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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마태복음 6장 5절~8절)(마태복음 6장 16절~18절)

by 【고동엽】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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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마태복음 6장 5절~8절)(마태복음 6장 16절~18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현대를 피아르(PR)의 시대라고도 하고 매스컴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즉시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알려집니다. 그래서 편리한 시대이지만, 그 반면에 단점도 많습니다. 결정적인 실수와 부작용이 적지 않게 수반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어느 사장님 말씀이, 화장품은 그 원가의 40퍼센트가 광고료라고 합니다. '우리 물건이 이렇게 좋고 저렇게 좋다'고 선전해야 하고 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그러한 세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인간성도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남의 평판에 신경을 씁니다. 자기는 상실해버리고 남의 눈치만 봅니다. 말하자면 타인주도적(他人主導的)인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하는 것도 내 것이 아니요 슬퍼하는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니 나도 저 사람을 미워한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니 나 또한 사랑한다. 빼앗겼으니 나도 빼앗는다---이런 식의 종속적인 인격, 종속적인 가치만이 남아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자가 화장대 앞에 앉아 있을 때에는 모두 끼가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잘 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열심히 화장을 한다는 말이겠지요. 아이들도 반대하고 남편도 싫어하는 화장을 굳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이런 것을 묘하게 빗대고 있습니다. 여자는 친구의 남편을 위해서 화장을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위장(僞裝)철학'입니다. 본디 그렇게 예쁘지 않은데 예쁘다고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 지나치면 통하지 않습니다. 통하지 않는 거짓말은 혐오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그것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마침내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신경과민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평판 따위에 의존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의 신앙까지도 남의 평판에 신경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난센스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는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길거리에 서서 기도합니다.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을 기도하는 것입니까? 전혀 빗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양심과 진실과 의와 선---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옳다 잘했다 인정해준다고 내 양심이 편할 것입니까? 내 양심은 내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들이 지지해주면 옳고, 비난을 하면 죽는다 산다 해가며 신경을 쓰고 눈치를 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완전히 상실되어버렸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쇼업(show up)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요?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쓸데없는 일입니다. 간혹 인사를 나눌 때에 보니 늙었다고 하면 싫어하고, 젊어 보인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이것도 한심한 일입니다.

행복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비밀한 것입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고 했습니다. 내 마음의 고통은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여자 분이 제게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비밀스러운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제 고통을 모르실 것입니다." 그렇게 입을 떼기에 "그렇다면 무엇 하러 오셨소?"하고 대꾸했습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모를 것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나의 답답한 심정, 쓰리고 아픈 마음은 나 아닌 남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가족도 소용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다 내 속을 알지 못합니다. 나의 고통은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고 '이유 없는 반항'을 한다고 합니다.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가 남에게 통하지 않는 것이지요. 나만이 아는 비밀한 고통입니다. '저 사람 정말 훌륭하다. 성공한 사람이야'하고 남들이 부러워하고 선망하지만 본인은 자신만의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밀한 고통입니다. 반대로 기쁨도 비밀한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기쁨입니다. 나만이 아는 기쁨입니다.

어느 자매님 한 분이 낳은 지 얼마 안된 딸아이를 안고 제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딸을 낳았어요!"하며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기뻐서 우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 자매는 심장병이 있었습니다. 살고 싶으면 결혼할 생각을 말라는 의사의 충고가 있었는데 그만 애인이 생겼어요. 제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시집이나 가보고 죽으렵니다"라고 말하는데야 어찌할 수 없더군요. 다시 의사가 하는 말이, 절대로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말했습니다. "아기를 가져보고 죽겠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건 모험으로 낳은 아기가 바로 그 품에 안긴 아기였습니다. 이런 경우 그 기쁨이란 남다른 것입니다.

