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의 의미와 진로
김성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 구약학)
성경 말씀 한 곳만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입니다."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길을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처음에 총회 교육부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와 진로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것은 제가 맡아야 할 그런 제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이런 제목은 조직신학을 맡으신 분이나, 특히 교회사를 전공하시는 분께서 이런 제목의 내용을 다루어야 마땅하리라 생각을 해서 거듭 사양했습니다만은, 부탁에 못 이겨서 응낙은 했습니다만, 참으로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께 유익을 끼칠 수 있을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내용상 특히 이제 교회사 부분을 다룰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부족하고 혹시 오류가 있을지라도 널리 양해하시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이 제목이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라고 말씀하셨는데, 개혁주의 신학은 매우 방대한 체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느 것과 대조시켜서 이해하든지 간에, 로만 카톨릭과 대비해서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든지, 아니면 같은 종교 개혁을 시작한 운동이지만은, 우리가 특히 독일과 북구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는 루터파 신학과 대비해서 말씀하든지 간에, 개혁주의 신학은 워낙 방대한 체계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한 시간 내에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 중 한 제목만을 뽑아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짧은 시간에 말씀드릴 수 없는 줄 압니다. 또 그와 같은 것은 이 분야를 전문하신 분들께서 차후에 취급하는 것이 옳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따라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내용은 어떤 구체적인 신학의 내용을 다룬다기 보다, 어떤 개혁주의의 특징적인 시각에서 몇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대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한번 어떤 시도를 해서 이룬 것에, 성취한 것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있어서 편입한 여러가지 오류들, 잘못된 것들, 이것들을 일단 제거한 다음에, 복음과의 만남을, 참다운 교회다움, 교회상이라고 합니다만은, 올바른 교회다움으로 늘 끊임없이 새롭게 표현하는 그런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정의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얼마만큼 잘, 그리고 충분히 드러냈는가는 차치하고, 조금 전에 그분이 정의한 그런 개혁주의의 특징에는 두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있어서 초래된 잘못들, 오류들을 일단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류를 제거한다고 하는 말은 또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을 잘못된 것인가? 오류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전제로 합니다. 이 기준이 뭔가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지요. 이것은 비단 개혁주의만의 특색은 아닙니다만은, 모든 종교개혁 자체의 삼대 원리 중의 하나입니다만은,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라고 하는 그 말씀입니다. 성경이 무엇이 참되고,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있어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판별하는 절대적인 무오한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방금 말씀드린 개혁주의적 특징 정의에서 또 한가지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흔히 개혁주의 특징을 설명할 때 이런 구호를 많이 듣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daest' 라고 그러는데, 개혁되어진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바로 방금 말씀드린 그런 두가지 원리라고 할까요? 두가지 시각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와 진로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그 첫번째 원리는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라고 하는 이 원리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면, 아까도 언급했습니다만, sola scritura 라고 하는 원리는 개혁주의만의 유일한 원리가 아니고요, 비록 교회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 내지 그보다 더 궁극적인 권위를 갖는 교회 전통을 언급했습니다만,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도 성경의 권위는 인정을 했지요. 그러나 교회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것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교회 결정을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놓는 그런 것에 반대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만큼, 모든 종교 개혁자에 있어서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는 다 전제가 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경으로만 이라고 하는 이 원리는 개혁주의에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주장되고 강조된 그런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같이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강조했습니다만은, 루터의 경우에는 조금 색깔이 다른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야고보나 다른 등등 여러 책에 대해서 뭐 지푸라기 성경이니 하는, 어떤 그런 자신이 경험한 은혜, 이신칭의의 어떤 그런 은혜에 비추어서, 성경 내의 어떤 그런 차등을 두려고 하는 어떤 그런 루터의 생각과는 조금 달리,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채택된, 우리도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제일 첫머리에, 다른 하나님의 작정이나 삼위일체, 이런 것들 취급하기 맨 처음에, 첫장에 바로 이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경 작성에 있어서 제일 오랜 시간이 걸려서, 정성을 쏟고, 조목조목 살피고 다듬은 부분이 바로, 이 성경에 관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그 일에 참여했던 분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에 있어서는 이처럼 오직 성경으로만 이라고 하는 이 원리가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학적 원리의 도출 근거를, 또는 근원을 성경에 두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개혁주의 신학을 어떤 말로 부르는가 하면, 성경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흔히 유행하는 그런 의미에서 성경신학이 아니고요, 이것을 영어로 말하면 조금 구분이 갑니다만, 우리가 흔히 요즘 말하는 성경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Biblical Theology지요. 성경적인 신학이지요. 이것을 우리말로 쉽게 해서 성경신학이라고 합니다만, 이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가리켜 성경신학이라 할 때에는 Bible Theology, Bibel theologie (비벨테올로기)라고 그럽니다만, 정말 성경신학이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성경과 존립을 같이 하는 어떤 그런 신학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이 개혁주의 내에서 보면, 항상 문제가 되어 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의 권위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영감론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나 다른 개혁파 교회에서 큰 신학적 논쟁이 있을 때마다, 특별히 합리주의가 성행할 때에 교회 내에 있었던 여러가지 논쟁에 있어서 가장 초미의 관심사, 가장 뜨거웠던 논쟁점이 뭔가 하면, 성경과 관련되어 있어요. 성경 영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개혁주의에 있어서는 다른 종교개혁, 특히 루터파와 비교해서 볼 때, 꼭같이 종교개혁을 시작한 다른 어떤 교파와 비교해 볼 때도, 특히 이 성경의 권위, 모든 신학의 출발점으로서의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모든 진리 판단의 표준으로서, 절대적이고 무오한 표준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 회의, 공회의 결정이나 선언, 그리고 옛 교부들의 견해, 그 어떠한 종류의 견해이든지 간에, 항상 성경의 표준에 비추어 조사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그런 뜻의 조문을,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경 속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압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원리라고 하는 것,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그 말씀, 이 말씀은 개혁주의 신학은 정체되지 않고, 한번 어떻게 시도를 해서, 한번의 시도로 완성되지 않고, 또 달리 표현하면 정체되어 있지 않고, 완성되면 그 이상 더한 것이 없으니까, 딱 정체되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정체되어 있지 아니하고, 발전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그런 뜻이 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발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만큼, 신학의 역사를 하나의 동력적인 과정, 아주 힘있게 형성되어 가는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조금 아귀가 맞지 않다는 느낌을 가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개혁주의의 특징을 말씀드리면서 우선 교회 가르침과 생활에 있어서의 잘못된 모든 오류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에 대한 판단 기준은 성경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무오한 기준이 있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발전의 가능성, 발전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오류의 가능성도 포함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성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상대화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표준을 가졌으면 절대적인 판단이 가능할 터인데, 왜 개혁주의 신학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어떤 발전의 여지를 두었을까? 좀 이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만은, 거기에는 이런 이해가 전제되어 있는 줄 압니다. 성경 자체는 절대적이요 무오한 표준이지만은, 성경에 대한 이해는, 어느 한 시기에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다고 하는, 성경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표준과 그 성경에 대한 이해를 분리시켜서, 성경 자체는 완전하나 성경에 대한 우리 이해는 완벽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 전제가 되어 있고, 성경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 신학은, 따라서 어느 정도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인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핏 생각하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말을 했으니까, 어떤 개혁 신학적인 전통도 완전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 세대가 항상 그것을 비판하고 오류들을 발견하고, 제거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둔 것은, 항상 개혁해야 된다고 말할 것은, 우리가 신학적 유산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일단 거부해 놓고, 부정해 놓고 보고, 그 다음에 자기 나름대로 어떤 새로운 체계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전수되어 온 개혁주의 신학을 오히려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면서, 말하자면 그것이 참으로 성경에 부합 하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있을 수 있는 오류들, 부족한 것들을 성경에 더 밝은 깨달음에 의해서 보충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 두가지 원리를, 아까 말씀드린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과 관련해서 몇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대개 이런 말씀이 될 수 있는 줄 압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과거 전통에, 신학적인 교회 전통에 대해서, 성경에 비추어 그것의 정당함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전통 속에 들어 있는 잘못된 요소들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고, 그러나 이것은 과거 유산, 과거 전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교회 역사 속에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교회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인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도 과거에만 오류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런 교회 전통 형성에 있어서, 잘못된 오류들이 침입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것들을 계속적인 노력을 통해서, 성경에 비추어 그 오류들을 제거해 내고, 성경의 바른 뜻을 밝혀, 그 말씀에 따라 참다운 교회 모습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 그 속에 있는 줄 압니다.
