니다. 여기는 out of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나라의 특징은 군사적 정복을 통하여 나라가 섭니다. 두 번째는 화백회의처럼 육가의 연맹처럼 부족회의의 연맹체를 통하여 사회계약적인 합의를 통하여 나라가 섭니다. 그다음 민중투표를 통하여 나라가 섭니다. 민중투표, 군사적정복, 부족연맹체들의 합의가 나라가 서는 방법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라가 서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 나라로 그 구성 자체가 지상의 나라와 운영방법이 너무 다르고, 건국과정 자체가 다릅니다. 모든 나라는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자유를 일부분 빼앗아가며 섭니다. 나라에 속하기 위해서 여러분께서 자유의 일부를 양도할 마음이 있죠. 그게 바로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설이죠. 일반의지에게 내 의지를 일부 양도합니다. 대한민국에 소속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 모든 물건을 살 때 부가가치세 10%를 지불하는 것이 국가에 소속된 충성심의 표시입니다. 라면 살 때도 10%, 극장갈 때도 10% 세금을 냅니다. 그리고 군대에 갑니다. 국가에 소속됨을 유지하는 겁니다. 주체성의 일부를 빼앗기거나 양도되거나 뭔가 박탈됩니다. 전쟁나면 군대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면 내 안에 있는 원래 존엄한 생명력과 개성이 100% 발휘되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방법과 은사와 재능이 하나님을 향하여 100% 만개합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직업을 얻으면 내가 가진 가장 최적의 조합에 맞는 직장이 생깁니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최적의 내 은사와 재능과 모든 것을 이해하는 직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건국과정은 타자를 지배하고 타자의 주체성을 빼앗는 방식으로 건설되지 않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합니다. 그 나라는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될 것을 믿고, 그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신청하면 성령이 와서 그 나라의 문을 열어 줍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속하겠다는 이민신청서, 귀화신청서, 하나님 편에서 signature가 옵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인을 치는 겁니다. 성령의 인을 친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죄를 사함 받고 은혜의 동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되는 것은 국적을 이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 특징은 더 이상 죄의 인력권에서 벗어나서 은총의 감동 안에 살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을 거룩하게 공격하고 이 세상의 기초를 허물어뜨리는데 그 방식이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이 세상은 맘몬 신을 섬기지 않고 권력의 신을 섬기지 않고 육체적 열등한 욕망을 섬기지 않는 일련의 하나님 백성들이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세상은 구멍이 납니다. 세상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세상권력은 끝난 겁니다. 그런 공동체가 약 50명만 존재해도 세상은 끝난 겁니다. 세상의 체제를 보이콧 해버리면 됩니다. 우리가 주일날 하나님께 경배하면, 맘몬의 신을 어떻게 비신앙화 합니까? 십일조를 하면서 돈의 힘을 비신앙화 해버립니다. 십일조 보다 더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면 돈의 신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돈은 종으로 부릴 때는 가장 유능한 종인데 주인으로 모시기에는 악한 주인입니다. 돈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선언합니까? 십자가에 못이 박혀 봉헌합니다. 봉헌하는 시간은 돈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시간입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 형제자매들과 있는 것은 내 은사와 재능이 만개하도록 성령께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교회에 오면 세상 직장에서 맛보지 못했던 내 은사와 재능이 꽃이 핍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을 자유,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치외법권 지역으로서 맘몬의 신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성령의 감화감동만이 지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나라가 내 나라다, 나는 그 나라를 위해서 왔었고, 그런 나라의 왕이라는 겁니다. 상비군관 관료조직과 폭압적 국가기관을 가진 나라의 왕이 아니라 진리 안에 속해 진리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은 진리 안에 설득된 사람들의 나라, 진리 안에 설득된 사람들에게만 왕노릇 하는 왕이라는 겁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진리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의 왕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왕 됨을 인정했는데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민족주의적 냄새가 나는 용어를 예수님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건 네가 하는 말이다, 진리에 속한 사람, 진리의 음성을 듣는 사람, 진리의 음성에 설득된 사람들의 왕일 뿐이다, 예수님이 왕임을 인정한 겁니다. 진리에 속하여 진리의 음성을 듣고 설득된 사람들의 왕이라는 겁니다.
