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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이해 〓/조직신학I(서철원교수)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by 【고동엽】 2021. 11. 10.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이상규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시작하면서


흔히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정통주의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신학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을 검토하고,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개혁주의라는 관점에서 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주로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한 논의가 될 것이다. 넓은 의미로 말할 때 감리교나 성결교회도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앙 전통에서 생성되었지만 저들은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개혁주의를 논하는 이 글에서 논외일 수밖에 없다. 개혁교회, 개혁신앙, 혹은 개혁주의라고 할 때 이 용어는 때로 광의로 사용되고 있지만,1) 이 글에서는 보다 제한적 의미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확립된 개혁신앙이 스위스, 화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교회 혹은 장로교회를 통해 전수되어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과 화란교회 신학자들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석명된 신학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동의어로 보아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개혁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2)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시작된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독일의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교회는 독일, 화란, 프랑스 등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런 개혁교회의 신학을 보통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3)란 넓은 의미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을 통칭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라는 말은 쯔빙글리(Zwingli, 1484-1531)와 칼빈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사상을 루터의 그것, 곧 ‘루터파’(Lutheran)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루터파(Lutheranism)나 개혁파는 다같이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司祭主義, Sacerdotalism)를 비판하고 개혁했지만 개혁파는 루터파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점은 로마교의 ‘전통’(tradition)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를 비교해 보면 그 경계선이 뚜렷해진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으나 칼빈은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없다”고 보았다. 루터는 ‘전통’의 폐기에 대하여 칼빈만큼 철저하지 못했다. 따라서 루터교에는 로마교적 잔재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지만, 개혁교회에는 로마교의 잔재를 말끔히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디아포라(diaphora)와 아디아포라(adiaphora)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차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바트부르그(Wartburg)성에 은거해 있던 루터는 1522년 3월 비텐베르그로 돌아온 후 8편의 연속적인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복음(福音), 율법(律法), 이신득의(以信得義) 등은 디아포라(diaphora)로 보았으나 예배의식, 성상, 성직자의 예복 등은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간주하였다. 그는 디아포라(본질적인 것)는 어느 시대에서도 개변될 수 없는 ‘규범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아디아포라(비질적인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임으이로 정할 수 있는 ‘비규범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교회 안에는 예배의식, 성직자의 복장 등을 포함한 로마교적 잔재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모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개혁을 시도함으로서 로마교적 잔재를 일소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인톤는 개혁주의란 반사제주의(反司祭主義) 일뿐만이 아니라 루터주의의 개혁으로 보았다. 그래서 베인톤는 “개혁교회라는 말은 쯔빙글리와 칼빈을 따른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개혁이란 말은 그들이 루터주의를 다시 개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즉 개혁이란 종교개혁의 개혁을 의미한다.”4)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루터주의(Lutheranism)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였던 클로스터(Fred Klooster)는 개혁주의의 독특성이란 바로 ‘성경적 원리’라고 말했다.5)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를 보통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칼빈이 성경적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비록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히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화하였기 때문에 칼빈주의라고도 불리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학체계가 보다 성경적임을 증명하고, 다른 신학활동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들이 신학을 교리화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이었다. 독일의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이 루터란과는 다르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화란의 개혁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알미니안주의자와 다름을 도르트 신조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대소요리문답(1647) 등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신앙고백을 성경과 같이 절대화하지는 않으나 신조(信條)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국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권위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는 인간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말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마디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16세기적 상황에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하며,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 외에도 소위 성전(聖傳)이라는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때로는 이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한다 하여 성경 보다 우월한 권위로 받아드렸으나 개혁주의는 모든 전통을 배격했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교회건설이었다. 이것이 교회중심(Church-centered) 사상이다. 신학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하면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혼돈하거나 혼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란 그 이름처럼 헬라어 ‘복음’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지만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혹은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생성되었고, 20세기 후반인 1952년 조직된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1974년의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된 신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전도나 선교를 강조하고,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분리주의적 혹은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신자의 사회적 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는데, 이 점은 근본주의와 다르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지만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감성주의라는 점이 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무관심하고 이를 간과함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이런 입장은 교회관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긴다.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변혁적 성격을 지난다.


2.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유동식교수는 그의 ?한국신학의 광맥?에서 한국개신교 신학 백년의 흐름을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진보적 사회 참여의 신학’, 그리고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별하고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에 초석을 놓은 이로 길선주(吉善宙)와 박형룡(朴亨龍)을 들었다.6) 유동식의 분류를 따른다면 길선주와 박형룡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었고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학전통을 개혁주의 신학으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물론 개혁주의적 요소들이 없지 않지만 그 신학적 함의는 보수주의 혹은 정통주의에 가깝다. 차라리 간하배의 지적처럼 길선주, 박형룡으로 이어지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사상은 ‘보수주의, 복음주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 그 시기를 1920년대까지로 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에 의한 구체적인 신학적 논구는 1930년대로부터 시작되기도 하지만, 이 때부터는 그 이전 시대와는 다른 성격의 신학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한다. 적어도 1930년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신학교육과 연구와 집필 등 신학활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육기관인 평양신학교는 1901년 시작되었지만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다. 첫 한국인 교수인 남궁혁박사(1882-1950)가 취임한 때는 1927년이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첫 신학잡지는 1918년 창간된 ?신학지남?인데, 1930년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의 주된 필진이었다. 말하자면 선교사들이 한국의 신학교육과 신학적 논구를 주도하였으므로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바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을 ‘한국신학’(Korean theology)이라고 말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초기 한국교회 신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어왔다. ‘보수주의 신학,’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7)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보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평가했다.8) 비록 한국교회 초기 신학에 대해 근본주의, 정통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등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신학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장로교 선교사들의 경우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에 준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은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는 1911년 이전의 주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개국 이후 첫 25년간 내한한 선교사는 전형적인 푸리탄형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1세기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 잉글랜드에서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땐스, 술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 비평에 대해서는 그들은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천년설을 아주 중요한 진리로 생각했다.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했다. 미국과 대영제국의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에 있어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협력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현대적 견해’(the modern view)를 가진 소수의 인사들은 험난한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장로교선교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9)


이점은 1890년에 내한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선교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10)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 마포삼열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한국에서 활동했던 특출한 선교사였던 마포삼열의 이 두 가지 진술은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 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동시에 1930년대를 거쳐가면서 한국교회에는 신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면 초기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내한한 인사들로서 장로교 신학에 철저한 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신학이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을 결정했던 것이다.

