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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한국교회 영성가들의 하나님나라 복음

by 【고동엽】 2021. 10. 12.
한국교회 영성가들의 하나님나라 복음


양진일(연구소 부소장)


오늘은 종교개혁 496주년입니다. 종교권력의 폭압적인 힘 아래 짓눌려있던 복음의 빛이 찬연하게 분출된 재창조의 날입니다. 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날,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한국교회 영성가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입니다. 이 땅에 소개된 하나님나라 복음에 한국교회 영성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그 반응의 결과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냈는지,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단어에 대한 개념정의부터 하고자 합니다. 먼저는 영성이라는 말입니다.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가능합니다. 저는 영성을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봅니다. 따라서 영성의 삶은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그럼 무엇이 성령충만한 삶일까요? 한국교회만큼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교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원에서는 연신 “성령받아라 성령받아라” 찬양이 울려퍼지고 있고, 교회에서도 성령충만 대성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성령충만은 무엇이며, 한국교회가 받고자 하는 성령충만은 또 무엇일까요?


성령충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고자 한다면,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하나님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크게 두 가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4 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다음은 에스겔 36 27절과 로마서 8 4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의 세 구절은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신 두 가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깨달은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돕기 위함입니다. 즉, 참된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공급받는 선물입니다. 이처럼 성령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픈 열망이 있습니다. 성령안에 사는 사람이 바로 영성의 사람입니다. 영성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간절함과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을 일상속에 구현하며 살아내고자 하는 치열함을 지닙니다. 영성의 반대말은 육체성입니다. 육체성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중무장된 상태, 하나님과 이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옛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이 잡힌 상태입니다. 따라서 영성이 충만하다 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상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온 순간, 복음과 상황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기 전, 이 땅을 규정하고 지배했던 것은 유교이데올로기입니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된 이 땅은 신분제와 가부장제라는 두 기둥으로 질서잡혀 있었습니다. 이 질서체제는 누군가에게는 특혜를, 누군가에는 삶의 족쇄로 다가왔습니다. 특혜와 족쇄의 양극화가 자리잡은 이 땅에 복음이 소개되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인간의 높낮이를 당연시하고 신분제와 가부장제를 하늘의 뜻으로 떠받들던 조선사회에 기독교 복음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인간 상호간은 평등함을 강조했습니다. 복음은 조선의 질서속에서 신음하던 무수한 이들에게 기쁨의 소식 그 자체였습니다. 반면 조선의 질서로 인해 특권을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은 충격이자 도전이었습니다. 조선의 아들딸은 조선의 가치, 조선의 세계관, 조선의 제도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더 이상 조선의 가치와 세계관과 제도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치가 주인노릇하던 이 땅에서 과감하게 하나님나라로 자신의 소속을 전향했습니다.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로 하나님나라를, 인생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담대하게 자신의 인생을 전향한 것입니다. 그 전향한 이들이 바로 영성가들입니다. 영성가들은 말씀으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고, 그 새로워진 눈으로 세상과 사람, 사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바라봄은 이전과 동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말씀의 불빛에 인도를 받으며 새로운 삶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한국교회 영성가들은 이 땅 한반도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온 존재를 다해 아멘으로 수용한 자들입니다.


다음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온세상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쁜소식입니다. 이 기쁜소식으로부터 누구도 소외되거나 제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기쁨의 소식을 들어야 할 대상이고, 기쁨을 향유해야 할 존재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먼저 전해들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그 복음을 살아내며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일에 무관심한 교회는 직무유기상태에 있는 게으른 교회입니다. 오늘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과 살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고, 그 복음을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상에 기쁨을 전해주는 복음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앞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주,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며,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빌 2:5-11).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이루어진 일입니다(롬 5:6-8).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전무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기에 더욱 감당하기 벅찬 은혜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허덕이는 뭇생명들에게 전해진 참 복음입니다. 둘째는, 구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에 참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없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 우리 인생에 주인되신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그분,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목자없는 양같은 백성들의 현실앞에서 그들을 먹이시고 돌보신 그분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예수의 사랑에 감격한 이들은 자발적이고도 기쁜 마음으로 예수가 우리 인생에 주인되심을 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자는 이 두 번째 복음의 내용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예수께서 자기 인생을 구원해주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예수가 자기 인생의 주인되시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예수는 좋지만, 예수를 위해 존재하는 자기는 싫은 것입니다. 예수의 역할을 자기의 인생을 돕고 원하는바를 충족시켜주는 선 아래서만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인생의 주인이 되어 그분이 원하시는바대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마치 자기 삶을 차압당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머리로는 예수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하지만 실제의 삶속에서는 여전히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쥔 채, 하나님과 대결구도를 형성하는 것이 대부분 신앙인들의 현실입니다. 그런 연유로, 총체적 복음인 세 번째 내용이 부실해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세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요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만들어내고 살아내는 삶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인의 삶은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심이라 부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하기 이전과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한 이후의 삶은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신앙을 갖는 순간, 우리는 내 인생의 주인되신 예수께서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를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시간사용과 물질소비의 모습, 문화향유의 모습들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게 됩니다. 일상의 삶을 통해 예수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삶은 자연스레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 세속의 가치를 주인처럼 섬기는 자들의 삶과 비교가 됩니다. 어떠한 삶이 보다 생명다운 삶인지, 유쾌하고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 선한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새롭게 변화를 받은 신앙인들은 물질을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를 건설해내었습니다. 이들의 새로운 삶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초대교회에는 이 새로운 삶에 함께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로 넘쳐났습니다. 오늘 상실된 교회의 신뢰, 구호와 선언으로만 존재하는 기독교 신앙의 빈약함은 살아내는 복음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구체적인 삶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롬 12:1). 한국교회 영성가들은 이 총체적 복음을 삶으로 살아낸 자들입니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한국교회 영성의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수도자적 영성의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재가적 영성의 사람들입니다. 수도자적 영성의 사람으로는 이세종, 이현필, 재가적 영성의 사람으로는 조덕삼, 주기철(오정모), 장기려를 보고자 합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의 영으로, 예수의 삶을 이 땅 가운데서 살아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를 동일하게 고백하며 그 고백에 걸맞은 삶을 살아낸 것입니다.


