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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복음주의는 신학과 균형을 맞춰야 여호수아 23:6

by 【고동엽】 2021. 12. 4.

◑‘신학’과 ‘신앙운동(교회부흥)’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개신교 5백년 역사는, 복음주의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신앙컬러도 복음주의적입니다.

 

이 복음주의evangelical 라는 표현을 많이 들으셨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를 이해하시고

또 그래서 우리가 한국 교회를 무엇을 어떻게 더 준비하고, 자랑할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주의라는 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에

아시다시피 종교개혁이 1차적으로는 ‘신앙적’ 논쟁 아닙니까. ↔신학적

 

말하자면 중세 당시의 공허한 ‘이론적인 싸움’에 식상한 신자/성직자들이

복음의 생명력과 진리의 활동성을 강조해서

그런 복음의 결과, 결실, 이런 것을 치중한 그런 운동 또는 실천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데로 미국에서 일어났던 18세기, 19세기의 대각성 운동,

이런 것도 다 복음주의에 근거해서 일어난 신앙 운동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휫필드, 피니, 스펄전, 이런 분들의 부흥 운동은

성격상 말하자면 모두 복음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생명력, 기독교 진리의 역동성을 실천하는데

주로 초점을 두었던 사람들과 그 운동들입니다.

 

▲한국 교회의 주류도 복음주의 전통

한국 교회의 선교사들, 처음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선교사들도

다 미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할 때

복음주의적 성격에 근거해서, 이런↓ 신앙적인 컬러를 가졌습니다.

 

다른 말로, 보수적이고/ 청교도적이며/ 경건적인 신앙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제사를 거부하고, 성수주일하며, 여기에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그렇게 가르쳤지요.

 

▲그런데 이 복음주의는,

신학과 교리를 이론으로만 배우고, 실제적인 실천력이 결여된 데에 대한

하나의 자성이기도 하고 반동이기도 했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자성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반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것, 또는 교리라는 것은

우리의 믿는 내용에 관한 총체적인 종합과 정리와 균형을 설명하는 것이

곧 신학이며 교리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은, 하나의 이론이 될 수 있고, 피상적으로 흐를 수 있으며

현실(실천)적이지 못하고,

 

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런 이론적인 것들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부작용 중에 하나가

‘소수 엘리트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늘 가집니다.

자기 잘난 척 하게 하는 부작용을 갖습니다. 또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굉장히 다릅니다.

 

▲신학/이론가들은, 실천 현장(복음주의자들)을 비난할 필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상이라는 것, 또는 목표라는 것은 방향입니다.

‘저 쪽 방향으로 가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고, 직선으로 가리킬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길을 가는 것은.. 직선으로 가지 못합니다.

멀리서 보면, 서울 부산 고속도로가 직선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과정은 삐뚤삐뚤한 것입니다. 때로는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길을 따라 가야 하는데, 이론가들은,

그렇게 삐뚤삐뚤 하면서도 똑 바로 가는 것을 보면서,

근시적/비판적으로만 보고,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실천 현장, 즉 복음주의 목회자들도, 이론가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이론가에 의한 ‘저기다. 저 방향과 목표가 맞다’라고 제시하는

이 손가락이 없으면.. 현장에서는 뺑뺑 돌다가, 방향을 상실하고, 길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서로 동전의 앞뒷면 같이 서로가 보완적인 관계인데

문제는 이 둘(이론가+목회자)이, 서로 매일 싸운다는 사실입니다.

 

왜 싸우는가 하면, 우리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도 누구를 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한발 씩 자기에 대한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것으로, 서로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신학이 빠진 복음주의 신앙운동은, 잘못된 길로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복음주의는, 원래는 이런 중세 신학이 가지는 지적 폐쇄성을 극복한 것이죠.

실제성을 강조하여, 실제적인 신앙의 결실을 이루어내는 그런 운동이며

그런 실천이며. 그런 이해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음주의라는 것이

이런 실천력과 결실을 했다는 것 때문에, (즉 교회부흥을 이루었다는 것 때문에)

어디에 휘느냐 하면 (어디로 잘못 빠지는가 하면)

 

아까 신학은 ‘폐쇄성과 자랑’으로 가서 문제가 된다.. 라고 말했었죠.

똑같이 복음주의(교회를 의미함)도, ‘폐쇄성과 자랑’으로 가더라는 겁니다.

