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예배
김성봉(신반포중앙교회 담임목사, 전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칼빈은 그의 종교 개혁 활동을 시작하면서 오염된 예배의 개혁과 회복에 일차적 관심을 두었는데,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우리는 유일무이하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원하여 말씀의 규범에 따라 재건하였으며, 또한 재건한 예배를 열심히 지키고, 우리의 교회를 모든 우상예배와 미신으로부터 청결케 하여 왔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되살리는 예배를 회복하기를 원했으며, 은혜의 방편이 말씀과 성례전인 것을 강조하였다.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데, 예배가 타락되고 오염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리에 따라 그는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명을 걸었다. 칼빈에 있어서 목회는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사역이었는데, 목회자가 매 주일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무로 설교와 교육과 매주일의 성찬 성례전을 집행하는 일을 꼽았다. 흔히 생각하듯이 칼빈이 성례전적인 예배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고자 했다기보다는 매주 예배에서 성만찬이 초대 기독교의 단순성과 조화를 되찾도록 하고, 예배에서 성경 말씀의 권위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배의 구성은 말씀의 예전과 성만찬 예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교를 강조하면서 성찬을 경시하는 것은 전혀 칼빈적이 아니다. 오히려 칼빈은 “사람들이 일년에 한 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한 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우리의 논의를 편이하게 하기 위하여 육하원칙에 따라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씩 질문을 제기하면서 칼빈에게서 답을 구하고, 오늘날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하여 지적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본 주제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1. 예배란 무엇인가?
칼빈에 있어서 예배란 무엇인가? 칼빈은 합법적인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거룩하고도 진실한 경외”인데, 이 경외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예배의 중요한 기초는 “하나님을 사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덕, 의로우심, 거룩, 지혜, 진리, 능력, 은혜, 관용, 생명 및 구원의 유일한 원천으로 인정하는 일”이며, 따라서 이 일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할 때 하나님만을 우러러보는 일 이상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기도가 생기며, 찬미와 감사의 행위도 발생한다고 한다.
칼빈은 참된 예배와 그릇된 예배를 구별하면서, 롬 12:1-2이 가르치는 영적 예배가 참된 예배이며,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하였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 예배할 마음이 있다면, 자신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이요, 여기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거짓 예배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고안으로 만족하며 ... 은혜가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지만, 우리는 하늘의 재판관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서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는 그릇된 예배의 세 가지 유형을 소개하는데,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와 바리새인의 예배와 연극적 예배라고 하였다.다른 곳에서 그는 순전한 예배와 더렵혀진 예배를 나누어 말하면서, 그것을 분별하는 방법은 “명령권을 장악하고 계시는 유일하신 분이 명하시는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로, 이 같은 예배 방식은 하나님의 확고하신 권위에 전적으로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판단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는 공허한 존재인 까닭에 만약 제멋대로 예배하도록 허락된다면, 우리는 바른 길에서 떠나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 누가 누구를 예배하는가?
1) 누가 예배하는가?
누가 예배하는가? 예배를 드리는 주체의 문제이다. 아무나 유사한 동작을 취한다 해서 예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배제되는 자가 있듯이 예배에 있어서도 배제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칼빈에 있어서 예배를 드리는 주체는 구속받은 성도이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다. "인자하고 관대한 아버지에 대한 체험을 가진" 자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 있어서 오늘날 ‘구도자 예배’나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열린 예배’는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예배란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다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예배가 진행되는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예배가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칼빈은 예배와 관련하여 자기부정을 언급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예배가 단순히 의식에만 머물지 않고, 생활과 직결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데, 그래야만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우리의 심령을 지배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생명의 일체의 모든 행동을 제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누구에게 예배하는가?
예배의 대상의 문제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지루해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방탕함을 억제하는 데 족할 것이다.”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배의 대상의 혼동문제였다. 마리아와 함께 수많은 성인들이 예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말로는 모든 선한 것들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면서도, 실제에 있어 하나님의 여러 덕성들을 소위 성인들에게 돌림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의 거의 대부분을 헛되이 만들었다”고 탄식하였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예배의 대상의 혼동은 더 이상 있는 것 같지는 않으나, 예배의 대상은 삼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예배의 무게 중심이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에게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자 쪽으로 잘못 이동해 와 있는 듯하다.
