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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교회본질/최윤배교수

by 【고동엽】 2021. 10. 28.
칼빈의 교회론: 교회의 본질을 중심으로
최윤배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1. 서론
21세기는 물론 모든 시대의 교회와 신학은 ‘정체성 위기’(Identitätskrise)와 ‘렐레반쯔 위기’(Relenvanzkrise)라는 양대(兩大) 위기 앞에 항상 노출되어 왔다.이 양자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회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위기들 중에 많은 부분은 법과 원칙, 기본과 정도를 벗어남으로써 야기되는 정체성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교회와 신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가 성장만 된다면, 성경에 기초한 교회론적 원리와 원칙을 무시하고도 교회개혁 차원을 넘어 하루아침에 교회의 모든 신앙이나 전통이나 형식이나 절차 등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이런 현상은 로마 가톨릭교회보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교회의 직분을 강조하는 개혁․장로교회 중에서 우리나라 일부 장로교회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교회의 직분들을 경시하는 차원을 넘어 무시하기까지 한다. 이 같이 사회와 교회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체성 위기를 진단하고, 극복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종교개혁전통에 뿌리를 형성했던 종교개혁자들 중에 한 명인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교회론의 본질을 살펴봄으로써 온고이지신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우리는 칼빈의 교회론 전체를 다루는 것을 피하고, 주로 교회의 목적과 본질을 다루면서도, 지면관계상 우리는 교회의 표지(ecclesiae notae)와 네 가지 특성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방법론적으로 역사적(歷史的) 기술 차원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주로 조직신학적 기술을 하기로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1559) 제III권에서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다루고, 제IV권에서도 성령론의 틀 속에서 교회를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도구로 간주하고, 국가를 창조주 및 섭리주 성령 하나님의 도구로 간주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특별 사역의 영역에 속하고, 국가는 창조주 및 섭리주 성령 하나님의 일반 사역의 영역에 속한다. 교회에는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특별 수단으로서 말씀(성경), 두 성례전(세례와 성찬) 및 치리를 비롯하여, 신자 개개인과 직분자들(목사, 교사, 장로, 집사)이 있다. 국가 속에서 창조주 및 섭리주 성령 하나님의 일반 사역의 수단으로서 자연법(양심법) 또는 성경의 십계명(도덕법)에 기초한 실정법을 비롯하여, 시민 개인과 공직자들이 있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에게 외적 수단이 필요했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상태에 동정하셔서 도움을 준비해 주셨다.
칼빈의 교회론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교부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루터, 특히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그의 교회론도 성경과의 대화 속에서 전개시킨다. 그의 교회론은 초기부터 말기까지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는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지만, 시기에 따라 강조점에 따라 또는 부분적으로 변화되고, 발전하였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의 기독론적․성령론적 측면과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재세례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의 질서를 비롯한 제도적 측면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재세례파로부터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가라지를 배제한 알곡만으로 구성된 순수한 교회에 대한 재세례파의 교회 개념은 거부하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포함된 가시적인 교회에 기초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이해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교회의 권징과 치리를 시행했다. 칼빈은 부처의 사직분론(목사, 교사, 장로, 집사)을 도입하였고, 외콜람파디우스로부터 비롯된 교회의 고유한 치리를 부처를 통해서 물려받기도 했다. 칼빈은 교회의 사람, 교회의 형성자, 교회일치 운동가였다.


2. 교회의 목적 및 기능
교회론에서 취급되는 교회의 목적과 기능은 조직신학적으로 다양하게 정의될 수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의 목적은 ①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 ② 세계의 복음화 ③ 인간화와 생태와 자연의 회복 등이 있지만, 가장 포괄적으로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다.