수도자적 영성의 사람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기의 사막 수도사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도원적 영성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낸 이들이 많습니다. 한국교회에도 복음과의 만남 이후, 자신의 삶을 혁명적으로 전환해 낸 인물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안에서 육체의 욕망과 단절하고,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신 예수의 삶을 철저하게 계승한 것입니다. 그 과감한 전환과 삶을 다한 순종의 자세는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의 그 어떠한 것에도 미련두지 아니하고, 욕망도 단호하게 끊어내었습니다. 어떠한 것에도 매임 없이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의 삶을 살아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살아낸 삶을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유일한 정답으로 설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보여준 신앙적 실천의 귀감과 더불어 한계를 잘 살펴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세종과 이현필은 욕망과 단절하고자 결혼한 아내와 잠자리를 거부하고 평생을 오누이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혼한 아내의 동의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그들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고전 7:3).” 그러나 그들의 삶에 묻어있는 한계에 비해 그들의 삶이 보여준 신앙인으로서의 흔적은 더욱 깊고 선명합니다. 그 흔적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1. 이세종(1880-1942)
사람들은 이세종을 “모든 걸 나누고 비운 도암의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을 접한 것은 사십이 넘어서입니다. 그는 결혼 후 100 마지기 이상의 논을 소유한 마을 제일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짙은 그늘이 있었는데 바로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도 자식이 없던 세종은 기도를 하기 위해 산당을 짓고자 하였는데, 마침 산당을 짓던 목수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그는 일하는 중간중간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세종은 그에게서 성경을 빌려 읽었습니다. 그리고 말씀과의 만남 이후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깨우침 받은 후부터 하루 한끼만 식사를 하였고, 육식은 철저히 금했습니다. 피를 생명으로 여기며 길을 걸을 때도 개미를 밝을까봐 조심스러워했습니다. 동물뿐 아니라 나무와 풀이 꺾인 것을 보고는 그 생명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것입니다.


천태산 골짜기에서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하던 이세종을 ‘성자’라 칭하며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신학자 정경옥입니다. 정경옥이 만난 이세종은 대 청빈, 절대 순종, 절대 순결의 삶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와의 만남 이후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는 말씀대로 자신의 재산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빌 공()으로 개명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이공(李空)이라 부르도록 했습니다. 세상 모든 욕심을 비운 대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온갖 욕망들을 극복합니다. 재산욕, 명예욕, 성욕, 식욕, 수면욕을 극복한 것입니다. 그는 아내를 누이라 불렀으며, 죽는 순간까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28-29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란 측면에서는 이해할 행동이지만, 본문안에 있는 또 다른 말씀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 7:4)”란 말씀은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행한 그의 과감한 변화에 아내는 실족하였고, 다른 남자의 품으로 두 번이나 달려갔습니다. 그때마다 이세종은 아내를 찾아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욕심을 놓아버리면 당신 앞에 천국이 펼쳐진다오”라고 하며 그녀를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옵니다. 두 번이나 집 나간 아내를 받아준 이세종에게 그의 친형이 “옛날 강태공 같은 성인도 한번 집 나간 아내를 다시 받아주지 않았는데 너는 어쩌자고 그런 여자를 다시 받아주는 것이냐”힐난했습니다. 그때 이세종은 “강태공은 세상의 선지자이지만, 저는 하나님나라의 선지자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처럼 그는 하나님나라의 선지자의식으로 일상을 살았습니다. 이세종은 돌아온 아내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자신을 변화시켰던 말씀을 아내도 읽고, 자신과 같이 변화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의 소망대로 아내는 이세종이 죽은 후 3년간 시묘를 하였고, 죽는 순간까지 사막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면서 남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세종은 죽음의 때가 이른 줄 안 후에는 석달 동안 곡기를 끊었습니다. 죽기 전 제자들에게“나 죽거든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입혀 묻으시오. 수의 해 입힌다고 멀쩡한 옷 땅에 묻어 썩히면 죄가 되오. 그런 옷 있으면 거지들 갖다 입히시오. 나 죽고 내 옷 벗기면 벌 받소”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청빈한 사람이었으며,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돕고자 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평소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말씀을 보면 그의 삶의 중심과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감사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람을 예찬하는 것은 모욕보다 심하다” “예배는 순종이다. 순종하는 생활과 진리를 탐구하고 묵상하는 것이 곧 예배다”“안식일은 일주간의 생활을 검사 맡는 날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는 것보다 더 큰 배신이 없다.” 이세종의 삶을 존경하며 따르던 제자들도 세상 모든 욕심을 비우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름을 박공 김공 하는 식으로 바꾸었고 그 이름에 걸맞은 존재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중 한명이 이현필입니다.


