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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설교 3,276편 】◑/천국 설교 33편

9월 28일 주일설교_ 요한복음 18장 19-27절“밀교적 교훈과 공공연한 하나님나라 복음의 차이”

by 【고동엽】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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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일 주일설교_ 요한복음 1819-27

밀교적 교훈과 공공연한 하나님나라 복음의 차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요한복음의 저자가 어느 정도 베드로의 마음을 공감하면서 쓰는지 알 수 없지만 짧은 성경에 두 차례나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18절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25절에도 불을 쬐는 베드로가 나옵니다. 날씨가 추웠다는 말입니다. 날씨가 추웠다는 말은 그 당시 날씨가 추웠는지 더웠는지 알려주기 보다는 베드로 마음이 몹시 추웠다는 뜻이고, 외로웠다는 뜻이고, 불을 쬘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실감과 박탈감이 심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새벽녘에 일교차가 심한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스승이 체포되고, 갑자기 무기력한 체포당한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한 스승을 보고 베드로의 마음이 엄청 추웠다는 거죠. 베드로는 지금 따뜻한 불이 필요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상실하고 급격하게 냉담해진 거죠. 베드로의 마음이 냉담해지니까 그가 예수님께 그렇게 자주 말했던 선포, ‘죽는 데까지 가더라도 같이 가겠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 정도의 결심이 급격하게 냉담해졌습니다. 이런 베드로, 죽는 데까지 함께 가겠다는 이 마음도 진실이고 불을 쬘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것도 진실입니다. 파편화된 진실과 힘없는 파편적인 진실에 끼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 뒤에 하는 행동을 볼 때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는 말은 큰 맥락에서 볼 때 참말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1장 제일 마지막에 보면 베드로가 이 장면을 정확하게 다시 만회합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남들이 네 수족을 묶어서 네 생애 마지막에는 묶인 채 다닌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이 묶였던 것과 같이 베드로도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런 경험을 하면서 베드로는 원래했던 누가복음 22장 33절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큰 맥락 안에서는 자기 결심 안에 살았다는 말입니다. 큰 맥락, 엄청난 결단을 의심하게 만들고 이 결단을 흔들리게 만드는 작은 배반을 오늘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는 저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인 예수를 모른다,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인 예수는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예수입니다.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여서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잃어버린,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자기의 장래를 맡기는 것은 이성이 바른 사람이 따라갈 길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예수님 같은 순백의 진실을 포승줄과 오랏줄로 묶어낸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누가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이느냐? 이 세상의 악을 치명적으로 고발할 때 묶입니다. 이 세상의 악과 공존하면 괜찮은데, 이 세상에 좋은 점도 많지만 치명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랑 대적하는 이 세상의 무시무시한 약점을 노출시킬 만큼 강렬한 진리, 강렬한 빛, 강렬한 순전성, 강렬한 순결을 이 세상은 견디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 바로 밑 단계까지 도전을 견뎌줍니다. 예수님 바로 밑 까지의 성자들을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대적인 것을 폭로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품어내는 그 용광로 같은 관용성도 예수님을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오랏줄과 포승줄은 너무 진리 안에서 섰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섰을 때 진리 아닌 것의 오랏줄을 받게 되고 아닌 자들의 세력의 포승줄에 묶이게 되는 사태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훨씬 온건하게 현 정부를 비판하거나 또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비판할 때는 공존가능 합니다. 웬만하면 참습니다. 자유민주주의로 참습니다. 그것의 치명적 약점, 맑시즘이나 공산주의를 가지고 공격하면 참을 수 없이 공격합니다. 