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배 자와 거짓 예배 자! (창 4:1-7)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예배드리는 태도를 분류해서 정리한 것을 소개한 글입니다.
설교시간에 강단만 멀거니 응시하는 멀대 파(눈은 보고 있는데 생각은 딴 데 출장 가 있는 사람), 주보의 밑줄을 그으며 교정까지 보는 꼼꼼 파, 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멘 파, 수시로 시계를 보는 안절부절 파, 또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청각장애 파, 예배 후 할 일만 생각하는 염려 파, 설교 시간에 혼자 성경을 읽는 나 홀로 파,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금붕어 파, 기도 시간에 살짝 잠을 보충하는 기회주의 파,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거리는 경비 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을 집중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순정파가 있다고 글을 썼습니다. /할/ 우리는 어떤 파입니까? 우리는 순정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담긴 향기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언젠가 TV에서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에 보면 출연자는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한 가격을 적어 냅니다. 그러면 전문가들은 그것을 자세하게 감정해서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가름합니다. 그리고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매긴 가격을 알려줍니다.
이 때 재미있는 것은 출연자들의 표정입니다. 희비가 완전히 엇갈립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한 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그 그림이 진짜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귀중하게 보관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가격도 당당하게 오천만 원이라고 적어 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자세하게 감정을 하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을 '이 그림은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가짜입니다. 값도 기껏해야 이십만 원에 지나지 않는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그 그림의 주인은 완전히 실망한 표정을 짓습니다. 정 반대의 결과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오래된 것 같긴 하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의 감정을 받고 싶어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가격을 매길 때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삼십만원 정도라고 적어 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감정을 하고 난 뒤에 뜻밖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진짜입니다. 보기 드문 보물입니다.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적어도 일억은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너무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만일 두 사람만 천국에 간다면, 한 사람은 서기관일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리새인일 것이다.'
그만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잘 믿는다고 소문이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마5: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분명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으로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불꽃같은 눈초리로 살피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믿음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눅18장에 나오는 세리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당시 세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세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었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벨과 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믿음을 진짜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인의 믿음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짜 믿음을 가진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말씀하시고, 거짓 믿음을 가진 '가인을 받지 않고 가인의 제물까지도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진짜라고 판단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짜,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판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아벨의 믿음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오늘 창4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갈라지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갈라지게 만듭니까? 학식이었습니까? 점수를 매겨서 60점 이상과 이하로 나눈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적인 노력을 보고 열심히 뛴 사람과 게으른 사람으로 나눈 것일까요? 아니면 얼마나 뛰어난 인간관계를 가졌나를 보고 나눈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예배'였습니다. 결국 예배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백성과 버림받는 백성의 판가름이 났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도 어디서 갈라지냐하면 바로 예배에서 갈라집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열납하셔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예배에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 여러분의 능력, 여러분의 축복이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 하나님이 축복하는 교회, 하나님이 역사하는 나라가 되는 비결도 모두 이 예배에 있습니다. /아멘!/
예배가 살아 있으면 그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 있는 나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반면에 예배가 죽은 교회는 이미 망한 교회요 예배가 죽은 나라는 미래의 소망이 없는 절망 가운데 있는 나라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절기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예배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예배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①먼저 제사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⑴하나님과 직통으로 대면할 때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기 이전에 입니다. 이때는 제사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에덴에서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뵈올 레야 뵈올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⑵가인과 아벨 이후에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8:20절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⑶모세 이후에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출25장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 짓는 법을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고 이제 그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제사장들과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 이후 성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 주셨습니다.
⑷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행2장은 오순절 이후부터 교회에서 하나님과 예배를 통해 교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할/
②제사에는 두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⑴인간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죄 사함을 얻기 위한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시34:18절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할/
⑵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속죄해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의 표현입니다.
속죄를 위한 제사는 의무적인데 반해 응답으로써의 제사는 감사와 감격으로 자발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할/
③그렇다면 예배의 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은 철저히 예배자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순례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다가 저 천국에서는 영원한 예배를 드리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할/
요4:23절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아 망했습니다. 그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시고 복을 베푸십니다. /믿/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때 신령한 눈이 열립니다. 귀가 열립니다. 하나님을 향해 입이 열려 찬양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할/
하나님은 어떤 자를 찾으십니까? 하나님께 봉사를 잘하는 사람, 헌금도 잘 하는 사람, 찬양도 잘하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찾지 않습니다. 권사도, 집사도 찾지 않으십니다. 옷 잘 입은 사람을 찾지 않고, 날씬한 사람도 찾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찾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아멘!/
오늘 이 자리가 주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아오십니다. 예배하는 현장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집에서 예배하면 그곳이 성전이 됩니다.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예배하면 그곳이 성전이 됩니다. /할/
하나님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옛날 왕정시대에 사람들이 왕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이명박 전대통령이 임기 때 그동안 국정감사를 잘한 국회의원들 몇 명에게 격려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일이 있었답니다.
