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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자의 마음(갈라디아서 1:4-1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는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라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랑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오늘은 10월 31일입니다. 바로 종교 개혁일입니다. 동시에 465주년을 맞는 종교 개혁 주일이기도 합니다.
신교를 가리켜 영어로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이 말은 프로테스트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항의한다", 혹은 "반대한다" "저항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신교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저항적인 무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는 구교회로부터 신교인들이 그 구교회의 권위를 반대하고 그리고 저항하고 나섰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하는 말로 좋지 않게 불려졌던 것이나, 이제 신교인들은 "반대하는 무리"라고 하는 그 말의 뜻을 그대로 명예롭게 받아들여 프로테스탄트, 곧 저항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형성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과일 중에도 제일 맛있는 것을 잡수시려고 한다면 부득이 그 가운데 벌레가 먹은 것을 잡수셔야 합니다. 물론 공해 문제도 있지만 벌레가 먼저 맛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이 맛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공산당이 제일 싫어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건 공산주의자들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공산주의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신교인입니다. 신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3․1운동 때에도 많은 우리 국민이 일본 정부, 혹은 일본 정책을 반대해서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순국한 사람들, 이 일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까 90퍼센트가 신교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교인은 하나하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이 우리 신교인을 제일 싫어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항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이것이 신교인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무엇을 위해서 저항하는가? 무엇을 저항하고 있는가? 혹은 그 저항하는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50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개혁은 있어야 합니다. 개혁적 세계관 또 개혁적인 신앙, 이것이 우리의 특성입니다.
개혁은 곧 변화를 의미합니다.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특히 생명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썩지 않으면 성장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둘 다 변합니다. 생명이 죽었을 때는 썩어지는 변화가 있고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어려운 여건을 뚫고 저항해 가면서 성장하는데 그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이고 피동적인 자연적 변화는 부패입니다. 그것은 타락입니다. 그러나 의식이요 창의적이요 그리고 적극적인 변화. 이 선택적인 변화, 자발적인 변화 그것은 개혁입니다. 생명은 항상 사망과 더불어 싸우고, 생명은 썩어짐과 더불어 싸우고, 생명은 계속적으로 부패와 더불어 싸워 가면서 생명됨을 나타내고 성장하는 것이 그 특성입니다.
개혁 혹은 저항이라고 하는 것을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소화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을 위한 부정입니다. 이 저항은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우기 위하고, 건설하기 위해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혁은 옛 것을 무작정 치워버리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원을 살펴보면 개혁이라는 말은 옛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옛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개혁입니다. 아는 중에 모르는 중에 벌써 의미가 바뀌어졌고 본래의 목적에서 떠났습니다. 그런고로 첫 사랑으로, 첫 마음으로, 첫 동기로, 처음 세웠던 목적으로, 그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복음이 들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상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그 다른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냐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서 전체에 나타난 뜻으로 미루어보아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공로주의, 그리고 인본주의, 형식주의, 의식주의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하나님께로 나가고자 하는 그 마음이 "다른 복음"인 바 이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가짜는 언제나 진짜보다 좋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은 여기 있습니다. 이런 다른 복음이, 이런 비진리가 가만히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4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여러 곳에서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소식 없이 스며들어서 그 복음 진리를 왜곡케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작은 순수했는데 이제 나아가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출발은 아름다웠는데, 출발된 그 마음 그 뜻대로 계속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바뀌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지적합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와서 왜 이렇게 하려는 것이냐? 다시 말하면 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율법으로 마치느냐?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왜 사랑으로 끝내지 못하느냐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목적을 분명히 하지 못할 때 마침내 방법이 목적을 배신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시 원래의 목적, 원래의 동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개혁자의 마음은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순순한 복음, 깨끗한 복음 이것이 개혁자의 의도하는 바입니다.
개혁자의 대표인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을 두 번 썼습니다.