1.2. 이현필(1913-1964)
맨발의 성자 이현필은 이세종의 제자로서, 스승과 같은 전남 화순 도암면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보이는 신앙을 따르지 말라”는 것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런 신앙이 아닌 자신의 인격이 변하고, 인격이 완성돼 예수 닮은 삶을 사는”신앙을 배웠습니다. 스물 세 살에 결혼한 이현필은 육적인 생활이 영적인 삶을 약화시킴을 깨닫고 금욕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광주에 동광원을 설립해 고아와 결핵환자들을 돌봤습니다. 하루 한끼만 먹으며 맨발로 걸어 탁발을 했으며 탁발한 것을 가지고 고아와 걸인들을 먹였습니다. 그는 결핵환자들을 돌보다 결핵에 걸려 51세에 경기도 벽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죽기전 남긴 마지막 말은 “대자연의 모든 것이 감사하지 않은가. 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 초월의 삶을 살고자 하였는데, 그가 말한 초월이란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비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이현필을 따랐던 많은 이들이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수도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현필로부터 훈련받은 여성수도자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정신지체장애인들을 돌보거나 노동수도공동체를 일구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언니의 높임말인 언님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언제나 남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신발을 벗을 때도 나갈 때를 대비해 밖을 향해 가지런히 놓습니다. 매사에 준비성이 몸에 배도록 한 동광원의 가르침대로 평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이 시대가 지향하는 호의호식과 출세와 성공과 승리의 대로는 이들과 거리가 멉니다. 이들은 절제와 양보와 헌신의 좁은 길이 예수의 사람들이 마땅히 걸어야 길이라 확신하며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광주를 빛고을이라 부르게 된 것이 함석헌의 스승이었던 유영모가 이현필에서 빛을 본 뒤 광주를 빛고을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 말을 들은 함석헌에 의해 보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2. 재가적 영성(일상영성)
이제 재가적 영성의 사람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들은 수도자적 영성가들과는 달리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처럼, 자신의 몸(삶)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 사람들입니다. 재가적 영성의 사람으로 조덕삼 장로,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장기려 박사의 삶을 살펴볼 것입니다.


2.1. 조덕삼(1867-1919)
초기 한국교회에는 사경회를 자주 열었습니다. 사경회는 말 그대로 성경을 자세하게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사경회 기간중에 행하는 프로그램 중에는 토론시간이 있었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대부분 신앙의 실천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황해도에 있던 감바위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 하였습니다. 그 토론의 결론으로 감바위교회는 두 가지를 결정합니다. 하나는 남편과 아내는 상호 존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사할 때 겸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결정은 조선사회의 가치와 제도와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배운 말씀을 통해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배웠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라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 결정을 함에 있어 남편들이 동의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들이 조선의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면 여전히 가부장제도속에서 그들은 상전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조선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낸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자기부인이었습니다(막 8:34). 자기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조차도 기꺼이 유보하고 포기하는 자기부인의 모습을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기꺼이 감수한 것입니다.


가부장제 이상으로 조선사회를 떠받치던 기둥이 있습니다. 바로 신분제입니다. 이 신분제의 장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허문 사람이 있습니다. 선비의 고장 안동의 양반 이상동 장로입니다. 그의 개종은 잡지 ‘개벽’에 실릴 정도로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난후 양반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믿고 실천했습니다. 그가 개종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해방시킨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는 노비들을 보고 “내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에게 대대로 마당청소만 시켰구나”하고 회개하였고, 즉시 모든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내려 놓은 것입니다. 금산교회의 조덕삼 장로도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조덕삼은 조선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신봉하던 사람입니다. 조선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난 후,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요 주인으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산지방의 유지였던 조덕삼을 전도한 사람은 최의덕 선교사(L.B.Tate)와 김필수 조사였습니다. 예수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순간부터, 그는 예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재편합니다. 먼저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개방하여 예배모임을 갖도록 했습니다. 교인들이 늘어나자 조덕삼은 개종후 3년만에 자기 소유 과수원 땅을 내어놓았고 그곳에 5칸짜리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 예배모임에는 자신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도 함께 했습니다. 마부와 주인이 한 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로 부르며 함께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금산교회 초대교인으로서 학습과 세례도 함께 받았고, 1906년에는 집사임명을, 1907년에는 영수 임명도 함께 받았습니다. 영수는 장로보다는 조금 밑에 있는 직분으로서 교회의 모든 살림과 행정을 맡고, 목사와 장로의 부재시 설교까지 하는 주요한 직책입니다. 신분제의 위력이 여전히 강력했던 조선사회에서 집안의 주인과 종이 집사임명도 함께, 영수임명도 함께 받는다는 것은 종의 입장에서는 행복한 사건이겠지만, 주인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덕삼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장로선거였습니다. 최의덕 선교사는 만일 장로선거에서 조덕삼 영수가 떨어지게 되어 교회를 따로 세우면 어떡하나 걱정했습니다. 최의덕 선교사가 이런 걱정을 하게 된 이유는 실제 장로선거에서 떨어진 양반들이 그동안 출석했던 교회를 나가 새로운 교회를 세운 일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연동교회에서는 갖바치 출신 고찬익이 장로가 되고 양반이 낙선을 하자, 천민과 함께 예배를 드릴수 없다면 묘동교회를 세웠습니다. 승동교회에서도 양반이 떨어지고 백정출신인 박성춘이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들이 반발하여 소안동교회(현, 안동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만큼 양반과 천민의 간격은 좁혀지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최의덕 선교사는 이런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제1회 독노회 전라대리회에서 금산교회 장로 로 2명을 청원했습니다. 그래서 1908년에 장로선거를 하였는데, 투표결과 두 사람의 장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장로만 선택되었고 그것도 교회설립자요 지역 유지였던 조덕삼이 아닌 그 집 마부인 이자익이었습니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투표결과에 놀란 교인들이 웅성거리는 순간, 조덕삼은 교인들 앞으로 나갔습니다. 혹시나 폭탄선언을 하지나 않을까 잔뜩 겁먹은 교인들을 향해 조덕삼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마부는 장로가 되고, 자신은 떨어진 그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조덕삼의 인격과 신앙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다윗에 대한 사울과 요나단의 입장차이가 나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최고정적으로 바라보며 다윗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여 그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한 존재에 대해 상반된 반응이 나온 이유는 다윗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중심으로 다윗을 바라보았고, 요나단은 하나님나라를 중심으로 다윗을 바라보았습니다. 자기왕권을 중심으로 바라본 다윗은 최대정적이 되었고, 하나님나라 중심으로 바라본 다윗은 함께 힘을 모아 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할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신분제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동역자로 대했던 것입니다.


