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에바다' 하소서! (막 7:31-37)
역사학자들은 지난 20세기에 인류에게 가장 핵심적인 화두를 던진 사람으로 독일의 철학자 '니체'를 꼽습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고 광기 어린 선언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인간 중에 초인간이 나와 그 권력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니체의 이 사상을 기점으로 결국 무신론적 허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시작됐습니다. 그의 사상에 화답이나 하려는 듯이 수많은 초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레닌, 마오쩌뚱, 김일성, 저 일본의 천황' 등등. 이들이 나타나 세계 제 1, 2차 대전을 일으켰고, 공산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저들은 모두가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이 무신론자들은 그동안 인류가 겪어보지 못했던 전쟁과 살상과 인권유린의 악을 저질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지나간 이 20세기는 악이 난무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내다 본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슨 범죄든 다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신론자들은 왜 그렇게 상상하기 어려운 악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라고 묻고 대답하기를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겁도 없이 악을 저지릅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겁이 없는 것입니다. /할/
▶언젠가 한 평범한 주부가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 15분 동안에 무려 일곱 차례 절도행각을 벌인 것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진열장에 없는 상품을 주문하고, 주인이 그것을 찾는 동안 진열된 화장품을 가방에 정신 없이 일곱 차례나 넣었습니다. 의심이 생긴 주인이 감시 카메라를 보고 경찰에 신고해서 체포 됐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감시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도둑질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에 그 큰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악에 가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욥34:21절에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했고, 시33:1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찌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신전의식'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①오늘 본문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31).
예수님께서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을 떠나서 두로 지방으로, 두로 지방에서 시돈 지방으로, 시돈 지방에서 데가볼리 지방으로, 데가볼리 지방에서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막7장에는 두 가지 치유 이야기가 나오는데 24-30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이고, 오늘 본문으로 읽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신 사건입니다. /할/
31절에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그러니까 24절에 나오는 두로 지방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하시고 나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랜 기간 고된 사역과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치열한 논쟁에 시달렸던 예수님에게는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본토를 벗어나 '두로 지방'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국제적인 스타가 된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오셨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변은 또 다시 고침 받기 원하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이때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 중에는 귀신 들린 딸을 가진 한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하거나 새로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가시던 곳에서는 항상 일어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여기 '자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민족을, '자녀의 떡'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개들'은 누구일까요? 따질 것도 없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들입니다. 따라서 당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던 그 여인도 '개'라는 뜻입니다.
많은 분들은 예수님의 이 거칠고 모욕적인 언어 때문에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자비와 은혜의 예수님이 그 불쌍한 여인을 개라고 부르다니' 분명히 그 여성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본토가 아닌, 그것도 이스라엘 민족과는 역사적으로 매우 감정이 안 좋은 '두로 지방'에서 대놓고 그 여성뿐만 아니라 그 지역사람들 모두를 '개들'이라고 지목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명한 한류스타가 일본의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서, '너희 일본 놈들은 모두 개 같은 놈들이야!'하고 떠들어 댄 것과 같습니다.
한국 땅에서야 얼마든지 일본 사람들을 욕할 수 있겠지만, 일본 땅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그 여성이 모욕을 당한 것도 충격적이지만, 예수님의 발언은 너무나 무모하고 도발적이었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이 갑작스런 사건 때문에 엄청난 위기와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노골적인 모욕을 받은 그 여성의 반응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그 여인은 자신을 모욕하는 예수님을 '주인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개'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반항은커녕 오히려 맞장구를 쳤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여인의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 자신을 개 취급할 것이라면 '개밥'이라도 달라는 뜻입니다. /할/ 즉, '아무리 개라도 개밥을 먹을 권리 정도는 있지 않느냐'는 반론입니다.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스스로 개가되어 개밥을 요구하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 /할/ 이 선언과 함께 그 여인의 딸은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했던 '믿음의 말을 듣고 기적을 행하셨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그 사람의 믿음과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백이 참 중요합니다. /아멘!/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고의적으로 벌이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녀'와 같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정성껏 진수성찬을 차려 주셨습니다. 때마다 시마다 돕는 은혜로 그들을 축복하셨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받는 특권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기는커녕, 그 은혜의 밥상을 걷어차고 뒤엎기가 일쑤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직접 그들 가운데 오셔서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주시며 온갖 희귀한 기적을 베풀어 주셨지만, 이스라엘, 특히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가 일쑤였고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이 개 취급하던 이 이방 여인은 이스라엘이 받았던 진수성찬의 은혜와 비교하면 '개밥' 같이 초라한 은혜라도 달라고 애타게 간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특히 이 이방 여인의 마지막 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개라도 개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는 그 여인의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개의 자리까지 낮추는 극도로 겸손한 자세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건강한 자존 감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할/
다시 말해, 이 이방 여인은 '사랑의 하나님'의 진심을 꿰뚫어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치켜세우고, 그 외의 이방인들은 전부 개처럼 취급하였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여성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할/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②'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에바다' 귀를 열고, 입술을 열어주신 기적의 하나님을 만나세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귀 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도 어눌한, 거의 언어를 잃어버린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니까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그래서 완전히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연민으로 이 사람을 쳐다보시다가 유명한 말씀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34절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여기 에바다는 라틴어인데 본래의 발음을 '에파다'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열리라'는 뜻입니다. '에바다' 이 한마디 말씀에 이 사람의 귀가 열렸습니다. 또 혀가 풀려 입술이 열렸습니다. /할/ 그는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인생이 열린 것입니다. /아멘!/
이 극적인 기적을 35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곳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할/
오늘 에바다의 은총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갈릴리 호수 근처에 살고 있는 귀먹고 어눌한 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상고해 보겠습니다.
