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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명령!(3) (눅 6:44-55)

by 【고동엽】 2022. 1. 22.

주님의 명령!(3) (눅 6:44-55)


전도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는 데도 전도 방법이 참 많습니다. 안드레 전도법, 바울 전도법, 투망식 전도법, 삼투 전도법 등 여러 가지의 전도 방법이 있습니다. 모두 다 좋은 전도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도 방법들보다 더 좋은 전도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옛날에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이보다 더 좋은 전도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감화력에 의한 전도 방법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감화력에 의한 전도 방법일 것입니다.
거리에 나가 보면 예수 믿으라고 떠들고, 외치고 하는데 오늘날 강퍅해진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쉽게 믿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믿어 준다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뭘 보여 주어야 하는가 하면 감화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마땅히 보아야 할 이 감화력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이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를 보아야 하는데 겨우 본다는 것이 찔레 나무에서 열린 좋지 못한 열매만을 보았기 때문에 믿지를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가시 나무에서, 찔레 나무에서 좋은 과실을 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감화력이라고 하는 열매는 아무에게서나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만이 열리는 것입니다. 감화력에는 세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용모를 통한 감화력입니다.

 

사람은 첫 인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도를 하려고 갈 때는 인상이 좋은 분이 가야 효과가 좋습니다. 주일 날마다 교회 문 앞에서 집사님들이 서서 안내를 하고 있는데 그때는 인상이 아주 좋은 분이 서 있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이 제일 먼저 마주치는 분이 안내하시는 분입니다. 그 때 안내하시는 분의 얼굴과 모습을 보고는 "바로 저 얼굴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이구나." 이런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가는 효과적인 전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웃을 전도하는 데는 어떤 여러 말보다 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효과가 좋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그가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다." 이보다 더 좋은 전도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백마디 말보다 이것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스펄전은 "언제나 어둡고 침울하고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지닌 사람은 신앙인으로서는 부적합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려고 간 사람의 얼굴이 어둡고 침울한 얼굴이라면 전도가 되겠습니까? 설교를 하는 목사의 얼굴이 언제 보아도 어둡고 침울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목회 못합니다.
그런데 밝고, 은혜로운 모습과 그런 얼굴을 갖고 산다는 것은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가꾸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진리를 품고, 은혜를 품고, 살아가다 보면 좋은 얼굴과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성형 수술을 하듯이 얼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얼굴은 그 얼굴이지만 그 얼굴에서 아름다움이 풍기고, 경건함이 나타나고, 거룩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링컨이나 간디 같은 사람의 얼국을 보십시오. 그 얼굴 어디에 잘 생긴 부분이 있습니까? 오죽하면 링컨의 정적이 "오리지날 고릴라를 보고 싶거든 백악관으로 가 보라."고 했겠습니까? 간디의 얼굴을 유심히 보십시오. 그 얼굴 어디에 위대한 정신이 들어있어 보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에서는 뭔지 모를 엄숙함이 풍기고 인자함이 풍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얼굴로 한 시대를 지배한 사람들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경건한 신앙으로 수양한 끝에 그런 얼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워지고 코를 높이기도 하고, 쌍꺼풀을 하기도 하고, 귀를 뚫어서는 거기다 별 것을 다 매달고 다니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약간의 아름다움은 만들어질는지는 모르지만 감화력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화력이라는 것은 조작되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꾸며지는 것이 아니고 풍기는 것입니다. 나타나는 것이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근본이 좋고, 질이 좋은 나무는 그 자체로서 값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는 그에 상응하는 맛을 지닌 열매를 맺어 줍니다. 그래서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전도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감화력을 이웃들에게 발휘하고, 직장에서 발휘하고, 사회에서 발휘해 보십시오, 굳이 내 입으로 예수 믿으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 방법 중에 이 용모를 통한 감화력이 최상의 전도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언어를 통한 감화력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에 굉장한 감동을 끼쳐 준다는 말입니다. 말 한마디 속에서 인격이 나타나고, 품위가 나타나고, 그 사람의 사람됨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말을 얼마나 많이 하게 됩니까? 신, 불신을 막론하고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서 말을 많이 주고 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말 한 마디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감화력을 끼칠 수가 있고, 또 혐오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고상한 말 한 마디로써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감동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 한 마디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분을 내게 하고, 인격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약점만을 들추어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말 솜씨로는 상대방을 신앙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 말을 골라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되도록 말을 적게 하고, 말을 해야 할 때는 상대방에게 격려가 되고, 기쁨을 주는 말을 골라서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어에는 상대방에게 감화력을 끼치게 하는 힘과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생활을 통한 감화력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감화시킬 만한 얼굴도 아니고, 더구나 고상한 말도 할 줄 모르니 다 틀렸구나." 