특히 맑시즘이라는 공산주의를 가지고 공격하면 자본주의는 참을 수 없이 엄청나게 공격합니다. 맑시즘이 자본주의의 약점을 치명적으로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만큼 자본주의의 폭압적 파시즘 지배권력, 전쟁을 통하여 끊임없이 위험성을 자기 몸에 매다는 이런 체제에 공격을 완벽하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만 죽이면 나머지는 보존해줍니다. 결국 이 세상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치명적 죄성, 폭력성, 결국 절대다수를 가난하게 만드는 소수를 부유하게 만들어서 끌고 가는 무시무시한 것을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사상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나 한 체제를 정면으로 치명적으로 고발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운명이 비교적 동일하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을 도발하지 않았는데 로마제국이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감동으로 다스렸고 오천 명의 남자들을 순하게 만들어서 다스렸습니다. 오천 명의 남자를 순하게 다스린다는 것, 그것도 굶주린 남자들, 이것은 기적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보다 더 무서운 기적이 홍해를 건넌 것은 하룻밤 사이의 기적이지만 모세가 60만 명의 장정들, 전투에 나갈 만한 무시무시한 남자들을 40년 동안 아무런 수비대 아무런 경호대 없이 60만 명의 남자들을 끌고간 겁니다. 남자만 20-50세까지 전쟁에 나갈 만한 수가 60만 명입니다. 사람 수를 세면 200만 명이 된다는데, 그건 확실히 모릅니다. 세계 역사상 비무장 지도자가 돌을 든 군중60만 명과 대립하면서 40년 통치했다, 한 달 도 못가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물이 없다고 돌을 치려고 하죠. 배고프다고 돌로 치려고 하죠. 식단 메뉴가 더럽다고 돌을 치려고 하죠. 몰래 결혼했다고 돌을 치려고 하죠. 모세가 홍해 물을 갈라서 바다를 건넌 기적도 기적이지만 제가 볼 때 정치학적으로 더 큰 기적은 60만 명을 순하게 만들어서 데려갔다는 겁니다. 정치가 입장에서 예수님이 두려운 것은 한 명의 문둥병자를 고친 게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입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너무나 그 땅의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대책 없이 감동을 많이 시킨 겁니다. 대책 없이 존경도 많이 받으시고 메시아라는 말을 들으시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도 함부로 들으시고, 사연이 누적된 결과 필연적으로 온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실수해서 행동이 약간 돌출적이라서 이런 혼란이 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 죽음의 원인은 예수님이 도발했다고 봐야 합니다. 6군단 10군단 무시무시한 폭력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을 말로 사랑으로 비유로 아무런 무장조직 없이 관료조직 없이 상비군 없이 다스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운 겁니다. 안 무섭습니까? 누굴 다스려볼 마음도 안 생기고, 내가 택시회사 사장이다, 우리 회사에 택시가 100대인데 250명 운전사가 있다, 제가 옛날에 어떤 택시 회사에 성경공부를 한 6주 동안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노조에서 저를 초청해서 기사를 가르치니까 사장이 서서히 오기 시작합니다. 기사가 많이 모이니까요. 혹시 무슨 말을 하나 보기 시작하고, 사장과 노조와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사장 왈, 60명의 노조원이 한 곳에 모여 있어도 불안해 죽겠어요, 사장의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예수님은 대항공동체를 가지고 압박합니다. 로마제국의 폭력의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사랑의 방식으로요. 안나스와 가야바의 기계적이고 추악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거짓 성전예배 대신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광야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무차별 접촉과 교제를 창출함으로써 성전체제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압박했습니다. 예수님의 압박이 극심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증오심에 들떠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겁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선제공격을 한 겁니다. 그 선제공격의 방식은 대안공동체 대조공동체 대항공동체를 보여 살게 하는 것을 시범 보여준 겁니다. 오늘날 제일 무서운 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겁니다. 소비주의, 이 시대의 천박한 신자유주의 무자비한 잔악한 경쟁질서에 감염되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영토를 짓고 살아가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 세상을 보이콧 하는 겁니다. 