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롬 4:1-3)
주일날 교회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했습니다. '얘들아 성경은 무슨 내용이니?' 이때 한 작은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누나 성경에는요, 우리누나 애인 사진과 편지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온통 믿음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서의 대 주제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 선한 행위를 하는데 있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사는 생활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일생을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을 빼 버린다면 세상 사람과 삶의 현장에서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색이 없어지고 맙니다. /할/ ◀제목 소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어떤 왕의 아들 잔치에 손님을 초청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랬더니 '밭을 샀다. 장가를 갔다. 소를 샀다'고 핑계를 하면서 오지 않습니다. 손님을 초대하기 위해 음식을 잔뜩 차려 놓았는데 손님이 오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입니다.
왕은 대단히 섭섭하여 '산으로, 길거리로 다니면서 거지나 병신이나 장님이나 가리지 말고 다 불러 오라! 그리고 내 집을 강권하여 채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만하면 자비와 사랑이 무궁무진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왕이 연회석에 나왔다가 한 사람을 보고 화를 내며 '그대는 왜 의복을 입지 않았느뇨? 저를 밖으로 끌어내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무슨 말인가?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말입니다.
무조건 다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어 벌을 주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내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강제로 초청해서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기로 서니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는가?'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복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지금처럼 옷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할 때, 사람이 모이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 옷이 남루했습니다. 그러므로 큰 잔치에는 주인이 예복을 만들어 보내어서 입고 오게 합니다. 이 비유에서도 주인이 보낸 옷을 입지 않았기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죄인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복을 입혀 가지고 자격을 갖추게 한 다음 정당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예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바로 그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바로 예복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믿음의 예복으로 의롭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
▶바울 사도가 아브라함을 진단해 보고 있습니다.
①아브라함도 육신으로는 구원받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바울은 본문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 적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얻었느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도 따지고 보면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75세 때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은 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셨습니다.
창1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정도로 진실된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생각을 따라 애굽(애굽: 검은 땅이란 말로, 빅토리아호에서 내려오는 물이 나일 강으로 범람하여 땅이 시커멓게 발효되어 호미 질이 필요 없는 기름진 땅이 바로 애굽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조금만 농사가 안되면 애굽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세상으로 도망갑니다.)으로 내려갔다가 자신의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여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약해져서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첩으로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었지만, 그 후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자마자 그 가정에 불화가 터져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몰인정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육신 적인 행위로는 아무것도 하나님께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본문의 또 다른 의미는 오늘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육신 적인 행위로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얻을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할/
⑴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육신 된 조상의 후손이 되려면 '혈통이 같아야 합니다. 민족적인 것, 문화적인 것을 이어 받아야 그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대인과 혈통이 같습니까?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물려받았습니까? 아닙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우리의 조상으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⑵그렇다면 무엇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갈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⑶예수를 믿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행위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구원, 생명'을 말합니다. 인간의 노력, 수양, 열심, 행위 등 이런 것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할/
⑷로마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롬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가 로마 교황청 앞에 빌라도의 28층계를 무릎 꿇고 올라가다가 본문 말씀이 전광석화처럼 심령에 박혔습니다. '그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로워지는 것이지 무릎 꿇고 28층 계단을 오르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루터는 중간지점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때 마틴 루터는 '나는 새로 탄생하였고 열린 문을 통하여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과 합2:4절, 갈3:11절, 히10:38절 등 4번이 나옵니다. 바울이 합2:4절을 인용한 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역사적 변천이 가장 극심한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때는 앗수르가 망하고 바벨론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정치가 요시아 왕이 전사하고 앗수르와 바벨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고 있을 때, 갈대아의 군대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갈대아의 군대는 표범과 같이 무자비하고 성난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삼켜버렸고 겁탈했습니다. 어린아이와 노인들을 수없이 살해했으며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유린을 당했고, 그 틈에 모리배 상인들이 돈을 벌었고, 중상모략 자들은 출세를 하고 정의와 공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나님 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이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합2: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그러고 나서 말씀을 주시는데, 4절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들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음으로 정직하지 못하고 그 마음이 심히 교만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믿으라. 믿기만 하면 의인으로 봐줄 것이며 대적을 물리쳐 살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크게 새겨 누구라도 달려가다가도 보고 믿을 수 있게 써 높이 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뱀에게 불린 자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낫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적의 침략이 눈앞에 놓여있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주님은 의롭게 보시고 구원의 손길을 허락해 주십니다.
