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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고난

고난설교 : 요한복음 18장 1-11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진노의 잔!”

by 【고동엽】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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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1-11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진노의 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13-17장까지 말씀하신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세 계곡을 끼고 솟아 있는 예루살렘 시가지, 성전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부잣집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의 핵심시가지는 센트럴 밸리, 기드론 valley, 힌놈의 아들 밸리, 세 계곡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동쪽은 튼튼한 절벽요새고 남쪽 북쪽 서쪽은 계곡 세 가지로 둘러 싸여 있는데 비가 오면 콸콸 시내가 흘렀기 때문에 기드론 시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사람이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움푹 파인 계곡평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곡 평로는 밀농사까지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입니다. 기드론 시냇가로 내려왔다는 말은 시내를 빠져나온 거죠. 나와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습니다. 이 동산은 자주 제자들과 함께 모였던 작은 동굴이 있는 동산입니다. 석회형 동굴인데요.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보면 베드로가 잠들었던 동굴에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곳이 있습니다. 대충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갔던 기드온 도로의 자주 모이던 곳, 그곳으로 갔다는 것은 예수님이 기도하러 간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 굳이 말하면 목요일 밤 10시나 11시 정도겠죠. 17장의 대제사장 기도를 마치고 개인 기도를 하러 가시는데요. 제자들과 자주 모이던 곳으로 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이때 군대라는 말은 스페리안이라는 말인데 전문용어입니다. 스페리안은 10분의 1레기온이거든요. 로마군대 6천명이 레기온입니다. 1개 군단이 레기온인데 6천명의 보병 밑에 6천명의 10분의 1, 6백 명이 스페리안입니다. 중대병력을 끌고 가는데 아마도 이 중대병력이 다 오지 않고 일부만 왔을 겁니다. 18장 12절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천부장이 와 있는 겁니다. 중대장이 천부장이죠. 이미 재판도 하기 전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체포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 입장에서 보면 지금 유월절입니다. 20만 명 정도가 몰려왔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런 순례객들이 쇄도하는 예루살렘에서 만일에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공공연히, 또는 그렇게 칭송 받는 인물이 예루살렘 한 복판에 온다는 것은 소요가 일어나기 안성맞춤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예수가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자칭 메시아라는 말을 들려주었고, 빌라도는 예비검속을 한 것입니다. 유월절에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인 소요지도자를 잡아넣은 거죠. 6백명 정도의 천부장의 지도자가 임석하여, 천부장의 지도자가 군대를 데려왔으니까 2백명 정도가 왔을 수 있고 100명 정도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 로마군대만 온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도 왔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합쳐서 산헤드린이라고 말합니다. 산헤드린이라는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종교정치권력의 자치기구, 제한적 자치기구, 예루살렘 일대를 통치하고 성전의 모든 수익을 관리하는 제한된 자치기구, 산헤드린에서도 나름대로 종들을 파견했습니다. 청원경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원경찰 + 로마정규군이 온 겁니다. 유다가 앞서서 왔다는 말은 이들은 예수님을 본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양을 가지고는 자칭 메시야적인 선동지도자로 보이는 풍채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간접 증명할 수 있습니다. 대개 임꺽정 같은 경우는 표가 나거든요. 수염도 기르고 부리부리했기 때문에 임꺽정은 잡히자마자 누가 임꺽정인가 묻지 않거든요. 예수님은 나이가 좀 들어 보이시고 약간 평범한 외모였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목수처럼 보였지, 일을 꾸밀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4절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등과 횃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한밤중이라고 봐야 합니다. 한밤중이 되려면 겟세마네 기도가 생략됐거든요. 