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Άλλα σε προετοιμασία

나는 육의 사람인가? 영의 사람인가? (롬 8:5-11)

by 【고동엽】 2022. 2. 12.

나는 육의 사람인가? 영의 사람인가? (롬 8:5-11)

 

 

배고픈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걸하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가짜중이 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걸이 아니고 시주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짜 중복을 입고 목탁을 두드리고 시주를 받아야 하는데 불경을 몰랐습니다.

그가 부잣집 대문간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가나다라, 가나다라, 가나다라' 주인여자가 시주하려고 쌀을 퍼 주려다 보니 가짜중입니다. 그래서 '주나 봐라, 주나 봐라, 주나 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가짜중이 말하기를 '가나 봐라, 가나 봐라, 가나 봐라'하는 것입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그런 꼴을 보고는 '잘해 봐라, 잘해 봐라, 잘해 봐라' 그러다 진짜 중이 왔습니다. 목탁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왠 만하면 주지 그래, 왠 만하면 주지 그래'라고 했답니다.

요즘 가짜가 얼마나 많습니까? 명품도 가짜가 많습니다. 참기름도 가짜가 많습니다. 심지어 돈도 가짜가 있습니다. 믿음도 가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육에 사는 자가 있고, 영에 사는 자가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을 보면, 육신이란 단어가 6번, 영이란 단어가 9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두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끊임없이 연구 되어온 과제입니다. 어느 철학,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인생이 무엇이냐?'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소위 '인간학'이라고 말합니다. /할/

▶이 인간학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⑴인간을 완전히 육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사상을 학자들은 '유물사관'이라고 합니다. 이 사상은 사람들에게 정신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정신의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만 육체에 매여 있는 하나의 기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학설입니다.

⑵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이 사상은 헬라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해 왔습니다. 불교사상이 이와 비슷합니다. 여기서는 육체와 정신, 몸과 영혼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이원론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봅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이원론적인 입장이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가치를 정신적인 가치에 비해 아주 낮추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인 것은 속되고, 더럽고, 추하다하여 입산수도를 하고 정죄하며 육체적인 욕망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욕망은 나쁜 것이요, 생식본능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이원론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신만이 본질이요, 육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통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것은 모아 놓으면 이상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⑶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학은 어떤 것입니까?

즉 신앙적인 인간학은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인간을 '정신이다, 물질이다'로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기독교의 인간학은 육과 영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고 합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육신도, 영혼도 종합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사도 바울이 이원론적 방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도 사도 바울이 인간을 이원론적 입장에서 혹은 헬라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참 생명, 진정한 생의 실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후 죄악이 들어와 인간이 타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인간과 타락되어진 인간을 놓고 볼 때는 둘로 보이기도 합니다. /할/

본문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①나는 육의 사람인가? 영의 사람인가? (5-6)

⑴'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우리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⑵'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우리는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서 우리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신론자들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무신론이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무신론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신론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적 무신론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름대로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무신론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유신론에 대해 나름대로 논리적 근거를 대면서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사상적 태도를 말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면 증명해 보라'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고, 조작된 개념일 뿐'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을 괴롭히고 공격합니다.

물론 우리는 저들과 맞서서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들을 사랑하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할/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면에서 무신론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천적으로는 부정하는 무신론입니다. 말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남에게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는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 즉 영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할 성도가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할/

사탄이 자기 수하의 예언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세상에 내려가 하나님이 죽었다고 믿도록 사람들을 설득시켜라'고 하자, 그가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 곧 바로 사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탄이 '도대체 어떻게 설득했기에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세상에 내려가 보니 사람들은 매일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죄짓는 일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삶으로 이미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고 인정하면서도 손과 발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도 분명히 무신론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의 생각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할/

이런 종류의 무신론자들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무신론자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무신론자인지 모르고 무신론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들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

⑶'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소속의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생각하며 산다고 합시다. 동상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이부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꿈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면 운명까지 달라집니다.

남편은 주일날 세상으로 가고 싶고, 아내는 교회를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은 지옥으로, 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소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좇아서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 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으로 자기의 육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할/

⑷여기 또한 '육신을 좇는 자'란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타락한 성품대로 사는 사람, 죄(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삶의 중심을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을 좇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고, 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갈5:19절 이하에서 육의 생각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이라고 했습니다. /할/

⑸여기 '영을 좇는 자'란 예수 믿고 중생한 자로써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갈5:22절 이하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 속에 산다고 했습니다. /할/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아멘!/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때의 일입니다. 그때 서부 캘리포니아의 여러 곳에서 엄청난 사금이 채취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에 동부에 있는 백인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서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길도 좋지 않았습니다. 또 자동차로 달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서 가족들을 태우고 말을 메어 달렸습니다. 몇 달을 가야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가야지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금을 캐어 벼락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 가운데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영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기대 속에 자기 가족들과 함께 마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다가 주일이 되면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개울가나 숲 속을 찾아가서 그곳에 짐을 다 풀었습니다. 그런 뒤 그는 가족과 함께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일만큼은 말씀 그대로 주안에서 안식을 취했습니다.

