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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 참된 미덕의 본질

by 【고동엽】 2007. 7. 5.
 

참된 미덕의 본질 |

<참된 미덕의 본질>을 오랜만에 읽어 보았다. 그리고 참된 미덕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참된 미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호의(benevolence)이다. 호의는 대상성이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누구에 대한 호의인가? 그것은 존재 자체와 호의 자체에 대한 호의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호의이다. 존재 자체란 하나님을 말한다. 호의 자체란, 호의를 가지고 있는 대상 자체를 말한다. 호의란 쉽게 말하면 무조건적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참된 미덕이란,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며, 성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참된 미덕의 참 소유주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참된 미덕이 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 참되 미덕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조건으로 사랑한다. 또한 성령을 받은 성도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는 직접적인 성령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즉, 참된 미덕은 하나님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편적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을 만족적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거듭나지 않은 성도는 참된 미덕이 없다. 참된 미덕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후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갖게 되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한편 참된 미덕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다. 아름다움 자체는 하나님이시고, 거듭난 성도는 아름다움을 소유한 대상이 된다.

 

정리하자면, 미덕은 도덕적인 아름다움이다. 18세기 도덕론자들은 참된 미덕을 호의라고 보았다. 즉, 참된 미덕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보았으며, 인류에게 이러한 무조건전인 사랑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그런 난관론자의 허술한 논리를 단번에 무너뜨렸다. 즉, 인간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다.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하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애국심 등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 즉 도덕적 아름다움은 오직 하나님만 소유하고 계신다고 보았다. 즉, 도덕적 아름다움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천이시기 때문에 참된 미덕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참된 미덕은 그런 면에서 거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흘러나온 참된 미덕은 회개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성령의 내주함을 체험한 성도에게 성령의 열매로서 나타난다. 참된 미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참된 미덕을 소유할 수 없다. 기껏해야 일반 계시 차원에서의 제한적인 미덕을 소유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에는 참여할 수 없으므로, 거룩한 속성이 없다.

 

<참된 미덕의 본질> 에서 참된 미덕의 본질의 개념이 제시된다. 이 책은 1장만 독해를 해낸다면 그 다음부턴 수월하게 넘어간다. 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다. 그래서 1장 전체를 타이핑 해보니 개념이 많이 정리가 되었다.

 

<참된 미덕의 본질 > ‘1장 참된 미덕이란 무엇인가’, 부흥과 개혁사, pp. 21-35.

 

미덕이란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말한다

1. 미덕의 본질에 대한 많은 논쟁과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미덕과 악덕과 참된 차이를 부정하는 일부 회의론자 외에는 모든 사람이 미덕이라는 말을 무언가 아름다운 것, 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나 탁월함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모든 아름다움을 미덕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건물이나 꽃이나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미덕이라 하지는 않는다. 지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 속에 있는 어떤 아름다움을 미덕이라 부른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모든 아름다움을 미덕이라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얼굴이나 신체의 외적 아름다움이나 동작의 우아함이나 목소리의 좋음을 미덕이라 부르지 않는다. 미덕이란 본래의 마음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러나 마음의 모든 아름다움을 미덕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해와 사색의 아름다움도 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나 정치가의 사상과 개념 속에는 아름답다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미덕이라 불리는 것과는 다르다. 미덕이란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만한 덕성과 관련된, 심성 내지 심리 작용의 아름다움이다. 미덕이란 단순히 사색만 아니라 성향과 의지, 혹은 사람들의 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마음heart'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미덕이란 아름다운 심성 내지 마음 씀씀이 또는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라고 말해도 상식에서 벗어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참된 미덕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질문해 보자. 이것은 마음이 가진 어떤 경향성이나 성향, 혹은 실처능ㄹ 참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참된 미덕은 부분적인 관점에서만 미덕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2. 내가 ‘참된’ 미덕이나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참으로 덕스러운 어떤 것들과 부분적이고 피상적인 관점을 통해 단지 덕스럽게 보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나 성향을 부분적이며 피상적으로 보거나 특수한 면이나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해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지만 더 넓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수도 있다. 어떤 행동이나 성향을 넓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행동이나 성향의 온전한 특성과 전체와의 관련성 정도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참된 미덕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말한다

