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목록가기 | 자유 목록 돌아가기 |
자유케 하는 멍에(1)
마태복음11:28-30
설교방송 (설교본문)
성경은 보편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만 간혹 보면 특정한 대상을 지명하여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남편들아 네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말씀을 보면 그 말씀을 읽어야 할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정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주신 말과 아내에게 주신 말씀 그리고 자녀에게 주신 말씀과 부모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을 주신대로 읽지 않고 우리 욕심대로 읽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에게 주신 말씀은 아내가 읽으려 하고, 아내에게 주신 말씀은 남편이 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책임은 다 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상대에 대한 자신의 권리만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는 특정한 대상을 지명하여 주신 말씀과 같은데 그 대상이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독자와 대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남편들아' '아내들아' '자녀들아' '아비들아'라는 말씀과 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라는 형식으로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읽지 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만 읽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에게만 주셨습니다. 보편적인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큼은 그 특정하고 제한적인 대상이 보편적이고 제한이 없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아'라고 소리를 치면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철없는 아이들하고 너무 사는 것이 힘들어 제 정신을 잃어버린 환자를 제외한다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말씀에 해당 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는 예외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빨리 부자가 되면 그와 같은 수고와 부담으로부터 자유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부자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아'라고 부른다면 가난에 찌들고 고생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쳐다 볼 것입니다. 저는 부자의 개인적인 삶의 무게 즉 부담이 가난한 사람의 삶의 무게에 비해서 절대로 더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의 무게를 달 수 있다면 아마 똑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그 내면의 무게를 달아보면 정말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보편적인 별명이 있다면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일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대상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분들'입니다. 이에 해당하지 않으신 분은 주무셔도 좋고, 헌금만 내시고(?) 일찍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세상에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그냥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듭니다. 누구나 사는 것이 힘듭니다. 저도 사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솔직히 천당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천당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끔찍스럽게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천당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버티고 살지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세상을 버텨 나가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 역설적이지만 세상과 삶은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때로 좀 힘든 일을 만나도 특별나게 더 힘들어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좀처럼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황당한 일을 당하여도 크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라 언제나 세상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그와 같은 일은 언제나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물론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유난히 다른 때 보다 크게 힘들어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서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와 부담스러움은 무능함과 악함에서 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한결 같이 다 무능하고 악하기 때문에 이 수고와 부담스러움의 문제는 절대로 인간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수고와 삶의 고단함은 다분히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인데 인간은 기껏 육체적인 표피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수고를 덜어 보려고 애 쓸 뿐입니다.
물질의 풍요함과 과학의 발달로 육체적인 편안함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얻게 되었지만 삶의 무게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술 마시고 방탕하고 온갖 쾌락을 다 좇아 인생을 발광하듯 즐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삶을 더 외로워지고 힘들어집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해결이십니다. 삶의 문제는 세상과 사람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삶의 수고와 고단함은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직접 나서셔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재미는 세상도 줄 수 있으나 기쁨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편안함은 돈만 있어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함 즉 참 쉼과 안식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쉼은 세상의 쉼과 전혀 달라서 그 속에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평안이 있는 완벽한 안식과 쉼입니다. 세상의 쉼은 며칠은 좋은데 며칠만 지나면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징역을 사는 것과 같아집니다. 꼭 징역을 사는 것 같이 힘들어 집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거짓 쉼과 안식에 속아 열심히 좇아 다니지만 우리 삶의 수고는 그와 같은 쉼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은 한 우리의 고단한 삶의 순례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만나기를 원하여도 만나기가 어려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고 우리는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깨끗하신 분이신데 우리는 너무나 더럽혀져 있고 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찾아도 만날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시기 때문이랍니다. 더 이상이 없는 지존의 하나님이 낮고 천한 우리를 부르심은 겸손입니다. 깨끗하고 맑으신 하나님이, 티는 고사하고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이 더 이상 악할 수 없고 더 이상 추할 수 없는 우리들을 찾으심은 온유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과 온유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쉼과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십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던 탕자는 결국 망하여 돼지우리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었던 그 삶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떠난 뒤 늘 문 밖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기다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옴으로 순식간에 그의 삶은 변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것만으로 그는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자식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참 쉼과 안식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권태와 지루함이 없는 참 쉼과 안식 그것은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쉼과 안식이 멀어집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에는 쉼과 안식 즉 구원이 넘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저는 하나님께 쉼과 안식 그리고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압니다. 