신복윤교수는 “1885년 미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내한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평했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의 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서 ‘칼빈신학’이 처음 논구된 것은 1934년 남궁혁, 이눌서에 의해서였고, ‘칼빈주의’에 관한 논설이 처음 게제된 때는 1937년 함일돈(Froyd Hamilton)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함일돈은 이 글에서 칼빈주의라는 신학체계의 초보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11) 박형룡박사가 로라인 뵈트너(L. Boethner)의 Reformed View of Predestination을 『칼빈주의 예정론』이란 제목으로 역간한 때는 1937년이었다. 이 책이 칼빈주의 신학에 관한 최초의 역서였다.12) 비록 박형룡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 말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13) 이것은 1976년의 진술로서 후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의 신학적 입장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단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때 채택된 교리 표준이다. 독노회는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영국의 장로교회가 작성한 것으로 1904년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했던 동일한 신조를 단지 서문만 고쳐 그대로 채택했다. 이 신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유일신 하나님과 그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령의 역사, 선택과 수양, 성례, 신자의 의무, 최후 심판 등 12가지 기본교리가 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동일한 고백을 갖게 함으로서 피선교국의 장로교회간의 복음주의적 연대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꼭 개혁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장로교 전통을 세우고자 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집했을 것이다. 미국장로교회는 불과 4년전인 1903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 채택했는데, 꼭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웨스트민스터고백서를 채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설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이라고 밝혔을 뿐 교회의 공고백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때에는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 문서가 한국어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이 진술마저도 선언적 의미만 지닌다.



주한 선교사들이 복음주의적 연대를 시도했던 점은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자 교파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 곧 ‘조선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하자고 합의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즉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가 반드시 엄격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백낙준은 12개 신조가 “철저한 칼빈주의적 경향(strong calvinistic trend)을 지닌 것”이라고 평했고14) 하비 콘는 이를 평가없이 인용하고 있으나15) 백낙준의 진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릴 수는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12개 신조를 칼빈주의적 이라고만 볼 수 없다. 어떤 점에서 12개 신조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12개 신조는 개혁신앙의 특색도 없지 않으나 근본주의적이기도 하고, 정통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2개 신조가 기본교리를 말하는 단문으로 되어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김영재의 지적처럼 사실은 개혁주의적 내용이 희석화 되어 있다.16) 이 12개 신조에는 칼빈주의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만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던 이중예정에 관한 고백이 없고17) 무엇보다도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문화에 대한 소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말하자면 12개 신조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고백으로 규정할 수 없고 자유주의가 아닌 한 수용할 수 있는 기본교리를 표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한국이라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윤리적 상황에서 단순한 기본 교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직면하는 삶의 현실에서 개혁주의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지침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12개 신조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사상체계인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드러내는 고백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전통을 ‘개혁주의’로 간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하비 콘(Harvie Conn)이 말한 바처럼 한국에 소개된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을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기독교”18) 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초기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한국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했는냐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보다 극단적으로 수용하여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김양선에 의하면 길선주목사(1869-1935)는 “대전도자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로서 한국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는데 그의 설교와 성경강해는 상당한 신뢰를 얻었고, 그의 신앙과 신학는 한국교회의 표준으로 인식되었는데, 그의 신학사상은 선교사들의 그것 보다 더 극단의 보수주의였다고 지적했다.19) 극단적인 보수지향적 신앙이해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데는 철저했으나 개혁주의 전통과는 다른 신학을 헤아리는 안목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성경에 대한 철저한 믿음 혹은 축자영감설에 서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근본주의나, 경건주의, 신비주의 혹은 세대주의 신학도 거부감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 또 세상과 문화에 대해 분리주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근본주의적이고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한국교회 초기만이 아니라 그 이후 세대에도 여전히 현저했다.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종말론인데, 비록 일제하의 상황에서 신사참배강요라는 독특한 정치현실이었다고 하지만 전천년설(前千年說)을 신봉했다. 이 전천년설은 상당한 정도로 세대주의 신학으로 채색된 것이었다.20)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되어 개혁주의 신학전통에서 다수 의견이었고, 바빙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화란 개혁신학자들의 견해도 무천년설이었다. 또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나 칼빈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무천년설이 지배적이지만 박형룡이나 박윤선까지도 전천년설을 따랐다.21)


한국장로교회에 스며든 세대주의적 경향성을 지적한 인물은 하비 콘, 부르스 헌트(Bruce Hunt), 신복윤, 김영재 등인데, 하비 콘은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온건한 형태의 세대주의가 유입되었다.”고 지적하고 서구 기독교 문서의 역간에 힘입어 한국교회에도 세대주의가 유행하게 됐지만 서구적 형태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일반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세대주의는 고도로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 초기형태의 세대주의라고 지적했다.22) 그리고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에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과 단순한 성경해석법이라고 지적했다.23) 그 결과 모든 예언적 약속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문자적 성취라는 세대주의적 원리가 개혁주의적 이해가 결여된 초기 한국교회에 쉬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신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미래적인 강조’가 편만했는데,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해석방법이었다. 한국교회가 신국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바로 세대주의 신학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부선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부르스 헌트는 “미국의 많는 근본주의 계통에서 가르쳐 지는 하나님의 계시역사를 일곱 시기로 나누는 방식이 미국의 보수주의적 장로교 일부에 유입된 것 처럼 한국교회의 가르침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24)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세대주의가 곧 역사적 장로교인 것처럼 혼동하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25)고 지적했다.


