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한계
요 6:5-13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
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시고자 함이라.
오늘 성경 말씀은 오병이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희망을 주고 가능성을 주고 세상에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말씀같이 들려집니다. 오늘 현대인들로 하여금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그런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이런 희망이 어디 있고 이런 신기한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뭔가 길이 있고 방법이 있음을 암시해 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인구는 늘어나고 자원은 고갈되고 먹을 것은 부족하고 미래가 염려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이 한 가지 방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미래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것이 유전자 농법입니다. 이 유전자 농법이 알고 보면 이 5병2어의 방법을 구현해 보자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벼 한 이삭에서 100개씩 열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벼 한 이삭에서 200개 300개씩 열리도록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쌀 한 톨도 지금처럼 작은 것이 아니고 감자만큼 크게 만들어서 도시락에 쌀 3개 정도 넣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젓가락 대신 포크와 칼을 가지고 가서 썰어서 먹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이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세계에는 이런 방법이 아니면 그 많은 인류가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현실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 밤 한 톨이 아주 작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개발된 개량종 밤 한 톨이 얼마나 굵고 탐스럽습니까. 사과 배가 얼마나 커졌습니까. 감자가 옛날에 비해서 두세 배나 커졌습니다. 이것이 유전자 농법에 의해서 개량되었고 앞으로도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유전자 연구의 이상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얼마나 소망 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방법입니까. 예수님이 지금 벳세다에 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5천명쯤 모였습니다. 어린아이 노인 여인들을 포함하면 적어도 3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굶주려 있습니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 중 빌립에게 먹을 것을 준비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빌립이 금방 5천명이 먹을 음식 값이 약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계산서를 내 놓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니까 하루 품삯을 만원씩 만 치더라도 얼마입니까. 지금 빌립은 예수님 생각과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 방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여기서 예수님으로부터 신뢰감을 잃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지금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지 방법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빌립이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보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험해 보았더니 이런 식으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몇 가지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조금 안다는 것의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그 많은 제자 중에서 빌립에게 먹을 것을 구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벳세다가 빌립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그곳 지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금방 계산서를 작성해 온 것입니다. 만일 빌립이 그곳을 잘 몰랐다면 어디에 먹을 것이 있는지 찾아가 보는 행동이 먼저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보지 않아도 그곳은 먹을 것이 없는 곳임을 너무나 잘 하는 빌립은 행동하지 않고 계산서를 작성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보면 조금 안다는 것이 얼마나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이 얕은 지식이 때로 문제가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전도하기는 그래도 쉽습니다. 순수하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지식이 조금 있는 사람들이나 옛날에 교회에 조금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면 참 이론이 많습니다.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전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어설픈 지식이 행동에 옮기는 것을 막고 방해합니다.
교만도 깊이 알고 깊은 식견이 있는 사람은 어설프게 교만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보면 어설프게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교만합니다. 운동도 어느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은 절대로 돌아다니며 싸우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흉내도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먹질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초단자들 입니다. 아직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법은 알고 있기 때문에 주먹질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교만이 영적교만이라고들 말합니다. 영적으로 어느 깊이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영적으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며 예언한다고 하고 엉뚱한 소리하고 돌아다닙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깊어서가 아니고 신앙적으로 어설프게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성령에 이끌려서 영감을 받고 3층천에 들어갔다 왔습니다. 3층천이라는 말은 낙원이라는 말이고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천국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 후 14년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인데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이로니입니다. 여러분, 정말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정작 말이 없습니다. 정말 부자는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치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을 번 사람들이 사치하고 가진 체 하고 보기가 참 민망할 정도로 행동하고 나타내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세상에 교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만은 어설프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교만한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저자세도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나친 저자세는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안 좋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지방교회들을 순회하다가 서울로 올라옵니다. 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중학생에게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또렷한 한국말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중학생이 뒷걸음을 치면서 “나는 영어할 줄 몰라요”하고 두 손을 내젓고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소위 비굴함입니다. 상대는 물론 서양 사람이지만 그는 또렷한 한국말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한국말로 말해주면 될 것을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듯 도망가 버렸습니다. 조금 알기 때문에 교만한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친 저자세도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5천명을 먹이실 계획을 다 세우셨습니다. 6절을 보면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지금 어떻게 하실 것인지 계획을 다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빌립의 고향이니 빌립이 어떻게 하는지를 시험해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빌립은 계산서부터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예수님의 시험에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계산은 정확하게 분명하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계산이 흐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손해 보기 쉽습니다. 계산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매사 계산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믿는 것이지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믿고 계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향해서 어떻게 하는가 하고 시험해 보셨습니다. 그랬더니 빌립이 예상대로 계산부터 했습니다. 계산 하면 뭘 합니까. 그 큰돈도 없지만 돈이 있은들 지금 당장 어디 가서 그 많은 양의 음식을 갑자기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어디 가서 음식을 사 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예수님의 시험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의 전직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셈하는데 에서 오랫동안 종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셈하는데 그렇게 능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한 직종에서 오래 일하며 살아가면 직업의식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이 직업의식은 알게 모르게 내 생활 내 생각 내 판단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직업의식이 참 무섭습니다. 그 틀 안으로 나를 몰아가고 가두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의식이 내 언어에 까지 내 사고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둘 다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물론 두 손 들고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아이들을 보고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각각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 속에 선생님들의 전공의식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국어선생님은 “자기 주제도 모르고”라고 나무랐습니다. 수학선생님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음악선생님은 “말리진 못할망정 장단 맞추나”, 세계사 선생님은 “너희들이 싸운다고 세계가 달라지냐”, 생물 선생님은 “벌레만도 못한 놈들”, 급식담당 선생님은 “밥 먹고 그렇게 할 일이 없더냐”하고 말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사고와 언어에도 이렇게 영향을 주는 것이 직업의식입니다.