그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이미 제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삶은 가벼워지고 평안해 지는 것을 이제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게을러져서 하나님으로부터 삶이 멀어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무감각한 삶을 살게 되면 삶은 점점 곤고해 지고 무의미해 지는 것을 이제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이 곤고하고 무의미하고 무겁지 않으십니까? 힘들고 답답하고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그 어느 누구도 도와 줄 수 없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어렵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찾으세요. 하나님께 아뢰세요. 그것으로 여러분의 삶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자식의 문제는 부모가 해결합니다. 부모의 능력의 범위 안에만 있으면 모든 자녀의 문제는 부모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능력의 범위는 넘어서는 문제는 부모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능력의 범위 안에만 있으면 모든 자녀의 문제는 부모가 해결합니다. 부모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은 능력의 범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고하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줄로 저는 믿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난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넓으신 사 랑 베푸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 을 져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아멘. (찬송 363장)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돌아 와 돌아 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돌아 와 돌아 와 환난 있는 곳과 죄를 범한 데와 미혹 받는 데서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돌아 와 돌아 와 집에 돌아 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아멘. (찬송 315장)
말씀을 마치고 싶습니다. 하나님 떠나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살면 편하고 좋을 것 같은 착각이 원죄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부모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면 행복할 것 같은 사춘기적인 어리석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가출하여 성공한 사람은 혹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성공한 사람은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 내 욕심대로 살면 삶은 편해지는 것 같으나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재미를 좀 보는 것 같으나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그것이 주를 떠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모습이고 양태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힘들고 같고, 부담스러울 것 같고, 부자유스러울 것 같은 착각이 우리에게 있지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의 삶은 점점 가벼워지고, 자유스러워지고, 평안해 지고, 훌륭해 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정과 느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고 행동을 하고 봉사를 하려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시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늘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에 순종하여 늘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에 약속된 쉼 없는 세상에서 편한 쉼과 안식 즉 구원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마태복음11:28-30
설교방송 (설교본문)
성경은 보편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만 간혹 보면 특정한 대상을 지명하여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남편들아 네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말씀을 보면 그 말씀을 읽어야 할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정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주신 말과 아내에게 주신 말씀 그리고 자녀에게 주신 말씀과 부모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을 주신대로 읽지 않고 우리 욕심대로 읽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에게 주신 말씀은 아내가 읽으려 하고, 아내에게 주신 말씀은 남편이 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책임은 다 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상대에 대한 자신의 권리만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는 특정한 대상을 지명하여 주신 말씀과 같은데 그 대상이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독자와 대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남편들아' '아내들아' '자녀들아' '아비들아'라는 말씀과 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라는 형식으로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읽지 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만 읽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에게만 주셨습니다. 보편적인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큼은 그 특정하고 제한적인 대상이 보편적이고 제한이 없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아'라고 소리를 치면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철없는 아이들하고 너무 사는 것이 힘들어 제 정신을 잃어버린 환자를 제외한다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말씀에 해당 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는 예외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빨리 부자가 되면 그와 같은 수고와 부담으로부터 자유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부자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아'라고 부른다면 가난에 찌들고 고생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쳐다 볼 것입니다. 저는 부자의 개인적인 삶의 무게 즉 부담이 가난한 사람의 삶의 무게에 비해서 절대로 더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의 무게를 달 수 있다면 아마 똑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그 내면의 무게를 달아보면 정말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보편적인 별명이 있다면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일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대상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분들'입니다. 이에 해당하지 않으신 분은 주무셔도 좋고, 헌금만 내시고(?) 일찍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세상에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그냥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듭니다. 누구나 사는 것이 힘듭니다. 저도 사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솔직히 천당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천당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끔찍스럽게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천당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버티고 살지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세상을 버텨 나가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 역설적이지만 세상과 삶은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때로 좀 힘든 일을 만나도 특별나게 더 힘들어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좀처럼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황당한 일을 당하여도 크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라 언제나 세상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그와 같은 일은 언제나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물론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유난히 다른 때 보다 크게 힘들어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서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와 부담스러움은 무능함과 악함에서 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한결 같이 다 무능하고 악하기 때문에 이 수고와 부담스러움의 문제는 절대로 인간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수고와 삶의 고단함은 다분히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인데 인간은 기껏 육체적인 표피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수고를 덜어 보려고 애 쓸 뿐입니다.