칼빈은 교회의 목적과 기능을 어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고, 여러 곳에서 다루지만, 그의 교회론이 집중적으로 취급된 「기독교 강요」(1559) 제IV권 1장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IV권 1장의 제목 “우리는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인 참된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라는 표제의 말 속에서 칼빈은 이미 교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세우신 제도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칼빈은 제IV권 1장 1절에서 ‘교회의 필요성’이라는 내용으로 교회의 목적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칼빈이 제시한 교회의 목적과 기능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성장시켜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활성화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하고, 게을러서 - 심지어 기질이 변덕스럽기까지 하여 - 우리 속에서 신앙을 낳아, 키워가며,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도록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도움의 수단들을 더해 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살피시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역사가 흥왕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보배를 교회 안에 간직하셨다. 하나님은 ‘목사와 교사’(엡4:11)를 세우셔서 그들의 입술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가르치시도록 하셨고,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셨으며, 마지막으로 신앙의 거룩한 일치를 위하여 그리고 올바른 질서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례를 제정하셨으니, 이를 체험한 우리들이 느끼기에 신앙을 북돋고 강건케 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 근거하여, 방델은 칼빈에게서 교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요약했다. “교회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한 도구이자, 우리의 성화에 필요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복음의 전파와 가르치는 사역의 제도는 신앙을 일깨우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성화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칼빈은 이것을 ‘신앙의 일치’(le consentement de la foi)라고 불렀다. 즉, 신앙과 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한 일치다. 성례의 주요 기능은 신자들의 신앙을 계속 유지시켜주고, 그들로 하여금 개별적 성화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칼빈은 교회를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救贖史)의 큰 틀 속에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종말론적 관점에서도 이해한다. 이양호에 의하면,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의 무지와 나태와 약함 때문에 자신의 구속활동(救贖活動)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다. “물론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창조질서가 파괴되고 그래서 그 파괴된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교회를 세웠다.”칼빈에 의하면, 인류타락 이후에 벌써 교회가 시작되었다. “아담과 하와 자신들이 그들의 몇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모세는 그 당시 불경건의 홍수가 너무나도 크게 범람하여 종교는 빠른 속도로 부패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오직 몇몇 사람들에게만 남아 있었고, 어느 한 종족 안에서도 번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은 하나님의 강직하고 신실한 종이었다고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가 있다. 셋은 자신과 같은 아들을 낳았고, 올바르게 세워진 가정을 가진 후에, 교회의 얼굴(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손에까지 계속될 하나님에 대한 바로 그 예배가 설립되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의 보호를 통해서 창조질서를 유지하고 계시며, 지금도 교회를 보호하시며, 종말 때까지 교회를 보호하신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115:17)라는 말씀 안에서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그의 교회에 보여주셔서, 인류가 하나님의 자비를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기 위하여 인류가 완전히 잘려져 나가지 않고, 백성이 보존되는데 있어서 어떤 방해도 없도록 간구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예언자는, 만약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원하시지 않았다면, 자연의 전(全) 과정이 멸망되었다고 결론짓는다. 만약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면, 세상의 창조는 어떤 선한 목적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땅위에 살아남을 어떤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론한다. 그리고 예언자는 교회는 보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약속할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자에게 감사의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남겨진 모든 자들을 부르고 있다. 게다가 예언자는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예언자는 한 세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에 이르기까지 보존하시는 교회의 전체의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선과 자비를 어떤 사람에게도 증거하시며, 선포하시지 않고는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로 종말 때까지, 언제든지 교회를 가지셨고, 가지시고, 가지실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에 비교하여 죽음의 상황 속에서 교회의 탄생을 설명한다. “그들의 기도(祈禱)의 목적을 이루려는 소망 가운데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시편 기자는 여전히 그의 백성의 구원의 열매를 더욱더 크게 선전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념비적인 사역이며, 대대로 전해져야만할 찬양임을 시편 기자는 공표한다. 찬양할 가치가 있는 많은 것들이 곧 망각된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신이 탄원(歎願)하는 교회의 구원과, 일반 은총 사이를 구별한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시102:18)라는 말씀에 있는 단어 ‘기록되리니’의 뜻은 교회의 이 구원의 역사(歷史)가 공적인 기록들 속에서 위치를 차지할 만큼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뜻하며, 교회의 이 구원의 역사(= 구속사, 필자)에 대한 기억은 미래 세대들에게까지 전달될 수가 있다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백성에 대한 새로운 창조와 현재의 파멸 사이에 아름다운 대조가 있다. 이점에 대해 어떤 주석가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조국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어떤 면에서 교회는 소멸되었다. 유대인들이 이방 나라들 가운데서 뒤섞여졌을 때, 교회의 이름 자체는 죽은 것처럼 보였고, 구별되고, 연합된 몸을 더 이상 구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포로로부터 귀환은 말하자면, 제2의 탄생인 것이다. 따라서 예언자는 정당하게 새 창조를 고대하고 있다. 비록 교회가 사라졌을지라도,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놀랄만한 능력으로 그의 교회를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된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 구절은 교회가 항상 외형적인 모습으로 계속 생존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동시에, 교회가 죽은 것처럼 보일 때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렇게 기뻐하시기만 할 때는 언제든지, 교회는 갑작스럽게 새롭게 창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놀랄만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세계를 단 번에 창조하신 것처럼 교회를 죽음의 어두움으로부터 탄생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이라는 희망을 교회에 들이닥치는 어떤 황폐화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칼빈은 어느 누구보다도 구속사적으로 교회의 영속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교회의 신학자였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 성화의 증거를 보기 어려운 때가 많을지라도 우리는 천지창조 이후로 주의 교회가 없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도 주의 교회가 없는 때는 없을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처음부터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주께서는 이 오염된 덩어리 속에서 어떤 그릇을 귀히 쓰도록 항상 성별하셔서(롬9:23f) 주의 자비를 받지 않는 시대가 없도록 하신다.”