여러분, 셈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방면에서 오래 산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셈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셈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셈을 잘하는 분들은 셈을 잘 해서 좋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사를 셈하듯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도 셈하듯 합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셈부터 합니다. 계산부터 합니다. 신앙의 삶은 계산부터 하면 맞지 않습니다. 아귀가 잘 안 맞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젓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직업의식이 이렇게 삶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이 바로 빌립의 신앙입니다. 계산적인 신앙, 타산적인 신앙입니다.
다음은 “어제의 믿음을 잊음” 이 문제입니다.
여기 지금 5천명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굶주려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네가 먹을 것을 구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빌립과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가 하고 눈여겨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았더니 모두 우왕좌왕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무 감당도 못할 지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계산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돌아다니며 찾은 것이 도시락 하나였습니다. 그 도시락을 든 아이를 예수께 데리고 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 허둥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 이 제자들이 왜 이렇게 우왕좌왕했는가 하면 엊그제 있었던 기적들을 다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성경을 자세하게 관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지점에서 제자들에게 이 과한 지시를 왜 내렸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제자들은 몇 일전에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예수께서 고치시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또 며칠 전에 가나혼인잔치 집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들도 직접 마셔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가 고침 받는 것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입니다. 제자들의 한계는 오늘 여기서는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줄은 까마득히 모르는 것입니다. 그날 제자들이 여기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을 믿었다면 오늘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랬다면 빌립은 여기가 고향이니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무 것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여기서도 보기 좋게 기적을 일으켜 보시지요”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도시락을 든 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주님 여기 도시락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기적을 일으켜 먹이시지요“하고 신나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사람들을 정리하면서 조금만 기다려 보라. 곧 배불리 먹게 될 것이라고 돌아다니며 자신 있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신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신앙생활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날마다 기적 같은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늘 생각하며 신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태산 같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을 구해보라 지시하셨는데 방법은 없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오늘 제자들은 여기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한계이고 제자들의 한계이고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과 내일에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질없이 날 마나 똑같은 염려를 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시며 여러 번의 시험을 하시고 훈련하시고 체험하게 하셨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모두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서 훈련하고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체험의 생활입니다. 듣고 알고 지식을 갖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시며 훈련하셨고 보여주셨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이 체험이 중요합니다. 체험은 힘들 줍니다. 믿음을 갖게합니다. 신앙의 깊이를 줍니다.
엊그제 어느 목사님이 5번째 수술을 했습니다. 이분이 온몸에 암세포로 뒤덮여 있어 40회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심방을 가는데 가서 누가 기도해야 할 것이냐를 의논하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자신 있게 자신이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암 수술을 했고 이제는 고침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해야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기도하기 전에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힘내세요, 내 몸은 70,89%가 암세포 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권위가 있었고 힘이 있었고 위로가 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체험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시며 제자들에게 여러 번의 체험, 경험,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경험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이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결과 어떤 대처방안이 나오는가를 보시려고 또 한 번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어떻게 하는 가 보시려고 시험해 보셨는데 아직도 제자들은 어렸습니다. 미약했습니다. 아직도 믿음의 내용이 덜 익었고 성숙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산부터 하는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믿는 것입니다.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순박하게 그대로 믿는 생활입니다. 계산하고 따지고 재다 보면 빌립처럼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고 계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이렇게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고 내용이 있고 확신이 있는 그런 믿음의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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