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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3)

by 【고동엽】 2022. 2. 1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3)

 

엊그제는 제94회 삼일절 기념일이었습니다. 94년 전 한반도는 5천년 역사에 가장 어두운 역사인 일본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5천년 동안 세습 왕조 정치에 인권이 무시당해왔고 주변의 강대국들 틈에서 숨도 크게 못 쉬는 고난 역사를 살아오다가 일본의 36년 식민지 뼈아픈 상처를 역사에 남겼습니다. 지금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애통함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6,25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아직도 끝나지 아니한 남북의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나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축복은 한국 기독교와 무관치 않습니다. 우리나라 GNP가 5천불 시대에 우리나라 파송 선교사는 5천명 정도였습니다. GNP가 1만 불 시대에 선교사수가 1만 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교사 수가 2만 여명이 되고 나니 우리나라 GNP가 2만 불 시대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선교사 수와 GNP가 일치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추세로 보면 머지 않아 우리 선교사 수가 미국 선교사 수를 앞지르게 된다고 합니다. /할/
2004년 2월 월간조선에서 '한국인의 IQ는 106으로 185개국 중 최고'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입니다. 불만 붙여 주시면 어떤 일이든지 세계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민족이 우리나라입니다. /아멘!/
지금 미국에서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워렌 버펫' 콜롬비아 대학 교수가 있습니다. 이 분과 한번 식사하려면 1억 원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줄을 서는 것은 그분에게서 투자 정보를 받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에 1억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교수님이 얼마 전에 강의할 때 삼성 USB를 손에 들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은 2015년이 되면 세계 경제 5대국이 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만들어 꼭 필요하게 만드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잘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 민족입니다. 아리랑은 알이랑에서 나왔습니다. 알이랑은 하나님이랑이란 뜻입니다. /할/ 이 민족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민족이기에 하나님과 함께 미래로 힘차게 뻗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가를 보세요!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그런데 좀 살게 되었다고 우쭐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유명인이 대한민국 사람들은 '세 가지를 모르고 산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복을 받은 나라인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잘 살면서도 잘 사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본과 중국이 얼마나 무서운 나라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나라들은 굉장히 저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앞으로 중국이 세계를 제패할 확률이 참 큽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인 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북에서 핵을 만들고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어도 아주 태평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좀 문제가 심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더욱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할/ ◀제목 소개!▶

호세아서는 소선지서로 분류됩니다. 호세아선지자가 작은 선지자라는 말이 아니라 성경분량이 작아서 소선지서로 분류를 한 것입니다.

 

①호세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호세아는 '구원자'를 뜻합니다. 여호수아와 이름이 같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헬라어로 예수님과 이름이 같습니다. 여호수아와 호세아는 히브리어이고 예수는 헬라어입니다. 이것은 모두 구원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란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할/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한 선지자는 '호세아, 아모스, 요나, 나훔' 이렇게 네 명이고, 남 왕국 유다를 향해서 예언한 선지자는 '예레미야, 하박국, 스바냐, 이사야, 예레미야, 요엘'입니다.
호세아의 사명은 죄에 대한 심판을 자기 가정을 무대로 해서 가시적으로 증거를 했습니다. 호세아의 사명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에 앞장서는 것도 어려운데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는 이 어려운 사명에 앞장서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기 가정을 무대로 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누가 자기 가정의 치부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까?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자기 가정의 치부를 다 들어내면서 주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할/
호세아의 아내는 '고멜'인데 '완전함'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름의 뜻은 좋았지만, 고멜은 결코 완전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학자들은 고멜이 결혼 전부터 음행을 했는지 아니면 결혼 후에 바람이 났는지 이것을 두고 논쟁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멜이라는 여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음행 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멜이라는 한 여자의 타락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전체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영적으로 음행했다'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믿/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될 때 우리를 바로잡으시기 위해서 책망도 하시고 그래도 안 돌아오면 사랑의 채찍을 때리셔서 결국 주님 앞에 돌아와 주님이 예비한 풍성한 은혜 가운데 머물게 만들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완악한지 은혜를 받고 또 받고 또 받아도 늘 돌아서서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북 이스라엘은 모든 왕들이 또 모든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경고하고 또 경고하고 또 경고했지만 저들이 돌아오지를 않고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멜이라는 음탕한 여인을 택하여 음란의 죄를 책망하면서 그 백성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고멜이 남편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자꾸 세상에 나가서 방탕한 삶을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은 또 부인을 데려오고 집 나가면 또 찾아오고 그 마음의 고통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으로 음행을 하고 있고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취하여 낳은 자녀는 아들 둘, 딸 하나인데 그들의 이름의 뜻을 보아서도 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죄악 속에 살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장남의 이름은 '이스르엘'인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르엘은 원래 골짜기 이름입니다. 삿6:33절에 나오는 이스르엘 골짜기는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격파한 곳입니다. 또 예후라는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아합의 70의 아들과 그의 군대를 쓸어버린 곳입니다.
둘째는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었습니다. 로루하마는 '사랑 받지 못한다.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아들을 낳아 '로암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낳고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이름을 짓겠습니까? 하지만, 호세아는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이 백성은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보호도 해주지 않겠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흩어버리시고 긍휼도 베풀지 아니하시며 자식으로도 삼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
만약 호세아서가 심판의 메시지로 끝나버린다면 구원자라는 호세아의 이름은 무색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서는 인간이 아무리 죄로 인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면 소망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할/