오늘 대화가 정말 중요합니다. 빌라도와 예수님 대화에 어떤 비약이 있는가 보세요. 18장 35절 ‘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했느냐고 행위를 묻는데 예수님이 36절에 ‘내 나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안에 뭐가 생략됐다는 뜻입니까? 마태의 수난에 보면 이렇게 됩니다. 그가 무엇을 했나요? 예루살렘 여인들이 집어넣는 교창에 보면 그가 무얼 했느냐고요? 마태복음 11장 4-5절을 인용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걸 보면 예수님은 각각의 불행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고치고, 언뜻 보면 고침 받은 불행한 사람들 사이에 어떤 동아리도 만들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11장 4-5절이라든지 사도행전 10장 38절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답변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4-5절 답변을 한 겁니다. 나는 마태수난곡에 나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의 교창 속에 나오는 그것, 이런 일을 했다, 내가 귀신을 쫓아냈고 병자를 고쳤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나는 오천 명을 잔디밭에 앉혀서 밥을 먹였고 굶주린 무리를 먹였고, land hungry, 땅이 없는 사람에게 땅을 찾아주었고, 이런 말을 쭉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말한 나라는 무슨 나라냐고 물었을 때 ‘내 나라는’ 이라고 대답한 겁니다. 그렇게 해야만 문맥이 맞는 겁니다. 지상에서 어떤 물리적 영토를 차지한 나라 중에서 이런 나라가 없다, 내 나라의 시작은 천국이고 하늘이고 마지막 목적지가 지상일 뿐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 내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기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겁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물들지 않고 감동감화 받지 않았다면 그냥 예수님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고쳐주시기만 하고 떠나시고 나에게 형제자매들을 붙여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윤리적 개인적 기독교로 끝났습니다. 아돌프 폰 하르낙이 그런 말을 했죠. 나사렛 예수는 윤리를 가르쳤다, 앨버트 슈바이처도 예수는 윤리를 가르쳤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최고의 윤리를 모범으로 보였지, 거대한 전망, 이 세상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위험한 각축을 할 만한 사회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다, 아돌프 폰 하르낙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회적 프로그램을 제시했느냐? 성령에 감동 받은 개개인들이 천국에까지 이월될만한 존속할만한 공동체를 건설하고, 이 세상 맘몬 신과 어둠의 세력들에게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생활을 창조하러 왔습니다. 왜 사회과학적 용어가 없을까요? 성경에는 김회권 목사가 말한 공동체 지향적인 용어가 왜 없나요? 전부 개개인의 고침문제로 보이고 그들이 모여서 하나가 됐다는 건 없는데요? 아돌프 하르낙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돌프 하르낙의 약점은 구약성경 폐기론자입니다. 구약성경은 최고의 윤리를 완성한 예수 앞에서 폐기가 돼서 볼 필요가 없다, 아돌프 하르낙의 영향을 받은 안병무 같은 사람이 신약성경과 시편만 들고 다녔습니다. 한신대 기장측은 독일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몇 십년 동안 구약성경을 폐기해버렸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용어 중 개개인을 구원하면서 뚜렷이 하나의 대항대조 프로그램을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가졌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말한 본문이 ‘나는 선한 목자라’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사야 5장 1-10절에 나오는 들포도나무에 대한 대항공동체입니다. 처음 들은 사람들은 요한복음 15장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어려울 수 있겠는데요.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에 가면 설교 녹취록이 다 있습니다. 그걸 읽어보십시오. 우리 교회 늦게 온 사람들은 설교 녹취록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죠. 15장에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온다는 비유는 세 가지인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으러 왔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둘째 아들을 찾으러 왔다, 잃어버린 양이 바로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삯꾼 목자비유와 선한목자 비유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6장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창자가 끊어지듯이 슬퍼했다, 아파했다고 했습니다. 창자가 끊어질 만큼 공감하면서 아파했던 대상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한 무리들, 즉 굶주린 무리입니다. 굶주린 무리들을 보자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애 끓듯이 탔다고 했습니다. 그다음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굶주린 무리들을 오병이어의 기적, 오천 명을 광야에 앉혀 놓고 밥을 먹이는 이 장면이야 말로 완벽한 대항사회, 대조사회 구약사회가 꿈꾸는 사회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했던 그 말은 예수님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개별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다윗이 만든 그 나라의 총체적 프로그램을 완성시킨 그 개인 예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빼버리면 아돌프 폰 하르낙처럼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예수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을 천년의 울림으로 하나하나 풀어낸 예수를 보자마자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약속한 대항대조사회를 예수가 성취하러 왔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와 예수님에 대해 너무 뚜렷해집니다. 제가 외치는 게 그거 아닙니까? 저와 박철수 목사님이나 박득훈 목사님은 그런 복음을 외치죠. <복음과 상황>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발견했던 겁니다. 예수님과 구약의 관계를 인정하자마자 예수님이 말한 모든 것은 사회적 프로그램임이 드러났고 대항 대조 대안 공동체를 창출하는 것이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양상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당대에서 무슨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습니까? 예수님은 열두제자 공동체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대체할 대항대조공동체를 창출했습니다. 열두 공동체의 특징은 전 재산을 바친 공동체입니다. 