령을 따르는 생활! (갈 5:16-18)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는 부탁이고, 또 하나는 성령을 받거든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분부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기 시작한 지 10일 만에, 부활 후 50일 만에,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날은 오순절인 명절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바로 오늘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룩한 날입니다. 교회력으로 볼 때 바로 성령 강림 주일인 것입니다.
예수 사후 제자들은 위축되었고 실의에 빠져서 낙심하고 의기 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나서 제자들은 비로소 새 힘을 얻었고 새 능력을 받았고 그래서 새 각오를 가지고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 이 땅에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의 영을 지녀야 합니다. 이 영을 지닌 사람을 일컬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을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 즉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관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이 성령을 따르는 삶입니까?
1. 성령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사람의 삶에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심에 기준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도덕에 기준을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불의를 행치 않습니다 불의를 보면 고발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가만히 있어도 그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간의 기준을 정의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에만 기준을 두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궁극이 아니기 때문입닏.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것들이고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2.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기준을 두고, 인도를 받고, 순종해 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교사입니다. 그는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붙잡고 예수를 전했고, 십자가를 소개했고, 부활을 전했고, 천국을 전했습니다.
칸트는 백림대학 거대한 강당에 수재들만 모아 놓고는 자살 강의를 했고, 아볼로는 아덴의 아폴로 광장에 수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는 화려한 웅변을 퉁해서 명성을 날렸지만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의 비탈길을 거닐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예수, 십자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아무 곳에나, 아무데나 가지 아니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길을 따라다니며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에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때 성령은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그들은 따라가면 됩니다. 구름 기둥이 서면 서고, 가면 가고, 멈추면 움직일 때까지 멈추어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령은 앞으로 가라 하시는데 나는 뒤로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부준의 사람들은 뒤로 갑니다. 내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것은 내 소욕대로 사는 생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3. 성령의 힘을 받아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오늘은 풍요의 시대입니다. 그 어느 시대에 비해서도 오늘은 풍요롭습니다. 발전도 눈부십니다. 집도 소유했고, 승용차도 소유했고, 문화 혜택도 받을 만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흡족하지가 않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왠지 가슴이 텅 빈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우리의 실력입니다. 그 이상은 안 되니까 사람들은 고민도 하고, 술도 마시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힘을 받아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 힘이 내게 임하면 나의 능력을 초월합니다. 나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나의 무능이 보완됩니다. 성령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일을 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돈을 가지고 일을 하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과시하고, 힘을 발휘하려고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을 보면 요령 가지고 일을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면 언제나 수단이 앞섭니다. 자기 생각이 앞섭니다. 하나님의 일이 돈으로, 요령으로, 재주로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질투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고, 편이 갈라지고, 서로가 불편해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외국 말을 잘했습니다. 선교 단체에서는 이 사람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선교지에 파송했습니다. 말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일을 하는데 너무도 못합니다. 언제나 수단과 요령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말의 실력만을 과신하고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선교가 말만으로 되는 일입니까? 거기에는 성실성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이 서툴러서 염려했던 사람들은 가서 일을 아주 잘해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일은 언제나 진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힘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을 입어 그 힘으로 살고, 그 힘으로 일하고, 그 힘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그리스도인이고,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 땅에 성려을 보내신 것입니다.
4.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무당은 귀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귀신이 시키는 대로, 그가 주는 힘으로 일을 하고, 점을 치고 합니다. 주정뱅이는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술이 시키는 대로 오줌을 싸고, 뒹굴고, 추태를 부리고 합니다. 술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에게 이끌려 살고, 조종받으며 살고, 그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 생할의 참위력이, 참기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지배를 받을 때 얻어집니다. 예수께 꽉 붙들려 살아갈 때 얻어집니다. 내가 완전히 성령의 지배하에 있을 때 얻어집니다. 이 상태를 성령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목사입니다. 공산치하의 루마니아에 밀입국을 해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간첩혐으를 받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전도를 합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나서는 "내가 어디까지 전했더라"하고는 다시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맨정신으로 되는 일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지배하에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고 인간 그 이상의 용기와 집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길을 가다가 양지 바른 쪽에 잘 지어 놓은 집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래서 두 번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의 아름다움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에게 악한 사람이 그 집에서 살고 있으면 그 집은 값이 없는 집입니다. 그 집은 아름다운 집일 수가 없습니다. 강도의 소굴에 불과합니다.
내가 겉에서 볼 때는 볼품이 없고 왜소해 보일지라도 내 속에 모든 힘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이 함께하시면 나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서 성령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륵,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육신대로 보이는 것과 만져니는 것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했고, 보아 왔으나 이제부터는 성령의 기준으로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고 보니 그 보는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성령 강림 주일을 맞아 이 성령의 힘을 받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승리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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