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n>이제 모세 5경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위기는 책의 제목은 그렇지만 실제 레위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제사장에 대한, 그리고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이해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거룩의 위계질서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모든 나라들은 위계질서 사회이지만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이 상호평등한 사회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도 위계질서 사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 모두가 위계질서 사회였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달랐습니다. 그래서 ‘거룩’이라는 단어로 수식하여 거룩의 위계질서 사회라고 합니다. 보통의 위계질서 사회에서는 위에 있는 사람들이 군림합니다.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절대 복종합니다. 명령을 듣지 않으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위계는 전혀 그 내용이 다릅니다. 이스라엘도 위계를 갖고 있기는 합니다. 제일 위에 대제사장이 있고 제사장, 레위인, 평민, 종과 노예,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위계는 군림하는 위계가 아닙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시하고 명령하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복종하는 위계가 아닙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위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진실함, 거룩함, 정직한 삶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줍니다. 그러면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모방하고 따라 행하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의 위계질서 사회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룩의 위계질서 사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중에 여호수아를 보시게 되면 여호수아가 땅 분배의 총 책임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호수아 자신은 12지파의 땅 분배가 끝나고 나서 땅 분배를 받습니다. 만약 우리처럼 이기심과 욕망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땅 분배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 땅 가운데 제일 좋은 땅을 내가 먼저 찜하고 나서 그 땅을 제외한 나머지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2지파가 자기들이 원하는 땅을 먼저 차지하게 하고 여호수아는 가장 마지막에 땅을 분배받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40세 미만이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다 죽었습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 산지라고 할 때 그것이 정복한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정복한 땅을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땅에 있는 원주민들과 내가 전쟁하도록 허락해달라는 겁니다. 그 땅에 누가 살았습니까? 아낙 자손이 살았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보고했습니까? 12명 가운데 10명이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절대 차지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거기에 아낙 자손이 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너무 왜소해 보여 결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정탐꾼들의 보고 때문에 이스라엘이 낙담한 겁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힘있게 걸어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 무서운 아낙자손들과 갈렙이 싸우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때 갈렙의 나이가 85세입니다. 나이도 많고 그동안 수고하고 애썼으니 편하고 쉬운 상대랑 싸워도 되는데 갈렙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대적을 자신이 맡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거룩의 위계질서 사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건강한 모방인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바울이 뭐라고 하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어라.”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은 자녀의 선생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삶을 통해 건강한 모방을 할 수 있도록 부모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거룩의 위계질서 사회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건강한 모방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이뤄지길 기대하셨습니다. 이게 레위기에 잘 나옵니다.
레위기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무엇을 닮아야 합니까? 거룩함을 닮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거룩한 예배, 거룩한 삶이라 할 때 뭐가 거룩한 걸까요?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은 주류 문화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레위기는 거룩이라고 합니다. 첫 시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고대 근동의 신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일반적인 신과 다르다는 겁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은 노동을 중시하셨습니다. 사람의 제물보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삶을 더 중시하셨습니다. 이 땅에 힘 있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밑바닥 인생들, 소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아내 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일신을 주장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과 고대 근동의 신들의 주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과 다른 분입니다. 뭐가 거룩이라고요? 주류 문화에 동참하지 않고, 주류 가치에 편승하지 않고 다르게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레위기 19장입니다. 내가 만약 재판을 하는 판사라면 어떤 판사가 거룩한 판사입니까? 뇌물을 받지 않고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공의로운 판결을 하는 것이 거룩한 판사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 권력자들에게 편드는 재판을 해도 그런 일반적인 문화와 질서의 가치에 동화되지 않고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재판관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사업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저울추를 속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사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저울을 속였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장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나의 작은 이윤을 얻기 위해 저울추를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하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업가입니다. 우리가 거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드리고 매일 QT하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삶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종교적인 의식을 최선을 다해도 재판을 할 때 뇌물을 받고 장사할 때 저울추를 속이면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길을 걸어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류 문화와 주류가치와 주류질서에 동화되지 않고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레위기는 거룩이라고 합니다. 이 거룩한 삶을 평생 살아가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주전 2세기 말에 등장한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구별된’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은 침묵이나 엄숙함이 아닙니다. 