문자 메시지를 받은 국회의원들은 정말 대통령이 나에게 보낸 것인지 의아해 했습니다. 한 비서관은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들려오는 대답은 '나 대통령이오' 그럽니다. 이 비서관이 깜짝 놀라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할/
▶그렇다면 만 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정신 자세가 정말 중요합니다.
⑴예배는 경배입니다. 시138:2절에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할/ 예배의 뜻을 영어 성경에는 '가치를 돌린다. 숭배한다. 인정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숭배하고 존경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엄하심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로 경배를 드리며 그 모든 이름 위에 높으신 성호를 경배한다고 고백합니다. 시29:1-2절에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할/
⑵예배는 섬김입니다. 마4:10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라 하였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 모든 것이 유일하신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한마디로 예배란 우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만 왕의 왕으로 섬기는 행위를 뜻합니다. /믿/
⑶예배는 드림입니다. 이 드림은 헌신이 요구됩니다. 예배는 먼저 기본적으로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믿/아멘!/
㈀예배는 마음의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세리처럼 회개하는 마음을 드려야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사랑하는 마음, 충성하는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마22:37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할/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가장 승화된 감정의 발로이며 예배의 예술적 표현입니다. /할/ 엡5:19절에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할/
㈂몸을 드려야 합니다. 롬12: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 여기서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육체로 할 수 있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전 인격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할/
㈃재물도 드려야 합니다. 레22:20절에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예배에 있어서 헌금은 은혜의 보답입니다. 또 감사와 헌신과 희생의 표시이고 충성심의 외적 상징으로서 예배 가운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느니라' /할/
㈄순종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삼상15: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믿/할/
④거짓 예배자 가인은 어떤 사람인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며 수고를 해서 얻어진 것으로 가정을 이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⑴가인은 '얻었다'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결코 내가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마음대로 자녀를 낳기도 하고 지우기도 합니다. 생명은 내가 낳고 싶다고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낳는 것입니다. /믿/
1절에 가인을 어떻게 얻었는가? '동침하매'얻었습니다. 여기 '동침한다'는 표현은 '야다'라는 말로 '알다'는 표현입니다. 정신 적으나 육체적으로 상대방을 안다는 뜻입니다. 즉 체험해서 안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로부터'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히브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은 사람의 힘으로 원한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믿/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시127: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여러분, 모든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기 때문에 그 주신 분의 뜻대로 키워야 합니다. /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좋은 학교를 보내고 많은 재물을 자식에게 물려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학벌보다 재산보다 더 귀한 것은 신앙입니다. /믿/ 기도하는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순간 잘못 갔더라도 깨닫고 돌아옵니다. /할/
가인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 아들' 하면서 가인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인을 키우면서보니 역시 아담 자기를 닮았습니다. 여기서 '아담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음대로 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자녀들은 아무리 귀해 보여도 아담의 원죄 성을 유전으로 받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정말 귀엽고 순진하고, 천사 같은 아이라 할지라도 역시 아담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를 등한시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믿/
아담이 가인을 길러보니 '인간은 별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순진해 보여도 욕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아무 소용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아예 아벨 '허무하다. 공허하다'로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가인은 큰 실망을 남겨 주었고,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아벨은 훌륭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한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2)'라고 했습니다.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물론 잘못은 아닙니다.
⑵그렇다면 가인의 잘못은 무엇인가? 왜 가인의 제사는 왜 안 받으셨을까요? 그의 인격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고 의가 없고 정성이 없는 인간 행위 적인 제사를 드렸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가인의 인격은 어떠했는가? 요일3:12절에 가인의 인격에 대하여 말하기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인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이 제사는 바로 그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가증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가인이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변화를 입어야 하는데 오히려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 차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8). 이것이 가인의 행위요, 바로 그의 인격입니다. /할/
⑶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6-7).
에덴의 동쪽 끝까지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 오셔서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얼굴이 왜 그렇지 지금. 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느뇨?' 하나님이 몰라서 묻습니까? '그 이유는 내가 알지 않느냐? 너한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더냐? 네가 바르고 진실한 제사를 드렸다면 내가 받지 아니하였겠느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으면 '하나님 죄송합니다.' 그러고 또 드리면 되는 것이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으면 아벨이 왜 영접되었는가를 보고 그렇게 따라 가면 되는 것이지 '왜 저놈은 없어져야 된다'고 이를 갈고 있는 것이냐? 네 마음속에 죄가 있구나? 지금 죄가 짐승처럼 너에게 달려들려고 네 앞에 웅크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 죄를 다스려라 그렇지 않으면 큰 죄짓겠다'고 하나님이 경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할/
이런 경고를 받았으면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커녕 동생을 투기하고 오히려 분을 냈습니다. 이 분은 아벨에게도 해당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분을 냈으니 그 제사가 열납이 되겠습니까?