조덕삼의 이야기에 실과 바늘처럼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때 장로로 피택된 이자익입니다. 이자익은 조덕삼이 복음을 수용하기 전에, 그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면서 먼저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자익은 2세에 아버지, 12세에 어머니를 잃고 친척집에 맡겨져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17세에 조덕삼을 만나 그의 집에 마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조덕삼의 호의로 조덕삼의 아들 조영호와 함께 천자문을 공부하였고, 그로 인해 한문성경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자익은 1905년 5월에 최의덕 선교사의 주례로 전주서문교회에서 신부 김선경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첫 신방도 조덕삼이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자익은 1908년 3월 5일 장로로 장립받은 후, 매주일 낮, 저녁, 수요일 밤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지주 조덕삼 영수는 마부 이자익 장로의 설교를 경청하였고, 교인이 늘어나자 조덕삼 영수는 자신의 땅을 교회에 헌납하여 교회를 신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1년후 조덕삼 영수도 장로로 장립하게 되었고, 이자익 장로는 조덕삼 장로에게 교회를 맡기고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이때부터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가 신학공부를 하던 1년의 3개월 동안 강단을 맡아 설교했고, 이자익 장로의 학비며 가족의 생활비까지를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한 이자익 장로가 1917년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자, 조덕삼 장로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로 이자익 목사를 청빙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를 돈을 주어 신학공부를 하게 하고, 목사가 된 이후에는 자신의 교회로 청빙하여 섬긴 이 일은 세계교회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조덕삼 장로의 신앙이 얼마나 말씀안에서 철저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이자익 목사는 이후 장로교역사상 유일하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는 인물이 됩니다(1924년,1947년,1948년). 한국장로교가 어려웠던 시기에 세 번이나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을만큼 훌륭한 종으로 사역했던 것입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의 이야기를 보노라면, 과연 한국교회가 말씀안에서 온전히 성장하였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신분제의 위세가 강력했던 그때에도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엡 2:14) 주인과 종을 주안에서 동등한 존재로 대했던 한국교회가 신분제가 형식적으로 철폐된 오늘 이 시대에 더욱 깊고도 신실한 순종의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한국교회에서 인격과 신앙의 성숙됨 만으로 이자익과 같은 마부가 교회장로가 될 수 있을까요? 임직자선거에서 떨어지면 너무나 쉽게 다른 교회로 이동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조덕삼 장로가 보여준 신앙의 힘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렇게 유언하며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절대로 우상 섬기지 말고 제사는 지내지 마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 잘 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내가 죽었다고 해서 눈물 흘리지 말고 내가 즐겨 부르던 찬송을 불러주려무나.”자손들의 찬양소리를 들으며 1919년 12월 17일 52세의 나이로 그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2.2. 주기철(1897-1944, 오정모)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섬겼지만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겸하여 섬김, 그것이 이스라엘이 실패한 지점입니다. 기독교역사에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지점을 뛰어넘은 무수한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죽기까지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친 믿음의 인물들이 많습니다. 겸하여 섬김것을 유혹하는 음성을 단호히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진정한 돕는 배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부부가 있습니다. 바로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입니다.


