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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씨앗은? (시 126:1-6)

by 【고동엽】 2022. 2. 12.

눈물의 씨앗은? (시 126:1-6)

흔히 기독교를 가리켜 '기쁨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딱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福音)이 무슨 뜻입니까? 눅2:10절에 천사가 예수님의 성탄 소식을 전하면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영생복락의 축복을 주시니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또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은 기쁨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천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기쁨이 가득한 잔칫집이고,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 기쁨을 맛보는 축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당부했습니다. /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기독교의 기쁨은 그냥 기쁨이 아니고, '눈물을 통과한 기쁨'이라는 사실입니다. /할/ 그래서 오늘 시인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할/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단번에 대사,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았습니다. 마침 그 날 사자가 등장했습니다. 숫놈 사자의 별명이 '백수(百獸)의 왕'이지만 알고 보면 놀고 먹는 백수(白手)입니다. 폼만 잡지 아무것도 안 합니다. 사냥도, 새끼양육도, 적과 싸움도 암사자가 합니다. 수사자는 누워 자다가 밥 가져오면 먹고 가끔 폼 잡고 한 바퀴 돕니다.
어느 날 사자 무리가 고기를 먹는데 하이에나 떼가 급습을 했습니다. 사자에게 하이에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날은 너무 많아서 암사자들이 모두 나무 위로 도망을 쳤습니다. 하이에나들이 남은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숫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한 편의 중국 무술영화가 펼쳐집니다. 일당백으로 하이에나와 싸워 모두 죽이고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숫 사자를 구박했던 암사자가 내려와 아양을 떱니다.
'그동안 내가 미안했어' 그리고 해설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숫 사자 그는 그의 왕국을 되찾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숫 사자는 평소에는 어머니다운 모습이었으나 위기가 닥치면 아버지다운 모습으로 바뀝니다. 어머니 사자가 못하는 것을 아버지 사자가 단숨에 판을 바꿔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모습으로 고난 가운데 버틸 수 있게 해주시고 위로와 사랑으로 쓰다듬고 보살펴주십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강한 힘으로 판을 뒤집고 단번에 해결하십니다. /할/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절에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할/

①본문의 배경은 무엇인가?
본 시편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70년 포로에서 해방되어 귀환할 때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우상 숭배를 거듭하다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많은 엘리트 그룹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끌려갔습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때 많은 백성이 모두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것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망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망했습니다.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70년의 세월입니다. 그런데 이 70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모습으로 그들에게 역사 하셨습니다. 하나는 어머니처럼 역사 하셨습니다. '힘내라! 이 고난과 상처 가운데서 버티어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꾸지도 못했던 일이 나타납니다. 해방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몇 번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1차 귀한 직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포로 귀환은 바벨론이 바사가 되고 초대 왕 고레스가 즉위한 원년(B.C. 537)에 단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 부성 적인 모습이 나타나 다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날을 보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할/
여러분, 이스라엘이 그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에서 그냥 낙심하고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백성이 어떤 백성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이 그 세월 동안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저들의 잘못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동안 눈물 뿌려 기도했던 이스라엘의 간절한 기도의 소원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대사를 행하사 그들을 70년의 포로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할/
나훈아씨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의 씨앗이 사랑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눈물의 씨앗은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것입니다.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거두는 것입니다. 또한 회복의 역사인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가 고난 당할 때 두 가지의 영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포기의 영성'입니다. '이제 망했어, 죽었어. 돌이킬 수 없으니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여기서 포기하고 끝내자'는 영성이 있고, 또 하나는 '회복의 영성'입니다. '나는 포기 못합니다. 이 상처 그대로, 이 죄 그대로는 못 끝냅니다.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런 끈기가 회복의 축복을 이끌어내는 통로입니다. /할/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은 몇 년간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겁니다.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러면 인생이 긍정적으로 풀린다. 비전을 키워라. 기대치를 높여라. 생각과 말을 조심해라. 인생은 생각을 따라 가게 되어있다. 행복하기를 선택하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신앙은 긍정입니다. /할/
여러분은 어떤 인생철학으로 사십니까? 살아 보니까 인생이 장난이 아니에요. 직장문제, 가정문제, 사업문제, 질병의 문제, 이웃과의 관계, 돌이킬 수 없는 일, 힘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없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마음 편히 살아야지'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아직 포기 못해. 하나님, 이 상처 완전히 해결해주세요. 이 죄 깨끗이 씻어주세요. 이 팔자 완전히 고쳐주세요. 이 죽음 일으켜 주세요' /할/
요5장에 예수께서 지나가시는데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 지금 포기의 영성이냐? 아니면 회복의 영성이냐?'를 묻고 계십니다.
오늘도 이 질문은 우리들에게 해당됩니다. '아직도 회복하고자 하느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느냐?' 이 질문에 '아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오늘 분문 속에 눈물의 씨앗은 하나님의 대사, 즉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이요, 응답의 역사입니다. /아멘!/ 시인은 '열방 중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고 하십니다. 이 날을 우리 모두 소망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호6:1절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할/