겟세마네 기도가 끝났을 때부터 만약 10시부터 11시간 기도했다면 밤 11시가 된 거고요. 어떤 때 보면 닭이 울기 전에, 이렇게 보면 새벽까지 기도했다고 볼 수 있고 예수님이 새벽 2-4시 사이에 체포됐다고 볼 수 있으니까 이 시점은 닭이 울기 두 번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한다는 말을 하셨으니까 닭이 운다는 말은 새벽이 왔다는 말입니다. 대개 정상적인 닭은 4시 정도에 울잖아요. 이 아이들이 강남 8학군 닭이 아니잖아요. 4시에 운다고 봐야 합니다. 4시 전에 세 번 부인했다, 닭이 두 번 운다는 말은 우연히 운 게 아니라 확실하게 아침을 깨우고 싶었다는 마음이 든 거거든요. 닭도 창조질서 안에서 자기역할이 있는 겁니다. 닭이 시끄럽게 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닭을 만드실 때 자명종이 없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시계를 만들기 전까지 울어라, 두 번 운다는 말은 실수가 아니라 진짜 새벽이다, 동창이 밝았다,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했으니까 굉장히 부인해야 한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밤 11시부터 새벽 4시 사이에 붙잡혔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겟세마네 기도에서 그 잔이 이 잔입니다. 그 잔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전반부에는 이 잔이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두렵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죽음을 아예 원천거부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올해 유월절에 죽는 것을 거부했다고 봐야 합니다. 언젠가 내가 십자가를 지겠지만, 그렇게 기도하다가 예수님께서 두려움이 극고점까지 임했다가 어느 순간에 이 잔을 받기로 결단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공포를 겟세마네기도 동산에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극단적인 슬픔과 극단적인 고독감과 두려움이 지나갔습니다. 지금 체포되고 있어도 담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말고의 오른 귀를 베었는데 왼손잡이일 가능성이 있죠. 오른손으로는 왼쪽 귀를 베죠. 베드로는 왼손잡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석회석 동굴에서 칼만 믿고 잠을 자고 있었어요. 돌을 던질만한 거리니까 50-60미터 떨어진 곳에 예수님이 땀을 흘리고 기도하는데 베드로가 잠을 잡니다. 예수님은 태산 같은 단속으로 뚜벅뚜벅 자기를 체포하려는 체포자들을 향해서 전진을 거듭하는데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가장 말단 집행자, 악의 말단 집행자, 생각 없이 성실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말단 집행자의 귀를 슥 벱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너무 다른 방식입니다. 오늘날 말고의 귀를 베는 정도로는 이 땅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 땅의 하늘을 가리고 있는 유사하늘, 유사 신적 존재들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요즘 <한강>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박경리의 토지와 한강과의 차이는 한강에서는 부활 모티브가 매우 약합니다. 박경리의 토지는 마지막에 인간이 착해집니다. 최서희도 착해지고 길상이도 착해지고 최 참판의 모든 토지가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바뀌어가면서 해방을 맞이합니다. 조춘보라는 악당에게 빼앗겼던 걸 다시 사들이고 땅을 찾습니다. 토지를 회복하는 모티브가 토지의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길상이와 최서희 아들이 이름이 윤국이와 한국입니다. 최윤국 최한국입니다. 나라를 윤택하게 한다, 나라를 되찾는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조정래의 <한강>은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부터 강진과 순천 여수 광주를 휩쓸었던, 그때부터 호남민중이 철두철미하게 악지배론적인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소설을 읽고 나면 하나님이 진짜 신인가? 철통같은 악의 카르텔, 견고한 악의 조직, 이 소설의 전반부에는 친일파가 어떻게 반공주의자로 바뀌고 반공주의자가 어떻게 유신주의자로 바뀌고 중장으로 스며들고 다 나옵니다. 전부 다 호남일대입니다. 5권에 보면 전태일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진홍 목사도 나오고 실명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제가 아침에 읽었던 것이 전태일이 분신하는 과정을 읽다가 왔습니다. 우리가 이 역사, 우리 교우들 기도를 보면 악 지배론적 사고에 주눅이 들어서 도저히 이 역사가 좋아질 가능성이 없는 희망이 없어 보이고 묵시론적 슬픔이 있습니다. 제 설교 안에도 가끔 있고, 빌라도와 안나스와 가야바와 바리새인은 이런 겁니다. 지식과 돈과 종교와 폭력과 사각 동맹을 맺은 겁니다. 이 세상에는 폭력적 군사력을 상징하는 로마, 폭력 군사력은 정치의 핵심입니다. 정치는 폭력과 군사력으로 합니다. 그것을 정당화하는 종교권력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 대제사장의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신적질서의 일부라고 가르치는 바리새인적 지식인의 중간관리들의 지적 이념적 관리, 이들이 단결하면 세상은 숨질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은 대학교수진의 한 50%가 진짜 419 변절세대, 유신공화주의자들 세대의 자녀들입니다. TK판검사 국세청 군인은 진짜 거의 TK라고 봐야 합니다. 이제는 국정원에 호남인재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호남인이 들어가면 정보누수가 일어납니다. 