②나라가 살고, 인생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인생이 살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도 타락이 극심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바알신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그들의 타락상이 5장에 나옵니다.
1절에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종교적으로 제일 바로 서야 할 제사장이 바로 서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온 이스라엘 족속들이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왕들도 다 죄에 빠졌다고 한탄하고 계십니다.
2절에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여기 패역은 인간의 말종들이 짓는 죄입니다. 살륙죄는 살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패륜적인 사건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와 똑 같습니까?
4절에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10절에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각종 질병이 임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상처를 치유 받기 원한다면 의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능력, 치료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13절에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할/
치료를 받고 구원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입니까? 15절에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이어서 오늘 본문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눅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 내게 돌아올 분 깃을 주소서!' 그러니까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여기서 그 아들을 잠깐 조명해 보면서 주님을 떠난 자의 비극과 또 주님을 찾은 자의 축복이 무엇인가 알아보겠습니다. /할/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낭비하는 인생을 삽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찾아옵니다.
그가 먼 나라에 가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한 것'뿐입니다. 낭비의 인생, 허비의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합니다. 부모의 품을 떠난 아들들이 객지에서 자칫 잘못하여 못된 친구를 만나 물질을 낭비하면서 타락의 길을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부유층의 자녀들, 대학 입시 기피용 유학 때문에 교포사회에 심각한 문제들이 많답니다.
'허랑 방탕하다'는 원어의 뜻은 '중심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탕자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그날그날을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곧 탕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다음부터 소비의 인생, 낭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탕자가 있는 곳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생의 기근이 찾아와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려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영 육간의 기근입니다. 이 사실을 안 미국 '윌리암 맥도널드' 감리교 목사는 찬송가 440장에서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처량하게 됩니다. 곤고하게 됩니다. 슬픈 인생이 되어 외롭게 정처 없이 헤매는 비참한 운명의 사람이 됩니다. 암8:11절에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 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 없이 살면 영육간의 기근과 궁핍이 온다고 했습니다. /할/
㉢하나님을 떠난 탕자는 돼지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기에 그 고기는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탕자는 그런 부정한 동물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 했습니다. 영광스런 아들이 짐승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시49: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탕자의 삶의 자리는 돼지우리였습니다. 더럽고 추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할/
㉣탕자가 돌아오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비결도 이와 같습니다.
⑴탕자는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그는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스스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이 길이 살길입니다. 탕자는 현재 자기의 처지에서 돼지 치는 일을 불평하거나 곁을 떠나버린 친구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먼 나라에 가도록 내버려둔 부모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자기의 심령을 깨닫는 것이 살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는 풍랑을 만난 것이 자신 때문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요나는 거기서 스스로 돌이켜 큰 사명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할/
▶돌이켜 하나님을 찾는 길이 축복의 길이요, 은혜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 없다고 외치는 자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55:6-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죄인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자가 망합니다. 사울 왕이, 헤롯왕이, 가롯유다가 회개하지 않아 망했으나, 베드로는 회개해서 대 사도가 되었고, 다윗은 회개해서 성군이 되었습니다.
회개는 지정의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아는 것이 '지'요, 깊이 마음으로 뉘우치는 것이 '정'이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의'입니다. /아멘!/
