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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의 기본자세(행 17:11) / 존 라일 |

by 【고동엽】 2021. 11. 10.

개혁주의의 기본자세(행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존 라일(1816-1900, 영국 국교회의 개혁주의 목사)

 

목사도 틀릴 수 있다!

 

 

 

안디옥 사건이 주는 교훈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갈라디아 2장에 나타난 한 장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바울)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이는 몇몇 사람이 야고보에게서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마침 나(바울)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갈 2:11~14).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이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개종시켰던 베드로가

안디옥에서는 위선적인 면을 나타냈다.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복음과 위배되는 베드로의 위선을 목격한 바울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 사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갈라디아 2장에 전개되어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바울은 안디옥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앞에서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견책하였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베드로의 수치스런 위선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안디옥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사도였다.

그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었으며,

그분의 설교와 기적을 직접 듣고 보았고,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였다.

그는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첫 설교를 함으로써,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씨앗을 제일 먼저 뿌린 사도였다.

그토록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수치스러운 잘못을 범했다.

지금 나는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 하에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들도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화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언제든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쓰러질 수 있으며,

또한 곁길로 나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며, 영생을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빼어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은 썩어질 육체 안에 거하는 한

하나님의 손을 놓는 순간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높은 성직과 안수

 

높은 성직과 권위있는 직책이 사람을 실수와 잘못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모든 교리적 잘못과 도덕적 연약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게 보장해 주는가?

결코 아니다.

비록 그가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감독이나, 사제나 목사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안수 기름을 바르고, 경건한 대주교의 손을 통하여 안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를 잘못된 교리와 배도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모태로부터 신앙을 받은 사람,

교회에는 정기적으로 나가지만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인 사람,

친구나 가족이 나가는 교회를 별 다른 생각 없이 따라 다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정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영국 성공회 헌장 21조

 

비록 여러분이 믿고 있는 교리나 가르침이

교회의 위원회나 총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영적 위치가 반드시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원회나 총회의 교리적 결론 역시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단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을 성령의 음성과 진리를 통하여 인도하신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국 성공회의 헌장 제 21조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총회 역시 잘못을 범할 수 있고, 때때로 잘못을 범해 왔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에 있어서도 잘못을 범했다.”

 

형제자매들이시여!!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린 양의 인도하심을 안전하게 따라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의지하지 말며,

인간이 세워 놓은 전통과 교리를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 성

경을 스스로 연구하여 진리를 발견하도록 애쓰며,

이것이 정로이며 진리의 길인가를 항상 숙고하라.

이것이 하늘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다.

 

성경의 예증들

 

안디옥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잘못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예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는가?

그 믿음의 용사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에

아내 사라의 권고를 따라서 젊은 후처를 얻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홍해의 기적, 불기둥과 구름 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를 직접 먹었던 대제사장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춤을 추도록 방조했던 역사를 기억하는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이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취하여 이방 신전을 짓도록 허락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유다의 선한 왕인 아사가

하나님을 찾는 대신에 그 당시의 의사에게 찾아간 일을 기억하는가?

선한 왕인 여호사밧이 악한 아합을 돕기 위하여 갔던 일을 기억하는가?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사람들을 태워 죽이기를 구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왜 성경은 위대한 사람들이 범했던 이러한 잘못들에 대해서

숨김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향하여 크게 외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진리를...

 

경건한 수도사의 잘못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우리는

최고의 지성과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도 잘못된 사상과 교리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은 지식과 지성이 충만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진리 앞에 마음을 겸손하게 낮출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초기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좀더 순결하고 경건한 수도원 생활을 원했다.

비록 그들의 동기가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 안에도 세속과 배도가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경건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급기야는 외형적인 경건에 촛점을 맞추어

수도원을 교회의 허식적인 경건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중세기 동안, 수도원 안에 있는 성직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미신적 교리들이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잘못

 

교회와 수도원이 정치의 권력과 부에 이끌려 부패되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이 진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어났지만,

그들 중 아무도 잘못이나 실수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없었다.

마틴 루터는 너무나 고집스럽게 성체 공존론을 주장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에

루터의 동료 개혁자인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 - 1560)에 의하여

루터 교회가 몇몇 잘못된 교리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존 칼빈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장로교회를 어처구니없는 예정론으로 이끌고 말았으며,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6세기 영국의 개혁자)

자신의 첫 신앙을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한동안 물러가는 모습을 보였다.

존 제월(John Jewel, 16세기 영국의 개혁자)

죽음에 대한 잘못된 교리에 빠져서

결과적으로 교황권의 주장을 답습하게 되었으며,

존 후퍼(John Hooper, 16세기 영국의 개혁자)

예식 때에 입는 예복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공회에 해를 입혔다.