지난번에 장진수 6급 공무원이 국무총리조정실에서 내부고발자가 돼서 이제 호남인맥들은,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은 전부 경북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지역감정이 해소되지, 호남이 텅텅 비어 베트남 사람 캄보디아 사람이 가서 살고, 모든 전라도 사람들이 부산 경북으로 이민을 가고, 새누리당은 새정치민주연합과 합당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당 안에서 해야지, 지금 이런 지역구도라면 TK세대들이 영구적으로 정권이 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갑자기 인구가 늘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는 우리 대한민국은 악지배론적인 허무주의가 이제 젊은이들 가슴속에 지식인들 가슴속에 들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 안나스 가야바 대제사장 빌라도 이런 정도의 정치적 동맹은 사실상 이 세상에서 신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여전히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굉장히 진지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혈혈단신 비무장입니다. 그 비무장인 예수님을 잡으러 무장병력이 약 200명까지 왔습니다. 사병들 청원경찰을 데리고, 이들은 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도발적인 언어를 쓰지도 않았고 로마제국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성전체제를 훼방하지도 않았고 바리새인체제를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갈릴리 농민들에게 왕적인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예수님의 죄는 왕적 영향력을 행사한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안질서와 대항공동체를 잉태할 수 있는 상상력에 불을 지핀 것, 이것이 예수님이 위험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위험한 인물이 되지 못한 이유는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데 아직까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공안당국이 우리를 보지 않는 이유도 별로 볼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갈릴리 일대를 풍진을 일으키면서 5천 명씩 자리에 앉혀서 식사를 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코뮨입니다. 남자 5천명을 그렇게 순하게 만들고 떡을 나누어주고 고기를 나누어주며 식사를 시키는 것은 어느 나라든 무서운 사람입니다.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한테는, 남자 5천 명을 데리고 광야에서 밥을 나눠주면서 사흘 동안 질서정연하게 휴지 정리하면서 집으로 가게 만듭니다. 이건 어떤 나라에서든 그냥 놔두면 안 됩니다. 현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남자 5천명이 광야 코뮨 집회를 만들어서 질서정연하게 평화를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을 터트리면서 감동을 일으킨다, 이게 죄죠? 예수님의 죄는 감동을 일으킨 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심은 죄, 로마제국 안나스 가야바 체제와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꿈을 꾸게 만든 죄,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에 자본금 3천만 원만 있으면 미싱 5대, 재봉사 몇 명, 주5일 근무,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멋진 청계천 피복노조대 공장장이 나옵니다. 이 3천만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대통령 각하, 저는 성북구 상도동 250-2에 사는 스물두살 청년입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도록 설득해주십시오, 14시간씩 18살짜리 소녀들이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노무사를 찾아갑니다. 근로감독관들을 찾아가니까 이놈이 미쳤나? 빨갱이? 근로감독관들이 이 사람을 청계천의 위험분자라고 말합니다. 16살 18살 소녀들이 오빠라고 따릅니다. 전태일은 청계천 피복여공들한테는 메시아적인 오빠였습니다. 그가 바보회를 결성하고 돈을 냈습니다. 그때 이미 전태일이 10만원의 빚을 졌습니다. 그때 전태일 한 달 월급이 2만5천원 재단사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것은 빌라도 즉 폭력적 정치권력의 소유자, 안나스와 가야바 그런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평화를 심어주면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거짓말하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이런 대제사장과 빌라도와 안나스 가야바 이중적 체제, 양분체제를 견딜만한 체제이며 다른 질서는 없다고 가르치는 수구적이고 현상유지적인 지식인들 바리새인들, 이들이 예수님의 대적자입니다. 오늘날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외에 다른 질서를 꿈꾸는 것을 체포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대적자가 됩니다. 제가 어제 서울시 장학청 숭실대 EBS 세 군대에서 주최하는 <10대를 위한 고전콘서트>라는 강의를 했습니다. 숭실대 교수 두 명 중에서 첫 주자로 강의를 했는데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중3부터 고2까지 600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제 강의를 두 시간동안 들었습니다. 