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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4:1-10)

by 【고동엽】 2022. 2. 12.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4:1-10)

 

이 세상에는 세 가지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익 공동체'입니다.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사 관계입니다. 노(勞)는 돈을 많이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회사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노동자들이 노사 협상을 벌이면서 극렬하게 투쟁하는 이유도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사(使)는 돈을 가능하면 적게 주려고 합니다. 그래야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은 많이 시키고 돈은 적게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노사 관계는 언제나 긴장되고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이익 공동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정신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뭉쳐진 관계를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가정입니다. 가정은 이익 공동체가 아닙니다. 가정은 돈을 목적으로 해서 가꾸고 운영하고 일하고 봉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 주었다고 보수를 받고 품삯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낳아 20년 동안 기르느라고 투자하고 희생하고 밤잠을 설치고 정력을 낭비했으니 너는 그것을 계산해서 갚아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데 수고 비를 받지는 않습니다. 자식은 무조건 낳아서 기르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정신 공동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은 정신 공동체의 차원을 넘어선 영적 공동체입니다. 영적 공동체는 유익을 찾아 따라다녀서는 안 됩니다. 이 교회를 가야 저 교회보다 빨리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내게 유익하겠다고 옮겨 다니는 것은 이익 공동체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부처를 믿는 것이 더 유리하겠다 해서 옮기는 것도 이익 공동체입니다.
적어도 신앙에는 이런 이익 지향적인 의도는 없어야 합니다. 만일 신앙이 그렇게 움직여진다면 그 신앙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할/ 그런데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갔습니다. 우상이 떡도 주고 물도 주고 양털도 주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보다 더 유리하고 이익이 많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배신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한탄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구원'을 의미하는데 '여호수아' '예수'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선지자 아모스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북쪽 이스라엘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남쪽 유다에는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번성하며 부유할 때 약 40년 동안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그 시대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가 치리 하던 시대로 이스라엘의 황금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풍요를 누렸지만 내적으로는 신앙의 부패로 죄악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던 때였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음을 탄식하면서 그의 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 분의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에, 지금 그들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음을 탄식하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1절과 6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을, 범죄의 원인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그들이 등 따습고 배부르니까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잘 살게 되니까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해졌고, 더욱 번성하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결국엔 망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할/ ◀제목 소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호세아서의 중심 메시지로 단순한 지적 개념을 말하지 않고 지정의(知情意)의 인격과 애정과 행위가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과 사랑과 헌신의 지정의의 전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적인 교통과 헌신을 말합니다. 삼상2: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말씀하신 대로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지만 그 하나님께 사랑과 영적인 교통과 헌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1: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라고 탄식했으며,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인 빌3: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사도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서신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벧후3:18절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할/
그렇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었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었고, 범죄로 인하여 멸망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떠난 상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잘 살게 되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좇아간 많은 실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태평시대를 누릴 때 그들은 범죄 하게 되었고 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고 이 징계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잊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다시금 평안의 때를 맛보게 한다는 구속 역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들을 찾아보게 됩니다. 특히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번성하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고 오히려 더욱 더 범죄 하므로 망하게 되는 역사의 교훈 앞에서 오늘 우리들의 신앙 생활을 다시 한 번 본문을 통하여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멘!/

 

①호세아의 외침이 무엇인가?(1-2,6)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누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그 땅 거민들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탄식이십니다. 말씀 앞에 서서 변론해 보자는 호세아의 외침은 무엇인가? 신앙에는 세 가지 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속성이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할/
㉠진실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관계 맺는 생활이기 때문에 진실이 꼭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 관계가 성립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 진실이 없습니다.
진실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것을 인정하면 자기에게 손해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하는 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진실이 없다보니 그들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 2절에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저주와 사위' 여기서 저주는 욕입니다. 그리고 사위는 사기입니다. '투절'은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힘을 사용해서 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살인과 간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사나운지(강포) 피가 피를 뒤대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 보복적인 살인이 일어납니다. 이쪽에서 저쪽을 죽이면 저쪽에서도 이쪽을 죽입니다. 그래서 결국 계속 피를 흘리게 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가 얼마나 삭막하고 거칠다는 말입니까? 이 백성들이 복을 받겠습니까? 진실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이 없는 곳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한마디 거짓말을 해서 평생 원했던 이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연설했습니다.