⑵탕자는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쳤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탕자는 자신의 죄를 알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했습니다. 탕자는 아들 될 자격이 없는 허물 많은 죄인임을 깨닫고 아버지가 어떻게 대해도 겸손히 낮은 자리에 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눅18: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겸손한 회개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구원에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믿/
⑶일어나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행함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더 이상 죄악의 길에 있지 아니하고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결단입니다. 회개의 열매입니다.
만약 병원에서 병명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치료받지 않고 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죽으러 가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뛰어나가 통곡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할/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들면 세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어떤 아이는 불평, 원망을 하면서 도망을 칩니다. 또 고집 센 아이는 아프다고 소리치면서 울기만 합니다. 그러나 착한 아이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다. /아멘!/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봤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일보 전진하면 하나님께서는 백보 달려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탕자를 아들로 영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수속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이렇듯 빠를 수가 없습니다. 물어볼 말도 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것말고 다른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라 불러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하자마자 은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자마자, 우리가 죄를 고백하자마자, 예수님을 향해 '주여!' 부르자마자 주님은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믿자마자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 현재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사43: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할/
㉥성경은 '돌아온다'는 것을 '회개와 회복'의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고멜과 둘째 아들의 경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⑴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나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발적으로 선택한 유혹이었고 타락이었습니다.
⑵집을 나간 이후로부터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멜은 인신 매매 단에 의해 유흥가에 팔렸고, 둘째 아들은 환락가를 맴돌다가 결국 돼지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⑶둘 다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멜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고,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⑷두 사람 다 용서받았습니다. 고멜에게 남편은, '여보 내 잘못이오. 내가 당신을 잘 돌보지 한 탓이오. 우리 이제부터 딴 맘먹지 말고 사랑하며 잘살아 봅시다' 그러면서 맞이했습니다.
또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내 아들은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다. 목욕을 시키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고 그리고 살진 소를 잡아 환영 잔치를 열도록 하자' /할/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지난날의 잘못이 일체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일을 미주알고주알 낱낱이 따지면서 용서하겠다는 것은, 심판하겠다는 것이지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정죄나 심판은 유보해 놓고 하는 것입니다.
⑸두 사람 모두 타락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녀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을 배신했던 고멜처럼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제 남편의 품을 떠나 다른 남자의 품을 전전했던 고멜처럼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좋은 집, 넉넉한 가산,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놔 둔 채 환락가로 뛰쳐나가 거지가 된 둘째 아들처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향락이 더 좋다면서 그 품을 떠나고 있습니다. 고멜과 둘째 아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자화상이며 그림자입니다. /믿/
⑹제아무리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품을 떠난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도망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찾아가십니다. 인간은 외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면하시고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도망치는 인간, 쫓아가시는 하나님, 어떻게 승부가 결정 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손오공은 부처님 손안에 있지만, 그 부쳐도 우리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믿/
고멜과 탕자의 이야기는 결국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고 기어이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극적인 사랑을 설명해 줍니다. /할/