주기철은 1897년 11월 25일 부친 주현성과 모친 조재선의 넷째 아들로 경남 창원군 웅천면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기복(基福)인데 1915년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기철(基徹)로 바꾸었습니다. 기철의 뜻은 ‘기독교를 철저하게 신앙한다’는 의미입니다. 1916년 7회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안질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오게 됩니다. 20세였던 1917년 10월 안갑수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었습니다. 1920년에는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던 사경회에 두 번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3월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주기철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신학교 기숙사는 같은 지방출신들끼리 지냈습니다. 이 모습이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됨과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한 주기철은 학교에 지방별 기숙사 제도를 없애고 모든 지방 학생들이 어울려 지내는 방식을 제안하였고, 학교는 주기철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로 다른 지역 출신 학생들이 학년별로 함께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주기철은 1925년 12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26년 1월 10일에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초량교회 목회기간동안 어려움을 당하는 교인들을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저축하였다가 서로 돕는 호상계를 조직하였고, 치리와 권징도 엄격하게 시행했습니다. 초량교회 당회록을 보면, 믿지 않는 자와 혼인한 것으로 인해 1년간 책벌을 하는 등 다양한 사유로 인한 치리와 권징 사례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권징의 목적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죄를 범한 지체의 진정한 회개를 바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말한 참된 교회의 세가지 표지에 비추어볼 때, 권징의 신실한 시행은 주기철 목사가 올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분투한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 목사는 1931년 8월에 6년 반 목회하던 부산 초량교회를 떠나 마산 문창교회로 부임합니다. 그리고 1936년 7월에 평양산정현교회로 부임하기까지 문창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마산 문창교회 사역기간동안 주목사에게 큰 슬픔이 있었는데 바로 부인 안갑수 사모가 1933년 5월 16일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일입니다. 나이든 노모와 어린 자녀들이 있던 상황에서 홀로된 주 목사는 1935년 11월 오정모(1903-1947) 집사와 재혼을 하게 됩니다. 문창교회 사역기간에 주목사는 여러곳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중 두 편의 주요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1933년 11월 평양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빙되어 “일사각오”라는 제목으로 행한 설교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1936년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에서 열린 장로교 목사수양회에서는 “목사직의 영광”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면 어떠한 때, 어떠한 곳, 어떠한 경우, 어떠한 사람에게라도 전하는 것이 목사이다. 제왕을 충간하는 자 목사이요, 대통령을 훈시하는 것이 목사이다. 목사는 이에 하나님 앞에 선 하나님의 대언자이다.”상황과 대상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신을 말씀선포자로 파송하신 하나님중심의 사역을 행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열망을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평양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시기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신사참배강요가 본격화된 시기입니다. 일제의 강요와 박해가 강력해질수록 주 목사의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 신앙도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고난의 시기, 주 목사의 확고한 신앙은 흔들리는 성도들을 굳세게 했습니다. 주 목사는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이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상이 무서워 배반하는 행동을 하자는 모독배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떠나가라...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가증스럽고 있을 수 없는 모독이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이런 주목사의 존재가 일제에게는 눈에 가시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6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 투옥시켜 온갖 고문과 회유로 그의 변절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주 목사는 “너희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제1계명을 온 존재를 다해 지켜내며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 충성심을 드러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신앙의 정절을 지켜내기 위해 온 존재를 다한 주기철 목사에 대해 평양노회가 목사직 파면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파면 이유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집단적 우상숭배에 빠진 교회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파면은 1997년 장로교 통합총회와 2006년 통합측 평양노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복적, 복권이 선포됨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해방이후 한국교회가 그토록 존경하고 추앙하던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1997년까지 여전히 목사직 파면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왜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즉각적으로 주기철 목사에 대한 복적, 복권을 선포하지 않았을까요? 그의 재판에 관여했던 이들, 일제에 협력하며 교회를 유지했던 이들이 해방후 한국교회의 어른역할을 하면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역사적 죄악들이 청산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기철 목사의 위대함은 그의 신실함에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때문에, 가족들 때문에 자신의 지조를 저버리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주목사는 6년의 세월동안 변함없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충성의 지조를 지켜냈습니다. 이것은 그의 부인 오정모 사모와 교회의 한마음 한뜻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 목사의 두 번째 부인 오정모 사모는 하나님이 기대하신 돕는 배필의 표상입니다. 많은 이들은 주기철 목사님이 오랜 세월 일제의 박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오정모 사모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오 사모는 여고의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던 중, 주기철 목사의 첫 부인이었던 안갑수 사모가 죽으면서 주 목사와 네 명의 자녀를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자 주 목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 3년 만에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서 나오면, 두 마디를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는 ‘승리요?’ 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감옥에 갈 준비를 하시오’ 입니다. 여기서 ‘승리요’는 감옥에서 ‘신앙승리를 했느냐’ 라는 말입니다. 감옥에 있는 주 목사를 면회할때도 가족들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주 목사는 목사의 길을 가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만일 당신이 신사참배를 허락하고 나오면 나와는 이혼할 것을 각오하고 나오시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다른 목사의 부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많은 사모들이 가족의 힘듦과 교회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이제 그만 일제와 타협하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오정모 사모는 현실논리에 자신의 신앙을 팔지 않았습니다. 잠시의 영광과 부귀를 위해 영원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자각하고 용기있게 실천한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기 전 날 감옥에서 마지막 면회를 할 때, 오정모 사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테니 목사님은 순교하시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삽니다.”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가 끝까지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아니하며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불의한 길을 도모하는 부부가 아닌, 신앙의 동지로서의 아름다운 부부의 삶을 산 것입니다.