본인만이 누리는 비밀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 사연을 듣고 이해해보고 상상해볼 수는 있어도, 실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기쁨에 다른 사람이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기쁨도 비밀한 것입니다. '비밀'이란 모른다는 말도 아니고 어렵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참여할 수 없는 나만의 것---그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갖는 기쁨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인간적인 기쁨이 깨달음의 기쁨입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혹은 누구를 불러내어 이런 기막힌 것이 있다고 열심히 설명도 해봅니다. 그런데 상대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수선을 떠는구나 하는 태도로 나옵니다. 알 리가 없지요.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나만이 깨닫는 기쁨입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아인슈타인 박사가 상대성원리를 발견했을 때에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온 세계에서 유명한 물리학자 11명을 불렀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이론을 몇 시간 동안이나 설명했는데, 명석한 물리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만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더랍니다. "왜 모르십니까? 왜 이해하지 못합니까?" 아인슈타인의 마음은 답답해서 터질 것 같습니다. 이 기막힌 진리, 이 기쁨을 왜 모를까?

감격도 나만의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동참할 수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은 스스로 깊이 명상하면서 그 신비함을 즐기는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이고 고상한 기쁨은 이러한 기쁨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비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진실의 비밀을 즐길 줄 아는 자만이 인생의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아무리 존경하고 칭찬을 해도 나는 '아니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사양을 합니다.

또한 남들이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쓸데없는 소리! 진실의 열쇠는 내게 있다' 하며 빙그레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인간입니다. 좀 좋은 소리 듣겠다고 안간힘을 써보아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변명 잘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불필요한 것이 변명입니다. 모름지기 깊은 진실을 비밀리에 즐길 줄 아는 인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깊이가 있어야 되겠어요.

이제 기도의 신비로운 비밀을 생각해봅시다. '은밀하다'라는 말은 비밀스럽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내게 주시는 사명을 알게 됩니다. 내가 당한 사건의 뜻을 알게 되고 미래도 알게 됩니다.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성 안토니는 그 기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에 올라가 3년 동안이나 똑같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이며, 나는 무엇입니까?" 그는 기도의 신비로움을 알았습니다. 요사이 저희 교회 새벽기도회에는 상상 밖으로 교인들이 많이 참석합니다. 약 1000명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걱정스러워요. 새벽잠이 없어서 나오는 것인지, 운동 겸해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오직 기도의 신비,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라는 신비한 행복을 알아서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출석하는 것과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적어도 기도로 하나님 만나는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비밀한 그 즐거움을 맛보는 자라야 예수 믿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내가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른다'---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그런 높은 경지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만남의 기쁨은 종합적인 해결입니다. 마치 밀월여행과도 같은 비밀스러운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자는 사이에 몰래 빠져나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다녔다는 기록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이 있든 없든 새벽에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밤늦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신비로운 기쁨을 은밀하게 즐기셨습니다.

기도를 할 때, 외식주의(外飾主義)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외식(外飾)이란 '광대 짓'이라는 뜻입니다. 남에게 보이려는 짓입니다. 저에게 이런 전화가 왔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께 도움을 청하고자 40일 금식기도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러면서 도움을 청하는데 이야기가 못마땅합디다. 듣다못해 농담으로 받아보았습니다. "40일이나 기도하셨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으니 좀더 기도하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왜 이런 말이 나와야 합니까? 내가 며칠을 기도했다느니, 금식을 했다느니, 웬 쓸데없는 소리입니까? 오히려 누가 알아챌까 봐 걱정을 해야지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초췌하게 말고 세수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 티를 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치 아침이슬이 내리는 것처럼 조용한 기도--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억수같은 비는 싹이 나게 하지 못합니다. 무효입니다. 조용히 젖어드는 아침이슬과 같이 은혜를 받아나가는 신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는 선행의 신비를 즐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학자들은 마가복음을 흔히 '비밀의 복음' 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많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고치시거나 변화산에서의 신기한 변화를 하신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신문기자 부를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밀에 붙여달라고 하십니다. 마술사로 오해하고 정치적인 것으로 오해될까봐 비밀에 붙여달라고 당부하십니다. 선행에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요사이는 수제의연금이니 불우이웃 돕기니 해서 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신문이나 방송에 대서특필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과연 그사람 참 훌륭한 일 한다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러봅니까? 쓸데없는 짓입니다.