인생을 단기적으로 보면 요령이나 거짓으로 승리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을 좀 길게 보고 평생을 내다보면 결코 거짓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거짓은 주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진실이 없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할/
㉡인애가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인애는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바로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는 그 인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저주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과 강포와 피 흘림뿐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 그 백성이 무슨 복을 받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인애가 없으면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인애'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헤쎄드'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그냥 '사랑'으로 번역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책임지는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할/
이 단어가 사용되는 말이 여호수아 2장에서 나옵니다. 여리고를 정탐하던 두 이스라엘 사람이 여리고 사람들에게 발각이 됩니다. 그때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이 두 사람을 숨겨주고 수색하는 자들을 따돌립니다.
그리고 나서 이 두 사람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한 것처럼 당신들도 나와 우리의 가족을 선대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때 '선대'라는 말이 바로 이 '인애'라는 단어입니다. 나에게 손해가 돌아오는 줄 알고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 바로 '인애'입니다. /할/
하나님께서 교회를 평가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건물이 얼마나 웅장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열심히 모이고 있는가?'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서로에게 정직하며 책임지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인지 그것을 보십니다.
오늘 교회는 어떻습니까? 바로 이 부분에 문제가 있습니다.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기에 능력이 나오지 못하고, 축복이 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바로 진실된 성도가 되고, 인애를 베푸는 성도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할/
㉢호세아 선지자는 1절과 6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한 신학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직접 하나님을 겪어서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성을 가지고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하여 아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나는 그 사람을 알지만 그 사람은 나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설사 서로 안다고 하더라도 친하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이름은 알고 있고 얼굴은 알지만 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아십니다. 그런데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서로 깊이 사귀어 가는 것입니다. 아마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만나면 상당히 다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누구시더라'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을 보자 말자 바로 알아보고 기뻐하면서 '주여 매일 주님과 동행을 했는데 이제 눈으로 보니까 너무나도 좋습니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부귀와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알아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가까이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버리고 객관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존귀해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내 영혼이 영화로워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많아야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내면까지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은 모두 죄가 심어놓은 자존심입니다. 남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치장하고, 남보다 뒤떨어지기 때문에 더 가지려고 하는 자존심입니다. 이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잃게 만들고 더 거짓되게 만들며 더 복수심에 불타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참된 우리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도 나를 가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임할 때, 우리 마음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 우리에게 임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우리는 그 말씀만큼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가지는 거룩함처럼 거룩하게 되며, 그 말씀이 가지는 정결함을 입게 되고, 그 말씀처럼 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게 된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힘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 놀라운 특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알아봐야 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을 듣고 전하며 또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면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먹고살아야 합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 존 전이 우리의 위치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그곳이 우리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6절 끝에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기억력이 너무나 나빠서 율법을 잊어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들을 하나님께 잡아매는 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끈을 슬그머니 놓아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제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구속되기 싫어서 스스로 해방을 선언하고 프리랜서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멸망의 길임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황이 바로 호세아를 통하여 '너희에게 지식이 없어 망한다'는 그 시대상황과 똑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4천년 전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오늘 우리나라의 영적, 국가적 상황이 똑 같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던 4천년 전 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광개토대왕과 같은 분입니다. 굉장히 영토를 확장하고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7절의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번성하였는데 번성할수록 더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번성할수록 교만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길로 가고, 망하는 길로 갑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사람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종교는 부폐하고, 정치는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호6:1). ▶그런데 여호와께로 돌아가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소망이 있고 회복이 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고, 모은 국민들이 잘 사는 평화로운 나라가 될 터인데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렇게 된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이 망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돕는 사람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우리도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금의 상황을 바르게 진단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배시간은 우리 모두의 자신을 진단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청진기로 나를 진단하는 시간입니다. 내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 시간입니다. 그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내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왜? 왜?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너희가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너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합니다. 해결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호6: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멘!/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등 이런 것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머리 속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행동이 따르는 것입니다.
