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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시기를 아는 지혜/(로마서 13장 11절 - 14절)

by 【고동엽】 2022. 1. 7.

時期를 아는 지혜

 

 

 

정진경 목사

 

(로마서 13장 11절 - 14절)

 

 

 

2000년의 문턱에서 새 천년의 도래를 경축하는 축제 행사는 온 누리를 휩쓸었다. 국경과 민족 그리고 종교와 문화의 벽을 넘어서서 온 인류가 한 마음으로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사례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어울려서 새 천년의 개막을 찬양했다.

 

우리는 새 천년(New Millenium)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행복이 깃드는 황금시대의 꿈을 안고 새 천년 첫 세기인 21세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런 큰 기대와는 달리 오늘의 현실은 너무도 복잡하고 혼미상태에 빠져들어 지금의 세계는 희망과 절망, 활력과 쇠퇴, 진보와 퇴보 등의 상반된 이중주(二重奏)를 합주하고 있다.

 

낙관적 측면에서 보면 경이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 기술은 풍요한 평화세계를 약속하는 듯 희망을 준다.

 

그러나 비관적 인 측면에서 보면 세계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가 산비탈을 달려 내려가는 듯한 모습이며 방향을 잃은 배가 정처 없이 표류하는 것 같이 한 치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어둠의 미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문제와 심각한 고민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 미래학자들은 이런 시대를 ‘혼돈의 시대’, ‘위기의 시대’. ‘불안의 시대’, ‘불확실의 시대’라고 특징짓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표현으로도 끊임없는 미래 충격에 의해 혼란을 가중시킴으로서 자신의 삶에 적절한 판단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종합적인 해답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단지 「갤부라이스」(John K. Galbraith)의 말대로 ‘이 시대는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확실한 것이 전혀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몇 해 전 하버드 대학의 석좌 교수인「사무엘 헌텅톤」 박사는 오늘의 인류역사를 ‘이데올로기 시대가 지나가면서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문명과 종교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아랍계 밑의 이슬람 문명과 서방세계의 기독교문명의 충돌을 예견한 듯 하다. 그의 예견대로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중심지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는 마치 이런 예측을 앞당겨 나타낸 듯싶기도 하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는 인간의 증오와 잔인한 파괴 본능을 충동한 ‘사탄의 힘’이 숨어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이는 인류에게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 경종을 울리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이번 테러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는 테러와의 전쟁일 뿐 결코 문명이나 종교의 전쟁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사마 빈 라덴」은 이는 분명히 ‘문명과 종교의 전쟁’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종교와 관계없는 문명과 문화는 없으며 또는 역사상 문명과 관계없는 전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고로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교수는 “모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종교는 모든 문화의 뿌리요 모든 문화의 원천은 종교의 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많은 종교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그 종교가 창출한 문화가 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문화를 창출했고, 불교는 불교의 문화, 유교는 유교의 문화를 창출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문화를 창출하여 오늘의 서구문명을 만들었다.

 

이렇게 오늘의 역사의 방향이 불투명할수록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 읽은 성경말씀대로 이런 시기를 아는 지혜일 것이다.

 

 

 

첫 번째로 바울은 로마서 13장 11절에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라는 말씀을 했다.

 

이 말씀의 뜻은 역사의 흐름을 바로 인식하고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 시기라는 원문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 (the Present Time)을 뜻한다.

 

시간은 모든 가치의 기본이다. 시간을 자본이나 지식 경험 능력, 이런 것들 중의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모든 가치는 시간 안에서 새롭게 평가 되어야한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시간이라는 지점에서 생각할 때 그 가치 옳게 평가받을 수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시간은 수직적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안다는 것은 수직이다. 고로 시기를 안다는 말은 나의 현주소, 나라의 현주소, 역사의 현주소를 아는 것 이다. 과거의 것은 오늘 소용이 없다. ‘시기를 알라’는 것은 지금 내가, 교회가, 나라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혼미한 세상에서 크리스천인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며,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시간만이 수직적이다. 그 밖의 문제는 모두 수평적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결정적 인 제한을 받고 산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제한된 인간의 만남이 바로 역사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현재적이다.