3. 언제 예배하는가?
성도는 개인적으로 아무 때라도 예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공적 예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인가? 공적 예배라도 아무 때고 임의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칼빈에게 있어서 예배의 때는 주일로 정해져 있다. 주일 중에서도 언제인가? 언제라야 하는가? 정해진 시각과 시간이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칼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배 일시와 예배 장소의 건축물, 어느 날 어느 시편을 부를 것인가 하는 등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 단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날과 시간을 정해 두는 것과 모든 사람을 수용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는 것이 편리하다.”칼빈은 그리스도 교회의 성도가 일요일을 지키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 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예배의 때와 관련하여 오늘날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날의 문제이요, 다른 하나는 날 중에서도 시각의 문제이다. 날의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날 주 5일 근무제와 더불어 예배의 때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아무 때나 우리가 편한 대로 예배드리면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고 해도, 때와 상관없이 예배드려도 되는 것인가? 때가 맞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날 중의 시각의 문제에 있어서도 과연 몇 시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오전에 드려야 하는가, 오후에 드려야 하는가? 오전에 드려야 하는데, 오후에 드려도 되는 것인가? 날만 지켜지면 시각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주 5일 근무제와 더불어 새삼스럽게 제기된 예배의 때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정도로까지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예배의 대상만 분명하면, 예배의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제 1 계명을 명하신 분께서 제 4 계명도 명하시지 않았던가? 제 1 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되지만, 제 4 계명은 각자 나름대로 지켜도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서도 칼빈과 17세기의 개혁신학자들이 주의 깊게 다루었음에도 그들의 논의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듯이 보인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도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을 제외한다면, 복음에 근거하여 성경이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는 날은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4.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 장소의 문제는 이미 요한복음에서 언급된 고전적인 문제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들으시고는,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고 하시었다. 칼빈은 여기서 말하는 예배란 “제사와 관련된 예배로서 공적으로 엄숙하게 표현하는 신앙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며,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특정한 예배 장소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오나니 라고 말씀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은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중간에 막힌 담의 헐릴 때가 온다고 말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장소의 문제에 집착하는 여인을 향하여 장소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예배의 보다 본질적인 요소에 집중하도록 요구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이곳이냐 저곳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칼빈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주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것이라는 한층 더 높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신령으로 예배할 때 그는 어느 곳에서나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5. 왜 예배를 드리는가?
이 부분에 있어서도 어떤 혼동이 있는 듯하다.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자가 그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물질을 드리는 것이다. 또한 은혜 받은 자로서 계속 은혜 가운데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를 드림으로 무엇인가 소위 “복”을 받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조금은 조심스러운 생각이라 여겨진다. 칼빈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의 로마 카톨릭의 경우를 언급하며 교회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들이 공포에 의해서 일종의 강요된 순종을 짜내는 것이면 충분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를 비굴한 공포가 아니라 의에 대한 자발적이요 기꺼운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 동여매려는 뜻에서 우리의 구원의 바탕이 되는 달콤한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끌고 있다.”
6. 어떻게 예배드리는가?