②이들이 뿌린 눈물의 씨는 무엇이겠습니까?
모진 박해 속에서 참고 견딘 인내의 씨앗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묵묵히 수고한 노력의 씨앗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씨앗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4절 말씀의 보면 기도의 씨앗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아직까지 포로에서 돌아오지 않은 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눈물로 기도의 씨를 뿌렸습니다. 결국 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것은 기도로 해방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후에 해방될 것은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놓았습니다.
렘29:10-11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러면서 기도를 당부하셨습니다. 렘29:12-14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눈물의 씨앗은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뿌린 기도의 씨앗들은 언젠가 거둘 때가 있습니다. 계7:17절에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할/

 

③그렇습니다. 눈물의 씨앗은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게 합니다(5-6).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울음과 눈물입니다. 그 후 일생동안 수많은 울음과 눈물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뻐서 우는 눈물, 슬퍼서 우는 눈물, 때로는 억울해서 우는 눈물, 때로는 외로워서 우는 눈물 등 수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떠나가게 됩니다. 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살다가, 눈물 속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각기 의미가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우는 울음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명의 신호입니다. 살아가면서 흘리는 눈물은 인간다움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사악한 사람을 향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며 증오하게 됩니다. 인간다움의 요소는 사랑인데, 눈물이 없다는 것은 인정이 메마른 증거로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난 뒤 그 사람의 죽음을 두고 주위의 사람들이 슬퍼하는 정도에 따라 그가 살아온 삶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장부는 평생 동안 세 번 박에 울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은 나약한 자의 모습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말 같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의 힘만 믿고 살아가는 불신 세계에서의 강인한 모습을 나타낸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할/