그 두 권의 주석을 대조하면 더 깊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바로 순수한 복음입니다. 오직 십자가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거듭 거듭 강조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복음은 오직 예수요,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 확실한 신앙에 서 있습니다. 이 복음의 절대성을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말씀까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확신은 놀라운 것입니다. 내가 믿고 내가 전하는 것, 이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하든가 다른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 그 절대적인 확신이 끝없이 부럽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적어도 이 복음에 관한 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사고는 자칫 잘못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다는 독선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복음을 객관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리고 8절에 보니까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했습니다.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여기에 "우리"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까지도" 그 말입니다. "내가 전에 전한 그 순수한 복음이 있는데, 이제 나라도 그 외에 딴 소리를 한다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복음의 절대성, 복음의 순수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언제나 절대화될 때만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절대화될 때에 행복이 있습니다. 진리도 절대화될 때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때는 아무 일도 되는 법이 없습니다. 때로는 고집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절대적 확신, 이 속에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인이 처절할 정도로 나약한 생을 사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상대주의 때문입니다. 대답은 언제나 "글쎄요" 뿐이니까요. 이렇다, 저렇다, 'yes' or 'no'가 분명치를 않습니다. 그저 "글쎄요" 하고 대답해 버립니다. 바로 그러한 상대주의 때문에, 그러한 희미한 생각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재판을 받는 그 위험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호소한 것을 여러분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갖은 말로 그를 정죄하고 있는 여러 가지 비난 속에 생명을 가름하는 재판정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Oh God, here I stand) 얼마나 굉장합니까? 하나님은 내 편에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란 말입니다. 내가 믿는 바가 그대로 복음이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면 이 자리에서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종교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그들은 생명을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니엘도 그리고 그 친구들과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한결같이 이 길을 갔습니다. 이러한 신앙에만 순교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 의하면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사람, 이런 개혁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부득불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확실한 믿음에 선 사람의 관심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오직 의에 있었습니다. '의' 그들의 관심은 물질이 아니요, 장수도 건강도 영화도 출세도 아닙니다. 오직 "의롭다 하심" 그것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것이 '의' 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가난해도 좋고 병들어도 좋습니다. 다만 관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즉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의롭게 되기 위하여는 그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로도 아니요, 고행도 아니요, 선행도 아니었습니다. 신비적인 체험도 아니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에 적이 둘 있었습니다. 사상적으로 볼 때 하나는 이상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신비주의였습니다. 그 당시 재세례파라고 하는 신비주의가 있었습니다. 루터에게는 이 둘이 다 원수입니다. 둘 다 적입니다. 이성주의도 인간을 중심한 인간의 이성이며 이성 중심이요, 신비주의도 내가 경험하는 바를 절대화하는 내 경험에 준한 하나의 주관주의입니다. 그러기에 루터의 판단은 이렇습니다. 이성주의도 신비주의도 둘 다 인본주의라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 그 계시하신 의를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결코 선행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사를 받는 그릇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그는 믿음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겸손을 말하고 또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힘이 생기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의를 힘입어서 그 용기가 생깁니다.
그에게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주는 용기가 아닙니다.
의가 주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기만 하면 이제 나는 가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보장이었습니다. 소원도 이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기만 한다면 어떤 실패도 어떤 환난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에만 계시다면, 하나님이 나를 옳다 하시기만 하면, 그는 그대로 어떤 역경이라도 겪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교만해서 그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을 회개나 혹은 믿음에서 찾지 않고 자기들의 혈통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랍비들은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귀족이다. 이스라엘 중에는 지옥 갈 사람이 없다.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망상입니다. 어떠한 자기 의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어떤 혈통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어떠한 과거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십자가의 계시를 믿고 나아갈 때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나아가는 그 '의',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 그 '의', 십자가 안에 계시된 그 의를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하나님이 의롭다 하면 끝난 것이지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이것이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그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슬프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어떤 제도에 대하여 그는 항거했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법, 사람의 관습을 초월해야 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라"하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내가 기쁨을 구할 것이냐, 하나님에게서 기쁨을 구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그만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에서 오는 그 기쁨, 이것만을 유일한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 다 나를 정죄해도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그만입니다. 세상 사람 누가 나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재판정에 나가고자 하는 루터에게 그 친구가 말렸습니다. 그 때에 루터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볼름스의 모든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쁨을 주면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른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저항은 생명의 표식입니다. '의'를 따르고자 하여 불의에 항거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비진리에 항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의'를 부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완전히 힘입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십자기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힘이요, 용기요, 생명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갈 때 이 개혁자와 함께 하시고, 이 개혁적 신앙을 가진 자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면 큰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의와 불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이런 혼탁한 세대에 사는 저희들, 내가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미처 생각지 못하는 저희들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하오니 이 시점에 서서 내가 본래에 출발했던 그 믿음으로 향하고 있는지, 또 본래에 시작했던 그 목적과 일치한 길을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게 하시고, 주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주의 거룩한 의에 따라서 진정으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하시고, 먼저 간 믿음의 조상들을 따라서 개혁적인 신앙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와 이 세대를 개혁할 수 있는 개혁적인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개혁자의 마음(갈라디아서 1:4-1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는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라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랑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오늘은 10월 31일입니다. 바로 종교 개혁일입니다. 동시에 465주년을 맞는 종교 개혁 주일이기도 합니다.