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배 방식과 관련하여 칼빈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배드릴 것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주께서는 진정한 의의 골자 전체와 그의 위엄 앞에 드리는 예배의 모든 국면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한 말씀에 충실히 포함시키며 분명히 표현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관하여서는 “주의 말씀만”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인도할 지침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의 성품에 맞는 것에 탐닉하는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피상적인 의식으로 가득 찬 것을 여러 가지 발상해 낸다”고 주의를 촉구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예배 의식은 우리 자신의 독창성을 표현하는 자리가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의 새로운 형태를 고안해 낼 것이 아니라, 믿음의 순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배드려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어떻게 예배드리는가의 문제는 그다지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칼빈의 영향 아래 칼빈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나온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제 96문에서 “제 이 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요?”라고 묻고는, “하나님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만들지 말며, 그가 그의 말씀 안에서 명하신 것과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그를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섬기는 방식도 말씀으로 제한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2) 단순하고 간결하게
칼빈은 예배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드릴 것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공중예배는 단순하고, 예절에 합당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때 말하는 예절은 “거룩한 신비에 대해서 경외를 표시하는 데 적합한 것이며, 경건의 합당한 연습이고, 적어도 예배 행위에 합당한 장식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비하여 당시 카톨릭 교회에서의 예배는 “연극적인 도구들”을 사용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가면만이 있을 뿐 유익이나 결실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 의식들은 무익하기 때문에 너절하며 ... 화려한 허식으로 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므로 기만”이라고 비판한다. 칼빈은 “우리가 세우려는 질서는 일시적인 호화로움에 불과한 너절한 의식이 아니라, 모든 혼란과 야만성과 불순종과 소란과 분쟁을 제거하는 조치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예배의 세부사항에 있어서는 교회의 유익과 사랑의 판단에 따라 행할 것을 권하는데, “인간이 만들기는 했으나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법들만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주께서는 진정한 의의 골자 전체와 그의 위엄 앞에 드리는 예배의 모든 국면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한 말씀에 충실히 포함시키며 분명히 표현하셨다”고 하며, 이런 문제들에 관하여서는 “주의 말씀만”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외형적인 규율과 의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자세히 명령하려고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는 그 이유로 “이런 일은 시대의 형편에 의존한다는 것을 아시고 한 형식이 모든 시대에 적합하다고 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고 설명하였다. 칼빈은 교회법과 관련된 속박과 자유의 문제를 논하면서, “한 지방 고유의 관습이나 인정이나 중용의 규범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지시한다”고 하였다.
3) 자의적 예배는 금물
예배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칼빈이 제기한 것은 소위 ‘자의적 예배’의 문제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논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열심을 구실로 삼을 수 있다면 어떠한 행함일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가납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만인들의 골수에 스며들어 있다!”고 탄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잘못된 확신에 근거한 예배가 편만해 있는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소위 “제 멋대로의 예배”는 전적으로 헛된 것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에 온갖 정성을 쏟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과 기뻐하신 것에 주목하는 대신 자기들 기분에 맞는 방법으로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주석에서 예배와 관련하여 말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없이 자기의 의사에 따라 인도함을 받을 때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좋은 의도는 여기에서 공격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하여 소위 “좋은 의도” 조차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예배와 관련된 고전적인 본문인 요 4:23-24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칼빈은 “그럼 율법 아래서의 예배는 신령하지 않았던가?”라고 묻고는, “비록 율법 아래서 행해졌던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신령한 것이었다 해도, 그 예배는 수많은 외적 의식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육에 속하고 땅에 속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고 답하며, “우리는 율법 하에서의 예배가 본질상으로는 신령한 것이었으나, 그 형식에 있어서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고 하였다. 칼빈은 신령한 예배를 “옛날 예식의 덮개를 벗겨버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중에서 신령한 것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리는 “성령 안에 있는 것으로서, 의식은 말하자면 우발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골로새서 2:23에 나오는 “자의적 예배”를 해설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택해서 자의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은 모든 거룩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본 원리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방법으로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이라고 말한다. 잠 3:5을 인용하면서 예배와 관련하여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만 그의 말씀을 따라 겸손히 순종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의 명철이나 기타의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역시 기본원리”라고 말한다.