선행은 비밀리에 하여야 의미가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도 모르게, 이웃도 모르게, 남편도 모르게, 그렇게 완전히 숨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은하게 조용히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을 할 때에라야 받는 사람도 은혜가 되며, 주는 사람도 선행의 신비로운 행복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스코틀란드에 아주 인색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인색한지 자기의 아들 4형제에게도 도대체 돈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아버지를 몹시 미워했답니다.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노랭이, 구두쇠, 수전노---이렇게 아버지를 욕했습니다. 노랭이 아버지가 마침내 돌아가시는 날이 왔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불쌍한 우리 아버지!' 아들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체를 치우려 했습니다. 머리맡에 유서가 있습니다.

'나의 남은 재산을 죠지 뮬러에게 돌리거라'---이것이 유서의 내용이었습니다. 고아원 원장인 죠지 뮬러에게 재산을 다 준다는 것이 유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유서를 들고 고아원을 찾아갔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아원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일생동안 대오셨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까지 노랭이다 구두쇠다 소리를 들으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와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에 이르러 '남은 재산을 모두 고아원에 돌린다'라는 유서를 남긴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이렇게 좀 은근하게 할 수 없습니까? 겨우 몇 가지 해놓고 알아달라 하고, 얼마만큼 알아줄 테냐 따지고 계산하고…… 서두르지 마십시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다. 냉수 한 그릇도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조용히 은밀하게 선한 일을 해보십시다. 주님은 은밀한 가운데서 넘치도록 갚아주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돕는 저 대상을 위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선행을 실천합시다. 물론 내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는 도덕적 향락주의로 흘러서는 안되겠지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인간됨, 인간다움의 행복이란 언제나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비밀 속에서 신비한 능력과 지혜를 얻습니다.

선행의 비밀 속에서 진실한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하나님만이 갚으십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고, 알려지고 인정받아보았자 오늘의 말씀대로 이미 상을 받은 것이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지나가는 사람이 아첨하는 말로 옅은 칭찬 툭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바랄 것이 못됩니다. 비밀로 덮어두십시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큰 은혜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은밀하게 만납시다. 비밀한 만남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무한한 기쁨과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마태복음 6장 5절~8절)(마태복음 6장 16절~18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현대를 피아르(PR)의 시대라고도 하고 매스컴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즉시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알려집니다. 그래서 편리한 시대이지만, 그 반면에 단점도 많습니다. 결정적인 실수와 부작용이 적지 않게 수반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어느 사장님 말씀이, 화장품은 그 원가의 40퍼센트가 광고료라고 합니다. '우리 물건이 이렇게 좋고 저렇게 좋다'고 선전해야 하고 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그러한 세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인간성도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남의 평판에 신경을 씁니다. 자기는 상실해버리고 남의 눈치만 봅니다. 말하자면 타인주도적(他人主導的)인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하는 것도 내 것이 아니요 슬퍼하는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니 나도 저 사람을 미워한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니 나 또한 사랑한다. 빼앗겼으니 나도 빼앗는다---이런 식의 종속적인 인격, 종속적인 가치만이 남아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자가 화장대 앞에 앉아 있을 때에는 모두 끼가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잘 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열심히 화장을 한다는 말이겠지요. 아이들도 반대하고 남편도 싫어하는 화장을 굳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이런 것을 묘하게 빗대고 있습니다. 여자는 친구의 남편을 위해서 화장을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위장(僞裝)철학'입니다. 본디 그렇게 예쁘지 않은데 예쁘다고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 지나치면 통하지 않습니다. 통하지 않는 거짓말은 혐오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그것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마침내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신경과민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평판 따위에 의존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의 신앙까지도 남의 평판에 신경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난센스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는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길거리에 서서 기도합니다.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을 기도하는 것입니까? 전혀 빗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양심과 진실과 의와 선---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옳다 잘했다 인정해준다고 내 양심이 편할 것입니까? 내 양심은 내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들이 지지해주면 옳고, 비난을 하면 죽는다 산다 해가며 신경을 쓰고 눈치를 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완전히 상실되어버렸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쇼업(show up)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요?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쓸데없는 일입니다. 간혹 인사를 나눌 때에 보니 늙었다고 하면 싫어하고, 젊어 보인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이것도 한심한 일입니다.