'선을 행치 아니하면' 이 말은 '잘못을 뉘우치고 선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더 완악한 마음을 갖는다면'이라는 뜻입니다. 방귀뀐 놈이 성내는 이치입니다. 또 여기 '엎드리느니라'는 말은 '잠복하다, 꾸부리라'라는 뜻으로 '먹이를 단숨에 낚아채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짐승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로,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말을 사단이 인간의 마음에 곧 심령에 침입하여 악으로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이 말은 '죄짓고 안 짓고는 네 마음대로나'란 의미입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은 '너는 죄에게 지지말고, 죄에게 삼킴을 당하지 말고, 도리어 죄를 지배하고 정복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멘!/
여러분!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능력은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옵니다. 빌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그런데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혈기로 동생을 죽인 인류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할/
⑤거짓 예배자로 살았던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세요!(사1:1-20)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당신의 불편한 심기를 전달하시기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1)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팔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심 봉사가 기가 막혀 동네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여보쇼 내 말 좀 들어보소' 바로 그런 심정입니다.
또 하나님은 한탄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자식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만은 내 백성 이스라엘은 나를 외면하고 잊어버렸다'(3)고 한탄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에게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도 웬만하면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망은 오늘 우리를 향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우리를 엄하게 꾸짖는 책망이라는 말입니다. /할/
하나님은 선택받은 그 백성들에게 사1:10절에서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라고 부르시며 저주하십니다. 그들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다른 그 어떤 민족이 아니라 바로 그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르시느냐는 말입니다. 그 까닭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그들을 선택하셨지만 이제 그들은 저주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날 것 같으면 그 누구라도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할/
원래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매우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심히 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아주 멸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죄악이 소돔과 고모라에 못지 않다는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이어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고 하시면서 그들의 제사를 거절하십니다. 그러니까 거짓 제사를 더 이상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제사는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간접적이지만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제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또 은총을 받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제사는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거절하십니다. 그들의 제사가 싫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치중합니다. 그들은 그럴듯하게 제사를 드리면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의 참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제사만 드리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자동적으로 죄를 사하시고 자동적으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시면서 12절에서 그들의 신앙행위를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할/
구약의 제사가 신약에 예배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세상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가장 위대한 일은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행위 중 가장 위대한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는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인간 차원의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신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생활에서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전도도 중요하고, 봉사, 교제, 그리고 선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예배의 연장이며, 넓은 의미에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신앙과 삶에서 최우선 순위'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합니다. 반대로 예배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히 확인됩니다. 그 중에 예배에서 성공해서 인생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창12장에 보면,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땅 한 평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게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담합니다. 그는 실망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가는 곳마다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그 당시 예배 방식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제일 먼저 예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12:7-9절에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이와 같은 아브라함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모리아 산에서 제단을 쌓아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중지시켰지만, 아브라함으로서는 이삭을 이미 바친 겁니다. 이것은 최상의 예배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아브라함보다 인생에서 성공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지! 그는 예배에서 성공하고, 인생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할/
▶여러분, 2백 개가 훨씬 넘는 전 세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국입니다.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가 얼마나 짧습니까? 초대 워싱턴 대통령을 기준으로 하면 220여 년, 청교도가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에 상륙한 것을 기준으로 해도 4백 년이 채 안 됩니다. 그런데 미국이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요? 그 비결은 예배의 성공에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예배 잘 드리는 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청교도가 처음 상륙했을 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습니까? 먹고사는 문제와 안전 문제가 시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드리고, 예배드릴 교회당을 지은 겁니다. 그 다음에 학교 짓고, 나중에 자기들이 살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그 전통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 그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가장 부강한 나라를 이룩한 것이 미국입니다.
우리 한국도 이만큼 잘 살 게 된 게 예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 부흥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 배경에는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열심히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얼마나 예배가 많습니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신 겁니다. /할/
⑥왜 가인의 예배와 이스라엘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한마디로 형식적인 예배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마음이 없는 예배였습니다. 겉모양은 갖추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예배의 모습을 사29:13절에서는 단적으로 이렇게 지적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성경을 척척 찾고, 기도도 잘 하고, 찬송 시간에 잘 따라 부르고, 설교 시간에 정숙하게 앉아 있고, 그러나 몸은 와 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데 가 있는 경우입니다. 주님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없이 기계적으로 건성으로 예배에 임하는 모습입니다.