중매결혼을 할 때 중간에서 소개하는 분이 어느 학교 나왔고, 지금은 무엇을 하고, 나이는 몇이고, 키는 어느 정도고 라고 소개한다고 해서 덜렁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결혼을 했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만나봐야지요. 소개를 받고 신상명세서를 받았지만 만나야 결정을 하잖아요. 소개하는 사람이 자리를 마련해서 만나게 해주면 데이트도 하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 갑니다. 그래서 좋으면 결혼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체험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내 것을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⑴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압니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그 말씀이 레마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이런 체험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계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할/
⑵삶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허버트 웰즈'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한 대주교가 시간을 정하고 하루에 세 번씩 대 성전에 들어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하고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큰소리로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냐, 내가 여기 있느니라. 무엇을 원하느냐?' 그 음성에 대주교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정말로 내 기도를 듣고 계셨구나!' 그는 놀라서 신음하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설은 현대 교회에 주는 메시지가 강합니다. '너희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기도하느냐?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형식화되어 있는 것을 꼬집고 있으며, 생명력 없는 기도를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현대교회를, 교인들을 깨우는 소설입니다. /할/
우리는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당신을 나타낼까요?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계시하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나 성령의 감동으로 깨우쳐 주지 않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둘째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내십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경험하기를 사모하며 날마다 기도하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십니다. /할/
다윗이 시18:1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도 사울 왕이 '이런 꼬맹이가 어떻게 골리앗과 싸우겠느냐? 애야 너는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어라'고 할 때 '아닙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양을 잡아가는 곰을 찢고 사자를 쫓아내어 양을 지켜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저 골리앗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큰 골리앗이 와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신앙 인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어느 수도사가 스승에게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갈망함으로 찾을 수 있느니라' 다음날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스승은 다음날도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며칠 후 수도사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갈망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았지만 저는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찾지 못했을까요?'
스승은 제자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강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제자의 머리를 잡고는 물 속으로 팍 쳐 넣었습니다. 제자는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도 머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제자가 지쳐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때 머리를 놓아주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내가 자네를 물 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서 그랬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봐. 그러면 하나님 반드시 만날 수 있어' /할/
㉤우리가 왜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까? 그 분 안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제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일가요? 아마 대통령이 아닐까요? 전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한 때 백악관에 귀빈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 누구든지 와서 잘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는 대통령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정치자금을 수억 원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나라를 위하여 할 말도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하루 만나려고 수억 원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통령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서의 주제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입니다. 우리는 대통령보다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할/
우리는 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할까요?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호6:1-2절에 보면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⑴'낫게 하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⑵'싸매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⑶'일으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⑷'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할/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써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할 가요? 낫게 하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싸매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으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②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결과는 무엇인가?
⑴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은 그들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황폐해지고, 그들이 많은 노력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인 이스라엘 백성이 머무는 그 곳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곳에 거함으로 더욱 더 은혜가 있고 복된 아름다운 땅이 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범죄로 그 땅이 폐허로 변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씀을 떠난 한 인생의 삶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삿16:21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삼손은 사사 중에 위대한 사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위대한 사사였을 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떠났을 때 그의 삶은 짐승보다 못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의 결말을 우리들에게 분명히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삼상2:12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런데 삼상4:11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사는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수입도, 소득도 없게 됩니다. 그것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잘 한다고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못한다고 해서 망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하시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느냐 안 도우시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진실과 인애가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형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는데 고통을 받기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물고기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철저하게 거두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공중의 새나 들짐승들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그 땅이 철저하게 초토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나 들짐승들이 숨는 곳이 있어야 사람들도 피할 곳이 있을 텐데 숲이 없어지면 사람은 피할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할/
⑵주의 종들과 다투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제사장인들 존중하고 그 지시인들 따랐겠습니까? 그러니 그 나라가 얼마나 혼돈했겠습니까?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어른들이 무시되고 존경받지 못하면 그 나라는 혼란스럽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는 백성들이 질서인들 지킬 것이며 도리인들 다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살아가는 집단 속에는 '권위 공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집에는 권위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집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날 때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들으시고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시면 뚝 그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집안이 질서가 있는 집안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권위 공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집안의 권위 공간은 사랑방입니다. 사랑방에서 기침 소리가 났는데도 여전히 싸움 소리가 그치지 않으면 그 집안은 다된 집안입니다. 이미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린 집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많습니다. 다툼이 많고 원망이 많고 권위자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들딸들이 어머니 아버지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이제는 사랑방도 없어졌지만 권위도 사라졌습니다.