이런 개혁주의 특징에 비추어,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신학이 걸어온 길을, 또 그 모습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저는 교회사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개괄적인 말씀이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모든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신학사도 마찬가지 입니다만은, 교회사에 있어서, 몇가지 큰 역사적 동인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큰 전환기라 할까요? 어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어떤 큰 흐름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이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엽까지 일어났던 독일의 경건주의가 그 첫째이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시작된 자유주의,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의한 도전이 그 둘째이고, 세번째는 어느 시대에나 쭉 있어 왔습니다만은,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설정이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세 교회에 있어서는, 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 다릅니다만은, 국가와 교회가 상당히 밀착이 되어 있었고, 서로 상호 간의 어떤 영향력을 미치기를 원했고, 또 행사해 왔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원칙적으로는 교회와 국가 간의 분리를, 구별을 천명했습니다만은,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이, 왜냐하면 교회가 국가와 좀 분리해서 교회에 대한 자율권을 스스로 갖고 싶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정부가 가만 놔두지 않으면, 세속 국가가 가만 놔두지 않으면 그것은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국가와 교회 간의, 정치와 교회 간에 그런 복잡한 어떤 역사 과정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항상 이제 문제가 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개신교에 있어서 큰 두가지 흐름을 대변하는 루터파와 개혁주의 두 파에 다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가 영미에서는 대각성 운동으로 나타났고, 영국에 있어서는 감리교 운동이라고 그럴까요? 성결운동이라고 하나요? 그런 것으로 나타났고, 자유주의가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어떤 의미에서 미국 장로교를 완전히 공중 분해시켜 버렸다고 그럴까요? 그 원흉이 바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입니다. 또 이제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도 교회와 사회의 관계, 또는 국가의 관계가 항상 미묘한 문제로 계속 이제 어떤 분쟁의 불씨로 작용해 왔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독일, 화란, 동구에 있어서 헝가리, 그리고 특별히 영미에 있어서는 장로교 개통, 그리고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남미쪽, 남미에 있는 장로교, 그리고 우리 한국도 극동의 우리 한국도 거기에 포함이 됩니다만은, 대개 이렇게 이제 광범하게 개혁주의가 퍼졌는데, 그 각 부분에 대해서, 각 지역에 있어서의 개혁주의 발전에 대해서 우리는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고, 한국 장로교회와 가장 가까운 관계로서 아주 큰 영향을 끼쳐 온 미국 장로교의 경우에 국한해서 잠깐 그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아주 개괄적인 말로 표현을 한다고 그러면,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퓨리탄들, 청교도들이 먼저 17세기입니까?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 왔고, 이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칼빈주의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칼빈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그런 어떤 유파였고, 이들은 또 상당히 그런 개인 경건에 열심인 어떤 그런 특징을 가졌었고, 또 이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간만큼, 뉴잉글랜드 지방에 정착하면서, 거의 기독교 국가, 신앙 공동체 비슷한, 어떤 그런 생활을 한 것으로 우리가 잘 압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고 그러면, 교리적으로는 상당히 칼빈주의적이었고,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적 요소도 그 속에 갖고 있었고, 또 거기서 거의 국가와, 사회와 교회와의 구별이 거의 생기지 않을 만큼, 거의 하나의 종교사회로 존재한 만큼, 사회와 상당한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생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후에 18세기에 들어 와서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독일, 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영향으로, 한 템포 늦게 미국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대각성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쪽에서 들어 온 이민들에 의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세력이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들은 상당히 교리를 중요시하는 어떤 그런 특징을 가졌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선 이렇게 내려오면서 미국 역사가, 또는 사회적 구조 내지 성격이 변함에 따라서 교회 내에도 여러가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제 경건주의적 경향, 대각성 운동과, 엄격한 교리를 고수하기를 원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통과 있었던 갈등을 조금 후에 말씀드리겠고, 첫째로 다른 면에서 일어난 어떤 그런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내의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교회와 사회, 국가와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유산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교회와 사회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교회가 사회 일에 간섭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에 있어서 안식일을 입법화하는, 법제화하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전체 장로교회가 다 동의를 한 것이었고, 그래서 잘 진행된 반면에, 노예제도 폐지, 특히 미국 남북전쟁 즈음에 노예제도 폐지 문제가 거론이 되자, 잘 아는 대로 남부 지역은 흑인 노동력이 없으면 면화 재배, 산업을 유지하기가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장로교 내에서 이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부 쪽에서는 교회는 영적인 문제나 할 일이지, 이런 정치적인 문제는 간섭할 것이 못된다고 주장했고, 그런가 하면 특별히 뉴잉글랜드 지역, 북부 지역, 그쪽의 교회들은 노예제도를 강력히 폐지해야 한다고, 교회가 분명히 이런 일에 있어서는 사회에 관여해서 이런 악을 없애야 한다는 어떤 그런 주장을 하게 되고, 그래서 교회 내의 갈등을 초래했던 것을 이미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나중에, 이런 논쟁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미국 사회가 거의 신앙인이었었다. 대부분이 신앙인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후에 꾸준히 이민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고, 장로교뿐 아니라 또 다른 여러가지 교파들이 들어오게 되고, 특별히 신앙을 갖지 않은 여러가지, 여러 이민들이, 우리가 말하는 복수 종교사회라고 그러나요? 그리고 사회의 이념에 있어서도 어떤 그런 칼빈이즘적인 그런 국가관을 갖기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주장하는 그런 국가 이념들이 등장하고, 이렇게 됨에 따라 역사적 상황이 옛날 청교도하고는 상당히 변하여 버렸지요. 그때는 거의 신앙에 있어서 동질성이 확립된 그런 종교적 공동체였고, 거기에서는 교회나 사회가 크게 이렇게 분리가 되지 않는 만큼, 관여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지만은, 이렇게 어느 한 교파의 견해에 따라 그 전 사회의 일을 결정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리자, 이런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어떤 그런 인본주의나 자연과학 사상에 의한 성경 권위에 대한 도전들이 있게 되었고, 이런 자유주의와 결합해서 어떤 것이 생겨났는가 그러면, 사회 참여, 사회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와 결합될 때는 어떤 현상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사회 복음, Social Gospel 이라고 하는 어떤 그런 쪽으로 나타나서, 종래의 장로교 같은 기본적인 교리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속죄에 근거한 어떤 그런 구원까지도, 개인 구원까지도 부정해 버리는, 말하자면 기독교를 하나의 윤리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그런 사회 복음으로도 변질이 되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종래의 전통적인 개혁주의에 심각한 도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때 구 프린스톤에 있어서의 찰스 핫지나 워필드 같은 사람이 학적으로 전통적인 신학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 노력은 나중에 자유주의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고 난 다음에 웨스터민스터에 의해서 이것이 또 계속 된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웨스터민스터가 형성될 때,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근본주의 연합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우리가 사소한 데 어떤 차이가 있을지라도, 신학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 자유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공동의 적을 대처하기 위해서 연합하게 된 어떤 근본주의 운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행되다가 근본주의 내에서 또 분열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것은 특별히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흔히 메킨타이어, 그분이 주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이런 신학적으로 이질적인 어떤 그런 그룹 때문에, 결국 다시 근본주의도 갈라지게 되는 그런 교회 분열을 미국 교회가 맞게 되지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제 전공도 아닌 미국 장로교회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대개 이런 역사적 흐름에 의해서 개혁주의에서 가장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장로교회가 대개 어떤 길을 걸어 왔고, 지금 어떤 형편인가를 말씀드리고, 특별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는 한국 장로교회 역사와 긴밀히 연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또는 요즘 와서는 장로교회 내에서도 미국 장로교의 이와 같은 역사와 현실을 보고 대개 어떻게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한마디로 분열, fragmentation이라고 그럽니다만, 갈가리 찢어졌다, 교회가 갈가리 찢어졌다. 그리고 특별히 장로교회와 관련해서 지식주의, 그리고 냉랭함, 교만, 독선, 이런 것들로 대개 장로교의 특징을 말하는 것을 우리가 흔히 듣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런 분열, 교회 분열, 그리고 지식주의, 냉랭함 등등 이런 문제는 개혁주의 자체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미국 장로교회사를 쭉 보면, 그냥 너무 급히 지나가서 그것이 제대로, 제 뜻이, 의사가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서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겪었던 그런 단계들이 그대로 거기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와 상응하는 것이 대각성운동이고, 그 경건주의가 끼친 순기능과 역기능, 그것들이 미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고, 거기에 대한 어떤 그런 보수주의자들의, 어떤 교리를 강조하는 그런 정통주의자들의 반동이,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나 있었고, 또 자유주의가 등장했을 때 이에 대해서 학적으로 변호하려고 하고, 변증하려고 하는 노력이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나 다같이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가 찢어지고 갈라진 일들, 그리고 대각성 운동에 의해서 군소 교파에 불과하던 그런 감리교나 침례교들이 급성장해서 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 이것은 오히려 미국에서 잘 맞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유럽에서도, 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거의 다같이 나타났던 그런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 간의 미묘한 문제가 교회 내에 여러가지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도 독일 교회나 미국 교회나 방식과 정도에 있어서 좀 차이가 있겠지만은, 다 일어났던 문제입니다.