신교를 가리켜 영어로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이 말은 프로테스트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항의한다", 혹은 "반대한다" "저항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신교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저항적인 무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는 구교회로부터 신교인들이 그 구교회의 권위를 반대하고 그리고 저항하고 나섰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하는 말로 좋지 않게 불려졌던 것이나, 이제 신교인들은 "반대하는 무리"라고 하는 그 말의 뜻을 그대로 명예롭게 받아들여 프로테스탄트, 곧 저항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형성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과일 중에도 제일 맛있는 것을 잡수시려고 한다면 부득이 그 가운데 벌레가 먹은 것을 잡수셔야 합니다. 물론 공해 문제도 있지만 벌레가 먼저 맛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이 맛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공산당이 제일 싫어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건 공산주의자들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공산주의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신교인입니다. 신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3․1운동 때에도 많은 우리 국민이 일본 정부, 혹은 일본 정책을 반대해서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순국한 사람들, 이 일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까 90퍼센트가 신교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교인은 하나하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이 우리 신교인을 제일 싫어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항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이것이 신교인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무엇을 위해서 저항하는가? 무엇을 저항하고 있는가? 혹은 그 저항하는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50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개혁은 있어야 합니다. 개혁적 세계관 또 개혁적인 신앙, 이것이 우리의 특성입니다.
개혁은 곧 변화를 의미합니다.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특히 생명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썩지 않으면 성장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둘 다 변합니다. 생명이 죽었을 때는 썩어지는 변화가 있고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어려운 여건을 뚫고 저항해 가면서 성장하는데 그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이고 피동적인 자연적 변화는 부패입니다. 그것은 타락입니다. 그러나 의식이요 창의적이요 그리고 적극적인 변화. 이 선택적인 변화, 자발적인 변화 그것은 개혁입니다. 생명은 항상 사망과 더불어 싸우고, 생명은 썩어짐과 더불어 싸우고, 생명은 계속적으로 부패와 더불어 싸워 가면서 생명됨을 나타내고 성장하는 것이 그 특성입니다.
개혁 혹은 저항이라고 하는 것을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소화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을 위한 부정입니다. 이 저항은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우기 위하고, 건설하기 위해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혁은 옛 것을 무작정 치워버리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원을 살펴보면 개혁이라는 말은 옛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옛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개혁입니다. 아는 중에 모르는 중에 벌써 의미가 바뀌어졌고 본래의 목적에서 떠났습니다. 그런고로 첫 사랑으로, 첫 마음으로, 첫 동기로, 처음 세웠던 목적으로, 그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복음이 들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상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그 다른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냐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서 전체에 나타난 뜻으로 미루어보아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공로주의, 그리고 인본주의, 형식주의, 의식주의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하나님께로 나가고자 하는 그 마음이 "다른 복음"인 바 이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가짜는 언제나 진짜보다 좋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은 여기 있습니다. 이런 다른 복음이, 이런 비진리가 가만히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4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여러 곳에서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소식 없이 스며들어서 그 복음 진리를 왜곡케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작은 순수했는데 이제 나아가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출발은 아름다웠는데, 출발된 그 마음 그 뜻대로 계속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바뀌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지적합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와서 왜 이렇게 하려는 것이냐? 다시 말하면 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율법으로 마치느냐?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왜 사랑으로 끝내지 못하느냐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목적을 분명히 하지 못할 때 마침내 방법이 목적을 배신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시 원래의 목적, 원래의 동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개혁자의 마음은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순순한 복음, 깨끗한 복음 이것이 개혁자의 의도하는 바입니다.
개혁자의 대표인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을 두 번 썼습니다.
