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두 국면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일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생시키는 일, 즉 구원하시는 일>과,
<구원 받은 성도들을 완성하시는 일> 등
두 개의 국면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앞부분.. 즉각적인 구원, 신분의 구원을 <칭의>라고 하고
뒷부분.. 점진적인 완성에 해당하는 이 구원의 완성을 <성화>라고 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이 <성화의 과정>이
-자기 의를 꺾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일로 나타나서
신자 개인들의 신앙 현실에서는
성화의 과정이 나아지는 느낌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실패로 경험이 됩니다.
▲성령의 역할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한,
말하자면 성화의 완성을 인도하시는 일이
성령 충만으로 인하여 단번에 즉각적인 어떤 신앙의 완성 경지에 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따라 사는 이 일은,
일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방불한 삶을 현장 속에서
신앙적인 전투를 하며, 훈련을 받도록,
그렇게 성도들을 인도하셔서
그래서 어찌 보면 우리의 소원과 간절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거의 응답하시는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 충만으로 인도하시는
지혜와 능력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살피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
▲1. 기독교는 인격적이다.
기독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종교이지만,
우리의 신앙에 특징이 무엇이냐 할 때에
제일 먼저 기독교의 핵심은 인격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로봇처럼 조종하시거나 조작하시지 않고,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 연습시키시고/ 항복을 받아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이루신다.. 하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잘 사용하는 ‘사랑’이나 ‘믿음’이라는 단어들이
‘대등한 인격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쓸 때는,
우리의 생각은 자유롭게 그대로 놔 두고, 우리의 항복은 받지도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로봇처럼 휘둘러 도구로 부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항복에 기초해서 쓰십니다. 항복한 자를 그때부터 들어 쓰시는 겁니다.
▲2. 기독교는 종말론적.
기독교의 큰 특징 중에 하나로, 종말론적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목적과 끝을 갖고 계신다. 라는 것입니다.
종말이 있고, 마지막의 심판과, 하나님이 허락하실 영생복락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종말이 있다는 것은
지금은 종말이 아니라는 이야기거든요.
지금은 아니고, 지금과 종말 사이에 시간이 있다는 뜻이고
그 기간에 신자는 ‘종말론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부터, 종말은 미래적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든지 간에,
시작하실 때, 계획과 목표를 갖고 일을 하시는데
그것은 그 사이에 시간을 가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큰 특징은 종말론적입니다.
하나님은 계획과 끝을 가지신다/ 애당초 목적을 가지신다/ 거기에 시간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그 목적이 결과가 일어나는 일에 과정이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때가 이르매, 때가 되매’ 라는 표현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것들은 바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기독교 신앙의 특징 중에 하나인 인격성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항복시키시는 일에 시간을 두고/ 과정을 두고 (즉 구원의 완성, 성화를 통해 서서히)
항복을 시키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 기독교는 ‘초월적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은,
자연인이 가지는 종교적 기대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연인/일반 사람이 가지는 종교에 대한 기대는 “초월”입니다.
종교란 초월적인 속성이 있으므로,
자연법칙과 다른 것이고,
자연은.. 심는대로 거두는 것이라면
초월은.. 심지 않고 거두는 것이라.. 이런 생각을 누구나 합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었고,
아래부터가 본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초월(기적, 초자연)”적 속성,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올바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주제입니다.
◑본론/ '초월'과 '자연' .. 어느 것도 무시해선 안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연’과 달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기적(초월)이 마땅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시간이 있고 과정이 있다(즉 현실)’ 이라는 것은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이라고 과소평가하고
같은 일이라도 초월적인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그것이 정말 신이 개입하신 것이고, 은혜를 받은 것이고
자신의 신앙이 열납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초월주의라는 것은,
우리 자연인의 본성적인 <종교에 대한 기대치>이기 때문에
기독교 외에 어떤 종교에서건 이 초월성을 목적하고 있고
기독교인들 마저 이 문제에서 사실은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쉬운 예로, 우리 뭐 신학교 같은 곳에서 잘 일어나는 일인데
공부 열심히 해서 100점 받은 것과 - 현실, 자연법칙
기도 열심히 해서 100점 받은 것은 - 기적, 초월
어느 쪽이 더 신앙적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공부 안하고 기도해서 100점 받은 것이 신앙이고,
공부해서 받은 것은 신앙이라고 생각을 조금 덜 하죠.
자연 질서를, 초월질서와 적대적이며/ 차별된 것으로 보는 것이죠.
초월만이 하나님의 영역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고
자연과 자연 질서는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하나님에게는 자연과 초월이라는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초월도 자연도, 둘의 구분이 없는 이유는, 전능하시니까요.
우리는, 초월은 우대하고, 자연은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기기 쉬운데, 그것 잘못입니다.
초월(기적, 초자연)은.. 우리가 평소에 우대를 하니까.. 별 문제 없습니다.
자연(일상, 현실)은.. 우리가 평소에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연도 똑같이 우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설교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초자연)이십니다. 인간처럼 자연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이신데,
그래서 초월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초월자인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자연이라는 세계를 만들고, 시간과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그게 창1~2장의 천지창조입니다.
구원은, 창3장에서 타락하여 황폐해져버린 창조/피조세계를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주1)
자연(창조, 피조세계)도 중요하다는.. 그래서 회복되어져야 한다.. 그런 뜻입니다.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습니다.
우린 신이 아니라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공간(자연)이라는 것이, 꼭 손해는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로인해 어떠한 더 많은 복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공간적인 복과 시간적인 복입니다.
그것이 신과 피조물의 한계의 기준이기도 하면서
하나님은 사실 복되게 우리를 만드셨고, 이 자연계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초월’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가 ‘자연’이라는 질서와 공간과 상태를 만들었고요.