 

 

◑복음주의 신앙운동, 즉 교회 부흥의 최대 장점/ 동시에 위험성은.. ‘대중화’

 

▲복음주의 신앙운동이 대중화(부흥)로 가면서,

복음주의의 그 신앙 실천의 기대(목표)와 결과는, 오직 대중화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 많은 실천이라는 것은,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해 내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더 많은 사람을 항복시키는 것은, 결국 대중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많이 교회에 들어오는(구원 받는)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단순해지고 값 싸지기 시작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보는 것입니다.

역사상 언제나 이 둘이 엎치락 뒤치락 해 온 것입니다.

 

▲한국의 복음주의 신앙운동은, 신학을 무시한 결과, 너무 ‘단순화’ 되어졌습니다.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는 다 단순하다.’ 이런 말이 있죠.

스펄전의 설교는, 단순했지만, 즉 어렵지 않았지만

그 단순함이 많은 사람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라는 논리입니다.

 

※스펄전의 설교가 심플 하다는 말은, 굉장히 이론적인 신학자에 비교해서 심플하다는 것이지,

사실 스펄전의 설교를 50편 이상 읽어보십시오.

굉장히 신학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원고 분량도 오늘날 설교의 3배 정도로 깁니다.

‘스펄전의 설교가 심플하다’는 말이 구미 세계에 유행했는데..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의 설교,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 그것은 모두 쉽고 단순했다’

우리는 그 명제에 아무런 거부감이나 반대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깊이 알고,

그렇지만 그 설교의 표현은 쉽고, 단순하고, 심플하게 설교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이 대중성, 대중적 결과는, 신학을 비웃고 외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설교를 아무렇게나 하는, 변명 내지는 논리적 정당성의 근거로

위 명제가 오용/남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한국 교회에서 들어보았을 것이에요.

꽤나 유명하신 목사님이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별로 소용없어요.)

이렇게 가끔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는, 자기가 많은 열매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학을 잘 모르지만, 이렇게 큰 교회를 이뤄낸 것을 보라..는 논리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 한국 교회가, 이제 처음으로 맞이한 기이한 부작용 현상입니다.

 

한국교회가 신학과 사상, 이론을 무시하고,

교회 부흥(고상한 표현으로 복음주의 신앙운동)만 바라보고 달려온 결과

지금 한국교회 상황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사실 일제와 공산주의의 극한 핍박의 길을 거쳐서

처음으로 교회가 성장을 이뤄 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학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이 성공했거든요.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실은 통제가 안 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신학, 교리를 모릅니다.

다만 ‘누가 얼마나 큰 교회, 얼마나 많은 성도를 확보했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과,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일꾼이란 증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실은 조금 짚어봐야 합니다.

 

▲신학의 도움이 없으면, 종합(신학과 신앙의 종합)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들을

질서와 균형으로 종합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게 없으면, 같은 내용을 이야기 하면서,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종합’하는 일도, 신학자/사상가들의 몫이지요.)

 

우리가 여러 번 겪었지만, 방언 문제도 그렇고, 구원의 확신 문제도 그렇습니다.

종합이 안 되고, 각자 주장만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런 교회 안에 나타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허락하신 큰 복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진실한 신앙생활을 어떻게 영위하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한국 교회는 전혀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종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이 모아 온 사람들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하는 일 (즉 전도와 교회 성장) 외에는

신학의 진정한 내용과/ 현실과/ 인생과/ 역사와/ 자기가 몸담고 사는 시대와/ 사회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는 법에 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은혜의 과도한 강조, 또한 신학의 괄시 풍조가 만연합니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경험한 것과 같이

우리의 신앙은, 이론의 습득은 거의 없이, 어느 날 은혜로 시작이 됩니다.

 

그 은혜는..

'말씀의 깨우침'이라는 은혜로 받는 사람도 있고,

특별한 '신비 체험'으로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경험하고 확신한 것을 근거로 하고

내용으로 하여 떠들기 시작합니다. 너무 주관적이죠.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 전체 모두가 합의하는 절대 근거, 절대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즉 신학이 없다면

그러면 우리는, 같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혜 체험으로 인한 신앙의 주관화, 신학 무시)에 한국 교회가 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은혜 체험) 경험들은, 기독교 신앙 전체 중에, 극히 일부입니다.

 

 

신학교에 공부를 하러 오는 이들이 신학을 배우러오기 보다는

대부분의 경우에 면허증을 따러 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저 박영성 목사는, 신학교에서 굉장히 무섭게 구는 교수로 통해 있습니다.