그 전 재산을 바친 공동체 다음으로 70제자가 전 재산을 바치지 않았지만 바나바처럼 밭을 상당부분을 판 제자가 합류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공동체의 특징은 물질과 재산을 바친 공동체였습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특징은 성령에 감동 받자마자 물질적 차원까지 지갑까지 열어젖힌 우정공동체, 지갑까지 하나님께 바쳐버린 신적인 공탁이 일어난 공동체입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했지만 자유롭게 얼마든지 하나님께 바쳐서 급진적인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한 의의 연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의의연대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도덕적으로 매우 열등하거나 평범한 사회를 이루었으면 대제사장들이 두려워할 만큼 무섭게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충분히 급진적으로 착하면 우리가 핍박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충분히 급진적으로 착하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를 종교로 존중해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삶을 못 살기 때문에 이 나라는 계급투쟁이나 군사적 정복이나 부족연맹체적 합의를 통해서 나온 나라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대항대조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책이 이 책입니다.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마르바 던 이 사람은 매노나이트의 존 요드의 제자입니다. 존 요드와 칼 바르트 등에게 엄청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상권세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책은 요한복음 내내 강조했던 대안 대조공동체, 이 세상 질서에 속하지 않은 자유를 가진 사람들의 전략적이고 창조적인 고립 공동체, 이 세상에 접합하지만 영향 받지 않는 공동체, 이 세상에 접합하지만 영향을 안 받고 삼투압을 일으키는 공동체, 이것이 바로 세상권세를 무력하게 하고 세상권세를 굴복시키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이 책이 아주 좋은 책입니다. 우리가 구약적 언어 하나하나를 가지고 쓰셨던 예수님을 연구하다 보면 예수님은 김회권 개인을 구원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김회권 같은 인간들을 모아서 대항대조대안 공동체를 만들어 하나님의 전적 통치를 받는 공동체를 이 역사 속에 뿌리내리는 것이 하나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운동의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 은혜는 우리의 노력을 완성시킵니다. 우리 신앙의 분투는 하나님 은혜에 의해서 완성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하나님 나라 비전을 가지고 이 땅에 살면 자신도 모르게 대안 대조공동체로 나옵니다. 극단적 소비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옷을 검소하게 입고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공동체입니다. 명품 자체가 우리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명품가방을 들지 못했다고 열등감을 느끼는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웃음거리가 됩니다.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면 웃지는 않겠지만 웃음거리는 됩니다. 김회권 목사가 엄청 호화로운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 그러면 제가 아무리 안 웃기려고 해도 웃음거리가 됩니다. 우리 개개인이 있을 때 얼마나 대항이 되는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집합체로 봤을 때,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만큼 누리는 것보다 훨씬 적게 누리고, 과감한 자기 응축을 통하여 빛을 창출해내는 공동체인 걸 알게 됩니다. 우리끼리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지금 형제자매들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세요. 우리 공동체는 지시하지 않았지만 극도의 자기절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극도의 자기 절제입니다. 삼감이 있습니다. 삼감은 경건함입니다. 그 삼감 때문에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돌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볼 때, 상상력 넘치는 동정심이 많은 게 아니라 감수성, 감정적인 표현보다 훨씬 중요한 게 나의 절제입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이 없다 해도 절제해서 내 물질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철철 흘러넘치지 않아도 매우 냉정하고 사무적인 것처럼 보이는 내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느껴지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나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지 않았다, 진리의 음성을 듣고 설득당하는 사람의 왕으로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음성에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사람에게만 예수님이 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은 관념적인 우울증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치합니다. 한 번도 통치를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불순종을 드러내면 내가 표류하게 됩니다. 세상을 탓하면서 교회를 비난하고, 그 사람들 특징은 자신이 진리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일고 있는 대안 대조공동체의 몸부림들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보세요. 세계의 유수한 언론 모두 반드시 대안대조 공동체가 요소요소에 일어납니다. 우리 주변에 내가 진리의 음성에 속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영토에 머물면 내 주변에 내가 본받고 추종해야 할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덕은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덕부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은 절대로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막연하게 세상을 비난하거나 교회를 비난한다면 그 사람 개인이 오랫동안 진리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이 누적돼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순종을 일삼는 사람들은 특징이 경건한 설렘이 끊임없이 있습니다. 저도 경건한 설렘 때문에 기도하는 게 즐겁습니다. 