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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사는 지혜! (몬 1:10-14)

by 【고동엽】 2022. 1. 22.

만들어 사는 지혜! (몬 1:10-14)


사람이 살아가는 형태를 보면 참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가 다 만들어 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고생 한 번 해보지 않고 곱게 살아갑니다. 세상에 염려가 없습니다. 부모가 일일이 다 공급해 줍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육상 경기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출발 지점에서 뛰는데 자신은 중간 지점에서 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아주 쉽게 살아갑니다. 저는 한때 그런 동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었습니다. 약이 오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하나을 자기가 직접 만들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산도 없고 그냥 주어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조그만 셋방엣부터 출발을 해서 고생 고생을 하면서 인생을 시작합니다. 조그만 물건 하나도 자신이 직접 마련을 해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 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살자니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두 종류의 삶의 형태를 놓고 볼 때 어떤 형태가 더 좋으냐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를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서 만들어 사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만들어 사는 삶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얼마나 유익한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몇 명의 특별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만들어 살고, 개척 의지를 지니고 살았던 한 시대를 말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점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걸어갔던 사람들이고, 앞길을 열어 놓은 사람들이고, 새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첫 번째로는 데라라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이 데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의 이야기를 단 두 절로 아주 짧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거보를 내디덨던 사람이고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은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의 집에도 우상의 제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있는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데라가 깊이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아닌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그러고는 섬기던 우상을 부숴 버리고 아들 아브라함 내외와 아비 없는 손자 롯을 데리고 우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창 11:31) 그리고 하란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에 이미 데라느 아들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데라는 하란에서 죽습니다.
얼핏 보면 데라의 인생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데라는 고향을 떠나가던 중 죽었으니까 객사입니다. 허무하게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단 두 줄로 짧게 그에 대해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십시오. 이 출발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르실 때 즉시 부름에 응답하게 만든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즉시 고향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데라가 고향을 떠나게 해 놓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데라가 이미 출발을 시켜 놓은 셈입니다. 데라가 그때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쉽게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는 일을 시작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역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마 데라가 현실주의자였다면 우상의 도시에서 자자 손손이 우상만 섬기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또 그가 소심하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더라면 그곳에서 그날 그날을 살다가 어느 날 이름없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남다른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데라의 용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레미야라는 사람입니다.

 

데라가 역사를 만든 사람이라고 하면 이 사람 예레미야는 내일을 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집권한 지 12년에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언제 예루살렘이 함락될지 모를 그 때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때는 한창 나라가 위협을 받아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위태위태한 시대였습니다.
그때 사촌간인 하나멜이라는 사람이 와서 "내 밭을 싸게 줄텐 사라"고 합니다. 무엇하러 그런 때 밭을 사겠습니까? 지금 예루살레이 포위되어서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그때 밭을 사서 무엇하겠습니까? 전쟁이 위험이 있을 때는 현금을 확보해 놓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싼 값이라고 해도 땅을 사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밭을 사들입니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일어나서 이 성이 함락되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헛수고한다고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계산입니다.
그렇게 하는 예레미야에게는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일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성이 함락되어 우리가 바벨론으로 끌려 간다해도 언젠가는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소망입니다. 이 나라가 오늘 밤 망한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이 나라를 되찾게 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그때는 돌아와서 이 땅을 갈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짓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고 헛수고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예레미야는 그 땅을 사들였습니다.(렘 32:7-12)
그래서 예레미야를 가리켜서 내일을 보면서 살아갔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시대나 보면 이런 사람들이 한 사람씩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암울한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약고 재주도 있어 보입니다. 계산도 빠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일을 보는 기대가 없고, 소망이 없고, 믿음이 없고 새벽을 볼 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오늘에 집착하고, 이익에만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 사는 지혜가 없습니다.
내일을 보는 사람이라야 오늘도 행복할 수 있고 내일도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얼마나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까? 내일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할지 모를 운명인데도 오늘 땅을 사들이고, 이 땅이 망한다 해도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농사를 짓겠다는 그 마음을 가진 그는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는 내일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세상 종말은 내일 올 것처럼 살고 세상을 살아가는 희망은 천년을 살 것같이 살라고 했습니다. 모두 다 내일을 내다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사도 바울입니다.

 

예레미야가 미래를 보며 살아갔던 사람이라고 하면 사도 바울은 현실을 극복해가며 살아갔던 이를테면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은 드로아에 갔을 때 귀신 들린 점쟁이를 고쳐 주고는 고소당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저는 감옥이 어떤 곳인지 잘 모릅니다. 면회를 가서 살펴본 바로는 온전한 사람은 갈 곳이 못됩니다. 불결하고,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고, 아주 좋지 못한 곳입니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없는 곳이고 비관하고 신세 한탄하기 꼭 좋은 그런 곳입니다. 정서적으로, 굉장히 많은 피해를 보게 된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곳에 갇혔습니다. 죄를 지어서 갇힌 것이 아니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고서 고소당해서 갇혔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의 현실을 대처하는 지혜스러운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때 모두 분노하고 흥분하고 탓하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그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어 아주 유익하게 활용합니다. 우선 그는 간수 전도에 나섭니다. 그리고 죄수 전도에도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얻은 사람이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로서 물건을 훔쳐 달아났던 도적놈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쉴새없이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다가 오네시모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붙들고 설득하고 권고해서 새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시간을 선용하고, 쓸모없는 사람을 찾아내서, 그에게 꿈을 심어주고 뜻을 세워줘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경도 자신에게 맞게 만들어 살아가는 지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불결하고 답답한 감옥을 사도 바울은 아주 조용한 기도처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고는 그곳에 앉아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영적인 교통의 장소로 활용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집필 장소로 활용해서 많은 책을 써냈습니다. 우리들이 읽고 있는 성경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네 권은 그때 옥중에서 써낸 책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들을 가리켜서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위인은 어딘가 모르게 정신 구조에 있어서 보통 사람들보다 한가지가 더 많이 구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밖에서 하기도 어려운 일을 사도 바울은 옥중에 앉아서, 그 큰일으 해냈습니다. 그게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주어진 천국도 지키지를 못하고 지옥으로 만들어 악용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매일 누구 탓만 합니다. 부모 탓을 하고, 무능함을 탓하고, 시대를 탓하고, 팔자 탓을 합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만들어 사는 지혜나 꿈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운명까지도 만들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만들어 놓고 길을 닦아 놓은 꽃 길을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길을 닦고 내가 꽃밭을 만들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하는 생활입니다 그런 길을 만들어 걸어가고자 할 때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고 믿음과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는 길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다만 틀리는 것이 있다면 보통 사람들보다 정신적인 자세에 있어서 새로운 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그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제부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렇게 해 주십시오." 하지 말고,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할테니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처럼 언제나 여러분들의 앞길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걸음을 옮기는 데라와, 어느 환경에서나 내일을 보면서 살아갔던 예레미야와, 어떤 환경이든지 극복해가며 살아갔던 사도 바울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앞길에도 그 같은 은총이 함께할 줄 믿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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