3. 아름다움에는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특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내가 말하는 ‘특수한’ 아름다움이란 제한된 사적인 영역속에 어떤 특수한 것들에 대한 관계와 성향만을 고려할 때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보편적’ 아름다움이란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연관성 속에서, 또 그것이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성향을 고려하면서, 가장 완전하고,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관찰했을 때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수한 아름다움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가지지 않은 채로 존재할 수도 있고, 심지어 보편적 아름다움과 반대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어떤 곡조 속에 있는 몇몇 가락이 그 자체만으로는 화음을 낼 수 있지만, 그 곡의 전체 악보를 고려했을 때, 혹은 전체 소리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불협화음을 이루고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이에 대해 나중에 더 언급하겠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참된 미덕이란 지성적인 존재의 마음에 속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운 것 혹은 포괄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운 것을 말한다. 즉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것이 연관된 모든 것과 관련하여 보았을 때도 아름다운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참된 미덕의 본질에 대해 우리가 질분할 때-즉 마음의 이런 참되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가장 본질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참된 미덕은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에 있다

4. 참된 미덕이란 가장 본질적으로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적 사랑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된 미덕은 보편 존재에 대한 마음의 동의, 성향, 연합이다. 동의, 성향, 연합 등은 보편젂 호의 속에서 즉시 행사된다.

 

참된 미덕은 보편 존재에 대한 일치와 연합이다

5.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참된 미덕의 본질에 대한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참된 미덕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고, 그리고 가장 포괄적인 관점에서, 그것이 보편적인 성향 속에서, 그것이 연관된 모든 것과의 관련 속에서 마음의 성향과 실천의 보편적 선이요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보편존재에 대한 동의와 호의 외에 무엇이겠는가? 아름다움은 불일치와 부조화 속에서 존재하지 않고, 일치와 동의 속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만일 모든 지성적인 존재가 보편 존재에 어떻게든 관련되어 있으며 보편적인 존재계의 한 부분이라면, 그래서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 지성적 존재의 보편적이고 참된 아름다움이란 커다란 전체에 대한 연합과 동의 외에 무엇이겠는가?

 

참된 미덕은 특정 집단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6. 어떤 특정한 존재나 집단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연합하고, 단지 전체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사적인 단체나 집단에 대해서는 사랑을 나타내면서, 커다란 전체 조직에 대해서는 연합하지 않고, 보편 존재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것을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도 어떤 면만 보았을 때는 선하게 보일 수도 있고, 사물을 보는 제한되고 좁은 관점에서는 아름답게 나타날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살펴보겠다.

 

미덕은 본질적으로 사랑이다

7. 미덕이 가장 본질적으로 사랑에 있다는 것은 성경이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기독교 신학자들뿐 아니라 사려 깊은 이신론자들도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사려 깊은 작가들도 미덕은 일반적으로 호의적 사랑 혹은 친절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작가들이 그렇게 정의할 때에 그 의미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주제에 대한 논의에서 어떤 착오와 혼동이 생긴다.

 

참된 미덕은 본편 존재에 대한 사랑에 있다.

8. 내가 참된 미덕은 보편 존재에 대한 사랑에 있다고 말할 때, 어떤 마음의 작용이나 사랑의 발휘도 보편 존재, 즉 보편적 실존의 거대한 체계를 그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참된 미덕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한 특정 존재에 대한 어떤 사랑 또는 친근한 애정의 발휘도 참된 미덕의 본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참된 미덕의 본질은 분명 본편 존재를 향한 호의적 사랑의 성향에 있다. 비록 이런 보편 존재에 대한 사랑의 성향에서부터 사랑할 대상이나 상황이 주어질 때 개별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보편적인 호의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이 잘 알고 가까이 지내며 자신의 호의적 성향을 가장 크게 자주 발휘하게 되는 특정인이에게 더 호의적인 감정으로 마음을 움직이기 쉬우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특정한 사람 내지 존재에 대한 애정도 일반적으로 호의적인 기질, 즉 본편 존재에 대한 사랑의 성향이 있는 그런 마음의 습성 내지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참된 미덕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보편 존재는 지성적인 보편 존재다

