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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그 한계(막 3:1-6)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2. 4.

자유와 그 한계 막3:1-6

제가 오래 전 부터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답변해 오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참 자유인이 되어가기 위해서 입니다.”라는 독백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된다면, 저의 답변 역시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삼십년 전에 제가 이해했던 자유 의미와 현재 이해하고 있는 자유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이해 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자유인으로서의 삶의 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저에게 지금까지 자유 하는 삶의 모범이 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예수님으로부터


진정 자유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몸소 이 자유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참 자유하신 예수님의 다양한


면모를 대하게 됩니다.


그 장면이 본문에도 나옵니다. 본문을 서술적으로 풀어서 말씀드린다면 이와같습니다.






“어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


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기를 적대시하며 바라보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 시선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손이 오그라든 남자를 한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도전 하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말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사물을 이해하고 있는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표명해야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비인간적인 관점을 말로 표현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말을 하게 되면 그들의 숨은 내적동기가 무엇인지 드러나기 때문에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왜곡된 관점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깊이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애와 슬픔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분노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왜곡된 관점이었습니다. 그들의 왜곡된 관점은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시대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그들의 왜곡된 삶은 하나님 나라의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바리새파 사람들의 왜곡된 모범을 그대로 모방해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체험적으로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초리와 위협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그들의 왜곡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왜곡은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까지도 억압했습니다.






예수님의 슬픔은 참된 자신을 잃어버리고 왜곡된 생각에 예속되어 살아가고 있는 그 시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분노까지 느끼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침묵으로 예수님을 흔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조금도 동요


됨이 없이 엄연한 주권을 지니고 자유 가운데서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왜곡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왜곡된 관점은 예수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냉혹해진 채로, 그들의 독선과 고집, 두려움을 지닌채로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일을 자유롭게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안식일에 병든자를 고치는 문제에 있어서 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 관점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는가?






그 근본 원인은 율법에 대한 이해에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보다는 문자에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그 다음 또 다른 하나는 사물에 대한 표상이 달랐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인간을 율법을 위해,


즉 율법의 노예로 보았고, 예수님은 율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으로 이해 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보다 율법을 더 절대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내면의 자유를 갈망합니다.


불우한 상황에서 많은 시험과 유혹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


외부에서 부딪쳐오는 운명에 완전히 종속되는가, 아니면 운명이 우리에게 종속되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내적으로 체험하고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


우리를 오로지 일의 성과로만 원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내적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사회에서 이탈해 나와야만 하는가, 아니면 나의 직업을 갖고도 내적 자유를 느끼며 살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나를 재는 다른 사람들의 잣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 하는 삶이 가능한가?


* 만약 가능하다면 그러한 자유를 어디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가?






오늘의 현실에서 일의 성과 만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분석해보면 그들을 부자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사회적 상황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에 예속시켜 살아갑니다.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유를 원하면서도 돈도 벌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도 받고,


성공도 원합니다.






제가 목사가 된 후에 자유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회적인 성공, 유명한 목사, 큰 교회와 같은 것에 삶의 목표를 두지 않고 진정한 내 자신이 되어가는데 목표를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참 자유 하는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자유 하는 삶의 모범은 올바른 표상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 하는 삶을 위해 어떤 것을 지키고, 어떤 것은 하지 말라는 경귀적인 율법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올바른 표상을 보여 주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안식일에 대한 표상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안식일 이해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다른 이해는 행동에 있어서도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주인으로 행동하였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상황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는 사물의 표상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올바른 표상을 형성해 갈 때에만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의 목적이 경력을 많이 쌓고 돈을 많이 버는데 있게 될 때 우리는 내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생의 우선순위가 될 때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지에 지배를 받게 되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평가, 인기, 명성에 나 자신을 얽매이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진정


나 자신으로 형성되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평가, 인기, 명성에 나를 예속시킬 때 나는 진정 나 자신이 되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인기 있는 목사, 명성있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 보다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종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큰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에 목표를 두기보다는 어떻게 사람들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갖고 고뇌할 수 있을 때 자유를 배워갈 수 있습


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월드컵 열기가 대단합니다. 어떤 축구 코치는 자기가


어떻게 하면 인기 있는 감독이 될것인가에 목표를 두고 선수를 훈련시킵니다.


한편 다른 감독은 어떻게 실력있는 강인한 선수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목표를 두고 선수를 훈련시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큼니다.


인기에 노예가 되어있는 감독은 좋은 선수를 만들어 갈 수 없을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많은 상처를 받으며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서 자유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빛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예수님,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나를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높임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롭게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칭찬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보다 더 낳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관심가운데 있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낮아짐의 두려움으로부터 멸시받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고통스러운 책망의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짐의 두려움으로부터


실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조소의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마더 테레사-














이 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욕망들과 두려움들은 모두 우리들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인 본능을 부인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나 자신이 그러한 본능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본능적인 욕구와 공포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삶의 표상은 왜곡되고, 우리는 자유와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결국 자유 하는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많은 우상들을 섬기며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입니다. 자유의 목표가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에 이르는 자유입니다. 또한 온갖 자기 경직으로부터, 자신과 욕망의 모든


굴레로부터 풀려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의 목표는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내면의 자유에 기인하는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 될 때 우리는 또 다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예”와“아니오”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자유에 기초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참 자유해가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자유의 삶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유혹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을 거짓과 허구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진정한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명예, 인기, 칭찬, 돈, 성공에 예속되어 있을 때 참으로 자유 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자유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생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의미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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