그 두 권의 주석을 대조하면 더 깊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바로 순수한 복음입니다. 오직 십자가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거듭 거듭 강조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복음은 오직 예수요,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 확실한 신앙에 서 있습니다. 이 복음의 절대성을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말씀까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확신은 놀라운 것입니다. 내가 믿고 내가 전하는 것, 이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하든가 다른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 그 절대적인 확신이 끝없이 부럽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적어도 이 복음에 관한 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사고는 자칫 잘못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다는 독선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복음을 객관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리고 8절에 보니까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했습니다.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여기에 "우리"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까지도" 그 말입니다. "내가 전에 전한 그 순수한 복음이 있는데, 이제 나라도 그 외에 딴 소리를 한다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복음의 절대성, 복음의 순수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언제나 절대화될 때만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절대화될 때에 행복이 있습니다. 진리도 절대화될 때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때는 아무 일도 되는 법이 없습니다. 때로는 고집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절대적 확신, 이 속에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인이 처절할 정도로 나약한 생을 사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상대주의 때문입니다. 대답은 언제나 "글쎄요" 뿐이니까요. 이렇다, 저렇다, 'yes' or 'no'가 분명치를 않습니다. 그저 "글쎄요" 하고 대답해 버립니다. 바로 그러한 상대주의 때문에, 그러한 희미한 생각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재판을 받는 그 위험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호소한 것을 여러분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갖은 말로 그를 정죄하고 있는 여러 가지 비난 속에 생명을 가름하는 재판정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Oh God, here I stand) 얼마나 굉장합니까? 하나님은 내 편에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란 말입니다. 내가 믿는 바가 그대로 복음이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면 이 자리에서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종교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그들은 생명을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니엘도 그리고 그 친구들과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한결같이 이 길을 갔습니다. 이러한 신앙에만 순교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 의하면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사람, 이런 개혁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부득불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확실한 믿음에 선 사람의 관심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오직 의에 있었습니다. '의' 그들의 관심은 물질이 아니요, 장수도 건강도 영화도 출세도 아닙니다. 오직 "의롭다 하심" 그것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것이 '의' 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가난해도 좋고 병들어도 좋습니다. 다만 관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즉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의롭게 되기 위하여는 그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로도 아니요, 고행도 아니요, 선행도 아니었습니다. 신비적인 체험도 아니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에 적이 둘 있었습니다. 사상적으로 볼 때 하나는 이상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신비주의였습니다. 그 당시 재세례파라고 하는 신비주의가 있었습니다. 루터에게는 이 둘이 다 원수입니다. 둘 다 적입니다. 이성주의도 인간을 중심한 인간의 이성이며 이성 중심이요, 신비주의도 내가 경험하는 바를 절대화하는 내 경험에 준한 하나의 주관주의입니다. 그러기에 루터의 판단은 이렇습니다. 이성주의도 신비주의도 둘 다 인본주의라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 그 계시하신 의를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결코 선행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사를 받는 그릇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그는 믿음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겸손을 말하고 또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힘이 생기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의를 힘입어서 그 용기가 생깁니다.
그에게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주는 용기가 아닙니다.
의가 주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기만 하면 이제 나는 가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보장이었습니다. 소원도 이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기만 한다면 어떤 실패도 어떤 환난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에만 계시다면, 하나님이 나를 옳다 하시기만 하면, 그는 그대로 어떤 역경이라도 겪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교만해서 그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을 회개나 혹은 믿음에서 찾지 않고 자기들의 혈통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랍비들은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귀족이다. 이스라엘 중에는 지옥 갈 사람이 없다.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망상입니다. 어떠한 자기 의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어떤 혈통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어떠한 과거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십자가의 계시를 믿고 나아갈 때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나아가는 그 '의',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 그 '의', 십자가 안에 계시된 그 의를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하나님이 의롭다 하면 끝난 것이지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이것이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그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슬프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어떤 제도에 대하여 그는 항거했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법, 사람의 관습을 초월해야 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라"하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내가 기쁨을 구할 것이냐, 하나님에게서 기쁨을 구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그만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에서 오는 그 기쁨, 이것만을 유일한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 다 나를 정죄해도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그만입니다. 세상 사람 누가 나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재판정에 나가고자 하는 루터에게 그 친구가 말렸습니다. 그 때에 루터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볼름스의 모든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쁨을 주면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른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저항은 생명의 표식입니다. '의'를 따르고자 하여 불의에 항거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비진리에 항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의'를 부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완전히 힘입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십자기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힘이요, 용기요, 생명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갈 때 이 개혁자와 함께 하시고, 이 개혁적 신앙을 가진 자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면 큰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의와 불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이런 혼탁한 세대에 사는 저희들, 내가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미처 생각지 못하는 저희들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하오니 이 시점에 서서 내가 본래에 출발했던 그 믿음으로 향하고 있는지, 또 본래에 시작했던 그 목적과 일치한 길을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게 하시고, 주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주의 거룩한 의에 따라서 진정으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하시고, 먼저 간 믿음의 조상들을 따라서 개혁적인 신앙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와 이 세대를 개혁할 수 있는 개혁적인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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