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목적과 기능은 전통적으로 이해된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의 목적과 ‘복음전파를 통한 세계의 복음화’의 목적, 예배의 목적, 즉 ‘모이는 교회’의 목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대외적(對外的) 책임, 즉 사회적, 정치적 책임 등을 포함하는 ‘흩어지는 교회’의 목적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칼빈의「기독교 강요」제IV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앞부분의 교회론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라는 제목을 가진 제IV권의 마지막장인 제XX장의 국가론을 우리가 서로 분리할 경우, 우리는 칼빈의 본래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칼빈은 교회론과 국가 내지 기독교 국가를 밀접하게 결부시켜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수계획에 의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의 정치와 교회 직제와 권세를 논하며, 다음에 성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민 정부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있다.”칼빈에 의하면, 국가는 교회를 위한 종교적 책임과 동시에 국민을 위한 사회복지 내지 질서유지의 책임이 있다. 교회 역시 자신의 고유한 책임으로서 종교적 책임 외에도 통치자에 대한 복종과 기도의 책임과 동시에 국민대표를 통한 악한 통치자에 대한 정치적 저항권과 종교적 차원의 개인적 저항권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목적과 기능은 다양하다.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목적은 구원제도로서 목적이지만, 이를 위해서 교회는 신앙의 성장, 신자 개인과 공동체의 성화, 복음전파, 교회의 다양한 대외적 책임, 사회와 정치의 올바른 질서회복, 창조질서의 회복 등에 봉사한다. 교회의 이 모든 목적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前兆)로 이해한다.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최종적인 목적과 기능은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다. “교회는 여하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경륜 안에 있는 것이지 개인이나 개인의 집합체의 결정(結晶)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칼빈은 느꼈다. 그러므로 칼빈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엄격히 순종함으로써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폭넓게 봉사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성령의 새로 지으시는 권능이 확장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


3. 신자(信者)들의 어머니로서 교회
국어사전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낳은 여성 내지 자식을 가진 여성을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일컫는 말로 정의하고, ‘어미’는 어머니의 낮은 말 또는 동물의 암컷을 그 새끼와의 관계로 일컫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어머니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상(象)은 생명체인 자녀를 낳아 기르고, 훈계하고, 가르치는 양육(養育)과 교육(敎育)의 상을 지닌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교회의 본질 중의 하나로 그토록 강조했던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는 무엇을 뜻하는가?
“칼빈은 이미 고대에 있었던 여러 가지 말로써 교회의 본질을 다음 몇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즉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다.’라고 말한다.”칼빈의 경우,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성도들이라고 할 때, 그리고 교회가 그들의 어머니라고 할 때, 어머니로서 교회는 자신의 자녀들을 낳아서, 양육하고, 교육하는 책임과 기능을 가지게 된다. 어머니로서 교회상(敎會象)은 칼빈이 독창적으로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교부들 중에서 키푸리안(Cypurian)이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발견되는 교회상이다.
칼빈은 교회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교회의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 언급한 뒤, 처음으로 언급하는 것이 바로 어머니로서 교회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아동일 동안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 받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성인이 되고, 드디어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칼빈은 계속해서 부부관계의 유비와, 키푸리안이 주장한 “만약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서 가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서 가질 수가 없다.”라는 글을 인용하여, 어머니로서 교회와 자녀로서의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막10:9),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율법 하에서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이러했는데, 이는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과 같다.(갈4:26)”이상에서 볼 때, 칼빈이 이해한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는 교회와 신자들 사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말해준다.
인간이나 동물의 경우, 자녀나 동물의 새끼는 장성한 뒤에 어머니나 어미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있지만, 신자들은 장성한 뒤에도 어머니로서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결코 생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가시적인 교회를 논할 생각이므로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마22:30) 보호하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는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서 지내는 동안 이 학교에서 떠나는 허락을 받을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사37:32)와 요엘(욜2:32)이 말한 것과 같다.”
칼빈이 이해한 어머니로서 교회상에는 ‘하나님의 적응’(accomodatio Dei)이라는 사상이 깊이 깔려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해서 항상 자신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자신의 자녀들을 양육하시고, 교육하시기 위해 사람의 눈높이에 자신을 낮추시고, 적응시키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와 태만과 경솔함과 약점 때문에 교회라는 기관을 주시고, 목사와 교사를 통한 설교와 성례를 통해 복음의 말씀을 전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섭리로 우리의 능력에 맞는 적당한 방법을 취하셔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하는 길을 지시하신 것이다.”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맡아서 여러 가지 수단들과 질서들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신앙의 양식을 공급한다. 어머니로서 교회는 특별히 신자들에게 양육과 교육과 훈계와 지도와 보호의 책임이 있다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육아원인 교회, 하나님의 학교인 교회, 하나님의 훈련소인 교회를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어머니로서 교회의 모든 도움의 수단들을 활용해야 한다. 칼빈은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가시적인 교회와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칼빈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논지로 교회로부터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칼빈이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교회가 그 자체로 구원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말씀과 성례를 통해 구원하는데,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원하는 권능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는 (바울이 증거한 것처럼) 복음의 선포 안에서 그것을 나타내고 드러낸다.’ 칼빈이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에 따라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많은 양들이 밖에 있으며 많은 이리들이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은, 즉 교회 안에 많은 이리들이 있다고 말한 것은 교회 자체가 그 자체로 구원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것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말하자면,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와 가시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 내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항상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4. 삼위일체론적 교회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에서 취급되는 삼위일체론적 교회 개념은 우리에게 이미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교회에 대한 완전한 개념에서 우리는 교회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성령의 전 또는 피조물로서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 가지 이름들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이 내용을 다른 동사(動詞)들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교회를 선택하시고, 아들은 교회를 모으시고, 성령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 바로 이점에서 성경의 여러 구절들(엡1:3-14; 엡4:4-6; 벧전1:2)은 교회의 존재의 가장 깊은 신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으로 선택된 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피뿌림바 되어 순종에 이른다.”