따라서 장로교만을 가리켜서 저것은 분열주의자다. 장로교는 분열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제 왜 분열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포괄적이지 못하고, 편협한 성격 때문에, 독선과 교만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만은, 이것은 그 옳고 그름의 문제를 하나의 mentality, 사람의 성격의 문제로 환원시켜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고 하는, 어떤 그런 평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과연 이 장로교나 개혁주의자들이 직면했던 그런 문제들, 경건주의가 만들어 놓은, 초래한 여러가지 그런 잘못된 것, 교리적인 오류들, 이런 것들을 가만 덮어두고 그냥 싸안고 있어야 할 것인가? 특별히 자유주의, 성경의 권위 자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은 구원 자체를 거부, 부정하는 그런 자유주의를, 그럼 교회가 관영과 일치라고 하는 명분 아래, 교회가 싸안고 포용했어야 하는가? 라고 우리가 반문을 한다고 그러면, 우리가 교회 분열한 그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우리의 약점으로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한 문제였고, 또 그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중요한 것인 만큼, 기독교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던 만큼, 그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식주의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 당시의 문제가, 특히 자유주의와 관련해서 문제가 된 것이 대개 이 지식적인 면에서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변증하려고 하는,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노력에서 지식적인 면이 부각된 것, 그것이 반드시 약점이나 잘못된 오류로 지적되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흔히 그들은 독선적이었다고 말을 하는데, 진리와 비진리와의 투쟁, 전쟁이라고 하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 어떤 호전적인 심성이 작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당시 특별히 강조된 것이 교회의 전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때 교회 상황이 진리와 비진리 간에 시비가 분명해야 하는 그런 어떤 상황이었던 만큼,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그런 태도는, 유화적인 사람, 모든 것을 그저 덮어두고 적당히 싸안고 포용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태도가 독선적으로 비췰는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교회의 사활을 가름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결코 독선이라고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때 그 문제 자체가 사소한 문제였고, 또 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그런 주장이었을 때는 그들의 태도가 참 독선적이었다고 비난받아 마땅하겠으나, 그러나 사안 자체가 중요하였고, 또 시비가 분명한 문제였던 만큼, 옳은 것을 옳다고 분명히 말한 그것이 결코 독선적인 태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그저 중간을 생략 < > 특별히 이런 자유주의에 의한 위기, 이들은 다 개신교 전체 공통적으로 닥친 것인데, 이들에 대한 반응 역시 루터파나 개혁주의 교회를 막론하고, 무론하고, 대개 비슷한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이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루터파에서는 옛 교리들을 고수하려고 하는 그런 Neo Lutheranism, 신루터주의가 일어나게 되었고,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프린스톤을 중심으로 한 구학파라고 그러나요?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들이 강력하게 고수하려고 했던 기존의, 그들이 성경이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성경이 분명히 주장한다고 생각하는 교리들을,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갖다 교리주의자 이렇게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주의자들의 어떤 그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 운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경건주의적 경향은 여전히 남아서, 그후에는 교파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많으니까, 이런 교파, 저런 교파, 특색을 따라 여전히 남아 있었고, 특별히 사회 참여,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어느 특정 사회 속에 몸을 담고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수는 없습니다. 여하튼 어떤 특정 사회 내에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고 하는 그런 문제는 항상 대두되게 마련인데, 이런 문화적 사명과 관련해서 항상 이렇게 미묘한 지렛대 역할을 한 것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 문제도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었고, 특별히 우리 한국 같은 경우에도 6.29 사태를 즈음해서, 그 부분에서, 교회가 이러한 때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가? 라고 하는 그런 것이 한국 교회 내에서 열띤 논쟁 거리가 되었던 것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산재하는 하는 여러가지 개혁주의 교파들의 특색을, 신학적 특성을 크게 분류해서 대개 이렇게 나누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교리주의자, 그리고 경건주의적 경향의 사람들, 또 문화적 사명을 강하게 주장하는 어떤 그런 사람들의 교파, 미국 내에서는 특히 이제 칼빈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어시아닉 Christian Reformed Churth가 이 일에 적극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은, 대개 이 세가지 신학적 내지 신앙적 특색이 개혁주의 내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향해서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상대방을 비난한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선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리, 경건, 문화적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개혁주의와 상치되는 것이 전혀 없고요, 개혁주의 내 속에 다 포함되는 것이고,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고,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문제화되어서 경건주의니 교리주의니, 사회 참여파니 하는 이런 말이 논쟁의 불씨로 계속 등장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개혁주의 신학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이런 것들이 교회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늘 다시 등장하게 될 때마다 여러가지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면서, 여러가지 신학의 특색들이 가미되면서,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부정적인 부산물들을 토해 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교리를 무시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믿어야 할 것을 모르면서 우리가 어떻게 뭘 믿겠다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께서 목회서신을 통해서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목회자에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건전한 교훈, 가르침, 교리를 가르치라는 것이었고, 그것을 해치는 자들을 엄중히 경계하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말을 빌리자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그 복음, 그 교리가 아닌, 그 복음 교리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나타난 이 교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교회적 상황을 우리가 감안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전투적인 상황,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그런 상황을 우리가 감안할 때, 참 그들이 강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할지라도, 참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은, 아무래도 나쁜 것은,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어떤 부산물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하면, 계속 지적으로 항변하려고 변증하다 보니까, 이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보다는 너무 주지주의적이 되어서, 이지적이 되어서, 우리 흔히 개혁주의 내에서도 이야기하는 Historical Faith, 역사주의적 신앙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이 많았었고, 또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런 전투적 상황에서 강하게 반발하다 보니, 참 그런 상황이 오래 습관화되어서 교만과 독선의 부산물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그 가능성을 우리가 부정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교리 자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우리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필요 불가결한 중요한 것이로되, 역사적으로 교리주의가, 전체는 아닐지라도 그 일부에 있어서나마, 빚어내었던 부산물들, 부정적인 부산물들, 우리가 심각히 반성해야 할 줄 압니다.
그 다음에 이제 제가 경건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 제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만은, 이들이 이제 외친 말들, 교리 대신에 삶이 있어야 한다. 어떤 그런 제도적 직분이 아니라, 성령이어야 한다. 겉모양만이 아니라 어떤 능력,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쳤던 그들의 말에서 역으로 추측을 하면, 경건주의가 발흥하게 된 그 이면에는 분명히 어떤 그런 정통교회에 있어서 영적으로의 메마름, 그런 것들이 분명히 있었고, 이에 대한 갈급함이 경건주의 운동을 크게 확산케 하는 하나의 계기가, 하나의 토양이 되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저는 경건주의가 주장한 근본적인 긍정적인 면들, 어떤 살아 있는 생명력 있는 믿음, 그리고 그런 성령님의 살아 생생한 역사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맺히는 열매들을 강조한 것, 그런 것은 성경이 천번 만번 지지하는 것이요, 참으로 그 당시 정통주의 교회가 그처럼 생명력을 상실하였다고 하면, 그 상황에서 반드시 주장되었어야 할 어떤 긍정적인 주장이라고 저는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믿음과 삶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라고 하는 이것을 주장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주장하면서 항상 무엇을 의식하고 반대한 것이 있어요. 사실 교리와 삶이라고 하는 것을 떨어질 수가 없는데, 불가분의 것인데, 이 사람들은 교리가 아니라, 교리에 반해서 삶이 있어야 한다. 직분과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이 문제다 라고 하는 이런 것들, 말하자면 반교리적이고 반제도적인 이런 태도들, 이런 것들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들은 그런 살아 있는 생생함을 너무나 강조했기 때문에, 차디찬 지성보다는 감정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래서 대각성 운동이나 이런 데서 보면 정서적인 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결코 신앙에 있어서 정서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면, 그리고 참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감화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복된 감정, 우리가 다 그것을 느끼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가볍게 생각하게, 어떻게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 것을 우리가 다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반교리적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 것인데요, 우선 이렇게 자꾸 감정을 강조하다 보니까,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이야기합니다만, Temporary Faith, 일시적인 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컸습니다. 일시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그의 영혼이 거듭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그런 정서나 뜨거움이라기 보다는, 그저 내적인 참된 변화 없이, 그저 잠시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바글바글 끓다가,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옵니다만, 그저 얇은 흙에 떨어져서 싹이 금방 나서 이렇게 하다가, 결국 그 밑에 큰 바위가 있기 때문에, 뿌리를 뻗지 못해서, 수분을 받지 못해서 결국 이제 말라죽는, 그런 일시적인, 잠정적인 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폐단들이 나타났습니다. 반교리적인 이런 태도가 경건주의로 하여금 내용이 없는 믿음이 되게 했어요. 믿을 것이 없잖아요, 반교리적이면, 물론 이것은 혹평입니다만은, 하나의 경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만은, 경건주의 가운데 헹스텐버그 같은 유명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여튼 내용 없는 신비주의적 감정 내지, 체험 위주의 믿음으로 전락하기 쉬웠고, 실제로 그런 부작용이 많이 나타났고, 믿음이 어떤 그런 객관적인 토대를 상실하고, 말씀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토대를 상실하고, 주관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부작용들도 초래되었습니다.