요한 웨슬리와 어거스트 톱 플레디(17세기, 영국 칼빈주의자)는

치열한 교리 공방전으로 인하여 수치와 상처를 받았으며,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9세기 초 영국 장로교 목사)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빠짐으로서 미혹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지난 역사와 사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 입을 모아서

“성직자도 틀릴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인간을 의지하는 정신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는 일을 중단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사람도 우리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에

“우리 주교님(목사님)께 물어보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말라.

여러분이 어떤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가를 살피지 말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여야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성직자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말을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의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스런 목자이시며, 위대한 대제사장이시고,

대주교 중의 주교이며, 교황보다 높으신 분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교회의 성직자들을 의지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정보다 주교나 사제의 인정을 더 필요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깊이 회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존경하는 성직자에게 우리의 믿음과 신조를 맡겨 버리는 잘못을 범하기가

너무나 쉽다.

우리는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기 보다는

어떤 목사, 어떤 사제, 어떤 주교, 또는 어떤 신학 박사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좋아한다.

진리는 어떤 교단이나 학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만이 진리를 확인해 주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하거나 위험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직자를 무조건 믿고 따라가는 것이

최상의 안전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다 양 같아서 하나가 움직이면 나머지도 모두 따라간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

 

서두에서 언급한 갈라디아 2장의 안디옥 사건도 바로 이러한 잘못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십자가 이후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기독교회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유대교의 관습과 의식에서 한동안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이

신약 성경에 여러 곳 나와 있다.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베드로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만들었다.

 

“그(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평신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베드로와 같이 위대한 사도가 잘못을 범 할리가 없어!

그를 따르는 한, 결코 잘못에 빠질 수 없을거야!”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사제나 주교나 목사직에 있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베드로의 잘못된 이해가

초대 기독교회 전체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만 하였다.

바울은 이제 갓 태어난 교회 안에

유대교의 전통이 들어옴으로써 복음의 빛이 퇴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도층에 있는 성직자의 의견과 주장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가 쓰러지면 그 밑에 있는 교회 전체가 쓰러지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간파한 바울은

노장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함으로써,

진리를 올바로 세울 수 있었다.

 

“마침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

초대 교회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도 이러한 문제 때문이었다.

1세기 이후, 세월이 흘러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모두 죽게 되었고,

교회는 많은 신도들을 가진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교님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주교나 사제나 목사나 장로가 도대체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목자일지라도 단지 사람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하였다.

 

“아볼로는 누구이며, 바울은 누구이냐?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 3:5).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

 

아이러니칼하게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며서

자기 마음에 맞는 신조로 만들었던 장본인은 성직자들이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큰 오류는 모두 성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무질서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던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성직자였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성직자였으며,

이교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아리우스도 성직자였다.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몄던 사람도 성직자 이지만,

어두운 교회 안에 진리의 빛이 나타났을 때,

가장 앞에 나서서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성직자들이었다.

마틴 루터가 나타나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을 때,

어떤 성직자가 그의 편에서 섰었는가?

그의 곁에는 농민들과 소수의 귀족이 있었을 뿐이다.

진리를 전하는 것도 성직자이지만,

진리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성직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수를 받았다는 인준서가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으로만 진리는 확증된다.

성직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누가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가에 따라서 진리를 분별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베드로도 놀라운 방언의 은사를 받아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말씀을 전하였고,

그의 기도를 통하여 죽었던 도루가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지만,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진리는 기적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오직 성경 말씀으로만 확증될 수 있다.

 

맺는 말

 

중세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종들을 무조건 신뢰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의 상을 교회 안에 세워 놓고 우상시 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던 스코터스, 피터 롬바드와 같은 신학자들을

거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성인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서두에 붙였다.

“틀릴 수 없는, 거룩한(Rev.),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등등.

나는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로버트 멕킨의 “회고록과 설교집”과 같은 책이

오리겐이나 키프리안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가 저술한 어떤 책보다도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또한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알지 못했으며,

희랍어나 라틴어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 저술한 “천로역정”은

지금도 온 세상 사람에게 놀라운 진리의 빛을 전하고 있다.

옥스포드 신학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대해서는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그들이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무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진리는 학위나 숫자나 어떤 교단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리도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시여!!

그대들이 존경하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사람일수 있으며,

모든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서 진리 위에 올바로 서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또 하나의 교황으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자리에 성직자의 교리를 올려놓지 말라.

그대가 존경하는 성직자는 결코 틀릴 수 없다고 추측하지 말라.

성직자가 오류에 빠질 경우에 그대가 따라서 치르게 될 대가를 생각해 보라.

성직자도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직자에 온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들이 틀리고 깨어질 때에 함께 쓰러지지만,

자신의 신앙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그리스도인은

타고 있던 배가 흔들리거나 파손된다고 해도 반석 위에 굳게 서 있을 수 있다.

 

부디 그리스도의 신실한 대사인 성직자를 존경하기 바란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신뢰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 위에 두어야 한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존 라일의 노년의 역작 “교회들을 향한 경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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