칼빈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해서「기독교 강요」(1559) 제IV권에서 글의 제목이나 내용상으로 ‘어머니로서 교회’와 ‘선택된 백성으로서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개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만,여기서는 물론 칼빈의 다른 작품들 도체에도 이 개념들과 함께 성령론과 결부된 교회의 본질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칼빈의 교회의 본질에 나타나는 선택론적 관점과 기독론적 관점과 성령론적 관점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여 칼빈이 이해한 교회를 삼위일체론적 교회로 규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삼위일체론적 교회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다음의 글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온 세계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흔들리거나 넘어질 수가 없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굳건히 서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같이 동요하거나 파멸될 수 없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영원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지체가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신자들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 끝으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되는 약속들이 있다. … 교회 속에 참여가 너무나도 강하여,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지켜주신다. … ‘교통’이라는 단어 자체 속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의 지체들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시든지, 그것이 우리의 것임을 확신하므로 그들이 받는 모든 은택들이 우리의 소망을 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선택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성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교제 속으로 들어 온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구별된다는 것과 또한 우리가 거기에 속할 때 우리도 그 큰 은혜를 함께 나누게 된다는 마음으로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의 아버지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든 신자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확신한다면 그들은 형제애로 연합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들이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지 않을 수도 없다.”


4.1.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교회
칼빈은 초기에 이미 교회의 본질을 선택론의 관점에서 규정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1536) 초판에서 사도신경의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 항목을 해설하는 가운데, 교회를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시킨다. “먼저 우리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자의 전체수, 천사들이나 사람들(엡1:9-10; 골1:16), 사람들 중에서 죽은 자든지 산 자든지, 산 자들 중에서는 어느 땅에 살고 있든지, 또 어느 민족 속에 흩어져 있든지 간에 이들이 한 교회요, 한 공동체요, 하나님의 한 백성인 것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이 모두의 지도자요, 통치자며, 한 몸의 머리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기초가 있기 전에 택하심을 입어(엡1:4),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모이도록 하자.”여기서 특이한 것은 칼빈이 선택된 자들의 무리에 천사들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이 확실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요10:28), 진정으로 그 일원된 자들은 마침내 소멸되거나(요10:28)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일이 일어 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은 너무나도 확실하고 견고한 터전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구조가 허물어진다 하더라도, 그 구원은 흔들리거나 쓰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즈네브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1537)에서도 교회의 본질이 선택론의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는 교회를 믿으라는 것이 명령되고 있는데 이는 모든 선택된 자들은 신앙의 띠를 통해 한 교회, 한 공동체,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합되어 있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교회의 지도자, 군주 그리고 한 몸의 머리와 같으신 분이심을 우리로 확실히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우리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 안에서 모두 회집되도록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실히 하게 하기 위함이다.”스트라스부르에서 다시 즈네브로 돌아온 뒤에 작성된 「즈네브교회의 요리문답」(1541/1542)에서는 ‘보편적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이 선택론의 관점에서 주어지고 있다. “93. 목사 : 보편적 교회란 무엇인가? 아이 : 보편적 교회란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성도들의 모임(la compagnie des fideles)입니다.”
교회의 기초와 본질로서 선택이라는 사상은 불가시적 교회와 관련해서 그의 후기 작품에서도 조금도 감소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2:19),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에게 모두 인(印)을 치셨기 때문이다.(엡1:3) 그들은 하나님의 휘장을 달고 있어서 유기(遺棄)된 자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것없는 작은 무리가 숨어 있고, 몇 개의 밀알이 쭉정이 더미 속에 묻혀 있으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만 맡겨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선택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존립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같이 동요되거나 파멸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의 관점에서 이해된 칼빈의 교회 이해는 지나치게 제도화되고, 구조화되어 심한 부패 상태에서 능력을 상실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었다. 가시적인 지상의 현실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칼빈은 교회의 영적 측면과 불가시적 측면을 선택론에 기초한 교회론에 근거하여 강조할 수가 있었다. 이를 통해서 숫자적으로 열세이며, 외면적으로 보잘 것 없는 종교개혁 교회의 진영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확신과 위로를 가질 수가 있었다.


4.2.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황대우는 그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을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 마르틴 부처와 요한 칼빈의 교회론”이라고 이름붙일 만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상(敎會象)은 칼빈의 교회론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다.칼빈이 사용한 교회론과 관련된 용어들은 칼빈 자신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중세 신학자들도 사용하던 용어지만, 칼빈은 성경주석 등에 근거하여 중세 시대의 교회론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을 그의 교회론에 부과했다. 칼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정의하는데, 이 개념을 단지 비유적인 방법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실재성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했다.
