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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by 【고동엽】 2022. 2. 12.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실라와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3주 동안 데살로니가에서 열심히 말씀을 전했는데, 그들의 말씀을 듣고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시기해 불량배를 동원, 소동을 일으켰고, 그들은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도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핍박은 계속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어려움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인내함으로 놀랍게 부흥 성장했고, 성도간의 따뜻한 우애로 마게도냐와 아가야 뿐 아니라 온 지역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됐습니다. /할/
오늘 본문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때가 있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때가 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 멸망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세상 종말이 오는 날을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주의 날'은 예수님이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날입니다. /할/
오늘 본문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제목 소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우리는 낮(빛, 생명)에 속한 자입니다. 5절에서 ‘낮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낮’을 '빛'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 '근신하라'는 말은 원래 ‘술 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을 가지라’는 뜻으로 도덕적으로 단정한 생활을 강조한 말입니다.
우리가 근신한다고 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그들에게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신앙 인이 세상을 살고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필수 요건이 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붙들고 주안에서 승리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①믿음으로 살자!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우리들의 신앙의 행위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 그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상이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나의 삶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 중심을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할/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갖자' 믿음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갖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믿음을 지키고 살기가 참 복잡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뜻을 세워야 하고,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할/

 

㉠우리의 믿음이 믿음다워지려면 몇 가지 우선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⑴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입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이 우선되게 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 속에 관심 속에 하나님이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나에게 먼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믿/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이 같은 우선 순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⑵주일을 소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사58:13-14절에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할/
여러분, 주일을 생명처럼 지켜보십시오. 주일을 지킨다는 말은 내 인생, 내 중심을 성전중심으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내가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주일을 지킴'이 헌신이고 투자이고 고백이고 순종입니다. 바쁜 시대에 할 일은 많은데 하던 일들을 다 놓아두고 주일날 예배드리러 간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삶에 주님이 중심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의 앞길을 안내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주일날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일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도 주일날이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도 주일날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은 날도 주일날입니다.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날도 주일날 새벽이 될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일하느라고, 돈 버느라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주일날 놀러가고 여행가고 운동가고 잠자는 분들도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할/
⑶십일조 생활입니다. 말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성경에는 '십'자로 시작하는 정신이 세 가지 나옵니다. '십계명 정신', '십일조 정신', '십자가 정신'이 그것입니다.
'십계명 정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십일조 정신'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정신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인류의 죄를 청산하시려고 갈보리언덕 십자가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우리의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정신입니다. /할/
십일조를 통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무엇인가? 하늘 문이 열리는 복과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늘과 땅과 바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온전하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드리는 것이 축복의 기름길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창고', 즉 성전, 나의(하나님) 집인 교회에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축복이 어디에서 옵니까? 하늘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제때에 비가 풍족하게 오면 농사가 잘되어 목축도 잘되고 사람도 풍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때에 비가 오지 않고, 6개월, 1년, 2년, 3년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식물은 다 말라버리고 짐승과 사람도 굶주리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적당히 비가 내려야, 하나님께서 근본적인 축복을 주셔야 모든 것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14:22, 29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고 가르쳤습니다. 대하31:6, 10절에도 '히스기야도 유다 백성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와 헌물이 축복이 되어 다시 그들에게 돌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인복과(福因福果)'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된 일을 하면 복된 결과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씨를 심어야 좋은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 앞에 축복과 사랑을 받으려면 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내가 하늘 문을 열고'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요, 통로입니다. 반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부는 절대로 그물을 팔지 않습니다. 농부는 아무리 어려워도 종자 씨를 먹지 않습니다. 화가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붓을 없애지 않습니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는 어디를 가든지 가지고 다집니다. 내 머리를 깎아 주는 이발사는 6.25때 가위 하나만 들고 다니면 먹는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위는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성도는 십일조만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아멘!/
▶십일조를 드려도 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⑴즐거움과 감사로 하지 않고 부담감과 의무감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수입이 많은 분일수록 인간의 계산이 앞섭니다. 그러나 의무감으로 드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의 일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
⑵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⑶십일조를 드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서 내가 십일조를 드리기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다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더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할/

 

㉡믿음의 또 다른 바른 이해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믿음으로'라는 말이 232번이나 나오고 있고, 히11장에서 만도 2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롬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히10: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핵심은 모두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이 10가지 10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열 가지를 이사야 선지자는 여섯 가지로 요약을 했고, 미가 선지자는 이것을 세 가지로 요약을 했고, 하박국 선지자는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을 했는데 그 한마디가 합2:4절에 나와 있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는 유명한 말입니다. /할/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인가?