주류 문화로부터의 분리, 다르게 살아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 정직함과 진실함을 드러냄 이것이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 19장 2절, 20장 28절 끊임없이 레위기에서 말하는 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거룩입니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를 보시면 5대제사가 나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번제는 가죽만 벗기고 통째로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한문으로 쓸 때 그래서 태울 번자를 씁니다. 언젠가부터 한국교회 안에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따라서 헌금을 만든건데 여기서 번은 한번, 두 번, 세 번 할 때의 그 번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액수의 헌금을 일천번 드린다고 해서 일천번제라고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일천번제는 그게 아닙니다. 솔로몬이 바친 일천번제에서 일천은 많음을 뜻하는 상징적인 숫자이고 번제라는 것은 가죽을 벗겨 통째로 태워드리는 제사라는 말이지 똑같은 제물을 백번, 천번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번제는 가죽만 벗기고 통째로 바치기 때문에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바치는 제물입니다. 곡식을 있는 그대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루로 만들어서 바칩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야기 할 때 아벨은 양으로 바쳤고 카인은 농산물로 바쳐서 열납되지 않은 것처럼 이해한 분들이 계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에 보시면 짐승으로 바치는 제사도 있지만 곡식으로 바치는 제사도 있습니다. 그게 소제입니다. 화목제는 제물을 바친 사람들이 그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비슷한데 피해자에게 배상과 보상을 곁들이는 속죄제를 속건제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게 바로 5대 제사입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5대 제사를 말하는 레위기 1장부터 7장을 보시면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헌제자의 적극성이 요청되고 제사장은 굉장히 수동적입니다. 이게 오늘날 예배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양을 제물로 바치길 원한다고 했을 때 양을 성막으로 끌고 오면 그 양을 제사장에게 인수인계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양을 끌고 온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양의 머리에 직접 안수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직접 양을 잡습니다. 양을 죽이고 가죽을 직접 벗깁니다. 그리고 양의 각을 뜹니다. 각을 다 뜨고 나면 제사장이 헌제자가 떠 놓은 각을 제단 위에 올립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내장이나 정강이 같은 것을 씻습니다. 정결케 하면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에 또 올립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대부분 다 합니다. 안수도 직접하고 짐승도 직접 죽이고 가죽도 벗기고 각도 뜨고 지저분한 것들을 씻기도 합니다. 제사장은 이 사람이 떠놓은 것을 제단에 올리는 정도의 역할을 합니다. 제물을 드리는 헌제자가 그냥 수동적으로 제사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헌제자에게 주체성을 요구하고 제사장은 도리어 수동적인 존재로 있는 것을 레위기 5대 제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관객처럼 목회자가 준비한 모든 것을 관람하는 것처럼 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간과 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내가 구경꾼이나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존재를 다해서 적극적으로 예배에 함께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만 더 설명을 드리면 레위기는 거룩을 강조한 책입니다. 레위기의 거룩에는 중요한 공식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이면 부정해진다는 겁니다. 마치 깨끗한 물과 구정물이 섞이면 지저분해지죠.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이면 부정해지니까 내가 거룩하다 라고 한다면 거룩을 지키기 위해 부정한 모든 것들과 단절해야 합니다. 이게 소위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든 사람들과 어울리면 안 됩니다. 문둥병자들은 그래서 성 밖으로 내어보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부정한 이방인들과 만나면 안 됩니다. 이게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는 내가 부정한 자들과 어울림을 통하여 그들을 변화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레위기의 거룩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백성들에게 전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못하죠. 이방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니까요. 이것을 뒤집어 엎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받던 여인을 치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죽었던 12살 된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시면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의 공식이 전복됩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레위기 정결법에 따르면 병든 여인이 건강한 예수를 만지면 여인의 부정함이 예수에게 전염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리스도의 건강하심으로 말미암아 여인이 치유됩니다. 생명과 죽음이 접촉하면 죽음의 기운이 생명을 오염시킨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 예수 그리스도와 야이로의 12살된 딸의 죽은 시체가 접촉했는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딸이 다시 소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의 공식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18절, 20장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면서 부정하고 타락한 어두운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구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레위기에 근거해 보면 내가 거룩하다, 깨끗하다고 한다면 부정한 것들과 단절하고 분리하는 것이 거룩한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약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보내십니까? 너희의 거룩함으로 이 세상의 거룩하지 않음을 변화시키라는 것이죠. 너희의 정직함으로 세상의 불의함을 변화시키라는 거죠. 이렇게 구약보다 신약은 보다 적극적인 제자의 자세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무엇을 닮아야 합니까? 거룩함을 닮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거룩한 예배, 거룩한 삶이라 할 때 뭐가 거룩한 걸까요?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은 주류 문화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레위기는 거룩이라고 합니다. 첫 시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고대 근동의 신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일반적인 신과 다르다는 겁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은 노동을 중시하셨습니다. 사람의 제물보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삶을 더 중시하셨습니다. 이 땅에 힘 있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밑바닥 인생들, 소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아내 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일신을 주장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과 고대 근동의 신들의 주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신과 다른 분입니다. 뭐가 거룩이라고요? 주류 문화에 동참하지 않고, 주류 가치에 편승하지 않고 다르게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레위기 19장입니다. 내가 만약 재판을 하는 판사라면 어떤 판사가 거룩한 판사입니까? 