특히 이 말씀을 인용한 바울이 '기록한바'라고 말한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란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의인, 믿음, 영생' 이 세 가지의 큰 사상으로 구성되어있고 또 그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한 사람은 믿음으로 살고 또 영원히 살게 합니다. 믿음을 떠난 의인은 없고, 믿음이 없는 영생도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봐 주십니다.
빌3:9절(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그래 너는 옳은 자다, 완전한 자다'고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법적 선언'입니다. 여러분! 세상 법정에서는 그 재판장이 무죄를 선언하면 죄가 없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이 법적으로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롬8: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할/ 하나님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믿/
▶어느 장로님의 외아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장례 때 모든 교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장로님은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주례한 목사가 나중에 물어보았더니 '저는 불 타 죽은 아들을 보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 '의인, 믿음, 영생'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참 신앙고백입니다. /아멘!/
②아브라함도 그의 어떤 행위로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논증을 시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행위를 통해서 의를 얻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안타깝게도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의 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도덕적인 의입니다. 한 마디로 착하게 살면서 쌓아 가는 의를 말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선행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을 선행으로 쌓은 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농촌에 친구도 없이 외롭게 그리고 인색하게 살고 있는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이 자기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배고픈 거지가, '마님! 먹을 것 좀 주세요' 하고 구걸을 했습니다.
이 인색한 부인은 탐스럽게 열린 토마토나 오이, 가지 같은 채소는 아까워서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 하나 줄 것이 없나 하고 채소 밭 주변을 돌아보다 밭고랑 언덕에 씨가 잘못 떨어져 자라고 있는 무 한 포기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선심이나 쓰듯이 그 무를 거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이 부인으로서는 그나마 평생 처음 선행을 한 셈이었습니다.
얼마 후, 이 부인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거세게 항의를 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지옥에 와야 하느냐? 나도 세상에서 살 때 선행을 한 일이 있다.' 담당 천사가 무슨 선행을 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때 부인은 궁색하지만 '아무 때 배가 고파하는 거지에게 무 한 포기를 준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에 천사는, '한번 확인하고 오겠다.'고 하고는, 창고에 들어가서 여인이 행한 착한 일을 찾아보니, 과연 시들시들한 무 한 포기가 여인의 이름 밑에 놓여 있었습니다.
천사는 그 무 한 포기로 부인을 건질 수 있을까 하여 그 무 잎을 들고는 부인더러 무 밑 둥을 단단히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지옥에서 낙원을 향하여 날아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옥에서 천국을 행해 날아가던 도중 무 잎줄기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지옥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선행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저 천국으로 붙잡고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선행의 끈을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행위의 의는 종교적인 의입니다. 한 마디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쌓아 가는 의를 말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를 철저하게 준행하며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을 종교적 헌신으로 쌓은 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종교적인 의를 추구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로 바리새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종교적 열심에 대해 인정을 받고 있던 부류의 신앙 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주의자란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종교적인 의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종교적인 의는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적인 의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거리는 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받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도 이 종교적인 의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는 사월 초파일만 되면 꼭 절에 가십니다. 그리고 식구 수대로 절 마당에 연등을 매달았습니다. 출가한 딸 사위 외손자까지 다 등을 달았습니다. 심지어 사위가 목사인데도 연등에 그 이름 적어 달았습니다. 이 할머니 생각에 그 이름을 연등에 달아 매달아야 부처님의 자비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돈 많은 재벌은 절을 몇 개나 지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에 가지도 않고 불교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절을 지어 바칩니다. 그 정성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종교적인 의는 칭찬 받을 자격은 될 수 있지만 결코 구원을 받을 자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할/
⑴이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오늘날 이 죄악 된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행위로써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자랑'이란 말은 바울이 자주 쓰는 말 중 하나입니다. 자랑이라는 말속에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랑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사람이나 자랑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게는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데도 역시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를 자랑하고 우리 성도들을 자랑합니다. 여러분들도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를 자랑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야!' 신앙은 입술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멘!/
사람들은 새 집을 자랑합니다. 새 자동차를, 출신학교를, 돈, 지위, 재주, 남편, 자식들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사실 우리에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셨는데 내 것인 양 어찌 자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율법이나 행위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빌3:4절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사람들이 육신 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도 자랑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 중에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예수를 아는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해서 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사실 바울은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아니하고 그럴수록 겸손했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으며 자기는 연약함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할/
⑵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믿음을 통하여! 믿음에 의하여!'입니다.