▶이처럼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⑴애통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마5:2절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크게 힘입은 사람들은 깊은 통회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날 자신의 부끄러웠던 죄악 된 삶을 뉘우치며 깊이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한 지난날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여 참회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고귀한 시간들을 헛되게 보낸 것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통회의 눈물을 흘린 대표적인 사람은 구약성경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참회하며 뉘우치는 모습에 대해 시6:6절에 기록하기를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뉘우치며 흘린 눈물이 침상을 띄웠고 요를 적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정결케 하시고 넘치는 복을 주셔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더 없이 귀한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
또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재판 받으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정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새벽닭 울음소리에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한 자신의 약속에 양심이 찔려 심한 통곡을 했습니다(마26:75). 이러한 베드로의 통회의 눈물을 보신 예수님은 그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대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일평생동안 새벽닭 울음소리만 들으면 잠에서 깨어나 그때 일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아멘!/
눈물의 씨앗은 죄악을 씻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시51:17절에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또한 시34:18절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아멘!/ 이렇게 눈물의 씨앗이 고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며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⑵간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답답하고 괴로운 나머지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눈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하소연하는 눈물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날 우리들이 눈물을 흘려야 할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그곳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입니다.
왕하20장에는 히스기야 왕의 투병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건강했던 왕의 몸에 무서운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소생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향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야의 건강은 회복되어 15년의 생명을 연장을 받았습니다. /할/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시는 동안 통곡의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히5: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내는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빗물이 모이면 강물이 되어 농사를 짓게 합니다. 공장의 기계를 가동시킵니다. 각 가정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로서 내리는 빗물이 삶의 원천이 되는 것같이,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며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효험은 없었습니다.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향해 마음씨 착한 남편은 말하기를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위로가 한나의 눈물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던 한나는 마침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애타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삼상1:10-11절에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
한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지켜본 제사장은 그가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말하기를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영성이 무너진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한을 풀어 태를 열어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 나라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입니다. /아멘!/
▶2차 세계 대전 당시 홀어머니 품에서 자라난 한 공군 조종사가 출전을 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당부하기를 '전쟁 중에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라'고 했습니다.
전장에 나간 이 조종사의 전투기가 격전 중에 적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기는 기능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캄캄한 밤 레이더까지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생명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때 조종사의 뇌리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스쳐갔습니다. '전쟁 중에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조종사는 짧은 순간이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멋대로 곤두박질을 치던 전투기는 굉음을 내며 땅에 떨어졌습니다. 잠시 후 이 조종사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끝인 줄만 알았던 이 조종사는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무사했습니다.
캄캄한 밤 조종이 불가능한 이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살아난 것도 기적이지만 날이 밝자 이 조종사는 더 큰 기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위는 망망대해인데 비행기는 작은 섬 잔디 위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그 후 구조된 조종사는 이 사실을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편지로 알려 드렸습니다.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아들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염려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 밤을 새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던 그 날 밤 아들이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는 두 모자(母子)를 그 큰 환난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아멘!/
이것이 곧 기도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방울을 세십니다. 시56:8절에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아멘!/
▶1940년 5월 13일 독일의 공격을 받은 영국은 중대한 국가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에 '윈스턴 처칠'은 전시내각을 구성하면서 영국 국민들에게 호소하기를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피, 눈물, 땀과 기도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박근혜 대통령도 이 나라 현 상황을 위해 '처칠'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처칠 경의 호소를 들은 영국 국민들은 모두 조국애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눈물은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아멘!/
기도는 전기와 같습니다. 전기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다면 어둠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전기와 같이 항상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여!'하고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기도가 없다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광명한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두운 방에서 스위치를 켤 생각은 하지 않고 어둡다고 불평만 하고, 내가 있는 방만 왜 이렇게 어두우냐고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전기는 아주 가까운 데까지 와 있어서 스위치만 누르면 밝은 빛이 방안 가득히 비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내 삶 속에 나타나시도록 하기 위해 '기도'라는 스위치를 켜야 합니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문을 열게 합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이끌어 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우리 삶의 허다한 문제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의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전기 스위치를 켜듯, 기도의 스위치를 켜야 합니다.
빌4:6-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⑶방탕한 세상을 향한 탄식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19:41-44절에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때에 많은 여인들이 슬피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지 못하는 이 불쌍한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견하신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루살렘은 주 후 70년 로마에 의해 처절한 멸망을 당했고 그 후 2천 년 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를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시인도 부패한 세상을 향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6)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타락한 세상을 향해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를 일삼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없는 탄식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렘애1:1절에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라고 했으며, 2:11절에서도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이 예견된 나라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거리를 뛰어다니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멸시와 천대와 모진 핍박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운명은 70년 포로가 되었고, 예레미아의 이 눈물의 씨앗은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할/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문명이 점점 더 발달해가고 있습니다. 경제는 날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넉넉한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입니다. 넓은 지구 구석구석을 어디든 마음대로 왕래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지구촌이라고 합니다. 2-30년 전에 비하면 꿈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입니다. 영영토록 이 세상에 머물러 살고 싶은 세상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 살며, 즐기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관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이 그토록 살기 좋은 곳일까요? 그것은 겉모습뿐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한 자락을 제치고 살펴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악해져 가는 세상입니다. 요즘 매일 2-30대 젊은이들이 하루 평균 30여 명씩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성을 매매하는 퇴폐문화가 세계 1-2위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의 검불을 쌓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향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눅17:26-30절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선언인가?
또한 세상종말에 대하여 베드로의 선언을 들어보세요! 벧후3:10-13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타락해 가는 이 세대를 향해 애 타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방탕한 세대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빛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안전한 항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또한 진리의 파수꾼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탕한 세대를 가슴에 안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아멘!/
딤후4:1-2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셨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증거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충성된 신하와 백성은 왕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복음 증거는 십자가 군병의 총 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군인이 사령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상상을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모든 몸의 지체는 뇌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뇌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병들었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현재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눈물의 씨앗을 뿌려야 할 때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는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랑스럽게 기쁨으로 실천해야할 삶 그 자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이야기하여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다. 전도하는 생활은 우리의 신앙상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도를 기쁨으로 할 때는 신앙이 매우 좋다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신앙이 병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증거는 건강한 영혼의 증거입니다. 복음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성도의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복음을 들고 이 곳 저곳 다니는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충성은 복음을 전하므로 죽어 가는 영혼을 건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사52:7절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할/
▶몇 년 전에 제주도에 있는 신라호텔에 실습을 나온 한 대학생이, 호텔 앞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어린이를 건져 주었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아닌데 생명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어린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일로 인해 호텔로부터 표창 패를 받았고, 후에 그 호텔에 입사원서를 냈는데, 많은 지원자 가운데 이 사람을 뽑았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살린 결과였습니다.
사람들도 생명을 살린 사람에게 이렇게 예우를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마6:31-33절에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겨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시기바랍니다. 영혼구원은 하나님의 애절하신 소원입니다. /아멘!/