⑴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요11:40).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올 때마다 언제나 들르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동구 밖에서 살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입니다. 일찍이 부모를 잃어버리고 남매들이 아주 우애 있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지극히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주님은 그 집에 들어가서 종종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저 요단강 건너편 먼 곳에 계시는데 나사로가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신속히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으니 빨리 와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도 3일 동안 머뭇거립니다. 예수님이 오시는지 간절히 기다리며 문풍지 소리만 나도 방문을 박차고 나가서 살피던 마리아와 마르다도 오라버니를 장례 지내고 난 다음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지 사흘이 넘어서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리라'고 하시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위로 차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알고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부활의 날에 다시 살아날 줄을 믿습니다.' 그렇게 말했지 지금 살아날 것이라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오라버니가 지금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저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많은 유대인들이 위로하러 왔고 구경꾼들도 와 있는데 무덤에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군중이 모여서 가는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앞서서 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섰다'고 요11:3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통분히 여기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죄 값으로 이 죽음과 슬픔이 인류에게 다가오게 되었으니 통분히 여긴 것이고, '민망히 여긴 것'은 지금 살아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도 우셨다고 했습니다. 요11: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할/ 이 장면을 보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울면 주님도 울만한 자리는 우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 주님도 박수를 치고 웃으십니다.
하나님은 '지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기쁨도 보십니다. 우리의 문제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할/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가에 오셔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마르다가 너무 청천벽력 같은 말씀에 놀래 가지고서 사람들을 바라보니 사람들마다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눈에 눈물을 잔뜩 흘리면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님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므로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그러니까 헛수고 안하고 무덤의 돌을 옮겨놓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마르다를 보시고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십니다. 즉 안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못 보지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시지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역사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지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여러분의 많은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의 문제가 있는데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으면 하나님 영광이 나타납니다. 믿지 아니하면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살릴 줄 알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됩니다.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못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와서 돌에 매달려서 돌을 옮겨놓으려니 그 큰돌이 잘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결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면서 돌문을 옮겨 놓으니까 그 때 예수님이 무덤 앞에 서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시고 난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자, 그 말 한 마디에 죽었던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수의를 온몸에 돌린 채 그대로 걸어 나옵니다. /할/
주님의 말씀은 창조자의 말씀입니다. 죽어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주님 말씀 한마디에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 되신 그분의 말씀 한마디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능력의 말씀으로 세상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할/
⑵믿음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의 축복입니다(마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 노력한대로 될지어다. 너 공부 많이 한대로 될지어다. 너 잘난 대로 될지어다.'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케이스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할/
마8:5-6절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여기 나오는 백부장은 바로 로마의 정규 사관학교를 나온 고급 장교로써 가버나움 지역의 한 치한 책임자입니다. 눅7:5절 이하를 보면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인들에게 모든 재산을 착취당하였으므로 가난하여 그 마을에 회당 하나도 짓지 못하고 있을 때 안타깝게 여긴 이 백부장이 자기의 재산을 들여서 교회를 세워주었다고 나옵니다.
그만큼 백부장은 신앙이 있었고, 인격이 있었고, 인정이 있었고, 덕망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방 사람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사건부터가 빅뉴스입니다. 그런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간청합니다.
이런 귀한 신앙을 보신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십니다. 억지로 가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 좋게 흔쾌히 승낙하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부탁한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해 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이럴 때, 받는 분도, 해주는 분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기분 좋게 흔쾌하게 승낙했습니다. 여기서 '내가'라는 말을 사용하여 치유의 주체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할/
그런데 백부장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얼마나 겸손한 신앙입니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 성을 깨달은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당시 백부장 정도면 공중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세 높은 지위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겸허한 마음의 자세는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이요, 주님은 영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약4: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할/
백부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입니다. '다만 말씀에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할/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감탄하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서 '이만한 믿음'은 '위대한 믿음, 엄청난 믿음, 큰 믿음'이라는 뜻이요, '네 믿음대로 되어지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할/
이런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가라!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언하시자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여기 '그 시로'는 '바로 그 순간부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믿고 집에 돌아가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종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일어나 웃으면서 뛰어 다니며 부지런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의 마음에 근심이 떠나갔습니다. 종은 병이 낫고 백부장은 마음의 근심의 병이 고쳐졌습니다. ▶종과 백부장은 믿음으로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할/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 곳,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대로 되어지는 종교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됩니다. 적게 믿으면 적게 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큰 믿음을 가지십시다. 백부장은 그의 믿음대로 종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일어나 부지런히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15:28절에서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능히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엡3: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리라' /할/
⑶믿음은 우리 '주님이 보시는 것'입니다(마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회중들은 주님의 말씀에 도취되어 은혜 충만, 말씀 충만,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그 현장에 갑자기 이상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갑자기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그곳을 통하여 줄에 매단 침상하나가 예수님 앞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리둥절합니다.