일제의 패망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우상화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교회 뜰에 순교기념관과 주기철 목사의 동상을 세우고자 했을 때,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던 이도 오정모 사모입니다. 이유는“교인들이 주일날 예배드리러 교회에 왔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만을 찬양, 경배해야지 주목사가 그것을 가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유가족을 위해 땅을 사 주겠다고 했을 때에도, 김일성이 주 목사의 정신에 감복하여 금일봉과 적산가옥 문서를 주었을 때도, 주기철 목사를 면직했던 평양노회가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며‘주기철목사 순교기념예배’를 드리겠다고 했을 때에도 오정모 사모는 모든 제안들을 거절했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어떤 포상을 바라며 순교한 것이 아니며 사람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오정모 사모의 주치의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 본 장기려 선생은 “그의 신앙은 지금도 살아서 히브리서 11장에 추가될 인물 중 하나로 믿는다”며 그녀를 존경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일제와 타협하던 그 순간, 고난의 세월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킬 줄 알았고, 남편과 더불어 든든한 믿음의 동지가 되어 고난의 세월을 뚫고 전진하였던 인물, 정금같은 신앙의 정수를 보여준 이가 바로 오정모 사모입니다.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는 불의한 시대에 믿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말하는 오늘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우리 자신의 구원, 필요, 원함이 놓여져 있습니다. 내가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우상숭배는 자기숭배입니다. 자기숭배에 빠진 이들에게 예수는 온 존재를 다하여 따라야 할 길과 진리와 생명이 아닌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존재,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는 존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실패한 제자들의 모습처럼, 예수를 도구화 수단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절대주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충성의 삶을 살아낸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의 삶은 오늘 우리가 참 신앙의 길 위에 있는지를 돌아보도록 만듭니다. 이 성찰을 진중하게 받아들여 이기심과 탐욕의 세속주의가 만연한 이 땅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내는 일에 더욱 열과 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의 신앙과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산정현교회가 보여준 공동체적 저항의 모습입니다.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는 목사를 새로운 목사로 받아들이라는 총회와 일제의 요구에 대해 온 교인이 희생을 감수하며 힘 모아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1940년 3월 24일에 폐쇄처분을 받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의 손에 의해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교회의 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이때 교인들은 가정 단위로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공동체됨을 이어갔습니다. 교회공동체의 통일된 저항의 모습은 감옥에 있던 주기철 목사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모습에 교인들이 감동되고, 교인들의 모습에 주기철 목사가 감동하여 더욱 굳세게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간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 21일에 옥중순교를 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구속되기 전 “오(五)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여기서 오 종목의 기원이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노모와 처자,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입니다. 이 설교에서 주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그러나 어머니를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 팔십 넘으신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그의 신앙의 고백이요, 순교의 다짐입니다. 마지막 검속후 그를 찾아온 교인들에게 주 목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 내가 피하였다가 주님이 이 다음에 “너는 내가 준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일제에 협력하며 신사참배했던 목사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변명을 했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변명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상에게 절하면서까지 교회를 지키라고 명하셨습니까?. 세례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가는 일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기독교 역사 2천년을 비추는 거울같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흥하고자 했을 때, 최고의 권력을 향유하였을 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소멸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비우고 낮춘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뜻은 이 땅 가운데 구현되었고, 현실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저버리면서까지 지켜야 할 절대적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 존재가 되는 것,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참 신앙의 자세입니다.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그리고 산정현교회는 한마음 한뜻으로 그 신앙의 길을 걸어갔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2.3. 장기려(1911-1995)
장기려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장기려는 일상속에 구현된 순종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신앙인 한 사람의 탄생이 사회 전체를 얼마나 풍성하게 하는지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앞에서의 삶을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묘비에 있는 말처럼, 그는 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입니다.


장기려는 1911년 8월 14일에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의 둘째 아들로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를 5년간 다닌 뒤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합니다. 그가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의사 얼굴 한 번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그 다짐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다짐하기는 쉬우나 그 다짐에 걸맞게 평생을 살아가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장기려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다짐을 신실하게 지켜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다짐에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실수를 거울삼아, 평생 다시는 행하지 않겠다고 두 가지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다짐도 평생 지켜냈습니다. 다짐과 약속을 쉽게 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가 보여준 철저한 실천의 삶은 말의 무게와 약속의 신성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는 경성의전 재학시절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현실에 충실해서 현실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여야 하는 것인데 현실경시, 현실도피의 나의 생활은 나의 신앙이 건전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고 본다.”이때부터 장기려는 일요일과 교회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신앙을 뛰어넘어 현실에서 열매맺는 신앙을 추구한 듯 합니다.