 

④하나님의 회복은 더 큰 축복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모습이 꼭 원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면서 도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88올림픽 때의 한 장면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화려한 행사가 펼쳐지던 중에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불이 꺼졌습니다. 한 줄기 조명이 비취는 가운데 한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무슨 메시지입니까? '우리 민족은 굴렁쇠와 같다'는 메시지입니다. 수없이 찢겼지만 원처럼 또 돌아갑니다. 제 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고 전진하며 나아갑니다. 과거로 회복되는 것 같으나 전진하고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굴렁쇠와 같은 회복입니다. /할/아멘!/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었던 욥의 회복이 그랬습니다. 잘 지내던 욥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열 자식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변치 말자던 아내마저 떠나고, 병이 나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남았던 관계마저 다 깨어졌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회복이 옵니다. 떠나갔던 재산이 돌아오고 떠나갔던 자식들이,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병도 회복되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 /할/ 하나님의 회복은 무언가 더 큰 풍성함을 가져다 줍니다. /믿/아멘!/

 

⑤하나님의 회복은 꿈꾸는 것 같이 이루어집니다(1).
여기 '꿈꾸는 것 같다'는 뜻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꿈에서 이루어 진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해방을 받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꿈을 꾸는 것과 같은 그런 사건입니다. 도저히 저들은 상상도 못하였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종종 나타난 사실이었습니다. 행12:1-9/16:19-26절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천사가 저를 옥에서 건져내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손에는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쇠사슬로 묵고 그리고는 깊은 옥에 가두어 놓고 보초를 세워 지키게 하였는데, 그렇게 엄청난 삼엄한 경계를 뚫고, 이중 삼중의 옥문을 지나 성문에 이를 때까지 베드로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바로 이것이 꿈꾸는 것 같았던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할/
그래서 사람은 내일을 모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암담한 현실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내일이 캄캄하고, 암담하고, 망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낙심을 하고, 절망을 하고, 그래서 자살해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각도 못하던 어느 날, 길을 훤히 뚫어 놓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어두운 터널을 지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터널이 끝나고 밝은 햇빛이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의 앞 길이 그렇게 열립니다. /믿/아멘!/


⑥하나님이 이루신 대사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찬양입니다.
2절에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고 했습니다. 압박을 받고 남의 나라에 끌려 와서 온갖 설움과 압박을 다 받고 살다가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날에 광복이 되고 해방에 되고 나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찬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할/


⑦하나님이 이루신 대사 앞에 '이방인들도 놀랐다'고 했습니다.