4) 소위 ‘자의적 예배’에 관한 코드레이의 견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의 귀한 견해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17세기 개혁신학자 다니엘 코드레이는 자의적 예배를 미신이나 이단만큼 심각하고 신중하게 다룰 것을 주장한다. “옛말에 ‘이단을 공박함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미신과 자의적 예배에도 잘 적용되리라 생각한다. 이단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항하는 범죄요, 미신과 자의적 예배는 하나님 예배에 대항하는 범죄이다. 문제는 어느 것이 보다 더 큰 죄냐 하는 것인데, ‘교리를 부패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예배를 부패시키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단은 크고 저주받을 만한 죄라고 모든 사람들이 고백한다. 미신과 자의적 예배도 마찬가지로 악하며,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것이며, (비록 어떤 사람들이 그것들의 죄성보다는 덕성을 더 주장하긴 하지만) 충분히 논증할 수 있는 것인데, 다른 곳에서 논증되어진 바 있다.”
코드레이는 예배를 명령된 예배와 명령되지 않은 예배로 나누어 생각하면서 미신이라고 정죄 될 과도한 경우를 전자에 보다는 주로 후자에 적용하고 있다. “명령된 예배를 생각해 본다면, 특별히 자연적인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두려움과 신뢰에 있어서 헌신의 의도와 관련하여 한 사람이 지나치게 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 하지만 명령되지 않은 예배에 있어서는 예배의 규칙에 대한 최소한의 첨가라도 지나치게 많은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단락을 달리하여 비슷한 내용을 말한다. “예배에 있어서 말씀에 대한 모든 첨가가 신 4:2과 다른 곳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금지된 것처럼 악하고 죄된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나 교회도 하나님에 의하여 명해진 계명에다 죄 없이 어떤 예배를 더할 수는 없다. ... 만일 미신이 종교의 과다함이라면, ... 만일 자의적 예배나 명령되지 않은 예배가 복음의 규칙에다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이라면, ... ” 이 같은 서술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존한 바가 크다.
코드레이는 자의적 예배를 미신과 거의 동등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약에서는 말씀에 대한 첨가라고 하였고, 신약에서는 사람의 교리나 전통, 자의적 예배와 미신이라고 하였다. 종교에 있어서 부족함이 不敬이라고 일컬어지듯이, (종교에 있어서) 과다함은 그것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서 미신이라고 일컬어진다.” 또한 그는 자의적 예배에 해당하는 다양한 예들을 열거하고 있다. “보다 엄격하게 자의적 예배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결코 하나님에 의하여 명해진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안해낸 것들에나 사람의 제도에다 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는 교황주의자들에게서 넉넉히 볼 수 있는데, 미사에서의 희생제사와 여러 가지 행위들, 은둔생활이나 수도원 생활, 고해성사, 순례 등이 그것들이며, 이것들을 그들은 하나님을 특별히 예배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렇게 드리고 있는데, 개혁교회에 의해서는 미신이라고 정당하게 불리었다.”
코드레이는 미신에 관하여 먼저 다루고 이어 자의적 예배와 성탄절에 대하여 다룬다. 그에 의하면, “미신에 대한 논의가 자의적 예배에 대한 논의보다 앞서 와야 한다. 미신이 보다 일반적인 것이며, 자의적 예배는 미신 가운데 한 특별한 경우이다.” 특히 그는 토마스를 인용하면서 자의적 예배를 제 2 계명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불법적 예배 혹은 명해지지 않은 예배의 경우는 제 이 계명과 연관하여 언급되었다.”고 한다.
5) 우리 시대의 반성
우리 시대는 '자의적 예배'라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반성을 요하고 있다. 칼빈이 그렇게도 비판하였고, 칼빈 이후의 17세기 신학자들이 그토록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현금의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언제 그런 논의가 있었느냐는 듯이 보인다. 개혁교회의 예배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배하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이 문제는 거의 재론이 불가능하게 보이기도 한다. 부활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각양 이름을 붙인 예배들, 구약에서 힌트를 얻어 신학적 여과도 거치지 않은 채로 재현하는 예배 의식이나 복장 등이 현저한 예가 될 것이다.