보이콧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물건을 쓰지 않는 것이고, 이 세상의 체제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진짜 로마제국에게 정확하게 한 겁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에 한 것, 발레리우스라는 로마황제가 페르시아와 전쟁하다가 생포가 됐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전로마가 모여서 주피터 신에게 황제를 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독교인 유대교 로마제국 12 13 14 교구에 살았던 사람들, 은평구 금천구 이런 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전부 다 가난한 동네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동네 사는 기독교 사람들은 아무도 기도하는데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큭큭큭 일베식으로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일베입니다. 증오심이 폭발한 겁니다. 가지 않았습니다. 아무 기독교인들도 올림픽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포르노 수준에 공연물에 가지 않았습니다. 연극을 보지 않았습니다. AD 524년에 그때 마지막 콜로세움 경기기록이 나옵니다. 524년이 기독교가 공인된 지 200년 만입니다. 왜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의 경기가 없어졌습니까? 투쟁해서 없어진 게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시민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주교들이 저 추악한 검투사들의 살인행위는 보면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안 본 겁니다. 메이저 시민들, 로마의 시민들이 안 보기 때문에 망해버린 겁니다. 엄청난 적자를 면치 못하고 망했습니다. 엄청난 나쁜 제도, 1807년 1833년 이 사이에 노예무역폐지, 노예무역선 폐지가 있었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노예무역금지법안과 노예제도가 둘 다 금지된 것이 1807년부터 1833년 이 사이입니다. 이때 영국이 산업혁명 한복판일 때입니다. 찰스디킨스가 산업혁명 고발하던 그때입니다. 이때 노예제도가 폐지됐습니다. 영국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결단을 한 겁니다. 영국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큰 결단을 했느냐? 산업혁명 한복판에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그 때 딱 끝났습니다. 노예제도가 악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노예무역금지가 톨스토이 같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톨스토이도 노예를 다 풀어주잖아요. 노예제도에 대해 작가들 예술가들이 강렬하게 저항합니다. 해리엇 비처 스토 부인이 쓴 이라는 작품이 나오죠. 노예제도를 인류혐오 범죄라고 주장했거든요. 오늘날 우리가 이 전쟁을 보면서 기독교인들은 이게 얼마나 악한 일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전쟁소식이 너무 많으니까요. 사실 미국 사람들이 이라크 사람에게 전쟁합니까? 이라크 사람에게 한 전쟁은 인류에 대한 전쟁입니다. 이라크 인에 대한 살상행위는 결국 인류에 대한 살상행위이기 때문에 미국 사람에 대한 살상행위입니다. 결국 자국민을 죽이는 겁니다. 그 영화가 <람보>입니다. 밀림에서 40명을 동시에 죽였던 월남전 퇴역군인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영화입니다. 실베스타 스탤론이라는 사람이 80년대 영화 나왔었는데 잘 모르죠? 그러나 80년대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 퇴역군인들이 자살하거나 아니면 군용역 폭파용역업체에 다시 들어갑니다. 농기업이라는 몬산토가 부리고 있는 거대한 용역업체 블랙워터입니다. 블랙워터가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이 다시 재취업하는 폭파전문 암살집단 용역업입니다. 진짜 무서운 사람들은 이 민간인입니다. 조정래가 <한강>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월남전에 갔던 사람이 월남전에 사람을 죽였던 대한민국 사람이 얼마나 잔혹하게 자국민을 죽일 수 있는가, 한국전쟁에서 사람을 죽였던 사람, 그 사람이 또 월남전에서 사람을 죽입니다. 그 사람이 광주에서 사람을 죽입니다. 누군가 사람을 죽인 사람이 우리 시민가운데 있다, 이건 엄청난 문명의 손실입니다. 인구 1만 명의 나라에 200명이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이다, 그 200명이 평화의 거리를 왔다 갔다 한다, 람보 같이 평화의 질서에 정착하지 못한 사람이 200명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고 무관심한 것도 결국은 그런 겁니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미국의 전쟁참여를, 이라크의 기독교인들의 이라크의 전쟁참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한국의 전쟁참여를 결사적으로 막아내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 어린양, 예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가는 것이 대항대조대안 공동체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렇게 참여하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저항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도발, 오천 명의 굶주린 남자를 광야에서 질서정연하게 먹이고 열두 광주리 또는 일곱 광주리를 남겼다는 것을 정치가들은 진짜 주목합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무리들이 억지로 임금삼았다는 본문 다음에 예수는 홀로 산으로 가십니다. 저는 이때 벌써 예수님이 위험하다고 봤습니다. 누구를 왕이라고 부르면 실제로 위험한 겁니다. 시퍼런 분봉왕 4명 + 안나스와 가야바 +사이비 왕 한 명 있죠. 총독 있죠. 로마황제 있죠. 도저히 뚫어낼 수 없는 어둠의 질서, 정사와 권세와 주관들이 셋째 하늘 넷째 하늘 다섯째 하늘을 구성할 때 우리 예수님은 무얼 하셨습니까? 