그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 저러다가 언제 서부에 도착하려고 저러나? 아마도 저 가족이 도착할 때쯤이면 미리 도착한 사람들이 사금을 다 캐내 가버리고 말 거야!'

남들이야 비웃던지 말던지 그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꼭 멈추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엿새 동안은 그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와 그의 가족도 무사히 캘리포니아 목적지에 당도했습니다. 그는 자기들과 함께 출발한 사람들은 이미 다 도착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함께 출발한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와 그의 가족이 제일 먼저 당도한 것이었습니다. 정신 없이 달리기만 했던 사람들은 중간에서 다 병들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말도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사람들도 골병이 들어서 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차도 다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영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영을 좇아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믿/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육의 생각대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영의 생각대로 살겠습니까?

여기서 '생각'은 원어 적인 해석에 보면 '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은 곧 마음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흐름이요, 표현입니다. 생각이 가면 마음이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할/

영을 좇는 자는 그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말씀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영을 좇는 자는 생명과 평안히 온다고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재를 의미합니다. 또 평안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즉 화해의 결과로써 얻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면 평안히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 평안히 찾아옵니다. 집에 있는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부모와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따라 살았는가?'에 좌우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마음에 평안히 없는 이유는 성령을 좇아 살지 않고 육신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믿/

▶어느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업상 어떤 불이익이 와도 주일날은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굳게 고백을 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지난날 성령의 생각대로 따르지 않고 주일날 장로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사업상 어쩔 수 없이 골프 모임에 가면 자신의 마음에 평안히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할/

가끔 주일 예배를 빼먹고 가족이 모여 산이나, 들로 소풍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성령 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성령 님이 탄식하시는데 그들이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살면 저절로 축복이 따라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아멘!/할/

②육의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한 바울은 7절에서는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됨으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굴복할 수도 없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전적 부패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육에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마음먹지도 못하며 먹을 수도 없으며 전적으로 영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도 없는 무능한 상태입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원수 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인간은 전적 부패한 속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의 손길을 베푸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밖에 구원은 절대로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

▶한 교회에 남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교회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사업을 잘해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생활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그는 영의 일보다는 육의 일에 치중했습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도 거래처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장에 가서 골프 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에서 안수집사 선거가 있었는데 교인들은 그의 신앙은 별 볼일이 없었지만 그의 부모님을 생각해서 그를 안수집사로 뽑아 주었습니다. 그랬으면 열심을 내야 되는데 그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일에만 늘 분주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손을 드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 져 누어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는데 위암 3기였습니다. 의사는 그의 배를 갈라보고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다시금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생명이 까물까물 꺼져갑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흐느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장로님, 권사님의 부모님을 주셨고 나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하셨건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구나! 이 형편없는 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쓰시겠다고 안수집사로 뽑아주셨건만 그래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정신 차리지 못했구나.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 육신, 내 영혼이 둘 다 지옥에 떨어질까 봐 하나님은 내 육신은 불러 가시고 내 영혼은 구원해 주셨구나! 얘들아, 너희들은 어찌 하든지 예수님을 잘 믿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라. 그럼 우리 모두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그의 장례식 때 그의 육성이 녹음기를 통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흐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에게 나오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약4;4절에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말을 안 듣고 사고만 치고 다니며 애를 태우면 어떤 부모가 그 자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 부모는 그 자식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아멘!/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고는 답하기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바로 서야 축복도 받습니다. 바울은 고전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고, 전12;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할/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⑴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시29;2절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할/

⑵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사하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일상생활에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백성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불평이 없습니다. /아멘!/

⑶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롬7;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고, 렘15;16절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③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9).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랍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삶을 가르쳤습니다.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나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였더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못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이 음미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너무나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를 선포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행11;26절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처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란 명칭으로 교회 밖에 사람들에게 불리 움을 받게 된 것인데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인 명칭이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천주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항의하는 종교개혁의 무리들에게 '항의하는 자'란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게 된 것이 지금의 개신교(기독교)의 일반적인 명칭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할/

⑴'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명칭을 살펴보면 ㈀거룩한 영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 ㈄중재자, 위로자, 약속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⑵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할 때, 헬라 원문이나 영어 성경에는 꼭 '안에'라는 전치사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그 말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안에서 믿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요15: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성품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집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는 아직도 육에 머무는 잡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잡니다. 수없이 많은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핍박을 받고 또 순교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자 처자식과 배와 그물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살전5:19절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다가도 성령을 소멸해 버리고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 중 '최후의 만찬'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린 그림입니다. 다빈치는 예수님의 모델을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의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삐에뜨로 반디엘'이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모델로 제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모델로 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이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을 다 그렸는데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만 못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빈치는 죄로 마음이 무디고 찌들어진 얼굴을 찾아 나서기 10년 되는 날 로마의 뒷골목에서 아주 보기 만해도 역겨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가롯 유다의 모델로 그렸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돈을 지불하면서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몇 년 전에 당신이 나를 예수의 모델로 그린 '삐에뜨로 반디엘'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거한 사람과 성령이 떠난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납니다. /할/

 

 

④주안에 있는 사람은 죄로 인하여 몸은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자입니다(10).