칼빈의 경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라는 사상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임을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친히 다스리시며, 자신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 직분자들을 사용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살고 성장하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다. 또한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라 불리는데, 이 교제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교제이다. 칼빈의 경우,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교제는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 자체가 신비요, 비밀이기 때문이다.칼빈이 이해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 교회 개념에는 다음 세 가지 내용이 중요하다. 첫째,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다. 둘째, 머리로서 그리스도와 지체로서 성도 사이의 연합과 교제가 중요하다. 셋째, 그리스도와의 각 성도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전제한 성도들 사이의 교제가 중요하다.
칼빈은 이미 「기독교 강요」(1536) 초판에 보편적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묘사한다. 칼빈은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 라는 조항을 해설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보편적인 교회 안에서 성도들 상호간의 친밀한 교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몸의 지체가 일종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나누듯이, 그러면서도 각자의 특별한 은사와 독립된 사역을 수행하듯이, 성도들은 서로 모여 한 몸으로 지어져 간다. 이것이 보편적인 교회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다.”칼빈은 사도신경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 라는 조항을 해설하면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지체인 선택된 자들 간의 일치와 연합과 교제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선택된 자들의 지도자요, 통치자며, 한 몸의 머리”이며, “이 공동체는 보편적이요, 다시 말해서 우주적인데, 이는 둘이나 혹은 세 교회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모든 택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가 되고 연합되어져서(참고, 엡1:22-23) 그들이 한 머리에 붙어 있는 동안 한 몸으로 함께 자라며, 함께 결합되고 짜져 가는 것이며(비교, 엡4:16) 한 몸의 지체들과 같다.(롬12:5; 고전10:17; 고전12:12, 27). 이들은 한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또 하나님의 한 영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업에로 부름을 받아 함께 살아가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진 것이다.”칼빈은 그의「즈네브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1537)에서 사도신경의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라는 항목을 해설하는데, 「기독교 강요」(1536) 초판에 나타난 내용은 물론이고, 거의 비슷한 문장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든 선택된 자들은 신앙의 띠를 통해 한 교회, 한 공동체,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합되어 있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교회의 지도자, 군주 그리고 한 몸의 머리와 같으신 분이심을 우리로 확실히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이 공동체는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결코 둘이나 셋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고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오직 한 머리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오직 한 몸 안에서만 성장하고 있다. … 성도의 교제란 이런 것이다. 성도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을 때, 비록 이 은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그 한 사람에만 특별히 주어졌다하더라도 모든 성도들이 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에 서로 참여하면서도 그들 각자는 특수한 은사들과 상이한 직무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즈네브교회의 요리문답」(1541/1542)에서는 ‘보편적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대답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성과 그리스도와 각 지체 사이의 수직적 관계와 각 지체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의 머리는 단 한 분뿐이시라는(엡4:15) 것과 모든 사람들은 이 한 몸 안에서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고전12:12, 27)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말은 교회의 성원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통일성을 좀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첨가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베풀어 주시는 모든 은혜로우신 행위들이 성도 개개인의 유익과 구원을 위한 것임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줍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교제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라는 개념은 그의 「기독교 강요」(1559) 마지막 판에도 그대로 계속된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엡1:22-23) 한 머리를 의존하며 서로가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지체들같이(롬12:5; 고전10:17; 고전12:12, 27) 서로 단단히 결합된다.(엡4:16) 그들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심은 영생을 다같이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시키기 위함이다.(엡4:30”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지 서로 나눈다는 원칙하에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라는 구절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상이하게 분배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 대한 칼빈의 교회상은 기독론 중심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세계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있다. 그것이 교회이다. 교회는 고양(高揚)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인간에게 완성하시는 수단이다. …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이며,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만남의 장소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4.3. 성령의 전(殿) 또는 피조물로서 교회
칼빈의 교회론과 관련하여 선택론적 관점과 기독론적 관점과 함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회에 대한 성령론적 관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을 수행하는 분도 성령이시고, 선택된 자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몸에 연합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교회의 탄생과 성장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주도하시는 분도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해한 성령의 전 또는 성령의 피조물로서 교회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과 교제 및 성도들 상호간의 교제는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성령은 교회를 창조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외적인 은혜수단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첫째, 성령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각 지체인 성도와 연합시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연합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묶여 있는지의 방법, 즉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그 방법을 깨닫게 된다.”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시는 띠가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도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은 바로 ‘성령의 교통’(communicatio Spiritus Sancti)이다.