정리해서 말하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비록 개혁주의적인 특징들이 있기는 하지만 보수주의 신학 혹은 넓는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1930년대의 진보적 신학의 대두



1930년대로 넘어 오면서 한국인들의 새로운 신학, 곧 ‘다른 전통’의 대두를 보여주는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유동식은 1929년부터 1939년까지를 한국신학의 ‘정초기’라고 불렀다.26) 이 시기의 신학운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유를 선언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이식해 준 신학으로부터의 단절을 선언하였으므로 보수주의 신학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이 점은 1930년대로부터 선교사 중심의 신학에서 한국인에 의한 신학적 논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정통 보수신학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신학적인 문제들이 1930년 이전에도 간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1916년 황해도에서 김장호(金壯鎬)목사가 성경해석상의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고, 1925년에는 선교사 게일(Gale, 奇一)이 의역본(意譯本) 성경이 문제시 된 일도 있었다. 1926년에는 소위 ‘서고도 사건’이 있었다. 카나다연합교회 선교사인 서고도(William Scott)는 함흥에서 개최된 사경회에서 성서비평학을 용납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 목회자들과 논쟁한 일이 있었다. 그는 성경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김관식, 조희염 등은 이 주장에 동조했다. 함흥지역이 카나다 연합교회의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미국 북장로교의 영향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1930년 이전까지는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진보적 신학 운동이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며 지역적이었지, 전국적인 운동은 되지못했다. 그러나 카나다연합교회의 선교지역인 함경도를 중심한 자유주의적인 경향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27)



1930년 중반기 이후 한국교회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미국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는 1812년 설립된 이래 100여년간 북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어서 유일한 보수주의 신학교였으나 1929년 교수진이 개편되어 점차 보수주의 신학에서 이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메이첸(J. G. Machen, 1881-1937)을 비롯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프린스톤을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이 때 교수 8명과 52명의 학생들이 이들을 따라갔다. 이것은 브릭스(Briggs) 사건이나 오번선언(Auburn Affirration, 1924) 등과 연류된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와같은 미국교회의 상황은 한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미국교회를 추수(追隨)하고 있던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의 이런 변화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적 기류는 주로 미국교회의 영향하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28)

성경관의 변화는 신학적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표인데, 1930년대에 와서 성경관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났다. 완전 영감설(完全靈感說)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성경 비평학이 도입되었다. 모세의 창세기 기록설이 부인되었고(1934), 고린도전서 14장 33-34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여권(女權) 문제가 제기되었다(1934). 또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사건(1935)을 중심으로 신학적 견해차가 분명하게 노정되었다.



1934년에 모였던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립을 보여준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실재를 알리는 첫 신호였다. 이때 문제가 된 사건은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김양선 교수는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 제소된 이 창세기 저자문제와 여권문제를 가리켜 전 교회가 문제삼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에 의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했다.29)


창세기 저자문제란 서울 남대문교회의 김영주(金英珠) 목사가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한 데 대한 강병주(姜炳周) 목사의 문의에서 비롯된 사건으로서 이 문제는 결국 본문비평의 문제였다. 강병주 목사의 제소에 대해 총회는 평양신학교 교장 라부열 박사를 위원장으로, 박형룡 박사를 서기로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총회는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를 채택하였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론은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이론인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멎지않고, 오경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립니다. 또 그들은 오경뿐 아니라, 구약의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도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의 고담과 미신과 허설과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써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선 장로교회 안에서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창세기만이 아니라 오경 전부 내지 신구약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도 무시하며 능욕하는 사람이니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니라’(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조 21조)고 믿고 가르치는 우리 장로교회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교회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30)


김영주 목사는 이 보고서를 받아드리고, 자신이 주장을 취소함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은 새로운 도전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 문제시됐던 또 한가지는 김춘배(金春培)목사의 교회에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문제였다. 함북 성진(城津) 중앙교회의 목사였던 김춘배는 〈기독신보〉(基督申報) 제977호에 “장로교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글 ‘여권문제(女權問題)’라는 항에서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오천년전의 일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4:33-34까지의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였다. 김춘배 목사의 주장은 성경의 권위와 한계를 시사하는 것이었고 교회안에서의 여권 신장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성경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의심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총회는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앞서 말한 창세기 저작권 문제와 더불어 이 문제를 연구보고케 하였는데,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발표되었다.

.....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2천년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바울은 34절 하반에 ‘너희 율법에 이른 것과 같이 복종할 것이요’ 하여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규율의 성경적 근거를 지시하였으니 그것은 창세기 16절에 여자는 남자의 주관한 바 되리라 한 말씀이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의미하는 말씀임을 개설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기로 성경에 이미 명령되었으니, 남자를 포함하는 교회 위에 교권을 가지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은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령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試取問答)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적 해석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것이오며, 이미 임직을 받은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6장 42조,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31)


제24회 총회는 이 보고들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므로 자유주의 신학적 성경해석은 총회적 결의에 의해 거부되었다. 김춘배 목사는 총회의 대세에 뜻을 굽혀, 그 게재문의 의도가 “성경을 해석함이 아니었고’ 또 ‘만약 그 문구가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파괴하고 교회의 피해가 급(及)할 염려가 있다면 책임의 중대함을 감하고 취소하기를 주저치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성경을 비평하고 또 그것을 교수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추어 자유롭게 해석하는 자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여전히 정통신앙을 확립하고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용납치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통신학에 대한 일련의 도전는 한국교회의 신학이 보다 근본주의적 경향을 뛰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빙돈단권성경주석(Abigdon Bible Commentary)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1935년 총회에서는 당시 감리교의 유형기의 편집으로 번역 간행된 아빙돈 단권주석은 1930년 미국 감리교 출판사인 아빙돈사가 발간했던 것으로 미국, 영국, 카나다, 호주 등의 성경학자 66인이 공동집필한 것이었는데 한국감리교회가 희년기념으로 1934년에 출판한 것이었다. 이 주석의 한역자들은 대부분 감리교인들이었으나 장로교인 중에도 채필근, 김현근, 문재린, 김명선, 한경직, 윤인구, 김재준, 송창근 등의 목사들이 번역에 참가하였다. 이 주석은 성경의 역사적 비평을 전적으로 도입한 자유주의적인 주석이었으므로 장로교목사가 번역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문제시 된 것이다.32)