아침마다 기도하는 게 즐겁고, 또 기도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는지, 왜 저 형제를 우리 교회에 보내주셨는지, 왜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는가, 저분과 내 인생이 만나면 뭐가 일어날지 항상 꿈을 꿉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됐는지, 우리가 지금은 점처럼 고독하고 왜 이 공동체에 속했는지 잘 모를지라도 우리가 선이 되고 평면에서 입체가 되고, 순식간에 하나님 앞에서 meaningful한 메시지를 가지는 대안 대조 공동체로 완성될 때 이 교회에 온 것을 알게 됩니다. 3년 지나면 우리 공동체가 모양이 갖춰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모릅니다. 이 사람이 나오다 안 나올지, 김회권이 딴 데로 갈지 모두 모릅니다. 3년 내내 모릅니다. 3년이 지나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의 영역이 되지 않겠나,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서 설교할 마음을 주실지, 빼앗으실지, 강단에 서자마자 메시지를 박탈하실지 모릅니다. 우리가 3년 동안 가보면 우리 교회에서 대안 대조 대항공동체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겁니다.
저는 50명에서 100명 교회만 항상 존재해도 세상을 이겼다고 봅니다. 세상의 돈의 신이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가 50명만 있어도 세상은 다 지배하지 못한 겁니다. 역설적으로 세상 악이 이 세상을 다 삼킬 수가 없습니다. 요소요소에 진리의 음성을 듣고 저항하려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진리의 음성을 듣고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요소요소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정원이나 새누리당이나 새정치연합이나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집단 속에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실 수 있거든요. 삼성에도 있을 수 있고 LG에도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은 진짜 대안 대조 공동체를 이루어서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이루고 무차별적이고 급진적인 하나님 사랑에 노출되기만 하면, 물질적으로 너무 풍요로운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물질적 풍요 넘치는 재능과 은사, 흘러넘치는 풍요와 친절은 공동체적 자산이 돼서 우리가 섬길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우리 쪽으로 쇄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공동체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 많이 쇄도하기 때문에, 시편 103편 19절에서는 이미 하늘에 서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천군천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살아 있습니다. 즉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순종하는 민첩한 천군천사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빛의 속도보다 민첩하고 정확하게 순종하는 천군천사급 성도들이 이 땅에 있기만 하면 마태복음 11장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런 공동체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인종과 계층이나 계급,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우정과 사랑 상호 돌봄이 왕 노릇 하는 공동체가 반드시 이 땅에 가능하다고 보고, 그런 나라들이 점점 각 나라와 각 족속에 있다가 마지막에 한 데 모아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진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침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백낙청 선생님이 편집한 <민족주의자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앤서니 기든스 등의 민족 등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란 말이 나옵니다. 그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이 민족에 속해야 할 것인가 매 순간 결단해야 한다는 신학적 용어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물론 신학적 개념으로 쓴 건 아닙니다. 그걸 제가 똑같이 씁니다. 아침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로 결단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상상 속에 결단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좋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진리의 음성에 속하여 빌라도의 폭압적인 압제적인 수탈적인, 세상의 빌라도를 미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웃기느냐? 학벌 좋은 사람, 집안이 좋은 사람을 무조건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리 없는 서민도 학벌 좋고 집안 좋은 사람에게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난하지만 권세 있는 집안에 대해서 무조건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그런 것은 없지만 심리적으로 똑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거부할 수 있어야만 진짜 우리나라가 바른 민주주의가 되는 겁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권력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세상권력을 무장해제하고 세상권력이 불필요하게 만드는 사랑의 감화력에 속해 있는 나라, 성령의 주도력에 의해 소수의 공동체 안에서 왕성하게 시험되는 나라, 지갑까지 하나님께 바쳐버리는 물질적 코이노니아가 가능한 나라, 그런 나라에 소속할 때 하나님 나라가 실재한다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미국이 실재하는 것보다 더 서스펜셜한 나라, 미국보다 더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 소속하게 되는 것, 성령의 감동으로 자발적으로 소속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내는 것보다 더 많이 받는 나라입니다. 십일조보다 훨씬 받고 시간의 십일조를 내면 10분의 1보다 훨씬 많이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적게 내고 너무 많이 받는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적게 내고 너무 많이 받는 나라, 폭력투쟁이 필요 없는 나라, 진리와 설득의 힘으로 세워지는 나라, 그래서 말씀공부가 중요합니다. 