둘째, 성령은 외적 은혜수단에 항상 얽매이시지는 않지만, 외적 은혜수단들을 허락하시며,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성령이 사용하시는 외적인 수단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근거한 말씀의 선포, 성례전과 직분이다. 성령과,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수단의 관계를 중심으로 칼빈은 크게 두 진영과 논쟁하면서 중간의 길(via media)을 선택했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열광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령을 통한 복음 선포를 무시하고, 성례전주의의 사효론(事效論; ex opere operato)에 빠져서, 사역의 주체인 성령 자신을 사역의 수단에다가 흡수시키거나 종속시키는 객관주의의 잘못을 범했다. 반면, 열광주의자들은 성령의 수단을 무시하고, 성령의 능력만을 주장하여 주관주의의 잘못을 범했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과 성경말씀의 관계에서 열광주의자들은 성령께서 성경말씀과는 별도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잘못 주장하는가 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고 잘못 주장한다. “성경을 버리고 무슨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오를 저질렀다기보다는 차라리 정신착란에 빠졌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요사이 어떤 견실치 못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거만하게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성경읽기를 거절하면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죽은 글자 또는 치사적(致死的)인 문자에 아직도 관심을 갖고 있는 자들이라고 비웃는다.” “만약 교회가 처음부터 예언자의 문서와 사도들의 설교에 근거를 두었다면, 그 교리가 어디서 발견되든지 그 교리의 확실성은 교회의 형성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절대로 존재한 일이 없는 까닭이다.”칼빈은 성경말씀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성령의 외적 도구로 이해한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령의 확실성 사이에 상호 관계를 확립하셨다. … 성령을 떠나서는 진리의 빛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매우 예민하게 느낀다. 그와 동시에 말씀은 주님이 자신의 성령을 신자들에게 주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사실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성례전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례전의 효과를 성령의 역사에 기초시키지 않고, 성례전의 재료 자체에다가 종속시킴으로써, 사효론의 잘못에 빠지고, 열광주의자들은 성례전 속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의 실재성을 무시하고, 상징이나 의미 등으로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령 자신의 역사를 무시하고, 열광주의자들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수단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성례전의 재료(물, 포도즙, 빵)를 사용하셔서 은혜의 효과를 일으키신다. “성례전은 내적 스승이신 성령이 같이 계실 때 비로소 그의 임무를 행할 수 있다. … 성령이 같이 하지 않는 성례전은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과 그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마음에 대해서 성례전은 믿음의 강화와 향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직분을 성령과 말씀에 종속시키지 않고, 직분 자체를 절대화시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과,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교회의 직분을 무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잘못을 동시에 비판했다. “우리시대에 들어와서 교회의 직분의 효력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직분의 위엄을 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죽을 운명의 인간에게 위임해버리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목사나 교사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통찰하여 사람의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성령을 배제하고, 성령의 수단인 직분만을 주장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직분을 배제하고, 성령의 역사만을 주장한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칼빈은 성령은 교회의 직분 자체에 항상 얽매이시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직분을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성경주석에 근거하여 성령과 수단의 올바른 상호관계를 확립했다. “쌍방의 쟁점들은 다음 두 가지 설명을 통해 쉽고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① 어떤 구절에서는 설교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을 설교와 결합시키셔서 설교로부터 은혜를 약속하신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② 어떤 구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외적 보조수단들을 상호 분리시키시면서 신앙의 시작과 신앙의 전(全) 과정을 자기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요구하신다는 내용이 나타난다.”칼빈에 의하면, 바울 사도는 어떤 구절에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 심지어 구원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는 자라고 말하면서도(고전3:9이하),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신의 공적을 티끌만큼도 주장하지 않는다.(고전3:7)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칼빈에게서 설교, 성례전, 직분 등은 성령의 수단으로서 이해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귄능은 외면적인 수단에 매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평범한 교수 방법에 매이게 하셨다. 광신자들은 이 방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인 올무에 걸린다.” “교회는 오직 외면적인 복음 선포에 의해서만 성장하며, 성도들은 한 유대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 공중 예배보다 더 큰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 예배에 의해서 자기의 백성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속한 수단으로 우리를 마치 병거에 실듯해서 그의 하늘 영광에 올리신다.”
칼빈이 이해한 교회는 은사공동체이다. 은사 공동체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통일성 가운데 다양성을 유지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지 서로 나눈다는 원칙하에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상이하게 분배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 4:32절은 모든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주장했으며, 그것은 바울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공동체이다.”교회는 은사 공동체인 동시에 사랑 공동체이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베드로 사도가 신자들 전체로 이루어진 한 집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비록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합하고, 상호간의 사랑으로 굳게 연합되어 전체가 한 성전을 이루어야 만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으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는 성전인 것이 사실이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보편적인 성전을 이루어야 한다. 이 일은 모두가 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자신의 의무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동시에 각자 무슨 은사를 받았든지 간에 공동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며, 사람들에게 이 은사를 수여하고, 분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그 위력을 나타내게 하는 것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신자들은 각각 하나님의 성전이며, 신앙으로 결속되어 한 성전을 이룬다.”


5. 이중적 측면을 지닌 교회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두 가지 측면 또는 양상(樣相)을 중심으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보편교회와 지역교회, 싸우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가시적인(= 가견적인 = 보이는) 교회’와 ‘불가시적인(= 불가견적 =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visibilis et invisibilis)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가 있다.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교회들이 따로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이다. 플라톤적 이원론의 영향 하에 이 땅에 있는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로서 허상에 불과하고, 장차 완성될 하늘에 있을 이상적이고도 불가시적인 교회가 실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에 대한 부당한 비판이 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말하면서, 이 두 교회는 두 개의 다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교회가 가지는 다른 두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우리가 보기에도,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의 구별은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두 개의 교회들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측면 또는 두 가지 양상을 뜻한다.