7. 예배 모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예배 모범을 작성하여 제시하였다. 스트라스버거 시절을 거치면서 칼빈에게 있어서 부처의 예배 모범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예배 의식도 1538년-41년 사이 스트라스버그에서 망명한 프랑스인 회중들을 목회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부처의 예배 모범을 사용하였는데, 칼빈이 이곳에서 발전시킨 중요한 예배의식은 성찬 성례전을 주일 예배에서 생략하는 경우에도 예배로서의 깊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예배의식인데, 이것이 후일에 개혁교회 예배의 중요한 틀이 되었다. 스트라스버그에서의 3년 여 망명 생활을 마치고 제네바로 돌아 온 칼빈은 1542년에 예배모범을 펴내었는데, “일요 예배에 있어서 스트라스버그 예배 의식을 취하였고, 많은 부분들을 그것에서 빌려왔다”고 하였다. 칼빈의 예배 의식들을 비교해 보면, 제네바에서의 예배의식이 보다 더 간결한데, 그 이유는 ‘가능하면 예배 의식을 간단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제네바 행정관료들의 극단적인 입장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칼빈의 입장이 보다 더 잘 드러나 있는 예배 의식은 제네바에서보다는 스트라스버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고 한다. 성례전과 관계하여 그에 의하면 “성찬은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은데” 그리스도인들이 적어도 매 주 한 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하여야 한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식이 적어도 매주일(every Sunday at least) 규율로서 지켜져야 함이 마땅합니다"라고 하거나 “주의 식탁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진설해서 성찬이 선언하는 약속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칼빈의 예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체를 받기 위해 나아 온 사람들에게 권고와 경고의 말씀을 주는 것과, 성경 봉독과 설교 전에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칼빈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만찬과 함께 예배에 있어서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요소였다. 그는 성경봉독과 해설을 예배의 중심에 놓았고, 성만찬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가졌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예배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또한 칼빈은 말씀과 성례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성경을 봉독하기 전에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와 성찬을 받기 전에 성령 강림을 비는 기도는 아주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그리고 칼빈은 시편송을 강조하였다: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들어올리도록 감동시키며,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일깨우며, 칭송하는 열정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갑니다.” 시편송 외의 일반 찬송가는 파이프 오르간과 같이 배제되었다. 예배 중의 모든 음악은 사실상 회중의 찬양이 전부였다. 회중은 십계명을 찬송하기도 했으며, 모든 찬송은 성경적이었고 구약성경에 국한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성찬 없는 예배가 보다 보편적이며, 성찬이 있는 경우는 일년에 몇 차례 되지 않는 특별한 경우가 된다. 우리로서는 앞서 살다 간 신앙 선배들의 논의를 존중히 여기면서 보다 자주 성찬식이 있는 예배를 드리게 되기를 바라며, 그 경우에도 그 정신이 바르게 잘 드러나는 순서 가운데 예배드리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맺음 말
예배와 관련하여 육하 원칙에 따라 질문하면서 칼빈의 견해를 살피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드리려는 기본적인 소원이 있을 것이다. 이런 자세에 칼빈의 견해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라고 말할지라도,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며, 설혹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드러날 경우에도 그것을 곧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겠는가 하는 현실적인 적용의 문제이다. 이 면에 있어서도 해석에 있어서 가능한 객관성을 확보하고, 적용에 있어서 교회의 혼란을 조장하기보다는 평안과 덕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 칼빈의 다음과 같은 조언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일들은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도 민족과 시대의 풍습에 여러 가지로 순응해야 되기 때문에, 교회에 유리한 쪽으로 전통적인 관습을 변경 또는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제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물론 충분한 이유 없이 경솔하고 갑작스럽게 개혁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엇이 해가 되고 무엇이 덕이 되는 지는 사랑이 가장 잘 판단할 것이다. 사랑을 인도자로 삼으면 모든 일이 안전할 것이다.” 실제로 칼빈은 이상적으로는 매주 성찬식을 거행하기를 주장하였음에도, 교회의 형편을 고려하여 한 달에 한 번 거행하는 것에도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 석 달에 한 번 거행하는 것에도 동의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성도들이 약하므로 너무 자주 거행하면 이렇게 거룩하고 훌륭한 신비가 경멸을 받을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이 있다. 성만찬을 한 달에 한 번 거행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유익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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