역사공부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유익할까요? 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제가 답변했습니다. 역사공부를 하면 역사는 포괄적으로 도덕담론이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고 뇌물을 받는 자가 패가망신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다, 신문에는 역사라는 긴 호흡을 가진 정의감이 드러나지 않지만 역사에는 나타난다, 진시황이 15년간 다스리던 진나라 초기에는 역사의식을 알 수 없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역사의식을 배운다, 역사의식은 도덕담론, 큰 실수, 패가망신을 초래하는 역사에 오류를 남기는 것을 막는 게 역사공부다, 역사공부를 하면 작은 실수를 한다, 641을 타야 하는데 461을 타고 숭실대 안가고 여의도까지 가서 택시타고 오는 게 내가 자주 하는 실수다, 분명히 641을 타는데 오네 하고 타는데 숭실대가 안 나와요, 보니까 여의도에요, 이런 실수는 역사를 아무리 공부해도 안 된다, 그러나 패가망신,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실수는 대담하게, 역사 안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준드라마, 준십자가와 부활드라마가 역사라는 넓은 곳에서는 보인다, 거대담론에서는 보이는데 신문을 읽어서는 안 보인다, 제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습니다. 숭실대 아이들한테 엄청 냉대받던 그 자리에서 놀랐습니다. 9월 13일에 한 번 더 합니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면서 KTV 방송에 나갑니다. EBS에도 나갑니다. TV는 처음 나가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면서 역사공부는 무엇이냐? 운명론을 극복하는 것이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한 마디로 역사는 운명론에 대한 대항론이고 우리 민족이 깨어서 움직이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긍정적 확신을 심어주는 게 역사라고 마지막 결론지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그런 책이거든요. 왜 좌파 교과서냐? 5장 6장에 보면 상당히 마르크스적 진영이 나옵니다. 민중이 깨어서 일어나면 새 역사가 반드시 있죠. 모든 운동권 책에 보면 <역사란 무엇인가>가 있죠. <변호인> 영화에도 보면 이 책이 나쁜 책입니다. 영국대사관에서 이 책은 좋은 책입니다, 그 책이 좌파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운명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역사공부이고, 긴 역사적인 호흡을 봐야만 진보를 믿을 수 있고, 진보를 믿는 사람만이 역사에 투신할 수 있다는 게 책의 핵심입니다. 그 책이 좌파가 맞고 운동권들을 격동하는 거죠. 그게 운동권들의 정서죠. 우리가 만일에 체포하려고 오랏줄을 가지고 오는 빌라도와 바리새인과 성전대제사장의 하속들의 아귀로 빠져들어갈 용기가 없다면 악을 이길 수 없죠. 악의 치명적 무기는 죽음이거든요. 엉터리재판입니다. 엉터리 재판으로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 불의 치명적 불법의 피해자가 됨으로써 치명적인 악의 무기를 초토화시키겠다는 게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재판의 아귀 속으로 들어가고 레기온의 10분의 1정도 되는 스페라엔이라는 로마의 군대가 주는 오랏줄을 받아들이는 사명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악을 무섭게 합니다. 악을 무섭게 다그치는 것이 시퍼런 선이거든요. 절대적인 선, 착한 왕, 악인이 두 번이나 굽질러 쓰러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용기가 장풍을 발사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한 번 걷자마자 바람이 쓱 나와서 중국 무협지처럼, 어쨌든 군인이 쓰러졌다는 건 장풍은 아니지만 신적인 힘이 있다는 거죠. 내가 그다, '내가 그니라' 에고 에이미 하니까 '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로마의 무장폭력군인들이 체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 있게 나오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조선시대에 전봉준을 심문하던 사초가 있습니다. 5급 검찰공무원 조사가 있는데 거기서 전봉준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억울하다, 역적이라는 오명을 듣고 죽는 이 자리가, 그 검찰공무원이 말합니다. 선생님 누가 조선천지에서 선생님을 역적이라고 합니까? 선생님을 아무도 그렇게 역적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전봉준을 보냅니다. 우리는 전봉준을 참수하고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준하 두개골을 망치로 때려죽이고 김구를 쏴 죽이고 김규식을 쏴 죽이고 여운형을 쏴죽이고, 모든 의인들, 아벨의 피로부터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성전제단에서 죽여버린 이런 피가 우리 세대에 일괄정산하기 직전까지 왔다는 것, 예수님이 보신 그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의식은 창세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의인 아벨의 피부터 최근에 일어난 제사장 사가랴의 피까지, 의인들의 땅속에 자리잡아서 하나님 보좌에 직속하는 것이 역사라는 거죠. 예수님은 창세기부터 역대하까지 꿰뚫고 있는 겁니다. 사가랴 피가 역대하거든요. 히브리인들의 구약 마지막은 역대하입니다. 