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안식년제도 - 김영재 교수(합신)
아마도 1970년대 이후부터 한국 교회는 다른 나라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이한 현상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위 목회자의 안식년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간에 목회자의 안식년으로
인하여 교회가 겪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이 한국 교회가
범하고 있는 시행착오임을 반성함직도 한데, 많은 이들이 목회자의 안식년을 당
연시하는 데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목회자의 안식년이 목회원리에 맞는 것인지
고려해 보지 않기 때문이며 목회자의 안식년이 마치 성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
석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안식년이란 개념을 빌려 선교사들을 위하여 관례로 삼은 것이 선교회였다.
그리고 대학이 또한 교수들의 연구 활동을 위하여 안식년을 제도화하다시
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례는 구미로부터 도입한것이지만, 목회자를 위
한 안식년은 우리 한국 교회에서 자생한 것이다.
목회자에게도 안식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목회자의 직능이
아마도 선교사나 교수들의 것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므로 그
유사점과 차이점을 먼저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한다.
목회자에게 안식년이 적법한가?
목사 역시 가르치는 직능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교수와 같으나 교수가 종사하는
학교 공동체와 목회자가 종사하는 교회 공동체는 동일하지 않다.
교수에게는 연구와 지식 습득이 자신의 직책을 위하여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만, 목회자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목회자는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 못지 않게 사람들을 심방하고 보살피며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 인물로서 가르
치는 일과 모든 교인들을 상대로 봉사하는 복합적인 목회를 동시에 수행해
야 한다.
교수 역시 학생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며 그들의 교육을 위해 봉사한다.
그러나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늘 바뀔 뿐 아니라, 학생을 지도하는 것은
교수 한 사람의 몫이 아니고 교수들이 공동으로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수가 순번으로 안식년을 가진다고 해도 학교로서는 학생
지도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사람들은 안식하는 교수의 빈자리를 별로 의
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목회자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대상은 평생을 같이 사는 교인들
이다. 목회자와 교인의 밀접한 유대 관계는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 비교할 수
가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안식년은 교인들과의 교제에서 이루어지는
목회에 큰 공백과 지장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선교사와 목회자는 다 같이 복음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만
둘의 직능에는 차이가 있다. 선교사들은 문화와 풍속이 다른 외국에서
일하는 사역자이다.
옛날 선교사들이 고국을 방문할 경우 1년간의 안식을 취했던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범선이나 증기선을 타고 오가는 데에만 두 달 혹은
석 달씩 걸렸으므로 그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날에는 하루
이틀이면 왕래가 가능함으로 안식년의 기간에 관한 것은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안식년은 선교사와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제도이다. 선교사가 고국
에 돌아오면 가족과 친지도 만나고 파송한 교회들을 순방하며 선교 사역에
관한 보고를 함으로서 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지와 선교 사역을 위하여 새롭
게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며 격려한다.
그리고 선교사의 자녀들은 조국을 보고 친척을 만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안식년에 선교사와 가족은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힘을 얻
는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의 안식년은 선교지의 토착 교회에도 유익이 되는 것
임을 관찰하게 되었다. 특히 윌리엄 캐리 이후 선교 정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선교지 교회의 자립과 자영이다.
선교지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할 단계에 이르면 선교사들은 스스로 물러
나야 한다는 것이 이러한 자립을 위한 원칙의 하나이다.
이를 일컬어 선교의 '유타나시아'(euthanasia, 安樂死)라고 한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선교지를 떠나 있는 동안 선교지 교회는 대부분의 경우
기대 밖에 교인들이 서로 도우면서 성장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경험하게 되
었다. 선교사의 안식년 기간은 토착 교회의 자립과 성숙을 위하여 스스로를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경우는 다르다. 목회자가 안식년으로 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 교회가 더 부흥하고 성장한다면, 그런 경우가 실제로는 거의 없지만,
목회자가 그 교회에 별로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셈이 된다. 교회가 목회자
를 별로 기다리는 눈치가 없으면 목회자는 묘한 소외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위험은 여전히 내재한다. 목회자를 대신하여
설교를 맡은이가 교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교인들은 교회 생활에
흥미를 잃고 흩어질 수가 있다.
그와는 반대로 대신 설교를 맡은이를 교인들이 좋아할 경우 교인이 흩어
지는 시험은 없을 수 있으나 그것이 도리어 안식년을 하고 돌아온 목회자
에게는 큰 시련이 될 수 있다. 교회가 임시 설교자를 목사로 모시기로 하는
경우도 있고, 임시 설교자를 좋아하는 그룹이 형성되어 교회가 분열되기도
한다.
이런 불상사가 없는 경우에도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된다. 교인들이 한
해 동안 담임 목사 아닌 다른 설교자의 설교에 익숙해져 버려 나중에 다시
돌아온 담임목사의 설교에 다시 적응하느라 애를 쓰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은 목회자와 교회 양측에 다 꽤 오랫동안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대신하는 설교자가 주일마다 바뀌는 경우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은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인들이 매주 설교만 하고는 가버리는 낯선 설교자의 설
교를 듣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좋을 것이 없다. 사랑으로 돌보
는 목회 부재 대신에 땜질식 설교로 교회는 욕구불만에 빠지기 마련이다.