9. 내가 지성적인 존재가 보편 존재에 마음으로 연합하고 호의를 가진다고 할 때, 이 보편 존재가 ‘지성적인’ 보편 존재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생물 또는 지각이나 의지가 없는 존재들은 정확한 의미에서 호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호의적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과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10. 사랑은 일반적으로 호의적 사랑과 만족적 사랑으로 구별된다. 호의적 사랑은 대상의 유익을 구하고, 대상의 행복을 바라고, 대상의 행복 속에서 즐거워하는 마음의 감정이나 성향을 말한다. 그리고 만일 내가 잘못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상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 항상 이런 호의의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실존 자체를 아름다움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의 유익을 바라는 호의나 성향 것이 있다.

 

신적 존재 속에 속에 있는 호의나 선하심은 많은 대상의 아름다움에 선행할 뿐 아니라, 그 대상들의 실존보다 앞선다. 하나님의 호의나 선하심이 그 대상들의 실존이나 아름다움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그 대상들의 실존이나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호의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대상들에게 존재와 아름다움을 준다. 그래서 만일 모든 미덕이 주로 존재에 대한 마음의 사랑이어서 자비심, 즉 그 존재의 유익을 위하는 마음으로 발휘된다면, 하나님의 미덕은 실제로 존재하며 실제로 아름다운 존재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름다움과 행복을 베푸실 마음을 품을 만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까지도 아우르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지금 특별히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호의가 반드시 대상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족적 사랑은 상대방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11.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족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룸다움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만족적 사랑은 바로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며 대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존재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덕은 대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12. 만일 미덕이 지성적 존재의 아름다움인 동시에 사랑 안에 있다면, 미덕이 일차적으로 대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대상을 사랑하는 어떤 사랑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즉 대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대상을 좋아하는 만족적 사랑이든지, 혹은 대상이 성취할 아름다움을 사랑의 기초로 삼는 호의적 사랑이든지 간에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적 존재들의 아름다움, 즉 미덕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라고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덕이 무엇보다 미덕에 대한 사랑이라고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순이며, 순환 논리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덕 혹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미덕이 발생하는 기초 혹은 최초의 동기로 만들기 때문이자. 다시 말하면, 첫 번째 미덕을 미덕의 결과 혹은 효과라고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 번째 미덕으로 하여금 기초도 되고 결과도 되게 하는 것이며, 원인도 되고 효과도 되게 하는 것이다. 의심할 열지 없이 이덕은 미덕의 어떤 효과나 결과 외에 다른 것에 달려 있다. 만일 미덕이 무엇보다 미덕에 대한 사랑이라면, 미덕 즉 사랑받는 바로 그 미덕은 미덕에 대한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덕은 미덕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만일 누가 그것의 미덕이 미덕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게 하는 그 미덕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미덕에 대한 사랑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미덕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무한대로 계속된다. 왜냐하면 이 순환 고리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시작이나 어떤 기초에도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도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덕은 대상의 아름다움을 기초로 하는 사랑이 아니다

13. 그러므로 만일 미덕 또는 마음의 아름다움의 본질이 사랑이나 사랑의 성향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대상을 종하는 만족적 사랑이나, 대상이 성취할 아름다움을 사랑의 기초로 삼는 호의적 사랑과는 다른 것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미덕이 무엇보다 미덕 자체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미덕을 미덕 자체보다 앞에 두는 것이 된다.

 

미덕은 받은 호의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14. 미덕은 일차적으로 감사에도 있지 않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받은 호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에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것도 똑같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원인이 되는 감사에 선행하는 호의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호의, 혹은 그것 앞에 아무것도 선행하지 않는 호의는 어떤 호의에 대한 감사일 수가 없다.