행복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비밀한 것입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고 했습니다. 내 마음의 고통은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여자 분이 제게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비밀스러운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제 고통을 모르실 것입니다." 그렇게 입을 떼기에 "그렇다면 무엇 하러 오셨소?"하고 대꾸했습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모를 것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나의 답답한 심정, 쓰리고 아픈 마음은 나 아닌 남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가족도 소용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다 내 속을 알지 못합니다. 나의 고통은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고 '이유 없는 반항'을 한다고 합니다.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가 남에게 통하지 않는 것이지요. 나만이 아는 비밀한 고통입니다. '저 사람 정말 훌륭하다. 성공한 사람이야'하고 남들이 부러워하고 선망하지만 본인은 자신만의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밀한 고통입니다. 반대로 기쁨도 비밀한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기쁨입니다. 나만이 아는 기쁨입니다.

어느 자매님 한 분이 낳은 지 얼마 안된 딸아이를 안고 제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딸을 낳았어요!"하며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기뻐서 우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 자매는 심장병이 있었습니다. 살고 싶으면 결혼할 생각을 말라는 의사의 충고가 있었는데 그만 애인이 생겼어요. 제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시집이나 가보고 죽으렵니다"라고 말하는데야 어찌할 수 없더군요. 다시 의사가 하는 말이, 절대로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말했습니다. "아기를 가져보고 죽겠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건 모험으로 낳은 아기가 바로 그 품에 안긴 아기였습니다. 이런 경우 그 기쁨이란 남다른 것입니다.

본인만이 누리는 비밀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 사연을 듣고 이해해보고 상상해볼 수는 있어도, 실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기쁨에 다른 사람이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기쁨도 비밀한 것입니다. '비밀'이란 모른다는 말도 아니고 어렵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참여할 수 없는 나만의 것---그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갖는 기쁨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인간적인 기쁨이 깨달음의 기쁨입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혹은 누구를 불러내어 이런 기막힌 것이 있다고 열심히 설명도 해봅니다. 그런데 상대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수선을 떠는구나 하는 태도로 나옵니다. 알 리가 없지요.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나만이 깨닫는 기쁨입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아인슈타인 박사가 상대성원리를 발견했을 때에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온 세계에서 유명한 물리학자 11명을 불렀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이론을 몇 시간 동안이나 설명했는데, 명석한 물리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만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더랍니다. "왜 모르십니까? 왜 이해하지 못합니까?" 아인슈타인의 마음은 답답해서 터질 것 같습니다. 이 기막힌 진리, 이 기쁨을 왜 모를까?

감격도 나만의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동참할 수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은 스스로 깊이 명상하면서 그 신비함을 즐기는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이고 고상한 기쁨은 이러한 기쁨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비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진실의 비밀을 즐길 줄 아는 자만이 인생의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아무리 존경하고 칭찬을 해도 나는 '아니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사양을 합니다.

또한 남들이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쓸데없는 소리! 진실의 열쇠는 내게 있다' 하며 빙그레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인간입니다. 좀 좋은 소리 듣겠다고 안간힘을 써보아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변명 잘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불필요한 것이 변명입니다. 모름지기 깊은 진실을 비밀리에 즐길 줄 아는 인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깊이가 있어야 되겠어요.

이제 기도의 신비로운 비밀을 생각해봅시다. '은밀하다'라는 말은 비밀스럽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내게 주시는 사명을 알게 됩니다. 내가 당한 사건의 뜻을 알게 되고 미래도 알게 됩니다.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성 안토니는 그 기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에 올라가 3년 동안이나 똑같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이며, 나는 무엇입니까?" 그는 기도의 신비로움을 알았습니다. 요사이 저희 교회 새벽기도회에는 상상 밖으로 교인들이 많이 참석합니다. 약 1000명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걱정스러워요. 새벽잠이 없어서 나오는 것인지, 운동 겸해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오직 기도의 신비,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라는 신비한 행복을 알아서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출석하는 것과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적어도 기도로 하나님 만나는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비밀한 그 즐거움을 맛보는 자라야 예수 믿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내가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른다'---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그런 높은 경지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만남의 기쁨은 종합적인 해결입니다. 마치 밀월여행과도 같은 비밀스러운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자는 사이에 몰래 빠져나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다녔다는 기록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이 있든 없든 새벽에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밤늦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신비로운 기쁨을 은밀하게 즐기셨습니다.