그런 분이 있으면 실망하지 마십시오. 용모나 언어가 부족하면 생활의 감화를 통해서 커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그에게 용모가 있습니까? 말이 고상하기를 합니까? 용모는 긴 머리에다 덥수룩한 수염, 거기다 약대 털옷을 입은 아주 거친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세례 요한이 약대 털옷을 입었다고 하니까 비싼 옷을 입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약대를 이용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짐을 싣고 광야를 지나가다가 물이 없어서 지쳐 쓰러져 죽은 약대의 썩다 남은 가죽 부분을 벗겨 걸쳐 입은 것이 세례 요한의 약대 털옷입니다. 그러니 요한의 모습이 고상하기는커녕 얼마나 거친 모습입니까?
거기다 세례 요한이 사용한 언어를 보십시오. 세례를 받기 위해서 광야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소리 지르기를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그랬습니다. 여기까지 찾아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했느냐 해도 부족할텐데 "독사의 자식들아"했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것은 옛날 번역이니까 그래도 점잖은 표현입니다. 얼마나 말이 거칠고 사납고 멋이 없습니까? 세례 요한은 외모로나 언어로서는 사람들에게 감화력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요단강으로 세례 요한을 구경하기 위하여 나오던 사람들이 욕하는 것을 보고 기분 나쁘다고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거칠게 욕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자꾸만 자꾸만 광야로 몰려 나옵니다. 그러고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뭔가 깊은 감동을 받고는 세례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의 생활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현직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당시 제사장이면 고소득층에 속하는 특권층입니다. 요한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아버지를 이어서 제사장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면 좋은 집에서 살고, 매일 제물로 가져오는 고기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고기도 보통 고기입니까?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요한은 장래 출세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은 그 같은 기득권을 헌신짝 버리듯 다 포기하고 광야로 나와서 혼자서 야인으로 살았습니다. 지금 나라 되어가는 꼴이 평안히 앉아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나와서는 허물어져 가고 있는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며 눈물로 기도하다가는 졸고, 졸다가 쓰러지고, 깨면 또 일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메뚜기들이 날아다니다가 요한의 긴 수염이 숲인 줄 알고 와서 매달리면 잡아먹었습니다. 그것을 잡아서 구워서나 먹었겠습니까? 날로 씹어 생식하면서 지냅니다. 그리고 바위틈에서 기도를 하는데 웬 벌들이 웽웽거리고 다니는데 보니까 바위 틈에 야생벌들이 벌집에 꿀을 물어다 쏟아 놓았는데 요한은 그것을 그냥 씹어 먹습니다. 그것이 석청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살면서 나라가 망해 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 속에서 불이 일어날 때는 요단강에 내려가서 물을 떠 마시며 가슴을 달랬고, 그래도 가라앉지 않으면 그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괴성을 질렀는데, 그것이 "회개하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기분 나쁘다고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경을 나왔던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통분한 마음이 생겨서, 저마다 회개하고 거꾸러져서 모두 세례를 받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가만이만 있으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앞날이 보장된 사람입니다. 요새말로 하면 앞길이 훤한 청년입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은 그런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져 버리고는 스스로 고난의 자리에 앉아서 기울어만 가는 나라의 앞날을 바라보며 아픈 목소리로 외치기를 "동포여,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어떻게 하려고 죄만을 짓고 사는가,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지 않은가, 회개하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단죄했습니다.

이 말에 거꾸러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그 거칠은 외모와 혐오감을 줄 수 있는 막 말을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욕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감화를 받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들이 이 시대에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또 큰 재벌이 되어서 백성을 먹여 살리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도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신앙으로 성숙해진 감화력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용모를 통해서 감화력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용모를 통해서 감화력을 끼치고, 언어를 통해서 감화력을 끼치고, 그리고 생활을 통해서 감화력을 끼치는 일입니다.

"저 사람이라면 나도 그가 신앙하는 예수를 믿고 싶다." 이렇게 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고, 이것이 이 시대의 최상의 전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이 너무나 삭막해졌습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의별 전도 방법들이 다 연구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날이나 장차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감화력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덕목입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니니 가시 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좋은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감화를 끼치는 축복의 생활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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