이전에 정통교회에서 강조가 된 것은 객관적인 토대로서의 말씀, 객관적인 수단으로서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으로서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참 그 말씀에 나의 전부를 맡기는, 신뢰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것이 강조된 반면에, 경건주의의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감정을 너무 강조하고, 체험적인 그런 것을 너무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결국 어떤 폐단이 생겨났는가 하면, 감정을 부추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인위적으로 감정을 유발시키고, 흥분시키고 하는, 우리 종래 한국 부흥사에게서 많이 봅니다만은, 박수 부대를 동원한다든지, 여러가지 이런 것들이 경건주의 운동 말기에 오면, 미국에서 그런 일이 나타나게 되고, 챨스 피니 같은 사람, 하여튼 그런 것이 감정을 유발하다 보니까, 유발하는 것과 함께 뭐가 강조가 되었는가 그러면, 종래의 종교개혁에 있어서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중의 하나였던 오직 은혜로만,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그것이 약화되고, 인간의 결단과 의지에 호소하는, 그런 면들이 강조되게 되어서, 나중에는 어떤 신학적인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면, 거의 반펠라기우스적인 그런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제 근본적으로는 교리나 경건이나 어떤 문화적 사명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로 통합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나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어떤 현실로 나타난 것이 교리주의자, 경건주의자, 그리고 사회 참여주의자로 이렇게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 그런 것들을 주장하는 사람에게서는, 그 정당한 것과, 또 그 정당한 주장이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초래된 여러가지 부정적인 부산물을 함께 안고 있는 것도,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실로 존재하는 이런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고, 대처해 나가야 될 것인가? 우선 이렇게 장단점을 함께 안고 있는 여러가지 다양한 신학적 흐름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이러한 다양성을 맹목적으로 인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그러니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저 어울려서 살아가자. 이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절대적이고 무오한 진리의 척도인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각 신학 흐름이 갖고 있는 잘못된 것은, 오류는 제거하고, 참된 것은 확인하고 발전시키되, 진리 안에서 모든 참된 요소들이 통일을 이루도록 우리가 해야 할 것입니다. 적당히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이렇게 그저 인정해 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그른가를 밝혀 가면서, 나에게서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그것을 버릴 것이요, 상대방에게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취하고, 상대방의 잘못된 것은 그것을 밝혀서 그것을 끊어 내야 할 것이요, 이렇게 참된 요소들을 오직 성경 말씀에 비추어 찾아내어서, 이것들이 진리 안에서, 진리로 자연이 이렇게 하나가 되도록, 통일을 이루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이렇게 Uiniy,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해야지, 이것이 교파 간의 연합이든, 아니면 한 교파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든, 하나됨을 추구할 때, 이것을 진리가 그 근거가 되고, 진리가 중심이 되어야지, 이것이 정치적인 목적이나 어떤 교세 확장을 위한 이런 것들이 끼여들게 되면, 결국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도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압니다. 참 어떤 근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대부분의 가장 중요한 교리에서는 합의했지만은, 그러나 세대주의라고 하는, 참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잘못된 교리적 오류가 있을 때에는, 결국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경험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뭐 같이 적당히 안고 함께 살아가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갈라져 나가느냐 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은, 물론 실제적으로 나중에 그분들이 의견을 돌이켜서 돌아올 수 있었다면, 그만큼 그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지요. 그러나 여하튼 이런 교리적 차이가 있을 때, 결국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편협한, 교리만을 고집하는 그런 못난 사람들의 mentality 때문에 그런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교리라고 하는 것이 교회의 삶에 있어서, 교회의 존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와 위치를 갖는가를 반증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리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좋을 것 같으면 뭐 적당히 살아도 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교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맹목적인, 감상주의적인 연합운동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W.C.C. 같은 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에 근거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안에서, 비록 그것이 지루하고 번잡하고 오랜 과정이라고 할지라도, 참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우리가 하나됨을 추구해야 될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분열이 편협한 mentality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만은,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합니다. 교파 분열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밝히는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해요. 아, 그 적당히 좀 양보하지. 그 뭐 이렇게 좀 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자면, 사람 속이 좁아서, 편협해서 교회 분열이 생겼다고, 그런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저는 그 반대로 생각을 합니다. 교파 분열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무엇이 참으로 옳은 것인가? 라고 하는 것, 분명히 그 시비를 분명히 밝힌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에 순종, 복종하려고 하는 자세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끝까지 밝히고 순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오히려 분열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안고, 불씨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여러가지 정치적인 요인, 이런 것들이 겹쳐서 그냥 분열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진리가 분명히 서 있었다고 하면, 그런 정치적인 꼬투리들, 그런 것들이 감히 거기 작용하지 못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다양한 입장을 속에 그대로 안고 있으니, 어떤 기회만 되면 그런 것들이 표출되기 마련이고, 결국 갈라질 수밖에, 필연적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국 교회 현상도 이런 세계 교회의 난맥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한가지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미묘한 입장들 차이가 혼재하는 가운데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상황을 판단하고,, 그 바른 길을 제시할 준비가 과연 한국 교회는 돼 있는가? 말하자면 교회란 결국 목회자들, 우리 목사 장로들이 참으로 이런 미묘하고 복잡한 이런 신학적인 문제들, 또는 교회 삶에서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참으로 성경적으로 이런이런 결론을, 원리를 도출해 낼 수 있을 만큼 성경에 박식한가? 사실 어떤 신학적 문제를 내놓아도, 우리는 그 앞에 속수무책인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그것에 대해서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시는 이렇게 비는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완벽한 어떤 그런 대답, 어떤 제시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런 깊은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준비라도 우리가 충분히 되어 있는가? 한번 심각하게 자성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씀만 더 한다고 하면,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하튼 어떤 다양한 신학적 입장과 교회 삶의 복잡한 양상 있든지 간에,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바람직한 진로라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는가? 성경 말씀이 밝히는 진리를 따라서 오래 참고 관용하며, 그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추구하는, 이 자세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오늘 신학적인, 교회 난맥상을 헤쳐 가는, 적어도 해결 내지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절대적 권위로서의 성경, 이 성경 권위에 대해서 자꾸 포용적인 태도와 해이한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처럼 믿어 왔던 미국 내의 보수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보수 교회 내에서도, 제가 잘못 보았다면 제가 욕을 먹고, 제가 욕을 먹더라도 저는 참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아직 한국 보수 교회가 성경 말씀을 분명히 붙잡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확인만 할 수 있다면, 네가 한국 교회를 잘못 알아서 그런 경솔한 소리를 함부로 입밖에 내뱉는 것이라고 욕을 먹어도 저는 기뻐할 것이에요. 그러나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한국 보수 교회 내에서도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태도가 점점 해이져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가장 염려스럽고, 우리 목회자들에게 특별히 심각하게 경계할 일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끝).