길선주 목사는 그 주석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집필된 것임을 지적하고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목사들에게 엄중한 책임규명을 하므로 후일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진보적 신학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1935년 제24회 장로교 총회에서 이 문제를 제소하였고, 총회는 길선주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신생사 발행 성경주역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 장로교회의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으므로 장로교회로서는 구매치 않을 것이며 동 주석을 집필한 본 장로교 교역자에게는 소관 교회로 하여금 사실을 심사케 한 후 그들로 하여금 집필의 시말을 기관지를 통하여 표명케 할 것이다.


채필근 목사는 집필의 과오를 사과하였으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식 목사는 신학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총회의 독단에 응할 수 없다고 하여 사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을 이끌고 있던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에 극히 형식적인 3인 연서의 성명서33)를 신학지남에 발표하므로 일단락 되었다.


이상과 같은 장로교 총회적 차원에서 문제가 됐던 사건들은 한마디로 성경관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완전 영감설은 한국장로교회가 서 있는 양보할 수 없는 기초였다. 문제는 이런 신학적 토론의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는 보다 방어적 성격을 뛴 근본주의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의 전통신학이 개혁주의적 특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 특성의 외연은 기대할 수 없었다.



1930년대 이후 점차 대두되던 이런 신학운동은 총회 차원의 결정이나 사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후에도 계속 발전되어 장로교 안에는 자연히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4. 김재준의 신학과 조선신학교의 설립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인물은 김재준이었다. 김재준은 김익두 목사의 감화로 입신하였고, 일본 청산(靑山)학원 신학부에서 3년간(1925-1928) 유학하고 도미하여 핏츠버그에 있는 웨스턴(Western)신학교에서 3년간(1929-1932), 그리고 프린스톤에서 일년간 연구한 후 1933년에 귀국하였다. 남궁혁은 그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추천했으나 그의 신학사상 때문에 교수로 채용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930년대의 대부분을 평양 숭인고등학교(1933-36)와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1936-39) 성경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편집인이었던 남궁혁의 배려로 〈신학지남〉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는 1933년 귀국 후부터 1935년 신학적인 문제로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쓸 수 없게 될 때까지 8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다.34) 이런 기고문을 통해서 김재준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해 나갔고 역사비평학적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신학지남〉 1934년 1월호에 쓴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였다. 김재준은 이 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의 ‘처녀’를 ‘젊은 여자’로 고쳐 읽었다. 또 이것이 사실에 가깝고 본문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표적’을 꼭 ‘이적’으로 볼 것은 없다고 지적하므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김재준 목사의 이러한 해석은 당시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때 편집위원으로 있던 박형룡은 편집인 남궁혁에게 사표를 제출함으로 항의하였고, 김재준은 1935년 5월호를 끝으로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박형룡이 볼 때 김재준은 성경을 축자적 영감설을 부인하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오류를 주장함으로 보수주의 신학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자유주의 신학이었고, 전통과 정통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대립은 시작에 불과했다. 신학적 대립은 캐나다연합교회 선교구역이었던 함경도 지방에서 보다 뚜렷했다. 곧 해외에서 신학을 연구한 이들이 귀국하면서 ‘다른 전통’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마포삼열의 경고는 그 의미가 이미 반감되고 있었다.

근래에 신신학(新神學)이니 신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합니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한다든지, 혹은 선교사업을 최소한도로 축소한다든지 할지라도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합시다. 나와 한석진(韓石晋) 목사가 13도에 두루 다니며 전파하던 그 복음, 양전백(梁甸伯)목사가 선천(宣川)에 전하던 그 복음은 저들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것이었으니 앞으로는 그것을 조금도 변경치 말고 받은 그대로 전합시다.


1935년 이후 해방 전까지 신학적인 문제로 총회적 차원에서 문제된 것은 신사참배건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일제하라는 시대적 제약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아직까지도 한국 장로교 총회가 보수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이 총회적 차원에서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학적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말을 거쳐 가면서 한국의 신학적 판도는 크게 변모되고 있었다. 이 변화에 동기를 준 것이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이었다. 교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고, 교회에서의 구약설교를 금지시키는가 하면 성경과 찬송 일부의 삭제를 명하기도 했다.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가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사실상 폐교되고, 1918년 창간되어 22년간 장로교회의 신학을 주도해 오던 〈신학지남〉은 1940년 8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의 연구와 변증은 제한을 받게 되었고, 그 영향은 해방 후까지 계속되었다. 또 주한 선교사들이 강제출국하고,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보수주의 신학의 약화를 초래했고, 그 신학적 공백상태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지경을 넓혀갈 수 있는 환경을 얻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대적 상황에 타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수주의 신학은 급속도로 위축되었고, 교회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갔다. 김양선은 “보수주의는 붕괴되고 지금까지 저들의 손에 있던 교회의 지도권은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35)