목회자의 안식년이 한국 교회에 정착하게 된 경위
목회자의 안식년은 대형교회의 산물이다. 1970년대 큰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안식년이 마치 제도화되다시피 정착하게 되었다. 큰 교회의
목회자들은 과로하지 않을 수 없다. 3부, 4부, 5부로 반복해서 드리는 주일
예배에 설교하는 일만 해도 탈진케 만든다.
게다가 많은 교인들과 교회 일을 돌아보아야 하는 격무를 치러야 한다.
스트레스도 그만큼 많이 받는다. 그래서 큰 교회의 목회자들이 몸이 극도
로 쇠약해져서 장기간 요양을 해야 하는 경우도 더러 발생했다.
목회자가 안식년을 가지는 것도 우리에게만 있는 특이한 관례이지
만, 몸을 부셔지도록 혹사하면서 목회를 하는 경우도 우리 한국 교
회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건강 회복을 위하여 목회자는 당연히 쉬어야 한다. 그러나 안식년으로
제도화하면서 쉬는 것은 문제이다.
큰 교회(대형교회)의 경우 목회자 개인에게 기대는 교인들의 의존도가
작은 교회에 비하여 낮을 뿐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일을 대신할 수 있는
부목사나 전도사들이 있어서 목회자가 별 어려움 없이 교회를 떠나 있을
수 있다.
큰 교회는 기구화 된 교회이고 목회자는 경영자의 위치에 있으므로 담임
목사가 떠나 있어도 교회는 비교적 원활히 운영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작은 교회(대형교회 보다는 적은 중대형)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작은 교회는 목회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므로 목회자가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면 교회의 목회는 공백상태에 빠진다. 교인들은 작은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장점과 특권을 상실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안식년에 대하여 대형교회가 아닌 작은 교회는
큰 교회만큼 관대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목회자가 접근하기 힘든
대교회의 목사로 변신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며 그리하여 막연한
배신감까지 가지게 된다. 작은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차이점
을 인식하지 못하고 안식년만은 대교회의 목회자나 마찬가지로 가
지려고 하는데 더 문제가 있다.
목회자에게 안식년이 불가한 것은 이런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들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그런 실제적인 문제가 야기되는 것은 교회가
해서는 안될 불합리한 일을 성경에서 말씀하는 안식년을 핑계로
결행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가지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성도들이 함께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
로 지어져 가야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야하는 건설 현장에서, 성도들이
함께 살아가며 교제하는 중심부에서 모든 것이 원활히 진행되고
이루어지도록 지휘하고 감독하는 직무를 맡은 목회자가 1년씩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교의 경우에도 교수는
안식년을 취하더라도 행정과 운영의 책임을 맡은 총장이 임기 동안에
안식년을 취하면서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다.
구약의 안식년을 목회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목회자의 안식년은 성경이 말씀하는 안식년과는 무관하다. 구약 성경은
모든 생업의 안식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땅의 안식에 관하여
말씀하심에 유의해야 한다.
"너희는 내가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레 25:1, 3-7)." 안식년은 파종하는 것을 쉬어 땅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봉사는 데서, 혹은 혹사 당하는 데서 해방을 받아 쉬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포도나무 등에서 나오는 소출은 종들과 객과 가축과
들짐승들로 하여금 먹게 하도록 배려하라고 말씀한다.
안식년의 주목적은 땅으로 하여금 쉬게 하는 것이다. 땅을 놀릴 때
쉬게 되어있는 사람은 농사하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나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안식년과 목회자의 쉼에는 어떤 유추의 가능성도 없다.
안식년의 규례는 경작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목축하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목회를 목양(牧羊)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희랍어로 목사(poimen)
라는 명칭은 바로 목자란 말이다(에베소서 4:11). 목회의 유추는 농사가
아니라 목축이다. 교회의 유추는 땅이 아니고 양떼이다. 목축을 하는
사람은 심지어 안식일에도 가축은 돌보아야 한다. 마치 주부가 가족들에
게 돌보듯이 해야 한다. 쉼 없이 돌보아야 될 양떼를 오랜 기간동안
팽개쳐 두는 그런 목자는 없다.
따라서 구약의 안식년을 목회자의 안식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어이없는 성경해석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에서
'목회자의 안식년'이란 말을 들어 볼 수 없는 것은 그런 합성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맺는 말
목회자는 그러면 쉴 틈도 없이 일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목회자도 사람이므로 쉬어야 한다. 실제로는 한국적인 사정에서 지키기
힘들지만, 목회자도 주중에 하루는 안식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
들도 해마다 적어도 보통의 근로자들이 갖는 법정 휴가기간 정도나 그
보다 많은 기간의 휴가를 가져야 한다.
교회는 이해와 사랑을 가지고 목회자를 위하여 충분한 휴가를 배
려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를 위한 것이다. 목회자는 휴가 동안에 기
도하며 목회를 점검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혹은 견문을 넓혀 목
회에 도움이 되는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한국교회가 목회자의 안식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해당
성경 말씀의 피상적인 해석과 교회관의 빈곤에서 온 것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는 파수군으로서, 멀리 떠난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히 수행하
는 청지기로서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하며 양을 먹이는 목자의 심정으로
교회를 돌보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양육하는 목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여러 해를 쉬지 않고 일하다가 한꺼번에 취하는
안식년은 말고 해마다 몇 주간의 충분한 휴가를 취하도록,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배려하도록 감히 제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행되는 보편적인 관례이며, 옛날
우리의 선배 목회자들이 따랐던 관례이다.
- 김영재(합동신학대학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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