그 꼴을 제가 볼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반 신앙인이 틀리는 것과는, 너무나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온 학생이, 1학년에 막 들어온 신입생이

배울 것은 없고, 면허증을 받기 위해서만 온다는 것은, 그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중간정리하면,

복음주의라는 것은, 사상에서보다는

활동에서 그 특징이 나타나는 것으로,

어떤 주의나 이념이기보다는, 운동movement입니다.

 

운동과 사상은 다르죠. 한국 교회는 운동만 있지, 사상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복음주의 신앙운동(교회 부흥)은 열심히 해 왔는데, 신학이 괄시된 것입니다.

 

왜 그런 운동만 있었는가요?

그것 (교회 부흥)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는 전체 신앙의 내용을 망라하는

그런 이해와/ 중요성.. 에 대한 어떤 책임의 통감,

이런 것들을 지금 한국 교회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이런 사상적/신학적이기 보다는

결과에 치중하고, 활동에 재미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반지성적인 성향>을 띕니다.

 

지성/신학/사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반감을 가지는 그런 색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무조건 열심히 달리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이런 현상은, 우리 현실 속에서도 지금 경험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오래 전에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미국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자성과 반성과 비평이

아주 많이 오랜 세월에 거쳐서 일어났고,

그런 문제점들을 지적한 책들이 출판되어, 그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은 이 복음주의가 제일 크게 성공한 나라이고

그래서 미국 교회는 대표적으로 반지성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데 *유럽과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사회의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미국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자기도 모르게

미국 교회의 복음주의와 그 반지성적인 색깔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저는 반미 주의자가 아닙니다. 미국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할 입장도 아니고요.

미국은, 하나님이 복 주신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고,

제가 미국에서 공부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기독교 안에 늘 생길 수 있는

우리 죄성으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은혜는, 현장에서 먹히는데.. 신학은 현장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현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일에는, 이론/신학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모든 사람들의 구원은, 공부로 되지 않습니다.

정말 느닷없이 (은혜로) 됩니다.

왜 일어났는지 모르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특별한 개입으로.. 구원이 일어납니다.

 

▲신비주의도, 현장의 필요에서 선택하게 되는 수단.

그래서 신학만이 아니라, 지성 전반에 걸친 외면과 반대를 만들어오고 있고

그러면 더욱 더 어디로 갈 수밖에 없느냐 하면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가는데

그러면 다시 어디로 가냐 하면 신비주의로 회귀하게 됩니다.

 

신비주의가 일어나는 이유는,

결과(교회 성장)를 얻어내는 방법으로, 그것(신비주의, 은혜)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의 특색은 점점 더 활동적, 대중적, 실용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반지성적으로 흐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주류입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복음주의 개신교의 지성은, 복잡성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이슈를 단순화 하며

비판적 분석과 진지한 성찰 대신, 영감과 열심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목사가 설교 준비 안 하면 고함을 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를, 열심(고함)으로 때우는 것이죠.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책에 썼는데,

우리 실정과 맞아서, 지금 제가 인용하겠습니다.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은 사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어느 정도 경건주의로 변명해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함 없이

그저 믿음만 좋고, 은혜만 뜨겁고, 목소리만 우렁차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은혜와 사상, 양쪽 다 필요합니다.

제가 지식과 이론, 그런 것을 따로 나누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반 은총'으로도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고 (여기서 말하자면 ‘신학’)

거기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데

이런 것을 우리가 다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일반은총, 신학)는 하나님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생각과 공부는, 신앙과 관계가 없고

그래서 오직 기도, 금식 방향으로 가는 것이죠.

 

 

◑20세기에 반지성적 복음주의가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

 

▲근본주의나 세대주의, 오순절 성령주의는

모두 지난 19세기에 종교적 위기에 반응하여 일어난

복음주의의 생존전략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9세기에는 종교적 위기란, 자유주의 신학을 말합니다.

이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거를 뿌리 뽑을 작정이었습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정말 하나님이 있고, 내세가 있고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도덕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히브리 민족의 종교였다.. 라고 격하시켰거든요.

 

이때, 기독교는 참 하나님이 계시고 창조주가 계시고

그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보내어 구원하시고, 최후 심판이 있다.. 라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지켜내는, 그 반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근본주의’입니다.

 

이런 근본주의나/ 세대주의나/ 오순절 성령주의 같은 것들은 (통칭해서 복음주의)

제각각 기독교의 본질들의 어느 부분들을 일부 부분적으로 보존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지성적>으로는 모두가 취약한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복음주의에 단순화, 반지성 분위기의 요인은

지성이 가지는 교만이,

겸손한 신앙에 위협이 된다는 이런 생각 때문에, 복음주의가 반지성화가 된 것이죠.