롬3: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 26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절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할/
⑶의롭게 되는 길은 무엇인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 오직 이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그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요6:28-29절에 보면,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하신 일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주신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봅니다. 시23편에 보면 다윗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풍성한 식탁을 이미 다 차려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할/
⑷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내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아멘/
㈁죽었다가 부활 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아멘/
㈂다시 오실 심판 주, 재림 주를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우리는 그저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이 의인이 되는 길입니다.
깡패 김익두는 예수 믿고 의인되어 당대에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돈만 알던 수전노 삭개오가 예수 믿고 의인됐으며, 한때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도 예수 믿고 바울이라는 겸손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과 원수 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할/
⑸'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지금까지 악했던 사람, 선했던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적게 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힘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또는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홍인종, 인종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란 말은 곧 예수 믿을 때에 스위치를 올리면 즉시 전등의 불이 밝는 것처럼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순식간에 하나님의 의로 덮이게 됩니다. /믿/
롬3:27절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구원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은 어디 손을 들고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법으로냐?'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무슨 원리에 의해서냐? 행위로써냐? 네가 잘나서 그러냐? 너에게 공로가 있어서 그러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다 이루어주시고 우리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의 손을 내밀어서 받을 뿐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시고 '너희는 그저 믿음으로 받아라'고 하시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하고 받으면 될 텐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믿음이 가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행위 문제가 계속해서 솟구쳐 오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내가 일을 해야만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일종의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랑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심리입니다. 안됩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멘!/
③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9절에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리고 1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바로 그것이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 성에 어느 날 갑자기 적군이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롯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있는 사병들을 이끌고 밤중에 기습작전을 펴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롯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왜? 언제 적군이 보복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셔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상급이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보시다시피 저에게는 아직도 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서 기르고 있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난 너의 씨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 아브라함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 많아 늙었고 아내 사라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 많은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멘!/
예나 지금이나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 적은 믿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 한 가지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15: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바울은 이 말씀을 꼭 붙잡고 여러 곳에서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⑴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성경 전체의 사상입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큰 믿음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믿음을 키워 가면서 쓰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왜 나에게 뜨거운 믿음이 없을까? 왜 내 믿음이 이 모양일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에 조성된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세우시고 더 큰 믿음의 주인공으로 삼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⑵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는 믿음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양심과 이성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계시에 들어갑니다. 또 특별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거나 말씀으로 나타내시는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버지와 조상들이 믿어오던 우상은 생명이 없고 오직 인류의 흥망성쇠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우상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 사상까지도 바꿨습니다.
㈁말씀대로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고 할 때, 그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실 이방 땅으로 가라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히11;8절에 보면 '갈 바를 전혀 몰라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만 믿고 고향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창12;4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다'고 했습니다.
㈂약속을 믿고 미래 지향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의 약속을 했습니다. '첫째, 너에게 자손을 주겠고, 둘째,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땅 문서를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땅을 주실 것을 믿고 천막을 치고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자손을 하늘에 별처럼,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주시겠다고 약속한 지가 20년이 다 가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떠나라! 아멘! 버리라! 아멘! 누구를 버리라고 했습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바치라! 아멘!
④본 장에서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⑴그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17).
'그가 믿음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말씀은 바울이 창17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창17: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뜻은 '함께 하셔서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남자가 100세이고 그 아내가 90세라도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 나이가 100세이고, 아내는 90세이지만 그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상황을 보지 않고, 가능성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로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아멘!/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상상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 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이런 일은 창조주 이외에는 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약을 보면 엘리야의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다시 살려 놓으셨습니다.