역대하까지 구약을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 12절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선지자들이 핍박받은 역사, 선지자들이 자기 고향에서 환대받지 못한 역사, 이걸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식이 출중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부터 제사장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담론을 아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아시고 그 오랏줄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고 할 수 있죠.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잔을, 여기는 해석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2주 내내 이 잔이 뭔가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여러분은 제가 오늘 하는 설교를 듣고도 설득이 안 될 겁니다. 안 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한계이고 저의 한계이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감수성의 한계라고 봐야 합니다. 유다의 배신과 빌라도의 폭정과 안나스와 가야바의 무시무시한 영적 무감동과 잔혹함, 이런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분명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은 아버지가 주신 잔이라고 했을까? 이 모든 인간들의 행동들을 마치 종속변수인 것처럼 말하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빌라도의 폭력, 안나스와 가야바의 음모, 바리새인의 시기와 질투심, 유다의 배신 몰이해,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셨는데 그것들을 다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잔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잔은 진노의 잔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진노의 잔을 가지고 열국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맹렬하게 규탄하는 그 현장에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흉악무도한 죄인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루저들, 이스라엘 국민성 정체성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자처럼 살아버리는 사람들이 요단강에 침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요단강에 침수할 때 세례를 기어코 받았습니다. 받으면서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 나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하라면서 세례요한을 설득합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려고 세례 받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세례가 이스라엘 백성을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내기 위한 통과의례였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죄를 잊게 만들고 새 이스라엘의 시작을 알리는 죽음의 잔, 세례의 잔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옛 이스라엘의 잔을 예수님이 다 지고 갑니다.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광야세대의 불순종을 다 짊어지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자기 당대 세대의 불순종 죄를 뒤집어쓰고 못 들어가는 겁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대속적으로 못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 침수하는 숱한 죄인들의 동류가 됨으로 그들의 죄를 뒤집어쓰기 위하여 요단강에 빠져듦으로 세상 죄,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살게 만들었던 이 악한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만 새로운 언약백성을 창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잔이라고 했습니다. 이 잔은 식사를 가리키는 잔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잔에는 진노의 잔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식사에 초대하는 새 언약 초청의 잔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피부터 모든 일괄 정산된 죄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잔은 진노의 잔임과 동시에 언약식사 공동체로 새 언약의 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이 잔을 받아 마셔야 옛날 이스라엘은 죽고 새 이스라엘이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을 있게 만들었습니다. 진노의 잔, 빌라도의 폭정 앞에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죽음이 완성되자마자 부활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죄를 용서받은 새 백성이 돼서 3천명 5천명이 믿고 120문도가 성령을 받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원래 사명, 열방에게 빛이 되고 열방에게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사명, 열방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 예수님이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서 새 언약의 공동체를 창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히브리서와 바울의 모든 서신이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다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 깨달을 것은 예수님의 죽음, 전태일의 죽음을 메시아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민중신학자가 왜 그렇게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전태일의 죽음, 전봉준 최제우 같은 동학지도자의 죽음이 before와 AC를 나누었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세계 신학자도 많이 주목합니다. 