뇌물을 받지 않고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공의로운 판결을 하는 것이 거룩한 판사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 권력자들에게 편드는 재판을 해도 그런 일반적인 문화와 질서의 가치에 동화되지 않고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재판관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사업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저울추를 속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사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저울을 속였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장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나의 작은 이윤을 얻기 위해 저울추를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하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업가입니다. 우리가 거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드리고 매일 QT하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삶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종교적인 의식을 최선을 다해도 재판을 할 때 뇌물을 받고 장사할 때 저울추를 속이면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길을 걸어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류 문화와 주류가치와 주류질서에 동화되지 않고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레위기는 거룩이라고 합니다. 이 거룩한 삶을 평생 살아가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주전 2세기 말에 등장한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구별된’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은 침묵이나 엄숙함이 아닙니다. 주류 문화로부터의 분리, 다르게 살아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 정직함과 진실함을 드러냄 이것이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 19장 2절, 20장 28절 끊임없이 레위기에서 말하는 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거룩입니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를 보시면 5대제사가 나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번제는 가죽만 벗기고 통째로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한문으로 쓸 때 그래서 태울 번자를 씁니다. 언젠가부터 한국교회 안에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따라서 헌금을 만든건데 여기서 번은 한번, 두 번, 세 번 할 때의 그 번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액수의 헌금을 일천번 드린다고 해서 일천번제라고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일천번제는 그게 아닙니다. 솔로몬이 바친 일천번제에서 일천은 많음을 뜻하는 상징적인 숫자이고 번제라는 것은 가죽을 벗겨 통째로 태워드리는 제사라는 말이지 똑같은 제물을 백번, 천번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번제는 가죽만 벗기고 통째로 바치기 때문에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바치는 제물입니다. 곡식을 있는 그대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루로 만들어서 바칩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야기 할 때 아벨은 양으로 바쳤고 카인은 농산물로 바쳐서 열납되지 않은 것처럼 이해한 분들이 계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에 보시면 짐승으로 바치는 제사도 있지만 곡식으로 바치는 제사도 있습니다. 그게 소제입니다. 화목제는 제물을 바친 사람들이 그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비슷한데 피해자에게 배상과 보상을 곁들이는 속죄제를 속건제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게 바로 5대 제사입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5대 제사를 말하는 레위기 1장부터 7장을 보시면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헌제자의 적극성이 요청되고 제사장은 굉장히 수동적입니다. 이게 오늘날 예배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양을 제물로 바치길 원한다고 했을 때 양을 성막으로 끌고 오면 그 양을 제사장에게 인수인계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양을 끌고 온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양의 머리에 직접 안수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직접 양을 잡습니다. 양을 죽이고 가죽을 직접 벗깁니다. 그리고 양의 각을 뜹니다. 각을 다 뜨고 나면 제사장이 헌제자가 떠 놓은 각을 제단 위에 올립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내장이나 정강이 같은 것을 씻습니다. 정결케 하면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에 또 올립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대부분 다 합니다. 안수도 직접하고 짐승도 직접 죽이고 가죽도 벗기고 각도 뜨고 지저분한 것들을 씻기도 합니다. 제사장은 이 사람이 떠놓은 것을 제단에 올리는 정도의 역할을 합니다. 제물을 드리는 헌제자가 그냥 수동적으로 제사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헌제자에게 주체성을 요구하고 제사장은 도리어 수동적인 존재로 있는 것을 레위기 5대 제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관객처럼 목회자가 준비한 모든 것을 관람하는 것처럼 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간과 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내가 구경꾼이나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존재를 다해서 적극적으로 예배에 함께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만 더 설명을 드리면 레위기는 거룩을 강조한 책입니다. 레위기의 거룩에는 중요한 공식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이면 부정해진다는 겁니다. 마치 깨끗한 물과 구정물이 섞이면 지저분해지죠.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이면 부정해지니까 내가 거룩하다 라고 한다면 거룩을 지키기 위해 부정한 모든 것들과 단절해야 합니다. 이게 소위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든 사람들과 어울리면 안 됩니다. 문둥병자들은 그래서 성 밖으로 내어보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부정한 이방인들과 만나면 안 됩니다. 이게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는 내가 부정한 자들과 어울림을 통하여 그들을 변화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레위기의 거룩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백성들에게 전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못하죠. 이방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니까요. 이것을 뒤집어 엎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받던 여인을 치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죽었던 12살 된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시면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의 공식이 전복됩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레위기 정결법에 따르면 병든 여인이 건강한 예수를 만지면 여인의 부정함이 예수에게 전염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리스도의 건강하심으로 말미암아 여인이 치유됩니다. 생명과 죽음이 접촉하면 죽음의 기운이 생명을 오염시킨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 예수 그리스도와 야이로의 12살된 딸의 죽은 시체가 접촉했는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딸이 다시 소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의 공식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18절, 20장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면서 부정하고 타락한 어두운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구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레위기에 근거해 보면 내가 거룩하다, 깨끗하다고 한다면 부정한 것들과 단절하고 분리하는 것이 거룩한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약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보내십니까? 너희의 거룩함으로 이 세상의 거룩하지 않음을 변화시키라는 것이죠. 너희의 정직함으로 세상의 불의함을 변화시키라는 거죠. 이렇게 구약보다 신약은 보다 적극적인 제자의 자세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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