㉠누가 귀 먹은 사람인가?(32)
본문에 이 사람은 듣지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소리를 말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해도, 들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에 대한 비난과 욕과 모욕해도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귀머거리 환자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저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형제 이웃의 사랑의 언어를 듣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 소리는 다 듣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영적 귀머거리들이 더 불쌍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듣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들이 참 많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더 불쌍하다고 하셨습니다. 막8:18절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할/
오늘 에바다의 이 기적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주여!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에바다' 하소서!'입니다. /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누가 말 못하는 벙어리인가?(32)
우리 속담에 '꿀 먹은 벙어리'란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 입은 가졌지만 '꿀 먹은 벙어리'들이 참 많습니다. 말 못하는 벙어리도 불쌍하지만, 영적 벙어리도 우리 하나님이 불쌍히 보십니다. /할/
▶성도가 입으로 해야할 몇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꼭 해야 합니다. /할/
⑴찬송의 입술입니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시100:4절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할/
찬양은 능력입니다. 행16:25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미하매' 한 밤중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찬양은 입술의 열매입니다. 히13: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아멘!/
⑵기도의 입술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은 기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기도 없는 영혼은 마치 그리스도 없는 영혼과도 같다.' 그리고 '기도는 어쩌다 생각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일과이고, 습관이며, 날마다 해야 할 신성한 노동이며, 삶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헬렌 컬러'는 '앞문이 막히고 옆문이 막히고 뒷문이 막힐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신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이 죽으면 기도가 끊어지고 기도가 끊어지면 믿음이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할/
성경을 보면 모든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기도하는 족장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의 영도자 모세! 불의 사자 엘리야,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민족을 위해 에스겔은 기도했으며, 조국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기도하며 나라를 다스린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의 생애에 기도로 무장한 제자였으며 사도바울은 아라비아에서 3년을 기도하였고, 그의 권면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마7장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닫힌 문을 여는 것입니다.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문을 두드리라! 건강의 문을 두드리라! 행복의 문을 두드리라!' 다 같은 기도의 표현입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너희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고, 찾는 이가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할/
⑶감사의 입술입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시50:14-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아멘!/
⑷전도의 입술입니다.
전도는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이요 유언입니다. 전도보다 주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은 이 지상에서 없습니다.
눅15:7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전도이며, 우리의 가장 시급한 일이 전도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믿/
여러분! 복음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 가장 귀한 능력, 보화, 은혜, 보물, 축복은 이 예수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내 안에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입 밖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를 합니다. /할/
이 능력을 믿으시고 열심히 복음을 전합시다. 고전9:14절에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복음 전하는 자를 밀어 주십니다. 또 지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보화도 복음 전하는 자를 향하여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의 능력이 그를 지원하고 계십니다. /믿/
그런데 이런 네 가지의 입술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성도들이 있다면 큰 일납니다. /믿/
㉢에바다의 기적은 좋은 이웃으로 더불어 일어났습니다(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현대인들의 비애(悲哀) 중에 하나는 가까운 이웃에게조차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이웃사촌' 즉, '멀리 떨어진 혈육보다는 차라리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이 훨씬 낫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오랜 시간 이웃으로 살았던 동네 사람들도, 수십 년 간 교제한 친구와 동료들도, 하다 못해 자신의 피붙이조차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믿었던 사람들이 잔인한 흉악범으로 돌변하는 일이 너무나 잦아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비극은 안 그래도 힘든 우리 사회를 더욱 어둡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복 중에 하나는 바로 인복(人福), 즉 '좋은 사람을 만나는 복'입니다. /할/
사실 이 장애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듣지를 못하니 예수님의 말씀도, 소문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이 장애인은 말을 할 수가 없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불쌍한 사람에게 정말로 참 좋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더 좋은 이웃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본문에 좋은 이웃들은 '제발 이 장애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결국 이 장애인이 예수님에게 에바다의 기적을 입은 것은 자신의 믿음이 아닌 이웃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할/
③예수님의 치유의 방법을 보겠습니다(33).