1940년 4월에는 김재준, 송창근(宋昌根), 윤인구(尹仁駒) 등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를 개교하였다. 이미 있던 평양의 장로교신학교가 폐교되는 상황에서 조선신학교가 개교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 인사들이 일제의 정책에 순응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신학교는 처음부터 일제와의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김재준은 ‘선교사 집권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고 신학과 신학교육의 자주를 내세웠는데, 이것은 세계교회로부터의 한국교회를 이탈시키고자 했던 일제의 정책과 일치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과 전통을 전적으로 개혁할 것을 말하면서, “조선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에 넣는 신학”을 강조했는데,36) 이것은 한국교회의 기존의 신학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다. 이 조선신학교는 1940년대 보수주의 신학의 폐허 위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을 다져갔고, 해방후 조선신학교는 ‘남부총회’에 의해 한국 장로교 직영신학교육기관으로 승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교가 1946년 9월 설립되었다. 타협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이 고려신학교 설립의 주된 동기였다. 따라서 고려신학교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신학교 설립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5. 박형룡는 개혁주의자인가?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에서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의 영향력은 과소 평가될 수 없다. 그는 한국장로교 신학의 정초를 놓은 인물이자 장로교신학의 보수주의적 전통을 엮어간 인물로서 그의 신학이 어떻했던가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의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897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난 박형룡은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1916), 평양의 숭실전문학교(1920)를 거쳐 중국 남경(南京)의 금능대학(1923)에서 수학하고 도미하여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1926는 졸업하였다. 다시 컨터어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에서 9개월간 수학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후일 이 학교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1932). 귀국한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일하는 동시에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31년 4월부터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가르치는 전임교수가 되었다. 이 때로부터 교수로서 그리고 보수신학의 변증가로 활동하게 된다. 1931년부터 평양신학교가 폐교되는 1938년까지 교수로 있었고, 1942년에는 만주 동북신학원 교수 및 교장으로, 1947년에는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1948년에는 남산의 장로교신학교 교장으로, 1952년 이래로는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1972년까지 활동하고 은퇴했다.


그는 1935년 『근대 기독교신학 난제선평』이란 책을 저술한 이래, 『표준성경주석 로마서』를 포함한 4권의 주석서와 『우리의 피난처』라는 제목의 설교집, 『기독교 변증학』 등 단행본과 전7권의 『교의신학』을 완간했다. 1978년에는 박형룡의 모든 저작을 한데 묶어 전14권의 『박형룡박사 저작전집』이 출판되었다. 흔히 박형룡은 “변증학자로 시작하여 조직신학자가 된 분”이라고 하는데,37) 그는 변증학을 그의 『교의신학』의 서론격으로 하여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그 기초로 조직신학적 체계를 『교의신학』에 담았으며, 이상의 분야 외에도 목회학, 예배학, 교회정치, 기독교교육학, 선교학 등에도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흔히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데 기여한 인물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가 프린스톤에서 공부한 때는 1923년에서 26년 어간이었는데, 이 때는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와 이로 인한 대립과 갈등의 시기였다. 1812년 설립된 프린스톤신학교는 16세기 개혁신학과 17세기 유럽의 칼빈주의적 장로교 정통주의를 이어받는 “칼빈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의 진정한 보루(a vertitable bastion of calvinistic orthodoxy)였고, 알렉산더, 하지, 워필드, 메이첸 등이 프린스톤 신학을 주도하였다. 그의 신학적 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프린스톤의 신학자들 중에 특히 메이첸(G. Machen, 1881-1937)이었다. 특히 박형룡은 변증학을 전공했으나 변증학을 가르친 존슨(Johnson)이나 그리인(William B. Greene) 보다 신약학을 교수했던 메이첸의 영향이 컸다. 메이첸는 1920년대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정통신학의 파수는 그 시대 그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그가 1921년에 출판한 『바울 종교의 기원』(The Ogigin of the Paul's Religion)이나 1930년의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은 그 시대 자유주의와의 대결이 빗은 결정체였다. 흥미롭게도 1928년 귀국한 박형룡은 마치 미국장로교 현장에서 메이첸이 그러했듯이 한국장로교회 마당에서 벌어지는 자유주의 신학사조에 맞서 싸우는 신학적 소명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다. 그는 1930년대 한국교회의 ‘다른 전통’에 대항하고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과의 일전을 통해 초기 한국교회의 정통신학을 지키고 이를 계승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신학은 방어적 근본주의 성격을 띄게된다.38)



이런 점에서 볼 때 박형룡이 메이첸으로부터 특히 4가지 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한숭홍의 지적은 수긍할 만 하다. 즉 박형룡은 1.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배타적이고 변증적인 신학방식, 2. 알렉산더, 하지 부자, 워필드, 메이첸으로 이어지는 근본주의적이며 칼빈주의적인 정통주의, 3. 변증학 공부에서 터득한 신학논쟁에서의 강한 반론과 비판 능력, 4. 교단분열과 신학교 설립의 선례를 메이첸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박형룡이 변증학을 전공하게 된 일이나 메이첸의 문하에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1920년대의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에서 한국교회를 유추해 보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상황에서 미국교회를 조망해 보는 반성적 성찰의 결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형룡이 ‘한국의 메이첸’39)이라고 불린 것은 메이첸과 박형룡이 미국과 한국이라는 상이한 현장에서 개혁주의적 정통신학을 위해 동일하게 부름 받았다는 시대적 소명과 그 신학적 유사성과 정신적 연대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 때문에 박형룡의 생애에는 메이첸을 추종하려는 심리적 연대감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그에게는 변증과 옹호가 중요한 사상적 맥이었고, 그가 『기독교근대신학 난제 선평』에서 말한바와 같이 “신학사상의 바른 자와 그른 자를 획별차천명(劃別且闡明)”하는 것을 교회를 위한 사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신학에는 고도의 교리적이고 사변적인 성격이 짙었다.