장기려는 1932년 4월 9일 새문안교회에서 김봉숙과 결혼합니다. 1940년 9월에는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순수한 신앙과 함께 자신의 연구분야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겸비한 것입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평양에 있는 기홀병원에 원장으로 취임합니다. 1942년에는 ‘성서조선사건’으로 인해 12일간 평양 경찰서에서 구류를 당합니다. 그는 성서조선을 구독하면서 야나이하라의 “기독교 이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만일 누가 나에게 삶의 목적을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독교 이상주의로 살고 싶다고 대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글에서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를 가리켜 “이들은 현실에 의하여 이상을 삭감하려는 타협적 태도를 버리고, 이상에서 현실을 내려다보고 현실을 비판하고 규정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하였습니다. 장기려 스스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기독교 이상주의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또한 ‘성서로 본 일본’을 쓴 후지이 다케시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후지이 다케시는 “이 악한 세상에서는 진실한 인간의 생애는 패배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진실한 생애뿐이므로 이 세상에서의 패배자야말로 영원한 승리자”라 하였습니다. 일제말기 장기려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가 동방요배를 하고 예배를 드리자, 해방 이전까지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그는 신사에도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해방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폐쇄되었다가 해방후 다시 문을 연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으며 1948년에 장로장립을 받습니다. 1947년에는 김일성대학에 교수가 되었고,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상인 모범일꾼상을 수상하였으며 1948년에는 북한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이념적으로는 대립관계에 있었던 당국도 장기려의 실력과 정직함, 그 성실함을 인정한 것입니다. 장기려는 그의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통해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장기려는 공산치하에서 수술을 할 때에도 항상 기도를 했습니다. 김일성대학 수업시간에도 자신이 크리스쳔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명령하는 부학장에게 그럴수 없노라고 단호하게 맞서기도 했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장기려라는 한 사람의 크리스쳔이 어떤 존재로 비취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장기려는 1987년에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일주를 하게 됩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안기부가 장기려를 불러 북한이 납치하고자 하는 주요인물의 명단을 보여주었는데 장기려가 그 명단에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자신의 머리 뒤에 있는 혹과 관련하여 측근들에게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고 한마디 한 이후에 북한의 납치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장기수였던 이인모 선생이 북송될 때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 선생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50년 가까운 세월속에서도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 박사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기려는 한국전쟁 기간중 이산가족이 됩니다. 둘째 아들과 함께 월남한 장기려는 북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남한에서 평생을 홀로 지냈습니다. 정부에서 특별히 장기려 박사에게 아내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주었을 때 그는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가고 싶겠소. 그 사람들도 다 보내준다면 나도 갈 생각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절하겠소”라고 하며 특별호의를 거부했습니다.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을때는 “나는 매일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한에서 살 수 있다면 평양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사양하겠소”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월남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아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했다.”그 약속 그대로, 그는 매일 아내와 영적으로 교통하며 사랑의 신실함을 지켜냈습니다.


장기려는 월남 이후 1951년에 부산에서 복음의원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료병원으로 시작하였다가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자로 인해 4년째부터는 1인당 100환씩의 치료비를 받았습니다. 그는 복음의원 초창기부터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 적마다 오진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복음병원 운영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직원들의 월급을 가족수에 따라 차등지급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들 모두를 직원의 수로 포함하여 1/N의 월급을 지급한 것입니다. 그 결과 식구수가 같은 원장과 운전기사가 같은 월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명이라 여기며 맡기신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기꺼이 유보 내지 포기했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기부인을 한 것입니다. 부산 사람들은 복음병원에 갈 때마다 장박사에게 간다고 할 정도로 그의 헌신적 섬김과 실력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자기와 동일화시켜 진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병의 70%는 환자의 몸에서 생기는 기전으로 자연치유되기에 의사가 환자를 진실로 친철하게 대하기만 해도 유명한 의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쁜 병원생활속에서도 매월 하루는 무의촌 진료를 다녀왔습니다. 의사를 찾아오는 환자만 돌본 것이 아니라 찾아올 수 없는 환자를 친히 찾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준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고신교단이 복음병원을 장악하기 위해 병원 운영에 무능하다는 이유로 장기려 원장을 내쫓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정년을 70세에서 65세로 낮추는 무리수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장기려는 1976년 6월 25일 원장직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장기려의 의료사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이 1968년에 시작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입니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방황하던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처럼, 장기려는 병마의 고통속에서도 가난으로 인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목하였고, 그들을 돕기 위해 고민하던 중,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국가보다 먼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고자 한 그 마음을 주목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청십자(Blue Cross)는 1929년 미국 대공황 당시 실업자들을 위해 시행되었던 민간의료조합인데 이것을 보고 조합이름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라 정했습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마중물이 됩니다. 청십자의 구호는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입니다. 적은 돈이라도 모으고 협력하면 가난과 질병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제시, 이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 돈을 섬기든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맘몬의 지배로부터 탈출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의사로 살았지만 자신의 소유로 된 집도 없었고, 병원 옥상에 있는 옥탑방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죽었을 때 그의 총 재산은 통장의 천만 원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쓰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 지나치게 부유하게 사는 삶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는 무소유의 삶을 이상으로 여겼으며 간디를 닮고자 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도 늙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다소의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이런 장기려였기에, 그는 한국교회의 자본주의화에 대해 통탄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맘몬을 섬기고, 자본주의 원리로 운영되는 교회를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돈을 가지고 큰일을 하겠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권세와 지위와 명예와 사업의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이 맘몬과 타협한 결과로 얻게 된 열매는 아닌지를 반성하라고 했습니다.


장기려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 관한 책을 발간하자는 여러 제안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자신이 필요이상으로 높여지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 그의 동상을 만들고자 한다며 사진촬영을 하려고 할 때에는 “내 동상을 만드는 그 놈은 벼락을 맞아 죽어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삼간 사람입니다. 평생을 무소유와 무권력과 무명예로 살아온 그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철저히 금했습니다. 장기려에게는 세가지 행동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동기 없이는 언동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는,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잘못된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믿고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입니다. 이 행동원칙에 근거하여 그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것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이 식사제의를 했을 때에도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식사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과, 받은 편지에 대해 즉각 답장을 보내는 것, 꼼꼼하게 일기를 쓰는 모습속에서 장기려의 생활태도와 사람들에 대한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외형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 신분, 돈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목하여 그를 존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거지와도 겸상을 하였고, 입고 나갔던 겉옷을 거지에게 벗어주기도 했습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나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며 자신이 치료비를 대신 내어줄 수 있었던 것도, 외모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주목한 결과입니다.