[출처]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와 진로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김성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 구약학)
성경 말씀 한 곳만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입니다."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길을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처음에 총회 교육부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와 진로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것은 제가 맡아야 할 그런 제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이런 제목은 조직신학을 맡으신 분이나, 특히 교회사를 전공하시는 분께서 이런 제목의 내용을 다루어야 마땅하리라 생각을 해서 거듭 사양했습니다만은, 부탁에 못 이겨서 응낙은 했습니다만, 참으로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께 유익을 끼칠 수 있을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내용상 특히 이제 교회사 부분을 다룰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부족하고 혹시 오류가 있을지라도 널리 양해하시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이 제목이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라고 말씀하셨는데, 개혁주의 신학은 매우 방대한 체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느 것과 대조시켜서 이해하든지 간에, 로만 카톨릭과 대비해서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든지, 아니면 같은 종교 개혁을 시작한 운동이지만은, 우리가 특히 독일과 북구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는 루터파 신학과 대비해서 말씀하든지 간에, 개혁주의 신학은 워낙 방대한 체계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한 시간 내에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 중 한 제목만을 뽑아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짧은 시간에 말씀드릴 수 없는 줄 압니다. 또 그와 같은 것은 이 분야를 전문하신 분들께서 차후에 취급하는 것이 옳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따라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내용은 어떤 구체적인 신학의 내용을 다룬다기 보다, 어떤 개혁주의의 특징적인 시각에서 몇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대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한번 어떤 시도를 해서 이룬 것에, 성취한 것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있어서 편입한 여러가지 오류들, 잘못된 것들, 이것들을 일단 제거한 다음에, 복음과의 만남을, 참다운 교회다움, 교회상이라고 합니다만은, 올바른 교회다움으로 늘 끊임없이 새롭게 표현하는 그런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정의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얼마만큼 잘, 그리고 충분히 드러냈는가는 차치하고, 조금 전에 그분이 정의한 그런 개혁주의의 특징에는 두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있어서 초래된 잘못들, 오류들을 일단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류를 제거한다고 하는 말은 또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을 잘못된 것인가? 오류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전제로 합니다. 이 기준이 뭔가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지요. 이것은 비단 개혁주의만의 특색은 아닙니다만은, 모든 종교개혁 자체의 삼대 원리 중의 하나입니다만은,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라고 하는 그 말씀입니다. 성경이 무엇이 참되고,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있어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판별하는 절대적인 무오한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방금 말씀드린 개혁주의적 특징 정의에서 또 한가지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흔히 개혁주의 특징을 설명할 때 이런 구호를 많이 듣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daest' 라고 그러는데, 개혁되어진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바로 방금 말씀드린 그런 두가지 원리라고 할까요? 두가지 시각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와 진로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그 첫번째 원리는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라고 하는 이 원리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면, 아까도 언급했습니다만, sola scritura 라고 하는 원리는 개혁주의만의 유일한 원리가 아니고요, 비록 교회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 내지 그보다 더 궁극적인 권위를 갖는 교회 전통을 언급했습니다만,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도 성경의 권위는 인정을 했지요. 그러나 교회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것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교회 결정을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놓는 그런 것에 반대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만큼, 모든 종교 개혁자에 있어서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는 다 전제가 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경으로만 이라고 하는 이 원리는 개혁주의에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주장되고 강조된 그런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같이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강조했습니다만은, 루터의 경우에는 조금 색깔이 다른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야고보나 다른 등등 여러 책에 대해서 뭐 지푸라기 성경이니 하는, 어떤 그런 자신이 경험한 은혜, 이신칭의의 어떤 그런 은혜에 비추어서, 성경 내의 어떤 그런 차등을 두려고 하는 어떤 그런 루터의 생각과는 조금 달리,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채택된, 우리도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제일 첫머리에, 다른 하나님의 작정이나 삼위일체, 이런 것들 취급하기 맨 처음에, 첫장에 바로 이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경 작성에 있어서 제일 오랜 시간이 걸려서, 정성을 쏟고, 조목조목 살피고 다듬은 부분이 바로, 이 성경에 관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그 일에 참여했던 분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에 있어서는 이처럼 오직 성경으로만 이라고 하는 이 원리가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학적 원리의 도출 근거를, 또는 근원을 성경에 두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개혁주의 신학을 어떤 말로 부르는가 하면, 성경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흔히 유행하는 그런 의미에서 성경신학이 아니고요, 이것을 영어로 말하면 조금 구분이 갑니다만, 우리가 흔히 요즘 말하는 성경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Biblical Theology지요. 성경적인 신학이지요. 이것을 우리말로 쉽게 해서 성경신학이라고 합니다만, 이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가리켜 성경신학이라 할 때에는 Bible Theology, Bibel theologie (비벨테올로기)라고 그럽니다만, 정말 성경신학이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성경과 존립을 같이 하는 어떤 그런 신학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이 개혁주의 내에서 보면, 항상 문제가 되어 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의 권위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영감론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나 다른 개혁파 교회에서 큰 신학적 논쟁이 있을 때마다, 특별히 합리주의가 성행할 때에 교회 내에 있었던 여러가지 논쟁에 있어서 가장 초미의 관심사, 가장 뜨거웠던 논쟁점이 뭔가 하면, 성경과 관련되어 있어요. 성경 영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개혁주의에 있어서는 다른 종교개혁, 특히 루터파와 비교해서 볼 때, 꼭같이 종교개혁을 시작한 다른 어떤 교파와 비교해 볼 때도, 특히 이 성경의 권위, 모든 신학의 출발점으로서의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모든 진리 판단의 표준으로서, 절대적이고 무오한 표준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 회의, 공회의 결정이나 선언, 그리고 옛 교부들의 견해, 그 어떠한 종류의 견해이든지 간에, 항상 성경의 표준에 비추어 조사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그런 뜻의 조문을,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경 속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압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원리라고 하는 것,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그 말씀, 이 말씀은 개혁주의 신학은 정체되지 않고, 한번 어떻게 시도를 해서, 한번의 시도로 완성되지 않고, 또 달리 표현하면 정체되어 있지 않고, 완성되면 그 이상 더한 것이 없으니까, 딱 정체되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정체되어 있지 아니하고, 발전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그런 뜻이 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발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만큼, 신학의 역사를 하나의 동력적인 과정, 아주 힘있게 형성되어 가는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조금 아귀가 맞지 않다는 느낌을 가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개혁주의의 특징을 말씀드리면서 우선 교회 가르침과 생활에 있어서의 잘못된 모든 오류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에 대한 판단 기준은 성경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무오한 기준이 있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발전의 가능성, 발전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오류의 가능성도 포함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성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상대화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표준을 가졌으면 절대적인 판단이 가능할 터인데, 왜 개혁주의 신학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어떤 발전의 여지를 두었을까? 좀 이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만은, 거기에는 이런 이해가 전제되어 있는 줄 압니다. 성경 자체는 절대적이요 무오한 표준이지만은, 성경에 대한 이해는, 어느 한 시기에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다고 하는, 성경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표준과 그 성경에 대한 이해를 분리시켜서, 성경 자체는 완전하나 성경에 대한 우리 이해는 완벽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 전제가 되어 있고, 성경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 신학은, 따라서 어느 정도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인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핏 생각하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말을 했으니까, 어떤 개혁 신학적인 전통도 완전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 세대가 항상 그것을 비판하고 오류들을 발견하고, 제거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둔 것은, 항상 개혁해야 된다고 말할 것은, 우리가 신학적 유산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일단 거부해 놓고, 부정해 놓고 보고, 그 다음에 자기 나름대로 어떤 새로운 체계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전수되어 온 개혁주의 신학을 오히려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면서, 말하자면 그것이 참으로 성경에 부합 하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있을 수 있는 오류들, 부족한 것들을 성경에 더 밝은 깨달음에 의해서 보충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 두가지 원리를, 아까 말씀드린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과 관련해서 몇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대개 이런 말씀이 될 수 있는 줄 압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과거 전통에, 신학적인 교회 전통에 대해서, 성경에 비추어 그것의 정당함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전통 속에 들어 있는 잘못된 요소들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고, 그러나 이것은 과거 유산, 과거 전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교회 역사 속에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교회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인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도 과거에만 오류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런 교회 전통 형성에 있어서, 잘못된 오류들이 침입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것들을 계속적인 노력을 통해서, 성경에 비추어 그 오류들을 제거해 내고, 성경의 바른 뜻을 밝혀, 그 말씀에 따라 참다운 교회 모습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 그 속에 있는 줄 압니다.