왕상17:17-24절에 보면 엘리야에게 마지막 떡 한 조각을 만들어 공개한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그 다락에 올라가서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할/
▶엘리사의 하나님도 보면 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과 그를 다시 살리는 역사를 베풀었습니다. 왕하4:17-37절에 보면 엘리사에게 종종 음식을 대접하고 남편과 함께 엘리사 일행이 쉴 방을 예비한 그의 부인이 바로 이 수넴 여인이었는데 그 남편은 늙었고 그 부인은 자녀가 없었습니다만 엘리사가 그들의 정성을 고맙게 여겨서 축복한즉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추수할 때 아버지와 함께 밖에서 있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어머니 무릎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집으로 청해 왔습니다. 엘리사가 자기의 침상에 어린아이를 뉘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엎드려 엘리사의 얼굴과 손을 아이의 얼굴과 손에 대니 몸이 조금씩 따뜻해 졌습니다. 엘리사가 두 번째 대었을 때 아이가 재채기하고 눈을 뜨며 살아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할/
▶예수님은 물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이 가서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 하니 살아서 일어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관에 들어가서 상여에 얹혀서 장지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행렬이 지나가는 곳에 예수님의 행렬이 오다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일 아닙니까? 여기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관속에 들어가서 상여에 매여서 장지로 가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이 오셔서 만나자 죽음의 행렬은 생명의 기쁨으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관 뚜껑을 열게 하시고 죽은 자를 보고 청년아 일어나라 하니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할/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오장육부가 부패했습니다.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살아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서 살리라고 해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 그가 온몸에 수의를 둥둥 동여맨 체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할/
▶아브라함은 창조주 하나님 즉, 기적의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히11:17-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할/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는 믿음입니다. /믿/아멘!/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에 태의 문이 닫힌 사라의 통해서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믿음 안에서 없는 것을 있게 받는 실례들이 많습니다.
▶딸만 다섯 둔 집사 님이 눈물 뿌려 기도했더니 아들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예 40이 넘는 어느 자매 님은 예수 믿고 아들 얻었다고 기뻐하며 간증합니다. /할/
⑵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은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으로 절대절망을 절대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할/
창15장을 보면 당시 아브라함의 처지는 대단히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으로 들어온 지 5-6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 아브라함을 불러냅니다. 밤하늘에는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가리키면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가 믿습니다.' /아멘!/ 아브라함은 바라볼 수 없는 중에 바라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환경에서 볼 때, 바랄 수 없는 상태에서 바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적인 희망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할/
인간의 희망이란 제약된 것이 많습니다. 학벌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명문대학에 들어가려고 머리를 싸매고 공부합니다. 집안이 좋아야 합니다. 집안 때문에 많은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별을 체험합니다. 또 능력이 있어야 인정을 받습니다. 같은 입사 동기생들 중에서도 하나는 과장, 하나는 계장, 평사원 등 이렇게 능력별로 진급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희망은 제약이 많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행진은 제약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앙, 그것이 바라 볼 수 없는 중에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믿/아멘!/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 중에 바라보았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이름이 창대케 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할 때, 그는 믿고 일어섰습니다.' /할/
⑶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었습니다(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 66권의 약속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아멘!/
아브라함은 '그냥 이루는 것이 아니고 능히 이루실 줄 확신'했습니다. 믿음은 확신입니다.
빌1: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도 생수를 내시고, 오늘도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할!/
⑷우리도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딤후3:1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당부합니다. 신앙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찍이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교육을 받는 유일한 동물이며, 교육을 통해 동물성 대신 인간성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답게 살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인간답지 못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신앙교육을 받아야만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딤후3:17절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 능력은 교육을 통해서만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우선 '배우고'라는 말은 '배우다, 학습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배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배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배움이 사람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써야 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워야 믿음이 자랍니다. 배워야 믿는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할/
다음으로 '확신한'이라는 말은 '분명하게 알다, 확실하게 깨닫다'라는 뜻입니다. 배우면 확신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하라'는 말은 '머무르다, 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배우고 확신한 말씀 속에 머무르고 그대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알고 깨달은 것을 지속적으로 마음속에 담아두고서 계속해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할/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인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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