사건은 한 중풍병자를 둔 네 사람이 그를 데리고 예수님 계신 집회 장소에 갔지만 너무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이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내고 침상에 줄을 달아 예수님 설교 단 앞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집은 2층 스라브 집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옥상은 항상 귀하게 사용합니다. 그곳에 올라가 기도도 합니다. 네 친구들은 비상수단으로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줄을 매달아 중풍병자의 침상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놀라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할/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이 보는 관점과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다릅니다. 사람은 환경을 보고, 조건을 보고, 외형을 보지만 우리 주님은 그 마음 중심에 믿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저희가' 누구입니까? 네 사람의 친구들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사람들의 믿음 만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가 가고 싶지 않다고 막무가내였다면 그들이 데리고 올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중풍병자 마음속에 간절하게 주님 앞에 와서 고침 받기를 원하고 있을 때 네 친구들이 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저희 믿음이란 환자 자신을 포함한 네 친구들의 일치 합심한 믿음인줄 믿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침상 채 달아 내렸습니다. 어찌 보면 저들의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물도 헤치고 나올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뚫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적극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장애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저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기의 이성으로 돌아가고, 경험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똑한 체 하며 합리적인 방법을 추구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하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되고 맙니다. 믿음으로 하면 죽는 것 같지만 살아납니다. 믿음으로 하면 망하는 것 같지만 흥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할/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연합을 이루는 믿음입니다. 한사람의 힘도 큽니다. 그러나 두세 사람의 힘이 합해지면 더 큽니다.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고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신앙을 존중히 여깁니다. 개인의 신앙에 따라서 그 사람의 구원과 축복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혼자 믿는 것보다 온 가족이 일치 합심할 때 그 신앙은 역사를 이루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교회 안에 믿음도 그렇습니다. 내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협력하고 합심해야 하나님의 일이 감당됩니다. 교회 생활은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십시일반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합심협력하면 큰 힘이 생깁니다. 무거운 것도 가벼워지고 어려운 것도 쉬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4: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면 나도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할/
㈁역경도 헤치고 나가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너무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다고 거기서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간 것처럼 이들도 지붕 위 옥상으로 올라가 남의 집 옥상을 부서뜨립니다.
그들은 욕을 얻어먹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보면 신앙생활의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장애물에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다 포기해도 신앙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어떤 역경과 어려움이 왔더라도 뚫고 나가십시오, 이 친구들은 그 역경을 뚫고 나갔습니다. 이런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아멘!/
㈂저들은 확신 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고칠 수 있다.'라는 강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글쎄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의심 있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렇게 무거운 환자를 데리고 거기까지 올라갈리 만무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다. 구원의 확신, 응답의 확신, 축복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들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졌습니다. 약고보 장로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었습니다.
저들은 수고도 불사했습니다. 주님은 말세에 믿음을 보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산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십니다. /할/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성경은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망의 길로 가게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32:1절에서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할/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복음의 일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문제만 해결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믿/
아담의 죄로 인한 저주, 가난, 질병의 문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자동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됩니다. /믿/ 그래서 주님은 병보다 더 무서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멘!/
⑷믿음은 하나님을 맛보는 것입니다(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맛으로 승부하자' 이 말은 음식점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독실한 믿음의 가정에 옥동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어머니가 새로 태어난 손자에게 젖도 나오지 않은 늙은이의 젖을 물리고 빨리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마른 젖을 빨리지 마세요. 제 젖이 잘 나오고 있어요' 그래도 막무가냅니다. 너무나 귀여운 손자이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던 며느리가 목사님에게 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목사님이 한 마디로 말했습니다.
'그러면 맛으로 승부하세요' 이 말이 식당 가에서 유행하게 되었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맛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그 맛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아멘!/ 다윗이 하나님의 맛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당당하게 주신 말씀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맛본다'는 말은 '음식 맛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먹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 3천명과 함께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도망을 가다가 적군이었던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하기를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골리앗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외쳐댄 인기 절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기껏 안전할 것이라고 도망쳐 온 곳이 불안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미친 사람 흉내를 냈습니다. 대문에 몸을 긁적거렸습니다. 그리고 침을 수염에 질질 흘렸습니다(삼상21:13) 아기스 왕이 이런 모습을 보고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미치광이 아니냐? 이런 사람을 왜 내게 데리고 왔느냐? 우리나라에 미친 사람이 없어서 기껏 이런 미친 사람을 내게 데리고 왔느냐?' 그리고 다윗을 내쫓았습니다. 다윗은 아둘람으로 도망을 쳐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신 체험을 하면서 하나님을 맛보고 체험한 상황을 시편에 기록했습니다.