오늘의 권위는 돈에서 나옵니다. 돈 없는 아버지 어머니는 더 이상 권위 공간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 자체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는데 오늘은 돈이 없으면 더 이상 권위를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부모들은 자식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아갑니다. 권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하다 못 해 조그만 집문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허물어져 가는 권위를 그나마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손가락에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끼고 살았습니다. 큰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는 그 반지 저 주세요' 시어머니는 쾌히 승낙했습니다. 둘째 며느리가 또 말합니다. '그 반지 저를 주고 가세요' 또 쾌히 승낙했습니다.
이 며느리들이 아디아몬드 반지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공산주의의 권위는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이 시어머니의 권위는 반지에서 나왔습니다. 후에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까 그 반지는 가짜였습니다. 이 현대물을 먹고 자란 똑똑하고 야무진 며느리들이 그 반지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시어머니에게 잘했던 것입니다.
▶또 여기 '제사장과 다툰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은 바로 잡으려고 하면 거기에 불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툰다'는 말도 이주 중요한 히브리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고를 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반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사람들도 제사장이 충고하면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일단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받아들일 때 그들은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도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하고 하면서 대어 들면 그때에는 제사장과 다투는 자가 되며 제사장이 죄 용서를 위하여 기도를 해 주어야 요서가 될텐데 제사장과 싸우면 치료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할/
신약 시대에 이것을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깨닫게 회개하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성령을 훼방하면 고칠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겸손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그들은 안팎이 다 황폐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거칠 대로 거칠어져 있었고 땅도 그만큼 황폐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거칠어지고 황폐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상태를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집에 돈이 많고 생활이 편하다고 해도 마음에 기쁨이 없고 성격이 거칠어지고 있다면 이것은 무서운 경고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내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할/
⑶그 당시 선지자와 제사장의 잘못도 많았습니다(5,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무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거짓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불 신앙에 용기를 주고 더욱 더 자신 있게 하나님을 떠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5절에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고 했고, 8절에는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 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기능은 주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율법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여 그들이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깨우침으로 바른 방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차로 말하면 모두 가는 철로가 있는데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지금 그런 식으로 살면 결국 어디가 종착역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벡성들의 죄를 예방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설교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벙어리 개와 같았습니다. 개가 짖을 때는 짖어야 하는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자기들의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가져오는 제물과 십일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잘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속죄의 제사보다는 감사제나 서원제 같은 것을 많이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말 본문에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라고 했는데, 실제로 원문에는 '죄를 먹고'로 되어 있습니다. '죄를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으니까 의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속죄제사는 제사장이 먹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다 태워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들이 먹은 것은 감사제나 서원제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참된 회개 없는 이런 제사는 제사장 자신들이 그들의 죄를 먹는 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대신 책임져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존귀한 직분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항상 그 이상을 탐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는 직분 그 자체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 일을 통하여 부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해석자요 설교자였습니다. 얼마나 존귀한 직책입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할/
⑷그들의 징계는 무엇인가?(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⑸배부름도 없고, 대를 이을 자식들도 없게 되었습니다(10).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다'는 것은 그들이 노력 한만큼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손을 번성시키기 위하여 많은 행음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손이 많아진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구는 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⑹저는 오늘 7절을 한번 더 생각해 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무엇인가 잘될수록 그들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욕심대로 살았습니다. 잘되면 잘될수록 더 겸손하고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배가 부르니까 죄만 짓는다고 하면 그 부는 저주입니다. 부가 저주의 역할을 한다면 그 부가 무슨 축복입니까? 사람은 가난이 축복인 사람이 있고 부가 축복인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입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가난이 축복일 때가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넉넉함은 없어도 그 삶이 활기가 있습니다. 삶에 신선함도 있습니다. 그때는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살고 살아 있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들이 가난했을 때 뜨거운 신앙이 있었고 기도의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도 부해지게 되면 그 신선하고 생동감 있던 신앙들이 모두 느슨해집니다. 가난하다가 부해지면 더 감사하고 더 감격하고 더 은혜 생활할 것 같아도 그것이 아닙니다. 옛날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더 감사하고 더 영광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이 지점이 바로 인간의 한계가 느껴지고 인간의 본능이 나타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전10:12절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겸손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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