물질의 풍요함과 과학의 발달로 육체적인 편안함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얻게 되었지만 삶의 무게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술 마시고 방탕하고 온갖 쾌락을 다 좇아 인생을 발광하듯 즐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삶을 더 외로워지고 힘들어집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해결이십니다. 삶의 문제는 세상과 사람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삶의 수고와 고단함은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직접 나서셔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재미는 세상도 줄 수 있으나 기쁨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편안함은 돈만 있어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함 즉 참 쉼과 안식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쉼은 세상의 쉼과 전혀 달라서 그 속에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평안이 있는 완벽한 안식과 쉼입니다. 세상의 쉼은 며칠은 좋은데 며칠만 지나면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징역을 사는 것과 같아집니다. 꼭 징역을 사는 것 같이 힘들어 집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거짓 쉼과 안식에 속아 열심히 좇아 다니지만 우리 삶의 수고는 그와 같은 쉼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은 한 우리의 고단한 삶의 순례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만나기를 원하여도 만나기가 어려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고 우리는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깨끗하신 분이신데 우리는 너무나 더럽혀져 있고 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찾아도 만날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시기 때문이랍니다. 더 이상이 없는 지존의 하나님이 낮고 천한 우리를 부르심은 겸손입니다. 깨끗하고 맑으신 하나님이, 티는 고사하고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이 더 이상 악할 수 없고 더 이상 추할 수 없는 우리들을 찾으심은 온유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과 온유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쉼과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십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던 탕자는 결국 망하여 돼지우리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었던 그 삶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떠난 뒤 늘 문 밖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기다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옴으로 순식간에 그의 삶은 변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것만으로 그는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자식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참 쉼과 안식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권태와 지루함이 없는 참 쉼과 안식 그것은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쉼과 안식이 멀어집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에는 쉼과 안식 즉 구원이 넘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저는 하나님께 쉼과 안식 그리고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압니다. 그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이미 제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삶은 가벼워지고 평안해 지는 것을 이제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게을러져서 하나님으로부터 삶이 멀어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무감각한 삶을 살게 되면 삶은 점점 곤고해 지고 무의미해 지는 것을 이제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이 곤고하고 무의미하고 무겁지 않으십니까? 힘들고 답답하고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그 어느 누구도 도와 줄 수 없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어렵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찾으세요. 하나님께 아뢰세요. 그것으로 여러분의 삶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자식의 문제는 부모가 해결합니다. 부모의 능력의 범위 안에만 있으면 모든 자녀의 문제는 부모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능력의 범위는 넘어서는 문제는 부모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능력의 범위 안에만 있으면 모든 자녀의 문제는 부모가 해결합니다. 부모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은 능력의 범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고하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줄로 저는 믿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난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넓으신 사 랑 베푸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 을 져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아멘. (찬송 363장)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돌아 와 돌아 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돌아 와 돌아 와 환난 있는 곳과 죄를 범한 데와 미혹 받는 데서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돌아 와 돌아 와 집에 돌아 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 오라. 아멘. (찬송 315장)
말씀을 마치고 싶습니다. 하나님 떠나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살면 편하고 좋을 것 같은 착각이 원죄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부모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면 행복할 것 같은 사춘기적인 어리석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가출하여 성공한 사람은 혹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성공한 사람은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 내 욕심대로 살면 삶은 편해지는 것 같으나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재미를 좀 보는 것 같으나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그것이 주를 떠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모습이고 양태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힘들고 같고, 부담스러울 것 같고, 부자유스러울 것 같은 착각이 우리에게 있지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의 삶은 점점 가벼워지고, 자유스러워지고, 평안해 지고, 훌륭해 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정과 느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고 행동을 하고 봉사를 하려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시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늘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에 순종하여 늘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에 약속된 쉼 없는 세상에서 편한 쉼과 안식 즉 구원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딤후 4:1-8 전도로 성장하는 교회 / 김동호 목사 (0) | 2021.12.25 |
---|---|
마 11:28-30 자유케 하는 멍에(2) / 김동호 목사 (0) | 2021.12.25 |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 마 12:1-8 (0) | 2021.12.25 |
자녀 양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 / 엡 6:4 (0) | 2021.12.25 |
일으키는 사람 / 행 3:1-10 (0) | 2021.1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