아침마다 기도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나라에 속한 결단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침에 기도하여 그 음성을 듣는 사람만이 오늘 그 나라에 속하겠다는 겁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간성을 못 믿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하지 않음 때문에 우크 에이미, 나는 그 나라 백성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순간이 순식간에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면 내가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하고 싶은 순간에도 당당하게 내가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강렬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탐욕과 각축보다 사랑과 협력의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시작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기원한 나라가 아닙니다. 땅에서 물질적 결핍 속에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나눔을 통하여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나눔의 성품, 경청의 성품, 사랑의 성품이 진짜 중요할 거라 봅니다. 지상에서는 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가 해명이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천국 가봐야만 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지 완전히 해명될 거라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게 왜 중요한지, 지금 이 땅에서는 섬기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가 충분히 납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남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둘로마, 노예처럼 남을 섬기는 겸손함이 천국 갈 때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상에서 이렇게 강조된 것을 볼 때 제 마음속으로 하나님 나라는 진짜 이런 것이 무진장 필요한 곳인가 보다 감지하게 됐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우리 사이는 장막이 끼어 있는 교제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막힘없는 교제가 일어날 것이다, 사랑은 영구불변, 사랑 자체는 천국에서 시작해서 천국에서 마무리 됩니다. 사랑이 왜 제일 중요한가는 지상의 경험에서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경험에서는 왜 사랑이 폭력보다 더 좋은지 납득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형용론적으로 사랑을 많이 하자, 공리적으로 접근합니다. 자명하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천국에 갈 때 이 사랑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 이 사랑이 하나님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경험할까요? 가향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면 저는 영구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경험하려면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모든 것을 보급해야 하고, 진리의 음성에 속한 자답게 경청할 때 주님은 나에게 왕노릇하시고, 진리의 음성에 복종한 만큼 주님의 왕노릇하는 왕 정치적인 내 인생의 현장이 나타난다고 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이 왕적통치를 현저하게 드러내는 각각 개인이 되기 바라고,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정말 감사합니다. 진리의 음성에 속한 자에게는 왕이 돼주시는 주님, 빌라도의 폭정과 압제와 수탈 체제에서는 예수님이 한낱 죄인에 불과할지라도 진리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왕이 돼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은뱅이, 눈먼 자, 가난한 사람, 빌라도가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삶의 어두운 변경으로 가장권으로 몰려난 자들이 천국에서는 기둥이 되고 모퉁이 돌이 됩니다. 아버지 지상에서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지상에서 박탈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새 나라 만날 때 불행하고 우울한 경험한마저도 써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앉은뱅이 같은 저희를 일으키셔서 직립보행하게 해주시고 눈이 먼 저희의 눈을 열어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여 주소서. 서울의 가향이 비산동 가향이 진리의 음성에 속한 공동체, 대안 대조 공동체 대항공동체로 이 세상을 당연하게 보이콧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굶주린 무리들을 오천명의 남자를 순한 양처럼 다뤄주시며 먹여주신 주님, 저희가 굶주린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 주님, 이 땅의 모든 굶주린 사람들에게 교회가 먹일 마음을 주소서. 하나님 정부에게 맡기지 말고 고용노동부에게 맡기지 말고 이 땅의 교회가 굶주린 모든 사람에 대하여 거룩한 무한책임을 갖게 하여 주소서. 우리 대한민국 기업가들에게 분배와 나눔이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주시고, 탐욕과 각축과 잔혹한 지배보다 나눔과 인자한 베풂이 경제발전을 가져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대한민국 정부와 기업이 분배의 정의를 통하여 나눔을 통하여 이 땅의 한숨소리를 거두어주시고 세계 만민이 나누고도 남는 열두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날마다 경험하는 나라가 되게 해주시고 세계가 되게 해주소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직장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으로 바친 성도들 있습니다. 주님 그들의 직장을 힘 있게 붙들어주시고 불안한 직장은 견고하게 해주시고 새로운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포도원을 찾는 무리에게 주님의 포도원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아침마다 진리의 음성을 들으며 진리에 설득당하며 나사렛 예수의 왕권 앞에 자발적으로 엎드리기로 다짐하는 교우들과 친척들과 가족들과 자녀들과 일터위에 그리고 그들 때문에 주 예수를 영접하게 된 미래의 신자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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