장기려가 청빈과 겸손, 이웃사랑의 삶을 살 수 있었던 토대에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는 46세에 부산모임을 조직하여 신앙안에서의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였고, 이 모임에 월 1회는 함석헌을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부산모임의 사명 중 하나를 함석헌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전하는 일이라고 할 정도로 함석헌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민감하였는데 함석헌의 음성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함석헌의 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의 바로 그 한사람이 장기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기려는 함석헌 평생의 동역자요 재정후원자로 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평생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 장기려에게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교회는 통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대형교회나 대형집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는 1974년에 “이 형식과 타산 효용에 치중하고 위선과 허식을 용납하는 불진실의 기독교는 생명이 없는 까닭이다. 기독교는 새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글을 썼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충실한 공동체, 일상의 삶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신앙공동체를 그는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신앙공동체로 만난 곳이 ‘종들의 모임’이라는 소종파공동체입니다. 종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은 장기려가 편의상 지은 것입니다. 그는 1984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1987년을 끝으로 산정현교회를 떠나 이 모임에만 집중했습니다. 장기려가 평생을 함께한 제도권교회를 떠나 소종파공동체를 찾아갔다는 것은 기성교회에게는 충격이었고,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장기려가 끝까지 기성교회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한국교회안에서 끊임없이 모범적 신앙인으로 회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려가 제도권교회를 떠나 소종파공동체로 간 것으로 인해, 그는 한국교회안에서 언급해서는 안될 금기 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전향을 언급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손봉호 장로는 장기려의 새로운 신앙의 걸음에 대해 “한국교회 내에 예수 이름 빙자해서 자기 욕망 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나는 그런 점에서 장기려 박사가 제도 교회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순수성과 진실됨을 상실한 한국교회, 예수를 따르자는 말은 넘쳐나지만 실제의 삶속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도 결단도 보이지 않는 한국교회, 구제와 봉사는 많이 하지만 자신이 누리는 삶이 침해받지 않는 범위안에서만 순종을 행하는 한국교회, 하나님을 믿는다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물신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교회를 보면서 탄식하였고 노년에 새로운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하였던 그가 인생에 마지막에 선택한 것이 한국교회를 떠나 소종파공동체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은 오늘 한국교회의 현 주소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거울같이 느껴져 참으로 서글프게 다가옵니다.


장기려는 한국교회의 개혁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외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면서 거대한 교회건물을 건축하는 것을 신앙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맘몬주의, 즉 물신숭배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물신에 지배받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받는 교회로 전환되기를 그는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개혁은 개인의 삶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겸손한 삶을 통해 높아진 한국교회의 문제가 지적되고, 청빈한 삶을 통해 부유해진 한국교회가 변화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을 지식이나 이론이 아닌 실천이자 현실에 대한 태도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행한 설교에서 “예수님의 구원을 믿기만 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실까 두렵다”고 할 정도로 그는 오직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인격적 존재자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히 되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나라의 국민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장기려는 “성공적 삶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사명을 자각하고, 어떠한 경우에서도 그 결심을 변치 않고, 실천 매진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처럼 그는 성공적 삶을 산 인물입니다. 이만열 장로는 장기려에 대해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기를 원하셨던 분, 이 민족의 분단의 상처를 가장 진지하게 지고 가신 분, 젊었을 때부터 그는 의료를 통해 예수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였다.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일시적인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다”고 했습니다.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새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 한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것은 그의 소천 두 달 전에 자신의 묘비에 써 달라고 아들에게 건넨 유언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 아니라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 그의 삶은 그래서 더욱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3. 결론
성령의 기운으로 충만했던 영성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의 삶이 이웃과 사회에 밝은 빛을 비추고 유익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신앙이 공공선인 이유입니다. 참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단계를 뛰어넘어 이 시대의 예수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과 다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구현하는 하나님의 지상대리자로 부름받았음을 기억하며 맡겨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주장이 아닌 우리의 삶이 우리가 진정 누구를 구원자요 주인으로 믿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주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셨음을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종교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시체도난설, 예수가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스스로 무덤에서 나왔다는 기절설 등으로 제자들의 주장을 제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삶을 그들이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해 삼년이나 모셨던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은 너의 것과 나의 것의 경계를 허물고 물질을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제자들은 변하였고, 변화된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곧 우리의 신앙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교회다움의 모습이 무엇인지, 당신들이 믿는 신앙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예수를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구체적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대적자들의 이러한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긴장감을 갖도록 합니다. 말이 아니라 행위로서, 오늘 우리는 구체적 신앙의 모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에는 무엇이 충만해 있습니까? 말씀으로 충만합니까? 우리의 순종을 도우시는 성령으로 충만합니까? 아니면 세속의 가치, 세속의 욕망, 과시욕으로 충만합니까? 우리 각자에게는 무엇이 충만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삶속에서 현실이 되기를 우리는 얼마나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그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믿음의 분투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 후, 예수를 따르기 위해 어떤 자기부인을 하였습니까? 우리가 참된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여 대적자들의 조롱을 받게 될 때, 실상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자녀로 인해 부모가 지탄을 받듯, 그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경외를 받지 못하시고 도리어 조롱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가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도 있고, 조롱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첫 머리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순종하는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진정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현장속에서 복음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와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졌는지를 증거해야 합니다. 영성의 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 세속의 가치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생에 걸쳐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과만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에 그들의 삶은 이웃을 위한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들의 걸음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원하는 우리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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