 

미덕의 일차적 대상은 존재 자체다

15. 그러므로 남은 결론은 미덕의 일차적인 대상은 존재 자체(Being, simply considered)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된 미덕은 일차적으로 어떤 개별 존재들이 가진 미덕이나 아름다움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미덕은 존재 자체에 대한 마음의 일치와 연합이며, 말하자면 보편 존재에 대한 절대적 호의(absolute benevolence)다. 참된 미덕은 ‘일차적으로’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가 이 절대적 호의 외에 다른 사랑 속에는 어떤 참된 미덕도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있어서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래에서 그 개별적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미덕은 일차적 대상은 존재 자체다

16. 덕스러운 호의의 일차적 대상은 존재 자체다. 그리고 만일 존재 자체가 호의의 대상이라면 보편 존재가 호의의 대상이다. 또한 호의의 궁극적인 성향은 봎녀 존재의 최고선이다. 그리고 그 호의는 개별적 존재의 선이 보편 존재의 최고선과 일치한다면 모든 개별적 존재의 선을 추구할 것이다. 개별적 존재나 어떤 존재들의 최고선과 불일치하는 경우에는 보편 존재의 최고선을 위해 포기될 수도 있다. 그리고 특별히 만일 어떤 존재가 보편존재를 확고하게 지속적으로 반대하며 대적한다면 보편 존재에 대한 동의와 일치로 인해 참된 덕스러운 마음은 그런 존재를 물리치거나 반대할 것이다.

 

각 존재가 가지는 존재의 정도에 따라 호의적 사랑을 차지한다

17.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만일 존재 자체가 참으로 덕스러운 호의의 일차적 대상이라면, 우리 능력으로 파악하고 우리 눈에 보이는 한, 대부분의 존재하고 있는 존재, 또는 실존의 크기가 가장 큰 존재는 다른 조건이 같을 때, 마음의 성향과 호의의 사랑을 가장 많이 차지할 것이다. 여기서 ‘다른 조건이 같다면’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덕스러운 호의의 이차적 대상이 특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살피고자 하는데, 이것 역시 순후하게 덕스러운 호의의 기초 혹은 동기로 간주되어야 한다. 순수한 호의는 일차적으로 존재가 존재에 연합하고, 동의하고, 일치하는 성향이다. 순수한 호의는 보편적인 최고선을 추구한다. 그리고 각 개별 존재들의 복지가 보편적인 최고선과 일치하는 그런 개별 존재들을 향한 성향을 가지는데, ‘다른 것들이 같다면’ 존재의 정도에 비레해서 그렇게 한다.

 

미덕의 이차적 대상은 대상 속에 있는 호의 자체다

18. 미덕의 이차적 대상은 호의를 가진 존재이다. 순후한 호의의 두 번째 기초는 대상 속에 있는 덕스러운 호의 그 자체다. 보편적인 호의를 갖고 있는 어떤 사람이 동일하게 보편적인 호의를 소유하고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려 그 사람이 단지 아무런 호의가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더 사아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그 존재는 보편존재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존재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존재가 보현 존재에까지 확장되며, 어느 정도 보편 존재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편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 동일한 호의를 가진 사람을 만족적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며, 보편적 실제를 향한 그 사람의 사랑에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더 큰 호의를 갖게 된다. 그것은 보편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보편 존재까지 확장되고 연합되어 보편 존재의 유익을 자신의 유익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보편존재와 연합되어 있어서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의 성향을 어디서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가진 존재를 아름답다고 간주하며, 그것을 가진 사람을 존중과 만족과 더 큰 호의를 받기에 합당한 탁월함을 지닌 사람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덕의 두 번째 기초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볼 것이다

19. 그러나 이런 참으로 덕스러운 사람의 두 번째 기초에 대해 몇 가지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1. 어떤 존재가 갖고 있는 호의에 기초해서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보편 존재에 대한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다

20. 어떤 존재가 갖고 있는 호의에 기초해서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보편 존재에 대한 순수한 호의에서 일어나며 거기로 귀착된다. 왜냐하면 보편적 실재 혹은 실존에 대해 단순한 혹 순수한 호의를 가진 사람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런 성향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에 동의하는 마음은 존재에 대한 동의에 반드시 일치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선을 진실하고 신실하게 구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선을 구하는 데 있어서 그와 연합하는 자를 틀림없이 인정하고 사랑할 것이다.