그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창조물들,
피조물들에 대한 은총과 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월에 속하는 것은.. 죄다 하나님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방법이고,
자연에 속하고 자연 질서로 나타나는 것은.. 그냥 자연에 속한 것,
초월에 속하지 않은 것, 신앙이 아닌 것이라는 과소평가를 하는 바람에
신앙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이,
죄와 저주 아래에 있어서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오직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상함과 해함과 절망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더 특별한 은혜로, 구원으로 찾아 오사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초월적인 일과 함께, 하나님이 만드시고
지금도 여전히 창조주로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질서에 대하여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나면, ‘자연’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여집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구별 없이 적용된다는 것 때문에
자연 질서와 창조 질서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고 있지만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고
신자인 우리는.. 구원을 얻고 나서 비로소 모든 세계가,
모든 질서가 초월 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이 세상이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영광을 증언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며
복 주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하루 연습하고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은혜의 체계 속에서 신앙으로 이해하여
하루 저녁 금식 철야해서 소나무 뿌리 뽑아서 어느 경지에 가는 것이 아니고
연습하고 연습하면서 그 경지에 간다는 것을, 이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을 일반 은총론이라고 합니다.
▶자연법칙, 하나님의 공의, 일반법칙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초월과 똑같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십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은 초월과 자연이라는 영역에 구별이 없으십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자연계를 만드셨다는 것이죠.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 안에 복 된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자연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 규칙이십니다.
여기에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자연계와 창조세계 안에서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제 특별히 찾아 오셔서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
특별한 간섭에 의해서 얻어집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초월자이시며
동시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지
‘초월’이라는 영역으로 도망을 가고
‘자연’이라는 영역은 무시 하는 그런 결과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적용
▲교회 건물도 번개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피뢰침을 달아야 합니다.
‘초월’을 믿지만, ‘자연’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통적인 한국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고딕식입니다.
교회 종탑이 높이 뾰족하게 솟고, 그 맨 위에 십자가가 있죠.
십자가 위에 피뢰침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초월주의적 발상으로 생각을 하자면,
벼락을 누가 내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내리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교회 십자가에다가 벼락을 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그러시면 안 되죠.
그러면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다는 것은, 불신앙이입니까?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피뢰침을 세우지 않은 교회 보았나요?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초월)만 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수련회에서 사고가 나는 것도, 우리가 ‘자연법칙’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초월’아래에도 있지만, 동시에 ‘자연’아래에도 지배를 받습니다.
‘초월’만 우대하고, ‘자연’을 무시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잊을만하면
한 번씩 여러 해 전에 특별히 큰 사고가 있었는데
어떤 교회에서 여름수련회에, 전 교인이 기도원에 올라갔다가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여러 명이 죽었다.. 이런 기사를 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하러 기도원에 갔는데, 하나님이 그것도 떼죽음을 시키시는가?’
그런 질문을 하죠.
‘초월’만 우대하고, ‘자연’을 무시하는 상태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봉사하던 어떤 교회에서는,
아침에 한 가족이 차를 타고 교회에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아버지가 사고의 충격으로 뇌에 출혈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의식 불명이 되고, 며칠 만에 숨졌습니다.
그 집 아이가 열심히 기도를 했죠.
‘하나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면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왜 안 들어주시는가?’
문제가 되요.
(물론 가끔 들어주시는 때도 있지만요. 초월이 통할 때도 있으니까요)
▲제가 어렸을 때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돗물이 나오다 말다 했습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밖에 나가서 너무 열심히 뛰어 놀아서
땀범벅, 먼지 범벅이 되어서 집으로 들어와서
수돗물을 틀었는데, 물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같이, 제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제가 목욕을 해야 되는데 물 좀 나오게 해주세요.’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수도꼭지를 틀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게 다 ‘초월’만 우대하고, ‘자연’을 무시하는.. 잘못된 신앙인 거죠.
둘 중에 하나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초월’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동시에 ‘자연’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자연을 보존하고 계시고, 다스리고 계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마치는 말.
우리에게 초월주의적 생각이, 그 치우침이,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에 상당 부분을 사실은 갉아먹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분은 신앙으로 남겨두고 (초월만 우대하고)
나머지 부분(자연)은,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이런 식의 이원론적 신앙 체계를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보통 우리를 개신교라고 그러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종교 개혁의 후예들이죠.
종교 개혁의 공로 중에 하나는, 바로 그것을 개혁한 것입니다.
‘초월’만 강조하던 당시 신앙 문화에서,
‘자연’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들고 나온 것이죠. (계속 읽으실 분은 초월은 현실과 조화를 이뤄야 2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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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크게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보면
하나님은 구속사역을, 창조사역의 회복을 위하여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의 계획과 뜻은, 창조에 다 나타났죠.
창조에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 라고 말씀하셨고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생육하여 번성하라고 말씀하시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류 조상이 범죄 하여 타락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연계 모두가 저주아래에 놓이게 되었죠.
우리가 죄 아래 놓여있어서, 썩어짐과 해함과 상함의 환경이 되고
우리 인간 모두의 본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죠.
구원이라는 것은, 구속 사역이라는 것은,
창조사역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찾아오신 개입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을 받는 모두가
원래의 하나님의 창조에 의도와 복 주심으로의 회복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구원 받은 사람이
창조 세계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시고 만드신 것임을 이해하고
창조세계 속에서 회복된 예수 믿는 자들이
창조질서 속에서의 하나님 되시는 창조 사역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구별하고 차별하고 반대라고 생각을 하죠.
이것을 초월주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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