그러면 칼빈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칼빈의 경우,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에는 두 가지 측면 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는데, 하나는 불가시적이고, 천상적이요, 영적이고, 승리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비가시적이고, 지상적이고, 육적이고, 전투하는 교회이다. 칼빈은 이 대조적인 형용사를 한정사(限定詞)로 교회와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술어(述語)로 교회와 연결시킨다. 칼빈은 교회가 무엇인지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교회의 두 측면, 즉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와 사람들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 et ecclesia coram huminibus)를 구분하여 사용했을 뿐이다.칼빈의 경우, 교회는 불가시적인 동시에 가시적인 ‘한 몸’(unum corpus)과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사도신경의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Sanctam ecclesiam catholicam)에 나오는 ‘교회’를 칼빈은 불가시적인 교회에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가시적인 교회에도 적용시킨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 라는 조항은 (우리가 현재 취급하고 있는) 가시적인 교회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도 그 숫자에 포함된,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사도신경에 나타난 ‘믿는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불신자들 사이를 그리고 하나님의 양떼들과 들짐승들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칼빈은 불가시적인 교회를 선택론의 차원과 하나님의 인식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2:19),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에게 모두 인(印)을 치셨기 때문이다.(엡1:3) 그들은 하나님의 휘장을 달고 있어서 유기(遺棄)된 자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것없는 작은 무리가 숨어 있고, 몇 개의 밀알이 쭉정이 더미 속에 묻혀 있으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만 맡겨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선택이다.”
또한 칼빈은 불가시적인 교회를 선택론의 관점과 교회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보편교회와 연결시킨다. “교회를 ‘보편적’ 또는 ‘우주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뉘어 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는 한(고전1:13), 교회도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엡1:22-23), 한 머리를 의존하며 서로 서로가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지체들같이(롬12:5; 고전10:17; 고전12:12,27) 서로 단단히 결합된다.(엡4:16) 그들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똑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심은 영생을 다같이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시키기 위함이다.(엡5:30)”이상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칼빈이 이해한 불가시적 교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의 총합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을 수가 있다.
칼빈은 사도신경에 기록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Sanctorum Communionem)을 가시적인 교회에도 적용시킨다. “이 외면적인 교회 안에서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인 일치를 유지해야하며, 교회가 마땅히 가지는 권위를 교회에다가 부여해야하며, 간단히 말하면, 양떼들의 일원으로 행동해야 한다.”칼빈은 또한 ‘신자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가시적인 교회에 적용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가시적인 교회를 논할 생각이므로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가 될 때까지(마22:30) 보호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 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한 교회의 두 가지 양상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다음의 글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성경이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했다. ‘교회’라는 말은 때로는 입양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성화로 그리스도의 참 지체들이 된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면전(面前)으로 영접된 사람들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산재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찬에 참가함으로써 참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직분을 보존한다. 이런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칼빈에게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는 인식론적인 문제로서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를 알고 계시지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는 한 교회의 실체에 대한 두 가지 양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불가시적인 교회를 믿어야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보는 교회인 현실의 교회를 잘 유지하며,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도모할 의무가 있다.”한 교회의 두 양상, 가시적인 측면과 불가시적인 측면을 통전적(統全的; holistic)으로 그리고 균형 있게 이해한 칼빈의 교회론은 선택론과 관계된 불가시적인 교회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가시적인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역사화 시키고, 동일화하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과 상치될 뿐만 아니라, 가시적인 지상의 현실적 교회를 무시하고, 불가시적인 교회의 순수성과 도덕성만을 추구하는 재세례파들의 교회론과도 상치되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 교회와 선교현정에서도 발견된다. 기성교회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구태의연한 신앙습관과 제도에 얽매여 있는 일부 기성교회도 있다.
칼빈에 의하면, 지역교회는 보편교회에 포함된다. 보편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이며, 하나님께서 영생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이다.보편교회는 세계창조 때부터 있었고, 마지막까지 존재할 것이다. ‘가톨릭’(catholica) 또는 ‘보편적인(우주적인)’(universalis)이라는 말은 “신자들의 머리는 단 한 분뿐이시라는 것(엡4:15)과 모든 사람들은 이 한 몸 안에서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곤전12:12, 27)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단 하나의 교회기 있을 뿐입니다.”한 몸으로서 보편교회는 “모든 나라에서 모은 큰 무리다. 그 보편교회는 나누어져 여러 곳에 산재하지만, 거룩한 교리의 한 진리에서 서로 일치하며, 같은 종교생활의 유대로 연합되었다. 이와 같이 보편교회 아래 지역교회가 포함되며, 그 지역교회들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도시와 촌락에 설립되어 각각 교회라는 이름과 권위를 정당하게 가진다. 각 개인이 신앙고백에 의해서 이런 지역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때, 비록 그들이 보편교회를 모를지라도 공적인 재판에 의해서 출교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보편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하나님께서 교회의 몸을 세상으로부터 성별하셨다.