어떻든 박형룡은 1930년대 이래로 정통주의 혹은 보수주의라고 일컬어지는 한국교회의 신학전통을 기초 놓고 이를 파수하며 계승해 가는 50년간의 변증과 대결과 투쟁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런데, 박형룡의 신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를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과 화란에서 석명된 삶의 세계관적 체계 혹은 문화적 소명을 강조하는 전통에서 볼 때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박형룡은 미국의 개혁주의적 정통신학과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두 갈래의 신학전통을 동시에 수용했다고 보여진다. 미국신학은 직접적으로 배웠지만 화란신학은 간접적으로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교의신학』을 보면 17세기 유럽의 개혁주의적 정통신학을 계승한 프랜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 1632-1687)의 신학을 이어받는 프린스톤 신학자들, 곧 찰스 하지, 에이 에이 하지, 워필드, 메이첸, 그리고 심지어는 침례교신학자 스트롱(A. M. Strong), 세대주의자 세드(William G. T. Shedd) 등도 인용하고 있고, 화란계통의 카이퍼, 바빙크, 보스 등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그는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40) 그는 벌코프를 통해 화란 신학 전통을 잇고 있다고 보여진다. 박형룡이 벌코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교의신학』이 벌코프의 조직신학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41) 말하자면 그는 벌코프를 통해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간접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한국교회에 소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화란 개혁자들의 저술이 영역되지 못했고 그가 화란어를 읽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벌코프는 박형룡에게 화란 개혁주의 전통을 전수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박형룡은 벌코프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벌코프가 가졌던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사회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개혁주의적 성찰을 시도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루이스 벌코프는 하나님의 주권의 우주적 성격을 강조하여 문화에 대한 소명, 곧 문화변혁을 강조했다. 그는 칼빈신학교에서 38년간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뿐 아니라 성경신학과 사회윤리 분야에도 저서를 남겼다. 그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의 와중에서 근본주의자들이 무관심했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사회복음주의에 대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낙관주의적인 합리주의 신학인 사회복음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 『교회와 사회문제』(The Church and Social Problems, Grand Rapids, 1913)이다.



다시 말하면 벌코프는 근본주의를 동조하면서도 그들의 약점인 사회에 대한 건실한 관심을 회복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던 것이다.42) 그는 개인구원과 타계주의적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문화변혁적 전통을 가진 개혁주의자로서 신칼빈주의(Neo-Calvinsim) 전통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벌코프의 신학으로부터 큰 빚을 지고 있는 박형룡에게는 그 시대의 사회나 문화현상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나 문화변혁적 관심이 희박했다. 이 점은 그의 글쓰기의 여정 속에 드러나 있다.43) 장동민은 박형룡은 “1940년 이후 조직신학을 강의하면서 프린스톤의 전통과는 다른 화란신학을 접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도 벌코프를 통해서 화란신학을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은 장동민의 말처럼 “화란신학을 받아드린 후에도 변증학의 방법론과 그 내용이 별로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구 프린스톤의 신학 전통, 곧 하지, 워필드, 메이첸으로 이어지는 미국적 전통에 착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형룡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 특히 1930년대 이후 진보적 신학의 대두에 대항하여 한국교회의 신학전통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싸움 때문에 성경권위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고, 그 싸움의 와중에서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적 경향성을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자신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불렀지만,44) 그 시대적 외인(外因) 때문에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적 내인(內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개혁주의적 특성을 지닌 ‘정통주의’ 신학자로서 근본주의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직접적으로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두 편의 글을 발표했는데,45) 이 글에서 그는 근본주의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앙이며, 정통주의 기독교운동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그는 근본주의는 20세기 미국적 배경에서 대두된 신학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며, 초대교회 교부들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파수하려했던 신학이었고 미국장로교회가 견지해 온 신학으로서 심지어 기독교 자체라고 이해했다.

흔히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칼빈 이래로 최대의 칼빈주의 신학자로 불리며, 근세 개혁교회의 3대 조직신학자로 불린다. 그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살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므로 문화에의 소명은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는 심지어는 정치 현실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이상을 수립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함께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을 강조한 신학자였다. 그러나 박형룡에게는 카이퍼적인 문화에의 소명은 없었다. 박형룡은 카이퍼를 비롯한 화란 개혁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박형룡은 구 프린스톤 신학-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이어지는 청교도적 보수주의 정통신학을 받아드렸기 때문에 그것을 불변의 전통으로 계승하고자 했지 유럽의 개혁주의를 받아드릴 필요가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물론 1930년대에 대두된 진보적 신학과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거절한 박형룡에게서 카이퍼에게서 보게 되는 문화에 대한 세계관적인 체계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그런 세계관적 체계나 박형룡의 표현을 빌려 말해서 문화에 대한 ‘지로’(指路)가 있었다면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오늘 현실에서 보는 신앙과 삶의 이원론적 괴리를 극복하는데 적지 않는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를 쇄신하고 혁신하는데, 아니 사회와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박형룡의 신학에서 문화변혁적 측면이 없었던 점은 비단 박형룡에게만이 아니라 '개혁주의'를 말하는 모두에게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46)


6.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주의 신학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한국교회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그 계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해방후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신학 교육기관으로서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 곧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더 나아가서 진정한 의미의 개혁주의 신학을 계승하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 쇄신을 의도한 일은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신학 확립에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과 주남선은 비록 투옥되어 있었으나 해방을 예견하고 한국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해 신학교의 설립을 의도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입교(神學立敎), 특히 개혁주의 신학을 통해 한국교회를 바로 새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불신앙과 타협주의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고, 자유주의 신학은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투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체득했던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45년 해방당시 장로교 신학교는 조선신학교 뿐이었고, 이 신학교가 남부총회에 의해 장로교회 직영신학교로 가결되었을 때 새로운 신학교육 기관의 설립은 긴박한 과제였다. 그 현실적 요구에 의해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는 설립되었다.