2절에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압제를 70년씩이나 받는 동안 누가 보아도 그들 스스로 해방을 받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들이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 것을 이방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 해방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고백이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도다' /할/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되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 만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삶의 마디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뭔가를 보고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의 전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자신 있게 살고, 살다가 혹시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 있게 대처해 나가는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서 보디발 집에 있을 때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디발이 보았습니다. 창39:2절에 보면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더라' /할/


⑧하나님이 이루신 대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할/ 이스라엘이 기뻐하며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더 표현할 길이 없어 3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할/


⑨또 시인은 계속하여 제2,3차 귀환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4절에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여기서 '남방'은 구체적으로 팔레스틴 남쪽 '네게브'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평소 땅이 바짝 말라 있는 사막 지역입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면 놀랍게도 물이 고이고 시내가 되어 흐릅니다. 이런 땅을 가리켜 '와디'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일을 다시 한번 남은 포로들에게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라 안보를 위해 기도합시다. 내 나라, 내 민족이 있어야 나도 당당합니다. 손기정은 1936년 8월 제11회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시상대에서 월계관을 받을 때 손들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우승을 했는데도 그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때 손기정은 나라를 잃었을 때입니다. 손기정은 그런 고뇌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니 우승했는데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승했는데도 고개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황영조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받을 때 고개를 바짝 처 들고 웃으며 단상에 올라가 메달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 나라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국력이 신장된 나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껏 환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
내 민족의 안보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어부지리라는 말을 아십니까? 도요새가 논을 돌아다니다가 입을 벌리고 있는 조개를 긴 주둥이로 콕 짚었습니다. 그러자 조개가 벌렸던 입을 오므리며 도요새 주둥이를 꼭 물었습니다. 그때부터 둘이 죽자 사자 싸움을 했습니다. 조개는 물고 황새는 조개를 떼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때 농부가 아주 손쉽게 조개도 잡고 도요새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부지리입니다. 우리도 눈물의 씨앗을 뿌리면 이런 복이 임하게 됩니다. /믿/
▶종수라는 가난한 학생이 서울대학 의과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의사가 되어 돈을 벌면 어머니의 속옷 한 벌을 사드려 춥지 않게 해드리고, 어머니와 함께 돼지고기 실컷 먹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봉투를 들고 달려가 '어머니, 첫 월급 받았습니다'라며 손에 들려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이제 고기 먹으러 가요. 속옷도 사드리고 싶어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거야. 타협하지 말고 바르게 살자. 이건 네가 처음 받은 월급이니 첫 열매다.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리자', '어머니, 그럼 십일조만 드리고 고기 먹어요', '아니다. 첫 열매니 우리 것이 아니다. 깨끗하게 살자'
주일날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보름쯤 지났는데 학장이 그를 불렀습니다. 의사고시에서 1등을 했다며 상금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렸던 월급의 딱 두 배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송두리째 하나님께 드렸더니 1등으로 합격시켜주실 뿐 아니라 상금도 주셨다'고 기뻐합니다. '이제 어머니 속옷도 사드리고 고기도 마음껏 먹어야지' 생각하며 어머니께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제가 의사고시에서 1등을 했대요. 상금도 받았으니 고기 실컷 먹어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봉투를 받아들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처음인데요', '첫 상금이니 첫 열매로구나. 이것도 하나님 앞에 드리자. 주일까지 기다리다가 시험 들겠다. 새벽에 일어나자'
새벽에 일찍 일어난 그는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제단에 상금을 바쳤습니다. 그는 바로 한국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미국 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암 박사로 알려진 원종수 박사입니다. 그분이야말로 기쁨으로 단을 거둔 대표적 신앙의 인물입니다. /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모습은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이 드는 일입니다. 평탄한 길이 아니라 괴로운 길입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것 같은 놀라운 복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린 만큼의 희생과 수고로 얻어집니다. 부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때 상상할 수 없는 은혜, 꿈꾸는 것 같은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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