기도를 할 때, 외식주의(外飾主義)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외식(外飾)이란 '광대 짓'이라는 뜻입니다. 남에게 보이려는 짓입니다. 저에게 이런 전화가 왔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께 도움을 청하고자 40일 금식기도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러면서 도움을 청하는데 이야기가 못마땅합디다. 듣다못해 농담으로 받아보았습니다. "40일이나 기도하셨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으니 좀더 기도하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왜 이런 말이 나와야 합니까? 내가 며칠을 기도했다느니, 금식을 했다느니, 웬 쓸데없는 소리입니까? 오히려 누가 알아챌까 봐 걱정을 해야지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초췌하게 말고 세수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 티를 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치 아침이슬이 내리는 것처럼 조용한 기도--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억수같은 비는 싹이 나게 하지 못합니다. 무효입니다. 조용히 젖어드는 아침이슬과 같이 은혜를 받아나가는 신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는 선행의 신비를 즐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학자들은 마가복음을 흔히 '비밀의 복음' 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많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고치시거나 변화산에서의 신기한 변화를 하신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신문기자 부를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밀에 붙여달라고 하십니다. 마술사로 오해하고 정치적인 것으로 오해될까봐 비밀에 붙여달라고 당부하십니다. 선행에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요사이는 수제의연금이니 불우이웃 돕기니 해서 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신문이나 방송에 대서특필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과연 그사람 참 훌륭한 일 한다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러봅니까? 쓸데없는 짓입니다.

선행은 비밀리에 하여야 의미가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도 모르게, 이웃도 모르게, 남편도 모르게, 그렇게 완전히 숨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은하게 조용히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을 할 때에라야 받는 사람도 은혜가 되며, 주는 사람도 선행의 신비로운 행복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스코틀란드에 아주 인색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인색한지 자기의 아들 4형제에게도 도대체 돈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아버지를 몹시 미워했답니다.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노랭이, 구두쇠, 수전노---이렇게 아버지를 욕했습니다. 노랭이 아버지가 마침내 돌아가시는 날이 왔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불쌍한 우리 아버지!' 아들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체를 치우려 했습니다. 머리맡에 유서가 있습니다.

'나의 남은 재산을 죠지 뮬러에게 돌리거라'---이것이 유서의 내용이었습니다. 고아원 원장인 죠지 뮬러에게 재산을 다 준다는 것이 유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유서를 들고 고아원을 찾아갔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아원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일생동안 대오셨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까지 노랭이다 구두쇠다 소리를 들으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와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에 이르러 '남은 재산을 모두 고아원에 돌린다'라는 유서를 남긴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이렇게 좀 은근하게 할 수 없습니까? 겨우 몇 가지 해놓고 알아달라 하고, 얼마만큼 알아줄 테냐 따지고 계산하고…… 서두르지 마십시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다. 냉수 한 그릇도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조용히 은밀하게 선한 일을 해보십시다. 주님은 은밀한 가운데서 넘치도록 갚아주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돕는 저 대상을 위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선행을 실천합시다. 물론 내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는 도덕적 향락주의로 흘러서는 안되겠지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인간됨, 인간다움의 행복이란 언제나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비밀 속에서 신비한 능력과 지혜를 얻습니다.

선행의 비밀 속에서 진실한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하나님만이 갚으십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고, 알려지고 인정받아보았자 오늘의 말씀대로 이미 상을 받은 것이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지나가는 사람이 아첨하는 말로 옅은 칭찬 툭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바랄 것이 못됩니다. 비밀로 덮어두십시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큰 은혜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은밀하게 만납시다. 비밀한 만남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무한한 기쁨과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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