전태일의 일기장에 보면 자기가 죽어서라도 청계천 피복노조의 근로기준법이 지켜지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전태일이 죽자마자 조영래라는 서울대 법대 학생이 큰 충격을 받고 민청학련 사건에 불을 지핍니다. 민청학련사건은 유신독재에 결정타를 가하는 87년에 종료된 민주화시위이고 조영래의 전태일 알리기입니다. 전태일 죽음이 서울법대생 물리대생 고대생의 심장을 강타했고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청세대가 등장했습니다. 결국 전태일의 죽음은 박정희를 겨누었습니다. 김재규의 마지막 항변이 유투브에 돌아다닙니다. 그걸 보면 부마항쟁에 대해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김재규가 언제 대통령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느냐? 부산 마산에 가 보니, 시민이 시위 데모하는 사람에게 밥을 해다 나르면서 환영을 합니다. 데모대와 시민이 하나가 되는 것을 발견하고 끝났다고 생각하고 빨리 하야 하셔야 한다고 설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고 다만 한 인간의 죽음은 예수님 같은 죽음이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효력을 깨닫게 하려면 기억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복제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예수의 영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복음서를 믿는 것에 그치면 안 되고, 누군가가 빌라도의 오랏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서 빌라도가 휘두른 죽음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죽음 자체를 무효화시키고 죽음자체를 비신화화시키고 죽음자체를 조롱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악의 심장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고 악의 졸개들을 쓰러뜨리게 만드는 보무 단아한 항쟁이 필요하다, 이런 거죠. 예수님의 걸음걸이, 내가 그다, 이렇게 말하는 그 걸음걸이가 로마의 군병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앞으로 복음의 행로가 로마까지 진격할 수 있는 힘을 저는 여기서 보았다고 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시대가 하나님 진노를 촉발할 수 있는 우리 누군가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 때문에 심판 받아야 할 자인 것처럼 자기가 그 심판을 받을 마음으로 선한 삶을 살면, 그 선한 영향력이 위협세력이 될 만큼 선한 사람이 되고 악은 부활적으로 이 선한 영향력,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오천 명의 남자를 움직이는 선한 리더십을 반드시 침탈해오고 공격해올 것입니다. 이 오천 명의 남자를 감동시키는 이 선한 조직력, 역사를 움직일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두려운 느낌을 갖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복제인간이라는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오천 명의 남자를 질서정연하게 먹여서 집에 돌려보내는 엄청난 조직의 힘, 무시무시한 민중의 힘, 이런 것들을 가진 사람이 희생을 할 때 십자가 부활의 드라마가 일어난다는 거죠. 우리가 안 되고 우리끼리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우리 안에 선한공동체 대안공동체 대조공동체를 착상할 만한 시범을 보이지 않고 악한 세력을 공격하고 비난만 해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몸이 체포된 게 아닙니다. 오천 명의 남자가 사이좋게 밥을 먹는 꿈이 체포된 것이고 빚 있는 사람에게 빚을 탕감해주는 착한 마음이 체포된 것이고, 종교의 바깥에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대 초청하여 한 식탁에서 밥을 먹게 만드는 무진장한 하나님의 자비를 체포하는 겁니다. 이렇게 체포당할 정도로 충분히 대안적 공동체를 일구는 능력을 배양하고, 민중들의 조직의 힘을 배양할 때 체포당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체포되게 하려면 엄청나게 착한 일을 해서 정말 선한 행위를 가지고 사회에 대안위협적 세력이 되면 체포됩니다. 그때 제가 피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드라마가 안 되고 엉뚱하게 되죠. 그럼 김회권 당신은 뭐했냐? 사실 그렇게 한 겁니다. 삼십 몇 년 했는데 사람이 안 모이는 것일 뿐이지 안 한 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바쳤습니다. 시간과 돈, 제 모든 활동은 5천명의 무리를 광야에 앉혀놓고 대안적 질서를 꿈꾸는데 바치는 겁니다. 가만히 보면 제 활동은 그겁니다. 