예수님의 방법은 다양하십니다. 어떤 때는 말씀으로 고쳐주실 때도 있었고, 안수하시면서 고쳐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할/
⑴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주님을 따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개별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 누가 있으니까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은 개인이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 하나님과 나 1:1입니다.
오늘 이 사람은 이웃들의 도움으로 예수님께로 나왔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따로 나갔습니다. 친구들 도움으로 교회까지는 올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까지는 잘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구 따라 식당까지는 같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밥은 자기 자신이 직접 먹어야 합니다. 누가 대신 먹여주지 않습니다.
구원은 은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역사는 은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주님과 나, 단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부의 밀월은 단둘이만 아는 일이듯이 은밀히 기도하는 기도가 응답을 받고, 은밀한 구제가 보상을 받습니다. '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할/
주님께서는 치유의 역사에 구경꾼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구경꾼들이 보는 앞에서 안수하시고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구별된 장소에서 그를 치료하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그것입니다. /할/
예배에는 구경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는 단 한 사람도 구경꾼도 없는 진정한 예배 자들의 예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⑵주님의 손가락으로 그 양 귀에 넣어주셨습니다.
인간의 오장육부가 다 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과 발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귀를 가지고 치료하는 이혈(耳血)이라는 한방치료방법, 또는 대체의학이 있습니다. 우리 사모님이 그 공부를 좀 하셨습니다.
귀를 만져주거나 귀에 '이석'이라고 해서 아주 작은 돌을 붙여주기도 합니다. 손과 발에도 오장육부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손 치료, 발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집중적으로 손을 마사지해주기도 하고, 발을 마사지해주기도 하고, 침을 놓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은 귀를 치료해 주고 있습니다. 귀에 안수해 주고 계십니다. 귀를 치료해 주셔야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제목이 '주여!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에바다' 하소서!' /할/
⑶침을 뱉어 혀에 발라주었습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를 치료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묻혀 그 장애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지금 너의 혀를 고쳐줄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하신 것이 아닐까요? /할/
⑷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34).
'하늘을 우러러' 병 고침은 자신의 명예를 나타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지는 못하여도 볼 수 있는 그의 눈으로 하늘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할/
'탄식하시며' 귀는 있으되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혀는 있으되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보시면서 너무나 가엽고, 불쌍하고 측은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혀를 주었는데 지금 그것을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창조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대로 살지 못할 때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믿/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창6장에 보면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났을 때 탄식을 넘어서 한탄하셨습니다. 창6:6절에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오늘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면서 탄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할/ 그러므로 여러분, 고전10:31절에 말씀처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대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에바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34-35).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귀가 막힌 사람에게 귀가 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혀가 굳어 말이 막힌 사람에게 말이 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35절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성경은 그의 귀는 열려졌다고 말합니다. 닫힌 것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혀가 맺혀진 것이 풀려졌다고 말합니다. 그 옛날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 번도 제대로 듣지 못한 그 말이 명백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라는 것은 자체의 힘이 있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만드신 소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 들어가서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고 바람 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쉼을 얻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소리에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능력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될 때 거기에서 치유와 회복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 속에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의미와 우리의 정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어떻게 찬양합니까? 가사를 기억하면서 그 가사에 동참해야 치유와 회복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찬양을 하면 그저 음정의 높낮이만 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마음속에 자신의 기도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으로 기도할 때도 조용히 자기 입으로 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혀가 움직이지 않고 들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기도할 때에도 그 기도소리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저분이 대표로 기도하는데 그것은 바로 저의 기도입니다. 제 생각과 같습니다.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받아주세요'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 말씀이 내 귀에 들려야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고 찬양도 함께 불러야 우리 속에 생기가 도달하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의 예배공동체가 바로 그런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함께 찬양을 듣고, 내 입으로 부르고, 기도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총을 기억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속에 막혔던 것이 다시 풀려지는 것입니다. 내 속에 닫힌 것이 다시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입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제목이 '주여!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에바다' 하소서!' /할/
⑴그렇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다'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 맺혀있는 부분들이 '에바다'라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맺힌 곳마다 풀어지고, 상처 난 부분마다 온전히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⑵'에바다'란 '귀가 열린다'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마음에 맺혀있는 것이 다 풀린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는 한은 다름 아닌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에바다'의 선언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⑶또한 '에바다'란 하늘 문이 열림을 의미합니다.