이런 개혁주의 특징에 비추어,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신학이 걸어온 길을, 또 그 모습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저는 교회사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개괄적인 말씀이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모든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신학사도 마찬가지 입니다만은, 교회사에 있어서, 몇가지 큰 역사적 동인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큰 전환기라 할까요? 어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어떤 큰 흐름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이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엽까지 일어났던 독일의 경건주의가 그 첫째이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시작된 자유주의,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의한 도전이 그 둘째이고, 세번째는 어느 시대에나 쭉 있어 왔습니다만은,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설정이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세 교회에 있어서는, 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 다릅니다만은, 국가와 교회가 상당히 밀착이 되어 있었고, 서로 상호 간의 어떤 영향력을 미치기를 원했고, 또 행사해 왔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원칙적으로는 교회와 국가 간의 분리를, 구별을 천명했습니다만은,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이, 왜냐하면 교회가 국가와 좀 분리해서 교회에 대한 자율권을 스스로 갖고 싶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정부가 가만 놔두지 않으면, 세속 국가가 가만 놔두지 않으면 그것은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국가와 교회 간의, 정치와 교회 간에 그런 복잡한 어떤 역사 과정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항상 이제 문제가 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개신교에 있어서 큰 두가지 흐름을 대변하는 루터파와 개혁주의 두 파에 다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가 영미에서는 대각성 운동으로 나타났고, 영국에 있어서는 감리교 운동이라고 그럴까요? 성결운동이라고 하나요? 그런 것으로 나타났고, 자유주의가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어떤 의미에서 미국 장로교를 완전히 공중 분해시켜 버렸다고 그럴까요? 그 원흉이 바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입니다. 또 이제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도 교회와 사회의 관계, 또는 국가의 관계가 항상 미묘한 문제로 계속 이제 어떤 분쟁의 불씨로 작용해 왔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독일, 화란, 동구에 있어서 헝가리, 그리고 특별히 영미에 있어서는 장로교 개통, 그리고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남미쪽, 남미에 있는 장로교, 그리고 우리 한국도 극동의 우리 한국도 거기에 포함이 됩니다만은, 대개 이렇게 이제 광범하게 개혁주의가 퍼졌는데, 그 각 부분에 대해서, 각 지역에 있어서의 개혁주의 발전에 대해서 우리는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고, 한국 장로교회와 가장 가까운 관계로서 아주 큰 영향을 끼쳐 온 미국 장로교의 경우에 국한해서 잠깐 그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아주 개괄적인 말로 표현을 한다고 그러면,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퓨리탄들, 청교도들이 먼저 17세기입니까?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 왔고, 이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칼빈주의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칼빈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그런 어떤 유파였고, 이들은 또 상당히 그런 개인 경건에 열심인 어떤 그런 특징을 가졌었고, 또 이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간만큼, 뉴잉글랜드 지방에 정착하면서, 거의 기독교 국가, 신앙 공동체 비슷한, 어떤 그런 생활을 한 것으로 우리가 잘 압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고 그러면, 교리적으로는 상당히 칼빈주의적이었고,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적 요소도 그 속에 갖고 있었고, 또 거기서 거의 국가와, 사회와 교회와의 구별이 거의 생기지 않을 만큼, 거의 하나의 종교사회로 존재한 만큼, 사회와 상당한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생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후에 18세기에 들어 와서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독일, 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영향으로, 한 템포 늦게 미국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대각성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쪽에서 들어 온 이민들에 의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세력이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들은 상당히 교리를 중요시하는 어떤 그런 특징을 가졌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선 이렇게 내려오면서 미국 역사가, 또는 사회적 구조 내지 성격이 변함에 따라서 교회 내에도 여러가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제 경건주의적 경향, 대각성 운동과, 엄격한 교리를 고수하기를 원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통과 있었던 갈등을 조금 후에 말씀드리겠고, 첫째로 다른 면에서 일어난 어떤 그런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내의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교회와 사회, 국가와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유산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교회와 사회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교회가 사회 일에 간섭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에 있어서 안식일을 입법화하는, 법제화하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전체 장로교회가 다 동의를 한 것이었고, 그래서 잘 진행된 반면에, 노예제도 폐지, 특히 미국 남북전쟁 즈음에 노예제도 폐지 문제가 거론이 되자, 잘 아는 대로 남부 지역은 흑인 노동력이 없으면 면화 재배, 산업을 유지하기가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장로교 내에서 이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부 쪽에서는 교회는 영적인 문제나 할 일이지, 이런 정치적인 문제는 간섭할 것이 못된다고 주장했고, 그런가 하면 특별히 뉴잉글랜드 지역, 북부 지역, 그쪽의 교회들은 노예제도를 강력히 폐지해야 한다고, 교회가 분명히 이런 일에 있어서는 사회에 관여해서 이런 악을 없애야 한다는 어떤 그런 주장을 하게 되고, 그래서 교회 내의 갈등을 초래했던 것을 이미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나중에, 이런 논쟁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미국 사회가 거의 신앙인이었었다. 대부분이 신앙인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후에 꾸준히 이민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고, 장로교뿐 아니라 또 다른 여러가지 교파들이 들어오게 되고, 특별히 신앙을 갖지 않은 여러가지, 여러 이민들이, 우리가 말하는 복수 종교사회라고 그러나요? 그리고 사회의 이념에 있어서도 어떤 그런 칼빈이즘적인 그런 국가관을 갖기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주장하는 그런 국가 이념들이 등장하고, 이렇게 됨에 따라 역사적 상황이 옛날 청교도하고는 상당히 변하여 버렸지요. 그때는 거의 신앙에 있어서 동질성이 확립된 그런 종교적 공동체였고, 거기에서는 교회나 사회가 크게 이렇게 분리가 되지 않는 만큼, 관여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지만은, 이렇게 어느 한 교파의 견해에 따라 그 전 사회의 일을 결정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리자, 이런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어떤 그런 인본주의나 자연과학 사상에 의한 성경 권위에 대한 도전들이 있게 되었고, 이런 자유주의와 결합해서 어떤 것이 생겨났는가 그러면, 사회 참여, 사회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와 결합될 때는 어떤 현상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사회 복음, Social Gospel 이라고 하는 어떤 그런 쪽으로 나타나서, 종래의 장로교 같은 기본적인 교리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속죄에 근거한 어떤 그런 구원까지도, 개인 구원까지도 부정해 버리는, 말하자면 기독교를 하나의 윤리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그런 사회 복음으로도 변질이 되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종래의 전통적인 개혁주의에 심각한 도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때 구 프린스톤에 있어서의 찰스 핫지나 워필드 같은 사람이 학적으로 전통적인 신학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 노력은 나중에 자유주의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고 난 다음에 웨스터민스터에 의해서 이것이 또 계속 된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웨스터민스터가 형성될 때,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근본주의 연합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우리가 사소한 데 어떤 차이가 있을지라도, 신학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 자유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공동의 적을 대처하기 위해서 연합하게 된 어떤 근본주의 운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행되다가 근본주의 내에서 또 분열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것은 특별히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흔히 메킨타이어, 그분이 주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이런 신학적으로 이질적인 어떤 그런 그룹 때문에, 결국 다시 근본주의도 갈라지게 되는 그런 교회 분열을 미국 교회가 맞게 되지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제 전공도 아닌 미국 장로교회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대개 이런 역사적 흐름에 의해서 개혁주의에서 가장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장로교회가 대개 어떤 길을 걸어 왔고, 지금 어떤 형편인가를 말씀드리고, 특별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는 한국 장로교회 역사와 긴밀히 연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또는 요즘 와서는 장로교회 내에서도 미국 장로교의 이와 같은 역사와 현실을 보고 대개 어떻게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한마디로 분열, fragmentation이라고 그럽니다만, 갈가리 찢어졌다, 교회가 갈가리 찢어졌다. 그리고 특별히 장로교회와 관련해서 지식주의, 그리고 냉랭함, 교만, 독선, 이런 것들로 대개 장로교의 특징을 말하는 것을 우리가 흔히 듣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런 분열, 교회 분열, 그리고 지식주의, 냉랭함 등등 이런 문제는 개혁주의 자체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미국 장로교회사를 쭉 보면, 그냥 너무 급히 지나가서 그것이 제대로, 제 뜻이, 의사가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서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겪었던 그런 단계들이 그대로 거기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와 상응하는 것이 대각성운동이고, 그 경건주의가 끼친 순기능과 역기능, 그것들이 미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고, 거기에 대한 어떤 그런 보수주의자들의, 어떤 교리를 강조하는 그런 정통주의자들의 반동이,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나 있었고, 또 자유주의가 등장했을 때 이에 대해서 학적으로 변호하려고 하고, 변증하려고 하는 노력이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나 다같이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가 찢어지고 갈라진 일들, 그리고 대각성 운동에 의해서 군소 교파에 불과하던 그런 감리교나 침례교들이 급성장해서 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 이것은 오히려 미국에서 잘 맞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유럽에서도, 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거의 다같이 나타났던 그런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 간의 미묘한 문제가 교회 내에 여러가지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도 독일 교회나 미국 교회나 방식과 정도에 있어서 좀 차이가 있겠지만은, 다 일어났던 문제입니다.