그런데 5천 명이 안나오고 50명밖에 안 나오고, 세력이 약한 것이지, 제가 쓰는 모든 글, 제가 쓰는 모든 돈 씀씀이 시간씀씀이 정확하게 대안공동체 대안교회를 건설하여 세상 사람에게 이렇게 숨 막히는 빌라도와 안나스 가야바와 거짓종교와 거짓지식인들의 사각 동맹 안에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선언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5천 명씩 광야에 앉아서도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고, 그 호전적인 남자 오천 명을 어린 양처럼 순하게 만드는 세상, 이것이 교회의 힘이고 기독교 힘이고 성령의 능력이고 이게 복제예수 제자들의 삶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건 제가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해야겠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주신 진노의 잔, 너무 착하게 산 사람들이 진노의 잔입니다. 이 세대의 죄에 참여하지 않고 그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가난, 그게 진노의 잔입니다. 이 시대의 중심죄악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고독과 소외 따돌림, 그게 진노의 잔입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느끼고 요단강가에 빠지는 게 진노의 잔입니다. 내가 너무 의롭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사각 동맹에 위협적인 존재가 돼서 체포당하는 것이 진노의 잔입니다. 그런데 이 진노의 잔을 마시려면 충분히 절댓값을 가진 선한세력이 돼야 합니다. 충분히 절댓값을 가진 선한 세력이 아니면 진노의 잔도 아니고 이상한 물건 칵테일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되기 쉽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중심죄악을 내 죄악으로 생각하면서 그 죄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가난과 궁핍과 소외와 비주류 따돌림, 너무 착하기 때문에 악한 자들에게 위협세력이 돼서 박해를 초래할 정도로 눈부시게 착한 삶, 이게 바로 진노의 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노의 잔을 마시면 죽겠지만 내 죽음 너머에 새로운 언약공동체가 탄생하고 세계를 향해서 진격하는 멋진 대안공동체의 새싹들이 자라는 겁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마셨던 진노의 잔, 그 잔은 너무 의롭기 때문에 받은 진노의 잔이고 너무 착했기 때문에 눈부시게 아름다웠기 때문에 추한 자들 악한 자들이 강요한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잔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잔이라 믿고 받아마셨고 마침내 부활하여서 새 언약의 잔으로 그 잔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시대의 중심죄악, 치졸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인맥을 만들고 세력을 만들고 비겁하게 살아가는 것을 부추기는 악한 자들의 동류에 끼지 못해서 소외감 느끼는 세상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천 명의 남자를 광야에 불러놓고 순한 양처럼 부르시고 통치했던 주님, 우리도 악한 세력이 위협을 느낄 만큼 선한 세력이 되게 하시고 오천 명의 무리가 되게 하시고 눈부시게 착한 의인들의 빛나는 삶이 일어나게 하여 주소서. 악인들이 우리를 두려워할 만큼 선인이 되게 하시고, 충분히 선해지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충분히 부요한 사회가 됐지만 남과 베풀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풍요로 세상에서도 나눔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키지 않고 더 탐욕적으로 더 많이 벌어야 한다고 다그치는 빌라도의 악한 압제자들의 통치를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이 땅의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풀 죽은 물 먹은 한지처럼 흐느적거리게 됐고 이 땅의 지식인들은 다 비겁해져버렸습니까? 이 땅의 교회는 언제 성령 앞에 격동되어 진리의 발걸음을 뗄 수 있습니까? 주님 우리 마음이 젖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가 꺾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이 자리에 동행하여서 우리 마음에 악지배론적 사고를 이기고, 예수님이 우리 왕이신 것을 백주대낮에 확신하게 도와주소서. 돈을 제대로 씀으로 주님을 경배하게 하시고 재산과 시간을 제대로 쓰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너무나 부요하고 가진 것이 많은 자들입니다. 감사가 넘치게 하시고 추석에 고향을 떠난 서울시민들이 도시민들이 이웃사촌의 정을 나누는 축제가 되게 하시고, 흩어졌던 가족들이 하나 되는 아름다운 축제의 장이 되게 하시고 자비와 사랑의 무진장한 전시장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 귀한 헌물을 바친 것 감사합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바친 손길을 축복하여 주소서. 직장생활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을 지켜주시고 인격적 자존심과 신앙적 순결성을 훼손하지 않을 만큼 그 직장에서 그들을 붙들어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일터를 놓고 기도합니다. 아들들에게 주님의 포도원을 보여주셔서 길을 열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과 격려하심의 역사가 빌라도와 안나스와 가야바와 바리새인들의 천하 속에서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아 기도하는 모든 성도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신앙을 점점 잃어가는 이 땅의 청년들과 오늘 예배드린 하나님의 백성들 천국의 백성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희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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