두 가지가 서로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은 '영'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은 것'은 '산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무엇을 택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몸이 아니라 영을 택해야 합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택해야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 곧 부패한 육신의 행실을 좇아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인하여 산 것, 곧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죽는 것과 산 것입니다. 죽을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고, 살 것이 아닌 산 것입니다. 완벽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그때 벌써 죽었다는 것이요, 부활하실 때, 곧 하나님의 법대로 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마28;20절에서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과 같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도의 몸은 아직도 죄 아래 있고, 사망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여기 영은 성도들의 중생의 영을 의미합니다. 중생이란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영은 의로 인하여 중생 하여 살아났으나 육은 아직도 죄와 사망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할/

⑤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11).

여기 '살리시리라' 이 말은 '살리다'라는 동사의 미래형입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죽은 몸을 다시 살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10절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11절에서는 우리 육신을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몸은 죽어 이 땅에 묻히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 오시는 날 홀연히 변화되어 우리 육신이 부활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입니다. /아멘!/

고전15;13절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였도다' /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변화가 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육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는 육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일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겨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영과 육의 갈등 속에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육의 사람처럼 육신의 일에 치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여러분!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잠시 잠깐의 세상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의 행실에 따라서 살려고 하지 맙시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을 좇아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⑥영의 사람은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요6:35).

주님의 말씀은 때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떡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여기 주님께서 생명이라고 하실 때 그 생명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생명과는 다릅니다. 여기 생명이라는 원어는 '조에'라는 말로 영적인 차원의 생명, 즉 '영적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니까 죽음으로도 끝이 나지 않는 영원한 차원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할/

▶생명의 개념에는 크게 세 가지 차원의 생명이 있습니다.

⑴육체적인 생명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살아있음'의 차원입니다.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몸에 체온이 유지되고 신진대사가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냥 생명 또는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해서 '생물학적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생명은 생명체라면 그 어떤 존재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물론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들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할/

⑵정신적인 생명입니다.

이것은 '인간다운 살아있음'의 차원입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계획하고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목숨이라고 부릅니다.

이 목숨은 인간만이 가지는 생명의 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가 이 목숨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할 때 생각하는 그 생명의 차원을 말합니다. /할/

⑶영적인 생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음'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차원을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아멘!/

이 영생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게 되는 그 풍성한 생명 바로 그 생명의 차원을 말합니다.

▶요일 5:12절에 보면 매우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이 바로 '조에'라는 말로 곧 영생을 말합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 그들에게는 이 조에 영생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조에', 영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 심령 속에 예수가 있는 사람들만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 심령 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에는 살아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생명체는 모두 배고픔을 느낍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끼만 굶어도 금방 이 배고픔을 느낍니다. 쌀독에 쌀이 떨어진 사람들은 이 배고픔에 서럽도록 시달립니다. 저 북한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 배고픔과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정신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배고픔이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페트릭 헨리'의 말에서 보듯이 '자유에 대한 배고픔'이 있습니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고 외쳤던 공리주의자 '밀'의 말에서 보듯이 '진리와 지혜에 대한 배고픔'이 있습니다.

가수 조용남은 '사랑 없인 난 못살아요'를 절규하듯이 불렀는데 여기서 보듯이 우리에게는 '사랑에 대한 배고픔'이 있습니다. /아멘!/

▶여기서 제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배고픔은 이 육체적인 배고픔이나 정신적 차원의 배고픔이 아닙니다. 더 깊은 차원의 배고픔 즉 '영적인 배고픔'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를 여기서 또 한번 해야겠습니다. 그가 한 밤중에 주님을 몰래 찾아왔습니다. 주님께 상담을 하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유대 관원이고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먹고 살만합니다. 육체적인 배고픔에 시달릴 사람은 아닙니다. 안정된 지위에서 사회적 존경까지 받고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배고픔도 그렇게 심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안에 알 수 없는 배고픔이 있는데 그것을 채울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확하게 이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적인 배고픔을 채울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셨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이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밥으로 채울 수 없는 배고픔이 있습니다. 돈으로, 명예로, 향락으로 채울 수 없는 배고픔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배고픔입니다. 이 영적인 배고픔이 있음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 영적인 배고픔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입니다. 말씀 속에 모든 축복의 원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계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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