따라서 장로교만을 가리켜서 저것은 분열주의자다. 장로교는 분열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제 왜 분열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포괄적이지 못하고, 편협한 성격 때문에, 독선과 교만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만은, 이것은 그 옳고 그름의 문제를 하나의 mentality, 사람의 성격의 문제로 환원시켜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고 하는, 어떤 그런 평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과연 이 장로교나 개혁주의자들이 직면했던 그런 문제들, 경건주의가 만들어 놓은, 초래한 여러가지 그런 잘못된 것, 교리적인 오류들, 이런 것들을 가만 덮어두고 그냥 싸안고 있어야 할 것인가? 특별히 자유주의, 성경의 권위 자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은 구원 자체를 거부, 부정하는 그런 자유주의를, 그럼 교회가 관영과 일치라고 하는 명분 아래, 교회가 싸안고 포용했어야 하는가? 라고 우리가 반문을 한다고 그러면, 우리가 교회 분열한 그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우리의 약점으로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한 문제였고, 또 그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중요한 것인 만큼, 기독교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던 만큼, 그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식주의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 당시의 문제가, 특히 자유주의와 관련해서 문제가 된 것이 대개 이 지식적인 면에서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변증하려고 하는,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노력에서 지식적인 면이 부각된 것, 그것이 반드시 약점이나 잘못된 오류로 지적되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흔히 그들은 독선적이었다고 말을 하는데, 진리와 비진리와의 투쟁, 전쟁이라고 하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 어떤 호전적인 심성이 작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당시 특별히 강조된 것이 교회의 전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때 교회 상황이 진리와 비진리 간에 시비가 분명해야 하는 그런 어떤 상황이었던 만큼,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그런 태도는, 유화적인 사람, 모든 것을 그저 덮어두고 적당히 싸안고 포용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태도가 독선적으로 비췰는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교회의 사활을 가름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결코 독선이라고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때 그 문제 자체가 사소한 문제였고, 또 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그런 주장이었을 때는 그들의 태도가 참 독선적이었다고 비난받아 마땅하겠으나, 그러나 사안 자체가 중요하였고, 또 시비가 분명한 문제였던 만큼, 옳은 것을 옳다고 분명히 말한 그것이 결코 독선적인 태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그저 중간을 생략 < > 특별히 이런 자유주의에 의한 위기, 이들은 다 개신교 전체 공통적으로 닥친 것인데, 이들에 대한 반응 역시 루터파나 개혁주의 교회를 막론하고, 무론하고, 대개 비슷한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이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루터파에서는 옛 교리들을 고수하려고 하는 그런 Neo Lutheranism, 신루터주의가 일어나게 되었고,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프린스톤을 중심으로 한 구학파라고 그러나요?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들이 강력하게 고수하려고 했던 기존의, 그들이 성경이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성경이 분명히 주장한다고 생각하는 교리들을,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갖다 교리주의자 이렇게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주의자들의 어떤 그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 운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경건주의적 경향은 여전히 남아서, 그후에는 교파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많으니까, 이런 교파, 저런 교파, 특색을 따라 여전히 남아 있었고, 특별히 사회 참여,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어느 특정 사회 속에 몸을 담고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수는 없습니다. 여하튼 어떤 특정 사회 내에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고 하는 그런 문제는 항상 대두되게 마련인데, 이런 문화적 사명과 관련해서 항상 이렇게 미묘한 지렛대 역할을 한 것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 문제도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었고, 특별히 우리 한국 같은 경우에도 6.29 사태를 즈음해서, 그 부분에서, 교회가 이러한 때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가? 라고 하는 그런 것이 한국 교회 내에서 열띤 논쟁 거리가 되었던 것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산재하는 하는 여러가지 개혁주의 교파들의 특색을, 신학적 특성을 크게 분류해서 대개 이렇게 나누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교리주의자, 그리고 경건주의적 경향의 사람들, 또 문화적 사명을 강하게 주장하는 어떤 그런 사람들의 교파, 미국 내에서는 특히 이제 칼빈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어시아닉 Christian Reformed Churth가 이 일에 적극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은, 대개 이 세가지 신학적 내지 신앙적 특색이 개혁주의 내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향해서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상대방을 비난한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선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리, 경건, 문화적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개혁주의와 상치되는 것이 전혀 없고요, 개혁주의 내 속에 다 포함되는 것이고,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고,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문제화되어서 경건주의니 교리주의니, 사회 참여파니 하는 이런 말이 논쟁의 불씨로 계속 등장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개혁주의 신학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이런 것들이 교회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늘 다시 등장하게 될 때마다 여러가지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면서, 여러가지 신학의 특색들이 가미되면서,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부정적인 부산물들을 토해 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교리를 무시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믿어야 할 것을 모르면서 우리가 어떻게 뭘 믿겠다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께서 목회서신을 통해서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목회자에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건전한 교훈, 가르침, 교리를 가르치라는 것이었고, 그것을 해치는 자들을 엄중히 경계하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말을 빌리자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그 복음, 그 교리가 아닌, 그 복음 교리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나타난 이 교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교회적 상황을 우리가 감안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전투적인 상황,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그런 상황을 우리가 감안할 때, 참 그들이 강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할지라도, 참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은, 아무래도 나쁜 것은,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어떤 부산물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하면, 계속 지적으로 항변하려고 변증하다 보니까, 이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보다는 너무 주지주의적이 되어서, 이지적이 되어서, 우리 흔히 개혁주의 내에서도 이야기하는 Historical Faith, 역사주의적 신앙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이 많았었고, 또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런 전투적 상황에서 강하게 반발하다 보니, 참 그런 상황이 오래 습관화되어서 교만과 독선의 부산물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그 가능성을 우리가 부정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교리 자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우리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필요 불가결한 중요한 것이로되, 역사적으로 교리주의가, 전체는 아닐지라도 그 일부에 있어서나마, 빚어내었던 부산물들, 부정적인 부산물들, 우리가 심각히 반성해야 할 줄 압니다.
그 다음에 이제 제가 경건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 제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만은, 이들이 이제 외친 말들, 교리 대신에 삶이 있어야 한다. 어떤 그런 제도적 직분이 아니라, 성령이어야 한다. 겉모양만이 아니라 어떤 능력,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쳤던 그들의 말에서 역으로 추측을 하면, 경건주의가 발흥하게 된 그 이면에는 분명히 어떤 그런 정통교회에 있어서 영적으로의 메마름, 그런 것들이 분명히 있었고, 이에 대한 갈급함이 경건주의 운동을 크게 확산케 하는 하나의 계기가, 하나의 토양이 되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저는 경건주의가 주장한 근본적인 긍정적인 면들, 어떤 살아 있는 생명력 있는 믿음, 그리고 그런 성령님의 살아 생생한 역사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맺히는 열매들을 강조한 것, 그런 것은 성경이 천번 만번 지지하는 것이요, 참으로 그 당시 정통주의 교회가 그처럼 생명력을 상실하였다고 하면, 그 상황에서 반드시 주장되었어야 할 어떤 긍정적인 주장이라고 저는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믿음과 삶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라고 하는 이것을 주장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주장하면서 항상 무엇을 의식하고 반대한 것이 있어요. 사실 교리와 삶이라고 하는 것을 떨어질 수가 없는데, 불가분의 것인데, 이 사람들은 교리가 아니라, 교리에 반해서 삶이 있어야 한다. 직분과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이 문제다 라고 하는 이런 것들, 말하자면 반교리적이고 반제도적인 이런 태도들, 이런 것들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들은 그런 살아 있는 생생함을 너무나 강조했기 때문에, 차디찬 지성보다는 감정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래서 대각성 운동이나 이런 데서 보면 정서적인 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결코 신앙에 있어서 정서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면, 그리고 참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감화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복된 감정, 우리가 다 그것을 느끼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가볍게 생각하게, 어떻게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 것을 우리가 다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반교리적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 것인데요, 우선 이렇게 자꾸 감정을 강조하다 보니까,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이야기합니다만, Temporary Faith, 일시적인 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컸습니다. 일시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그의 영혼이 거듭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그런 정서나 뜨거움이라기 보다는, 그저 내적인 참된 변화 없이, 그저 잠시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바글바글 끓다가,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옵니다만, 그저 얇은 흙에 떨어져서 싹이 금방 나서 이렇게 하다가, 결국 그 밑에 큰 바위가 있기 때문에, 뿌리를 뻗지 못해서, 수분을 받지 못해서 결국 이제 말라죽는, 그런 일시적인, 잠정적인 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폐단들이 나타났습니다. 반교리적인 이런 태도가 경건주의로 하여금 내용이 없는 믿음이 되게 했어요. 믿을 것이 없잖아요, 반교리적이면, 물론 이것은 혹평입니다만은, 하나의 경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만은, 경건주의 가운데 헹스텐버그 같은 유명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여튼 내용 없는 신비주의적 감정 내지, 체험 위주의 믿음으로 전락하기 쉬웠고, 실제로 그런 부작용이 많이 나타났고, 믿음이 어떤 그런 객관적인 토대를 상실하고, 말씀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토대를 상실하고, 주관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부작용들도 초래되었습니다.