사랑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서로 돌보고 서로 사랑하는 여기가 로마를 이기고 안나스와 가야바를 이기는 것이다, 서로 먹여주라, 서로 식탁에 앉혀서 먹어주고 서로 성만찬적 축제를 벌이고 서로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야 말로 로마제국을 이기는 항구적인 승리의 자리다, 그래서 십일조가 무서운 거예요. 십일조를 하면 우리 교우들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우리가 십일조를 하면 직장 실업수당 다 우리가 줄 수 있어요. 십일조를 하면 급진적인 사회가 오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하더라도 교회는 계속 헌금이 누적됩니다. 그 누적된 헌금을 가지고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잘못된 사람을 도와주면 그게 대안 대조 공동체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광야에서 앉아서 먹는 겁니다. 성만찬 공동체입니다. 성만찬 공동체의 핵심은 내 살과 피를 내 이웃에게 나누는 행위입니다. 살과 피를 나누는 행위가 꼭 추석 설 썩어빠진 잘못된 유교전통이 대한민국의 백화점과 공모해서 너무 악한 풍습을 이뤘습니다.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절 한 번 할 때마다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있으면 참습니다. 아무런 내용도 없는데 백화점에 속아서 선물 사고, 썩은 사과 썩은 배, 맛도 없는 위스키 사서 선물하고, 선물 잘못 했다고 욕 얻어 먹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열 몇 시간 가고, 미친 짓이죠. 그런데 교회가 거기서 옆사람에게 살과 피를 나눠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미친 듯이 내일 종말이 올 것 같이 사랑을 베푸는 결단은 없는데 전부 다 유교적 질서에 빠져서 다 허비합니다. 소는 누가 먹입니까? 도시는 누가 책임져요? 이 삭막한 도시를 교회가 책임지는 것, 그게 바로 로마제국 시대의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로마제국 시대 때 교회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로마의 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습니까? 퇴역군인들, 고리대금업자한테 땅을 잃고 농토를 빼앗기고 오는 사람들, 고아와 과부들, 미망인들이 교회로 몰려오니까 도시로 밀려나오는 이 모든 부랑아들을 교회는 전부 다 원천책임 진다며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너무 무섭습니다. 우리 교회에 노숙자가 안 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에 대책 없이 보따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렇게 명성이 나려면 굉장히 기도가 깊어야 하는데, 우리가 정상인만 교회에 오는 것은 로마제국 시대 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교회처럼 강력한 마그네틱한 사랑의 자석이 없기 때문에 녹슨 쇠붙이 같은 영혼들을 끌어들이지 못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굉장히 기도를 많이 하고 영성이 깊으면 녹슨 쇠붙이 같은 사람을 다 보내주셔서 우리에게 무한 책임을 지울 겁니다. 전도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하나님이 친히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우리 가향교회에 영적 역량에 맞게 사람을 충분히 보내주십니다. 전도가 저절로 됩니다.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됩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기도하면 허다한 무리가 그 산에 올라가잖아요. 영성의 고도가 올라가면 그 교회로 숱한 사람이 몰려들어요. 이게 성령의 힘이거든요. 18장 36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정권을 획득해서 역관계적인 용도을 통해서 벼슬아치를 대체하는 의미의 나라가 아니다, 내 나라는 온전히 사람을 살리는 활동 그 자체다, 그 활동들 적분이 바로 내 나라다, 내 나라는 고체가 아니다, 권력이 아니다, 내 나라는 권력을 비신화하여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왜 존재할까요? 교회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활동 자체 때문에 존재합니다. 교회는 기체처럼 존재하고 액체처럼 존재하고 사람을 살리는 활동 자체가 교회가 존재하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활동을 하는 그 순간에 교회는 존재하고 그 교회는 대안 대조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렇게 하기 위하여 오랏줄에 매였습니다. 그런 교회를 산파하기 위하여 오랏줄에 매여야 하고 포승줄에 매여야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 잔을 마셔야만 성령이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밀을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비밀을 알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많은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변절을 보고하지만 베드로를 세차게 단죄하는 맥락이 아니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라는 말로 오히려 베드로의 변절이 베드로에게 순사도적 권위를 이상한 방식으로 확증해준다는 느낌이지 책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이는 경험입니다.