말하자면 고려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개혁주의 신학운동을 전개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이다. 이것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이념을 계승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 점은 초기 고려신학교 관련 문서에서 거듭 표명되고 있다. 한상동과 주남선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고려신학교가 추구하는 신학적 이념은 개혁주의 신학임을 분명하게 표명히 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도 장로교원본 신조서인 웨스터민스터 신조게요서의 교리대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하여 교리와 및 생활을 순결하게 할 목사 양성을 이념과 목적으로 하고 현하 한국교계에 거대 신학자인 박윤선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 칼빈적 개혁파의 사상 그대로 생활하도록 노력하여 왔고, 앞으로 더 일층 노력하려고 하는 바입니다.47)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박윤선는 고려신학교를 모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우리의 신앙노선>이라는 글에서,


첫째로 이 노선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및 그 대소요리문답을 교리로 하고 또한 그 예배 모범과 권징조례를 순수히 지킨다. 둘째로 일제말기의 흐리워졌던 오점을 밝히 회개하여 청산함이 절대로 필요한 줄 알고 실행한 것이다. 셋째로 신학에 있어서 타협주의는 배척하고 순수히 칼빈주의 신학을 보수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사도적 전통으로 가지지 않는 현대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를 반대한다.48)


고려신학교는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장로교전통을 생활을 따르며, 생할에 있어서는 성화적 삶을 추구하며, 신학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박윤선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자였고,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고려신학교교육의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고려신학교 학우회가 발간한 소책자 『우리의 신앙노선』에서 “우리가 진리를 지키려면 옳은 신학사상을 지켜야 한다. 신학이란 성경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후,


우리는 개혁파의 신앙노선을 따른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이 칼빈주의 신학을 주장함에 손색이 없어야 한다. 신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자유주의, 발트주의, 알미니안주의. 우리는 위의 모든 신학을 반대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중간주의 신학도 좋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께달은 성경주의라고 할 수 있는 칼빈주의 신학을 강력히 파수한다.49)


고 하여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이를 교육하고 파수하는 것을 신학적 이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개혁주의를 복음주의와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위의 소책자에서 박윤선는,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신학을 께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가진다.50)


그래서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를 사수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51) 한상동과 주남선는 개혁주의 신학을 통한 교회건설이라는 분명한 의지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고, 박윤선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재확립과 계승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다. 고려신학교는 하비 콘의 지적대로 “교회 내에 보수주의 사상을 심어줄 터전”52)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분명히 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는 묘판의 역할을 했다.



7.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학


실제로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를 놓은 인물은 박윤선(朴允善, 1906-1988)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주경신학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보다 앞선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사변적 난해성 때문에 대중적 수용도가 낮았다. 그러나 주경신학자였던 박윤선의 저작들, 특히 성경주석은 일반 목회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한국목회자들의 서제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박윤선의 주석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박윤선은 그의 방대한 저술과 30여년간의 신학교육과 목회적 활동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공표하고 가르치고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선언적 의미가 컸지만 박윤선의 개혁주의적 성경주석은 목회적 터전에 쉬 용해되고 착근할 수 있었다. 그의 성경 주석에는 41편의 소눈문이 특주 혹은 참고자료로 포함되어 있고, 1,053편의 설교가 포함되어 있어 시골의 설교자로부터 도시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을 능가하며, 한국교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1905년 평북 철산군에서 출생한 박윤선는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두 차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였다(1934-36, 1938-1939).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메이첸의 문하에서 헬라어공부와 신학연구에 주력하였다. 박윤선는 2차 미국유학시에는 반틸(C. van Til)의 문하에서 변증학을 배웠는데, 반틸의 영향으로 신학이란 어떤 자연론적인 유추나 철학적 사변에서 출발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 성경계시에서 출발하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에 기초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또 반틸의 신학이 근거하고 있는 바빙크의 교의학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게된다. 그의 첫 신학논문인 “빨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과 그의 두 번째 신학논문인 “빨트의 계시관 비평”53)은 이런 훈련의 결과였다. 박윤선의 철저한 계시의존사색도 이런 교육을 통해 얻는 것이었다.



박윤선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 교수 혹은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53년 10월에는 화란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비록 체류한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화란의 개혁신학을 직접 접하게 된다. 박윤선이 박형룡과 다른 한가지는 박형룡은 미국의 구 프린스톤 신학을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으로 보수하고 파지하려는 입장이었으나, 박윤선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그는 구 프린스톤 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전통의 개혁주의 신학과, 19세기 화란에서 석명된 개혁주의 신학, 이 두 흐름을 적절히 종합하였다. 박윤선은 1960년 고려신학교 교장 및 교수직을 사임하고, 1960년부터 63년까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동산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로 활동했고, 1963년부터 1980년까지는 총신대학교 교수로 봉사했다. 1979월에는 설립 50주년을 맞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 10월 말 총신대학 대학원장직을 사임하고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여 원장 혹은 교수로 봉사하였고, 명예원장으로 계시다가 1988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박윤선은 일생동안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위해 일관된 생애를 살았는데,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중요한 봉사는 주석 집필이었다. 그의 주석 집필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로부터 40년간의 노고 끝에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성하고 1979년 10월 9일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드린바 있다. 그의 주석은 분량으로 보면 구약은 총 7,347쪽, 신약은 총 4,255쪽에 달해 신구약 주석은 총 11,602족에 달하며 매년 약 240쪽의 주석을 집필한 샘이다.54) 그는 지칠줄 모르는 학자였다. 그는 주석이나 설교, 단행본 외에도 고신의 『파숫군』에 218편, 총신의 『신학지남』에 40편, 합신의 『신학정론』에 1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14년인데, 218편의 글을 발표했으므로 연 15.6편의 논문을 발표한 샘이다. 외람된 이야길 수 있으나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고신 신학의 전성기였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열정적인 기간이었다.


박윤선은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박식하였고, 그의 성경주석에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의 신학자와 하지, 워필드, 메이첸 등 미국신학자들은 물론, 잔 메이어(Jahn Meter), 델리취(Delitzsch) 등 독일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 비빙크, 보스, 리델보스, 스킬더 등 화란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동시에 소개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석명하고 이를 구체화하였을 뿐 만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 위에서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 진정한 개혁신학자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을 비판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천착하려고 힘썼다. 박윤선는 옛 평양신학교의 벽을 넘어선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하비 콘은 박윤선은 단순한 근본주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고 함으로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 였음을 지적했다.