옛날에 극장 구경 간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오래 전에 시골 영감님이 서울에 자식들 보러 올라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모두 바빠서 모시고 다니지 못합니다. 죄송해서 용돈을 드리면서 극장 구경이나 하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보니까 돈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이상해서 물었더니 영감님이 대답하기를 '얘, 서울 사람들 약아빠진 줄 알았더니 참 어리석더구나. 내가 30분이나 여기 저기 둘러보았는데 돈 받을 생각도 안 하더라. 나도 굳이 낼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왔지 뭐' 극장 구경은 했는데 정작 영화 구경은 못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당 구경은 했는데 바른 예배는 드리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두 번째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신앙은 마음 속에 있지만 행실로 나타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중요한데, 더 나아가 삶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의 진실한 모습이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 예배 시간에는 그럴 듯한데, 삶은 엉뚱하게도 악으로 가득하다면 이야말로 큰 모순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되는 것처럼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축복을 받기는커녕 거꾸로 진노가 임한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1:15절에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유대인은 손을 내밀면서 기도하는 습관이 잇습니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예배하고, 간절한 모양으로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축복이 회복되는 것, 이건 원리이며 공식입니다. 딱 떨어지는 진리입니다. 우리 삶이 왠지 답답합니까? 뭔가 꽉 막혀 있습니까? 열심히 사는데도 뭐가 잘 안 됩니까? 하는 일마다 자꾸만 꼬입니까? 그러면 우리 예배를 잘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배의 회복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흠향하실 만한 예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은혜가 넘치는 산 예배로 새롭게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조화와 생화의 차이입니다. 얼른 보면 조화도 그럴 듯합니다. 어느 때에는 더 화려합니다. 하지만 조화에는 은은한 향기가 없습니다. 생화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에서도 향기가 풍겨야 합니다.
▶먼저 마음의 향기가 있는 예배여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마음의 향기가 생길까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정결해야 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사1:18절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사악하고 예배에 실패하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그들의 깨끗하게 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참 예배자로 변화되기를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바라보십니다. /믿/할/
▶또한 우리 예배에 삶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1:16-17절에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악한 행실은 버리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에배가 제대로 드려질 수 있다는 겁니다.
▶마더 테레사가 한번은 거리의 고아를 도와주면서, 목마른 아이 물 한 컵 주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그녀를 칭송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주님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칭찬 받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할/
이런 예배를 가리켜 생활 예배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롬12:1-2절에서 설명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것 자체가 예배라는 겁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향기, 사람의 향기가 담긴 예배로 회복되면 심령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생활이 회복되고, 더 나아가 인생이 회복됩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요한삼서 2절이 바로 그런 원리를 언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배에 성공하면 영혼이 회복되고 잘 됩니다. 그러면 생활의 범사가 잘 됩니다. 계속 그렇게 살다 보면 인생이 복스러워집니다. 그리고 존귀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성공입니다. /할/
⑦참 예배자 아벨은 어떤 인격인가?
히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할/ ▶아벨의 제사를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⑴하나님은 먼저 아벨의 인격을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보다는 먼저 제사를 드리는 아벨의 마음을 열납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마음 없이 드려지는 형식적이요, 요식적인 예배행위는 가인의 제사가 됩니다.
잠15:8절에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할/ 하나님은 재물을 받으실 때, 재물의 종류와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 드리는 자의 마음 자세를 보십니다. 또 하나님은 속성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를 따르지 않은 재물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5:23-24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우리가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저와 여러분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멘!/
육신은 의식주 세 가지가 중요하지만 영혼의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는 사람이 사는 방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의 목적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아멘!/
⑵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굉장히 중히 여기십니다. 히11:6절에서 '믿음을 가장 기쁘시게' 여기셨고 롬14:23절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⑶아벨은 첫 것을 정성껏 드렸습니다. 여기 첫 것은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첫째 되고 가장 최선의 것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할/
⑷아벨은 피 흘리는 재물을 드렸습니다. 레17: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벌써부터 아벨은 이 땅의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귀한 예배의 정신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예수 믿고 구원받았고, 신약의 성도들은 오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기 전에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난 뒤에 짐승을 잡아서 죽이시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범죄한 인생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인생을 구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양이나 소의 피로 구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로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이 구속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이미 아담에서부터 주신 것입니다.
가인은 종교적인 행위를 한 사람이요,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을 안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제사문제에는 단호하십니다. 히9장에서 '피 흘리심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 피를 부리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 양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을 입히신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제사는 반드시 양을 잡아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구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속 이후에는 제사가 폐하여졌고,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할/ 우리 모두 참 예배자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의 씨앗은? (시 126:1-6) (0) | 2022.02.12 |
---|---|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롬 4:1-3) (0) | 2022.02.12 |
사순절에 새기는 거듭남의 삶! (요 3:1-8) (0) | 2022.02.12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3) (0) | 2022.02.12 |
선한 일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 6:1-4) (0) | 2022.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