 

우리는 극단적인 의견이 맞서는 시기를 산다. 언제 파국을 맞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위기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속에서 화평을 구하고 타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높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안목으로 역사를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역사관이다.

 

 

 

두 번째로 바울은 “밤이 깊었다.”고 했다.

 

밤의 개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본문의 ‘깊은 밤’은 의인의 고난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하나? 왜 죄인은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죄 없는 사람은 억울함을 당하고 살아야하나?

 

이것이 깊은 밤이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깊은 밤에도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밤과 같은 어두운 시대에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도 역사하고 계시다.

 

일본 히로시마 시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일시에 40만 명이 죽었고 그 여파로 100만 여명이 희생되는 무서운 깊은 밤과 같은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은 그 뼈저린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서 ‘원폭자료관’을 만들었다. 그 안에 는 여러 가지 끔찍한 사건들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할 것은 노란 쇠붙이로 만든 종이다. 거기에는 ‘불가 사이한 일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 종은 성당에 매달려 있던 것 인데 쇠붙이고 뭐고 다 녹아버린 그 폐허가 된 현장에 이 종 만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참으로 불가사이 한 일이다. 인간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원자탄이 떨어져 40만 명이 순간에 죽어가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셨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그런 현장에도 있었다는 것을 이 종이 우리에게 증거해준다.

 

태양은 하루 종일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깊은 밤이 되면 세상은 온 통 캄캄해진다. 태양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딘가에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온통 흔들리고 폭력과 테러가 난무해도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뜻은 차질 없이 성취되어가고 있다.

 

 

 

세 번째 “낮이 가까 왔다”고 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밤은 밤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밤은 반드시 아침을 부른다. 밤의 끝에는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이 있다. 밤은 새벽으로 연결된다. 끝이라는 시간은 새로움의 시작이다. 인생의 깊은 밤뒤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

 

인생의 깊은 밤과 하나님의 구원의 아침이 이 시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사실 을 아는 것이 이 시기를 아는 지혜다.

 

우리는 점점 어두워져가는 깊은 밤과 같은 시대에 산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새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깊은 밤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매이지도 말고 현재에 깊이 빠져들지도 말자. 그것은 오늘이라는 현재도 곧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낮이 가까웠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현재의 노예가 된 우리의 생각을 재촉하여 미래를 보기를 원하신다. 어떤 젊은이가 「찰스 베어드」 라는 사가(史家)에게 ‘당신은 오랜 세월 역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베어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첫째로 얻은 것은 하나님이 어떤 것을 멸하려 하시면 그것이 개인이든 민족이든 막론하고 권세욕에 날뛰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권세욕에 날뛰는 개인이나 민족을 보면 그 나라는 벌써 멸망할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배웠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맷돌이 쉬지 않고 역사 안에 돌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그 맷돌이 너무도 느리게 천천히 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맷돌이 돌고 있는지 아닌지를 의심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맷돌은 모든 것을 보드랍게 갈아 결국 의는 의대로 불의는 불의대로 골라내고야 마는 것을 보았다.

 

세 번째로 내가 얻은 진리는 벌이 꽃에 가서 꿀을 도적질해 오지만 그렇게 도적질해 옴으로 인하여 꽃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벌과 같은 강도들이 항상 악을 행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로인해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네 번째로 배운 진리는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 별을 더욱 똑똑히 볼 수 있듯이 암흑과 혼란이 길어지면 이것이 다 지나기 전에 벌써 소망의 별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을 역사는 증명하더라.

 

하나님의 오랜 침묵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돌아가는 그의 공의의 맷돌에 의하여 그의 경륜이 차질 없이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근대사를 통해서 우리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독재국가들과 공산 이데올로기가 쇠퇴하고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세계질서가 개편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랑이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돈하고 격동해도 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은 쉬지 않고 지금도 역사 안에 돌아가고 있음을 바로 보는 것이 이 시기를 아는 지혜일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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