 

2. 참된 도덕적 영적인 아름다움은 호의에 있다

21. 지금 덕스러운 사랑의 두 번째 기초로서 언급된 덕스러운 호의 속에 참된 도덕적, 영적 아름다움이 있다. 그렇다. 영적인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이 호의 안에 있으며, 이런 호의에서 마음의 여러 자질과 활동이 나오며, 이런 마음의 자질과 활동에서 외적인 행동들이 나온다. 모든 참된 미덕은 이런 것들 속에 존재한다. 즉 참된 미덕은 이와 같은 존재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자질들과 행동 속에 존재한다.

 

3. 보편 존재에 대한 동의와 연합은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다

22. 모든 영적인 아름다움이 이런 덕스러운 원리와 행동 가운데 있듯이, 모든 영적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은 일차적으로 보편 존재에 대한 동의와 연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 존재에 대한 동의와 연합은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히 불릴 수 있는 모든 것 가운데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며, 사물에 대한 완전한 견해를 갖고 있는 존재의 눈에 가장 도덕적으로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이차적 혹은 하위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4. 영적인 아름다움은 호의적 사랑의 이차적 기초이며, 만족적 사랑의 일차적 기초다

23. 이런 영적인 아름다움은 호의적 사랑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만족적 사랑의 기초이기도 한데, 호의적 사랑에는 이차적 기초가 되며 만족적 사랑에는 일차적 기초가 된다. 만족적 사랑이 영적인 아름다움을 일차적 기초로 삼을 때, 만족적 사랑은 덕스럽게 된다. 우리가 특별하게 받은 사랑과 친절은 호의적 사라의 두 번째 기초가 될 수 있지만 만족적 사랑에는 일차적이고 객관적인 기초가 된다.

 

5. 참된 미덕의 사랑스러움의 정도는 호의를 베푼 존재의 크기와 베풀어진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24.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참된 미덕의 사랑스러움과 가치의 정도는 일차적으로 보편 존재에 대한 마음의 동의와 호의에 존재하는데, 단순히 호의를 베푼 정도가 아니라 호의를 베푼 존재의 크기와 호의를 베푼 정도에 복합적으로 비례한다는 것이다. 보편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은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를 어디서 보게 되든지 간에 그 호의를 반드시 높게 평가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가 두 존재가 동일한 호의를 가진 것을 보게 된다면, 단지 한 존재에서 보게 되는 때보다 두 존재에서 보게 될 때에 더욱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 존재에게 호의를 베푸는 두 존재가 있는 것이 단지 한 존재만 있는 것보다 보편 존재에게 더 크고 유익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두 존재는 단 하나의 존재보다 더욱 많다. 그래서 만일 어떤 존재가 두 존재를 합친 것만큼 크고 두 존재를 합친 것만큼의 실존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동일한 정도의 보편적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단지 그 실존의 절반만 갖고 있는 존재 속에 보편적 호의가 나타나는 것보다 보편 존재에 더욱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같은 정도의 가치의 금이 있다면, 다시 말해 같은 수준의 탁월한 품질을 가진 금이라면, 많은 양의 금이 적은 양의 금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6.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를 가진 사람만이 보편적 호의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다

25 누구든지 이런 보편적인 호의의 아름다운 기질이 없는 사람은 보편적 호의 속에 존재하는 이런 아름다움을 참으로 음미할 수 없다. 어떤 존재가 어떤 기질을 갖고 있으면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똑같은 기질을 기뻐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은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의 마음 가진 사람뿐이다. 왜냐하면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가 결여된 어떤 존재가 보편 존재에 대한 호의를 사랑해야 한다면, 자기에게 가치가 없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보편 존재의 선을 향한 성향을 사랑하는 것은 보편 존재의 선을 사랑하는 것과 중히 여기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고, 아무 가치도 두지 않으며, 진전시키고자 하는 아무 욕망도 없는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그런 일에 대한 성향을, 혹은 그런 일을 진전시키고자 하는 경향성을 어떻게 사랑하고 귀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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