박박사는 옛 평양신학교가 너무나 제한된 분야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들을 인식하지 못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 즉 한국교회가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인 안목(the larger perspectives of Calvin)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개혁신앙에서 동료였던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는 조직신학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약연구를 통해서도 이런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55)


그가 말한 칼빈주의에 대한 ‘원시적인 관점’이란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했다. 그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그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으로 체달(體達)했던 신학자였다. 그는 경신애학(敬神愛學)의 삶을 살았으며, 겸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김명혁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윤선은)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한국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박목사님은 한국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적 삶이 무엇인자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신 분이었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 주셨고, 소극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보여 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사회문제와 구제사역 등에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다56).


박윤선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는 고려신학교에서 교수로 혹은 교장으로 봉사했으나, 1963년에는 1948년에 설립된 총회신학교, 곧 총신대학교로 옮겨갔고 이 곳에서 1980년까지 봉사했다. 그리고 1980년 11월 합동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이 신학교 교장에 취임함으로서 그의 영향하에 개혁주의 신학과 그 학맥(學脈)은 고신대학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 등을 통해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 계승되었고, 고신과 합동 등 한국의 보수주의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8. 남은 문제들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라는 흐름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연원과 발전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한국교회가 아니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따른다고 말하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고, 또 그 개혁주의적 삶에 충실한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그 신학적 경계선을 획정하고 비판도 해왔다. 그러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세대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혹은 오순절 운동과의 경계선이나 그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석명하지 못했고, 개혁주의라고 하지만 사실은 세대주의 혹은 근본주의적인 신학에 안주해 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장로교회가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근본주의, 세대주의 혹은 경건주의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을 말하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문화 현실이나 사회 현상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해 왔다.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에는 대체적으로 문화소명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근본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예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사명에 대한 무관심은 결과적으로 도나티스트들이나 청교도들에게서 보는 분리주의적 경향을 보게 된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인 동시에 만유의 주제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만다. 바빙크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정교는 분리될 수는 없으나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은 정교의 분리를 정당한 것처럼 인식하여 왔다.

교회 현실에서 볼 때 다음의 몇 가지는 개혁주의 교회와 개혁주의적 삶의 과제로 남아있다.



첫째로 개혁주의적 삶의 체계, 곧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을 확립하고 그것이 일상의 삶속에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개혁주의는 교회를 위한 신학인 동시에 개인의 삶을 위한 지로적(指路的) 체계이다. 한국에서 개혁주의를 말하는 장로교회는 개혁주의적인 삶의 추구에 무관심했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사는 생활은 먹고 입는 가장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궁국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개혁주의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개혁주의 교회간의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김의환박사의 말 처럼은 “교회사는 항상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 사이에서 움직이는 진자(振子)의 움직임을 목격해 왔다.” 순결을 지나치게 요구할 때 연합이 깨지고, 연합을 우선시 할 때 순결이 훼손된다. 어거스틴과 도나티스트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고, 칼빈과 제세례파의 긴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는 교리적 순결과 정통을 강조하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연합을 그토록 강조하였기에 Willem Nijenhuis는 칼빈은 개혁자들가운데 교회일치 혹은 연합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를 Calvinus Oecumenicus, 곧 ‘연합운동가 칼빈’이라고 호칭하였고, 연합운동가로서 칼빈에 관한 한권의 책을 저술하였다.57) 우리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되 연합을 소흘히 해서는 않될 것이다. 특히 개혁주의 교회들의 연합은 우리의 당면과제라고 할 수 있다. 고고(孤高)한 분리주의는 교만일 뿐이다.


세째 오늘의 현실에 대한 문화적 소명을 지녀야 한다. 앞에서 강조하였지만 한국의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로 오인될 만큼 근본주의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하지 못했다. 이것은 개인의 회개와 구원에만 관심을 둔 경건주의나 복음주의의 영향일 수 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과 통치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넷째 교회정치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교회, 특히 개혁주의를 말하는 교회에서 가장 개혁주의적이지 못한 한 가지가 교회정치이다. 교회정치의 개혁이란 비 개혁주의적인 정치적 관행과 그 요소를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에 나타난 직분의 계급구조, 교회 제도의 계급화는 불식되어야 할 비 개혁주의적인 요소이다. 19세기 영국의 칼빈주의 역사신학자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 1805-1861)은 교회관의 변질은 이미 2세기에서부터 그 조짐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한 가지가 교회에서의 비 성경적인 고위 성직계급의 출현이라고 말했다.58) 오늘의 한국교회의 계급적 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로마교회와 같이 계급구조화 되기 쉽고, 이미 그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의 지나친 권력행사는 개혁주의 정치원리인 지교회의 동등성과 자율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개혁주의적인 실천은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할 수 있는 도서


교회와 신앙고백, 김영재 성광
개혁신학의 현대적 조명, 5집, 한국개혁신학회
개혁신학, 한국교회, 한국신학, 도서출판 대학촌
기독교사상연구, 3집(고신대학교)
박형룡의 신학연구, 장동민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 총신대 출판부, 박용규편
성경과 나의 생애, 박윤선
성경과 신학 1집, 복음주의 신학회
신앙과 신학, 쿰란출판사 이종성외
신앙과 학문, 서철원
신학사상 25집
신학정론, 1989. 12
신학정론, 1991. 7
신학정론, 1992. 3
신학정론, 1995. 11
신학지남 1994. 여름
신학지남, 1996. 겨을
신학지남, 1997, 가을
신학지남, 1999, 여름
신학지평 8집, 안양대학교
한국기독교의 재인식, 김영재, 엠마오
한국기독교와 신앙, 숭실대학교 기독교문화연구소
한국교회사, 김영재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김양선
한국장로교신학사상, (영문, 한역판), 간하배
한국장로교사상사, 박용규
Der Protestanttismus.... 김영재 학위논문
The Christian confrontation ... 이근삼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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