이전에 정통교회에서 강조가 된 것은 객관적인 토대로서의 말씀, 객관적인 수단으로서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으로서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참 그 말씀에 나의 전부를 맡기는, 신뢰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것이 강조된 반면에, 경건주의의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감정을 너무 강조하고, 체험적인 그런 것을 너무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결국 어떤 폐단이 생겨났는가 하면, 감정을 부추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인위적으로 감정을 유발시키고, 흥분시키고 하는, 우리 종래 한국 부흥사에게서 많이 봅니다만은, 박수 부대를 동원한다든지, 여러가지 이런 것들이 경건주의 운동 말기에 오면, 미국에서 그런 일이 나타나게 되고, 챨스 피니 같은 사람, 하여튼 그런 것이 감정을 유발하다 보니까, 유발하는 것과 함께 뭐가 강조가 되었는가 그러면, 종래의 종교개혁에 있어서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중의 하나였던 오직 은혜로만,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그것이 약화되고, 인간의 결단과 의지에 호소하는, 그런 면들이 강조되게 되어서, 나중에는 어떤 신학적인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면, 거의 반펠라기우스적인 그런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제 근본적으로는 교리나 경건이나 어떤 문화적 사명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로 통합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나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어떤 현실로 나타난 것이 교리주의자, 경건주의자, 그리고 사회 참여주의자로 이렇게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 그런 것들을 주장하는 사람에게서는, 그 정당한 것과, 또 그 정당한 주장이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초래된 여러가지 부정적인 부산물을 함께 안고 있는 것도,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실로 존재하는 이런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고, 대처해 나가야 될 것인가? 우선 이렇게 장단점을 함께 안고 있는 여러가지 다양한 신학적 흐름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이러한 다양성을 맹목적으로 인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그러니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저 어울려서 살아가자. 이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절대적이고 무오한 진리의 척도인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각 신학 흐름이 갖고 있는 잘못된 것은, 오류는 제거하고, 참된 것은 확인하고 발전시키되, 진리 안에서 모든 참된 요소들이 통일을 이루도록 우리가 해야 할 것입니다. 적당히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이렇게 그저 인정해 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그른가를 밝혀 가면서, 나에게서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그것을 버릴 것이요, 상대방에게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취하고, 상대방의 잘못된 것은 그것을 밝혀서 그것을 끊어 내야 할 것이요, 이렇게 참된 요소들을 오직 성경 말씀에 비추어 찾아내어서, 이것들이 진리 안에서, 진리로 자연이 이렇게 하나가 되도록, 통일을 이루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이렇게 Uiniy,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해야지, 이것이 교파 간의 연합이든, 아니면 한 교파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든, 하나됨을 추구할 때, 이것을 진리가 그 근거가 되고, 진리가 중심이 되어야지, 이것이 정치적인 목적이나 어떤 교세 확장을 위한 이런 것들이 끼여들게 되면, 결국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도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압니다. 참 어떤 근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대부분의 가장 중요한 교리에서는 합의했지만은, 그러나 세대주의라고 하는, 참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잘못된 교리적 오류가 있을 때에는, 결국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경험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뭐 같이 적당히 안고 함께 살아가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갈라져 나가느냐 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은, 물론 실제적으로 나중에 그분들이 의견을 돌이켜서 돌아올 수 있었다면, 그만큼 그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지요. 그러나 여하튼 이런 교리적 차이가 있을 때, 결국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편협한, 교리만을 고집하는 그런 못난 사람들의 mentality 때문에 그런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교리라고 하는 것이 교회의 삶에 있어서, 교회의 존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와 위치를 갖는가를 반증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리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좋을 것 같으면 뭐 적당히 살아도 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교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맹목적인, 감상주의적인 연합운동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W.C.C. 같은 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에 근거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안에서, 비록 그것이 지루하고 번잡하고 오랜 과정이라고 할지라도, 참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우리가 하나됨을 추구해야 될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분열이 편협한 mentality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만은,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합니다. 교파 분열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밝히는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해요. 아, 그 적당히 좀 양보하지. 그 뭐 이렇게 좀 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자면, 사람 속이 좁아서, 편협해서 교회 분열이 생겼다고, 그런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저는 그 반대로 생각을 합니다. 교파 분열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무엇이 참으로 옳은 것인가? 라고 하는 것, 분명히 그 시비를 분명히 밝힌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에 순종, 복종하려고 하는 자세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끝까지 밝히고 순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오히려 분열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안고, 불씨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여러가지 정치적인 요인, 이런 것들이 겹쳐서 그냥 분열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진리가 분명히 서 있었다고 하면, 그런 정치적인 꼬투리들, 그런 것들이 감히 거기 작용하지 못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다양한 입장을 속에 그대로 안고 있으니, 어떤 기회만 되면 그런 것들이 표출되기 마련이고, 결국 갈라질 수밖에, 필연적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국 교회 현상도 이런 세계 교회의 난맥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한가지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미묘한 입장들 차이가 혼재하는 가운데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상황을 판단하고,, 그 바른 길을 제시할 준비가 과연 한국 교회는 돼 있는가? 말하자면 교회란 결국 목회자들, 우리 목사 장로들이 참으로 이런 미묘하고 복잡한 이런 신학적인 문제들, 또는 교회 삶에서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참으로 성경적으로 이런이런 결론을, 원리를 도출해 낼 수 있을 만큼 성경에 박식한가? 사실 어떤 신학적 문제를 내놓아도, 우리는 그 앞에 속수무책인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그것에 대해서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시는 이렇게 비는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완벽한 어떤 그런 대답, 어떤 제시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런 깊은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준비라도 우리가 충분히 되어 있는가? 한번 심각하게 자성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씀만 더 한다고 하면,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하튼 어떤 다양한 신학적 입장과 교회 삶의 복잡한 양상 있든지 간에,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바람직한 진로라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는가? 성경 말씀이 밝히는 진리를 따라서 오래 참고 관용하며, 그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추구하는, 이 자세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오늘 신학적인, 교회 난맥상을 헤쳐 가는, 적어도 해결 내지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절대적 권위로서의 성경, 이 성경 권위에 대해서 자꾸 포용적인 태도와 해이한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처럼 믿어 왔던 미국 내의 보수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보수 교회 내에서도, 제가 잘못 보았다면 제가 욕을 먹고, 제가 욕을 먹더라도 저는 참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아직 한국 보수 교회가 성경 말씀을 분명히 붙잡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확인만 할 수 있다면, 네가 한국 교회를 잘못 알아서 그런 경솔한 소리를 함부로 입밖에 내뱉는 것이라고 욕을 먹어도 저는 기뻐할 것이에요. 그러나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한국 보수 교회 내에서도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태도가 점점 해이져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가장 염려스럽고, 우리 목회자들에게 특별히 심각하게 경계할 일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끝).
[출처]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와 진로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를 위한 개혁신학을 위하여 / 이승구 교수 (0) | 2021.11.10 |
---|---|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0) | 2021.11.10 |
개혁 신학의 미래 / 정성욱목사 (0) | 2021.11.10 |
박형룡과 개혁파 정통신학 / 최덕성교수 (0) | 2021.11.10 |
그저 인간일 뿐이다. (0) | 2021.1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