문이 열려야 출입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을 열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옥중에 갇혔을 때, 그들은 한 밤중에 옥중에서도 기도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어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야곱도 벧엘광야에서 하늘 문이 열립을 체험했습니다. /할/
⑷'에바다'란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병든 자에게 형통함이란 강건함입니다. 사업을 하는 이에게 형통함이란 사업의 번창함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이에게 형통함이란 모든 삶의 자리에서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학업을 하는 이에게 형통함이란 학문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에바다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⑸뿐만 아니라 '에바다'는 생명입니다.
죽은 나사로에게 있어서 주님의 음성은 그를 죽음의 문에서 걸어나와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무덤의 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바다'란 이렇게 우리의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역사 하십니다. 형통함으로, 강건함으로, 문을 열어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할/
⑤다윗은 '에바다'의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입니다(시30).
다윗은 '최고의 통치자, 위대한 신앙인, 승전장군, 시인, 음악인'입니다. 우리는 시30편에서 그의 신앙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섬기는 가?'로 결정됩니다.
시30편은 다윗이 질병과 고통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부른 찬양입니다. /할/ ▶그가 고백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⑴'끌어내시는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시30:1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여기 '끌어낸다'는 말은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없을 때 손을 내밀어 끌어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벼랑에 매달려 떨어지기 일보 전 손을 내밀어 끌어 올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위기, 절망, 고통, 죽음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단6장을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 왕국의 국무총리로 있던 어느 날 그를 시기한 정적들의 음모로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 그 이유는 다니엘을 제거하려는 정적들이 황제 이외의 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절하는 사람을 사자 굴에 던진다는 긴급법령을 만들어 공포했는데 그 덫에 걸린 것입니다.
단6:10절에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리고 난 후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23절에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 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할/ 그의 믿음과 용기를 보시고 하나님이 사자 굴에서 끌어내신 것입니다. /아멘!/
다윗을 끌어내시고 다니엘을 끌어내시고 바울을 끌어내신 하나님은 우리도(나도) 끌어내십니다. '죄와 사망의 웅덩이에서 절망과 고통의 심연에서 환난과 시험의 질고 속에서' 우리를(나를) 끌어내십니다. 시30:3절에 '끌어내시고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할/
⑵'부르짖으매 고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시30:2절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할/
'랑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셨다.'고 했고, '로우린슨'은 '정신적 고통을 고치셨다.'고 했고, '칼빈'은 '위기에서 구출하셨다.'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환경도 고치십니다. /할/ 다윗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나를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아멘!/
⑶'도우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시30:10절에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그리고 시121: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걱정하지 맙시다. 염려하지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부르짖어 도움을 요청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⑥하늘이 열리는 '에바다'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⑴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어야 합니다.
엘리사의 생도의 아내가 남편 죽고 자식은 빚으로 넘겨야하는 운명의 날에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름 한 병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왕하4:3-4절에서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사람 찾아다니지 말고,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만나고 싶습니까? 음성을 듣고 싶습니까? 풀어지지 않는 인생의 꼬인 문제를 풀고 싶습니까?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 주님에게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이 '죽은 게 아니라 잔다'고 하시니 모두 비웃었습니다. 비웃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시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다굼'하시니 살아났습니다. 비웃는 사람,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 믿음 없는 사람들은 다 내보냅니다. 문을 닫습니다. 오로지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요, 나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사람 만나는 게 아니라, 방법 찾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한 문은 다 닫아걸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고 말씀의 상황 속으로 들어갑니다. 상상의 날개를 펴고 가슴을 열고 마음으로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며 묵상하면 말씀의 상황이 내 가슴속에서 전개됩니다. 말씀의 상황이 거역할 수 없는 순종으로 나를 이끌어갑니다.
이것이 묵상입니다. 주님과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뿐만 아니라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할/
⑵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믿음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슴으로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도 가슴으로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엄마의 감성이 어린이에게 복사되는 과정이 잉태에서부터 4살까지랍니다. 가슴으로 알아야 진짜 아는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주님은 믿음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사랑해야 진정한 주님 사랑입니다.
하늘을 열고 싶습니까? 먼저 가슴을 여십시오! 자신의 감성을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내 감정의 색깔을 보세요. 미움입니까? 시기, 질투, 증오입니까? 사탄이 심어주는 악마의 색깔입니다. 마귀가 들어오는 신호입니다. 그놈은 원망, 시비, 짜증을 동반합니다. 거부, 거역을 일삼게 합니다. 저주를 뿌립니다.
사탄의 본성입니다.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머리 신앙이 아니라 가슴 신앙인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⑦'에바다'의 기적은 복음으로 퍼져 나갔습니다(36-37).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놀라워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면서 여러 차례 경고하셨는데도 이들은 경고하면 할수록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못 듣는 사람도 고쳐서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고쳐서 말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물론 주님의 말씀에 100%,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교회에는 막무가내로 예수님 전하고, 교회 전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려면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에바다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여!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에바다'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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