칼빈에게 ‘싸우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ecclesia militans et triumphans) 사상이 나타난다. 교회의 창조와 갱신은 하나님만의 사역이다. 이 말은 교회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말은 아니다.왜냐하면, 역사는 하나님께서 사탄과 싸우시는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나그네로서 이 땅에 살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지상적인 삶을 투쟁하는 순례자의 삶과 비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지상에서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교회는 안식할 여유를 갖지 못하며, 수많은 공격들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지상의 교회는 싸우는 교회이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의 이 싸움은 가시적이지 않고, 불가시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격렬한 전쟁을 혈과 육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 몰고 가려고 힘쓰는 사탄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불경건한 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聖殿)으로서 교회의 구축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구축은 영적인 공격을 동반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적 전쟁을 경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성도들은 그들을 해치는 모든 것으로부터 끝까지 안전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한, 교회의 전체의 몸과 양떼들의 각각은 안전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선택된 자들이 있는 교회는 보존된다.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는 소망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도우시고, 신자들 각각을 견인(堅忍)하기 때문이다. 비록 교회가 지상에서는 완전한 승리는 하지 못할지라도, 최종적인 영광과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싸우는 교회 안에 확실하게 보장된다.칼빈의 경우, 지상의 교회의 영적인 전쟁은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속되는 싸움을 통해서 지상적인 교회를 훈련시키시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두 가지 측면들, 가령,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 보편교회와 지역교회, 싸우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 등이다. 칼빈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를 구별하지만, 이러한 구별을 통해서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사회화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재세례파와 자유주의파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영성주의화에도 반대한다. 칼빈은 어디에서도 이상적인 교회와 현실적인 교회라는 식으로 두 가지 교회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한 몸을 두 개나 세 개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이며,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나누어질 수가 없다. 비록 가시적이 교회가 불가시적인 교회와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는 떼래야 뗄 수가 없는 끈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칼빈은 어디서도 교회의 두 가지 측면 또는 양상 사이를 날카롭게 분리시키거나 대립시키지 않는다.
칼빈의 경우, 교회는 사건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제도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사건으로서 교회’에 대한 이해는 바르트(K. Barth)의 다음의 글 속에서 잘 나타난다. “기독교 교회는 형제들의 모임인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말씀과 성례전 안에서 주님으로서 현재적으로 활동하신다.”칼빈의 경우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곳이다. 칼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외적 수단들(말씀, 성례전, 사역자)을 허락하셨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 바로 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쫒아 버리시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시기 위하여 무언의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한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 외에 자신의 말씀을 참가하셨다.”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목사와 교사를 통한 복음전파와 성례집례 등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한 외적인 도움의 수단을 교회에 주셨다. “교회는 외적 설교에 의해서 지어지며, 성도들은 하나의 유대에 의해서 결속된다. 한 마음으로 배움과 발전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교회질서를 지킨다.”여기서 칼빈이 이해하는 교회의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나타난다. 칼빈은 교회를 모임 또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제도로 이해했다. “즉 선포된 말씀을 중심으로 볼 때 제도적인 면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의 믿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모임이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다. 교회는 선포된 말씀으로 살지만 또한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나 성도의 모임이냐 하는 양자택일은 있을 수 없고,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 하는 것도 없다.”


6. 결론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본질을 살펴보기로 본고를 시작했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칼빈은 많은 사람들, 가령,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부처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자신의 교회론을 독창적으로 전개했다. 그의 교회론은 몇 진영들과의 논쟁 속에서 발전되었지만, 본질적 측면에서 그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거의 동일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에서 교회의 기독론적․성령론적 측면과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재세례파와의 논쟁에서 교회의 질서를 비롯한 제도적 측면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제세례파로부터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가라지를 배제한 알곡만으로 구성된 순수한 교회에 대한 재세례파의 교회 개념은 거부하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포함된 가시적인 교회에 기초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이해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교회의 권징과 치리를 시행하였다. 칼빈은 부처의 사직분론(목사, 교사, 장로, 집사)을 도입하였고, 외콜람파디우스로부터 비롯된 교회의 고유한 치리를 부처를 통해서 물려받기도 했다.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기능과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있었다. 우리는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라는 전통적인 교회 모델로서 ‘모이는 교회’에 대한 표상(表象)과 피조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흩어지는 교회’에 대한 표상을 칼빈의 교회론에서 발견했다. 칼빈의 ‘어머니로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양육과 교육과 목회 및 목양(牧羊)이라는 교회의 본질이 발견되고, ‘삼위일체론적 교회’에서 칼빈의 교회에 대한 이해가 성경적 기초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 교회론에 대한 성서신학적, 조직신학적 통찰력들을 우리에게 풍부하게 제공하여 교회론적 논의를 오늘날도 가능케 한다. 칼빈이 이해한 이중적 측면을 가진 교회, 즉 가시적인 동시에 불가시적인, 보편적인 동시에 지역적인, 싸우는 동시에 승리하는 교회로부터 우리는 그 동안 오해했던 이원론적 또는 이분법적 구별을 극복하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마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교회론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방적으로 치우진 양자택일의 사고가 편만해 있는 우리나라 교회와 사회 현실 속에 칼빈의 교회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근원과 원칙과 원리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반성하게 하고,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보다 새롭고도 지평이 넓은 교회론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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