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서로 지라 (갈 6:1~5)
임 영 수 목사
교회에서 신도들 간에 성령으로 사는 삶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이해하고 있는 성령으로 사는 삶은 방언, 신유의 은사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으로 사는 삶은 그렇게 좁은 의미가 아닙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성령으로 사는 삶은 다양하고 인간적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성령으로 사는 삶을 목회 상담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삼 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유아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장성한 후에 학습을 서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장성한 후에 세례를 받은 데는 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세례를 받으면 절대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더 완전한 사람이 된 후에 세례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에서 저는 학습을 선후에도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고 나서 본래의 생각대로 죄를 안 지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지고 있는 것은 저는 영적으로 더욱더 강건한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교인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세례 받으면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더욱 위축시키고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는 사람인고로 세례를 받았어도 잘못과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무엇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우리 인간으로서는 실현해 갈 수 없는 이상주의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바울이 현실적이었다는 것은 그가 세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렸다는 뜻에서 현실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그러한 면모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본문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했습니다.
여기서 “범죄”란 말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하면서 얼음 위를 걸어가다가
미끄러져 발이 삐든가 얼음이 깨어져 빠지는 것과 같은 실수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속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살다보면 아무리 주의해도 사람인고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인간의 현실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런데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실수한 사람보다 스스로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실수 하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현실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인정합니다.
바울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문제를 덮어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임과 동시에 진정한 신앙적인 해결의 방안을 제시 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방안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고치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령한 자들이 가져야 할 포용력, 유연성, 희망의 삶을 보게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생활을 해가다가 생의 어려운 문제로 인해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진정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찾아가서 자신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할
좋은 상담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담자들이 소위 신령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신령한 자들에게 찾아가는 것을 기피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고침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아픔을 더 받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은 넘어진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고 하나님이 버린 사람으로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할 때 넘어진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 가운데서 슬퍼하게 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지난 주간 삼개월간 미국을 순회하고 돌아온 후배 목사를 통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교민 교회를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가는 곳마다 상처 받은
사람들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처받은 사람들은 있는데 상처를 준 사람들은 없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문에 의하면 생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생의 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젊은이, 중년, 노인 모두에게 짐이 있습니다.
그러한 짐들 가운데는, 어린시절 상처로 인한 것, 성장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내적 비밀, 실패, 갈등, 생의 위기, 유혹,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감당해야할 책임 등 입니다. 이러한 짐들이 사람이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을 고갈시키고, 성장을 방해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생의 짐을 해결해 가는 방안으로“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짐을 깊이 묻어 두라고 하거나, 혼자서 고민하며 지고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걱정troubles 과 문제problems를 서로 나누라share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고민과 문제를 가진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고, 우리에게로 찾아오셔서 우리가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짐을 져야합니다. 그러한 일을 신령한 사람들이 해야합니다.
“짐을 서로 진다”는 것은 실수 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반응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 짐을 서로 진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지나친 완전을 요구하지 않는 것 입니다.
* 그리고 인간의 현실성을 이해하고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 상대방의 고민과 문제에 귀를 기우려 듣는 것입니다.
*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 짐을 나누어지려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다른 사람이 그의 짐을 나누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에 근거하면 오늘날 정신 질환 계통의 병만도 120여 가지가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신질환계통의 병이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에 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참된 쉼을 갖지 못하는 것은 생의 짐 때문입니다.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생의 짐도 창조적 밑거름으로 만들어 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능히 그 짐을 질수 있도록 능력, 희망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에서 자기는 다른 사람이 범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자위하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 지혜로운 삶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한걸음 나아가서 나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답해 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대처해가고 있는 가를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우리 각자에게는 그 누구도 대신 지어줄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짐이 있습니다.
그러한 짐은 그 누구에게도 대신 져달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짐을 회피하지 말고 충실히 져야 합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근처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어떤 저명한 사업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하는 일마다 행운이 따라주어 엄 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평생 써도 못다 쓸 만큼 말이지요. 저의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결의에 찬 면모와 강한 성품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멋지게 그을린 그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서서히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처럼 많은 돈을 벌려고 애썼던 동기는 단순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제가 하기 싫은 일을 맡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대신 다른 사람이 결코 해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인생의 목적을 발견 해서 그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저는 어떤 대가든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죄 그 자체보다 그러한 일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장의 짧은 자서전을 소개해 드리고 저의 설교를 맺겠습니다.
1) 나는 길을 걷고 있었네. 보도에는 깊은 구멍이 있지. 나는 거기에 빠졌네.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희망도 없었지.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네. 나오는 길을 찾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네.
2) 나는 동일한 길을 걷고 있었네. 보도에 깊은 구멍이 있지.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 척했네.
... 나는 거기에 또 빠졌지. 내가 같은 곳에 빠졌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네.
... 그러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네. 그곳에서 나오는 데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걸렸지.
3) 나는 동일한 길을 걷고 있었네. 보도에는 깊은 구멍이 있지. 나는 그것을 보았네.
... 나는 여전히 거기에 빠졌지.
... 습관적으로. 나의 눈은 열려 있었고.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았지.
... 이번에는 나의 잘못이지. 나는 즉시 거기서 나왔다네.
4) 나는 동일한 길을 걷고 있었네. 보도에는 깊은 구멍이 있지. 나는 그것을 피해 돌아가지.
5) 나는 다른 길로 다니네
-촬스 휘트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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