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포승줄과 오랏줄에 묶이는 것은 내가 원하는 곳까지 못 가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살지 못하는 것, 이게 바로 포승과 오랏줄에 매이는 겁니다. 이영애가 아무리 좋은 냉장고를 선전해도 못 사는 겁니다. 살 수 있는 돈이 있지만 진리 안에서 못 사는 겁니다. 엄청난 소비의 능력이 잇지만 소비능력대로 살지 않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은 주님께 순종하기 때문에 자기를 축소시키는 삶이 바로 오랏줄과 포승에 결박당하는 겁니다. 즉 내가 부자유한 자처럼 결박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도로 오늘 우리가 이 시간 실천해야 할 거죠. 그런 의미로 얼마나 많이 남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약간만 불편을 감수하면, 내가 2000cc 사람인데 1500cc로 살면 500cc가 남죠. 그러면 500cc만큼 사람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2000cc 인데 4000cc 차인 줄 알고 오르막 가다가 브레이크 파열로 죽는 사람도 많잖아요. 베드로가 주님을 안다고 했다면 아마 오랏줄과 포승줄에 매였겠죠. 그러나 베드로가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오랏줄과 포승줄은 없지만, 베드로는 네 복음서에 이름이 이런 식으로 영원히 올려졌죠. 그렇더라도 베드로는 이걸 만회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해와 달처럼 항구여일한 존재로 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직장상사 앞에서 내 모습이 다르고 학업자 앞에서 내 모습이 다르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최대한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는 대안 대조 공동체 주님이 다스리는 자애로운 공동체에 속했다는 강력한 소속감을 대한민국에 속했다는 소속감 보다 더 생생하게 느낀다면 대한민국은 가짜처럼 보일 것이고, 주님과 내가 느끼는 친밀감은 진짜처럼 느껴지겠죠. 저는 대한민국이 가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게 하나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가짜처럼 느껴지고 날림공사처럼 느껴지고 가건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현실에서 조금도 안정감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건물에서 살면서 안정감을 느껴요? 날림공사된 집에 살면서 자부심을 느껴요? 나는 못 느껴요. 그러면 주변에 그런 사람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이렇게 살려고 결단하면 주변에 전부 다 그런 사람만 보입니다, 이렇게 살려고 결단하지 않고 불가능하지, 김회권 목사 확실히 급진적인 데가 있어, 남들이 다 급진적이라고 그러더만, 이렇게 하면 아무도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안사는 사람이 좀비 도깨비처럼 보이고 진짜 내 주변에는 전부 다 이렇게 살아요. 훨씬 저보다 더 강력하게 도전하는 사람만 있지, 내 인생의 도상에는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만 있어요. 나에게 천국을 가리키는 확신을 주는 사람만 있지, 가짜는 없어요.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이건 불가능해, 어떻게 오랏줄과 포승줄에 매여? 이건 메타포겠지, 비유법, 저는 우리가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면 어마어마한 사랑의 여유가 있고 능력이 있고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 사랑의 결단에 대안 공동체가 창출되고 여기서 인간관계 네트워크와 우정이 창출되기 때문에 점점 천국에 대한 확신이 강해집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우습게 압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모든 것, 모든 소비주의를 우습게 압니다. 이 모든 것은 망할게 분명합니다. 허영이고 악입니다. 우리의 동정심을 다 앗아가는 악한 삶, 우리를 미친 듯이 바쁘게 만들고 텅 빈 껍데기로 만드는 체제, 이것을 당연하게 지워버립니다. 나에게는 뭡니까? 저는 신앙 때문에 온유할 수밖에 없고, 신앙 때문에 이웃 사랑할 시간이 넘치는 사람, 신앙 때문에 물질적인 나눔과 베풂에 용감무쌍한 사람, 그런 사람이 제 주변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용기가 생깁니다. 저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 제 주변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분들의 급진적인 삶 때문에 조금씩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때 한 가지 불편한 것, 포승줄과 오랏줄입니다. 포승줄과 오랏줄은 인격적인 온유함을 통해서 또는 겸손함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고 소비생활의 규모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고, 허례허식 더럽고 추악한 인간관계에 속하지 못했다고 소외감을 안 느끼는 결단에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유명한 사람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유명한 사람을 알려고 명함을 주고받을 게 아니라 나보다 항상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 엎드려 있는 강도 만나는 사람에게 내 명함을 줘야 합니다. 명함을 받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는 명함을 많이 받습니다만 다 쓰레기통에 버려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명함은 대개 도움이 안 됩니다. 