㉦돌아온 아들이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
⑴제일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의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옷 자랑을 많이 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⑵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이 징표는 신분의 확인이고 권리의 확인입니다.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제 너는 내 아들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⑶발에 신발을 신겼습니다. 오늘 아들이 신은 신발은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가라는 신발입니다. 엡6:15절에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아직도 세상 길에서 헤매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할!/
⑷아버지께서 돌아온 이 아들을 위해서 거창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배설합니다. 잔치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잔치는 축제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생명의 축제요 회복의 축제입니다. /아멘!/할/

㉧현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미신적인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미신적 신앙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미신적 신앙 현상은 기복신앙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가 복을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신앙 현상입니다. 그래서 '축복성회'라는 이름으로 집회도 많고, 또 복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모입니다.
또 다른 미신적 신앙 현상은 예언 제단들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언을 합니다. 아이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지 여부,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 지 여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여부, 등 교인들의 관심사를 예언합니다. 심지어 예언하며 헌금을 받고, 또 아예 가정에서 제단까지 차려놓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를 사칭한 무당 행위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이와 같은 병적인 미신적 신앙 현상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교인들의 의식 속에 이와 같은 미신적 신앙의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어떤 결단이 필요한가요?
⑴기복 적인 신앙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복 적이라는 점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달래서 화를 면하거나 복을 받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미신행위 가운데 하나가 굿입니다. 통상 굿은 네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청신과정입니다. 무당이 귀신을 모셔드리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가무오신과정입니다. 초청된 귀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춤을 추고 소리를 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신청과정입니다. 무당이 귀신의 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귀신의 요구사항이 전달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송신과정입니다. 귀신을 돌려보내는 과정입니다.
굿을 하는 사람들은 인생사의 모든 우환은 다 귀신 때문에 생긴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을 모셔서 요구사항을 들어드리고 달래고 기쁘게 해 드려서 우환을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사의 복도 귀신을 통해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귀신에게 잘 보여서 남다른 복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를 면하고 복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섬기는 대상을 달래려고 애를 씁니다. 귀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빕니다. 필요하면 비싼 돈을 주고 굿도 하고 부적도 사서 간직합니다. 정성을 다해 치성도 드리고 시주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의 진노를 피해서 우환을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신에게 잘 보여서 기대하는 복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복만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미신적 신앙을 극복하려면 우리 신앙의 초점을 복 받는데 두지 말고 내가 복된 사람이 되는데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복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뜻에 맞게 신들을 변화시켜보려고 합니다. 신들의 힘으로 자기 주변의 환경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은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신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나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된 내 모습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복은 자동적으로 옵니다. 시37: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할/
⑵이기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복을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척이나 인색합니다. 수억 원씩 돈을 들여 굿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단돈 한 푼도 기부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들이야 어떻든지 나만 복 받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은혜 받고 내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남들을 배려하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나 외에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그것이 내가 소원하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그것이 내게 유익이 되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내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일이라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할/
⑶회개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옷을 찢곤 했습니다. 아이 성 공격에 실패한 후 여호수아는 회개하며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아합 왕도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경고를 들을 때에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할/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 온 유럽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던 '루이 햇숀' 목사님이 '갈보리 언덕'이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죄와의 투쟁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은 주님의 기준을 맞출 수 없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어린양의 보혈의 피를 온전히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거기에는 아무 자격 조건 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시선을 자기와 세상에 두지 말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죄를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죄를 진심으로 회개할 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서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아멘!/ 신앙은 좀 색달라야 합니다. ▶어떤 동생이 언니한테 '나는 믿어도 언니처럼은 안 믿어!'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언니처럼 매달리고 울고불고 하면서 광신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어도 이성적으로, 타당성 있게, 절제하면서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니가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알 때가 옵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도 있고 저런 신앙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에는 색깔이 많다. 빨주노초파남보, 가지각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아직 교만하기 때문에, 아직 계산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언니처럼 안 믿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무조건 하나님 한 분만 붙들고 울고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대학생의 신앙이 따로 있고 40대의 신앙이 따로 있고, 직장인의 신앙이 따로 있고 노인의 신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입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불쌍한 언니 같은 신앙,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할!/

 

③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할/
주님이 다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 앞에 고침 받지 못할 질병이 없고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시고 육신의 병을 치료 해주시고 환경의 저주와 절망을 치료하여 주시고 깨어졌던 가정이 회복되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믿/
욥5:18-20절에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할/
사41: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사40: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입니다. /할/

 

④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3/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리고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 보면 그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아멘!/
▶여기서 '안다'고 할 때 두 가지의 철학적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헬레니즘으로 헬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고, 또 하나는 헤브라이즘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헬레니즘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별개로서 지식과 감정이 따로 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 결심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적인 생각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하나로 봅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라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많이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가 '야다'라는 말입니다.
'야다'는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서, 체험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앙이 바로 야다입니다. /할/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을 세 종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무관심하게 사는 방임된 인간입니다. 자기를 내버린 인간입니다. '되는 대로 살다가 가자, 하나님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이렇게 관심 없이 살다보니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가?'도 모르고 사는 버려진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 못했으나 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사는 철학적인 인간입니다. 무지개를 따라가는 어린애처럼 '어딘가에 있겠지'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찾아 헤매다가 끝나는 종교적, 철학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섬기며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줄 알았는데 벌써 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벌써 나를 사랑하셨습니다,'하며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사랑을 매일매일 확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멘!/할/
하나님은 이런 지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순간 나를 알고 남을 알며 세상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4: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한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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