맛좋은 음식점에 다녀오면 그 집을 자랑하게 되듯이 다윗은 하나님을 자랑할 정도로 하나님을 깊이 맛보았습니다.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 맛은 어떤 맛일까요?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맛보았습니다. 시34:4절에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할/
㈁곤고할 때 환란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맛보았습니다. 시34: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천사가 진을 치고 건지시게 하시는 하나님을 맛보았습니다. 시34: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부족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맛보았습니다. 시34:9-10절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체험에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②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삶은 미래 적인 삶입니다. 미래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 장차 나에게 면류관이 예비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할/
신앙인의 삶은 이렇게 미래를 준비하며 기대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했습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미래는 하나님이 이루시고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기대하고 꿈꾸고 바라보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런 기대와 꿈을 가지면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아멘!/
원래 소망이란 원어의 뜻은 '피난을 가기 위해 서둘러 간다, 살길을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말이 상징적으로 변해 '확신한다, 신뢰한다, 안전하다'라는 뜻이 된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벧전 1장에서 '산 소망'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 소망이 살아있는 소망이며 생명이 있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산 소망이 되십니다. /아멘!/
▶벧전1:4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산 소망의 조건을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⑴'썩지 않고' 우리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썩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썩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 기업은 썩지 아니합니다. 부활의 몸도 썩지 아니할 몸입니다. 고전15:52절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할/
⑵'더럽지 않고' 땅은 사람의 죄악으로 손상되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것들은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혀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깨끗합니다. 그곳은 사람의 범죄한 손으로 세운 나라가 아니므로 정결합니다. 그곳에 있는 것, 그 나라에 속한 자 모두 정결합니다. /아멘!/
⑶'쇠하지 아니하는' 세상 것은 세월이 지나면 쇠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습니다.
⑷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있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할/
그런데 세상이 주는 소망은 그렇지 못합니다. 곧 변하고 오염되고 추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소망은 영원한 소망다운 산 소망입니다. 시39:7절에서 시인의 고백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할/ 주께 소망을 둔 사람은 넘어지는 것 같으나 일어서게 됩니다.
눅12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어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업에 성공하여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큰 창고를 짓고 거둔 곡식을 저장하고 배를 두드리며 자기와의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부터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면서 그 물질에 소망을 두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현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업에 소망을 거는 사람은 그 사업이 몰락할 때 함께 몰락합니다. 우리가 IMF시대에 얼마나 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기업가들이 몰락했습니까? 가진 소유에 소망을 거는 사람은 그 소유가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권력에 소망을 둔 자들도 그렇습니다. 그 권력이 붕괴되면 함께 붕괴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한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믿/ 여기에 우리가 빨리 눈을 떠야 합니다. /아멘!/
시71:14절에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라고 합니다. /할/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할/

 

③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호심경은 개혁 성경에서는 '흉배'라고 했습니다. 흉배는 가슴을 보호하는 군인들이 무장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말은 가슴을 건강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가슴이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슴은 정신의 공급처입니다. 그래서 이 가슴이 병들고 찌들고 악해지고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게 되면 세상을 향해서 악한 삶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사랑을 베풀며 선하게 살아갑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도도하게 흐르는 몇 가지의 사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⑴경신사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웃어른을 공경하는 경장사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가정에서도 부모를 공경하고, 사회에서는 나이 많으신 분을 공경하고, 센머리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스승을 존경하고, 선배를 대우하는 이런 것이 다 '경신사상'에서 오는 정신입니다.
⑵애린사상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사상이 결여되면 종교는 거추장스러운 사치품이 되고 맙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정치, 경제, 봉사 그 어떤 것도 가치를 상실합니다.
특히 남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은 '애린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애린사상이 결여되면 의사와 환자는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운수업자는 사람을 짐짝 취급합니다. 요식업자는 돈을 벌기 위해 먹는 음식에 인체에 해로운 물질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⑶보은사상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일괄해서 흐르는 사상이 바로 이 '보은사상'입니다.
보은사상은 '은혜에 보답하고,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 오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께 순종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사상입니다. 이와 같이 '경신사상, 애린사상, 보은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이요, 도덕의 기준이 되고 사랑의 실천 학이 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베이커'는 '사랑으로 이끌면 잔인성이 물러간다.'고 했고, '버튼'은 '제아무리 강한 밧줄도 실오라기 만한 사랑의 줄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들을 놓지 않는 견고한 사랑의 줄입니다. 요13: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가지 사랑하시니라' 이 사랑으로 우리 모두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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