실제로 명함을 주면서 연락을 해야 할 사람에게 명함을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예수님의 제자기 때문에 신자기 때문에 내 삶에 오랏줄과 포승줄 같은 불편함이 따르는 구나,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걸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 게 없다? 가짜입니다. 예수님 믿을 때 이런 정도의 고민과 불편함이 없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에서 맘이 몹시도 차가워져 가고, 스스로 불을 쬐야 할 만큼 내 마음이 차가워지고 냉각되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냉각된 제자도가 오늘 날 한국교회에 오순절 성령으로 불붙는 제자도, 띠 띠워짐을 당하여 내가 원하지 않는 곳까지도 감히 갈 수 있는 제자도, 그런 제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 가지 확실합니다. 지금 당장 급진적 결단을 하면 당장부터 신나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급진적 결단이 없는 모든 신앙생활은 권태고 질리고 생활의 불안입니다. 신앙생활이 진짜 재미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다시 한 번 주님의 뒤를 따라가다가 여종이 피우는 불에 약간 불 쬐어 가면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여종 곁불 정도만 하고 가지 마시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포승줄이 오면 기분이 엄청 좋아집니다. 결단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령 모른다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내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 때 모른다고 했던 제자를 결국 더 키워서 잡아먹습니다. 늙어서 띠 띠우고, 주님은 지금은 참아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을 참아주시면 더 크게 됐을 때 소득이 2만 불 때 참아주면 20만 불 때 잡아갑니다. 그때는 극적으로 포획되겠죠. 우리를 포획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우리를 오랏줄과 포승줄로 포획해주셔서 주님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라가도록 격려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같이 하잘 것 없는 죄인에게 주님의 제자도를 선물로 주시고 안나스의 법정까지 따라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안나스의 법정까지 따라갔지만 오랏줄과 포승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건 진짜입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하지만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게 진짜입니다. 주님 흔들리는 저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주셔서 예수님 나라가 대한민국 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게 도와주소서. 이 교회를 통하여 신앙을 배우고 교회에서 만난 형제자매들끼리 진짜 나라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땅과 하천과 산과 들을 무상으로 선물로 은혜로 주셨건만 저희는 탐욕으로 이 땅을 갈갈이 찢어서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사경으로 몰아넣고 비인간적인 삶의 장으로 몰아넣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오시면 저 굶주린 사람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서도 이 땅의 굶주린 사람들과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과 삶의 조건이 흐트러져서 살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이다지도 동정심이 모자랍니까? 저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두려움에 가득 찬 저희에게 결단 용기 대담무쌍함을 허락하여 주소서. 한번 밖에 없는 이 생애를 불멸의 가치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모든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지위와 우리 모든 출세와 성공을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 써 주십시오. 이 귀한 물질을 하나님 안팎의 백성 살리는 데 써 주십시오. 주님 우리 교회가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적극 사랑의 손길을 뻗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 믿고 쏟아지는 노숙자 있게 도와주시고 가난한 사람 많아지게 도와주소서. 장애우가 나타나게 하시고 사랑의 돌봄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교회로 쏟아져 오게 하여 주소서. 그 형제자매를 도울 만한 더 많은 사람들도 이곳에 오게 하셔서 대안대조대항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가능함을 확신시켜 주소서. 귀한 헌물을 바친 손길을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격려하심과 교통하심의 역사가 주님의 오랏줄과 포승줄을 받지 못하여 서성거리며 추운 마음으로 불만 쬐고 있는 베드로 같은 저희들을 그 여정위에 일터위에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태신자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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