 

▲그러니까 19세기에 자유주의가 일어난 것은

종교개혁 때

기독교 내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일어났지만

일반 역사에서는 ‘인본주의(인문주의)’로 반발 운동이 일어난 것이거든요.

 

그러면서 이게 (인본주의, 휴머니즘이) 전부 과학과 합리주의로 흘러왔는데 대해서

복음주의는

‘이게 이성과 철학을 강조한 잘못이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신학적 자유주의 운동이

이런 인본주의와 지성의 강조 때문에 일어났다..는 반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반지성주의’라는 공통된 컬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다른 소리 하는 놈들하고는 아예 상종도 하지 마라!’ 이것이 근본주의입니다.

 

반지성주의가 성령운동을 부채질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주의 같은 것은, ‘초월’을 강조해서

우리 기독교가 진짜 종교인 것을 증명해보이려는 주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느 쪽이나 다

지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저들(신학)과 아예 싸움을 하지 않는,

그리고 지성적인 것들은 전부 신앙적인 것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버리는

이런 반동(부작용, 반발)이, 말하자면 복음주의 내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이런 쪽으로 자꾸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라는 배타성,

말씀 대신에

-즉각적 성령 경험,

-대중적 설득력.

-천상에 대한 매혹과 지상에 대한 경멸,

-초자연에 대한 헌신과, 자연세계에 대한 외면.

이런 것들이 다 복음주의의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둘 다 균형을 맞춰야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종합(신학+신앙운동)을 위해

근본적 성찰을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오직 전도(교회 성장)으로만 치닫는 것은,

그 열심과 진지함이 아무렴 옳을지라도

기독교 신앙을 다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한국 교회가 잘못했다고 하기보다

 

이제야 잘못을 저지르는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아이가 커서, 사춘기가 되어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처음 시험을 보는 그 자리에 왔다. (그만큼 성장을 했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러나 오답이 나오지 시작하고

또는 보다 넓은 의미에 안목이 필요한 단계에 왔다.. 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는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음주의 신앙 컬러의 약점 중 하나는,

‘현실’을 무시하고, ‘내세 천국’만 약속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제대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만히 내무반에 쳐 박혀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그 날짜만 기다리기 보다는

그 날이 올 때까지, 군대생활(현실)을 열심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는, 천국 영생은 따 놓은 당상으로 보고,

현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이루는 크리스천의 삶 Christian living을..

강단에서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축복은 강조했지만요..

 

"현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며 (사상)

또한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영적 생명력도 필요로 합니다. (은혜)

둘 다 필요합니다.

 

▲생각을 해야 됩니다. 생각하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하고 '당신 예수 믿고 나랑 천국 같이 갑시다.’

그것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면 모든 것이 충분하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사상, 옳은 신학) 가운데로 인도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모르면 무조건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의 어떤 결함입니다.

 

‘옳으면 다다.’ .. 이게 신앙이 아닙니다.

‘옳은 사람이 참아야 된다.’ .. 이게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런데 옳으면 큰 소리를 치죠.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 신념이 아니고, 훨씬 더 깊고 높고 넓습니다.

 

 

▲교회 역사에 있어서 절정의 순간들은

언제나 심오한 신앙적 삶과

기독교적 사고 사이의 연결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가장 몇 가지로만 신앙의 길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그게 전부라는 것이죠.

신앙의 영역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교회 여덟 번 출석’을 부르짖으면 안 돼요.

교회 가는 것 너무 강조 마시고, 밖에 나가보세요. 세상에 나가서 부딪쳐 보세요.

 

세상 사람들과 부딪쳐서, 당신이 얼마나 다른가 보세요.

당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멋있고 따뜻하고 반가워야 되요.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크리스천. 따뜻한 사람으로’ 인정 받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못하고,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오히려 재수 없이 굴죠.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골치가 아프죠.

 

끊임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뒤좇아 다녀요.

세상에 그런 벌도 없을 거예요.

그러지 말자고요.

 

▲마치는 말.

교회 역사의 영성이

 

 

지적인 밸런스를 가지지 않으면,

 

그 영성이 발전은 하는데

지적 균형은 함께 가지지 않으면

지성을 태만시한 결과,

기독교 신앙이 타락하여, 엄청난 과실을 유발하거나

아니면 간단히 소멸하고는 했습니다.

이게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균형이 함께하지 않으면

영성만의 영향력은, 대단한 피해를 낳고는 했습니다.

 

여러분 역사상 제일 잔혹했던 통치자들은

다 이상주의자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상이 높을수록, 독단과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제거를

실행하고는 했습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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